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 순례의 길에서
수잔 엘바움 주틸라 . 지음
김 한 상 . 옮김
ON PILGRIMAGE
Susan Elbaum Jootla
BODDHI LEAVES NO. 118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차례
1. 들어가는 말
2. 룸비니에서
3. 보드가야에서
4. 사르나트에서
5. 사받티(舍衛城)와 라자가하(王舍城)에서
6. 쿠시나라에서
7. 맺는 말
들어가는 말
나는 지금 그대들과 더불어 불교 성지 순례의 길을 떠나고자 한다. 고타마 붓다께서 살다 가셨고 또한 몸소 법(法)을 가르치셨던 중요한 곳들을 찾아 보고자 한다. 우리 모두 오늘날 그곳의 모습을 돌아보며, 부처님 당시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그 유서 깊은 곳에서 부처님의 법을 닦아 보도록 하자.
반열반(般涅槃)에 드시기 전, 부처님께선 시자 아난다 존자에게 이르셨다. 신심 깊은 사람이 꼭 찾아 보아야 할 네 군데가 있느니라. 그런 다음 부처님은 당신이 태어나신 곳, 깨달음을 이루신 곳, 깨닫는 길을 처음으로 가르치신 곳, 그리고 반열반에 드신 곳을 거명하셨다.
이 같은 권고를 새기며 세계 각처에서 온 신심 깊은 불자들은 무상의 성질을 알게 해주고 깨닫게 해줄 곳 이라고 하셨던 (장부경의 10개의 경들, 272쪽) 바로 이곳에 존경의 염을 바치고자 인도와 네팔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하려고 하는 순전한 마음만의 성지 순례를 위하여 이 말씀에 간직된 의미를 향해 조심스레 다가가 보도록 하자. 어쩌면 이 지상(誌上) 여행은 언젠가 우리로 하여금 정말 성지를 찾아갈 만한 큰 신심을 일으켜 줄지도 모른다. 지금은 다만, 부처님께서 모든 괴로움[苦]을 끝내도록 가르치셨던 정신적 정화의 과정을 더 한층 깊이 들여다 보는 하나의 방법을 우리에게 제공해 줄 것이 틀림없다. 실로 모든 현상들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 없는 성질임을 깊이 염두에 두고 인도 대륙을 향해 이제 과거와 현재를 한번에 보는 여행 길에 올라 보자.
룸비니에서
부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이에게 찾아보라고 권하셨던 첫번째 장소는 룸비니이다. 그곳은 부처님이 석가족 숟도다나왕의 아들로 태어나신 땅이다. 현재 네팔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룸비니는 인도 국경에서 차로 채 반 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오늘날 이곳에는 우리에게 부처님을 회상케 해줄 그 무엇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부처님 입멸 후 몇 세기를 지나 인도의 여러 지역을 통치했던 아쇼카 황제가 고타마의 탄생지로서 중요한 곳이기에 자신이 이곳에 순례차 왔었음을 나타낸다며 낮으막한 언덕 위에 하나의 석주를 세워 놓았다. 룸비니는 그 중대한 사건을 기념하고자 일본이 그 부근에 정교한 공원단지를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들린다.
부처님의 생모 마야 왕비는 친정으로 가기 위해 카필라바투 시가(媤家)를 떠났을 때 머지않아 아기를 낳을 듯 싶은 산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가는 도중 뜻밖에도 그녀는 룸비니 마을 근처의 사라나무 숲에서 선 채로 아기를 낳았다.
아기는 태어나자 곧 두발로 땅을 딛고 북쪽을 향해 일곱 걸음을 걸은 다음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였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이요. 이것이 내 마지막 태어남이리. 이제 앞으로 더 이상의 재생(再生)은 없으리라. (중부경 123; 중간길이의 말씀들, 3:166-67)
이 때 마지막 태어나는 보살들이 항상 그렇듯이 몇 가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한 줄기의 광대한 광명이 나타났으며, 그 광명은 아주 어두운 지옥으로부터 위로는 천상계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 모든 계의 존재들에게 비추었다. 이 사바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일만 개의 여러 세계에 펼쳐져 있는 넓은 존재계가 모두 흔들리고 진동하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보살의 수태에 관한 자연스러운 이야기, 위대한 존재를 잉태하고 있었던 동안의 마야부인의 상태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위에 인용했던 법문의 일부분으로서 아난다 존자가 암송했던 보살의 탄생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일러 이 모든 것을 사받티(舍衛城)의 아나타핀디카 동산(祇樹給孤獨園)에 모인 비구 대중들에게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지시하셨다. 아난다가 이 놀라운 사건들을 모두 이야기하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 부처님에 관해 기억해 두어야 할 다른 놀라운 특질이 더 있다고 덧붙이셨다.
