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출가의 길

출가의 길






                      


                      게오르게 그림 지음

                          묘주스님 옮김





Going into Homelessness


George Grimm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1988

(Bodhi Leaves No. B 114)



* 이 책은 게오르게 그림의 『부처님의 가르침 : 이성과 명상의 종교 (The Doctrine of the Buddha : The Religion of Reason and Meditation)』(1958년, 독일, 베를린, 아카데미출판사 두 번째 개정판)에서 발췌, 실라짜라 비구(Bhikkhu Sīlācāra)가 영어로 번역한 것임.


들어가는 말


이 ‘보리수 잎’은 게오르게 그림의 역작인 『부처님의 가르침 : 이성과 명상의 종교』에서 발췌한 글이다.

생전에 ‘바바리아 주에서 가장 자비로운 판사’로 소문났던 저자는 독일에서는 최초기 불자의 한 사람으로 그가 지닌 불교에 대한 깊은 신심은 마침내 불법에 대한 방대한 저술로 나타났다. 무아(無我)의 해석문제를 둘러싸고 다소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불교를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입장에서 대했던 서구의 지적 분위기 속에서, 그의 저술은 오히려 확실한 불자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불교를 그 내부로부터 체계적으로 이해하고자 시도한 뛰어난 작품으로 지금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방대한 저술 중에서 이 글을 선택한 이유는 오늘날 이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논의의 주제로 삼아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깊은 생각도 없이 성급하게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있는 ‘출가라는 승려의 삶의 방식을 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세속적인 시대에는 이 출가의 문제,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항상 점진적 수행의 첫 단계로 자리매김하셨던 중요한 걸음의 내디딤을 그냥 범상한 ‘생활유형’의 선택문제로 축소시키거나, 아니면 본질적 가치와는 무관한 문화적 인습의 하나로 경시하고 있다.


이런 세태에 대항해 저자 그림은 확실하게 말한다.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승려생활은 없어도 무방한, 법의 단순한 부속물이 아니다. 법의 핵심은 해탈 지향적이고, 이 해탈 지향적 성격 때문에 승가생활이라는 초세간적 형태의 삶의 방식이 필연적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다”고 힘 있게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속인도 깊은 신앙심으로 법을 닦고 실천할 수 있으며, 열성적인 속인이 나태한 승려를 훨씬 능가할 수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저자는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웅변적으로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지금 이 생애에서 구경해탈을 열심히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묶고 있는 가정생활이라는 속박의 끈을 포함하여 세상과의 일체의 끈을 끊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물론 그의 이런 주장은 시종 부처님의 말씀에 입각해 있다.


부처님이야말로 이런 첫 걸음을 격려하고 또 전폭적으로 지원하고자 하는 대 자비심에서 승가를 세우셨기 때문이다.


비구 보디

출가의 길


숭고한 것일수록 일반적인 이해를 얻기 어렵다. 보통 사람들의 정신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해받을 소지도 점점 더 늘어난다. 이런 원인은 제거하려 든다 해서 제거되는 것이 아니므로 그런 오해를 완전히 불식시키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장 높은 진리의 가르침들이 항상 오해를 받아왔을 뿐 아니라 조롱까지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숙명적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인류에게 전해진 것 중 가장 높은 진리인 부처님의 법이 이런 운명에 자주 처해졌고, 특히 서양 여러 나라에서 그러했다고 해서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불교가 이런 대우를 받게 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지 모르나 내 생각에는 불교를 완벽하게 실천한다는 것은 결국 사원에서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 그 중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 제도에 대해서 세속의 일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금욕 생활만이 진리에 부합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감각적 쾌락에 완전히 바쳐진 자신들의 생활방식에 대한 통렬한 질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불자임을 자처하는 서양의 ‘불자들’ 중에도 이런 불교의 금욕적 생활태도는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큰 바다 속에서도 항아리는 자기 그릇 정도 밖에 물을 담지 못한다.”는 인도의 옛 속담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자유에의 길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세속생활에서는 그 길을 온전히 밟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 길은 아주 하찮은 감각작용까지도 하나하나 깊이 관(觀)하고, 끊임없이 마음챙겨 닦아 나아가도록 요구한다. 그래야만 세속을 향한 갈망이 매우 해로운 것임을 깨닫게 되고 더 이상 어떤 집착도 일으키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감각적 인상의 끊임없는 통제가 세속생활에서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감각적 인상이 너무 많아, 그 하나하나에 지속적으로 마음챙김을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세속생활에서는 끊임없이 주시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 마음챙김을 이루어내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어쩌다 이룬다 해도 잠깐 동안일 뿐이다. 그래서 랏타빨라는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법을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가정생활을 계속하면서 가장 청정하고 결점 없는 범행(梵行)을 철저하게 실천하기는 불가능하겠습니다.”(『중부』 82경)


