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에 나오는 비유담 몇 토막
두개의 비유/비유와 우화
냐나삿따 엮음
박은화 옮김
차 례
두 개의 비유
1. 독사의 비유
2.통나무의 비유
비유와 우화
1. 산다는 것
2. 결혼
3 가정 생활
4. 여성의 삶
5. 조화로운 사회
두 개의 비유
Two Buddhist Parables
Nyanasatta Thera
(BODHI LEAVES NO.A.3)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독사의 비유
여기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죽는 것이 제일 두렵고 그저 오래 사는 것만이 소원이다. 이런 사람에게 기이한 제안이 들어왔다. 독사 네 마리를 돌보아달라는 것이다. 이 뱀들은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어서 한번 물렸다 하면 극도의 고통을 받다가 결국 죽게 마련이며, 게다가 유난스러워서 조금만 잘못 다루었다간 물리고 말테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서운 뱀들을 이따금씩 잠에서 깨워 먹이고 씻기고 다시 재우라는 것이다. 물론 그 자리를 맡고 안 맡고는 자신이 결정할 일이므로 기겁을 한 그 사람은 독사를 피해서 멀리 도망을 친다.
한창 도망을 치는 중에 새롭게 경고를 받게 된다. 그를 붙잡기만 하면 그 당장에 요절을 낼 양으로 다섯 살인귀들이 줄곧 뒤를 추적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에 놀란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을 친다. 게다가 여섯 번째로 원수같은 산적 두목이 칼을 빼어들고 등 뒤에 바싹 다가와 목을 치려든다는 말을 듣고는 혼비백산하여 죽을 힘을 다해 내뺀다.
무서운 네 마리 독사에다 다섯 살인귀들, 그리고 칼을 빼어든 산적 두목에게서 벗어나려 필사의 노력을 하는 이 가련한 사나이는 마침 어떤 마을에 도달하게 되어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딱하게도, 그 곳은 빈 마을로 집들이 다 텅텅비고 방안에는 빈 그릇만 썰렁하게 널브러져 있을 뿐이다. 행여나 하고 살피는 중에, 이번에는 또 떼강도 한패가 이 버려진 마을로 약탈하려 몰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겁에 질려 그는 다시 달아난다. 그러다가 어느 망망한 강변에 이른다.
거기엔 다리는 커녕 나룻배도 거룻배도 없다. 그 넓은 강을 건널 뗏목마저도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강저편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만이 안전하고 불행을 면할 수 있는 길이기에, 그는 널판지나 나무토막, 갈대, 넝쿨, 잎사귀, 송진 같은 것을 주워모아 뗏목을 만든다. 그리고는 팔과 다리로 뗏목을 부지런히 저어 마침내 강을 건너 공포와 고통이 없는 저편 강변에 무사히 올라서게 된다.
이 우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네 마리 독사'는 지 수 화 풍의 사대(四大)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물질의 기본요소, 특히 우리 육신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들로 견고성(堅固性), 응집성(凝集性), 열성(熱性) 그리고 동성(動性)이다.
'다섯 살인귀'는 오온(五蘊)을 가리킨다. 부처님은 이 용어를 써서, 소위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적 정신적 진행 *1 을 분류해놓고 계시다.
그것은 ①육체, ②감수성, ③인식, ④의지적 행동과 그밖의 모든 정신적 과정, ⑤일체의 인지 또는 의식이다. 이 오온은 인간뿐 아니라 사실상 일체의 유정물을 모두 수렴한다.
'버려진 마을'은 의식생활의 여섯 개 안쪽 바탕[六內處]으로서, 다섯 감각기관 그리고 여섯 번째로 모든 면에서의 마음 *2 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자는 이들 기관중 어느 것을 검토해 봐도 거기서 자기자신, 자아 또는 에고라 부를 그 어떤 지속적인 실체나 정신적인 실재, 혹은 영혼이랄까 아니면 달리 비슷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기에 '빈' 마을이라 한 것이다.
'마을을 터는 떼강도'는 우리 의식생활의 바깥 바탕[六外處]을 가리킨다. 보이는 형상, 소리, 냄새, 맛, 몸의 감촉 대상 그리고 사유대상으로 모든 인식 대상을 말한다. 사실, 우리의 안쪽 주관적 바탕들은 즐겁거나 괴로운 갖가지 바깥 바탕들 때문에 시달리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 바깥의 바탕들을 떼강도의 출몰에 비유한 것이다.
