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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정근(精勤)

정 근精勤


와뽀 스님 지음

재연 스님 옮김

EARNESTNESS

VAPPO THERA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1981. Bodhi Leaves No. 3)


  ▲ 일러두기


* 이 책에 나오는 경(經)의 출전은 영국빠알리성전협회(PTS)    에서 간행한 로마자 본 빠알리경임.

* 로마자 빠알리어는 이탤릭체로 표기함.

* 각주는 모두 역주(譯註)임.


정 근(精勤)1)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간곡히 이르노라. 모든 형성된 것은 영원하지 않다. 방일하지 말고 힘써 정진하라.”(Handa d?ni bhikkhave ?mantay?mi vo: Vayadhamm? sa?kh?r?, appam?dena samp?deth? ti)2)


이것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며 남기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우리를 거듭 몸받게 만드는 탐·진·치와의 싸움을 멈추지 말고 기어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촉구하시는 당부이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모든 악을 극복하고 선근을 키울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확실하게 보증해 주시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면 참으로 흐뭇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악을 이겨낼 때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되고 또 마음속에 선함을 일으키면 역시 기쁘고 행복해집니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삿되고 해로운 일들을 버리고 그대들 마음속에 선함을 일으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아예 할 수 없는 일이었다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노력을 쏟아 정진하라고 이르지 않았을 것이며 “나는 정진을 가르치는 스승이다”라는 말씀도 아니 하셨을 것입니다.


용맹으로 훈련을 쌓고, 결의를 다지며, 분발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뒷걸음질일랑 꿈도 꾸지 말고, 불퇴전의 열의와 인내심을 지니며, 마음을 챙기고, 정견을 계발하며 밤낮없이 정근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부처님을 보고 혐오하는 자, 제압자, 경멸하는 자, 그 무엇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자 등으로 비난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실로 그 무엇도 아랑곳 하지 않는 분이 부처님이다. 여래께서는 모든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관념들에 대해 조금도 연연하지 않으시니까.”

“부처님은 애착 없으신 분이다. 그분은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관념 따위에 대한 애착을 다 부숴버렸으니까.”


“부처님은 ‘하지 말라’고 가르치시는 분이다. 그분은 생각, 말, 행동으로 악업을 짓지 말라고 가르치시니까.”

“부처님은 소멸을 가르치시는 분이다. 탐욕과 성내는 마음 그리고 미혹의 소멸을.”

“부처님은 경멸하시는 분이다. 생각과 말, 행위로 하는 모든 악행을 경멸하니까.”

“부처님은 혐오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탐욕과 악의, 무지 그리고 모든 불건전한 것들을 혐오하니까.”


“부처님은 제압자이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모든 악행과 해로운 것들을 제압하라고, 마음과 입과 몸으로 짓는 모든 악행을 제압하라고 가르치시니까.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완전히 제압하신 분을 우리는 제압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부처님은 추방당한 분이다. 윤회로부터 추방당하여 다시는 몸을 받지 않으니까.”

『증지부』Ⅳ권 173-176쪽


“정근은 불사(不死 열반)로 가는 길


방일(放逸)은 곧 죽음에 이르는 길,

정근하는 자, 불사(不死)의 경지에 이를 것이며

방일하는 자, 이미 죽은 것과 같도다.”


(Appam?do amatapada?, pam?do maccuno pada? appamatt? na m?yanti, ye pamatt? yatha mat?)


                              『법구경』21게송


“허다한 스님과 재가불자들이 증득한 경지, 어찌 나라고 얻지 못할까 보냐? 건강하고 신심에 충만한 이 몸, 위선자도, 난척하는 사람도, 허풍쟁이도 아니다. 내겐 의지력이 있고, 모든 감각대상들은 무상하고, 고(苦)에 매인 것이며, 종양, 가시, 고통, 짐, 적(敵), 장애이며, 자성이 없는 것임을 나는 안다. 어찌 나라고 해탈과 열반을 희구하지 못할까 보냐?”


