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수행자의 길

수행자의 길


― 티베트 옛 고승들의 경책 ―


Essential Advice

of the Kadampa Masters

Translated from the Tibetan under

the guidance of Geshe Wangyal


게셰 완걀 엮음

각묵 스님 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Bodhi Leaves No. 116. 1988)


  차  례

들어가는 말 … 5

아티샤 존자의 경책 … 8

홀로 머물며 네 자신을 조복받아라 … 8

다른 스님들의 경책 … 26

세속과 일치하면 이미 법이 아니다 … 26

성자의 네 가지 행법을 닦으라 … 33

무상을 관하라 … 36

네 가지 방법으로 참을성을 닦으라 … 39

염라대왕을 만나면 이미 잘못 산 것이다 … 43

선정을 큰 보물로 생각하라 … 46

어떤 스승을 따라야 하나 … 48

구하지 않을 때 가장 크게 얻는다 … 49

노비구, 스스로 경책하다 … 52


들어가는 말

카담파(Kadampa) 교파는 티베트 불교가 한창 활발하고 창조적이었던 11세기에 일어났다. 그 창시자 아티샤 존자(982-1054)는 1042년에 티베트로 들어온 인도의 고승이었다. 이 교파는 독립교단으로는 그다지 긴 수명을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카담파의 사상은 다른 교파들에 통합․흡수되어서 오랫동안 티베트 불교에 영향을 끼쳐왔다. 여기 이 작은 책자는 카담파의 역사상 주요한 족적을 남겼던 몇몇 고승들의 대담과 충고의 말, 그리고 반성록을 발췌하여 모은 것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아티샤는 물론, 그의 가장 저명한 티베트인 제자 게셰 드롬을 위시한 주요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분들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근본이 통찰에 있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는 점에서 카담파 교파의 특색을 잘 드러내고 있다. 카담파 고승들의 가르침은 단도직입적이며 또 타협의 여지가 없이 간단명료한 점에서 특히 돋보인다. 이들 고승들은 우리들에게 삶의 기초적 진실들을 직시하도록 계속 다그치면서 실제적이고도 의미 있는 대책을 세워나갈 것을 촉구하여 마지않는다.


우리의 세상살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적 수행의 길도 역시 온갖 자기기만의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그분들은 거듭거듭 지적해준다. 이런 함정을 피해 나가려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 가장 깊숙이 숨어있는 동기, 자신의 목적,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일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항상 마음을 챙겨 관[正念]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책은 애초에 몽골의 라마승 게셰 완걀의 지도하에 그의 미국인 제자들이 영역한 것으로, 1975년에 티베트 불교 전집이『해탈의 문(The Door of Liberation)』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면서 그 한 부분으로 수록되어 출판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책은 거기에 실린 내용의 절반쯤을 싣고 있다.


스티븐 베츨러


▶게셰 완걀 (1901-1983) 칼미크 몽골에서 출생, 6세에 스님이 되어 티베트에서 공부함.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기 시작할 때 인도로 감.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가〈티베트 불교 수행센터〉를 설립하여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하였고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수행자의 길


아티샤 존자의 경책



홀로 머물며 네 자신을 조복 받아라.

어느 날, 한 제자가 아티샤 존자에게 물었다.

“도(道)에 관한 최상의 가르침은 어떤 것입니까”

존자는 말씀하셨다.

“최상의 묘(妙)는 무아를 깨닫는 것에 있다.

최상의 고귀함은 너 자신의 마음을 조복받는 데 있다. 

최상의 덕(德)은 남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는 데에 있다.

최상의 지침은 간단없는 마음 챙김[正念]이다.

최상의 영약은 모든 것의 무자성(無自性)1)을 이해하는 것이다.

최상의 활동은 세속사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


최상의 성취는 번뇌를 줄이고 이를 깨달음으로 바꾸는 것에 있다.

최상의 베풂[布施]은 집착하지 않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최상의 도덕실천[持戒]은 평화로운 마음이다.

최상의 참을성[忍辱]은 겸허함이다.

최상의 노력[精進]은 활동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최상의 선정(禪定)은 자부하지 않는 마음이다.

최상의 지혜는 명색(名色)2)에 속지 않는 것이다.”


나리(Nari)국의 서쪽 지방을 떠나면서 아티샤 존자는 모여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고별의 충언을 주었다.


“벗들이여, 기필코 깨달음을 이루자면 선지식(善知識)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대선지식에 의존하라. ‘공(空)’의 참뜻을 완전히 깨달으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므로 스승이 일러주는 지침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도록 귀 기울이라. 법(Dhamma)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깨닫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그대들은 끊임없이 수행 정진해야 한다.”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곳은 멀리 피하라. 언제나 계를 지키기에 도움이 되는 곳에 머물도록 하라. 흔들림 없는 마음을 얻기까지는 번잡한 곳은 해롭다. 그러니 한적한 곳에 머물러라. 그대의 번뇌를 늘리고 부채질하는 벗을 멀리 하라. 계율을 잘 지키도록 도와주는 벗에게 의지하라. 이 점을 명심하라.