'칼을 빼든 산적두목'은 희탐(喜貪)으로서 고통의 원인인 갈애와 동의어이다.
만약 약탈자인 여섯 바깥 경계들을 이 갈애가 인솔하게 된다면 미상불 큰 재앙이 아닐 수 없다. '망망한 큰 물'은 네 가지 폭류라는 것으로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첫째, 감각적 쾌락을 쫓는 갈애[欲暴流], 둘째, 생에 대한 갈애[有暴流], 셋째, 이론과 삿된 견해에 집착하는 것[見暴流], 넷째, 삼계(三界) 일체중생의 본질에 대한 무지 미망상태에 집착함[無明暴流]이다.
위험으로 충만한 '이편 언덕[此岸]'은 이 고해에 처하여 그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소위 인간이라는 존재를 말한다. '저편 언덕[彼岸]'은 안전한 피난처이며 바로 열반이다. '뗏목'은, 피안으로 기필코 건너가려면 꼭 타야하는 것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의미한다. 이 팔정도는 말할 것도 없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부분으로 크게 분류하면 계(戒), 정(定), 혜(慧)로 이루어진다.
'팔과 다리로 저어서'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온 힘을 다 쏟는 것을 뜻한다. 강을 건너 마침내 피안에 올라선다는 것은 구경(究境)의 해방, 해탈, 완전한 청정, 성스러움, 다시 말해 아라한과의 성취를 의미하며, 저 깨치신 분께서 선포하셨던 그 목적을 기어코 이루어내었음을 의미한다. 이 '독사의 비유'에서 우리는 불교 철리(哲理)의 요체에 접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이 놀라운 철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생활에서 실천해 나간다면,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속한 일체의 것에서 헤어나 그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 들어간 셈이 된다.
자 그러면, 이 철리를 우리 일상생활에 적용할 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지 여러분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 육신과 일체 유형물을 독사로 여길 줄 알게만 되면, 그때 우리는 남이 자기보다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다 해서 부러워하지도 않을 것이며, 내가 못 생겼다 해서 기가 죽지도 않을 것이다. 외모를 가꾸느라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남들도 나와 마찬가지 처지로, 허약한 육신과 다치기 쉬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알게 될 때, 남을 해치는 짓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이 새롭고 위대한 철리를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우리가 남들을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도록 힘껏 도와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즉, 차지해보았자 시중이나 들어주어야 할 독사를 더 많이 가지려고 헛되이 애를 쓰지 않게 될 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물심양면으로 돕게 되고, 나아가서 그들에게 해탈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새로운 인생관을 실천에 옮기는데 가장 긴요한 것은 체계적으로 교리를 연구하며 계율을 익히는 길을 택하거나, 아니면 생의 본질에 활연히 눈뜨게 되는 것이다. 이중 후자의 통찰력-또는 저절로 돈발(頓發)하는 순수지-은 때로 대단히 강력하여 폭류를 건너버린다. 그것은 갑자기 찾아든 어떤 한 순간에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러한 순간들이 연속적으로 올 때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직관적 통찰력도, 지금까지 계를 익히고 경전을 연구하고 그리고 선정에 들어'완전한 홀로' *3 를 이룬 경험들과, 그리고 여러 전생동안 쌓아온 공덕의 누적 효과가 빚어낸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최종적 실현 *4 을 도와줄 유리한 조건들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깨치신 분의 인생철리를 행위규범으로 삼아 거기에 맞추어 나날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마음챙겨, 특히 인생의 결정적 고비에서는 더더욱, 명예, 평판, 명성, 권력 같은 세속적 쾌락의 추구에 정신없이 열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살피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권력에 대한 의지'를 사심없는 '공동체에 대한 의지'로 승화시켜야만 한다. 고상하고 그러면서도 매사를 빈틈없이 그 본질까지 꿰뚫어 보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선의를 모두에게로 펴나갈 수 있게 되며, 그때는 계급도, 신앙신조도, 인종도, 적과 동지도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모두로 하여금 세속과 격정의 폭류를 건네도록 도와줄 채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나날의 삶에서 가장 좋은 시간들을, 우리 생의 진정한 본질과 해탈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이랄까, 통찰력이랄까를 계발하는 데에 바쳐 마땅하다.
