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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무아의 명상

무아의 명상


MEDITATION on NO-SELF

Sister Khema

케마 스님 지음

조효종 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Bodhi Leaves No. 95)


케마 스님은 독일 태생으로 스코틀랜드와 중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나중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1978년 호주 시드니 근교에 자신이 구입해서 기증한 땅에 불법정사(佛法精舍, Wat Buddha Dhamma Forest Monastery)를 세운  이래 그곳에 머물고 있다. 1979년 스리랑카에서 비구니계를 받았으며 1982년에는 콜롬보 근처에 국제 여성 불교도 센터(The International Buddhist Women's Centre)를 세웠다. 우기(雨期)에는 스리랑카에서 결제에 참여하고 그 밖의 기간은 세계 도처에서 참선지도에 전념하고 있다.


* 이 책의 주(註)는 모두 역주(譯註)임


무아의 명상


불교에서는 ‘자아(自我)’니 ‘무아(無我)’니 하는 말들을 쓰고 있다. 특히 `무아'란 말은 우리에게 퍽 생소하게 들리는데, 이 말에 부처님 가르침의 진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강조들 하니, 도대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해두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비록 처음에는 관념적 이해에 그칠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런 대로라도 노력해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 무아의 가르침은 불교 특유의 것으로, 달리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정신적 스승도 일찍이 무아를 이렇게 역설했던 적은 없었다. 정말 부처님이 그처럼 강조하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누가 이 문제를 입에 올려볼 엄두라도 낼 수 있었겠는가. 하여튼 그 후로 무아에 관한 수많은 저술이 나오기도 했지만, 무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만으로는 안 되고 스스로 무아를 체험해 보는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부처님의 그 모든 가르침도 결국 우리 스스로 무아를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아를 체험하려면 먼저 ‘자아’라는 것부터 충분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아니, 충분하다기보다는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도대체 이 자아가 무엇인지, 즉 ‘나’라고 하는 이 자아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모르고서는 “자아라는 것이 없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던져버리려면 먼저 손으로 그것을 확실히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늘 자아를 확인하고자 거듭거듭 애쓰고 있다. 이것만 봐도 이 자아란 것이 근거가 박약해서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그런 것이거나 아니면 오히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데 풍설만 무성한  종류의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끊임없이 그것을 재확인하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정말이지 왜 우리는 항상 그 ‘자아’가 위협 받을까봐, 위태로워질까봐, 존립의 근거가 무너질까봐 그처럼 전전긍긍하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평소에 믿고 있듯이 자아란 것이 그렇게 견고한 실체라면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이다지도 번번이 불안해 할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다.


보통 우리는 자신을 그 무엇과 동일시(同一視)하는 방식으로 자꾸만 ‘자아’를 확인하려 든다. 우선 이름, 나이, 성별, 능력, 직업 따위의 신원을 자아와 동일시한다. “나는 변호사다”, “나는 의사다”, “나는 공인회계사다”, “나는 학생이다”. 또 우리는 자기가 맺고 있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자아인 것처럼 생각한다. “나는 남편이다”, “나는 아내다”, “나는 엄마다”, “나는 딸이다”, “나는 아들이다”라고.


물론 이상의 예처럼 자아를 내세우는 것은 한갓 입버릇이라 치고 예사롭게 생각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입으로만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말 그런 ‘자아’가 바로 자기의 당체(當體)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작 그렇게 믿어마지 않는다. 그러한 ‘자아’가 자신의 당체라는 데 대해 마음속으로 추호도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형편이다 보니 혹시라도 자아의 확인 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위태롭게 되는 날이면, 예를 들어 아내의 지위가 위태롭다든지 어머니의 자리가 위협받는다든지 변호사로서의 신분이 위태로워지거나 교사의 위치가 위협받는다면, 또는 그런 ‘자아’를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그 사람들을 혹시라도 잃어버리게 된다면, 맙소사! 그 끔찍한 비극을 어떻게 감당해 내겠는가.


