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필독!경전,법문자료/7. 입보리행론

입보리행론강의. 3

  

[입보리행론]은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가 배운 [입보리행론] 전승의 계보는 자 뻬툴 린포체(Patrul Rinpoche)의 전통입니다. 자 뻬툴 린포체께서는 이 논을 설하실 때 이 기원문의 뜻과 항상 연관시켜 설하셨다고 합니다.

“가장 뛰어난 보배인 보리심을 아직 일깨우지 않은 사람은 일깨우고, 이미 일으킨 사람은 없어지지 않도록 하며, 위로 더욱더 커질지어다.”

“아직 일깨우지 않은 사람은 일깨우고” 이 말씀은 처음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에 해당하는 것으로 [입보리행론]의 앞부분 3장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의 보리심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다음 3장을 설하셨습니다. “위로 더욱더 커질지어다.” 하신 것은 보리심을 일으켜, 지니고 있는 보리심을 키우기 위한 것으로 [입보리행론]의 뒷부분 3장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회향품입니다.        


제1장 보리심 공덕 찬탄품, 제2장 죄업 참회품, 제3장 보리심 전지품, 이 세 장은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한 내용입니다.

제4장 보리심 불방일품, 제5장 정지품(호계품), 제6장 인욕품은 보리심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며 항상 지니기 위한 내용입니다.

제7장 정진품, 제8장 선정품, 제9장 지혜품은 보리심을 더욱 증장시키기 위한 장입니다.


먼저 발심을 하는 것입니다.


4    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시기를 얻기는

     매우 어려운 것!

     인간의 참된 뜻을 이루려고 할 때

     만일 이 생에서 그것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다음 생에 어찌 완전히 기회가 오겠는가?


이 게송은 수행을 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인간의 몸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행을 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인간의 몸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앞서 말한 것 같이 번뇌를 없앨 수 있는 것은 지혜와 방편뿐입니다. 지혜와 방편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도 전생의 잠재적 성향에 따라 어떤 개나 고양이는 매우 사납고 어떤 개나 고양이는 아주 얌전합니다. 이것은 전생의 습기로 인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사나운 개의 경우, 개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다소 순할 수는 있습니다.


근래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인데, 원숭이 새끼들 가운데 어미와 함께 지내는 원숭이 새끼는 잘 놀고 즐거운 표정도 자주 지었지만 어미와 따로 둔 원숭이 새끼는 잘 놀지도 않고 사나울 뿐만 아니라 조금만 건드려도 화를 잘 내고 싸움도 잦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다소간 환경에 영향을 받아 화를 잘 내거나, 화를 잘 내지 않는 경우가 있긴 하겠지만 짐승은 자신의 성냄과 집착 같은 것을 줄이지 못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이성의 힘으로 궁극적인 유익함과 손해를 생각할 수 있으며, 이것으로 번뇌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이외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특히 아집을 다스리는 법으로 무아의 지혜를 찾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짐승은 불가능합니다. 지금 우리가 얻은 이 몸은 평범한 사람의 몸이지만 여덟 가지 시기와 열 가지 성취를 모두 갖추었을 때는 수행을 할 수 있는 좋은 바탕이 됩니다. 우리의 이 몸이 수행을 할 수 있는 좋은 바탕이며 이것의 힘은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일시적인 뜻과 궁극적인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질을 갖춘 몸을 또다시 얻기가 어려운 것을 생각하고, 여덟 가지 시기와 열 가지 성취를 갖춘 이 몸을 받아 지금, 큰 뜻(깨달음)을 이루려는 마음을 습성화해야 합니다. 보리심을 설하시면서 인간 몸의 바탕을 말씀하신 것은 인간으로 태어나 수행하기 적합한 인연을 얻기 어려움에 대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몇 분 라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보배롭게 하는 것도

인간의 몸을 쓸모없이 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손에 달려있네.”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지금 받은 이 인간의 몸을 쓸모없게 만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타락시키는 것도, 일시적이든 궁극적이든 인간의 몸을 보배롭게 만드는 것도 자신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수 천만 명의 사람을 타락하게 하는 것 또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 짐승은 어떤 경우에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호랑이나 사자와 같이 보기만 해도 사납고, 육식을 하는 짐승들은 손톱. 발톱. 이빨 어디를 봐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비록 육식을 하고 살아가지만 인간처럼 크게 남을 해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도 뒤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부패하게 하고 타락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몸은 건장하고, 어떤 특별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일을 행합니다. 큰 코끼리에 비하여 인간은 볼품없이 작지만 코끼리 등에 올라타고는 힘도 세고 덩치가 큰 코끼리의 귀를 사람이 발로 차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코끼리는 뒤뚱거리면서 갑니다! 인간은 정말로 사악하지 않습니까?


인간 자체가 지니고 있는 힘은 그다지 세지 않지만 인간의 사악한 지식은 다른 사람은 물론 짐승들까지 지배할 수 있도록 합니다. 정말 나쁜 짓입니다. 인간들처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하는 존재가 이디에 또 있겠습니까? 참으로 어리석지 않습니까? 인간의 지혜를 악하게 쓰면 자신과 타인, 모두를 타락하게 하고, 모두에게 해를 끼칩니다. 지혜로 모든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이롭게 하는 것 또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을 보배롭게 하는 것도 인간의 몸을 쓸모없게 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손에 달려있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렵게 얻은 이 인간의 몸을 보배롭게 쓰기 위해 어떻게 하는지 봅시다. 우리에게는 불성-일체지-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의식이 있어 행복과 고통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은 무엇이다’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으며, 대상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본인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으며, 이것은 부처의 경지-모든 것을 아는 지혜인 일체지를 이루는 근간이 됩니다. 이는 진제와 속제로 모든 것은 ‘한순간에’ ‘한 번에’ ‘하나의 의식’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상을 인지할 수 있는 우리의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대상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은 의식을 가진 자에게는 반드시 존재합니다. 이는 의식의 본성이 바로 대상을 인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일체지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근본 바탕은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의식에 의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지 능력을 가진 의식으로 일체지를 이룰 수 있는 이것을 불성이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음은 본래 공한 것이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른 것에 의해 이루어졌는가 하고 구체적으로 찾아보아도 그것도 아닙니다. 과거의 의식과 현재의 의식과 미래의 의식과 마음과 마음의 작용(심소心所)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관찰해 보아도 의식이라는 것을 찾아내기란 어렵습니다.


의식의 흐름을 ‘흐름이 있는 실재로 존재하는 법(실유법實有法)’이라고 합니다. ‘흐름이 있는 실유법’은 다른 것-다섯 무더기(오온五蘊)-에 의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의 흐름을 없애면 의식의 흐름은 있을 수도 없으며, 찾아낼 수도 없습니다. 어떤 물건이 그것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부분에 의해서 생겼다고 가정하면, 그 각각을 떼어내어 버리면 그 물건을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의식의 흐름이 되는 그 각각의 것을 없애버리면 그 의식의 흐름이 없고, 의식의 흐름이 없으면 그것에 대응하는 의식의 흐름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복잡하거니와 어떻게 말을 해도 어색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이 의식 자체도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공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의식은 연기에 의지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의식은 그 어떤 것에 의지하지 않고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는 실체가 없는 공(空)입니다. 그런 것을 공성(空性)이라 합니다. 마음은 밝음 그 자체이고 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있다고 믿는 것은 뒤집힌 의식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허물을 정화할 수 있는 것이며, 그를 통해 일체지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허물을 없애서 궁극적으로 번뇌가 정화된 객진청정의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허물을 버리지 못했어도 자성을 불성이라 하는 것입니다.