즉, 완전한 분께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들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머물면 머무는 대로... 가라앉으면 앉는 대로 그대로 알려진다. 그분의 지각과 생각들도 또한 일어난 대로, 머무는 대로, 가라앉는 대로 당신에게 알려지고 있다고 하셨다.
룸비니에 잠시 머무는 동안 우리는, 완전하신 분께서 마음의 전개 과정에 대해 얼마나 명료하게 이해하고 계셨던가를 되돌아보도록 하자. 우리가 이곳 부처님께서 태어나셨던 곳을 찾아와 명상하는 동안, 만약 우리가 세심한 마음챙김을 통해 느낌이나 지각이나 생각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우리는 그분께 가장 알맞는 바른 경배를 올리는 셈이 되리라, 오직 성불하신 여러 부처님들과 아라한들만이 모든 정신의 활동 과정을 완전히 알아차릴 수가 있다고 하지만 불교를 공부하는 수행자라면 누구라도 마음과 몸의 변하기 쉽고, 무상하며, 변화하는 성질을 보는 수련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느리더라도 이 같은 수행이 견고한 계행의 바탕 위에서 되어진다면 언젠가는 무상을 꿰뚫어 보는 큰 깨달음으로 통하게 될 것이다.
보드가야에서
그럼 이제 현대 인도의 비하르주에 있는 보드가야로 발걸음을 옮겨 보도록 하자. 이곳은 고타마께서, 가르쳐 주는 스승조차 없이, 우주 만유에 대한 완벽한 직관적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셨던 곳이다.
작은 읍 보드가야는 아마도 사대 성지 가운데 순례자의 발길이 가장 많이 닿은 곳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살께서 성불하신 곳을 보러 이곳을 찾아오고 있어 오늘날의 보드가야는 거의 국제적 센타가 되어 있다.
옛날 이 지역은 우루벨라라고 불리웠었다. 고타마께서 네란자라 강 기슭 보리수 아래에 앉아 계셨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얕으막하면서도 넓은 네란자라 강은 이제는 보리수 나무를 끼고 돌아 흐르고 있지는 않다. 그 강의 수로는 현재, 아마 반 킬로쯤 떨어져 멀리 굽이쳐 흐르고 있을 것이다. 가지들이 넓다랗게 뻗어나간 지금의 이 핍팔라나무는, 말하자면 보살이 그 아래 풀더미를 깔고 깨달음의 자리로 삼았던 원래 나무의 손자뻘인 셈이다.
그 나무는 마하보디 사원 오른쪽에 서 있는데 이 거대한 사원은 인류 사상 가장 위대한 성취를 기념하며 건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쪽으로 다가가려면 우리는 사실상 긴 돌 층계를 맨발로 내려가야만 한다. 조그만 감실(龕室)들이 줄줄이 열을 지어 둘러싸고 있는 사원 내 정방형 탑을 향해 우리는 발걸음을 옮긴다. 몇몇 감실 안에는 일부 훼손되었거나 혹은 다시 복원되었거나 금박이 입혀진 부처님상들이 모셔져 있다. 수백년이 넘도록 수백만 사람들의 발자취에 의해 반들반들 닳아진 사원의 반석 위를 걸어 한바퀴 돌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석재 난간 울타리 이편에 서 있는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보도록 하자.
우리는 이제 무수한 다겁(多劫)에 걸쳐 닦으셨던 부처님의 정진 공덕이 마지막 절정을 이루게 된 이곳에서 그분께 감사하는 일념으로 경의를 표해 볼 수 있다. 당신이 발견하신 옛길[古道],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다른 중생들과 함께 나누기로 하셨던 바로 이곳에서 부처님께 절을 올리도록 하자. 그분께서 주신 가르침, 진리, 법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절을 올리도록 하자. 그리고 또한 청정한 법을 지니며 실천하는 분들, 승가[僧]에 대해서도 다시금 삼배를 올리자.
불자들이 찾아야 할 성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 자리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신심과 더불어 지혜도 또한 계발시켜 보자. 부처님께서 진리[法]를 발견하셨다는 확신, 그리고 그 진리는 지금도 정확하게 가르쳐지고 있다는 확신에서 시작하여 우리 자신 법을 꿰뚫어 알 수 있는 통찰을 얻을 때까지 정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곳 보드가야에서 고타마는 깨달으셨다: 모든 존재 와 사물은 실체가 없다는 것[無我性]을. 자신에 의해서가 아닌 다른 요인들에 의해 생겨나 조건지워져 있기에 그들 모두가 얼마나 불만족스러운 것인가를[無常性]. 그 원인들을 제거함으로써 거기에서 초래되는 괴로움[苦]이 어떻게 확고하게 그리고 영원히 근절될 수 있는가를!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이 존재의 모든 괴로움을 오게 만든 인과의 사슬, 서로 상호 의존하여 일어나는 법[緣起法]에 관해 명상해 보도록 하자.