삶(일상)에서 떨어져 홀로일 수 있는 능력이 증장되면 될수록 저 '피안'의 더없는 행복 또한 점점 실제적인 것으로 다가와 마침내는 그것만이 우리가 추구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실제로 확신하기에 이를 것이다. 처음에는 꿈같던 환상이, 이 '삶의 새 철리'를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해 진지하고도 간단없이 분투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철학을 마음속 깊이 다져두려면 다음의 비유마저 음미해 보는 것이 좋겠다.
통나무의 비유
한때 세존께서는 코삼비의 갠지스 강변에 머무르고 계셨다. 그때 스승께서는 커다란 통나무 하나가 강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그 통나무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약 저 통나무가 이쪽 강변이나 저쪽 강변으로 밀려가지 않고 강 한가운데서 가라앉지도 않고, 마른 땅 위로 내던져지거나, 사람이나 신령에게 붙들리지 않으며, 소용돌이에 말려 강바닥에 잠기지도 않고, 또 속으로 썩어 부식되지 않는다면 저 통나무는 떠내려가 바다에 들 것이다. 왜냐하면 갠지스 강이 흘러가는 길은 결국 바다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강변 어느 쪽으로 내몰리도록 자신을 방치하지 않고, 마른 땅 위로 내던져지지 않고, 사람이나 신령에게 붙잡히지 않고, 소용돌이에 말려 가라앉지도 않고, 속으로 썩어버리지 않는다면 그대들이 나아가는 길은 열반을 향하고 있을 것이며, 그대들은 해탈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올바른 견해[正見]는 해탈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듣자 한 제자가 세존께 여쭌다.
"존사시여, 이 비유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옵니까?"
스승께선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이쪽 강변'은 우리 정신생활의 여섯 안쪽바탕[內六處]을 의미하니, 다섯 육체적 감각과 여섯 번째로 '의(意)'가 그것이다.
'저쪽 강변'은 여섯 바깥바탕[外六處], 또는 대경(對境)을 말한 것으로 다섯 감각 대상과 의식의 대상이다.
'강 한가운데서 가라앉는다'는 것은 감각적 즐거움에 빠져드는 것을 말하며, '마른 땅에 던져지는 것은 향상을 그르치는 자만(自慢)을 가리킨다. '사람에게 붙들린다'함은 모든 시간을 사람과 어울리는데 빼앗겨, 온갖 시시한 일에는 모든 신경을 쓰면서도 정작 중요한 자기향상은 뒷전에 두는 것을 말한다.
'신령에게 붙들린다'함은 천상 세계에 천신으로 태어날 욕심으로 공덕행을 하거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소용돌이에 말려 강바닥에 잠긴다'는 것은 세속의 즐거움을 좇는 데에 집착하는 것으로, 이 재미, 저 즐거움을 좇다보니 속된 탐욕의 소용돌이에 말리고 말아 삶의 원대한 과제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지내고 마는 것을 말한다. '속으로 썩어 부식된다'는 말은 부도덕, 불륜, 정신적 오염, 종잡을 수 없는 행위, 위선, 속은 폭삭 썩어 있으면서 선하고 덕있는 척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비유 역시 불교의 인생철리를 매우 인상적으로 그려보이고 있다. 깨달은 분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들의 목표가 과연 무엇인지 잘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나는대로 몸이나 보살피고 쓸데없는 독서나 쓰잘데 없는 이야기로 마음을 채워서는 안될 뿐 아니라, 세속적 즐거움이나 단순한 지적 유희의 추구에 열중하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종류의 자만도 우리 마음속에 자리하게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니, 도대체 우리 속에 또는 우리 주변에 자랑할 거리가 얼마나 되겠는가.
여가 시간을 몽땅 속된 인간들과 어울리는 데 써버리는 것은 물론 안될 일이고, 오히려 우리는 마음을 가꾸는 일에 자기보다 앞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도록 부단히 애씀으로써 분별있게 지혜와 덕을 추구하는데 가능한한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또한 생활의 일정시간을 지혜를 키우는 책을 연구하고 또 명상하는데 바쳐야 한다.
