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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실용적 가르침

부처님의 실용적 가르침

The Buddha's Practical Teaching

John D. Ireland 지음

전채린 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1981. Bodhi Leaves No. 25)


부처님의 실용적 가르침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논고』1)라는 글에서는 불교의 핵심 사상인 사성제의 이론적 측면을 설명하면서, 이 사성제에 관한 가르침이 빠알리 경전의 경장에 여러 가지 형태로 거듭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다. 거기서는 사성제가 불교의 특징을 이루는 핵심일 뿐 아니라 이 사성제의 완전한 통찰과 이해가 바로 불교의 목표이기도 하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탄생과 죽음 사이에 사로잡혀 끝도 없는 그 많은 고를 겪으며 목적도 없이 방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사성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부처님이 직접 언급하고 계시니 새삼 부언할 필요가 없겠다.


그렇지만 여기서 얘기를 더 진척시키기 전에 그 ‘이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밝혀 놓는 것이 필요한 듯하다.


첫째, 그 가르침을 읽고 듣는 데서 생기는 이해2)가 있다. 이것은 물론 첫 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지만 그러나 이 이해 역시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이 첫 단계에서부터 글귀나 의미를 잘못 파악하는 날이면 그 다음에 올 ‘이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자기가 배운 것을 음미하고 그 단어들의 함축된 의미를 유추해 내고 소화하여 자신의 삶의 경험에 결부시키는 과정에서 생기게 되는 ‘이해’3)가 있다.


끝으로 그 가르침을 실제로 실천에 옮기는 과정 즉, 불교의 참된 목적인 열반을 스스로 경험하는 것을 절정으로 하는 도의 답파(踏破) 과정에서 생겨나는 이해4)가 있다.


이 글에서는 이 마지막 형태의 이해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렇게 접근하다 보니 우리는 다시는 퇴전하지 않는 이해, 다시 말해 잃어버리려 해도 잃어버릴 수 없고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마음에 떠오르게 되는 그러한 이해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네 단계가 차례로 일어나는 국면에 접하게 된다.


이 성스러운 단계 중 마지막 것은 마음이 일체의 고로부터 완전히 해탈하는 단계인데 이 최종 목표를 실제로 보장 받으려면 사성제를 ‘분명히 보는 눈을 갖추게 된’ 즉, ‘예류도’라 부르는 첫 번째의 성스러운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첫 번째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고서는 최종적 해탈에 이르는 불타의 길을 따라 진실로 향상되고 있다는 아무런 실제적 확증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가령 첫 단계에 도달하기도 전에 죽기라도 한다면 그동안 얻은 그 모두가 한순간에 쓸려나가 다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듣게 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행운을 만나려면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지 모른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따라서 우리가 지금 세워야 할 목표는 최소한, 보장을 얻는 단계인 예류도에라도 도달하는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면 우리를 그런 성스러운 단계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이해가 생기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 답은 마음이 과연 그런 이해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데 있다. 경전에는 근기가 수승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몇 마디만 듣고도 바로 깊이 이해하여 큰 노력 없이 성스러운 단계를 성취한 사람들의 얘기가 자주 나오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들은 예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다수 부처님의 제자들은 그 목표를 성취할 준비를 하는 데만도 길고 힘든 훈련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님 재세 시에는, 부처님께서 친히 당신의 형안으로 청중들의 마음을 뚫어보시고 그들의 잘못된 점을 일일이 바로 잡아주셔서 이해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해 주셨으니 사정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그런 점은 오늘날에도 노련한 스승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살아있는 스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통해 얼마든지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다. 이 사실은 부처님이 반열반에 드신 후 그분의 직계 제자들에 의해 확인된 일이다. 그처럼 의지하던 스승을 곧 여의게 된다는 사실을 한탄하고 있는 아난다 장로에게 부처님이 해 주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던가5).