대각을 이루는 순간 보살께서는 세상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보셨고 따라서 이 때 연기법에 대한 그분의 분석은 괴로움의 가장 명백한 유형인 늙음과 죽음[老死]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거기서부터 그분은 각각의 단계 뒤에 도사리고 있는 원인들을 되짚어 나아가신다[順觀]. 부처님께서는 태어남[生]이 늙음과 죽음[老死]을 가져 오게 만드는 조건임을 알아냈다. 그리고 태어남[生]을 낳는 조건은 생성 과정(有)이며 마음의 집착[取]이 또한 생성 과정[有] 뒤에 내재해 있음을 아시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또 갈애[愛]가 있을 때 집착[取]가 생긴다는 것을 아셨다. 갈애[愛]는 느낌[受]으로부터 자라나며, 느낌[受]은 여섯 가지 감각 기관들[六入]이 그들의 대상들[六境]과 접촉[觸]할 때 생긴다. 그런데 마음과 몸[名色]이 있음으로써 감각 기관들[六入]이 있게 된다. 그리고 식[識]은 끊임없이 마음과 몸[名色]의 전 복합체를 재생해 내는 과정에서 가장 분명한 역할을 해냄을 아셨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은 어떻게 식(識)과 심신[名色]이 상호간에 서로 조건이 되는지를 밝히신다. 즉 만약 어느 한쪽이 그치게 되면 다른 한쪽도 또한 반드시 그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신다. 다음에 그분은 인과 관계의 연쇄를 그 요안들의 소멸이란 측면에서 분석하신다[逆觀]. 그것은 결국 태어남[生]이 있을 때는 반드시 따라오게 마련인 모든 괴로움이 이 연기의 사슬을 꾾음으로써 어떻게 종식될 수 있는지를 나타내 주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이 심오한 옛법을 발견했다는 것을 말씀하실 적에 그 사슬이 어느 부분에서 또는 어떤 방법으로 끊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셨다. 하지만 다른많은 경전들 속에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즐거운 느낌이나 즐겁지 않은 느낌이 일어날 때 갈애가 이에 호응하여 일어나도록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해 주신다.
이곳 보리수나무 아래 명상을 통해 우리가 꼭 해야 할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느낌들이 어떻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가를 침착하고 주의깊게 관찰할 수 있게 됨으로써 느낌[受]과 갈애[受] 사이에 이어진 연줄을 끊어 내는 수행을 시작하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즐거운 느낌들이 지속되기를 원하지도 말고 즐겁지 않은 느낌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도 말고 또 무덤덤한 느낌들을 묵과하지도 않은 채, 모든 느낌들을 오고가는 모습 그대로 알아차리도록 마음을 수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르나트에서
부처님께서는 보리수를 중심으로 보드가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일곱 군데에서 각각 7주를 보내셨을 때 범천(梵天)의 간청을 받아들이기로 하시고 다른 중생들에게 법을 가르치기로 결심하셨다. 부처님은 이시파타나로 가시기로 결심하셨다. 거기에서 당신께서 훌륭한 제자들을 얻을 것 같은 생각이 드셨던 때문이다.
이시파타나를 향해 가시는 동안 부처님께서는 그분의 태도에서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본 몇 사람들을 만나긴 했지만, 당신께 해탈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할 만큼 강한 구도심을 가진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지금은 사르나트로 불리우는 바라나시 근교의 사슴동산(鹿野苑), 이시파타나에서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시기 전에 힘든 고행을 함께 했었던 다섯 수행자를 만나게 되었다. 부처님은 이곳에서 몇 사람 안 되는 대중을 앞에 놓고 처음으로 당신의 법문을 설하셨다.
지금의 사르나트는 거의 바라나시 근교라고 부를 만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며 바라나시 자체는 인도에 사는 수백만 힌두교도에게 성스러운 도시이다. 사르나트는 그 존재 이유 자체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인연지어진 조그마한 마을이다. 넓직한 공원 한가운데에는 아쇼카 황제가 세운 거대한 벽돌탑이 서 있고 거기엔 부처님 최초의 법문이 아로 새겨져 있다. 그것은 근래에 옛탑이 서 있던 자리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은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신 장소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혹은 두 번째로 설법하신 장소를 나타낸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 밖의 인근 유적으로 다른 경이 설해진 장소를 나타내는 법좌(法座)가 발굴되었는데 이 유적은 현 지면 높이보다 약간 밑으로 내려가 위치해 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최초의 설법은 법의 바퀴를 처음 돌리기 시작한 경이란 뜻을 가진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Dhammacakkappavattana sutta)이라고 불리운다. 초전법륜경은 계절풍이 비를 뿌리기 바로 직전인 7월 보름날 저녁에 설하여졌다. 이 법문은 부처님의 다른 모든 교설들의 골자를 이루는 성스러운 네 가지 진리[四聖帝]를 설파하고 있다. 존재의 실체성이 없음을 가르친 두 번째경 무아상경(無我相經;Anattalahana sutta)은 그로부터 며칠 뒤에 처음 법문을 들었던 같은 다섯 제자들을 대상으로 설하여진 것이다. 이들 다섯 고행자들은 두 번의 법문을 들으면서 모두 완전 해탈을 얻은 아라한이 되었다.