그렇게 되는 날이면 다른 것에 기대어 자아를 확고히 다져오던 손쉬운 방법이 잘 안 통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이 ‘나’란 것이 “나 좀 보세요”, “나예요” 하고 말할 근거가 없어지게 될지 모른다. 자아 확인에는 또 칭찬이나 비난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칭찬은 ‘나’를 확인시켜주는 효과를 발휘하고, 비난은 ‘나’를 위협하는 것 같이 보이게 된다. 그래서 누구나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비난받기를 싫어하는 것일 테지만, 하여튼 비난은 자아의식(에고)을 위협하는 셈이 된다.


명예와 불명예 역시 마찬가지다. 득(得)과 실(失)도 그렇다. 무엇이든 손에 들어오는 것이 늘어나면 자아의식도 그만큼 커지는 것처럼 보인다. 잃으면 그만큼 작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늘 쫓기는 신세를 면치 못한 채 만성적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자아의식의 그 당당한 위신이 조금이라도 실추하게 되는 일이 언제 일어나게 될지 모른다. 누군가 불쑥 나타나 자아의식을 기죽여버릴 수도 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우리 모두가 그런 위험성을 안고 있다. 누군가가 무슨 일로 나를 비난하고 나설지 모르긴 하지만 그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부처님마저도 비난을 받은 적이 있지 않으셨던가.


하지만 우리에게 던져지는 비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있다. 우리는 비난을 받으면 위축된다. 자아의식은  그렇게 위축된 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회복하려고 기를 쓰게 된다. 이럴 때 보통 우리는 상대방을 되받아 비난함으로써 그 사람의 자아의식 또한 어떻게든지 왜소하게 만들려 안간힘을 쓴다.


자기가 하고 있는 역할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재산이든 사람이든 간에, 그것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일이 우리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하다고, 그래야 자아가 존립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무엇이든지 동일시를 하지 않고 있으면 정체성의 공황상태에 빠져버린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명상을 하는 중에서도 이런 저런 생각을 좀처럼 멈추지 못하는 것 역시 이런 까닭에서이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면 자기 확인 역시 못하게 될까봐 두려운 것이다. 내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자아를 확인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자아 확인이 필요하지 않은 명상의 단계에 좀처럼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불행하다’ 할 때의 ‘행복’, 이 역시 자아 확인의 하나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자아 확인 즉 자기동일시에 사활(死活)이 걸린 듯이 매달리고 있는 이상, 이 짓을 그만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단 동일시 자체가 자아의식의 존립문제로 되면 ― 실제로 우리는 늘 그런 상태에 있다 ― 이 동일시를 하지 못하게 될까봐 몹시 두려워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만성적으로 공포심에 사로잡힌 채 지내게 되는 것이다.


‘나’를 현재의 이 ‘나’로 만들어주는 재산, ‘나’를 현재의 이 ‘나’로 만들어주는 사람들을 잃을까봐 우리는 늘 두려움에 떨고 있다. 자식을 못 낳게 되거나 자식들이 다 죽어버린다면 우리는 더 이상  어머니일 수가 없다.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이 어디 있으랴. 똑같은 논리가 다른 모든 동일시에도 적용된다. 이러고서야 어찌 그 삶을 평화로운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인가? 대답은 단 한 가지, 자아의식, 즉 존재하려는 열망 그것 때문인 것이다.


이와 같은 자아동일시는 당연히 소유에 대한 열망으로 귀결되고 그리고 이 소유는 집착심으로 귀결된다. 무엇이든 가지게 되면 그것을 자기와 동일시하여 그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 열망, 이 집착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자유롭고 열린 시야를 가지기가 극히 어렵게 되고 만다.


그런데도 그 집착을 우리는 좀처럼 버릴 수가 없다. 가령 오토바이나 집에 대한 집착은 벗어났다고 치자. 또 심지어 사람에 대한 집착마저도 벗어났다고 치자. 그래도 우리는 어떤 견해나 의견에 대해 분명히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에 집착한다. 또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길인가 하는 견해에 집착한다.