세속에서는 기본적 계율조차 지속적으로 지키기 어렵다.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은 매우 바쁘고 여유가 없으며, 여러 가지 걱정으로 시달린다. 항상 진리를 말하는 자일 수가 없고, 항상 정근자(精勤者)일 수가 없으며, 범행자(梵行者)일 수가 없고, 많이 독송하는 자일 수가 없으며, 많이 보시하는 자일 수가 없다.”(『중부』 99경)


세속생활에서도 가능한 한 세상과의 관계를 제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세속인연을 완전히 끊고 지낼 수는 없다. 세속을 산다는 자체가 세속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관계가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세속의 일에 얽매이게 된다. 그런 만큼 우리를 세속에 묶어놓는 족쇄를 더욱 탄탄하게 조여 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한 그 족쇄를 완전히 끊을 수 없다. 세속에서는 완전한 해탈이란 불가능하다. ‘모든 인연을 끊어낸’ 사람, 그 사람만이 완전히 해탈한 사람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세속생활을 하면서 열반에 이를 수 없다고 부처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셨던 점을 보아도 이것은 분명하다


“오, 세존이시여. 가정을 갖고 그 속박을 떠나지 않고서도 죽을 때 해탈에 이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 와짜여. 가정의 속박을 떠나지 않고 죽을 때 해탈에 이르기는 불가능하다.”(『중부』 71경)


바로 이런 연유로 부처님께서는 승가(Saṅgha)를 세우셨다. 출가생활을 위해 집을 나온 사람들이 부처님의 지도를 받아서, 이 세상을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그 위대한 목적을 향해 정진하는 성스러운 제자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따라서 해탈에 곧장 이르는 길을 밟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부처님과 법에 귀의하는 것 못지않게 선택된 사람들로 구성된 승가에도 귀의하여 삼보귀의를 완성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모든 불자들이 신심을 표할 때 쓰는 귀의례문이 다음과 같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법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


이만 하면, 승가는 돌아볼 필요도 없고 법만 옹호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분명해진다. 그들은 칼에서 날을 빼 버리는 셈이고 또 물에서 나오기도 전에 몸이 마를 수 있다고 우기는 셈이다. 부처님 말씀의 핵심도, 나아가야 할 구경(究竟)의 경지도 알지 못하므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은 “온 세상이 불타는 집과 같다. 이 불타는 집에서 자신을 빨리 구해 내는 것은 힘든다.”(『중부』 52경)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말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출가를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라고 경멸하는 투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이 불타는 집에서 벗어난 출가자들을 볼 때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자신은 그렇게 할 만한 용기가 없음을 한탄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비구나 비구니가 되어 버리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이 어떻게 남아날 수 있겠는가 라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걱정은 마치 모든 사람이 다 육신의 병이 나아버리면 이 세상에 병원이 남아나지 않을까봐 걱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존재들이 구경의 경지를 실현하게 되면 이 세상은 분명히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때 끝나는 것은 오직 고통의 세계일뿐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존속 여부에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안심해도 좋다. 그런 걱정스러운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또 일어날 수도 없을 테니까. 세상에는 스스로 출가하기는커녕 출가의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오히려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있기 때문이다.