사르나트의 옛 유적들을 둘러보았으니 이제 우리는 가까이 서 있는 현대식 사원도 또한 찾아보도록 하자. 현대식 사원 안에는 부처님의 일생을 그린 벽화가 걸려 있으며, 우리에게 더욱 중요하게는 약간의 유골이 사원 사당의 지하 납골당 유리 상자 안에 모셔져 있다. 이 뼈조각들은 부처님의 사리(舍利)들이다. 부처님의 사리를 향해 존경을 보내면서 이 또한 얼마나 무상함을 잘 나타내는 증거인가를 실감하자. 중생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신 그분마저도 당신 입멸 뒤에 거의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지 않은가!
말끔히 치워진 공원 마당, 탑 둘레의 어느 곳을 그늘진 곳을 골라잡는다. 그리고 그늘 아래 앉아 2500년도 넘는 오래 전 옛날 바로 이곳에서 어떤 웅대한 사건이 일어났었는가를 곰곰이 짚어 보도록 하자. 우리가 앉은 주변 잔디밭에는 여러 세대에 걸쳐 불법을 수행하는 비구들이 살았던 옛 절터의 주춧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모든 비구들은 각자 마음의 온갖 더러움[漏:번뇌]을 정화하여 아라한위를 얻고자 열심히 정진하였다. 공부를 마치고 아라한이 된 비구는 다시는 새로운 업(業)을 지음이 없이, 그 마음 속에 그 어떤 욕망이나 이기심 또는 무지의 흔적을 남겨두지 않은 채 완벽한 평화로움 속에서 살아갔다.
바로 이곳에서 부처님은 다른 중생들을 해탈의 방향으로 이끄는 지나긴 생애의 막을 열었다. 그렇지만 단 한 번의 법문만으로 다섯 수행자들을 완전히 깨닫게 만들기에는 충분하지가 못했다. 실은 첫 설법이 끝났을 때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이 깨달음의 첫번째 단계인 예류향(預流向;Sotapatti)에 도달하였다. 이는 모든 부처님들이 신통력을 부려 다른 중생들을 깨닫게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개개인은 스스로 자기가 할 일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청정한 법을 전해 주시는 모든 부처님과 스승들은 길을 알려주고 격려해 주고 가르쳐 줌으로써 무엇보다도 귀중한 안내를 해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들 각자의 마음으로부터 더러운 성향들을 제거하는 과업은 우리 자신에게 그대로 남겨지게 된다.
최초의 설법
이제 부처님이 이시파타나에서 설하신 가르침이 무엇이었던가를 명상해 보도록 하자.
부처님은 첫 설법에서 성스러운 네 가지 진리[四聖帝]를 선언하셨다. 첫번째 성스러운 진리인 둑카(dukkha), 즉 괴로움[苦]의 성스러운 진리[苦聖제]에 대해 설명해 본다면, 부처님은 반복되는 태어남[生], 늙음[老], 병듦[病], 죽음[死], 비탄, 슬픔, 절망 속에 분명히 들어 있는 괴로움을 지적하신다. 부처님은 그 밖에도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또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상황 속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음으로 해서 흔히 불행을 겪게 된다고 하셨다. 또한 이러한 형태의 괴로움들 외에도 우리의 전 실재(being), 우리가 나 라고 착각하고 있는 마음과 몸[名色]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죽어 가게 되는 현실로부터 비롯되는 원초적인 불만족성 때문에 우리는 또한 둑카(dukkha)인 것이라고 부처님은 천명하셨다.
두 번째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蹄]를 가르침에 있어 부처님은 고의 발생이 갈애(渴愛:tanha)로 인해 일어난다는 것, 즉 서로 의존하여 생기하는 연기법에 따라 재생은 갈애로 인해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그렇다면 갈애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우리는 어디에서 갈애를 찾아내야 할까? 갈애는 즐거움을 줄 만한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 생각[法] 들을 갈망한다[欲愛]. 그런가 하면 또 생(生) 자체에 대한 지극히 본원적인 욕망도 있으며[有愛],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자기(self) 소멸에의 갈망도 있다[無有愛].