이 마음의 준비는 다름 아닌 사마디, 집중, 몰입 또는 ‘한 곳에 모음’에 의해서 그 절정에 이르며, 마음을 둔하게 만들고 오염시킬 뿐 아니라 이해에 장벽 노릇을 하는 장애들6)이 이 삼매를 통해 제거됨을 예시한 경우를 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문둥이 숩빠붇다에게 설하신 법문(『감흥어(Udāna)』 5장 3)이야말로 그런 마음 상태에 이를 수 있는 과정을 간명하게 요약한 경우로 들 수 있다. 여기 관련 문구를 소개한다.


그때 세존께서는 문둥이 숩빠붇다가 군중 속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 그를 보시고는 생각하셨다. ‘이 사람이 법을 이해할 수 있겠구나.’


세존께서는 문둥이 숩빠붇다를 위해서 차제(次第) 설법을 하셨다. 다시 말해 보시, 지계, 천상계, 그리고 감각적 욕망의 해로움, 하열함, 더러움, 그리고 감각적 욕망을 끊음에서 오는 이로움 등의 가르침이다.


드디어 문둥이 숩빠붇다의 마음이 준비가 되었고, 수용적이며, 장애에서 벗어났고, 환희심에 차 있고, 확신에 차 있는 것을 아시고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분들[過去佛]께서 해 오셨듯 고, 집, 멸, 도의 법의 가르침을 알게끔 만들어 주셨다. 그러자 깨끗한 천이 물감을 빨아들이듯 문둥이 숩빠붇다에게 ‘생기(生起)하는 것은 무엇이든 완전히 멸(滅)하는 성질을 가졌구나’하고 볼 수 있는 때 묻지 않고 흠 없는 법안(法眼)이 바로 그 자리에 앉은 채 생겨났다.


이제 이 구절을 부연하여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로 하자. 우선 수행자는 어느 정도 수준에는 이르는 지성 즉, 이해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과거에 지은 인간 도리에 맞는 도덕적 행위의 결과7)인데 이를 복 또는 공덕(puñña)이라 부른다. 가르침을 배울 마음을 내는 데에도 또 그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형편이 되는 데에도 공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숩빠붇다의 경우, 그 자리에 앉은 채 성스러운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부처님께서 아셨으니 그의 공덕이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몇 마디 말씀만으로도 능히 그의 마음이 높은 수준까지 청정해지도록 끌어 올려줄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부처님은 먼저 당신의 가르침을 신중하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 차제설법을 하셨다.


1. 베풂이나 보시(dāna)는 불교의 기본 덕성이며 동시에 불교라는 거대한 체계를 받치고 있는 초석이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의도, 내지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보시는 넓고 열린 성향을 키우는 한편 강한 물욕과 이기심을 향한 성향을 약화시킨다. 보시는 가진 것을 편한 마음으로 놓아버리고 그것들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습성을 키운다.


2. 보시가 몸에 배면 그 다음 단계의 덕행인 지계(sīla)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남에게서 무엇을 빼앗거나 어떤 식으로도 해치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처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짓는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제하는 태도인 것이다.


3. 세 번째로 ‘천상계’라 함은 순수하고 나무랄 바 없는 행복으로 이루어진 마음의 상태이다. 여기서 이것을 굳이 언급하는 것도 보시와 지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기 위한 것이다. 혹시라도 아직 관대하지 못하거나 그릇된 행동을 할 마음이 남아 있으면 천상계에 의해서 이런 마음이 깨끗이 치유되고 균형 잡히고 건전하며 유익한 상태로 된다.