열성스런 구도자일지라도 떨쳐버리기 힘든 망설임에 시달릴 수 있다. 자신이 출가함으로써 초래되는, 이른바 ‘의무의 충돌’, 즉 자기 가족, 특히 아내나 자식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망설이게 될 수밖에 없다. 부처님은 부모로부터 허락을 얻지 못한 사람이 비구계나 비구니계를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영원한 해탈을 얻기 위해 아내와 자식 곁을 떠나는 행위는 막지 않으셨다. 이런 입장은 다음 일화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세존께서 사왓티 성 아나타삔디까의 제타 동산에 머물고 계실 때, 상가마지 존자가 세존을 뵙기 위해 사왓티로 왔다. 소식을 들은 존자의 옛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제타 동산으로 쫓아왔다. 이때 상가마지 존자는 오후 시간을 선정에 보내려고 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아내가 다가가서 말했다.

“이봐요 사문이시여, 이 아이는 당신의 어린 아들이요. 나 혼자 키우기는 너무 힘들어요!”

이 말을 듣고도 상가마지 존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두 번 세 번 애원했다.

“사문이시여! 당신의 어린 아들을 좀 보세요. 저를 도와주세요!”

두 번 세 번 채근해도 상가마지 존자는 침묵할 뿐이었다.

“사문이시여, 이 아이는 당신 아들입니다. 당신이 키우세요!”

그녀는 어린 아들을 상가마지 존자 앞에 내려놓고 자리를 떴다. 그러나 그는 아이를 쳐다보지도, 한마디 말을 하지도 않았다. 멀리서 지켜보았지만, 상가마지 존자는 여전히 아이를 건너다보지도 않았고, 무어라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저 사람은 자기 아이한테조차 관심이 없구나.’ 그녀는 되돌아와 아이를 데리고 가버렸다.

세존께서 청정한 초세간적 지혜의 눈으로 이 장면을 보시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오는 것이 그를 기쁘게 만들지 못하고

가는 것이 그를 슬프게 만들지 못하네.

모든 애착(saṅga)에서 벗어난 상가마지(saṅgāma-

ji)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

(『감흥어』I품, 8경)


부처님의 교리에 매우 호의적이면서도 이런 관점을 이해하지 못해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일체의 감정 개입을 배제하고 순수 인식이라는 높은 차원에서 이해하려 들면 이 문제는 대단히 명료해진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세상을 능가할 만큼 성장을 이룩하고 그래서 마침내 세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모든 존재들의 구경목표라는 불법의 근본 취지가 진정 옳다면, 모든 행위를 도덕적 관점에서 평가할 때 반드시 이러한 궁극적 목표에 비추어 그 기준을 설정해야 할 것이다.

가장 고귀한 의미의 선(善), 즉 도덕적인 것이란 이런 궁극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것만을 말한다. 또 악, 즉 비도덕적인 것이란 이 궁극 목표에 방해가 되거나 직접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체를 말한다. 의심할 나위 없이 올바른 이 원칙을 토대로 삼는 한 구경(究竟)의 행복 즉 해탈을 이루기 위해 세상을 떠나고, 처자마저도 떠나는 사람은 결코 부도덕을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오히려 그가 행하고 있는 일은 그로서는 선(善)을 행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경목표에 이르는 길과 합치되기 때문이며, 특히 그 길이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기에 특별한 선이 되는 것이다.