「마하왓챠곳따 경(Mah?vacchagotta Sutta)」에서 부처님은 “출가 수행자들만 해탈을 성취한 것은 아니다. 세속에 살면서도 마음속의 족쇄와 장애를 이기고 고결하게 살아가는 재가불자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 세 번째 성위(聖位)인 불래(不來 an?g?min)의 과(果)를 성취한 이들이 많았느니라. 그들은 두 번 다시 이 사바세계에 돌아올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3)


물질만능의 시대를 맞고 있는 바로 지금, 이 같은 부처님의 말씀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커다란 격려와 용기를 줍니다.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자동차가 달리는 현대문명 속에서는 아무리 원할지라도 마음공부를 할 수 있는, 즉 수행할 수 있는 시간과 여가를 마련할 수 없다는 잘못된 생각 속에 고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에게 커다란 격려와 용기를 주는 법음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거듭거듭 보장해 주십니다.


“그대들도 뜻을 세울 수 있고 행동에 옮길 수 있고 정진으로 그대들의 품성을 바꿀 수 있으며 마침내 해탈할 수 있느니라.”


해내겠노라고 마음먹은 사람은 이미 반쯤 목표에 다가선 사람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니까요. 의지는 모든 일의 근본입니다. 악행과 고(苦)의 근본일 뿐만 아니라 덕행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불선한 업을 지으려는 의도를 없애라고 가르치십니다. “의욕은 의욕으로써 극복되나니”, 성스러운 경지를 성취하겠다는 의욕으로써 그 경지를 이룬 뒤에야 성스러워지겠다는 의욕 자체가 가라앉게 되는 것입니다.


「이디빠다 상윳따(신통 상응)」4)의 한 경에서 운나바(U???bha)라는 바라문이 아난다 존자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수행자 고타마께서 가르치신 성스러운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고자 하는 의욕5)을 버리기 위해 세존께 귀의하여 성스러운 삶을 일구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욕을 버릴 수 있는 방법이나 길이 있을까요?”

“바라문이여, 실로 그런 방법이, 길이 있습니다.”

“아난다 스님, 의욕을 버릴 수 있는 방법이나 길이 무엇입니까?”


“어떤 수행자가 신족[神通具足]을 성취하기 위한 네 가지 정진, 즉 의욕삼매(意慾三昧 Chanda-sam?dhi), 정진삼매(精進三昧 Viriya-sam?dhi), 심삼매(心三昧 Citta-sam?dhi), 그리고 사유삼매(思惟三昧 V?ma?s?-

sam?dhi)를 닦는다면 그것이 곧 의욕을 버리는 방법이며 길이 됩니다.”


“아난다 스님, 그렇다면 거기에는 끝없는 의욕이 있을 뿐 의욕의 소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의욕으로 의욕을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라문이여,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습니다. 뜻대로 대답해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처음 당신은 ‘절에 가야겠다’는 의욕이 일어났고, 여기 왔을 때 처음의 그 의욕은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스님.”


“성스럽고, 탐욕에서 벗어나 완성을 이룬 아라한, 해야 할 일을 마쳤으며 짐을 벗어 버리고, 완전한 지혜를 통하여 해탈을 성취하신 성자도 그와 같습니다. 그분이 아라한과를 얻고자 하여 가지고 있던 의욕(chanda)과 정진(viriya), 마음(citta), 사유(v?ma?s?) 등은 아라한과를 증득하자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바라문이여, 여기 의욕에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난다 스님, 그러하다면 실로 거기에는 의욕의 끝이 있습니다. 결코 끝이 없는 게 아닙니다.”


“의도(cetan?)를 통해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을 행하게 되는 것이니, 나는 의도가 곧 업(kamma)이라고 말하노라”6)고 부처님께서는 밝히셨습니다. 의도, 즉 마음먹는 것이 곧 행위[業]이며, 일단 마음먹은 것은 그 누구도 없던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정신능력을 높이고 계발하고자 열심히 정진하는 자만이 대다수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진실을 사랑하면 진실해지고, 속된 것을 사랑하면 속물이 되리.”