명확하게 인지하는 그 의식 자체에서 삼신-법신. 보신. 화신-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삼신을 이루는 근원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에 있는 이 식(識)을 바탕으로 부처의 경지를 이룰 수 있으며

그 근원은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며, 이미 스스로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불성이라 합니다. 불성이라는 것이 본래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이라는 분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에 불성이 없다면 부처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내면도 타타가타(tathaagata,여래)가 될 수 있는 불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법륜을 굴리시고 중생에게 이 길을 보이신 까닭은 우리들 내면에도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성을 덮고 있는 허물을 없애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행방편을 부처님께서 몸소 체득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불성이 있으므로 불성을 덮어 어둡게 하는 번뇌를 버림을 통해 최고의 깨달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이 길을 가면 번뇌를 다 버릴 수 있고 최고의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은 분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불성이 있음을 명상하자마자 부처가 된 것은 아닙니다.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인 삼 아승지 동안 공덕을 지으셨습니다. 불성이 우리에게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불성을 덮고 있는 허물을 없애기 위해서 차례로, 지혜와 방편의 길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차츰차츰 마음의 허물들이 없어지며, 아주 미세한 허물까지도 없앨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차례로 되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 드린 것처럼 깨달음의 길을 차례로 가기 위해서는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라 하신 것처럼 깨달음이 점점 증장되어야 합니다. 가행도. 자량도 등을 차례대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수행 단계가 점점 높아지면 동시에 버려야할 것들은 버려야, 깨달음도 증장되는 것입니다. 나가르주나의 제자인, 3세기의 인도의 학승인 아리야데바(Aryadeva,성천聖天)께서도 [사백송(四百頌)]에서 번뇌를 없애는 단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공덕이 아닌 것들을 끊고 그 다음에는 나 또한 없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끊는 사람을 과연 선지식이라 할 수 있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이 말씀처럼 해야 합니다. 먼저 공덕이 아닌 업과 행위들을 없애야 합니다. 그 다음, ‘나’라는 아집을 없애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우리를 삼악도로 끌어내리는 번뇌로 인해 생긴 업과 행위를 없애고 그 다음, 번뇌로 인해 생긴 업과 행위의 원인인 아집을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아집을 없애는 것보다 먼저 거친 번뇌*에서 생긴 거친 행위와 악업들을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섬세한 번뇌인 ‘나’라고 여기는 아집이 뿌리가 되어 생긴 섬세한 번뇌들을 무아를 깨닫는 지혜로써 없애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끊은 사람”이라는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는데 이렇게 설명하면 될 것 같습니다. 깊고 수승한 공성을 위없는 이치로써 가장 완벽하게 명상한다면 악업의 허물은 물론 그 습성까지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끊는 사람을 “과연 선지식이라 할 수 있네!” 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친 번뇌

본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거친 번뇌를 없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거친 번뇌 때문에 마음이 산란해져 수행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친 번뇌는 몸과 입으로 짓는 번뇌와 마음으로 짓는 번뇌로 나눌 수 있고, 몸과 입으로 짓는 살생. 도둑질. 사음. 망어. 기어. 양설. 악구가 더 거친 번뇌가 될 것이다. 마음으로 짓는 번뇌는 탐. 진. 치가 있다.


일체지는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일체지를 이루는 것을 우리의 마지막 목표입니다. 일체지를 이루려면 앞에서 말한 다섯 가지 수행의 길을 통해야 합니다. 이 다섯 가지 수행의 길을 통해 세세생생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 수행의 길을 수행할 수 있는 바탕인, 인간으로 태어나 수행하기 적합한 인연을 얻기가 어렵다 한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일체지를 이루려면 인간으로 태어나 수행하기 적합한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수행하기에 적합한 인간의 몸을 받으려면 반드시 열 가지 계(십선계十善戒)를 지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일체지를 성취하는데 첫 번째 바탕이 되는 인간의 몸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십선계를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선계를 지킬 때 거친 번뇌로 인해 생긴 악한 행위들을 끊을 수 있으며, 수행을 하기 적합한 인연으로 거듭날 수 있으며, 이런 인연들의 결과로 무아를 깨닫는 지혜를 익혀 일체지를 이루는 것입니다. “공덕이 아닌 것들을 먼저 끊고” 이 구절은 십선계를 수행해서 거친 번뇌에서 비롯한 악한 행위들을 단절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다음으로 나 또한 없애” 는 아집을 없애기 위해서 지관(止觀)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끊는” 이라는 말씀은 지관을 수행하는 것과 동시에 보리심과 같은 방편을 수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수승한 계. 정. 혜 삼학이 나오는 것입니다. 불교 이외의 가르침에도 삼학은 있지만 외도의 삼학으로는 아집에서 비롯되는 미세한 번뇌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불교에서는 무아를 깨닫는 지혜를 익혀 아집에서 비롯된 미세한 번뇌를 모두 없앤 상태를 열반이라 합니다. 이렇게 열반에 이르게 하는 삼학을 두고 ‘수승한 삼학’이라 일컫습니다. 외도의 삼학과 불교의 삼학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계를 지키는 목적을 순간의 행복에 두지 않고 열반에 두기 때문에 ‘뛰어난 계학’ 이라 합니다. 삼매를 이룰 때,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깨닫고 관법을 통해 보리심을 관하여 마침내 해탈을 이루기 때문에 ‘뛰어난 정학’이라 합니다. 외도의 세속법을 수행하는 것이 아닌 출세간법을 수행하여 깨달음에 이르기 때문에 ‘뛰어난 혜학’ 이라 합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이 일체지를 이루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악한 행위에 젖어 번뇌를 일으키고, 근기가 낮은 중생이라 선한 행위와 선한 생각을 하는 순간이 적습니다. 지금 우리는 인간의 몸을 받아 일체지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 수행해야 합니다.


나보다 남을 위하는 보리심을 수행하는 것은 수행 가운데 가장 뛰어난 수행입니다. 한순간만이라도 보리심이 생긴다면 크나큰 공덕을 짓는 것입니다. 설사 과거에 악한 행위를 했다하더라도 보리심을 통해 소멸할 수 있습니다. 공성에 대해 아는 것도 이 보리심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보리심이란 아주 심오합니다. 보리심이 일어나기만 해도 그 순간 행복하며, 가장 높은 보살도(상사도上士道)에 이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도 일체지를 이루려면 이런 보리심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삼악도에서 벗어나서 선한 길로 인도하니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 보리심에 정례합니다.”


일시적이건 궁극적이건 우리를 선한 길로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보리심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이 보리심이 싹튼다면 윤회 속에서 악업의 고통을 받는 그 순간에도 악업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력해서 이 보리심을 싹틔우는 사람이야 말로 뛰어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업과 번뇌 때문에 갖은 불행이 닥치고 슬픈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보리심을 통해 일체지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보리심을 내는 것은 일체지라는 열매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또 부처가 되려는 마음을 항상 되새기는 일입니다. 그래서

        

        “중생을 이끄시는 오직 한 분,

        부처님이 한량없는 지혜로써

        보리심을 가장 값진 보배로 관하셨으니” 라고 하신 것입니다.