일을 하려고 들면 한이 없다. 그러니 줄이고 볼일이다. 밤을 도와 정진하라. 그리고 마음을 챙겨 살피기를 쉬지 말라.”


“한번 스승으로부터 지침을 받으면 그 지침을 항상 관(觀)하고 그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 크게 겸허한 마음으로 이처럼 행하면 지체 없이 효과가 드러날 것이다. 진심에서 우러나와 법다이 처신하면 음식과 필수품은 저절로 얻어질 것이다.”


“벗들이여, 욕망에는 한정이 없으니, 바닷물은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해지는 것과 같다. 그러니 스스로 만족해야 한다. 온갖 형태의 자부심, 긍지, 아만을 멸절시켜라. 마음을 가라앉혀 평화로워져라. 남들이 아무리 공덕이라 우겨도 법을 닦는 데에 장애가 되거든 가차 없이 버려라.


남의 존경을 받고 이익을 얻으려는 일체의 생각을 마치 좁고 위태로운 길에 놓인 돌덩이를 치우듯 치워버려야 한다. 그것들이야말로 악마의 올가미이기 때문이다. 명예와 칭찬을 바라는 그 모든 생각도 코를 풀듯 팽개쳐버려야 한다. 그것들은 기껏해야 자신을 기만하고 착각에 빠뜨릴 뿐이니까.”


“그대들이 그동안 쌓아 모은 행복, 즐거움 그리고 친우들은 모두 잠깐 동안의 일일 뿐 오래가지는 못한다. 그러니 그런 것들에 연연하지 말라. 내생은 금생보다 훨씬 길다. 그 긴 미래에 대비해서 그대들의 공덕이라는 보물을 잘 간직하도록 하라. 죽을 때는 모든 것을 남겨두고 간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


“남을 멸시하고 비난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일으켜라. 친구라 하여 너무 애착하지 말고, 적이라 하여 냉대하지 말라. 남의 좋은 자질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겸허하게 그 좋은 점을 취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도록 하라. 남의 결함을 들추어내려 애쓰지 말고 자신의 결함을 속속들이 찾아내라. 자신의 결함은 종기를 빨아내듯 제거하라. 내 공덕 쌓기에만 열중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웃어른 모시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받들어라. 모든 중생에게 자애를 펼칠지니 마치 친자식 사랑하듯 하라.”


“언제나 웃는 얼굴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도록 하라. 성내지 말고 정직하게 말하라.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고 다니면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러니 절도 있게 말을 하도록 하라. 쓸데없는 행동을 많이 하면 공덕이 쇠한다. 수행인답지 못한 행동은 그만 두라. 본질적인 것이 아닌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지금 그대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일은 모두가 오래 전부터 지어온 업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그대가 바라는 대로 전개될 리가 없다.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혀라.”


“아,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어찌 성자를 욕되게 하는 짓을 하랴! 그대들은 언제나 솔직하고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하리라. 금생의 고난과 행복은 모두가 금생과 전생에 지은 업의 소산이다. 그러니 자신의 처지를 두고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


“그대 자신을 조복받기 전에는 남을 제도할 수 없다. 그러니 먼저 그대 자신부터 조복 받아라. 천안2)을 얻지 못하고는 남들을 향상하도록 이끌 수 없으니 이를 얻도록 열심히 노력하라.”


“그대들은 반드시 죽음을 맞는다. 아무리 재산을 많이 모아본들 가지고 갈 수는 없다. 그러니 재산 때문에 때묻지 않도록 하라. 환락에 아무리 탐닉해봐야 허망할 뿐이니 보시의 공덕으로 그대 자신을 장엄하라. 언제나 청정한 계행을 지켜라. 계행은 이생에서는 아름답고, 내생에서는 행복을 보장해준다.”


“지금 같은 깔리유가2)의 말세에서는 증오가 득세하니 인욕(忍辱)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인욕만이 증오를 무력화시킨다. 우리가 아직도 이 세상에 머물고 있는 것은 나태의 힘 때문이니 열화처럼 정진력을 점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순간순간 그대들의 삶은 세속적 활동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낭비되고 있다. 이제 선정을 닦을 때다. 그대들은 그릇된 견해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공(空)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the reality)의 의미를 간절하게 탐구하라!”