4. 다음으로 감각적 욕망이 얼마나 해로운지를 아는 일이 바로 이전 단계를 균형잡는 데에 필수적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천상계는 즐거운 상태이기 때문에 그 즐거움에 빠지기 쉬워 향상을 하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향하는 진정한 목적을 찾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천상계에서의 즐거움은 감각적 욕망 중 최고의 것이며 따라서 그런 욕망에 대한 애착을 끊어내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영구하지 못한 무상한 것이어서 실망과 걱정거리로 뒤섞일 수밖에 없는 큰 해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신다. 감각적 즐거움은 선정수행으로 얻어지는 기쁨에 비하면 진정 열등한 수준의 기쁨이고, 이 선정수행의 기쁨도 열반의 지고한 기쁨을 맛본 사람에게는 하찮게 여겨진다고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신다. 관능은 아주 현실적이고도 강력한 번뇌로서 이를 떨쳐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마음을 우둔하고 혼탁하게 만들기 때문에 관능에 지배되는 사람은 관능보다 더 뛰어난 상태가 있다고는 믿으려 들지도 않는데 하물며 그 외에 달리 어떤 행복을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5. 끝으로, 부처님께서는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얼마나 이로운지를 보여주시면서 욕망 때문에 생긴 고에서 헤어나라고 가르치신다. 우리가 욕망을 충족시키려 들면 조만간에 실망과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욕망의 대상이 끊임없이 변하거나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생들은 보통 고로부터 벗어나려면 감각적 쾌락을 좇아가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악순환이 연출된다. 고는 쾌락을 추구하게 만들고 쾌락은 다시 고로 되돌아가게 만드니까. 따라서 우리 마음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세상의 환락 쪽으로 내달리지 않게끔 훈련시켜서 불행이 오면 이를 정면으로 맞서 그 원인을 찾아내도록 만들면 비로소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져 나갈 것이다. 그 때 우리가 고에서 확실하게 벗어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을 감관으로부터 돌려세워 마음 그 자체로 향하도록 하는 선정수행을 할 수밖에 없다. 명상수행을 하면 삼매가 생기는데, 그것은 감관 세계의 수상쩍은 즐거움들보다 월등한 희열과 커다란 고요의 상태이다.


숩빠붇다는 이와 같은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었고 감관적 욕망에서 돌아서면서 그의 마음은 다섯 가지 자질8)을 갖추게 되었으니, 준비된 마음, 받아들이는 마음, 장애에서 해방된 마음, 즐거운 마음, 확신하는 마음의 다섯이다. 이들 다섯 자질은 마음의 집중과 청정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다섯 가지 장애(nīvaraṇa)9)를 약화시키고 마침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다섯 장애 중에 첫 번째이자 가장 심각한 장애는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욕망이다. 이 장애를 제거하게 되면 마음은 어떤 상황변화에 당면하게 되든지 그 상황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셈이다. 두 번째 장애인 혐오는 이해가 깨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장벽이 된다. 이 장벽을 허물어버리면 마음은 공감할 수 있게 되고 또 받아들이게 된다. 세 번째 장애는 마음의 게으름과 느림인데 이는 깨어있음과 또렷함에 반대된다. 네 번째 장애는 걱정과 산만인데 마음을 즐거운 평온으로 채움으로 없앨 수 있다. 다섯 번째 장애는 회의적 의심인데 확신과 신뢰로 극복된다.


이렇게 하여 얻어진 상태를 근접삼매(upacāra-


samādhi)라 부르는데, 이는 팔정도의 완전한 삼매[正定 sammā-samādhi]와 비슷하다 할까 가깝다 할까 그러한 삼매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미 사성제가 이 속에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감각적 즐거움의 해로움이나 그것의 무상함은 ‘고의 진리[苦聖諦]’,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욕망은 ‘고의 원인의 진리[集聖諦]’, 이 욕망으로부터 벗어남은 ‘고의 멸의 진리[滅聖諦]’, 감각적 즐거움을 끊는 것은 ‘도[道聖諦]’를 말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근접삼매에서 생기는 이해는 성스러운 단계라 할 수 없으며, 여기서는 열반에 대한 직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안정적이지 못하다. 다만 관능의 본성에 대한 통찰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그 나름으로는 진정한 목표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흘깃 일별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진정한 목표를 향한 열망[法欲 dhamma chanda]을 발동시켜 주는 든든한 토대가 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더군다나 그 다음에 오는 사성제의 실제 흐름을 예견하는 것이 되어 마음은 훨씬 쉽게 사성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성제의 방법론에 친숙해짐으로써 그 진리가 자신의 경험세계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래서 흡수하기도 그만큼 쉽게 될 것이다.