 한순간만이라도 남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내는 것은 오직 보리심을 수행할 때 가능하기에,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장 핵심적이고, 뛰어난 수행법인 보리심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한량없는 중생이 보리심으로 궁극의 행복과 부처를 쉽게 이룬다고 하셨네.” 보리심의 이익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보리심으로 궁극의 행복인 일체지의 경지에 이를 뿐만 아니라 일시적으로는 세 가지 좋은 태어남(삼선취三善趣)에 이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약하면, 오늘 아침에 말씀드린 것처럼 진정한 보리심이 일어나고 또 보리심에 대한 진정한 열망이 생기기만 해도 우리 삶에 변화가 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보리심에 대한 진정한 열망이 생기면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삶 또한 자신이 바라던 대로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스스로의 마음속에 “허공계가 존재하는 한, 중생이 존재하는 한 나또한 여기에 머물러 중생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하는 게송을 마음에 새기고 ‘이렇게 행하겠다!’ 라는 자세로 생활을 한다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고통’이라는 단어조차 거의 떠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지의 궁극적인 경지 즉 부처의 경지와 일시적인 좋은 태어남-인간. 수라. 천상-에 자연스럽게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리심을 열망하는 그 순간,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출발점에 서는 것이기에 “궁극의 행복과 부처를 쉽게 이룬다 하셨네.” 하신 것입니다.  


    마치 구름 낀 칠흑같이 어두운 밤

        한 순간의 번개 섬광이 모든 것을 드러내듯

        이처럼 한 때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이 세상이 복과 지혜는 잠시 생긴다


6      이처럼 선의 힘은 항상 약하고

        강한 악업의 힘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완전한 보리심이 아닌

        그 어떤 선으로도 악을 조복 받을 수 없네


7      무량한 세월 동안 (중생의 유익함을) 깊이 사유하신

        모든 부처님께서

        이 보리심만이 (중생에게) 유익함을 보시고

        이것으로 한량없는 중생에게

        아주 쉽게 궁극의 안락을 얻게 하셨네


8      (나의) 끝없는 윤회의 고통이 없어지기를 바랄뿐만 아니라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모두가) 더없는 행복을 원할 때마저도

        보리심만은 버리지 말아야 하네


보리심을 일으키는 그 순간, 모든 번뇌를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현재 자신이 번뇌에 짓눌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과 같이 번뇌라는 큰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윤회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도 번뇌가 마음의 평화를 빼앗지 못하니 "끝없는 윤회의 고통이 없어지기를 바랄뿐만 아니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다른 중생이 원하지 않는 것을 모두 없앨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세속에서 더없는 행복을 누리려고 할 때도 보리심만은 언제까지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입보리행론을 공부하는 수행자들이 전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의 끝없는 윤회의 고통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순간조차도

        보리심만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

        "허공을 가득 채울 만큼 수많은 중생의 고통이 없어지기를 바랄 때도

        보리심은 언제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

        "자신과 타인 모두, 윤회계의 끝없는 행복을 원할 때에도

        보리심만은 언제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


9      보리심을 일으키는 그 순간

        비록 윤회의 사슬에 얽매인 가련한 자일지라도

        행복하신 분(선서)의 아들(보살)이라 불리며,

        세간의 천신들과 사람들까지도 받들리니.


진정한 보리심이 생기면, 그 순간부터 아무리 악업과 번뇌가 많고 근기가 낮은 중생이라 해도 보리심을 일으킨 덕에 아귀, 축생, 지옥 같은 삼악도는 물론이고 세간의 천신들과 사람들까지도 예경을 한다는 것입니다. 보리심을 지녀 일체지를 이룰 수 있는 뿌리를 지닌 사람이기에 "행복한 분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며, 그래서 부처의 아들이라 한 것입니다.


10     (철을) 금으로 변하게 하는 최고의 연금액처럼

        이미 받은 이 더러운 몸뚱이를

        값비싼 보석에도 견줄 수 없는 부처의 몸으로 바꾸려고 한다면

        보리심을 소중히 잘 지녀야 하네!


내가 지금 받은 이 몸이 더럽고, 불결함 그 자체이며, 보잘 것 없고, 아픔과 고통, 두려움을 느끼고, 삼독과 같은 번뇌로 가득 차 있지만 연금액으로 철을 금으로 변하게 하듯이 보리심을 향해 마음을 일으키고 보리심을 소중하게 간직한다면 그 사람은 그 어떤 값비싼 보석에도 견줄 수 없는 일체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의 몸으로 바꾸려고 한다면" 이는 우리의 몸이 부처의 몸으로 바뀐다는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보리심이 증장되어 부처의 경지를 이룬다는 뜻이지, 몸 그 자체가 부처가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11     중생을 이끄시는 오직 한 분, 부처님이 한량없는 지혜로

       이것을 가장 값진 보배로 관하셨으니

       육도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은

       소중한 보리심을 굳건하게 지녀야 하네!


중생을 이끄시는 행복한 분께서 지혜로 ‘있는 그대로의 실상(여소유성如所有性)’과 ‘모든 존재에게 있는 차별성(진소유성盡所有性)’을 그릇됨 없이 관하신 것은 육도에서 윤회하는 중생에게 일시적인 행복과 궁극적인 행복을 주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선의 근원입니다. ‘완전히 정화되어 티 없고 위없는’ 이것은 오직 타인을 위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값진 보배로 관하셨으니

육도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은 소중한 보리심을 굳건히 지녀야 하네.”

육도를 벗어난다는 것은 윤회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과 궁극적인 것 모두, 버려야할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위해서, 깨달아야할 모든 것의 근원으로 가장 소중한 것이 ‘보리심’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소중한 보리심을 굳건히 지녀야 하네.” 라고 하신 것입니다.


12     다른 모든 선업들은 파초와 같아서

        열매를 맺는 즉시 시들지만

        보리심의 나무는 항상 푸르러서

        (끊임없이)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더욱 성장하노라.


보리심의 이로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상사도 단계를 수행할 수 있는 공덕의 선한 씨앗으로 절. 탑돌이. 등불 공양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절을 할 때, 탑돌이를 할 때 또 등불 공양을 할 때 ‘내생에도 인간의 몸의 받기를..’ 이렇게 기도를 하고, 발원을 합니다.