또 이 우주를 누군가가 창조했다는 견해를 세우고 거기에 집착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정부가 나라를 어떻게 끌어가야 되느냐 하는 견해에 집착할 수도 있다. 이처럼 어떤 견해든 일단 거기에 매달리게 되면 우리는 이미 사물을 참모습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기가 대단히 어렵게 된다. 따라서 마음은 열려 있어야 한다. 새로운 생각과 이해를 수용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열린 마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께서는 설법을 듣는 사람들의 근기(根器)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종류의 질그릇에 비유하셨다. 첫 번째 질그릇은 바닥에 구멍이 숭숭 뚫린 그릇이다. 그런 그릇에는 물을 부어도 바로 다 새어버린다. 말하자면 어떤 것을 가르쳐주어도 그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두 번째 그릇은 금이 가 있는 그릇이다. 거기에 물을 부으면 조금씩 새어나간다. 바로 새어버리지는 않지만 조금씩 새어나가 결국 다 새어버린다. 이런 사람들은 기억을 유지하지 못한다. 사실로부터 바른 결론을 이끌어 내지도 못한다. 이해력에 금이 가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그릇은 물이 가득 담겨 있는 그릇이다.  그 그릇에는 물을 더 부을 수가 없다. 이런 사람은 기존 견해로 꽉 차 있기 때문에 새로운 어떤 것도 더 이상 배우고 받아들일 수가 없다.


네 번째 그릇이 있다. 구멍도 안 뚫리고 금도 안 간, 온전한 그릇으로 완전히 비어있는 그릇이다. 아, 우리가 그런 그릇이 되었으면 오죽 좋으랴!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비어있지 못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꽤 많이 비어있어서 꽤 많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모른다. 어떤 견해나 의견에 있어서 그렇게 비어있다는 것은 집착이 그만큼 덜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실이라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마저도.


지금 우리가 진실이라 생각하는 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진실1)이라면 우리는 단 한순간도 불행해질 수가 없을 것이고 조금도 부족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사귐이 부족하다고, 가짐이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또 좌절감도 지겨움도 안 느낄 것이다. 그런데도 실제로 그런 느낌을 받고 있다면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제는 진실이 아닌 것이다.


참으로 진실한 것이라면 우리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어야만 한다. 우리가 완벽하게 충족해있지 못하다는 것은 완벽한 진실을 보고 있지 못하다는 표시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견해는 틀렸거나 불완전하거나 두 가지 중 하나이다.


자신의 견해들이 이처럼 틀렸거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리고 자아의식에 매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그런 견해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무엇에건 간에 일단 집착하게 되면, 즉 달라붙으면 그것은 우리를 매어두려 든다. 책상다리에 묶여 있다면 우리는 문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움직일 수가 없다. 거기에 매인 것이다. 풀어버리기 전에는 나갈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자아동일시가, 소유에의 집착이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는 한 우리는 그것 때문에 초월적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밖으로 사물이나 사람에 집착하고 있을 경우에는 자신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라도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다섯 부류의 요소[五蘊]를 왜 굳이 다섯 가지 집착 대상의 범주[五取蘊]라 불러야 하는지 그 까닭을 깨닫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오취온(五取蘊)이 우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들의 정식 명칭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가장 집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오취온이다. 하나같이 빈틈없는 집착덩어리들이 모여서 이룩한 총체적 집착덩이, 가히 ‘전적(全的) 집착’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고찰할 때에도 또 자신의 마음을 고찰하면서도2), 심지어 그 마음을 세분해서 느낌[受 vedanā], 인식[想 saññā], 정신적 지음(형성력)[行 saṅkhārā], 의식[識 viññāṇa]으로 면밀히 고찰할 때마저도 그것들이 집착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기 위해 잠시 숨을 돌리는 일조차 별로 없다.