개개인의 신념은 자신의 깊숙한 속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바가 곧 자신이 되며, 다시 그러한 자신을 그는 사랑합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믿고 그 신념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모든 생각은 그 생각의 대상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알고 행하는 사람은 바른 이해[正見],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집중[正定]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팔정도(八正道)를 따름으로써 이생에, 아니면 다음 생에 또는 미래의 어느 생에 열반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팔정도에 귀의하고 그 안에서 최상의 치유법을 찾아 전심전력 정진하십시오. 마음의 평화가 영원한 행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진리를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내면의 경험으로 체득하여 아는 일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실천하는 것이니’ 실천되지 않는 앎은 참된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팔정도를 삶의 지침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나 떡맛을 제대로 알려면 먹어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참된 불자(佛子)들은 바깥에 나타나거나 내면에 일어나는 모든 사바세계의 현상을 바로 알고자, 즉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현상들이 조건 따라 생겨나 사라지는 것임을 꿰뚫어 보고자 노력하면서, 지혜를 얻기 위해 밤낮없이 정진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드높고 거룩한 자유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자신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흘러가는 건전한 생각들과 건전하지 못한 생각들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그는 늘 성성하게 깨어 있고, 바른 수단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마약이나 흥분제 등 취하게 하는 약물이나 술을 삼가고,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쯤은 오후에 음식을 먹지 않고, 조용한 삶을 삽니다. 거친 말을 쓰지 않으며 다투는 일을 삼가고, 마음속에 일어나는 좋지 못한 생각을 잘 다스려 가라앉힙니다. 모욕을 당해도 흔들림 없이 한결같은 마음을 지키며, 남을 비판한다는 것이 결국은 자신도 해치는 일임을 알기에 일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불자는 자신의 생각과 말, 행동 모두를 언제나 분명히 알고 있으며,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항상 알맞은 말만을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자는 자신의 안녕과 남들의 안녕, 그리고 온 세상의 복락을 위해 살아갑니다.


비록 온갖 무지와 탐욕, 증오와 미혹에 쌓인 것이 인간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바로 친절, 자비, 연민, 함께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의 끈이 그것입니다. 그 끈은 우리를 자연계 속에서 살아가는 다 같은 존재로서 한데 묶어줍니다. 최상의 지혜를 얻고 깨달음을 이루어 열반을 성취하는 일이 인간의 궁극적 목표라는 것, 필요조건들을 갖추기만 하면 누구라도 그 목표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은 하나의 허황된 꿈이 아니라 모든 선각자들이 선포한 진리입니다.


재가불자이거나 출가 수행인이거나 간에 바르게 살지 않는 사람은 해탈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스러운 팔정도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고 성스러운 목표인 열반을 틀림없이 증득하게 됩니다. 성스러운 팔정도를 점진적으로 닦아가다 보면 그 길은 세속을 벗어나 출세간의 세계에 이르고 이를 닦은 수행자는 속인의 수준을 넘어 초인의 경지에 이릅니다. 그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완성을 이루신 분이 곧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깨달음과 해탈을 향해 정진 노력할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세기, 어떤 특정한 시대에만 깨달음이 가능하고 해탈이 얻어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거기에는 세기나 시대의 제한이 없습니다. 누구든 발심하여 팔정도를 닦고, 불?법?승 삼보를 일심으로 염(念)하며, 계행(戒行)과 선정력(禪定力)의 향상을 기뻐한다면 해탈의 성취라는 최상의 목표가 달성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밝히신 진리는 이렇듯 어떤 특정한 시대에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열반으로 이끌어주는, 당장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다만 지혜로운 이들만이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 분명히 알고 실현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탐욕에 끄달리고, 증오에 끓고, 미혹에 눈멀어, 마음이 덫에 걸린 인간은 제 자신의 파멸이나 타인의 파멸, 그리고 자타 모두의 파멸을 향해 가고 있나니, 끝내 정신적 아픔과 슬픔을 면치 못하리라.”