이와 같은 갈애들은 수행자 스스로 발견하고 관찰할 수 있는 것이므로 갈애가 일어날 때마다 어떤 감관의 문으로도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가르침이다[滅聖제]. 괴로움은 갈애를 버림으로써 멈추게 된다. 모든 욕망의 흔적까지도 다 제거시킴으로써 완전히 열정이 사라진 고의 소멸 상태, 열반(涅般)이 있게 된다.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괴로움의 원인을 멸진시키는 길,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이다[道聖제]. 팔정도를 걷는다는 것은 갈애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뜻이며 갈애의 원인은 바로 이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 속에 들어 있다. 우리가 지금 고찰하고 있는 이 최초의 법문에서, 부처님의 길은 감각적 쾌락과 고행이란 두 극단 사이에서 중도를 걷는 길임을 강조하신다. 다섯 수행자들이 오랫동안 고행에만 몰두해 왔었음을 아셨던 때문이다.
팔정도의 여덟 단계는 세 개의 그룹으로 구분될 수 있다. 올바른 견해[正見]와 올바른 생각[正思]으로 닦아야 할 지혜[慧] 부분. 다음은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위[正業], 올바른 생활 수단[正命]으로 이루어진 도덕성[戒] 부분. 그리고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마음챙김[正念], 올바른 선정[正定]으로 닦아야 하는 정신 집중[定]의 부분이 그것이다.
이제 여기 사르나트에서 팔정도를 닦는 정진에 들어가 보자.
우리는 먼저 지혜[慧] 부분인 올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생각[正思]을 닦기 위해 처음에는 이론적으로, 그리고 나서는 직접적인 통찰로 용맹정진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께서는 많은 설법을 통하여 올바른 생각(正思)이란 감각적 쾌락을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져야 하고 악의와 잔인성을 떠난 생각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셨다.
여러 해에 걸쳐 가지각색의 사람들에게 법(法)을 가르치는 동안 부처님은 줄곧 올바른 견해[正見] 또는 올바른 이해가 내포하고 있는 여러 측면들을 설하셨다. 이곳 사르나트의 공원에 앉아 있는 동안 우리는 정견에 관한 중요한 네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보게된다.
첫째, 우리의 몸과 말과 마음으로 하는 모든 행위들은 반드시 그 행위 뒤에 깔린 의도의 질(質)에 따라 선하거나 혹은 악하거나 하다. 그런데 반복되는 재생의 굴레 속에서 선한 행위들은 조만간 즐거운 결과들을 가져오며, 반면에 악한 행위들은 언젠가 불쾌한 결과들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업(業)의 법칙이다.
둘째, 우리가 나 자신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따지고 보면, 마음과 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바에 따르면 마음은 네 가지 집합체[四蘊]의 가합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의식[識], 느낌[受], 지각[想], 그리고 정신적 형성력[行]이며 그 중에서 가장 주된 것은 의도인 형성력이다.
세째, 나 자신 의 이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현상들은 극히 단명하고 무상한 것이다(anicca). 즉 그것들은 결코 항구적인 만족을 줄 수가 없으며(dukkha),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영원히 지속되는 존재(being) 또는 자아(self) 로 치부될 수도 없다(anatta).
네째, 연기법을 통해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과 존재들은 여러 다른 요인들에 의해 조건지어져 있고 그것들에 의존하여 있다.
팔정도의 두 번째 부분은 도덕성을 닦는 계(sila)이다.
우리는 단지 성지 순례를 하는 동안이나 명상 코스에 참여하고 있을 때만이 아니라, 한 치의 빈틈이 없이 항상 계를 지켜야 한다. 그것은 (3)올바른 말[正語:거짓말 하지 않는 것] (4)올바른 행위[正業:살생하거나, 훔치거나, 성적인 부정에 빠지지 않는 것] (5)올바른 생활 수단[正命:다른 생명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생활 수단]에 충실함을 뜻한다. 팔정도의 이 도덕적 발전 과정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서로 인연을 맺으며 살아나가는 과정에 있어 우리 삶의 능동적 측면들과 관계가 있다. 다른 생명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도록 하고 해탈에 필요한 선정과 지혜를 계발하기 위해 입과 몸으로 하는 모든 행위를 삼가야 함은 물론이고 올바른 생활 수단 강구에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엄격한 계 지킴을 마음의 바탕에 깔고 난 다음 (6)명상을 위한 올바른 노력[正精進] (7)올바른 마음챙김[(正念]) (8)올바른 선정[正定]을 우리는 이제 사르나트에서 머물고 있는 이 시간을 수행해 보는 기회로 삼아 보자. 이들 선정[定] 부분을 이루는 세 도정들(steps)의 뒷받침 없이는 팔정도의 지혜[慧]면은 단지 지적인 것으로만 남고 말 것이며 완전한 해탈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올바른 노력은 마음을 정(定)에 머물게 하기 위해 선을 계발하고 악을 행하지 않으려는 불굴의 노력 정진이다. 올바른 마음챙김[正念]이란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집합체인, 오온을 아무런 망상없이 있는 그대로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즉 몸[色], 느낌[受], 지각[想], 정신적 형성력[行], 의식[識]들이 모두 얼마나 무상하고 불만족스러운가 하는 것을 그리고 항구적인 실체나 자아를 가지고 있지 못한가를 보는 것이다. 올바른 선정[正定]이란 일시적으로 들뜸, 의심, 감각적 욕망, 악의, 나태의 장애들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나 차분히 한곳에 집중되어진 마음이다. 부처님은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다른 많은 기술과 함께 수식관(數息觀), 아나파나(anapana)를 가르치셨다. 정(定)을 이룬 마음은 괴로움의 원인들로부터 마음을 해탈시켜 줄 지혜인 반야(panna)를 개발하기 위한 주요한 수단인 것이다.