선행을 했더라도 후에 상사도에 태어난다면 이는 결실(과果)를 맺은 것이기에 그 공덕은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공덕을 이룸으로써 끝이 나는 선행의 씨앗’ 이라고 합니다. 상사도 단계를 수행할 수 있는 인간의 몸을 받으면 공덕의 힘은 끝이 납니다. 어떤 결실을 바라고 세운 원은 그 결실을 이루면, 그 원력이 사라집니다. 아라한과를 증득하기를 발원하여 아라한과를 이룬다면 이 발원은 ‘끝이 나는 선행의 씨앗’인 것입니다. 절 또는 등 공양 같은 선행을 통해 번거로움을 소멸시키고 난 후 아라한과를 이루었으면 하는 원을 세워 수행하는 것을 해탈 즉 아라한과를 이루기 위한 선행이라 합니다.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선행을 통해 번뇌가 모두 사라지면 아라한과를 성취한 것이며, 이 선행의 결실을 맺는다면 그 선행의 힘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절을 하거나 공양을 통해 선행을 쌓을 때 “허공을 가득 채울 만큼 수많은 중생”을 위해서 일체지를 이루겠다는 발원을 하면서 선업을 짓는다면 그 선업의 결실은 부처가 될 때까지 영원할 것입니다. 이런 선행의 씨앗은 처음부터 수많은 중생을 위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중생의 고통이 사라지기 전까지, 공덕의 힘은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공덕을 이룸으로써 끝이 나는 선행의 씨앗과 해탈을 이룸으로써 끝이 나는 선행의 씨앗과 같은 선행을 파초와 같다고 한 것은 파초는 열매를 맺으면 시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선행은 하나의 목적을 갖고 원을 세우기 때문에 그 결실을 얻으면 선행의 힘은 소멸할 수밖에 없지만, 보리심을 목적으로 할 때 그 공덕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허공계가 다할 때까지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것인데, 정말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생각 그 자체만으로도 끝이 없는 것이기에 그 결실 역시 허공계가 다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보리심의 나무는 항상 푸르러서 (끊임없이)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더욱 성장 하노라.” 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보리심의 공덕 즉 복을 쌓은 것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죄악을 정화시키는 데에도 보리심의 힘은 정말 큽니다. “선근이 있는 자라면 어찌 그것에 의지하지 않겠는가?” 하신 것처럼 악업을 정화할 때도 보리심보다 뛰어난 것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13     무섭고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보리심에 의지하면 찰나에 업을 벗는다.

        용맹하게 보리심을 일으키면 모든 공포가 사라지니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이것에 의지하지 않겠는가?


14     보리심은 말 겁(末劫)의 불처럼

        한순간에 반드시 (죄를) 태운다.

        (보리심의) 헤아릴 수 없는 이로움을

        미륵보살께서 지혜로 선재동자께 말씀하셨노라.


평소 우리가 어떤 행위를 ‘악’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과보로 불행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반면 ‘선’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결과로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원하는 행복을 ‘선’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행복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므로 고통이나 불행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원하지 않는 고통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짓누르고 있습니다. 악업의 과보를 받는 사람은 고통을 받고 슬퍼합니다. 자신이 당하는 불행의 원인을 ‘악’이라 합니다.


이런 ‘악’이 생길 때마다 네 가지 힘(사력四力) 즉 네 가지의 대치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사력은 삼보에 귀의하는 힘, 해독제를 통해 잘못된 행동을 극복하는 힘, 뉘우치는 힘, 잘못된 점을 다시 행하지 않는 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로 삼보와 스승께 지은 악업과 아래로 중생에게 해악을 끼친 악업,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로 삼보의 물건을 훔쳤거나 부처님 몸에 피가 흐르게 했거나 부처님의 법은 없다고 여기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삼보를 대상으로 짓는 악이 있고, 중생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 - 중생의 목숨을 빼앗거나 도둑질. 삿된 음행. 거짓말. 악언으로 몸과 입과 마음으로 중생에게 해를 끼쳐 지은 악업들 - 이 있습니다. 반면, 보살심은 어떤 중생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나 자신보다도 모든 중생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오직 중생을 돕겠다는 마음이 보살심입니다. 이런 마음이 생기면 그동안 중생에게 지은 죄악을 소멸하는 데에도 이롭습니다. 보살심은 다른 중생에게 해를 끼치는 악업과는 반대로 중생을 부처의 경지로 이끌며 오직 허공계에 가득 찰만큼 수많은 중생을 위하겠다는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허공계에 가득 찰만큼 수많은 중생을 대상으로 해를 끼치겠다는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몇몇 중생을 대상으로 삼거나 (특정한) 그룹을 대상으로 악한 마음이 생길 수는 있어도 모든 중생에게 악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 가능할까요? 중생에게 지었던 악업을, 같은 대상인 중생에게 ‘언제까지나, 그들의 어떤 행복이건, 내가 다 이루겠다.’는 생각의 힘이 생깁니다. 이같이 부처와 보살들께 발심을 해 ‘부처를 이루겠다.’는 것이며, 오직 타인을 위해 부처를 이루겠다는 것이므로 이는 일체지에 신심을 내는 것뿐만 아니라 일체지를 이루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삼보를 향해 일체지를 이루겠다는 원을 세운다면 삼보에게 악업을 짓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신심 중에서 가장 큰 신심입니다. 그래서 ‘보살심’처럼 악업을 정화하는 데 뛰어난 것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평상시 우리가 지은 악업을 참회하고 정화하기 위해 절을 하고 탑돌이를 하거나 진언을 외우는 등 많은 선행들을 쌓습니다. 이 모든 선행은 아주 좋은 것이며 지은 죄업을 참회하는 데 참 이롭습니다. 그러나 예불을 하는 순간에도 나태할 수도 있고, 머릿속에는 돈 생각으로 가득 차 있거나 잡념들로 가득 차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한없는 중생을 위해 일체지를 이루게’ 하시고, ‘이것을 이룬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눈물이 날 정도로 희열에 차서 보리심을 생각한다면 예불을 하는 순간, 그 어떤 나태함도 생기지 않을 것이며 질투 같은 나쁜 감정도 생기지 않습니다. 진정한 참회를 하려면 보리심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보리심은 말 겁의 불처럼 한순간에 반드시 (죄를) 태운다.”는 말은 공덕을 쌓을 때 보리심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며 악업 정화에도 보리심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일체지를 이루려는 사람이 복을 쌓고 죄악을 참회하는 데에는 오직 이것뿐이라는 것입니다. 복을 짓고 악업을 소멸시키는 것, 이 둘 다 보리심을 수행함으로써 얻는 큰 이로움입니다.     “(보리심의) 헤아릴 수 없는 이로움을 미륵보살께서 선재동자께 말씀하셨노라.” 이 구절은 화엄경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일시적인 공덕과 궁극적인 공덕을 쌓는데 이로운, 제일 선한 마음인 티 없는 보리심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15     그러한 보리심을 요약하면

        두 가지로 볼 수 있으니

        보리심을 일으키는 마음과

        보리심을 실천하는 마음이다.


샨티데바께서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발보리심과 보리심을 실천하는 행보리심으로 나누어 말씀하셨습니다. 발보리심과 행보리심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16     가려는 마음과 가는 것의 차이는

        실제 아는 것 것처럼

        지자(智者)는 이 둘의 차이를

        차례로 알아야 한다.


“가려는 마음과 가는 것의 차이를 실제 아는 것처럼”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길을 가려고 하는 생각만 있을 때와 생각만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비교해 보면 ‘가겠다.’는 생각은 같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는 오직 ‘가겠다.’는 마음뿐이지만 두 번째는 ‘가겠다.’는 마음뿐만 아니라 실제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예로 “지자(智者)는 이 둘의 차이를 차례로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체지를 이룬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마음을 발보리심이라 합니다. 반면 일체지를 이루기 위해 보살계를 받은 후 직접 행동으로 보살행을 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보살행을 하기로 맹세한 것은 실천의 시작이므로 이런 발심을 행보리심이라 하는 것입니다.


17     발보리심 그 자체만으로도

        윤회세계에서 큰 과보를 얻겠지만

        보리심을 실천할 만큼

        한없는 공덕은 얻지 못하네.