출가자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이 비상하게 선한 일이라면 이것의 성취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은, 그것이 어떤 쪽에서 오건 간에 모두 부도덕한 것으로 비쳐질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은 우리가 지금 택하고 있는 최고의 관점에서나 쓸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부도덕하게 행위하고 있는 자는 성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일 수가 없다. 오히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구경의 해탈을 성취하려는 것을 막으려 드는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부도덕을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논리를 펴게 되는 근거를 명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도 역시 아내와 자식의 사랑에 진한 감동을 느끼고 있다. 어쩌면 그를 꾸짖는 사람들보다 더 깊고 아프게. 왜냐하면 그는 더 물을 것도 없이 심성이 고결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런 사랑과, 그 뿐만 아니라 세속으로 되돌아가려는 여타의 잠재적 성향들에 저항하여 가장 처절한 정신적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해 불퇴전의 각오로 앞으로 밀고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투쟁에 비하면 다른 모든 인간사는 실로 어린애 장난과 같다. 이를 불교 용어로 표현하면 그는 갈애로 치닫는 각 연기지〔緣起支 : 촉(觸), 수(受) 등〕를 충족시키기를 멈추는 공부를 하고자, 그래서 때가 되면 갈애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고자 정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들이 원하는 것이란 고작 자기네들의 부양자를 잃지 않겠다는 것뿐이 아닌가. 그들은 떠나가는 자를 향한 모든 잠재적 욕망을 주체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잠재적 욕망이 사랑이란 허울을 쓰고 나타나고 있다. 요컨대 그들은 자기 자신의 갈애의 노예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생각이 크고 어떤 생각이 작은가? 큰 생각이 작은 생각 때문에 그 큰 목표를 포기해야만 할 것인가? 전장에 나가는 전사가 처와 자식들의 애원 때문에 뒤로 물러나야 하는 것인가? 그런다면 온 세상이 그를 겁쟁이라고 매도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볼 때 남들이 이해해 주지 않는다 해서 도덕적으로 선한 일을 포기하도록 권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이 길을 훼방하며 가로막고 있는 것은 이해부족 이외 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입장을 좀 더 밀고 나가보자. 몇몇 사람이 끝없는 윤회를 해나가는 도중에 어쩌다 서로 만나서 한 가족을 이루고 잠시 같이 살게 된다. 그러나 어차피 곧 죽음을 맞아들이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서로 헤어져서 제각기 홀로 윤회의 여정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고해의 삶인데 그 미래인들 어찌 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가족 중의 어떤 사람이 현재 자신의 그 덧없는 인생을 조금 더 편하고 고통 없이 살아보겠다는 욕심에서, 자신이나 타인들의 미래의 운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쏟지 못하고 타인이 이 불행한 윤회의 헤맴에 종지부 찍는 것을 막으려 든다면 그것을 과연 이치에 합당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런 내심이야말로 진실로 무책임한 성질의 것이 아닌가? 여기서 누가 이기주의자인가? 자신을 한 개의 이기심 덩어리로 만드는 그 모든 것들을 격파하겠다고 철저하게 마음을 다지는 그 사람인가, 아니면 자기의 이기심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남까지 자기 마음대로 부리려 드는 사람인가?

이렇게 보면 출가는 두말 할 나위 없이 도덕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그것을 막는 모든 장해는 부도덕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사람들 간의 상호협약에 기반한 권리(treaty-rights)’를 출가를 막는 논거로 내세워서는 안된다. 특히 서양처럼 출가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사회에서 그런 법리주장은 타당성을 지니지 못할 것이다. 단 예외가 있을 수 있다. 출가 반대의 논거가 충분한 설득력을 지녀서 이 경우만은 출가의 합도덕성이 유보될 수밖에 없다고 인정될 경우이다. 공법(公法)이 사법(私法)에 선행하고 따라서 사사로운 권리주장은 공공의 권리에 양보해야 되는 바로 그 논리의 연장에서 계약이라든가 그 밖의 다른 법률적 규범에서 도출된 모든 종류의 권리는 윤리의 요구 앞에서 양보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법률이라는 것이 비도덕성의 승리를 도우는 도구의 역할밖에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출가자의 입장에서 논리를 편다 해서 출가할 권리가 모든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주장으로 비약될 수는 없다. 오히려 출가를 정당화시켜 주는 도덕적 가치, 바로 그 속에 출가에 대한 제약조건도 있는 것이다. 자기의 구경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남들의 ‘참된’ 행복을 위태롭게 해서야 말이 되겠는가?

물론, 출가자가 자기에게 딸린 식구들에게 끼치는 슬픔 그 자체는, 그로 인해 야기되는 갖가지 말썽과 혼동되지 않는 한, 집을 떠나는 사람 탓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슬픔의 원인은 집을 떠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불법(佛法)에 대한 무지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슬픔이 초래한 결과에 대한 책임도 출가자에게 돌릴 수는 없다. 이제 남아있는 문제는 단 하나, 뒤에 남는 식구들의 ‘참’ 행복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령 그들이 지금껏 영위해 온 생활이 어찌 보면 꽤 유복한 편이었으며 그 근심 없는 생활을 이제 잃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참 행복과는 무관한 것이므로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생활은 가장 높은 관점에서 볼 때에 축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행으로 간주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런 생활은 이 세상에 대한 집착만 강화시키고 그리하여 미래의 고통을 키워줄 따름이기 때문이다.