“벗들이여, 윤회의 세계는 광막한 늪과 같아서 그 어디에도 참된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탈의 굳건한 땅에 오르도록 서둘러라. 스승의 지침에 따라 선정을 닦아 고통스런 윤회의 강을 말려 버려라. 이것을 항상 명심하라. 이는 그냥 건성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나의 진정에서 우러나와 하는 말이니 부디 이 충고를 잘 들어 두라. 이 지침을 따르면 그대들은 비단 나를 즐겁게 해줄 뿐 아니라 그대들 자신과 남들 모두까지 즐겁게 해준다. 내 별로 아는 바는 없지만 이 말들을 기억해두도록 그대들에게 거듭 권하노라.”


아티샤 존자가 라사 근처의 예르파드라크에 머물고 있을 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베풀었다.


“고귀한 아들들이여, 이 말을 깊이 되새겨 보라. 깔리유가에서는 인생은 짧고 깨우쳐야 할 것은 많다. 그 짧은 수명마저도 불확실하니 누군들 내일을 장담할 수 있으랴! 그러니 모처럼 세운 그대들의 서원을 이루려면 지금 곧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대가 세속인과 같은 방식으로 생활필수품을 얻고 있거든 자신을 중이라 내세우지 말라. 비록 절에서 살고 있고 세속활동도 단념했다지만, 이미 단념한 일들을 두고 여전히 안달하고 있다면 ‘나는 절에 사는 중이다’ 하고 내세울 권리가 없다.


만약 그대가 아직도 마음속으로 예쁜 것을 구하여 음심을 품는다면 ‘나는 절에 사는 중이다’ 하고 내세우지 말라. 만약 그대가 아직도 속인들과 어울리거나 함께 살고 있는 도반들과 쓸데없는 세속 얘기나 나누며 시간을 허송한다면 비록 절에서 살고 있더라도 ‘나는 절에 사는 중이다’ 하고 내세워서는 안 된다.


만약 그대가 참을성 없고 무시당한다고 생각하고 게다가 남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나는 보살승(bodhisattva-monk)2)이노라’ 자처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세속인들에게 중을 자처한다면 그대는 큰 거짓말쟁이가 된다. 그럭저럭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고 지낼 수는 있을 테지만, 그러나 그대가 어찌 천안통에 의해 가없는 세계를 내다보는 이들을 속일 수 있을 것이며, 법안(法眼)2)이 자유자재한 분들을 속일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그대 스스로를 무슨 수로 속일 수 있겠는가, 업의 과보가 바로 뒤따라오고 있는데.”


“절집 생활을 제대로 해내려면 세속적 처세 방식이나 친구, 친척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이런 것들을 버리면 너희들은 집착과 열망을 형성하는 그 모든 인연들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그대들은 깨달음을 향해 마음을 닦아 나갈 수 있다.


그러니 세속사에 연연하던 옛 망집(妄執)이 단 한순간이라도 다시 고개를 들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그대들은 법을 올바르게 닦을 줄 몰랐고 또 그대들의 힘을 좀먹는 옛 습관에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속인다운 생각만 일으켜왔다. 그런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 한, 강력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채 절에 머물러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절에 살고 있는 새나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요컨대, 속세의 좋은 것들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하여 금생의 세속적 활동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절에 머물러 있은들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금생의 목적, 내생의 목적 둘 다를 한꺼번에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세속적인 성향을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그대들의 수행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식의 수행이야말로 사사로운 이득을 구하는 위선적인 겉치레 수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좋은 도반을 찾고 나쁜 사람들은 피해야 한다. 한 장소에 정착하지 말며 많은 물건을 모으지 말라. 어떤 일을 하든지 법답게 하라. 그대들이 하는 모든 일이 번뇌를 다스리는 약이 되게 하라. 이것이 바로 ‘참다운’ 수행이니 이렇게 되도록 크게 분발 노력하라. 그리고 지혜가 늘어나면서 자만이라는 마장(魔障)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


“한적한 곳에 머물면서 그대 자신을 조복 받아라. 욕심을 줄이고 만족하라. 학식 좀 있다고 자만하지도 말며 남의 허물을 찾지도 말라.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라. 선의를 지니도록 하고 편견을 갖지 말라. 삿된 일로 마음이 산만해 지거든 즉시 정신을 법에 집중시키도록 하라.”


“겸허하라. 그대의 생각이 그릇된 것으로 판명될 때는 깨끗이 받아들여라. 거만을 버리고 욕심을 뿌리쳐라. 항상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라. 무엇을 하든 절도를 지켜라. 작은 일에도 만족하고 남들이 봉양하기 쉬운 이가 되라. 그대에게 날아드는 올가미로부터 야수처럼 뛰쳐나가라.”