숩빠붇다 만큼 선근을 갖추지 못한 우리는 길을 많이 에둘러서야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 모르고,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는 데도 어쩌면 수년이 걸릴지 모른다. 이러한 우리들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명상법과 기타 보조 장치들을 가르쳐 주셔서 우리의 근기와 심성을 강화시키고 깨끗하게 만들 수 있도록 해주고 계시다. 예를 들어, 다시 『감흥어』(4장 1)를 보면 메기야 비구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비구는 열심히 수행하려고 애를 쓰는 데도 불구하고 계속 산란하고 불순한 생각들에 시달렸다. 이런 사정을 자세히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다시 말해 경에 나오는 대로 말하자면 ‘해방되기에는 미성숙한 마음을 성숙시키는’ 다섯 가지 할 일10)을 가르쳐 주셨다.


1.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충고를 해 줄 좋은 벗과 동료를 가질 것.



2. 계율을 지킴에 있어 세심하게 주의할 것.


3. 정진 중의 수행자에게 격려가 되는 말에 귀를 기울일 것11). ― 어쩌면 오늘날 우리는 이 항목을 부처님의 법문이나 유명한 제자들의 생애 얘기를 읽는 것으로 대치할 수 있을 것이다.


4. 악하고 불선한 법을 피하는 데, 그리고 선한 법을 개발하는 데에 지속적 노력을 경주할 결심이 굳게 서 있을 것.


5. 어떻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생겨났다가 다시 속절없이 사라져가며, 조건에 매어 있고


무상한지를 관찰하여 지혜와 판별력을 키울 것.


여기에 다시 부처님은 메기야 비구에게 네 가지 일을 더 닦도록 충고해 주셨는데, 이를 우리는 네 가지 암시라고 말해야 할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네 가지 특별히 부정적인 마음상태를 극복하는 방법이다.


1. 부정관(不淨觀) : 몸을 갖가지 구성 부분이나 기관들 혹은 소화, 배변 등 그 작용을 머릿속으로 해체 분석해 봄으로써 몸의 아름답지 못하고 유쾌하지 못한 성질을 관하는 일. 이것은 자신의 몸이나 남의 몸에 지나치게 집착, 사랑하는 것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몸에 대한 관심과 걱정을 다 내려놓게 해 준다.


2. 자애심의 개발 : 남에 대한 친절과 동정, 동일감이라 할 수 있는 우애의 태도(mettā)를 원만하게 개발하는 일. 이것은 화냄, 악의 또는 폐끼침을 극복함으로써 행복하고 만족하고 참을성있는 마음 상태로 이끌어 준다.


3.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 : 호흡이 몸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콧구멍에 닿는 감촉으로 알아차리는 일. 이것은 지나치게 산만한 사변적 생각으로 인한 마음의 혼란을 극복하게 한다. 그렇게 되어서야 마음은 자재되고 집중될 수 있으며 보다 효율적으로 쓰일 수 있다. 이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은 불교에서 특히 중요시하는 명상수행법으로 부처님 당신께서도 주로 이 수행법을 쓰셨다는 전승(傳承) 때문에도 그 성가(聲價)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것이다.12)


4. ‘나’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五蘊]은 무상하다는 관념을 계발하는 일. 이것은 이기심과 아만을 제거하고 모든 현상[法]이 공하여 항구 불변한 핵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즉, 무아의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이끈다.


그 밖에 다른 예비적 수행법으로 빠알리 경에 나오는 것 중 다섯 가지 관법(『증지부』3권)도 있는데 이는 비구뿐만 아니라 재가자도 자주 관해야 한다고 서술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중요성이 부처님에 의해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1. 노년이 닥쳐올 것이다. 나는 노년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앞지르지 못했다.

2. 병이 닥쳐올 것이다. 나는 병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앞지르지 못했다.

3. 죽음이 닥쳐올 것이다. 나는 죽음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앞지르지 못했다.


이 세 가지는 사람들이 악업을 짓도록 만드는 이른 바, ‘세 가지의 자만’ 즉, 청춘, 건강, 생명에 대한 자만을 극복하게 만든다.