발보리심을 하는 것만으로도 궁극의 일체지를 성취할 수 있고, 잠시 윤회세계에 머무는 동안에도 많은 이로움을 누리겠지만 행보리심을 하는 것만큼의 큰 이로움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보리심을 통해 얻는 이로움이란 무엇일까요? “보리심을 실천하는 만큼 한없는 공덕은 얻지 못하네.” 이처럼 보살행을 하겠다고 맹세를 하고 발심을 한 그 순간부터 발보리심이 기울기 전까지는 순간순간 끊임없이 공덕이 증장한다는 것입니다.


18     보살계를 받은 그 순간부터

        중생세계의 무량한 중생이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나도록

        물러나지 않는 마음으로

        보살계를 온전히 받아 지니겠노라.


19   보살계를 지니면

        혹시 잠에 빠지거나 비록 게을러도

        그 공덕의 힘은 끊어지지 않고

        오히려 무한한 허공과 같이 언제까지나 증장하노라.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타인에게 이로움을 주려는 공덕으로 그 선업의 씨앗은 같겠지만 발심 즉 원을 세우는 차이에 따라 과보는 각각 달리 성취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일체지를 이루기 위해서 선업을 쌓겠다는 보리심을 실천해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하고 알 수 없으면 말고’ 하는 식이 아닌 ‘보리심을 이루기 위해 매순간 노력하고 실천하겠다.’는 발심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맹세를 했기에 비록 잠을 잔다거나 혹은 방일하거나 나태해진다 해도 보살계를 받은 그 순간부터 공덕은 언제나 증장된다는 것입니다.


20     이는 이치에 맞는 것으로

        [보살묘비경(菩薩妙臂經)]에서 

        소승의 길에 안주하려는 중생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보리심에는 많은 이로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21     중생의 두통 정도를

        없애려는 생각만 해도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이기에

        무량한 공덕이 있다고 할진대

22     중생 개개인의 끝없는 불행을

        완전히 없애려고 하는 마음은

        모든 중생에게 한량없는 공덕이 갖추어지기를 원하는 것인데

        그 무량함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은 보리심의 이로움에 대해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옛날 ‘자오의 딸’ 이야기처럼 몇몇 중생의 두통 정도를 없애려는 발심을 해도 헤아릴 수 없는 이로움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허공처럼 한없는 중생이 고통의 원인에서 벗어나 일체지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이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고귀한 화환(보행왕정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헤아릴 수 없는 중생, 즉 한없는 중생이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쌓는 일체지의 경지로 이끌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보살행을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맹세한 것이기에 가장 선한 마음이며 가장 뛰어난 이타심입니다. 이타심이 가장 용감한 마음이며, 아주 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중생을 대상으로 한만큼의 공덕이 쌓인다는 것입니다.


23     아버지 혹은 어머니,

        도대체 그 누구에게 이타심이 있는가?

        신이나 바라문

        혹은 신선이라고 해서 이것이 있는가?


이는 세간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정은 말할 나위도 없으며, 새나 짐승까지도 새끼는 끔찍하게 아낍니다. 어머니가 자기 자식에게 주는 정과 사랑은 매우 깊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과 정 또한 깊지만 어머니의 사랑과 정은 이보다 더 크고 깊습니다. 이에 반해 일반적으로 거북이나 도마뱀 같은 짐승은 어미와 자식이 서로 같이 지내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서로 정이나 사랑이 있을까 싶습니다. 이러한 예로 볼 때 애정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자식은 태어나서 어머니를 의지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살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명백하지 않습니까? 본인이 살아가는데 어떤 대상에 의지할 필요 없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면 과연 그 대상에게 정이 생길까 싶습니다. 인간을 예로 들면 살아가는 데 어머니에게 의지해야 되기 때문에 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정은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과 법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떠나,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에게 의지함으로써 그 대상에게 친밀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부모에게 의지하는 일이 줄어들고, 그러면서 자연히 정도 멀어집니다. 새를 예로 들면 새는 둥지에서 독립하는 순간부터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이 사라집니다. 이런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애정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모는 자식을 매우 아끼고 애정을 주는 분들이지만 한없는 중생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일체지를 이룰 수 있도록 이끌어 주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또한 세간의 사람이 존경하고 귀의하는 천신. 바라문. 신선들에게도 이와 같이 오직 타인만을 위하겠다는 마음은 없습니다.


24     일찍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모든 중생을 위하는 마음을

        꿈에서조차 낸 적이 없는데

        다른 이들을 위하는 그 뜻이 어찌 생기겠는가?


스스로 모든 허물을 버리고 완전히 깨닫는 일체지를 이루려는 마음이 ‘자신을 위해서도 생기지 않은 사람의 마음에 타인을 위하는 이런 마음이 어떻게 생기겠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5     다른 중생과 자신을 위하는 것은 물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중생을 위한

        이처럼 뛰어난 마음의 보석은

        예전에 없었던 아주 희유한 탄생이네.

26     모든 중생이 기뻐하는 근원이요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는 신령스런 약인

        보배로운 보리심의 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네.


마음에서 진정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타인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라면 육도의 모든 중생이 그를 좋아할 것입니다. 짐승이 아무리 불쌍하고, 어리석고, 무지하다고는 하지만 누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지는 압니다. 인간 역시 아무리 어리석다 해도 누가 자신을 아끼고 좋아하는지 압니다. 그러므로 보리심은 “모든 중생이 기뻐하는 근원이요,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신령스런 약”이라 하셨습니다.  누군가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큰 불행이 생겼다고 합시다. 고통과 슬픔에서 그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은 돈도 아니며, 새 옷이 그를 도와주는 것도 아닙니다. 과연 무엇이 그에게 진정 도움이 될까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사랑(자비)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자애)과 자비를 베푼다면 불행과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는 그의 마음에 ‘아!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 있고, 나의 고통을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으며, 이 고통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그에게 진정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리심을 “모든 중생이 기뻐하는 원인이요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영약” 이라 한 것입니다. 오직 타인을 위하는 티 없는 마음에다 지혜까지 뒷받침이 되는 이 보배로운 보리심의 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은 행보리심의 이로움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말씀하셨습니다.


27     돕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만으로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보다 수승할진대

        한 중생도 남기지 않고,

        모두의 행복을 위하는 노력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이 일어나기만 해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보다 수승하다는 것입니다. [보왕삼매경]에도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삼계에 칠보와 같은 공양물로 아무리 자주 올린다 해도, 많은 값비싼 것들을 아무리 수승한 분들께 항상 공양 올린다 해도, 사랑과 자비심을 일으킬 때 생기는 공덕에는 비할 수 없네.’ 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보살과 부처님께 크나큰 공양을 올리는 것보다는 중생에게 보리심을 베푸는 것이 더욱 이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보다 더 수승할진대” 직접 일체지를 이루겠다고 굳건히 맹세하고 실천하는 사람의 이로움 즉 공덕은 말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허공과 같이 한없는 중생을 위하는 선한 마음을 내어, ‘타인을 위하는 것’을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이유는 중생 모두가 고통을 바라지 않고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자신의 행복 위하고 고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실천하는 중생을 위해, 그들의 모든 고통을 없애고 그들을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하는가? 그럴 아무런 이유가 없지 않는가?’ 반문할 수 있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28     고통을 여의려는 마음은 있지만

        (중생은) 고통을 향해 치닫고

        행복을 원하지만 어리석음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적처럼 파괴하네.