우리는 이 마음과 몸[名色, nāma-rūpa]3)을 고찰한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정말 ‘나의’ 느낌인지, ‘나의’ 인식인지, ‘나의’ 기억인지, ‘나의’ 생각인지, ‘나의’ 의식이 하는 ‘나의’ 알아차림인지 의심해보려 들지도 않는다. 관(觀)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의심을 품어보기 조차 못 한다. 그리고 이런 관 공부를 하려면 일상의 견해나 관점으로부터 떨어진 꽤 널찍한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큰 소유욕이자 애착이 곧 집착이다. 그런 집착을 하고 있는 한 우리는 진실을 바로 볼[觀] 수 없다. 집착이 가로막기 때문에 진실을 못 보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이라 믿는 것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집착에 의해 모두 왜곡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좋아, 나는 이제 집착하기를 그만 두겠어”라고 말하는 것도 가당치 않다. 급한 마음으로 덤빌 일이 아니다. 그 ‘나’를 제거해 내는 과정, 즉 마음과 몸이 하나의 완전한 개체라 믿기를 그만 두게 되는 과정은 점진적인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상을 해서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고 성취를 이루었다고 하려면 맨 먼저, 마음 따로 몸 따로라는 것쯤은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언제나 한결같이 일치하여 움직이는 어떤 하나의 개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생각하는 마음이 따로 있어서 몸으로 하여금 움직이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자신을 좀 더 분명히 알아가게 되는 첫걸음에 해당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것은 느낌이구나”[受], 그리고 “이 느낌에다 내가 지금 이름을 붙여주고 있구나”[想], “이것이 내가 이 느낌에 대해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이구나”[行], “의식이 그 일어난 느낌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느낌이란 현상으로 실현될 수 있었구나”[識] 하고 일일이 주시할 수 있게 된다.


오취온 중 마음에 속하는 이 네 가지를 따로따로 분해해 보도록 하자. 그 하나하나를, 그것이 발생하고 있는 동안에, 다시 말해 그것에 대해 뒤쫓아 가며 사유하고 있는 ‘현재’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서 그것을 떼어내어 따로따로 살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명색이 정말 ‘내’가 아니구나 하고 어렴풋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다. 이 넷[受, 想, 行, 識]은 한갓 현상으로서 발생하였다가 잠시 머물고서는 스러져버린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의식이 어떤 대상에 머무는 시간은 과연 몇 순간이나 될까? 생각들은 얼마동안이나 지속될까? 그리고 과연 우리가 그 생각들을 원해서 불러들였던 것일까?


집착, 즉 매임은 자아의식을 일으키는 장본이다. 집착 때문에 ‘나’라는 관념이 생겨나며 그래서 ‘내’가 있게 되고 ‘내’가 있는 이상 온갖 문제의 주인이 아니 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없는데도 문제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나’니 ‘내’니 ‘김 아무개’니 ‘박 아무개’니 라고 불리는 어떤 주인공이 내 속에 들어앉아 있는 걸로 우리는 생각하는데 실제로 그런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럼 누가 그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것일까?

우리를 구성하는 그 온들[五蘊]이 끌어안고 있을 리는 없다. 오온이야 단지 전개과정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들은 현상이며, 그밖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계속해서 전개 또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기 때문에, 그러면서 줄곧 “이것이 나다”, “이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 나다”, “이렇게 원하고 있는 것이 나다”라고 되뇌고 있기 때문에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뿐이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고통에서 철두철미하게  벗어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집착을 놓아버려야 한다. 정신수행의 도정은 무엇을 성취하여 손에 넣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놓아주는 과정이다. 많이 놓아줄수록 크게 비워지게 되고 그래서 진실을 볼 수 있는 여지도 그만큼 많아지는 것이다. 놓아주면 풀려난 그것은 바로 사라져버린다. 따라서 놓아주면서 행위할 때 우리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위만을 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자신이 하는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고 있는 한, 또 자신이 하는 생각의 결과에 집착하고 있는 한, 우리는 포위당한 처지이며 묶여있는 신세인 것이다.