“그대들이 세속적 생활양식을 포기하지 못하겠거든 수행자를 자처하지 말라. 토지와 농사를 포기하지 못했으면 승가에 들어왔다는 말을 하지 말라. 욕망을 뿌리치지 못하면서 중이라 말하지 말라. 자비심이 없이는 보살이라 칭하지 말라. 세속사를 놓지 못하면서 훌륭한 수행자로 자처하지 말라. 어떤 식으로든 욕망을 품어 키우지 말라.


요컨대 절에 머물 때는 되도록이면 활동을 줄이고 오로지 법을 참구(參究)하라. 죽을 때에 후회할 거리를 만들지 말라.”


또 다른 때에 아티샤 존자는 이렇게 설했다.


“이 깔리유가는 재능을 과시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어려움을 통해 내면을 다져야 할 때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겸허하게 처신해야 할 때다.


많은 시자들의 시중을 받을 때가 아니라 스스로 꾸려나가야 할 때다. 제자들을 훈치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네 자신을 조복받아야 할 때다. 말을 건성으로 듣기만 하지 말고 의미를 참구(參究)할 때다. 이리저리 찾아다닐 때가 아니라 홀로 머물러야 할 때다.”


다른 스님들의 경책


세속과 일치하면 이미 법이 아니다

게셰 드롬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법문을 들려주어 중생을 돕는 일과 한적한 곳에서 수행을 닦는 일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

스승은 대답하였다.


“내면의 깨달음이 없는 초심자는 가르침으로써 남을 도울 수가 없다. 그들이 축원하는 것은 빈 항아리를 쏟아내는 것과 같아서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을 게다. 그들의 충고는 발효되지 않은 맥주와 같아 진미가 없다.”



“계행(戒行)은 존경할 만하나 아직 지혜가 영글지 못한 사람들은 중생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능력이 없다. 그들의 축원은 가득 찬 항아리를 쏟아 붓는 것과 같아서 남을 채워주고 나면 자신은 비어버린다. 그들의 충고는 손으로 버터 기름호롱을 들고 있는 경우와도 같다. 남을 비추기는 하지만, 들고 있는 사람은 그늘에 가려져 있다.”


“그러나 성자의 단계에 이르면,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중생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 그들의 축원은 마술항아리와 같아서 수없는 항아리를 채워도 그 자체는 결코 비지 않는다. 그들의 충고는 받침대 위에 놓인 기름 호롱과 같아서 남들을 밝혀주면서 동시에 들고 있는 사람도 밝혀준다.”


“이 깔리유가는, 한적한 곳에서 자비심과 깨달음을 향한 염원을 증장시키지 않고 마음만으로 중생들을 도우려고 나설 때가 아니다. 이 시대는 족쇄가 되는 번뇌를 경계해야 할 때이다. 이 시대는 선정이란 불가사의한 약초의 묘목을 베어버릴 때가 아니라 가꾸어야 할 때다.”


어느 날 점잖은 노인 한 분이 경내를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다. 게셰 드롬이 그에게 말하였다.

“노인장, 거닐고 계신 것을 보니 좋긴 합니다만, 법을 닦아보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본 그 점잖은 노인은 경전을 독송하는 편이 낫겠다고 느꼈다. 그가 사원 뜰에서 경을 읽고 있는데 게셰 드롬이 말했다.


“경을 읽고 계신 것을 보니 좋긴 합니다만, 법을 닦아보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그 점잖은 노인은 선정을 닦아야 할까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은 반쯤 내려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좌복 위에 앉아 있었다. 게셰 드롬이 다시 말했다.


“선정을 닦고 계신 것을 보니 좋긴 합니다만, 법을 닦아보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되자 그 노인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 물었다.


“게셸라(Geshela)2), 법을 닦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발 좀 가르쳐 주십시오.”


드롬이 대답했다.


“세속적 삶에 이끌리는 마음을 뿌리치십시오. 지금 당장 그것을 뿌리쳐 버리십시오. 삶에 대해 이끌리는 마음을 뿌리치지 못하면 무엇을 하든 법을 닦는 일은 되지 못합니다. 세속사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일단 이생에서 붙인 습관적 사고를 뿌리쳐서 더 이상 세상일 때문에 마음이 산만해 지지 않게 되면, 그때는 어떤 일을 하던 그것이 바로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확실한 걸음이 될 것입니다.”


“법(法)과 비법(非法)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포토와(Potowa)가 스승 드롬에게 물었다.


“사람을 옭매는 족쇄가 되는 번뇌와 반대되는 것이 법이다. 족쇄가 되는 것은 법이 아니다. 속인들과 호흡을 같이 하지 않는 것은 법이다. 호흡을 같이 하는 것은 법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일치되는 것은 법이다. 일치하지 않는 것은 법이 아니다. 선이 뒤따라오면 법이다. 악이 뒤따라오면 법이 아니다.”