자기 자신을 예로 들어서 봅시다. 시작 없는 옛날부터(무시이래無始以來) 지금까지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하지 않는 마음은 항상 있었을 것입니다.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원하지 않기에, ‘어떤 것은 행복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며 ‘어떤 것은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짐승의 몸을 받으면, 무엇이 좋고 무엇이 그른지 알 수 없습니다. 짐승은 무지하며, 멍청하게 어슬렁거리며 다닙니다. 이 불쌍한 짐승들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도와줄 사람도 없고, 아무런 능력조차 없는 짐승들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또 고통을 없애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짐승들 스스로는 행복을 얻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는 행동이 우리 인간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고통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굳이 불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런 현상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 수 있겠지요. 같은 인간이라도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의 경우, 행복을 원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는 행동을 그보다 조금 더 뛰어난 사람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타락하게 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하고 어리석다.’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다들 자신이 제일 영리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만심. 분노. 질투심. 집착 같은 번뇌와 늘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번뇌들을 제일 가까운 친구로, 온 마음을 의지하는 친구로 여기고 있습니다. 번뇌는 이름뿐만 아니라 그 행동의 결과를 보아도 그 과보가 나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근본번뇌인 삼독과 여러 가지 번뇌에 마음을 뺏기고, 의지하면 나중에 나쁜 일밖에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분노가 일어날 때 이 번뇌가 자신을 보호해주는 것처럼 느낍니다. 다른 사람이 우쭐거리거나 자신을 함부로 대하면 화가 납니다. 화를 내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분노는 자신에게 또 다른 만용을 부리게 합니다. 분노로 인해 만용이 생깁니다. 평상시 아주 순한 사람도 화가 나면 ‘겁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화가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집착이 일어나서 자기 자신을 아껴주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노가 자신을 치켜세우는 것 같습니다. 질투를 할 때도 ‘너,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하면서 후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나’라고 여기는 아집을 마음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을 자신의 마음 가운데 지니고 있습니다. 번뇌의 뿌리인 ‘나’라고 여기는 아집은 나만을 위하는 이기심과 함께, 서로를 돕고 돕는 사이입니다.


아집을 마음의 중심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위없는 구원자. 길잡이. 친구처럼 여겼지만, 결코 이것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되거나,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행복만을 바라지만 순간순간 끊임없이 불행한 일들이 생깁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고통들 가운데 하나를 없애고 나면 또 다른 고통이 다가옵니다. 또다시 다른 고통 하나를 없애면 또 다른 고통이 계속해서 다가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우리가 업과 번뇌로써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오온五蘊)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몸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한편, 오온은 어떤 것들에 의해 생기는가? 그것은 업과 번뇌에 의해 발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인 무명이 아집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의 뿌리인 무지 즉 아집을 자신의 마음에서 완전히 없애기 전까지는 영원히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고통의 경우, 삼독의 씨앗이 자신의 몸에 남아있는 한, 아직 다른 조건들이 갖춰지지 않아 눈에 띌 정도의 아픔으로 느끼지 못할 뿐이지 그 고통에서 헤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삼독과 같은 번뇌 중에서도 무지 즉, 아집과 이기심이 서로를 도우면서 마음 가운데 있는 동안에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스스로의 경험을 생각하며 타인을 위해,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28     고통을 여의려는 마음은

        오히려 고통을 향해 내닫게 하는 것이며

        행복을 원하는 것 또한 그 어리석음에 의해

        자신의 행복을 적과 같이 파괴하네.


이런 경우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7대 달라이 라마이신 겔상 갸초(Kalsang Gyaltso)께서 하신 말씀은  정말로 맞습니다. “높거나 낮거나, 재가자이거나 출가승이거나,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누구를 보던 간에 옷 모양. 얼굴 표정. 얼굴에 나타나고 있는 아만이 크고 작은 것 외에는 고통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동등하니 이렇게 비슷한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프구나!” 하셨습니다. 본인 스스로 생각할 때, ‘아집’과 ‘이기심’이라는 적을 이기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그냥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비슷한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을 볼 때면 “마음이 아프구나!”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아집我執)과 현상들이 연기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법집(法執)을 적으로 여겨, 이기심과 법집을 이길 수 있는가를 보고, 이기심과 법집을 이기기 위해 실천하는 것이 수행자의 진정한 임무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따르는 수행자라면 공성을 깨달은 지혜로 법집을 없애고, 티 없이 정화된 보리심 수행으로 이기심을 없애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도 기쁘고 벗들도 즐겁습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행복하며 궁극적으로도 행복하고 언제까지나 영원한 행복을 이루게 됩니다.


29     자신의 안락이 다해

        많은 고통 속으로 빠져버린 중생이

        모든 행복으로 만족하고

        모든 고통을 끊게 하니,

30     무지함까지도 없앨 수 있는

        이런 선행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변함없는 벗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복이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이런 변함없는 벗’이란 보리심은 언제까지나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31     도움을 받은 것에 보답을 하는 사람이

        칭찬을 받을만하다면

        보답을 바라지 않는

        보살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세간에서 이전에 도움을 준 사람에게 은혜를 기억했다 갚는 것이 칭찬받을 만하다면 보답을 바라지 않고 끝없이 베푸는 보살들이 칭찬받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32     몇몇 중생에게 하찮은 음식을 베풀고,

        (겨우) 한 번 먹을 만큼을 보시하고,

        괄시하며 잠시 허기를 면하게 했을지라도

        그가 덕행을 행했다며 칭송을 하네.


흔히 ‘베품’이라 하면 병든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몇몇 중생”은 소수의 중생을 의미합니다. “하찮은 음식을 베풀고”는 썩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은 양의 음식을 말합니다. “한 번 먹을 만큼” 혹은 “잠시 허기를 면할” 정도는 짧은 시간을 의미합니다. “괄시하며” 즉 얕보며 베푼 베품은 하등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로종lojong(마음닦기修心)에서 

        “내가 모든 중생을 향하여, 그 누구와 함께 하더라도,

        모든 사람 가운데 자신을 가장 낮은 사람으로 여겨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진실한 마음을 베풀게 하소서.” 하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나병환자. 장애인. 가난한 사람들을 볼 때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며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보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크게 이롭습니다. 그렇지 않고 돈을 던져 준다거나 하면서 생색을 내거나 멸시가 섞여있다면 보시를 받는 쪽에서 돈을 보고 좋아하다가도 보시를 하는 사람의 얼굴 표정을 보고는 기쁘지 않은 쪽으로 기울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보다는 진정한 애정을 주고, 그 다음 존중하는 마음으로 베푼다면 받는 상대방의 마음도 기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온 일반적인 선행들도 ‘괄시하며 베푼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동기도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으며, 행위 그 자체도 그다지 좋지 않았으며, 선행을 한 후에도 그다지 회향을 한 적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행을 했다고 합니다.


33     한량없는 중생에게 긴 세월동안

        여래의 위없는 안락과

        한없는 서원을 이루게 하려고

        늘 보시하는 것은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는 보리심이 마음속에서 진정 우러나, 눈앞에 보이는 몇몇 중생이 아닌 허공처럼 한없는 중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한량없는 중생에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허공계가 존재하는 한” “모든 중생이 있는 한” 모두가 일체지를 이루기를 원한다는 것은 오랜 시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래의 위없는 안락”이라 하신 것입니다. “한없는 서원을 이루게 하려고..” 하는 보리심의 장점과 이로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행위 즉, 오직 타인만을 위하는 것은 보살의 아름다운 행위로, “늘 보시하는 것은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하신 것입니다. 요약하면 모든 중생이 고통의 뿌리에서 벗어나, 일체지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이끄는 마음은 모든 사람이 칭송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말이 필요 없다는 말씀입니다. 