자아동일시와 집착 말고도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또 있다. ‘뭔가가 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훌륭한 명상가가 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일을 해 마친 사람이 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지금 상태가 아닌 다른 어떤 상태로 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다른 어떤 것이 된다는 것(becoming)은 지금에 있기(being)를 그만 둔다는 뜻이 된다. 내가 지금에 있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의 지금 있는 그대로를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도대체 무언가로 된다는 이 일들은 모두가 미래에 가서야 벌어질 일들이다. 미래에 벌어질 일들은 무엇이건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우리는 환상의 세계를 살게 된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실재는 바로 지금이라는 이 특정 순간뿐이다. 그런데 그대가 마땅히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할 이 특정 순간도 벌써 지나가버렸다. 지금 순간이 지나갔는가 하면 어느새 다음 순간도 역시 지나가 버린다. 이들 순간들이 모두 어떻게 지나가는지 관(觀)해 보라. 그럼 그 순간들이 한결같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매 순간이 지나가 버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집착한다. 그것들을 꽉 붙잡아 두려고 애쓰면서. 그것들을 실재(實在)로 만들려 애쓰면서. 그것들을 안심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자 애쓰면서. 그것들을 그 본연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어 보려 애쓰면서. 하지만 그것들이 모두 어떻게 지나가는지 관해 보라. 그것들이 지나가는 그 빠른 속도를 일일이 헤아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이런 형편인데 무엇을 가지고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는가. 그 무엇도 우리가 의지하기에는 너무나 부실하다. 전 우주가 온통 끊임없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우주에는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이 마음이라는 요소와 육체라는 요소도 포함된다. 그대가 믿건 안 믿건 이 이합집산은 변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것을 알려면 그대는 그것을 체험해야 한다. 체험할 때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해진다. 체험한 것은 전적으로 분명하다. 그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 못 한다. 세상 사람들은 부정하려 들겠지만 그들의 반대는 아무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것을 체험했으니까. 망고의 맛을 아는 데 직접 깨물어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체험해 보기 위해서는 명상이 필요하다. 평범한 마음으로는 평범한 관념과 개념만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비범한 경험을 체험하고 비범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비범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비범한 마음은 선정(禪定)을 통해서만 생겨난다. 대다수의 명상가들은 이미 이전과는 다른 어떤 경계를 체험해 봤을 것이다. 그것만 해도 벌써 평범한 상태는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작 단계를 넘어서서 정말로 비범한 마음상태에 이르려면 좀 더 그 쪽으로 밀어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비범함이란, 마음이 그 스스로 처하고자 하는 곳에 처하는 것이 자재롭다는 뜻이다. 더 이상 마음은 일상사에 휘둘리지 않기에 비범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정(定)을 이룰 수 있게 될 때, 그때에는 그 마음은 일찍이 알지 못했던 경지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대의 우주가 끊임없이 이합집산 하고 있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명상 특유의  체험이다. 그러려면 실천하고 불굴의 노력을 기울이고 또 끈기 있게 버텨내어야 한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고요해지면 평온과 평정, 그리고 평화로움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었을 때 마음이 무상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폭도 넓어져 마음이 그 자체를 전적으로 무상한 것으로 관찰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게 된다. 자기의 마음을 전적으로 무상한 것으로 관하게 되면, 세상을 보는 그 사람의 관점마저도 변하게 된다. 이 변화를 나는 어린애들이 갖고 노는 만화경에다 즐겨 비유한다. 그것은 조금만 손을 대어도 다른 그림으로 바뀐다. 조금 바꿨을 뿐인데도 전 우주가 생판 달라져 보이게 되는 것이다.


무아는 원래 무상(無常)의 측면을 통해, 고(苦)의 측면을 통해, 그리고 공(空)이라는 측면을 통해 경험된다. 여기서 공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공하다’니 무엇이 공하다, 즉 비었다는 말인가? ‘비어있음’이란 단어를 개념으로만 생각하면 오해의 여지가 많다. 그래서 “비었다니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고들 있는 것이다. 실은 거기에는 모든 것이 고스란히 그대로 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그대로 있고, 그들의 내부도 그대로 있다. 즉 오장육부도 뼈도 피도 그 밖의 모든 것이 꽉 찬 채 그대로 있다. 또한 마음도 전혀 비어있지 않다. 마음은 관념과 생각과 느낌들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또 설령 그런 것들을 안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 여기서 말하는 비어있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럼 이 비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비어있다고 하는 것은 단지 실체가 비어있다는 뜻인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특정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비어있음[空]인 것이다. 그것이 무유(無有)인 것이다. 이 무유 또한 명상을 통해 체험할 수가 있다.