우리는 방금 부처님께서 당신이 발견하신 궁극적 진리를 다른 이들에게 최초로 전하신 바로 이곳에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고찰해 보았고 팔정도도 간략히 분석해 보았다.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 이 진리들을 실제로 이해하기 위하여 마음을 단련시켜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 성지 순례를 한다는 것은 앞에서 간단하게나마 요점을 말한 세간적인 팔정도의 요소들이 흐름에 들어서는 예류의 순간에 출세간적 도(道)로 변화될 때까지 팔정도를 닦아 나가는 기나긴 과업에 더욱 더 몸 바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설법
부처님께서 당신의 두 번째 법문인 무아상경(無我相經)을 가르치셨을 때 다섯 제자들 은 모두 깨달음의 첫단계인 예류과를 성취하였다. 마음과 몸[名色]에는 자아가 없다는 [無我性]것을 가르치는 이 법문을 듣자 그들은 그 때까지 남아 있던 마음의 더러움들[漏:번뇌]을 곧바로 벗어던질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부처님께선 몸을 하나의 온(蘊)으로 이름 붙이시고 마음은 네 개의 온(蘊)들 - 느낌[受], 지각[想], 정신 활동[行], 의식[識]으로 나누셨다. 나 라는 것은 이 오온(五蘊)들의 가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밖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이 몸이나 혹은 마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측면이 나 일 것이라는 뿌리깊은 망상을 가지고 있다. 나 라고 하는 이 견해의 중심은 통제의 주체자라는 개념이며, 부처님께서는 무아상경(無我相經)에서 명백히 그 사상이 정확하게 맞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셨다.
부처님께선 만약 내 가 나의 마음이나 몸을 내가 바라는 대로 있게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마음과 몸을 나 자신의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신다. 내 가 몸에 병들기를 바라거나, 원하거나, 또는 그렇지 않거나 상관 없이 몸은 병에 걸리곤 한다. 단순한 바람만 가지고는 이 현실을 바꾸어 놓을 수가 없다. 또한 이 나 는 마음이 하는 짓도 순전한 의지의 발동으로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다.
이 경의 다음 부분은 비구들과의 대화이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일체의 온(蘊)들은 무상하고, 본래 변하기 쉬운 성질이어서 항구적인 만족을 줄 수 없음을 보라고 권하셨다. 이에 대해 비구들은 온(蘊)들이 궁극적으로 나 라거나 나의 것 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이치에 합당하지도, 그럴싸하지도 않다는 점에 동의하였다
부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미래의 태어남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든 관심들을 벗어 던지기를 바라신다. 따라서 경은 매우 강력한 어조로 계속된다. 성스러운 제자들은 과거이거나 현재이거나 안이거나 밖이거나 조악하거나 미세하거나 모든 몸[色], 느낌[受] 지각[想], 정신 활동[行], 의식[識]에 완전히 염증을 내고 혐오를 느낄 때라야만이 해탈하게 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이 설법이 끝났을 때 다섯 비구들은 아라한위를 얻게 되었다. 이 법문은 그들이 나는....이다 라는 망상을 마음의 모든 차원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 자신에 대한 애착을 벗어 던지는 작업은 복잡하고 어렵고 긴 기간을 요하는 일인 만큼 우리는 결코 이 일을 성급하게 마치겠다는 식의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부처님이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최초로 선포하시고 합리적으로 설명하셨던 이곳 사르나트에서 우리의 시간을 잘 활용해 보도록 하자. 오온(五蘊)들을 주제로 삼아 명상해 보고 우리 스스로에게 나는 있다". 그리고 나는 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자만심의 깊은 뿌리를 일깨워주도록 하자. 그리고 오온(五蘊)들의 전적으로 무상한 성질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관념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알아 보기 위해 이제부터 우리 마음과 몸을 분석해 보도록 하자.
사받티(舍衛城)와 라자가하(王舍城)에서
그로부터 45년 동안을 끊임없이, 부처님께서는 다른 중생들에게 그들의 불행을 어떻게 끝마치게 할 수 있는지를, 어떻게 생사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지를 가르치며 보내셨다. 비구 교단과 비구니 교단은 각 교단에 율(律)의 필요성이 생길 때마다 부처님께서 정해 주신 계율을 따름으로써 흥성해지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또한 갠지스 강 유역 도시와 촌락에서 일하며 살아 가는 많은 남녀 속인 제자들도 거느리셨다.