성자의 네 가지 행법을 닦으라


예르바이 샹춘은 말했다.


“그대 진정 해탈을 원할진대 죽음의 급박함을 끊임없이 관함으로써 생각과 행위를 성자들의 네 가지 행법[四聖種]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성자들의 네 가지 행법(行法)이란, ①간소한 수행자의 의복으로 만족하는 것 ②조악한 음식으로 만족하는 것 ③변변찮은 좌구(坐具)로 만족하는 것, 그리고 ④최소한의 약품으로 만족하는 것이다.”3)


“또 이 네 가지를 달리 말하면, ①욕심 없는 것 ②흡족해 하는 것 ③간소하게 살아나가는 것, 그리고 ④쉽게 만족해하는 것이다. 욕심이 없다 함은 일체의 소유에 집착하지 않으며 삶을 꾸려나가는 데에 좋은 것이나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을 말한다. 흡족해 함이란 작은 일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간소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조악하고 변변찮은 음식, 변변찮은 좌구, 그리고 간소한 옷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만족해함이란 하찮은 공양이나 예우에도 흡족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닦는 법마다 모두 깨달음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성자의 네 가지 행법을 지킨다는 말을 듣는다. 세속적 욕구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는 사람을 두고 성자의 행법을 지킨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사람은 마(魔)의 행법을 지킨다 해야 마땅할 것이다. 왜냐하면 계율에 어긋나는 활동을 고집하는 것은 악도(惡道)3)를  윤회하게 될 장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당장 금생의 제반욕구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내생에도 계속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금생의 제반 욕구를 포기하려면 무상을 끊임없이 관하는 것이 최상책이다. 새벽에 무상을 관하지 않으면 한낮에는 벌써 온갖 욕심에 젖어 있을 것이다.”


무상을 관(觀)하라


게셰 포토와는 한 재가 제자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실제로 법을 참구하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상을 관(觀)하는 것이다. 무상을, 죽음의 급박함을 관하라. 그것이 그대가 법을 참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공부는 그대가 계행을 닦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도록 해줄 것이며, 계행은 다시 그대로 하여금 만물이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줄 것이다.”


“무상의 관(觀)은 금생의 향락을 뿌리치려는 결단을 내리게 해줄 것이며, 모든 세속적 욕구를 떨쳐낼 수 있는 여건을 창출해줄 것이며, 그리하여 열반의 길에 들도록 도와줄 것이다.”


“무상을 관하여 다소라도 이해하게 되면 그대는 깨달음을 성취해 나아가게 된다. 이는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해 줄 것이며, 그리하여 깨달음을 완성하는 데 이바지하도록 해줄 것이다.”


“무상을 관하여 다소라도 이해하게 되면 또한 그대는 마음을 단단히 잡게 될 것이며 그것은 본격적인 참구를 시작하는 조건이 된다. 이는 그대가 불환과3)의 단계에 드는 데 도움이 된다. 성자(聖者)의 네 가지 단계 가운데 세 번째로서, 이 자리에 이르면 다시는 몸을 받아 이생에 태어나지 않는다.”


네 가지 방법으로 참을성을 닦으라


게셰 첸나와는 제자들에게 법문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요컨대, 법은 해로운 활동을 포기하는 것과 유익한 활동을 시작하는 것으로 양분할 수 있다. 모든 가르침은 이 말 속에 포함된다 할 수 있다.”


“이 지침을 실천에 옮기는 데는 참을성이 가장 중요하다. 가령 그대가 아직 참을성이 부족한데 어떤 이가 해친다고 치자. 그대는 대번에 보복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그때 억제하지 못하고 충동에 맡긴다면 어찌 되겠는가. 남을 돕기는커녕 해치는 행위마저도 멈추지 못한 꼴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수행을 시작하려면 참을성이 꼭 필요하다.”


“참을성을 관하는 데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과녁의 세움’, ‘자비심’, ‘스승과 제자’, ‘존재의 속성’에 대한 관 수행이 그것이다.”


“첫째가 ‘과녁의 세움’에 대한 관이다. 그대들이 과녁을 세우지 않았다면 화살이 와서 꽂히지 않을 것이다. 전생에 쌓아온 악업이 과녁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금생에 해악의 화살이 와서 꽂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또다시 나쁜 짓과 악담으로 과녁을 만들어 세우면 응보의 화살이 또 날아와 꽂히게 될 것이다. 과녁은 우리 자신이 세우고 있는 것이다. 화살은 우리 자신의 해악 행위에서 날아온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남에게 노여움을 품지 말라.