그리고 '깨달은 이의 제자'라는 이름값을 하려면 천상락만을 목적삼아 청정한 계행을 닦고 있어서도 안된다. 그런데 제대로 깨닫지 못한 속물들이 그런 잘못을 얼마나 많이 범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런 따위들에 현혹되는 일없이, 깨달음의 궁극목표를 굳게 염두에 새기고 금생에 그 목표를 향해 뚜렷한 향상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견지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한 향상을 이루기 위해서, 또 불교의 인생 철리를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피안 또는 구경열반이 가져다줄 안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탐 진 치라는 악의 세 뿌리를 근절하는 것이다. '차안'에 아직 매여 있는 주제에 피안의 완전한 소식을 어찌 다 알 수 있으랴만 부처님의 장엄하신 선언에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그 어렴풋한 모습을 떠 올려볼 수 있다.
"비구들이여, 태어난 것도 아니요[ajaatam:無生], 비롯된 것도 아니요[abhuutam:無有], 만들어진 것도 아니요[akaatam:無作], 형성된것[ asankhaatam:無爲]도 아닌 것이 있다. 만약 이와 같이 태어나지도, 비롯되지도, 만들어지지도, 형성되지도 않은 것이 없다면, 태어나고, 비롯되고, 만들어지고, 형성된 것들의 세계로부터 벗어난다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태어나지도, 비롯되지도, 만들어지지도, 형성되지도 않은 것이 있기에 이 태어나고, 비롯되고, 만들어지고, 형성된것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감흥어 8:3)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인식하려면 그 가르침의 후반부를 이루는 '피안'에 대한 가르침, 즉 해탈 또는 열반의 경지에 관한 교의를 소홀히 넘겨서는 안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피안(彼岸)과 차안(此岸) 양안'으로써 그 체계를 완성하고 있다는 점을 언제나 잊지 않아야 한다.
당신께서도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시지 않으셨던가. "예나 지금이나 나는 이 두 가지만을 가르친다 -고(苦)와 고로부터의 해방을."
이 두 비유가 요약 설명해주는 바, 불자가 지녀야할 삶에 대한 기본인식을 때때로 자주 숙고하고 또 실제로 적용해 나간다면 우리는 용기를 잃지 않고 생의 부침을 감내해 낼 수 있게 될 것이며, 모든 동반자, 온갖 생물들까지 선의와 우애로 대하며 정의로운 삶을 영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해탈이라는 구경 목표를 향해 끊임없는 향상을 성취해나가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원컨데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심해탈, 깨달음, 열반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정진하게 되기를!
이상의 두 비유는 상응부경에 실려있는 부처님의 법문을 번안한 것이다. 즉 육처상응(六處相應) 중의 제197경(毒蛇經:Asivsopama Sutta)와 제200경(통나무經:Darukkhanhopama Sutta)이다. 앞으로 '고요한 소리'모임은 이 모든 경들을 원문에서 바로 우리말로 옮김으로써 불자님들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토록 할 것이다.
비유와 우화
Sayings & Parables
Nyanasatta Thera
(BODHI LEAVES NO.B.97)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비유가 있다. 어떤 사람이 배를 저어 강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강가에서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여보게, 멈추시게. 물살도 급한데 뭐가 그리 신이 나서 노를 젓는가. 가보아야 위태로운 급류와 소용돌이 뿐이고 바위 동굴에서는 악어와 괴물이 노리고 있다네. 그대로 가다가는 닥치느니 죽음 뿐이라!" 여기서 '급한 물살'은 탐욕으로 가득찬 삶을 의미하며, '신나게 노를 젓는다'는 이러한 욕망을 부추겨 자신을 송두리째 내맡기는 것에 비유된다. '위태로운 급류'란 그런 탐욕에 내맡긴 삶에서 오는 괴로움과 고통을 뜻하며, '소용돌이'는 쾌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악어와 괴물'은 욕망과 방종에 빠진 삶 뒤에 따르는 황폐함과 죽음을 가리킨다. 강가에서 경고하고 있는 '누군가'는 바로 부처님이시다.