우리 순례자의 발길은 또한 경전에 자주 나오는 사받티[舍衛城:사위성]와 라자가하[王舍城:왕사성]에 이르러 그 걸음을 멈추게 된다. 사받티는 부처님의 2대 속가 제자들인 남신도 아나타핀디카와 여신도 비사카모(母)의 고향이다. 사받티는 또 파세나디왕의 코살라국 수도이기도 했는데 이곳에서 부처님은 여러 설법을 통해 재가자들이 어떻게 불법을 수행할 수 있는가를 가르치셨었다. 부처님은 25번의 우안거(雨安居)를 사받티에서 보내셨는데 대부분 아나타핀디카가 부처님과 비구 교단을 위해 제따와나(祈園林:기원림)에 지은 승원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그리고 얼마간은 비사카모(母)의 정사(東園精舍;鹿子母講堂)에서 지내셨다.
오늘날 사받티에 남아 있는 유적은 매우 광대하다. 우람한 사라나무들이 들어선 아름다운 정원 안에는 옛 승원 건물들의 잔해가 있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그처럼 여러 번 우안거를 보내신 부처님의 사저(私邸) 향실(香室, 香殿)의 터이다. 지금은 유적만 남은 사받티 시 자체는 이곳으로부터 몇 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으며 우리는 부처님께서 그분 특유의 쌍신변(雙身變)을 나투셨던 그 문을 지금도 볼 수 있다.
라자가하와 그 근교는 바로 부처님 생전에 빔비사라왕과 왕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자타사투 그리고 저 사악한 데바닫타와 관련되어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의 주 무대이다. 우리는 또 데바닫타가 큰 돌을 아래로 던져 부처님을 감히 시해하려고 했었던 영취산(靈鷲山)도 찾아가 볼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의사 지바카네의 망고숲까지도 가 볼 수 있는데 그곳은 부처님의 많은 법문들이 설해진 곳이다.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과 부처님의 비구들을 위해 건립했던 대승원, 죽림정사 한복판의 대나무숲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다시 발굴된 장소이며, 거기에 있는 옛 축조물들의 유적 주변에는 지금 공원이 세워져 있다.
잠깐 곁길로 빠졌던 흥미로운 두 군데 방문을 끝내고 부처님께서 신심 깊은 신봉자들에게 가장 핵심적인 네 개의 장소를 방문하도록 권하신 그 편력의 길로 되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쿠시나라에서
부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순례를 권하셨던 마지막 장소는 쿠시나라로, 그곳은 부처님께서 대반열반(大般涅槃; Mahaparinibbana)을 이루신 땅이다. 이곳은 현재 인도주 우타르 프라데시에 있는 조그만 읍으로 여기서 우리는 거의 다 옛 승원 건물들의 주춧돌일 법한 유적 사이를 걸어 볼 수 있다.
열반사(涅槃寺)에 누워 계신 금빛 부처님상에 우리 존경의 염을 바치자. 세존의 상은 반열반의 자세로 오른편을 땅에 대고 누워 계시며 그것은 현재의 절 구내를 거의 다 채우고 있다. 열반사 바로 뒤로 보이는 수백년 묵은 옛 탑은 1920년대에 몇몇의 버마(미얀마) 불교도들이 보수했다고 하는 탑이다. 아마도 이 두 개의 건조물은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의 온갖 고(苦)를 완전히 뒤로 하고 영원히 열반에 드신 바로 그 실제 장소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1 내지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마모되어 낮으막해진 또 다른 옛 탑이 부처님 다비를 올린 곳으로 여겨지는 지점에 서 있다.
부처님께서 대열반을 이루시기 전까지의 쿠시나라는 대수롭지 않은 한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아난다존자는 세존께 이같이 보잘것 없고 황량한 고장을 떠나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이 많이 모인 대처에서 열반에 드실 것을 간청드렸다. 그러나 부처님께선 바로 이 작은 도시가 아주 먼 옛날 전륜성왕(轉輪聖王) 마하수다사나 대제국 시대에 번영을 누린 수도였음을 설명해 주시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은 아난다로 하여금 그 지방의 말라족 왕족들을 불러오게 하여 세존께 마지막 경배를 하도록 하시므로 그들은 친족들과 시종들을 데리고 와서 그렇게 하였다. 이 때 수받다라는 이름의 한 떠돌이 수행자가 부처님께 의문점을 여쭈어 보았고 부처님의 마지막 비구 제자로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되었다.
다음,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이 기나긴 세월에 걸쳐 가르치신 교법[法]과 계율[戒]은 당신께서 입멸하신 다음 그들의 스승으로 충분할 것이라며, 최후의 가르침을 당부하셨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비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붓다[佛]와 법[法] 내지 승가[僧]에 그 어떤 의심이나 의혹도 없음을 확인하셨다. 그분께서 제자들에게(그리고 오늘의 우리들에게) 최후로 남기신 말씀은 바로 나 와 나의 것 에 대해 털끝 만한 집착도 남지 않을 때까지 존재의 궁극적인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의 힘으로 마음 닦기에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부탁이셨다.