“만일 제가 권고하는 대로 하시겠다면, 장자시여, 이 금덩이와 보석더미를 수레로 실어다가 갠지스 강 한 복판에 던져 버리십시오. 왜냐고요? 장자께서는 결국 이 금은보화 때문에 근심[愁, soka], 비애[悲, parideva], 괴로움[苦, dukkha], 슬픔[憂, domanassa], 고뇌[惱, upāyāsa]를 겪게 될 테니까요.”

랏타빨라는 그의 아버지가 엄청난 재산을 들먹이며 승려생활을 그만 두라고 설득할 때 이렇게 말했다.(『중부』82경)


뒤에 남는 가족이 설사 가장을 잃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거나, 남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살아갈 수 있다면 이 경우 역시 고려할 사항 이외의 문제이다. 높은 관점에서 보면 이는 불행이라기보다 오히려 축복이 될 수 있다. 세상과의 진정한 관계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가하고자 하는 사람이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로 남는 것은 다음 사항뿐이다. 그의 출가로 가족이 당장 호구지책이 막히게 되는 경우, 그리고 심지어 그들의 구경해탈 가능성마저 위태롭게 되는 경우이다. 후자의 예를 들면 그의 자녀들이 도덕적으로 방치될 위험성이 높은 경우가 그것이다.


가족의 호구지책이 막히게 되는 경우는 『중부』 81경에서 옹기장이 가띠까라의 예를 들 수 있다. 친구인 조띠빨라가 왜 부처님 승단에 들어가지 않느냐고 묻자, “내가 늙고 눈 먼 부모님을 봉양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느냐”고 대답한다. 그러나 자신의 출가가 가족들의 구경의 행복을 막게 될 염려가 없는 경우에 대해서는 위에 든 『감흥어』(Ⅰ품, 8경)의 이야기가 아주 명료하게 밝혀준다. 상가마지 존자는 그의 옛 아내가 자신과 어린 자식을 ‘부양’하라는 요구에 대해서 소극적 태도를 견지한다. 만약 부양하라는 요구가 아니고 그녀의 구경 행복이 문제로 제기되었더라면, 모든 성자들과 마찬가지로 일체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발로되어 그녀를 도와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자비는 틀림없이 ‘기적같은 가르침’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런 가르침이 아니고 참된 성공을 기약할 수 있는 길이 달리 있겠는가.


남에 대한 고려 때문에 출가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 사례가 불교 경전에 가끔 보이는데, 이에 관한 부처님의 진의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원칙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즉 누구든지 부처님 승단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그와 그에 딸린 식구들과의 관계를, 그들이 자기와 똑같이 높은 도덕적 수준에 서있어서 출가를 동의해 줄 수 있는 그러한 관계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 깊이 살펴봐서 자기와 그들과의 관계가 이런 종류의 관계로 확인될 경우, 다시 말해서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 자기가 뒤에 남는 식구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아서 출가를 원하는 사람에게 동의를 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이 들 수 있을 때 ― 그때에는 그가 실제로 출가를 해도 도덕률이 그의 편을 들어주어 자신은 도덕률에 완전히 조화되게 행동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어느 면에서나 부끄럽지도, 가책 받을 짓도 하지 않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가 택한 길이 그의 가족들에게 끼치게 되는 모든 고통의 참된 원인은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해부족 또는 결함 있는 인식에 있다. 그렇다면 바른 눈으로 볼 때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며, 따라서 책임도 그들의 것이 된다. 만약 그들이 동일한 도덕적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면 이 사건이 고통의 원천이 되지 않고 그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디가여, 이들 좋은 가문의 세 젊은이가 집을 떠나 출가생활을 서원했도다. 만일 그 가족들이 이들 출가자들을 신심이 충만한 마음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 가족들의 안녕과 행복에 길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중부』 31경에서 자신을 추종하여 출가를 결행한 세 젊은이들을 놓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다.