* * * * * *
또 다른 비유가 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도망가고 있다. 포졸이 그의 뒤를 쫓는다. 달아나던 그는 우물 속에 숨어볼량으로 가장자리에 늘어진 나무덩굴을 잡고 내려간다. 그때 바닥에 우글거리고 있는 독사를 보고는 도리없이 덩굴에 매달려 있게 된다. 이내 팔은 아파오는데, 이번에는 흰 생쥐와 검은 생쥐가 그 덩굴을 갉아 먹는 것이 아닌가. 덩굴이 끊어지면 독사에게 물려 죽고 말 형편이다. 그 와중에 문득 위를 쳐다보니 얼굴 바로 위에 벌집이 있고, 꿀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처한 모든 위험을 까맣게 잊은 채 꿀맛을 즐기고 있다.
여기에서 '쫓기는 이'는 태어나서 고통을 겪다가 홀로 죽어가는 인간을 의미한다. '포졸'과 '독사'는 갖가지 욕망 덩어리인 육체를 말하며 '덩굴'은 인간의 수명을 가리킨다. '흰 생쥐, 검은 생쥐'는 낮과 밤의 상징으로, 시간의 흐름인 세월을 의미한다. '꿀'은 살면서 겪는 온갖 괴로움을 잠시 잊게하는 육체적 쾌락을 의미한다.
* * * * * *
히말라야 산 기슭에 여러 짐승과 새들과 더불어 앵무새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세찬 바람이 불자 대나무들이 서로 부벼져 숲속에 불이 났다. 그러자 짐승과 새들은 모두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랐다. 앵무새는 그들이 놀라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기가 딱했고, 그동안 자신의 안식처였던 대나무 숲의 고마움을 생각해서 있는 힘을 다해 불을 끄려고 했다. 앵무새는 근처 연못물에 날개를 적셔다가 불이 난 곳에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는 숲의 은혜를 잊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지런히 물을 뿌려댔다. 자기를 돌보지 않는 인정스러운 앵무새의 마음이 천신의 눈에 띄었다. 천신은 하늘에서 내려와 앵무새에게 말했다.
"너의 용기는 참으로 가상하다. 하지만 이렇게 큰 불이 났는데 물 몇 방울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러자 앵무새는 이렇게 대답했다. "보은의 마음과 희생 정신으로 이루지 못할 것이 있을라고요. 나는 끝까지 해볼 작정이예요. 안되면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서라도 하겠습니다." 그 갸륵한 마음씨에 감동된 천신은 앵무새를 거들어 불을 꺼주었다.
* * * * * *
옛날 히말라야 산 속에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인 새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쪽 머리는 다른 쪽 머리가 혼자서 맛있는 과일을 먹는 것을 보고 부아가 나서 이렇게 내뱉았다.
"좋아, 그럼 난 독이 든 과일을 먹을테야."
그쪽 머리는 정말로 독이 든 과일을 먹었고 그러자, 머리 둘 가진 그 새는 죽고 말았다.
* * * * * *
옛날에 돈은 많은데 무척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웃 사람이 집을 삼층으로 잘 지어놓은 것을 보자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재력이 충분하므로 그와 똑같은 집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목수를 불러 집을 짓게 했다. 일을 맡은 목수는 바로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고 이어서 일층, 이층 그리고 삼층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던 어리석은 부자는 몹시 안달하면서 말했다.
"나는 기초도, 일층도, 이층도 다 필요없소. 내가 원하는 것은 삼층이오. 빨리 삼층이나 멋있게 지으란 말이오."
어리석은 이는 언제나 결과에만 연연하여 성급해 한다. 그런 나머지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반드시 먼저 기울여야 할 노력은 소홀히 한다.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응분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 법. 마치 기초와 일 이층이 없이는 삼층이 있을 수 없듯이….
* * * * * *
한번은 어느 바보스러운 사람이 꿀을 끓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친구가 찾아왔으므로 그에게 꿀을 대접하고 싶었다. 그러나 꿀이 너무나 뜨거워 먼저 식히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심하게도 그는 꿀을 식힌답시고 그릇을 불 위에 올려 놓은 채 부채질만 해댔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세속적인 열정의 불을 먼저 끄지 않고는 냉철한 지혜의 꿀을 얻지 못한다.