4. 나에게 가깝고 소중한 모든 것들은 변하기 마련이고 헤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인연 있는 사람과 소유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극복하게 한다.

5. ‘나’라는 존재는 내가 지은 업이 빚어낸 결과이다. 내가 어떤 업을 짓든, 좋든 나쁘든, 능숙하든 졸렬하든, 결국 나는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이것은 신․구․의 삼업을 통한 악을 극복하게 한다.

무상․고․무아의 개념은 사성제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실제로 열반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부처님께서 메기야 비구에게 말씀하신다. (『감흥어』4장 1)


“메기야여, 무상을 인식함으로써 무아의 인식[想]이 확립된다. 무아를 인식한다는 것은 ‘내가 있다’라는 아만을 뿌리 뽑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자는 이번 생에서 열반을 실현한다.” 


색․수․상․행․식이 참으로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은 대단히 불만스러운 일이며 그래서 우리는 괴로움을 겪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 존재하기를 갈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정말로 영원하고 우리에게 속한 것처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실재와 그것에 대한 우리의 견해 및 소망 사이의 불일치를 이름하여 ‘고’라 부르는 것이다. 무상의 관념을 개발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그 무상한 것하고 동일시하기를 그치게 되고 그래서 그것을 갈망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갈망해 봐야 고통만 경험할 뿐이니까. 갈망이 없으면 고통도 없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보는 것이 팔정도의 첫 번째 항목인 정견이다. 우리는 정견에 따라서 사유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삶을 영위하게 된다(팔정도의 2~5번째 단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청정히 하고 고를 낳는 갈애를 마음에서 제거해 내려는 우리의 그 모든 노력과 정념, 정정의 수행(6~8 단계)은, 역시 이 정견에 의해 인도되어 갈애에서 비롯된 고를 그치게 만드는 쪽으로 나아간다.


숩빠붇다의 경우 이해라는 물감에 담글 준비가 된 깨끗한 천에 비견될 정도로 그의 마음이 깨끗했기 때문에 그에게 이 정견이 생겨났으며, 그것도 ‘고는 갈애에서 생기며 갈애가 그치면 고도 그치게 된다’는 것을 간파할 정도의 ‘때 묻지 않고 흠 없는 법안(法眼)’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들께서 깨달으시고 가르치신, 사성제라고 알려진 법이니, 즉, (1) 고, (2) 갈망에서 그것이 비롯됨, (3) 고의 그침 곧 열반, (4) 고의 그침에 이르는,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의 여덟 요소로 이루어진 길[道]이다.


이처럼 사성제를 ‘청정한 법안으로 또렷하게 본다는 것’은 열반이라는 큰 바다로 계속 흘러가는 ‘흐름에 들어선 것’으로 성스러운 과정의 첫 번째 단계[豫流]에 해당한다. 일단 이 단계에 이르면 결코 퇴전하는 일이 있을 수 없고, 최종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며, 그곳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이전에는 자신의 욕망, 의견, 숙고에 따라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하는 식으로 끌려 다녔지만 이제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그 여정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며, 이젠 그 길이 길든 짧든 간에 목적지에, 다시 말해 모든 고통으로부터 최종적으로 벗어남에 이르는 것은 다만 시간문제일 뿐이다.


앞서 인용한 『감흥어』(5장 3) 부분을 좀 더 읽어 나가면 숩빠붇다가 그 단계를 성취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법을 보았고, 법을 깨우쳤고, 법을 이해했고, 법을 꿰뚫어 보게 되었고, 의심을 건너 질러 넘어섰고, 불확실성에서 벗어났고, 확신에 차서, 스승님의 가르침에 대해 (신심을 돋우어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 문둥이 숩빠붇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는 세존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리고 나서 한쪽 옆으로 비켜 앉았다. 거기 앉아서 문둥이 숩빠붇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뒤집어진 것을 바로 세우듯이, 감추어져 있는 것을 보이게 드러내듯이, 길 잃은 자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듯이, 시력이 있는 자 사물을 볼 수 있도록 어두운 곳에 등불을 밝혀주듯이, 그렇게 세존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법을 설해 주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법에,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를 지금부터 이 생명이 다 하는 순간까지 세존께 귀의한 재가신자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세존의 법문으로 가르침을 받고, 고무되고, 눈이 뜨이고, 기쁨에 차게 된13) 문둥이 숩빠붇다는 세존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감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엎드려 절을 올리고 나서 오른편을 세존께 향한 채14) 떠나갔다. 그러고는 얼마 안 되어 암소가 문둥이 숩빠붇다를 떠받아 목숨을 앗아갔다. 