그러나 탐욕과 증오, 미혹을 없애는 순간 모든 정신적 아픔과 슬픔, 고통이 부수어지니 그는 이제 ‘영원[不死]’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곧 성스러운 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열반으로 이끄는, 시간을 초월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진리이니, 오직 지혜로운 이들만이 체험을 통해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불 · 법 · 승 삼보에 대한 열렬한 신심으로 충만한 수행자가 있는 한, 그런 수행자들이 모여 조화로움 속에 살고 있는 한, 팔정도를 따라 수행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며 선행을 증장하고 게으름을 아주 멀리 하는 수행자가 있는 한, 만인의 진리인 불법(佛法)은 지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만인의 복락을 위해서 정법(正法)이 지속되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탈을 쓴 마구니들이 세도를 부리게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 속에는 의도가 깔려 있는데 그 의도가 우리의 미래뿐만 아니라 운명 또한 결정짓습니다. 모든 진리를 바로 알고 오직 진리만을 알고자 하는 사람만이 정법이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합니다. 한편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사견(邪見)은 순식간에 정법을 망쳐버릴 것입니다.


진리를 향해가다 보면 하나의 크나큰 장애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항상 진리를 가로막는, 미혹이라는 장애입니다. 정법의 가장 큰 적이 흔히들 의심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가슴은 대단한 열정으로 뜨겁지만 지혜가 부족한 사람, 오직 자기방식만 고집하고 안주하면서 궤변만 늘어놓는 소위 머리 좋은 사람, 자신의 의견은 말하기 겁내며 그저 학교에서 배운대로 전통과 신앙을 맹목적으로 고수하려는 경건파, 그리고 마음이 편협한 광신자들-이들이야말로 진정 진리의 적입니다.


손에 든 진리의 횃불을 꺼뜨리지 않고 군중 속을 뚫고 나가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해탈을 향한 길은 이미 분명하게 제시되었는데도, 이 시대에 마음의 해탈을 이룩한 사람이 극히 적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팔정도의 길을 밟지 않기 때문이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글쎄요, 이 세상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끊임없이 귀에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놓아라, 놓아버려라!’고 하는 따분한 노래 아닙니까?”

“진리여, 그대는 왜 미리 나타나 살 날이 아직도 먼 우리를 괴롭히며 고민거리를 안겨줍니까?”


아무 분별도 못하는 무명 중생의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따분함을 느끼는 바로 그 때 그 자신의 마음을 깊이 탐구해 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세상 사는 알량한 꾀에 치어 제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명확하고 분명히 꿰뚫어 볼 수 있게 할 높은 정신력을 계발하고픈 의욕을 몽땅 뭉개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고귀한 제자는 이 세상을 보되, 실수들로 빚어진 하나의 미로로, 공포의 사막으로, 파렴치한 행위들이 고여 있는 늪, 야수들의 서식처, 불운의 땅, 슬픔의 원천, 고뇌의 바다, 거짓 기쁨, 끝없는 고통, 욕심과 증오와 미혹이 한없이 난무하는 곳, 가실 길 없는 갈증, 잔치 자리에 나간 해골, 금방 눈물을 몰고 올 웃음, 역겨운 냄새, 독이 섞인 꿀물, 발을 못 붙이게 뜨거운 바닥(활활 타는 불구덩이), 신기루, 악의 소굴, 끊임없는 불화, 잔혹한 전쟁터, 죽음의 숨소리, 생존경쟁의 지옥, 끝없는 장례 행렬, 화려한 착각, 오만한 비참, 애도해야 할 행운, 껍질에 사탕발림한 쓰디쓴 약으로 가득 찬 약국으로 간주합니다.7)


이러한 까닭에 고귀한 부처님의 제자는 이 세상을 부추길 마음이 없고 벗어나려는 마음뿐입니다. 세상 안의 그 무엇도 애착가질 만한 가치가 없음을 그는 압니다. 그는 모든 신체적 현상[色]과 감각[受], 인식[想], 정신적 형성력[行], 의식[識]을 무상(無常)한 것이며, 고(苦)요,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라고 압니다. 존재를 구성하는 이들 다섯 가지 요소, 곧 오온(五蘊)을 이렇게 통찰하는 불자(佛子)는 머지않아 해탈을 얻어 지고의 행복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건대 우리가 삶을 통해 추구해야 할 유일하게 가치있는 정신적 평온, 그리고 그에 따르는 가없는 도덕적 용기를 낳게 하는 성스러운 팔정도의 실천을 어떻게 자기학대식 고행이라거나 염세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팔정도야말로 우리를 위로해 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기쁨으로 넘치고, 세속적인 미망으로부터 진실의 세계로, 끊임없는 생존경쟁의 고통으로부터 영원한 평온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 세상을 제일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망상일 뿐입니다. 웃고 있는 세상의 가면 뒤에는 단지 희희낙락과 의기양양만이 아닌, 다른 것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가면을 한번 벗겨보십시오. 거기엔 온갖 잔혹한 일들, 유아 살해, 합법을 가장한 갖가지 형태의 살인 행위, 노예제도와 농노, 절도나 강도, 노인과 의지할 곳 없는 이들 또는 재소자들에 대한 억압과 고문, 타인의 생명 경시, 피를 물처럼 흘리게 만드는 적들의 공격과 대량 학살, 잔학 행위에 재미 붙이기, 갖가지 형태의 파렴치한 행위나 성적 타락 행위, 한계를 모르는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을 그토록 환영하고 애지중지하는 대중들과는 달리, 조용히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과 중생의 삶을 이처럼 직시합니다.