* * * * * *
세속적 욕망이라는 덫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이를테면 뱀, 악어, 새, 개, 여우 그리고 원숭이등 성질이 전혀 다른 여섯 가지 동물들을 하나의 밧줄로 꽉 묶어두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동물들은 자기 우리를 찾아가려고 각기 나름대로 날뛸 것이다. 뱀은 풀숲을, 악어는 물을 찾을 것이고, 새는 하늘로, 개는 마을로, 여우는 외딴 절벽으로, 원숭이는 숲속으로 달아나려 들 것이다. 그들은 제가끔 몸부림쳐보지만 한데 묶여있는 탓으로 그때 그때 가장 힘센 것이 끄는 쪽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인간은 이 우화에 나오는 여섯 동물처럼 눈[眼], 귀[耳], 코[鼻], 혀[舌], 촉감[身], 마음[意] 여섯 가지 감각을 한 몸에 지니고, 그 감각들의 욕구에 이리저리 끌리며 순간 순간 가장 강렬한 욕구에 지배당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 여섯 동물을 모두 하나의 기둥에 묶어 둔다면 그들은 밧줄을 벗어나려고 애쓰다가 마침내는 녹초가 되어 기둥 밑에 기진맥진 쓰러져버릴 것이다. 여기에서 기둥은 정념을 의미하며, 바로 이처럼 사람이 마음 하나를 길들여 제어하게 되면 나머지 다섯 가지 감각은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음만 통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이나 앞으로나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 * * * * *
옛날에 도깨비 둘이서 상자 하나, 지팡이 하나, 그리고 신발 한 켤레를 놓고 온종일 입씨름을 하며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보고 물었다.
"왜 이것들을 가지고 다투는가? 무슨 신통력이 있길래 서로 가지려고 싸우고 있는가?"
도깨비들이 대답하기를, 그 상자는 음식이든 옷이든 보물이든,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나오게 하고, 지팡이로는 모든 적을 굴복시킬 수 있으며, 그 신발을 신으면 하늘을 날아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자 그 사람은 "서로 다툴 필요가 뭐 있나. 잠깐만 비켜주게. 이 물건들을 둘이서 공평히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네."라고 말했다.
그 말에 도깨비들은 자리를 비켜주었고,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그 사람은 신발을 신고 상자와 지팡이를 거두어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이 우화에서, 도깨비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을 나타낸다.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나오는 상자'는 자비행으로 얻어지는 공덕을 비유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입으로 자비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비행의 공덕이 얼마나 무한한지, 그래서 얼마나 많은 보물을 얻을 수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지팡이'는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행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입으로는 수행을 말하면서, 실제로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행이 모든 세속적 욕망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신발 한 켤레'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동시에 청정케하는 균형잡힌 수행을 통해서 모든 세속적 욕망과 견해의 싸움을 초월할 수 있음을 비유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상자니, 지팡이니, 신발이니 하며 논쟁과 싸움만을 일삼고 있다.
* * * * * *
어떤 집에 아름다운 여인이 옷을 잘 차려입고 찾아왔다. 집 주인이 그녀에게 누구인가를 물으니 그녀는 자신이 부(富)의 여신이라고 대답했다. 주인은 기뻐하며 그녀를 잘 대접했다. 곧 이어 못생긴 여인이 옷을 초라하게 입고 나타났다. 주인이 누구냐고 묻자 그녀는 빈곤의 여신이라고 대답했다. 주인은 깜짝 놀라 그녀를 집에서 쫓아내려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부의 여신은 나의 언니예요. 우리는 서로 떨어져 살 수 없는 사이랍니다.
당신이 나를 쫓아낸다면 언니도 나와 함께 떠나야 합니다."
그 못생긴 여인이 떠나자 과연 부의 여신도 사라졌다.
태어남은 죽음과 짝을 이루고, 행운은 불행과 짝을 이루며, 좋은 일에는 나쁜 일이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알아야만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불행은 꺼리고, 행운을 잡으려고 몸부림치지만,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두 가지 모두를 초월하고 세속적인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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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혼
부부란 단순히 서로의 편의만을 위해서 맺어지는 관계는 아니다. 부부관계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같은 집에서 함께 산다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다. 남편과 아내는 일심동체라는 잇점을 살려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각자의 마음을 닦는 데에 서로를 도와야 한다.
'이상적인 부부'로 알려진 어느 노부부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희는 어릴적 친구로 친하게 지내다가 결혼까지 했습니다. 저희들의 결혼생활은 내내 행복했습니다. 우리는 다음 생에서도 다시 결혼하여 함께 살 수 있을까요?"