34     누구든지 이렇게 베푸는 보살을 향해

        만일 악한 마음을 품는다면

        악한 마음을 일으킨 그 수만큼의 ‘겁’ 동안

        지옥에 머물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네.


35     만일 어떤 이가 (보살을 향해) 바른 마음을 일으키고 행한다면

        그 과보는 훨씬 더 늘어나리라.

        보살에게 아무리 어렵고 큰 일이 생기더라도

        악업이 되지 않고 선업만이 증장되리라.


36     마음에 그 거룩한 보배를 일으킨

        그의 몸에 절하나니!

        심지어 해를 끼친 사람조차도 행복의 길로 이끌어 주는

        안락의 근원이신 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여기까지가 [입보리행론] 제1장 보리심의 유익함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1장이 끝났습니다. 유익한 마음이 생기려면 목표를 두고 실천해야 합니다. 목표를 두고 실천한다는 것은 의미가 그릇된 것도 아니며, 순서가 뒤바뀐 것도 아니며, 뭔가를 빠트린 것도 아닌, 조건을 다 갖춰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습성으로 익혀온 마음속의 이기심 즉 이기적인 마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 마음이 따로 있고, 보리심이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런 의식에서 서서히 습관을 들여, 언제나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고 자신의 행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으로 바꿔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변하게 하려면 마음에 습성을 들이고 익힘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수행하는 것에도 정확한 순서와 바른 방편과 모든 것이 갖춰진 방편으로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대자비’에 이르려면 많은 단계를 거칩니다. 일반적으로 고통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하는 마음을 비(悲)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자비라고도 합니다. 평상시 우리들 마음속에 ‘한쪽으로 치우친 자비심’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거나 친구나 가까운 사람이 고통을 겪을 때 ‘아!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자비가 일어납니다. 이것이야말로 ‘대자비’를 일으킬 수 있는 바탕이 되는 마음이니, 이런 마음의 힘을 점점 키워야 합니다.


이런 힘을 키워 나가면 나중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 됩니다. 그러면 단지 내가 아는 사람만을 위한 ‘대자비’의 마음이 아니라 나의 적에게조차 ‘대자비’의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허공과 같이 수많은 중생이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또한 이 마음은 다른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아닙니다. 그들을 위해 내가 실천하겠으며, 이로서 마음을 굳건히 하고, 모든 중생의 고통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쌍히 여겨 중생을 돕는 그 마음을 ‘대자비’라 합니다.


지금 우리 마음속에 있는 작은 자비심은 한쪽으로 치우친 ‘기운 자비심’입니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고, 가까운 사람이 고통을 겪으면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만 , 나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이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원수가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면 ‘그가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참 잘됐구나!’ ‘아주 고소하다!’ ‘그보다 더 큰 고통이 생겼으면’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한쪽으로 ‘기운 자비심’입니다.

 

그러므로 한쪽으로 기운 자비심을 멀리하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심이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자비심은 나를 기준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평상시 나에게 잘하는 사람이 고통을 겪는다면 ‘아! 불쌍하다!’ 라는 마음이 저절로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평상시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다면 아무 생각이 안 들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은 자신으로 인해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잘 하고, 잘못하고’를 떠나서, 모든 중생이 고통은 바라지 않고 행복만을 바란다면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도 고통을 당하지 않고 행복하기만을 바라며, 아무 관련 없는 사람도 고통을 받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고통을 볼 때 ‘아!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통을 겪는 것을 바라지 않는 마음에서 ‘고통에서 벗어났으면’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본인 스스로에 대해 은혜로운 생각이 있어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가 고통을 원하지 않고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통을 바라지 않고 행복만을 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 역시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고통에서 벗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중생’은 본래적인 고통(고고苦苦)*을 겪고 있는 삼악도의 중생은 말할 필요도 없고 괴고(壞苦)*를 겪고 있는 중생, 행고(行苦)*를 겪고 있는 중생뿐만 아니라 번뇌의 허물을 없애 지금은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아직도 두려움에 빠져 있는 중생, 모두를 대상으로 합니다. 이들 모두가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고통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고고에 빠져있는 중생을 보면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유루의 행복에 머물러 있는 중생을 보면 오히려 질투심을 일으킵니다. ‘아! 참 좋겠다!’ ‘아! 나도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배가 아픕니다. 유루의 행복조차 고통인데,


괴고를 고통으로 보지 못해 괴고에 빠져있는 중생을 보면서 ‘이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는커녕 ‘아! 나도 이 사람처럼 되었으면’ 하는 집착과 질투를 느낍니다. 행고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는 고통을 몰라서 생기는 허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을 대상으로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과 ‘내가 이들을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겠다!’는 자비심이 마음에서 일어나려면 먼저 고통을 겪는 모든 이를 소중하게 여기고 그들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길러야 할 것이며, 중생이 겪는 모든 고통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본인 스스로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기르기 위해서 ‘일곱 단계로 나눈 인과 수행법’과 ‘나와 남을 평등하게 바꾸기’, 이 두 가지 방법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일곱 단계로 나눈 인과 수행법은 먼저, 모든 중생을 어머니로 알아 그 은혜를 생각하고, 그 은혜를 기억하며, 마음에서 따뜻한 사랑이 생기게 합니다. 이를 통해 자비가 일어나고 또 확고해진 자비를 통해 보리심을 얻는 것입니다.

          

한편 ‘나와 남을 평등하게 바꾸기’는 이기심의 허물과 이타심의 유익함을 보면서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방법으로 모든 중생을 소중히 여기며 모두를 이롭게 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남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는 ‘나와 남을 평등이 바꾸기’는 [입보리행론]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일반적인 진리(속제俗諦)의 보리심’을 수행하는 데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제9장 선정품에서 아주 구체적이고도 깊이 있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 고고(苦苦) :

        본래부터 겪어야 하는 괴로움으로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과 같은 육체적인 괴로움을 말한다.

* 괴고(壞苦)

        즐거운 상태, 행복한 상태가 사라질 때 경험하는 괴로움을 말한다.

* 행고(行苦)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의미에서의 괴로움을 말한다. 내적, 외적으로 그 어떤 조건에 의지해서 경험하는 모든 행복이나 불행도 행고에 해당한다.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할 때, 일체가 바로 제행(諸行)을 의미하며 모든 행 즉 조건에 의해 생겨나 모든 현상은 괴로움이라는 의미이다.


괴로움을 없애려면 먼저 고통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 괴고. 행고의 세 가지 괴로움에 대해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이중에서도 행고에 대해 아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려면 스스로를 예로 삼으면 좋습니다. 고고라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고통을 말합니다. 짐승조차도 고고가 괴로움인지를 압니다. 괴고라는 것은 유루에 대해 행복을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유루에 대해 행복을 느끼는 것이 사실은 괴고인데, 유루에 대해 행복을 느끼는 것은 비록 행복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세하게 살펴보면 괴로움 그 자체입니다.