그런 일이 있자 많은 비구들이 세존께 다가가서 (……)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 법문으로 가르침을 받고, 고무되고, 눈이 뜨이고, 기쁨에 차게 되었던 그 숩빠붇다라는 문둥이가 죽었습니다. 그는 어디에 태어나게 됩니까? 그는 어떤 미래를 맞게 되겠습니까?”


“비구들이여, 문둥이 숩빠붇다는 현자였다. 그는 법에 맞게 수행을 하였고, 법에 대한 의심 때문에 귀찮게 구는 일이 없었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족쇄를 부셔버렸기에 문둥이 숩빠붇다는 예류과를 이룬 사람이다. 그는 다시 퇴전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될 것이 보장되었고, 그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앞서 인용한 『감흥어』의 첫머리만 보아도 숩빠붇다가 법의 본질에 대해서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지, 법과 스승에 대해서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때 그는 네 가지 비유를 들며 자기의 깨우침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한다고, 다시 말해 삼보를 ‘이 생명이 다 하는 순간까지’ 자신을 인도하는 유일한 지침이자 이상으로 받아들인다고 선언하였다.


빠알리 경전에는 예류과를 얻은 이들의 특징을 네 가지로 열거해 놓았는데 이는 부처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 법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 승가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 그리고 완벽하게 계를 지키는 것이다. 승가의 구성원들 앞에서 불교의 ‘삼보’에 귀의하고 불살생, 불투도 등 오계를 지킬 것을 서약하는 단순한 의식은 불교라는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외관적 표시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예류과를 증득할 때에 비로소 붓다의 진정한 제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때에 비로소 삼귀의의 진정한 의미를, 또 올바른 도덕적 행위의 결정적 중요성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중생들에게는 불, 법, 승은 어디까지나 외적 존재에 그치지만, 예류과를 이룬 이에게는 이 삼보가 자신의 마음 안에 존재하며, 자기 존재의 일부분을 이루며, 자신의 깨달음 여부가 거기에 매달려 있는 중대사인 것이다. 경에서 정의하는 바에 의하면 예류과의 성취자는 열 가지 족쇄(saṁyojana) 중에서 처음 세 가지를 완전히 멸하여서 다시는 그것들이 일어나는 일이 없게 된 사람이다. 그 세 가지 족쇄는 다음과 같다.  


1. 몸, 느낌, 지각 등과 같은 갖가지 요소들[五蘊]이 실제로 영원하고, 만족스럽고, 과거에도 존재했었고 미래에도 계속 존재할 것으로 생각되는 인격적 개체 내지 ‘자아’를 이루고 있다거나 그에 의해 소유되고 있다고 보는 견해.[有身見]  

2. 불법(佛法)과 닦아야 할 길[道]에 대한 의심.[회의적 의심]

3. (안으로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밖으로 이 세상에서 청정과 해탈을 찾는 것.[戒禁取]15)


그 다음의 두 족쇄는 감각적 욕망과 악의로, 예류과에 든 자에게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는 족쇄이다. 이 두 족쇄는 그 다음 단계인 두 번째 성스런 단계[일래과]에 이름으로써 그 거친 면이 없어지게 되며, 완전히 멸해지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식(式)의 세상에 대해 집착을 끊어내는 세 번째 단계[불환과]에 이르러서이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러도 보다 미묘한 종류의 존재들(색계와 무색계의 존재들)에 대한 집착, 아만, 들뜸, 잔여의 (사성제에 대한) 무지는 남아 있다. 이것들은 네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인 아라한이 되어서야만 없어진다. 이 단계에서 갈애와 집착, 무명의 마지막 찌꺼기까지 흔적도 없이 멸해지고 완전히 해탈하게 된다.