그 다음은 ‘자비’에 대한 관이다. 가령 미친 사람이 성한 사람을 해쳤을 때 성한 사람은 그를 ‘참 딱하다’고 할 뿐, 그를 상대해 맞싸우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그대를 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성치 못한 사람이다. 그는 강한 번뇌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환자인 것이다. ‘정말 딱하다’고 생각하면서 연민을 관(觀)3)하라.


참을성을 닦는 세 번째의 방법은 ‘스승과 제자’에 대해 관하는 것이다. 가령 지식을 전수해주는 스승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깨달음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대를 해치는 적(敵)이 전혀 없다면 참을성의 수행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를 능멸하는 사람들이 바로 참을성을 가르쳐주는 스승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런 행운에 감사하고 그들의 친절에 보답할 생각만 하라. 즉 그대 자신이 참을성을 배우고 있다고 관하고 화를 내지 말라.


마지막은 ‘존재의 속성’이 공함을 관하는 것으로 해악의 세 측면 즉 해로운 행위를 하는 자, 해를 당하는 자, 그리고 해악 행위 그 자체, 모두가 자성(自性)이 비었음을 관하라. 자성이 없는 허깨비를 두고 도대체 어떻게 화를 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참을성을 관하라.”


염라대왕을 만나면 이미 잘못 산 것이다


게셰 푸츙와는 말했다.

“우리는 없어서는 안 될 육신을, 그것도 여유로운 시간과 향상의 기회와 더불어 이 육신을 얻었지만, 그 속에 오래도록 머물 수 있는 힘은 갖추지 못했다. 우리는 죽어야 하니까. 죽을 때 우리는 마치 나무가 그 모든 잎사귀를 떨어뜨리는 것처럼 이생에서 누리던 갖가지 생각과 향락을 다 버리고 간다. 그때에는 우리가 얼마만큼의 지혜를 닦고, 정신력을 키웠는지, 그리고 목표로 삼은 지혜가 어디에 이르렀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흔연히 그리고 즐거운 기대를 가지고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현명하고 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목표는 고귀한 것이었기에 맑은 정신으로 죽음에 들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때 야마(염라대왕)의 모습이 나타나고 다음에 몸을 받을 곳이 인간계보다 낮은 세계4)일 것이라는 징표가 나타나면, 우리의 목표는 어리석은 것이었으며 우리는 금생에서 주인의 삶을 살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금생의 욕망을 채우려는 욕심에서 잘못된 길을 걷는다. 지혜가 구족하신 부처님께서 틀린 말씀을 하신 적은 없다. 논사(論師)들이 틀린 말을 했을 리도 없다. 큰 선지식들이 틀린 말을 한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왜 우리들은 그릇된 길로 들어서는가? 금생의 욕심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죽음을 관(觀)해야 한다. 죽음의 급박함을 염(念)하면 금생에 대해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윤회 세계의 치명적 해독을 관해야 한다. 그래야만 윤회계의 그 어떤 주처에도, 그것이 설사 천상계일지라도, 집착하지 말아야 할 까닭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중생의 행복을 위한 자비관과 깨달음을 이루고자하는 열망을 관하는 명상수행을 해나간다면 자신의 이기적 목표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을 깨닫게 된다.


무아를 염하면서 일체가 공(空)함을 관하면 일체 대경(對境)과 그 속성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을 깨닫게 된다.”


선정을 큰 보물로 생각하라


게셰 뉴그룸파는 말하였다.

“그대 다시 사람이나 신으로 태어나고 싶다면, 더욱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그대는 윤회계를 감옥처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대는 이생과 몸을 한낱 물거품으로 봐야 하며, 나쁜 도반을 원수처럼, 선지식을 여의주처럼, 족쇄가 되는 번뇌를 독사처럼, 사악한 행위를 맹렬한 독으로, 갖가지 형태의 욕망을 재난의 불씨로, 달콤한 말과 명예를 빈 메아리로, 명예와 이익을 감기어드는 올가미로, 나쁜 친구를 전염병으로, 좋은 친구를 아름답고 방비가 튼튼한 궁전으로, 일체 유정(有情)을 자기 부모로 보아야 한다.


그대는 보시를 소원 성취시키는 암소로 생각해야 하며, 지계를 값비싼 보석 장신구로, 인욕을 튼튼한 갑옷으로, 정진을 소원 성취시키는 지혜의 말[馬]로, 선정을 큰 보물로, 듣고 생각하고 관하는 지혜를 밝은 등불로 생각해야 한다.”


어떤 스승을 따라야 하나





게셰 톨룽파는 말하였다.


