15. 범부중생(凡夫衆生)의 정진(精進)
난위(暖位), 정위(頂位), 인위(忍位), 세제일위(世第一位)의 네 가지가
일반 범부중생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경지, 즉 사가행범부위(四加行凡夫位)입니다.
중생들이 금생 번뇌뿐만이 아니라 과거 무수생의 번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에 맞는 여러 가지 수행법이 있습니다. 그 단계가 워낙 복잡해서 『능엄경(楞嚴經)』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무엇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가장 쉬운 것이 ‘유식(唯識) 5위(位)’입니다. 유식, 즉 오로지 식(識)뿐이라는 것은 유심(唯心) 즉 오직 마음뿐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우주는 오직 마음, 식뿐입니다. 중생은 겉만 보니까 마음을 보지 못하고 물질만을 보지만, 그것은 사실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색즉공(色卽空)이라는 것을 자꾸 생각해야 합니다. 물질이 바로 공이라는 것을 화두로 삼아 물질이 공이라는 것을 깨우쳐야 합니다. 물질은 바로 공입니다. 분석한 뒤에 공이 아니라, 그냥 바로 공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쪼개고 쪼개서 공이 아니라 바로 공인데 이런 것을 잘 보지 못합니다.
사실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진동해서 모양만 보일 뿐입니다. 횃불을 돌리면 잔상이 남아 둥그렇게 불 바퀴가 보이듯이 물질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자량위 資糧位
노자(老子)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인생은 결국 머나먼 나그네길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불이라고 하는 멀고 먼 고향 길을 가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는 중간에야 미끄러지고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결국 성불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의 고향인 성불로 가려면 그에 해당하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성불의 준비를 하는 단계가 바로 자량위(資糧位)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러 가지 자량, 즉 성불에 이르는 재료를 준비한다는 말입니다. 참선도 해보고, 염불도 해보고, 경(經)도 읽고, 고행도 해보고, 단식도 해보면서 성불에 이르는 여러 가지 방법 중 자기한테 맞는 행법을 찾아 공부합니다. 부처님 법문을 확실히 믿고 그렇게 되고자 애써야 합니다. 정말로 ‘나’라는 것도 허망하고, ‘너’라는 것도 허망하고, 물질도 허망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자꾸만 생각하면서 책도 읽고, 명상도 하고, 염불도 애쓰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같은 사람이지만 범부(凡夫)보다는 좀 앞서 나가게 됩니다. 그때는 삼현위(三賢位)에 이릅니다. 현자(賢者)의 자리입니다.
성자(聖者)는 굳이 억제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기가 하는 모든 행동이 법도에 딱 맞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현자는 자신의 행동이 법도에 맞도록 애쓰고 법도를 지키려고 합니다. 현자는 욕심(慾心)도 누를 수가 있고, 진심(嗔心)도 누를 수가 있습니다. 나쁜 마음도 억눌러서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비록 성자는 못 된다 하더라도 죄를 범하지 않으려 애쓰고 행하는 것입니다. 범부(凡夫)는 욕심이 나면 나는 대로 화가 나면 나는 대로 억제를 못합니다.
가행위 加行位
‘내가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내가 집에서만 공부를 해서는 안 되겠구나. 사흘이고 나흘이고 일주일이고 오로지 공부만 해야 되겠다.’라고 결심하고 오로지 공부만 하는 것이 가행위(加行位)입니다. 가행정진(加行精進)이라고도 합니다.
이때는 법문도 확실히 알고, 천지우주는 본래 청정한 눈으로 보면 모두가 하나의 불성이라(打成一片)는 확신이 섭니다. 그러면 그때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사흘이고 일주일이고 삼칠일(21일)이고 공부에만 애쓰고 오로지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하는 것은 그저 일상생활밖에 못됩니다. 이렇게 쉬엄쉬엄 공부하면 우리가 본래 부처지만 불심(佛心)하고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이따금씩 불심을 생각하면 어디론가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따금씩 떠오르는 불심을 잘 붙들어 매기 위해서는 오로지 공부를 해야 합니다. 보통은 사흘, 일주일 또는 삼칠일 또는 49일 동안 그렇게 공부만 합니다.