부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사려깊은 대답을 해주셨다.
"그대들이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똑같은 방법으로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같은 방식으로 자비를 행하고, 같은 지혜를 갖는다면, 다음 생에서도 같은 마음으로 태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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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생활
가정이란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곳이다. 이 마음이 서로 사랑할 때 그 가정은 꽃밭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그 가정은 폭풍우가 휩쓸고간 정원처럼 황폐해질 것이다.
가정에서 불화가 생기면 우리는 상대방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보고 그 때에 알맞는 올바른 길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마음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재난이 닥치기 마련이다. 엄청난 불행도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가정생활에서는 이 점을 특히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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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삶
깨달음의 길에는 남 敾텝구별이 있을 수 없다. 여성도 깨달음을 구하기로 마음먹기만 한다면 진정한 길[八正道]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프라세나지트 왕의 딸이며 아요드야 왕비인 말리카가 바로 그러한 주인공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실히 믿고있던 그녀는 부처님 앞에서 다음과 같은 열 가지의 서약을 하였다. "부처님,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저는 신성한 계율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나이 많은 분들에게 거만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겠습니다.
남을 시기하거나 그가 가진 것을 탐내지 않겠습니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저만 아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다. 제가 받은 것들을 쌓아두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쓰겠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나 정중히 대하겠으며, 그들이 필요로하는 것을 나누어 주고, 고운 말을 실천하겠습니다. 저의 편함만을 생각지 않고 남들의 처지를 염려하겠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치우침없이 돕겠습니다. 외롭거나, 감옥에 갇혔거나, 질병에 걸렸거나, 어떤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 인과법을 설명해주며 위로해주고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산 짐승을 잡거나 동물에게 잔혹하게 하는 등,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계율을 어기는 것을 보면, 벌받을 만한 자들은 벌을 주고 타이를만한 이들은 타이르겠습니다. 또 저의 능력이 닿는 한 그들이 저지른 과오를 뉘우치게 하고 잘못을 고치게 하겠습니다. 저는 바른 가르침 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진리는 어디에나 있는 것이지만 바른 가르침을 등한히 하면 순식간에 멀어지게 되고 깨달음의 피안에 이르지 못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불행한 사람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서원을 세웠다:
"첫째, 모든 이들이 평안하게 되도록 힘쓸 것을 서원합니다. 다음에 어떤 생을 받게 되든지 이 소원은 선근이 되어 선법을 잘 알아듣는 지혜로 자라날 것임을 믿습니다.
둘째, 선법을 잘 알아듣는 지혜를 얻은 다음에는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꾸준히 힘쓸 것입니다.
셋째, 나의 몸과 생명과 재산을 다 바쳐서라도 바른 가르침을 수호하겠습니다."
가정생활의 진정한 의미는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면서 함께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데 있다. 비록 여자일지라도 말리카 왕비처럼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으로 위와 같은 맹세와 서원을 한다면, 누구나 부처님의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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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사회
칠흙같이 어두운 황량한 들판에서 수많은 생물들이 한치 앞을 못보고 우글거리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생물들은 필시 겁에 질려 어둠 속에서 서로를 몰라보고 마구 내달으며 허우적대기도 하고 외톨이로 떨어져버리기도 할 것이다. 이는 정말 눈뜨고 볼 수없는 딱한 상황이다. 그때 어떤 비범한 사람이 횃불을 들고 나타나서 주위가 밝아지고 모든 것이 또렷이 보이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어둠 속에 외톨이로 있던 생물들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고 서로를 알아보게 되어 반갑게 정을 나누며 안심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황량한 들판'은 무지라는 어두움 속에 놓여있는 사바세계를 의미한다. 마음 속에 지혜의 빛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외로이 두려움에 떨며 방황한다. 그들은 외톨이로 태어나고 외톨이로 죽는다. 또한 주변 사람들과 화합하여 어울릴 수 있는 법을 모르기에 도리없이 낙심하고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비범한 사람이 횃불을 들고 나타난다'는 말은 부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나투시어 지혜와 자비의 빛으로 세상을 밝힌다는 의미이다. 그 빛을 받아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의 존재를 깨닫게 되고, 서로 친구가 되어주며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맺게된 것을 기뻐한다.