숩빠붇다가 암소에 받혀 죽은 일이 순전히 우연한 사고만은 아닐 수도 있다. 주석서에서는 암소의 모습을 한 야차녀(夜叉女)의 짓임을 넌지시 비치고 있지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사향사과(四向四果)에 들자마자 죽었다는 다른 제자들의 비슷한 경우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아라한이 되자 곧 죽는 바히야의 경우(『감흥어』1장 10)와 세 번째 단계인 불환과에 이르자 곧 죽는 뿌꾸사띠의 경우(『중부』140경) 등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지금의 우리 모습은 과거에 지은 행위[業 kamma]의 결과이고 빚을 갚듯이 그 과보를 다 갚으면 우리 환경에 반드시 변화가 일어난다고 본다. 


이 경에 그려져 있는 숩빠붇다는 ‘가난하고, 별 볼일 없고, 초라한 자’로 구걸로 살아가는 문둥병환자였다. 그는 그 곳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먹을 것을 좀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거기에 갔던 것이고 우연히 부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일 뿐이다. 그때가 그에게는 전생에 지은 불선업의 과보로 겪어야 했던 기나긴 고통의 끝자락이었다. 이제 선[善業]의 강력한 원천이자 동시에 과거의 악을 일소하는 성스러운 단계의 공부를 성취했기에 지금까지와 같은 비참한 상태의 삶을 더 이상 계속해서 살려고 해도 살 수도 없게 되었기에 죽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듯 그는 삼십삼천의 천신들 사이에 다시 태어나 ‘아름다움과 영화로움에 있어서 다른 천신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가 된 것이다. 이제 그의 운명은 마지막 해탈을 하기까지 많아야 일곱 번 더, 그것도 인간계나 천상계 등 선도(善道)에만 재생할 것이다. 이것이 예류과를 증득한 결과이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해 보겠다. 우리의 목표는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해탈, 명확히 말해서 ‘조건 없고’ 완전한 열반의 행복이다. 이것은 다른 어떤 형태의 행복과도 구별되는 행복이다. 다른 행복들은 무상(無常)으로 ‘조건’지어져 있는 까닭에, 환경이나 ‘조건들’이 변하면 자칫 고통으로 되돌아가고 말 수도 있는 불완전한 행복이다. 불교의 사성제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이와 같은 온전한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올바른 방향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이해에 이르자면 마음은 계율과 그 밖의 덕성들로 빈틈없이 준비되어야 하고, 세속적인 즐거움이나 정서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하며, 명상과 지혜로운 판별력으로 명징하고 청정한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그런 후 무상, 고, ‘기층적(基層的) 실재의 부재[無我]’라는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을 깊이 숙고하면 이 이해가 생겨나면서 확신과 신념을 심어 준다. 단단한 초석 위에 벽돌을 하나하나 올려 건물을 짓듯이 한 단계 한 단계 점차로 우리를 향상으로 이끌어 준다는 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실용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이제까지 이야기한 것들이 겉으로는 꽤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실행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니 수행 중에 퇴보하거나 잘못하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낙담을 해서는 안 된다. 혹여 정도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경우에는 『증지부』(4권 8법집(法集))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잣대에 비추어 판단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우리가 닦고 있는) 이 법은 ‘집착이 아닌 이욕(離慾)으로 이끈다.’ ‘속박이 아니라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이끈다.’ ‘번뇌를 쌓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흩뿌리는 쪽으로 이끈다.’ ‘많이 바라는 쪽이 아니라 적은 소망으로 이끈다.’ ‘불만이 아닌 지족(知足)으로 이끈다.’ ‘대중 속에 섞이는 쪽이 아니라 홀로 있음으로 이끈다.’ ‘게으름이 아니라 분발로 이끈다.’ ‘호사가 아니라 청빈으로 이끈다.’ 이 조항들에 맞추어 판단해 보면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존 디 아이어랜드 (1932-1998)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열 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불자가 되어 빠알리어 공부를 하였다. 1960년대부터 불자출판협회(BPS)에서 간행하는 연간물에 기고하면서 불법 전파에 일생을 바쳤다. 『상응부 제1권』(Wheel No. 107/109, 1981, BPS),『가려 엮은 숫따 니빠따』(1983, BPS), 『초기 불자 시인 방기싸 장로』(Wheel No. 417/418, 1997, BPS) 등 여러 권의 불서를 영역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저자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은 『감흥어와 여시어경』(1997, BPS)의 합본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사망하기 전 해에 이 경의 영어번역을 마치며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기고 있다. “금생에 불법을 만나 크나 큰 행복을 맛보았다. 이를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하며 죽을 수 있을 것 같다.”