“그대 진정 해탈을 원할진대 능란한 스승보다는 덕이 높은 스승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대는 마땅히 가르침을 설명해 주는 스승보다 심혈을 기울여 가르침을 실천하는 스승을 따라야 할 것이며, 대단한 위치에 앉아 있는 스승보다 겸허한 스승을, 지식으로 소문난 스승보다는 신심 있는 스승을 따라야 한다.


가르침을 모른다고 크게 해될 것은 없지만 법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따르면 재난에 봉착할 것이다.”


구하지 않을 때 가장 크게 얻는다


게셰 샤보가이파가 말하였다.

“금생의 욕망은 금생과 내생의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므로 욕망을 채우려 애쓰면 안 된다. 욕망을 채우려 애쓰면 행복할 수 없다. 삶의 방향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그릇된 말, 그릇된 마음, 그릇된 행동이 일시에 터져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갖가지 욕망으로부터 고개를 돌려야 한다. 능히 그럴 수 있을 때 행복과 즐거움은 확실하게 시작된다. 금생과 앞으로 올 모든 생의 행복을 예고해 주는 최선의 징표는 일체 어떤 것도 원하지 않고 모으지도 않는 것이다.


이득을 바라지 않을 때 우리는 가장 큰 이득을 얻게 된다. 좋은 평판을 구하지 않을 때 가장 좋은 평판을 누리게 된다. 명성을 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최고의 명성을 얻는다. 마음 맞는 도반을 바라지 않을 때 가장 좋은 도반을 갖게 된다.”


“법을 구해 최선을 다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우리는 온 마음 다 바쳐 탁발승의 삶을 살아야 한다. 탁발승이야말로 생사를 초월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마음을 낼 수 있으면 신들도 악마들도 우리를 정복할 수 없다. 그러나 금생의 욕구에 탐닉하고 있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천하게 만들어 완전히 비참하게 되고 만다. 금생에는 비난을 자초하고 내생에는 악도에 태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복을 바라지 않으면서 남에 대한 비판을 억제하고, 겸허하게 처신하고, 욕구를 제한하고, 그리고 계율에 어긋나는 모든 행동을 피할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달음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시작할 필요가 없는 일을 언제나 시작하고 있고, 깨달을 필요가 없는 일을 깨닫고 있고,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하고 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말로는 떠들고 있지만 실제로 금생의 욕망으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지금은 물론 어쩌면 미래의 여러 생 동안에도 행복을 찾을 길이 없을 것이다. 만약 모든 욕망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나면 도대체 행복을 찾을 필요마저도 없어질 것이다.”


노비구, 스스로를 경책하다


게셰 샤보가이파는 자신을 준열히 매질하였다.

“너 늙은 바보 ― 품성은 보잘 것 없으면서 높은 가르침을 바라고 있다.

너 허풍선이 ― 남들은 향상시키고자 하면서도 네 자신은 향상시키지 않는다.

너 야바위꾼 ― 법은 남들을 위해서나 설해진 것이지 자기를 위해서 설해진 것은 아닌 양 행동한다.

너 얼간이 ― 너는 남들에게 법답게 행동하도록 역설하면서도 자신은 법답지 않게 행동한다.

너 무기력한 건달 ― 일어설 때마다 매번 더 크게 넘어진다.

너 정치꾼 ― 약속은 크게 떠벌리면서 이행하는 데에는 움츠린다.

너 악당 ― 내심으로는 번뇌거리를 찾으면서 짐짓 그 대응책을 쓰고 있는 양 꾸민다.

너 비겁자 ― 자기 허점을 남들이 볼까봐 두려워하면서 좋은 점만 보이게 되길 바라고 있다.”


“너는 정신적 도반과 사귐을 키울 생각은 않고 친지들에게 마음을 팔고 있다.


너는 번뇌를 다스릴 약을 개발할 생각은 않고 오히려 번뇌에 마음을 팔고 있다.

너는 금생에서 수행력을 키울 생각은 않고 내생으로 미루려하고 있다.

너는 너를 해롭게 하는 사람들을 키울 생각은 않고 너를 돕는 사람들에게만 마음을 팔고 있다.”


“너 천치 ― 너는 남을 해친다. 네 자신을 해치는 짓인 줄 알지도 못하면서. 너는 남을 돕는 것이 바로 네 자신을 돕는 것인 줄도 모르고 있다.

너는 너에게 닥쳐오는 고통과 해악이 법을 닦도록 이끄는 것[助道]임을 알지 못한다.

너는 욕망과 행복이 법의 수행에 조금도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너는 남들에게 법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네 자신은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

너는 죄 지은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막상 자기의 그릇된 행위는 멈추지 않는다.

너는 남들에게서 아주 작은 잘못까지도 찾아낸다. 그러나 막상 네 자신에게서는 커다란 잘못도 알아채지 못한다.