특정한 인물도, 특정한 어떤 것도, 그리고 그것을 영속시켜 줄 그 무엇도, 심지어 그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줄 그 무엇도 결(缺)하고 공한 것이다. 일체가 한낱 흐름일 뿐이다. 비어있음은 바로 그러한 상태인 것이며, 우리는 도처에서 그러한 비어있음을 보게 된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서도 보게 된다. 이것을 두고 무아(無我 anattā)라고 하는 것이다. 실체가 비어있다는 말이다. 모두가 상상의 산물일 뿐 실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처음에는 이 말이 무척 불안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내가 지금껏 그다지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대해 온 그 자아의식의 존재, 지금도 이것저것 하려고 애쓰고 있는 그 존재, 내가 믿는 유일한 보증인이자 행복한 인생의 보장이어야 할 그 존재, 막상 그 존재를 찾아보니 그런 존재가 실제로는 없다니, 이 얼마나 놀랍고 불안스러운 일인가! 어찌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일단 그 놀라운 충격을 받아들이고 감내하게 되면,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게 되면 누구나 지고(至高)의 완전한 해방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


여기에 비유를 하나 들어 보겠다. 그대가 매우 값나가는 보석을 한 개 가지고 있다고 치자. 그 값이 하도 엄청나기 때문에 그대는 어떤 어려운 경우를 당하게 되더라도 이 보석만 있으면 문제없다고 아주 단단히 믿고 있다. 그 보석이야말로 그대에게 안전을 보장하는 둘도 없는 보물인 것이다. 그대는 어떤 사람도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집에다 금고를 들여놓고 그 속에다 보석을 잘 감추어둔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긴 세월동안 열심히 일만 해왔다. 이제 좀 쉬기로서니 어떠랴. 그런데 막상 휴가를 떠나려니 보석이 마음에 걸린다. 해수욕장에 가면서 보석을 가지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자물쇠를 새로 사서 문을 채우고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그러고는 이웃들에게도 당부한다. 이웃 사람들에게 휴가계획을 일러주면서 집을 좀 봐달라고, 특히 집안에 있는 금고를 잘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아무 염려 말고 잘 다녀오라고 대답한다. 이제 그대는 마음 놓고 휴가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대는 해변으로 간다. 오랜만에 가보는 바닷가는 얼마나 기분 좋은 곳인가. 정말 상쾌하다. 종려나무는 바람에 너울거리고, 골라 든 방도 깨끗하여 마음에 든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는 시원하고,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기만 하다. 이래서 첫날은 마냥 즐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틀째가 되자 걱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웃 사람들이야 참 좋은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줄곧 집에만 있으란 법은 없다. 자식들 집을 찾아갈 수도 있으니까. 또 최근 이웃 동네에 밤도둑이 빈번히 설쳐댄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흘째가 되자 그대는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란 생각에 사로잡혀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누며 안으로 들어가 금고문부터 열어 본다. 보석은 무사하다. 겨우 마음을 놓고 이웃들에게 인사하러 간다. 그들은 의아해서 묻는다. “왜 벌써 돌아오셨어요? 댁은 저희가 잘 지켜드리고 있는데. 서둘러 돌아오지 않아도 될 것을. 무슨 일이 있을라구요?”


다음 해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이번에도 그대는 이웃에 부탁한다. “이번엔 정말 한 달쯤 푹 쉬었다 오겠습니다. 너무 지쳐서 좀 쉬어야겠어요.” 그러자 이웃들이 말한다.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마음 놓고 떠나세요. 해변으로 가서 푹 쉬고 오세요.” 그래서 다시금 모든 것을 단속한 다음 창문과 대문을 꼭꼭 잠그고 해변으로 떠난다. 아, 역시 바닷가는 아름답고 멋있다. 이번에는 닷새를 버텨낸다. 하지만 엿새째가 되자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에서 도저히 헤어나지를 못한다. 결국 그대는 급히 집으로 돌아간다. 금고를 열자, 아뿔싸! 기어코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보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하늘이 무너진들 이보다 더하랴. 눈앞이 캄캄하다. 기운이 쑥 빠진다. 한참 있다가 이웃집엘 가보지만 그들인들 무슨 수가 있으랴. 그들은 나름대로 집을 잘 봐주느라 애썼는데. 별 수 없이 집으로 되돌아온 그대는 털썩 주저앉아 곰곰이 생각해본다. 속수무책이다. 이제 와서 어떻게 하랴. 에라, 이왕 보석은 사라졌겠다, 바닷가에 돌아가서 마음 놓고 실컷 즐기고나 보자!