〈고요한 소리〉에서 이미 나온 책으로는 「수행의 예비단계」(The preparatory path, BL. No 37)가 있으며 보리수잎3 『세상에 무거운 짐, 삼독심』의 뒷부분에 실려 있다.


1)  역주 : 저자가 이 글보다 먼저 불자출판협회(BPS)에서 펴낸 『Comments on the Buddha Word』(B 16)는 〈고요한 소리〉에서는 아직 출간하지 않았음.

2)  Suta-maya-ñāṇa (읽고) 듣는 데서 생기는 [聞所成] 이해.

3)  Cintā-maya-ñāṇa 사유에서 생기는 [思所成] 이해.

4)  Bhāvanā-maya-ñāṇa 수행에서 생기는 [修所成] 이해.

5) 『부처님의 마지막 날들』(Last Days of the Buddha, Wheel No. 67-69, BPS)의 73쪽 참조.

6)  빠알리어 ‘니와라나 (nīvaraṇa)' 즉 장애라는 말은 방해, 덮개라는 뜻으로 무엇인가를 막거나 따돌리거나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

7)  여기서는 ‘인간계’에 태어남을 강조한다. 천상계에 태어남도, 축생과 같은 하열한 계에 태어남도 도덕적 행위나 계행을 닦는 데 적합하지 않다. 이것이 불교에서 인간계에 태어남을 칭송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 중 하나이다.

8)  다섯 가지 자질이란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마음의 상태 (kalla-cittaṁ), 유연한 마음(mudu-cittaṁ), 장애가 없는 마음(vinīvaraṇa-cittaṁ), 기쁜 마음(udagga-cittaṁ), 확신[信樂]하는 마음(pasanna-cittaṁ)이다.

9)  법륜 아홉 『다섯 가지 장애와 그 극복 방법』(고요한소리 간행 1988)참조.

10)  역주 : 법륜 하나, 『부처님, 그 분』(고요한소리 간행, 2005년 개정판), 53쪽과 각주 44) 참조.

11)  역주 : 이에 해당하는 『감흥어』의 구절

   그릇된 견해를 제거해주고 마음을 열어주는 데 적합한 이야기, 염리(厭離), 이욕(離慾), 멸(滅), 고요, 증지(證智), 각(覺), 열반으로 이끌어주는 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 또는 소욕, 지족, 독거, 원리(遠離), 정진에 진력하게 만드는 이야기, 또는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으로 이끌어 주는 이야기. 비구는 이러한 것들을 힘들이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얻는다.


12)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 - 빠알리 경전과 주석서에서 가려 엮은 불교이야기』(Mindfulness of Breathing - Buddhist Texts from the Pali Canon and the Commentaries, 냐나몰리 스님 엮음, BPS 간행) 참조.

13) ‘기쁨에 차게 된’이라 번역한 ‘삼빠함시또’(sampahaṁsito) 라는 빠알리어에는 대장장이가 금속을 ‘두드리고, 정련하고, 정제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 이 말은 예류과의 증득으로 그의 성격이 청정해지고 변화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14)  존경을 나타내는 행위임.

15) ‘실라바따-빠라마사’(Sīlabbata-parāmāsa 戒禁取)는 흔히 ‘단지 의례와 의식에 의지함’이라 번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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