“자네, 그 어머니 같다는 대자연 이야기로 날 곤혹스럽게 만들지는 말게나.”


자연에 대한 찬사로 가득한 논문을 제출한 제자에게 네겔리 교수는 말했습니다.


“만약 자연의 본성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말하듯 그렇게 자애로운 것이었다면 고양이가 그토록 잔인하게 쥐를 다루게 하지 않았을 것이며, 때까치가 그토록 지독하고 무섭게 벌레를 찍도록 만들지 않았을 걸세. 자네가 예찬하는 어머니 같은 대자연 말고 도대체 누가 그렇게 무시무시한 본능을 동물들에게 불어넣었겠나?”


“분명 자연은 인류에게 놀라운 도구들과 설비를 제공했고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쓸모가 있지만 그 어머니 같은 자연은 언제고 우리를 파괴하고 말 것일세.”

“자연에게서 온정을 구하려 하지 말게나! 온정은 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것. 우리는 자연으로 하여금 그가 가진 도구들을 우리에게 넘겨주어 쓸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되네.”


정확하게 삶의 가치를 평가하자면 이 지구상에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에 대하여 깊이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삶을 보라’라는 말이 조작한 사진처럼, 우리 마음의 눈에 보는 사람을 돌로 변하게 만드는 눈길을 가진 고르곤 머리를 드러내주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으레 삶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림자를 실체로 착각하며 달콤한 꿈과 환상으로 엮어진 도피처에 안주하여 제 스스로를 속이며 달래 보고자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물의 진상을 직시하게 되면 몸서리를 치면서 “아이구, 선생님, 제발 그런 일들은 깊이 따지지 맙시다”라고 외치며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은 허세를 부리거나 핑계를 대거나 문제를 회피함으로써 감쪽같이 자신을 속이는데, ‘자아’니 ‘영혼’이니 하며 탐구를 빙자하여 자신을 속이는 철학자들보다 한수 더 뜨고 있습니다.


땅 위나 물 속, 공중, 그 어디에서나 모든 생명체들은 삶을 위한 끝없는 투쟁으로, 영원한 생존경쟁에 얽매어 있습니다. 오죽하면 부처님께서 “서로 먹고 먹히는 일은 사바세계의 원래 모습(annamanna-kh?dik? ettha vattati)”8)이라고 하셨겠습니까.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貪, 瞋, 癡]으로 인해 인간은 남을 희생시켜 제 살길을 찾으려 속임수와 책략과 잔꾀로 이웃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마치 카인이 그랬듯이 동기간을 약탈하고 종으로 삼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생존경쟁은 더욱 살벌해지며 잔인한 만행을 저지르는 소리들, 죽음의 공포 앞에 내지르는 고통스러운 비명과 끔찍스러운 단말마의 절규가 하늘을 향해 원수를 갚아 달라고 울부짖습니다.


소름끼치는 범죄와 전쟁 장면들, 전염병의 대량 확산, 참화와 참혹한 불행의 현장들을 목격하며 우리는 몸서리를 칩니다.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인간의 가슴 속에서 채찍질하듯 괴롭히는 죄책감과 후회와 비난의 염(念)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죄 지은 마음이 이렇듯 괴로울 줄이야. 누구 불쌍히 여겨줄 이 없소?” 빌어 보지만 아무도 돌보아 주는 이 없습니다. 죄책감과 후회와 비난들은 죄의식 앞에서 위협적인 모습으로 변합니다. 최후의 심판 광경이 죽음의 공포로 겁에 질린 머릿속을 엄습하여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올리는 기도가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하늘로 퍼져 나가건만 아무런 대답도 오지 않습니다.