여기서 보석은 다름 아닌 ‘자아’이다. 일단 그것이 사라져버리자 그것을 지켜야 했던 그 모든 부담이, 그것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던 그 모든 두려움이, 문과 창문을, 마음을, 가슴을, 꼭꼭 닫아걸어야 했던 그 짓거리들이 일시에 다 필요 없어져버린 것이다. 그대는 이제 이 육신을 지니고 있는 동안 마음 놓고 돌아다니며 얼마든지 유쾌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다지도 애지중지하던 물건을 잃어버리는 그 끔찍한 상황이, 잘 살펴보니 온갖 근심걱정에서 헤어나는 반갑기 그지없는 구원의 길이었던 것이다.


해탈로 가는 데는 세 개의 문이 있다. 차별상이 사라진 해탈, 원하는 바가 없어진 해탈, 그리고 비었음을 깨달은 해탈이다. 만일 우리가 덧없음[無常]을 온전히 깨달으면 이를 일컬어 차별상이 사라진 데 기인한 해탈[無相解脫]이라 한다. 만일 우리가 괴로움[苦]을 온전히 깨달으면 그것은 원하는 바가 없어진 데 기인한 해탈[無願解脫]이 된다. 만일 우리가 자아가 없음[無我]을 온전히 깨달으면 그것은 비었음을 아는 데 기인한 해탈[空解脫]이 된다. 이 말은 우리가 이 세 문 중 어떤 문을 통과해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해탈한다는 것은 불행한 순간을 다시는 경험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한 가지 더 중요한 뜻이 있다. 즉 우리가 이제는 업(業)을 짓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완전히 해탈한 사람도 여전히 행동하고 여전히 생각하고 여전히 말하고 있어 어느 모로나 여느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 사람에게는 ‘내가’ 생각한다, ‘내가’ 말한다, ‘내가’ 행한다 하는 관념이 없다. 나를 여의고 난 뒤의 생각 그 자체, 말 그 자체, 행동 그 자체가 있을 따름이어서 업이 되지를 않는다. 체험은 있으되 체험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처럼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일도 없다. 그것이 완전한 깨달음이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제 4단계에 이르기 전에 세 등급의 깨달음의 단계를 구분하고 있다. 그 첫째 단계가 ‘흐름에 들어선 자[豫流 sotāpanna]’인데 우리와 관련지어 볼 수 있는 그런 단계이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나마. 그 뜻은 열반을 잠시 보았고 그럼으로써 열반으로의 흐름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 무엇도 그 사람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지혜가 수승하면 한 번만 더 생을 받을 것이고, 약하면 일곱 생까지 더 받게 된다. 스스로 열반을 잠시 보았으므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족쇄들[結]4) 중 일부를 잃게 된다.5) 이렇게 도둑맞은 족쇄들 중 가장 강력한 족쇄가 바로 우리가 ‘나’라고 부르던 그 관념, 이 인격체야말로 별개의 독립된 실체다 라고 믿던 그 관념(열 가지 족쇄 중 첫 번째 족쇄)이다. 즉 자아에 대한 그릇된 견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흐름에 들어선 사람’이 ‘무아(無我)’를 언제나 끊임없이 깨닫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릇된 견해가 사라진 것뿐이다. 올바른 견해가 확고부동해지려면 거듭거듭 올바른 견해를 되새겨 자리 잡게 해주는 노력이 여전히 필요하며, 그런 보강과정을 통해 올바른 견해를 거듭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은 열 가지 족쇄 중 두 번째인 희생이나 제식 등 의례의식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은 물론이며, 그런 것을 믿는 일은 더욱이나 있을 수 없다. 전통이나 관습 때문에 어떤 의식을 여전히 준수할 수는 있겠지만 설사 그 전에는 그렇게 믿었다 할지라도 의례의식이 해탈을 가져다준다고는 믿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관심을 잡아끌던 회의적인 의심(세 번째 족쇄)이 사라진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기에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정말이지 여태까지는 회의적인 의심이 문득문득 일어나서 “글쎄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하는 생각이 은연 중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확신하려면 직접 체험해보는 수밖에 없다. 경에 쓰인 것을 틀림없는 사실로 확인하였기에 더 이상 회의적인 의심이 남아있을 리 없을 뿐 아니라 직접 체험해 보았기에 마음속으로부터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일단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아직 체험하지 못한 다른 것들을 관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불법은 분명 어떤 특정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연속성은 있지만 특별한 실체는 없다. 그런데 이 연속성이야말로 우리 몸 안에 누군가가 들어앉아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본인이다.