하나의 공동체 속에서 아무리 많은 사람이 함께 산다 하더라도 그들이 서로를 알지 못하고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지 못한다면 진정한 우정의 공동체는 아닌 것이다. 믿음과 지혜가 빛을 밝혀주는 사회만이 진정한 공동체이다. 그러한 곳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하며 조화로운 사회 관계가 이루어진다. 실로 조화로움이야말로 참된 공동체나 조직체의 생명이며 진정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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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피로 씻을 수 없는 법. 원한은 원한으로 풀 수 없는 법. 원한은 잊음으로써만 없앨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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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정해지면 사려가 깊어진다. 그 마음은 이미 팔정도를 닦는 마음이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마음이고, 기꺼이 계를 지키는 마음이고, 참는 마음이고, 정진하는 마음이고, 고요한 마음이고, 지혜로운 마음이고, 자비로운 마음이며, 곧 여러 가지 선한 방편으로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끌어주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이라야 불국토를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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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의 가르침을 널리 펴겠다는 열성과 지성이 불국토를 이룩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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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촛불이 다른 초에 하나씩 불을 붙여나가듯, 부처님의 자비의 빛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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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불자들이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그들이 불 廻승 삼보에 귀의하고 계를 지키는 이유가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는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비록 오욕(五慾)의 세계에 몸담고 있다해도 오욕에의 집착을 버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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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재가불자들이 잊어서 안될 일은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조만간 헤어져야만하고 자신도 필시 이승을 하직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생사를 초월한 깨달음의 세계에 마음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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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은 청정하고 부드러우며, 항상 참고 견디며, 결코 다투지 않고, 남을 괴롭히지 않고, 항상 불 법 잔삼보를 염하는 마음이다. 그러면 저절로 환희심이 샘솟고 어디에서나 깨달음의 빛이 비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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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진리를 바로 알아서, 살아가며 인연 맺게되는 것들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구경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만들려고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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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깨달음의 세계만이 의미있고 평화롭다고 여기고, 이 세상은 온통 무의미하다거나 혼돈으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세상의 갖가지 일들 속에서 깨달음의 방법을 체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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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꽃을 피울 여러 가지 조건들이 갖추어졌기에 피어나게 된다. 잎이 지는 것도 그럴만한 조건들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조건들이 갖추어지지 않은 채 꽃이 필 수는 없으며, 잎이 저절로 질 수도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은 생겨나고 또 소멸한다. 변함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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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일련의 원인과 조건들로 만들어지고, 또 같은 원리에 따라 사라진다는 것은 이 세상의 영원하고도 변함없는 법칙이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며 그 무엇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일련의 원인과 조건들로 만들어지고, 또 같은 원리에 따라 사라진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며 그 무엇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을 수는 없다.이것은 이 세상의 영원하고도 변함없는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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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나무 하나가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도중에 좌초하거나 가라앉지 않고 누군가가 건져내지 않고 썩지도 않는다면, 그 통나무는 결국 바다에 이르게 될 것이다. 산다는 것은 도도한 강물의 흐름에 내맡겨진 이 통나무와 같다. 어떤 이가 방종한 삶에 빠지지 않고, 출가하여서도 고행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미덕을 과시하지 않으며, 못된 짓에 재미붙이지 않으며, 깨달음을 추구함에 있어서 일어나는 망상을 하찮게 여기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그는 중도(中道)를 따르는 사람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서 중요한 것은, 그 어떠한 극단에도 사로잡히거나 얽혀들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제나 중도를 가는 것이다.
주해
*1) 인간은 어떤 고정된 불변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멸하는 오온의 흐름의 진행과정 그 자체이다.
*2) 모든 면에서의 마음:식(識), 심(心), 의(意)를 통틀어 가리킨 말.
*3) 완전한 홀로: 육체적으로 홀로일 뿐 아니라 마음도 일체 대경에 대한 관심 집착을 여의어 홀로가 된 상태. Viveka(遠離)상태.
*4) 최종적 실현:수행자의 발전단계는 이론, 실천, 통달과 목표실현(해탈)으로 삼대별 된다.
(사) 고요한 소리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72 번지. 전화: 739-6328, 725-3408, 전송: 723-9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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