“우리 가슴에 천국이 들어앉지 않는 한

천국에 닿을 기도는 없어라.

사랑과 자비로 채워진 가슴

기도는 오직 거기서만 익을 뿐.

끝없이 생겨나는 슬픔들은

오직 그런 가슴 속에서만 가라앉으리.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 마음

부처님의 성스러운 법 가운데

흔들림 없이 자리하리라.”


꾸준히 팔정도를 따르고 정진과 인욕으로 마음을 길들이면 아무리 사악한 사람이라도 점차 마음의 자유를 얻어 최고의 완성을 이룰 수 있으며 마침내는 위없는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금 이 생에서도 최상의 행복을 준다는 말은 맞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높고 원대한 소망들을 모두 이루게 하며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덕성의 빛이 빛나도록 만듭니다. 불법(佛法)은 비록 우리의 삶이 무상하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나마 가져볼 수 있는 올바른 기대를 충족시켜 주며 거센 바람에도 흔들림 없는 깊은 평온을 가져다줍니다. 똑같은 잘못과 그로 인한 죄책감에 거듭 빠져들게 하지 않으며 서서히 모든 탐욕과 성냄, 미혹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불법은 또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안식처인 열반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모든 악과 고로부터 영원히 자유롭게 해줍니다.


선행이나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자기희생이 제 아무리 거창하고 훌륭한 것이라 해도 결국은 그 또한 무상한 것이어서 그것만으로는 고뇌의 괴로움으로부터 우리를 영원히 지켜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밝히신 사성제의 수행 공덕은 변할 수도 없고 부서져 없어질 수도 없고 영원할 것입니다.


사성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잘 이해된 시대를 사는 이들은 가장 복된 세대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대가 우리에게 마련해 주는 이 귀중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며, 발심하여 사성제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 이해와 실천이 하나가 되는 깨달음의 경지를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며 “모든 형성된 것은 영원하지 않다. 방일하지 말고 힘써 정진하라” 하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사(不死)의 경지를 이루었어라.

열심히 정진하는 이는

오늘에도 이 경지 이룰 수 있으나

노력 없이는 그 누구도 거기 이르지 못하리.”

『장로니게』513게송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1) 정근(appam?da) : 게으름, 조심성 없음을 뜻하는 빠알리어 pam?da에 부정[不, 無]의 접두어 a를 붙인 단어로, 전통 한역은 불방일(不放逸)이다. 여기서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취하여 정근(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씀)으로 씀.


2) 『장부』Ⅱ권 156쪽

3) 『중부』Ⅰ권 491쪽

4)『상응부』Ⅴ권 271쪽 (Iddhip?da-sa?yutta 15, Br?hma?a-sutta)

5) 의욕(意欲 chanda) : 원문에서는 will로 되어 있었으나 이 단어의 두 가지 용례, 즉 ① 욕망, 충동, 욕구 ② 의도, 의지, 결의를 포함하는 우리말 단어와, 뒤에 나오는 Chanda-sam?dhi(漢譯은 欲情)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의욕이라고 옮김.

6)『증지부』Ⅲ권 415쪽


7)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염세주의 혹은 비관주의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앞에 이야기한 것들이 마음을 어둡게 했다면 다음과 같은 점을 상기하십시오. 즉, 달갑지 않은 상황이나 병을 치유하는 실제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꼭 해야 할 것은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붕대로 감아 슬쩍 가려두는 임시방편이 아니라 근본적인 치유를 위해서 환자는 자기 스스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너무 매정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환자에게 가해질 정신적인 충격을 고려하여 사실을 덮어두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설령 그것이 엄청난 충격일지라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는 고칠 수 없는 마음의 병입니다. 부처님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는 결국 이 고뇌에 찬 세계와 고의 원인, 고가 소멸된 경지와 그러한 목표를 향한 팔정도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8) 『상응부』Ⅴ권 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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