어쨌거나 일은 어떤 형태로든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예류’라고 하는 해탈의 일별만으로도 벌써 우리 안에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사향사과(四向四果) 중 제 1단계인 이 예류에서는 아직 탐욕[貪, 감관적 욕망 — 네 번째 족쇄]과 진심[瞋, 성냄 —  다섯 번째 족쇄]이 뽑혀나가지는 않는다. 사실 예류를 설명할 때에는 탐욕과 진심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류에 든 사람의 깨달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탐욕과 진심(瞋心)은 그만큼 더 작아진다. 이제 탐욕과 진심은 그전처럼 강하지 못하며 또 거칠게 드러나지도 않고 그저 미세하게 남아있을 따름이다.


사향사과의 두 번째 단계는 ‘한 번 더 돌아오는 사람[一來]’이며 그 다음은 ‘돌아옴이 없는 사람[不還]’이다. 이렇게 세 단계를 거쳐 마지막의 아라한에 이른다. ‘한 번 더 돌아오는 사람’이란, 이 다섯 가지 감관[五感]의 세계[人間界]에 한 번 더 생을 받게 된다는 말이며, ‘돌아옴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사람 몸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고, 아라한은 지금 여기서 완전히 깨달아 일을 다 마쳤다는 말이다. 탐욕과 진심은 ‘돌아옴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완전히 사라지고, ‘자아’라는 철옹성 같은 만심(慢心)은 아라한이 되어서야 사라진다.


우리가 아라한이 못 되었으니 탐욕과 진심(瞋心)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수긍할 수 있다. 그것을 아직 가지고 있다고 자신을 책망할 문제는 아니고 이들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이겠다. 이것들은 ‘나’라는 미망에서 생겨난다. 이 ‘나’라는 보물을 우리는 아직도 지키고 싶어 한다. 그래서 탐욕과 진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명상공부를 계속하면 마음은 점점 더 맑아질 수 있다. 그러다가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와 같은 깨달음을 이룬 마음은 초세간의 진실을 볼[觀] 수 있게 된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 경험은 심대한 영향을 끼쳐서 우리들의 생에 현저한 변화를 가져온다.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1)  진실 : 사실이어서 거짓이 조금도 없는, 완벽하게 충실한, 지금 있는 그대로인 실체 또는 진리.

2)  『염처경(念處經)』을 보면, 사념처(四念處) 중 법념처(法念處)에서 오개(五蓋) 다음에 두 번째로 이 다섯 부류[五取蘊]에 대한 수관(隨觀)을 들고 있다.

3)  명(名)은 느낌, 인식, 의지 작용(cetanā), 촉 또는 촉식(觸識)

    (phassa), 주의(manasikāra)의 다섯을 말한다고 경에는 명시하고 있다.(『중부』9경; 『장부』15경)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명색을 다섯 부류의 요소[五蘊]와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여 색을 뺀 나머지 네 부류를 통틀어 명으로 보고, 또 그것은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한다.

4)  열 가지 족쇄[結]에 관해서는 보리수잎․하나『영원한 올챙이』 주해 9 참조.

5)  족쇄를 잃는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앞에서 예를 든 보석을 도둑맞는 일을 상기하면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사) 고요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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