출가를 지체시키는 외부적 환경이 아주 없을 수는 없겠지만 출가의 주된 장해가 당사자에게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무엇보다도 출가자 본인이 출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의 뜻이 이미 모든 면에서 고상해져서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은 무엇 하나 그를 더 이상 전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게끔 되어 있고, 이에 다시 구경의 세계가 그에게 이해될 수 있는 형태로 비춰지자마자 곧 그를 강력히 사로잡아 이 속세의 소유물들이 모두 공허하고 무미건조하게 보여서 그를 더 이상 단단히 붙잡아 매는 족쇄가 될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중부』 66경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어떤 부자가 있었다. 그는 많은 돈과 금은보화와 곡식과 논밭을 소유했다. 아름다운 부인도 여러 명이 있고 하인과 하녀도 많았다. 그는 자주 숲 속에 가곤 했다. 그곳에서 손발을 씻고 공양을 마친 뒤 시원한 그늘에 앉아 평화로운 얼굴로 선정에 든 한 스님을 보았다. ‘아! 사문의 생활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할까! 아! 사문의 생활이야말로 얼마나 건강한 것일까! 아, 나도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고, 노란 가사를 걸치고, 출가수행하고 싶다!’ 그는 많은 금은보화와 곡식, 논밭, 목초지, 집, 농장, 그리고 하인과 하녀, 여러 명의 부인을 뒤에 두고 떠나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고, 노란 가사를 걸치고, 출가수행을 시작했다. 그 많은 재물과 여러 명의 부인도 그에게는 튼튼한 족쇄가 아니라 약한 족쇄, 무른 족쇄, 힘없는 족쇄였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런 경지에 이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세속에 악착같이 집착하며, 속세를 떠나 참된 행복과 평화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기껏 해야 잠깐 스쳐갈 뿐이다. 불행한 환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현재의 자기 처지가 무가치하다는 사실은 단지 희미하게 느낄 뿐이다. 출가하려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경전은 계속 이러한 경우의 예를 들고 있다.


“우다이여, 가령 여기에 몹시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그에게는 까마귀가 드나드는 낡고 볼품없는 오두막이 한 채, 낡고 볼품없는 침대가 하나, 볼품없는 곡식이 한 말, 그리고 볼품없는 한 아내가 있을 뿐이라고 하자. 그런 그가 동산에서 손발을 씻고 공양을 마친 뒤 시원한 그늘에 앉아 평화로운 얼굴로 선정에 든 한 스님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느꼈다. ‘아! 사문의 생활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할까! 아! 사문의 생활이야말로 얼마나 건강한 것일까! 아, 나도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고, 노란 가사를 걸치고, 출가수행하고 싶다!’ 그러나 그는 다 낡아빠져 까마귀가 드나드는 낡고 볼품없는 오두막 한 채와 볼품없는 침대, 그리고 볼품없는 곡식 한 말과 볼품없는 아내를 두고 떠나,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고, 노란 가사를 걸치고 출가수행 할 수 없었다. 그의 보잘 것 없는 소유물이 그에게 튼튼한 족쇄, 단단한 족쇄, 질긴 족쇄이었으며, 무른 족쇄가 아닌 고약한 족쇄였다.”(『중부』 66경)


이로 비추어 볼 때 여래의 승단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일 만한 사람은 참으로 극소수일 뿐이며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뒤에 그 진리를 세상에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이셨다.

이것은 “흐름을 거스르는, 심오하고, 은밀하고, 미묘하고, 비밀스럽고, 추론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고,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중부』 26경) 그러나 극소수이나마 고상한 사람들이 있으며 ‘저들마저 법을 듣지 못하면 길을 못 찾게 될 것’을 생각하여 승가를 세울 결심을 하시게 된 것이다. 어느 시대보다도 해탈에 대한 관심이 유달랐던 그 복된 당시에도 상근기의 사람은 극히 적었다. 하물며 오늘날, 이 ‘박복한 시대’에, 더구나 서양에서, 과연 몇 사람이나 이처럼 거룩한 길을 끝까지 갈만큼 성숙해 있겠는가?