자, 이제 우리 명상을 위해 이곳의 한 조용한 모퉁이를 골라 보도록 하자. 그곳은 열반사의 안이라도 좋고 다비탑의 옆이라도 괜찮다. 우리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부처님 최후의 가르침 - 조건지워지고 가합된 모든 것은 다 썩어져 분해되게 마련이다. 마음챙겨 부지런히 정진하여 할 일을 다해 마치도록하라. - 하신 교훈을 깊이깊이 되새겨 보자. 이 사바세계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변하기 쉽고 조금도 믿을 것이 못됨을 우리는 직접 체험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를 행하기 위해 강한 훈련을 쌓음으로써 우리 자신들에 대한 집착을 버릴 만큼, 우리가 감각의 쾌락에 대한 모든 관심을 그만 둘 만큼,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를 갈구하는 욕망을 내던질 만큼, 그렇게 철저한 수행을 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마음챙김 공부를 통해 자신의 마음과 몸을 있는 그대로 바로 아는 수행을 한다면 우리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 길을 실천하는 셈이 될 것이다.
마지막 교훈을 남기신 다음 부처님은 사선정(四禪定)과 사무색정(四無色定)에 차례로 드신 다음 모든 정신 활동을 정지하기에 이르러셨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은 역순(逆順)으로 초선정(初禪定)까지 다시 내려오셨다. 부처님은(初禪定)에서 다시 제4선정(四禪定)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세존(Bhagava)께선 네 번째 선정에서 나오신 후 그 즉시 생을 마감하고 반열반(般涅槃:parinipbana)을 실현하심으로써 입멸 이후 다시는 재생함이 없게 되었다(장부경, p.290).
아니룻다 존자가 그 때 부처님 가까이에 있으면서 비구들에게 이와 같은 선정의 단계들을 거치신는 부처님의 진행을 설명해 주었다.
말라족 왕족들은 열반의 통고를 받고 부처님의 다비에 쓸 특별한 장비들을 마련하였고 부처님의 유해를 6일 동안 공경하였다. 수많은 최고급 옷감으로 겹겹이 유해를 둘러감고 향목(香木)들을 고여 놓은 거대한 다비나무 더미 위에 부처님의 유해를 모셔 놓았다. 그런데 모든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 되었는데도 그들이 불을 붙이려 했을 때 웬일인지 불이 붙지 않았다. 그 때 마하가섭 존자가 많은 비구 대중들과 함께 도착하였다. 그들이 부처님의 시신에 마지막 예배를 드리자 다비나무 더미는 저절로 확 불타 올라 뼈조각들과 치아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타버렸다.
인도 대륙의 많은 곳에서 부처님의 신봉자들이 도착하였고, 모든 이들은 공경할 사리의 배당을 원하였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의 유걸은 여덟 부분으로 나뉘어졌고 나중에 곳곳에 그것들을 모시기 위해 탑들이 세워졌던 것이다. 그 탑 가운데 하나는 쿠시나라에 세워졌다고 하지만 여기 보이는 고고학적인 유적들 중에 바로 그 탑이라고 명확하게 확인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맺는 말
마음으로 찾아나선 이 성지 순례에 동참하신 여러 불자들이시여, 부디 신심을 충만시켜 부처님께서 태어나시고, 깨달음을 이루시고, 처음으로 법을 펴시고, 반열반에 드신 장소를 정말 방문하게 되어지이다!
모든 중생들이 성스러운 네 가지 진리(사성제)를 체득하고 마침내 괴로움[苦]의 소멸을 이룰 수 있게 되기를.
* 원전 인용에 대한 주(註)
장부경에서의 인용문들은 버마장경협회(Burma Pitaka Association)의 영어 번역본인 장부경의 열 개의 경들, 부처님의 긴 법문들(랭군 1984)에서 인용한 것이다. 다른 모든 출전(出典)들은 런던의 빨-리경전회(Pali Text Society)에서 발행한 영어 번역본들이다.
* 저자에 관하여
수잔 엘바움 주틸라는 1945년 뉴욕시에서 태어났고 미시간 대학에서 도서관학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서히말라야의 달후제고원 피서지에서 남편 발비라 수잔 주틸라와 함께 살고 있다. 두 사람은 버마(미얀마)의 고(故) 사야기 우바킨의 전통적 방식에 따른 위빳사나 명상의 장기 견습자들이다. 주틸라 씨의 이전 BPS 간행물에는 통찰에 관한 연구(Investigation for Insight) Wheel No.301/302와 깨달은 비구니들
로부터 받은 영감(Inspiration from Enlightened Nuns) Wheel No.349/35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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