너는 남을 돕다가도 보답이 없으면 금방 멈춰버린다.

너는 다른 스승들이 존경받는 것을 보아내지 못한다.


너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굽실거리면서 아랫사람들은 업신여긴다.

다음 생에 관한 얘기가 네 귀에는 달갑질 않다.

너는 고고한 채 굴면서 남들이 타일러주면 언짢게 여긴다.

너는 너의 장처(長處)는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면서 그들이 너의 단처(短處)를 못 보면 안도한다.

너는 내실이야 어떻든 겉으로만 좋게 보이면 그로써 만족해한다.”

“너는 보시 받기를 좋아한다.

행복을 안에서 찾지 않고 밖에서 찾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겠다고 서약했으면서도 거꾸로 세속 일들을 익히고 있다.

너는 보살행에 공감하면서도 실제 행동에선 지옥길을 준비하고 있다.

너는 네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몸과 즐거움과 공덕행을 모두 일체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회향하겠다면서도 네 자신의 자아의식은 조금도 버리려들지 않는다.

너는 죄 많은 친구들을 좋아한다. 그들이 파멸로 이끈다는 것을 잊은 채.

너는 착한 도반들의 질책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려고 들지 않는다.”


“무의미한 논쟁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갈애를 늘리는 일이니 허공에 누각을 짓지 말라.

위태로운 짓거리를 즐기지 말라. 덕행을 가로막는 그 많은 어리석은 짓들일랑 이제 그만 두어라.”

자책하는 마음으로 그는 이와 같이 스스로를 경책하여 마지않았다.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1) [역주] 무자성 : 모든 개체에 고유 불변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

2) [역주] 명색(nāma-rūpa) : 마음과 육체, 정신과 물질. 보리수잎․여섯 『불교의 명상』주9) 참조.

3) [역주] 천안(clairvoyance) : 선정을 닦아서 얻게 되는 초자연적인 눈. 각기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천상과 지옥 등 사후세계에 몸을 받게 되는 모양을 환히 내다보는 신통력. 육신통〈신족통(神足通),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누진통(漏盡通)〉의 하나. 오안〈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의 하나.


4) [역주] 깔리유가(kaliyuga) : 힌두교에서 말하는 말세. 황금시대, 박명(薄明)시대, 박암(薄暗)시대 다음의 암흑시대로 서기전 3102년에 시작되어 432,000년간 지속된다고 함.

5) [역주] 보살승 : 대승 보살도를 행하는 수행승.



6) [역주] 법안(法眼) : 진실을 보는 지혜의 눈. 보살은 이 눈으로 모든 법의 진상을 알고 중생을 제도함. 오안의 하나.

2) [역주] 게셰(Geshe)라는 명칭은 불교철학의 박사학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중요한 각종 경전들에 통달한 승려에게 주어진다. ‘지식을 가진 자’, ‘공덕을 어떻게 쌓고 과실을 어떻게 제거하는지를 아는 사람’을 의미한다. 게셸라는 게셰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8) [역주] 경의 원래 표현대로 하면 옷은 분소의(糞掃衣 : 속인들이 쓰고 버린 헌옷을 빨아 지은 가사)를 걸치고, 음식은 탁발한 것을 먹고, 좌구는 얻어지는 대로 쓰고, 약은 진기약(陣棄藥 : 주로 소의 대소변을 약으로 쓰는 것)으로 만족한다.

9) [역주] 악도(惡道) : 고통은 많고 지혜를 계발할 인연은 적기 때문에 나쁜 윤회의 길이라는 뜻.

10) [역주] 불환과 : 해탈에 이르는 ‘초월의 길’에 들어선 성자가 차례로 겪는 네 가지 경계의 세 번째 경계. ①예류과 ②일래과 ③불환과 ④아라한과.


3) [역주] 연민관 : 중생들의 불행, 아픔에 대해 연민하는 마음을 일으켜 가까이에서부터 차차 넓혀 전 우주에 사무치는 것을 관하는 것. 보리수잎․다섯 『거룩한 마음가짐』, 법륜․여덟 『자비관』참조.

12) [역주] 인간계보다 낮은 세계[下界]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의 나쁜 세계[惡道]를 말함.  


(사) 고요한 소리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72 번지. 전화: 739-6328, 725-3408, 전송: 723-9804

부산 지부: 051) 513-6650, 대구 지부: 053)755-6035

calmvs@hanmail.net, calmvs@concentric.net


'필독!초기경전 > 4. 고요한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업과 윤회  (0) 2010.12.02
현대인과 불교 명상  (0) 2010.11.16
무아의 명상  (0) 2010.09.19
불교와 과학, 불교의 매력  (0) 2010.08.20
어린이들에게 불교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0) 2010.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