따라서 안팎의 여러 사정으로 인해 출가승이 될 만큼 성숙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전생에 지은 복연으로 인해 진리를 가까이 할 선근은 어느 정도 갖추고, 그래서 “여래와 그의 법에 대한 신심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내민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중부』109경)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그런 사람들에게도 역시 부처님은 길을 가르치고 계시다. 팔정도에서 그들이 도덕적 향상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계신 것이다. 비록 세상살이에 매인 몸일지라도 사람들은 각기 근기에 따라서 또 그들의 삶의 조건이 허용하는 한에서 팔정도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다음 생을 위한 조건들을 마련하는 데서 그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윤회를 완전히 끝낸다는 저 위대한 궁극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힘써 정진하기도 할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열반은 승가에서만 이룰 수 있기에 그들은 금생에 최고 목표에는 도달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수행한 만큼 자신들의 욕망을 억제 순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세상에 대한 갈애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또 어쩌면 자신들이 죽음을 맞을 때 인간계 이하 존재계의 몸에 다시금 집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내적 확신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여러 생을 거치는 동안 구경해탈에 점점 접근하게 된다.


“예류과에 들면 인간계보다 낮은 세계[下界: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을 겪을 염려는 없어지고 완전한 깨달음이 보장된다.”


심지어는 불환과까지 이루어 우리를 욕계로 거듭 되돌아오게 하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들[五下分結], 즉 감각적 욕망[愛欲], 성냄[瞋恚], 유신견(有身見), 계금취(戒禁取), 그리고 불법에 대한 의심(疑心)을 완전히 부수게 된다. 죽은 뒤에는 욕계에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이 색계 사선(四禪)의 5정거천(淨居天) 중 어느 곳에 태어났다가 마침내 열반을 이루게 된다.


출가교단은 다른 것이 아니다. 팔정도를 꾸준히 실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세속의 외적인 장해들을 미리 제거하는 제도일 뿐이다. 우리가 가능한 한 이 세속에서 그 장해들을 피하는 방법을 알면 알수록, 그 뿐만 아니라 그 장해들을 억제하게 되면 될수록 성공적 향상을 여기에서 실현시킬 수 있다. 그래서 때로는 세속생활을 계속 하면서 오히려 출가자보다 더 멀리까지 향상을 성취하는 사람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조건에서라면 출가하는 쪽이 집에 머물러 있는 쪽보다 훨씬 용이하고 신속하게 향상 발전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가정사와 사회적 의무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상태라야 오로지 해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할 수 있다. 세속의 의무가 향상에 도움이 될 정도로 편안한 예외적인 경우라도 이번 생에 완전한 해탈을 이룰 수는 없으며, 해탈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도 얻기 어렵다. 따라서 해탈이라는 궁극 목표를 지향하는 사람은 출가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


이들 출가자라는 선택된 사람들을 향해 일차적으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신다. 이로 미루어 부처님이 출가를 팔정도 실현의 출발점으로 삼으셨다는 것, 그리고 팔정도 전 항목을 출가에 기초시켰다는 것은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기본적 선제조건을 이행할 수 없거나 이행할 의사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팔정도 중 몇몇 단계를 각기 상황에 따라 가능한대로 닦도록 하셨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요컨대, 부처님께서는 출가가 해탈의 길을 실천하는 첫 걸음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계시다.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보리수잎 44

출가의 길

          2005년 5월 14일 초판 1쇄 발행

          

            지은이 : 게오르게 그림

            옮긴이 : 묘주스님

            펴낸이 : 한기호

            펴낸곳 : (사)고요한 소리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72번지(우 110-300)

전화 :02)739-6238, 725-3408 ․전송 :02)723-9804

홈페이지 :

E-mail :

부산지부 051)513-6650․대구지부 053)425-4035


출판등록 : 제 1-879호 1989. 2.18

     ISBN 89-85186-69-8


값 500원



▲〈고요한 소리〉는 근본불교 대장경인 빠알리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불사를 감당하고자 발원한 모임으로, 스리랑카의 불자출판협회(B.P.S)에서 간행한 훌륭한 불서 및 논문들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책자는 근본불교․불교철학․심리학․수행법 등 실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다루는 연간물(連刊物)입니다. 이 책들은 실천불교의 진수로서, 불법을 가깝게 하려는 분이나 좀 더 깊이 수행해 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의 출판비용은 뜻을 같이 하는 회원들이 보내주시는 회비로 충당되며, 판매비용은 전액 남전대장경의 역경과 그 준비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됩니다. 출판비용과 기금조성에 도움주신 회원님들께 감사드리며 본모임에 새로이 동참하실 회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회비, 성금, 책값 보내는 방법