출가 수행자는 1년 동안에 두 번, 3개월씩 그렇게 공부를 합니다. 더 하는 사람들은 3년 동안 산문(山門) 밖을 안 나가고 정진만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아무리 둔한 사람도 부처님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같이 며칠이고 몇 개월이고 몇 년이고 부처님을 생각하는데 가까워지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오로지 공부만 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마치 전류에 감전된 것같이 전신이 시원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게 되면 우리 몸이 좀 피곤해도 부처님 생각만 하면 피로가 순식간에 싹 가시게 됩니다.
여기서 더 공부를 하면 가행위 중의 첫 번째 단계인 난법(煖法)에 이릅니다. 이런 지경은 공부를 했다 말았다 하면 이르지 못합니다. 오랫동안 정진을 해야 합니다. 출가해서 승복을 입었다 하더라도 정진하는 정도가 미치지 못한다거나 업장관계(業障關係)가 복잡하든가 환경이 나쁘다거나 하면 몇 년 동안 공부를 계속 한다 하더라도 이런 경계를 맛보지 못하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쉬지 않고 더욱 정진하면 가행위의 두 번째 단계인 정위(頂位)에 이릅니다. 이때는 욕심이 차근차근 줄어옵니다. 욕계(欲界)에서는 꼭대기까지 올라온 것입니다. 욕심의 꼭대기가 아니라, 욕심을 떠나는 마지막 끄트머리 단계에 다다른 것입니다. 이때는 누가 좋은 물건을 사용해도 별로 갖고 싶지 않고, 음식도 먹으나 마나 배가 고프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몸도 시원하고 마음도 시원하게 트여오기 때문에 물질이나 음식이 별로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때는 몸과 마음이 시원해 옴과 동시에 어렴풋이 광명이 비춰 옵니다. 아주 맑은 달(心月)이 커졌다가 작아지고 하는 느낌입니다. 그러면 마치 천지우주의 모든 기운이 자기 몸을 향해서 오는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면 원래 자기가 쓰던 힘을 훨씬 넘어서서 쓸 수 있게 되어 남이 보기에는 갑자기 힘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쉬지 않고 더 나아가면 인법(忍法)이라, 가행위의 세 번째 단계에 이릅니다. 인법까지 올라오면 공부를 잠시 놓아도 큰 후퇴가 없습니다. 정법까지는 애쓰고 하던 참선이나 기도를 놓아버리면 공부가 후퇴해버리지만 인법의 단계에 이르면 이미 공부를 너무나 많이 해보았기 때문에 공부가 습관이 되어 잠시 공부를 놓아도 별로 후퇴가 없습니다.
인법의 경지에 들어서면 정법에서 보았던 맑은 달의 광명기운이 더 커지고 줄어들고를 반복하면서 우주에 꽉 들어차버리는 기분이 생깁니다.
여기에서 또 쉬지 않고 나아가면 그때는 하나의 달빛, 즉 심월광명(心月光明)이 점점 커져 그야말로 금색광명(金色光明)이 트여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 광명을 보게 되는 단계를 가리켜서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고 합니다. 가행위 중에서는 가장 높은 경지로, 아직 성자(聖者)는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인간 세상에서는 가장 높은 경지입니다. 공자나 맹자 같은 분들이 이런 단계에 올라 있습니다. 현자(賢者)중의 현자인 셈입니다.
이 모든 단계를 넘어서 우주가 확 열려서 천지우주가 부처님의 광명으로 가득 차버려야 진정한 견성오도(見性悟道)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마음이 조금 열리면 거짓말로 견성오도를 했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견성오도 자리라고 하면 천지우주의 광명이 느껴지고 별이고 달이고 할 것 없이 천지우주가 광명 속으로 다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光吞萬象)
이렇게 되는 것이 결국 성자가 가는 길입니다. 우리 인간은 여기에까지 가야 비로소 ‘내 고향에 왔구나’하는 마음으로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지 않고서는 항상 마음이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난위(煖位), 정위(頂位), 인위(忍位), 세제일위(世第一位)의 네 가지가 일반 범부중생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경지, 즉 사가행범부위(四加行凡夫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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