행고라는 것은 괴로움의 뿌리와도 같습니다. 여기서 고통의 뿌리라 하는 이유는 현상계 자체가 업과 번뇌로 이루어져 있어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업과 번뇌로 이루어진 삶 혹은 오온을 바로 행고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온을 행고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사성제에 대하여 “이것은 고성제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아마도 업과 번뇌로써 이루어진 오온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업과 번뇌로 이루어진 오온을 “괴로움 그 자체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상을 생각하고 그것이 괴로움 그 자체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상함의 이유가 괴로움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사성제를 설명하실 때 고제의 네 가지 특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무상. 공. 무아. 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상은 ‘순간순간 사라지는 무상’과 ‘생명의 흐름이 죽음으로 끝나는 무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제에서는 순간순간 변하는 더욱 미세한 무상에 대해 설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거친 무상을 봅니다. 자신의 몸을 보아도 나이가 들어가고, 나무를 보아도 점차 변하여 나중에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라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보면 서서히 변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예로 죽음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나이를 먹고, 나이가 들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오온이 자리할 수 있는 힘이 줄어들어 죽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거친 무상이 생기는 경우,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다가 갑자기 죽거나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사라지는 것조차 서서히 변하면서 사라집니다. 서서히 여러 형태로 모습이 변하면서 결국 사라집니다. 잘 생각해 보면 거친 무상이 있기까지 순간순간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아주 명백합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나이가 들어 사라지는 것 또한 여러 해를 거쳐 변하는 것입니다. 한 해는 여러 달이 변하기 때문에 한 해가 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한 해가 바뀔 수 없습니다. 또 한 달이 변하는 것은 여러 날이 변하기 때문에 변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한 달이 변할 수 없습니다. 한 날이 변하는 것 역시 한 시간 한 시간에 의해서 변하는 것이며, 한 시간의 변화 또한 일 분, 일 분에 의해서 변하는 것이며, 그 일 분의 변화는 일 초, 일 초의 변화가 있기 때문에 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순간순간 변합니다.


이렇게 순간순간 변하는 거친 무상은 현상 존재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조건’에 ‘장애가 되는 주변조건’의 업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반면 순간순간 변하는 것-미세한 무상-은 다른 조건과 원인에 의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그 본성 자체가 본디 무상한 것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미세한 무상은 그 원인이 순간순간 사라지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미세한 변화를 하는 것입니다. 미세한 무상은 다시 스스로 생겨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본래 갖추고 있습니다. 그 원인 자체가 적합하지 않아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의 변화에는 생사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무상한 존재이건, 무상하지 않은 존재이건 간에 ‘순간순간 사라지는 것’은 그 원인 자체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원인에 의한 것으로써 ‘나’라는 것은 오온에 의해서 생긴 것입니다. 윤회계의 중생은 각자가 받은 오온에 의해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각각에 의해서 생긴 이 오온은 순간순간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는 그 자체에서 생긴 원인에 의해서 ‘순간순간 사라지는 것’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이렇게 순간순간 사라지는 것을 생기게 하는 원인의 중심에는 ‘업’과 ‘부모의 정혈’과 많은 것이 있지만 이유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무명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십이연기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무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확실합니다. ‘무명’이라는 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번뇌의 뿌리와 같으며 뒤집힌 의식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의해 가려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오온의 근본을 깊이 살펴보면, 고통의 뿌리와 번뇌의 바탕인 무지한 법집에 의해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업과 번뇌에 의지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업과 번뇌로 이루어진 이 오온의 원인을 찾아봅시다. ‘인간의 몸을 받은 것’을 예로 들어 봅시다. 우리 몸은 불결한 36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근본을 찾아가면 무명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받은 것’은 영원히 즐겁거나 좋은 것이 아니라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행(行)이라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 근원에는 번뇌가 있으며, 번뇌는 자신을 타락시키고 다른 사람도 타락시킬 뿐만 아니라 모두를 타락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번뇌로 인해 생긴 이 몸은 ‘썩 좋지 않은 것’이라는 마음이 생길 때, 앞서 말한 것처럼 번뇌를 없앨 수 있습니다. 번뇌가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벗어날 수 있는 것으로 여길 때 ‘번뇌에 의지하고 있는 이 오온에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번뇌의 얽매임에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이 마음과 번뇌로 인해 생긴 ‘이 오온에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이 마음이 생길 때 이것을 염리심(厭離心)이라 합니다.


행고를 생각하고, 이를 통해 해탈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야 말로 수행으로 깨달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동기가 잘못되지 않은 염리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모든 중생을 위해 마음을 열 수 있다면, 자신을 바탕으로 하는 번뇌에 얽매여 있는 것과 법집인 무지에 의지해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삼계의 모든 중생은 법집의 노예입니다. 세세생생 법집의 노예로, 행복을 바라지만 행복할 수 없는 그 이유는 이 몸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우리들 자신 속에 존재합니다. 이것은 매우 소중하다고 우리들은 생각하며 그렇지 않으면 두려워 고통이 올 것처럼 느낍니다. 무명은 바른 실상을 뒤집어 놓습니다.


이와는 정반대가 되는 ‘실재하는 법의 실체(법집法執)는 없다’는 것을 앎으로써 ‘본디 마음은 공한 것’임을 안다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통의 무명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이 몸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내가 없애겠다!’는 마음이 왜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면, 고통을 겪을 때마다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만 있을 뿐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며, 그런 방법에 의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진정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마음이 강력하게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만큼 자비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통을 없앨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지하여 길을 알려고 하지 않고 등을 돌리거나, 원래 고통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고통을 더 불러들이는 것을 볼 때, ‘아! 어떻게 하나?’ ‘이를 어쩌나?’ 하는 무한한 자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공성을 깨달은 지혜를 동반하는 자비심은 그 힘이 아주 큽니다.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보리심을 수행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고통에 빠져있는 모든 중생을 위해 자비와 이롭게 하려는 마음과  ‘무슨 고통을 겪고 있는가?’를 알아차리는 것, 이 두 가지가 함께 할 때 자비심은 크게 일어납니다.


어제 부처님의 법을 설명할 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사성제를 생각하면 삼보(三寶)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삼보가 어떤 것인지 알고, 이로써 발심의 유익함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이로써 법을 수행할 수 있는 바탕인 ‘인간으로 태어난 좋은 기회’를 낭비하지 말아야 하며, 법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면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무상을 생각하고 의미 있는 이 기회를 얻은 지금, 조심하지 않는다면 죽은 후 그리고 다음 생에 큰 아픔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친 무상인 ‘죽음의 무상’을 생각해 법을 행하도록 노력하고, 꾸준히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인과응보와 그 근원인 번뇌에 의해 우리가 존재하며, 그 모든 것이 행고임을 알아 윤회에 집착하는 마음을 바꾸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쫑카파 대사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기회를 얻기 어렵고 생은 짧으니

        이에 대해 반복하여 습성을 들이면,

        이생에 집착하는 것을 없앨 수 있네.

        인과응보에는 속임이 없으니

        윤회의 괴로움을 반복해 생각한다면

        다음 생에 대한 집착도 없앨 수 있네.

        이처럼 습성을 들임으로써

        세간의 풍족함을 바라는 마음이

        한순간에도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네.

        이로써 밤낮없이 해탈을 바라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때 진정한 염리심이 생기네.”


그럼 다음에 [입보리행론]에서 ‘죄업참회품’과 ‘보리심 전지품’을 설명할 것이며, 발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미리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