  국민은행   006-01-0689-346

  우리은행   004-007718-01-001

  농협중앙회        032-01-175056

  우체국     010579-01-002831

  지로번호   3032431

      - 예금주 (사)고요한소리 -


마음을 맑게 하는

고요한 소리 도서안내


- 보리수잎 시리즈 -


하나 : 영원한 올챙이

둘 : 마음 길들이기

셋 : 세상에 무거운 짐, 삼독심

넷 : 새 시대인가, 말세인가 / 인과와 도덕적 책임

다섯 : 거룩한 마음가짐 - 사무량심 -

여섯 : 불교의 명상

일곱 : 미래의 종교, 불교

여덟 : 불교 이해의 정(正)과 사(邪)

아홉 : 관법 수행의 첫 걸음

열 : 업에서 헤어나는 길

열 하나 : 티싸 스님과의 대화

열둘 : 어린이들에게 불교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열셋 : 불교와 과학 / 불교의 매력

열넷 : 물소를 닮는 마음

열다섯 : 참 고향은 어디인가

열여섯 : 무아의 명상

열일곱 : 수행자의 길

열여덟 : 현대인과 불교명상

열아홉 : 자유의 맛

스물 : 삶을 대하는 태도들

스물 하나 : 업과 환생

스물 둘 : 성지 순례의 길에서

스물 셋 : 두려움과 슬픔을 느낄 때

스물 넷 : 정근(精勤)

스물다섯 : 큰 합리주의

스물여섯 : 오계와 현대사회

스물일곱 : 경전에 나오는 비유담 몇 토막

스물여덟 : 불교 이해의 첫 걸음 / 불교와 대중

스물아홉 : 이 시대의 중도

서른 : 고(苦)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서른하나 : 빈 강변에서 홀로 부처를 만나다

서른둘 : 병상의 당신에게 감로수를 드립니다

서른셋 : 해탈의 이정표

서른넷 : 명상의 열매 / 마음챙김과 알아차림

서른다섯 : 불자의 참모습

서른여섯 : 사후세계의 갈림길

서른일곱 : 왜 불교인가

서른여덟 : 참된 길동무

서른아홉 : 스스로 만든 감옥

마흔 : 행선의 효험

마흔하나 : 동․서양의 윤회관

마흔둘 : 부처님이 세운 법의 도시

         - 밀린다왕문경 제5장

마흔셋 : 슬픔의 뒤안길에서 만나는 기쁨


- 법륜 시리즈 -


하나 : 부처님 그 분 - 생애와 가르침

둘 : 구도의 마음, 자유 - 칼라마 경

셋 : 아나가리까 다르마팔라

     (20세기 불교 부흥 운동의 선구자)

넷 : 존재의 세 가지 속성

     - 삼법인 (무상․고․무아)

다섯 : 한 발은 풍진 속에 둔 채

       - 현대인을 위한 불교의 가르침 -

여섯 : 옛 이야기 - 빠알리 주석서에서 모음

일곱 : 마음, 과연 무엇인가

       - 불교의 심리학적 측면

여덟 : 자비관

아홉 : 다섯 가지 장애와 그 극복 방법

열 : 보시

열하나 : 죽음은 두려운 것인가

열둘 : 염수경 - 상응부 느낌편

열셋 :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         가 - 재생에 대한 아비담마적 해석

열넷 : 사리뿟따 이야기

열다섯 : 불교의 초석 - 사성제

금구의 말씀 : 염신경




'필독!초기경전 > 4. 고요한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처님의 실용적 가르침  (0) 2011.05.28
경전에 나오는 비유담 몇 토막  (0) 2011.01.06
정근(精勤)  (0) 2010.12.21
성지 순례의 길에서  (0) 2010.12.11
업과 윤회  (0) 2010.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