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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7. 입보리행론

2. 입보리행론 달라이라마 법문

2. 입보리행론 달라이라마 법문


찬탄품 1 - 제1장 보리심 공덕 찬탄품


인도말로는 "보디싸따짜리야아와따라 Bodhhisattvacaryavetarr"이며 티베트말로는 "장춥 쎔뻬 쬐빠라 죽빠 JangChubSemsPheSpyedPaLaHjukPa"입니다. "보살행에 들어가다"라는 의미입니다. 티베트어로 번역된 경전의 첫머리는 언제나 "인도말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것은 인도어에서 번역된 것임을 알리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해당 경전이 제목을 알립니다.


JangChub은 보디bodhi 즉 보리를 의미합니다. 보디에는 '허물을 청정히 하는', '허물을 씻는', '허물을 정화시키는' 뜻도 있습니다. 티베트어로, '보디'라는 말의 두 가지 뜻을 모두 포함할 수 있도록, 장춥이라 한 것입니다. 아셨습니까? 장춥의 의미를 보면 Jang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허물에 대한 대치법으로 깨끗이 한 상태를 뜻합니다. 'Jang'은 '허물을 정화시킨', '깨끗이 한 것'을 말합니다.'Chub'은 완전히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뒤집힌 의식과 허물을 없애기 위해서는 뒤집히지 않은 의식이 생겨야 합니다. 뒤집히지 않은 의식(지혜)은 진제와 속제의 실상을 사실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하며 깨어 있는 의식을 통해 밝은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깨달은 것이라 하여 '춥'이라 합니다. '춥'은 '깨닫다', '알다'를 의미합니다.


'장춥'에는 많은 단계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장춥'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도를 추구할 때 존재하는 허물을 모두 버리고, 자신이 이루려는 도를 얻은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를 '장춥' 즉 보리라 합니다. 이 보리는 다시 '성문의 보리', '연각의 보리', '대승의 보리'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지금 여기서 말하는 보리는 '큰 보리Mahaa Bodhi'입니다. (이 글 아래서) '성문의 보리', '연각의 보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기 때문에 이 보리를 '성문의 보리'와 '연각의 보리'에 대한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보리의 마음을 가진' 보살이란 '보리의 마음을 가진 분'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즉 큰 보리의 마음을 가진 분인 것입니다.


'보리'는 즉 '큰 보리'로 일체지의 경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편, 보살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대자비의 마음으로 허공과 같이 많은 중생을 보리로 이끌기 위해서 '최고의 깨달음 무상정등정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보살은 '최고의 깨달음'을 목표로 하고 정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을 '보리의 마음을 가진 용감한 이' 즉 보살이라 합니다. 여기서는 보살행 실천을 의미합니다. 행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첫째, 동기가 필요하며 둘째, 실천해야 하며 세째, 실천에 의해 이루는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실천하기 위한 동기를 일으키는 것을 원행(願行)이라 하고, 실천하는 것을 入行이라 하며, 실천을 통해 얻는 결과를 果行이라 합니다. 이와같은 三行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살의 원행은 발심 즉 마음의 동기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기가 있을 때 보살의 행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를 입행이라 합니다. 이것은 일체지를 이루는 씨앗입니다. 입행을 실천함으로써 부처의 경지를 이룰 수 있으므로, 이것을 과행이라 합니다. 이러한 원행, 입행, 과행이 삼행입니다.


찬탄품 2

[입보리행론]은 보살의 ‘삼행’을 설명하고 있는 논서입니다. 이 논서를 통해 보살의 삼행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살 삼행을 실천하는 문에 들어가기에 ‘보살행에 들어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보리의 마음을 가진 용감한 사람(보살)’은 지혜로 깨달음을 목표로 삼고, 자비로 중생을 어여삐 여기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로 근기가 높은 보살의 경우, 보리심은 공성을 깨닫는 지혜를 바탕으로 하며, 대자비는 지혜를 바탕으로 합니다. 이렇게 대근기의 보살도 처음 신심이 생길 때에는 지혜가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심이 생깁니다.


‘장춥’은 ‘허물을 완전히 정화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허물은 내면에 있는 허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내면의 허물을 완전히 정화한다.’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의식의 바른 실상에 대해 무지하여 모든 것을 잘못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뒤집히지 않은 의식으로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뒤집힌 의식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뒤집힌 의식과 뒤집히지 않은 의식은 함께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뒤집힌 의식이 습관이 되어 뒤집힌 생각을 하고, 또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


뒤집힌 의식 그 자체가 본래 그런 것임을 증명하라고 한다면,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의식입니다. 모든 것을 그렇게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을 보고서 ‘그렇게 존재함’을 증명할 때 ‘내가 그렇게 보았다.’라는 것 이외에 다른 근거를 대기란 어렵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독립적으로 생기지 않았음을 비록 우리가 볼 수는 없지만 알 수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독립적으로 생겼다고 인정하는 것에는 잘못된 점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독립적으로 생겼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근거와 이유를 뒷받침한다 해도 애매하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어색합니다.


조건과 원인에 의한 연기법을 보다 광범위하게 설명하면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문제는 쉽게 풀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존재한다는 연기사상을 만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으로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쉽사리 풀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기에, ‘내가 보고 인식하는 것이 진정 그와 같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관찰해 보면 애매하고 불분명한 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나에게는 이처럼 보이더라도, 그것과 달리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근거를 댈 수 있습니다.


그 예로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제법실유(諸法實有)’는 그처럼 보기 때문일 뿐 논리적으로 이것이 ‘제법실유’라고 하는 아무런 근거와 이유는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눈에 보인다고 해서 전부 실제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진실한 것이라면 누구도 속지 않을 것입니다.


③ [입보리행론]의 전승 계보

제14대 달라이라마인 저에게 [입보리행론]이 전해진 계보를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입보리행론]을 쿠누 라마이신 텐진 겔친(Khunnu Lama Tenzin Gyaltsen, 1885~1977)으로부터 처음 들었습니다. 텐진 겔첸께서는 캄지방의 족첸 수행자(자 빠툴 린포체Patrul Rinpoche) 가운데 한 분으로부터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분으로부터 [입보리행론]을 전해들은 것은 1976년도 인도의 보드가야에서입니다. 그 후 조금씩조금씩 [입보리행론]을 혼자 공부를 했습니다. [입보리행론]의 내용은 제 수행에 아주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티베트 모든 종파의 많은 스승과 스님들은, 예외없이 [입보리행론]을 암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다 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입보리행론]이 한국 불자들께서 새롭게 접하는 논일 것입니다. 이 논은 여러분의 신심과 수행에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매번 법문을 할 때, ‘부처님 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먼저 설명합니다. 제 경우, 4살 때부터 “스승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불법에 귀의합니다! 승보에 귀의합니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후 라싸로 가서 일곱 살 때 출가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미계를 받고, 부처님의 제자인 승려가 되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봅니다. 그때 제가 진정 삼보에 귀의를 했던가?


 아마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불법에 귀의합니다! 승보에 귀의합니다!” 말로만 했을 뿐이지, 어떤 분을 부처님이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부처란 그저 ‘어딘가에 계시는 분’ 정도로 여겼을 뿐입니다. 하지만 경전의 내용을 익히면서 ‘부처님!’이라는 분이 계시고, 또 ‘부처님께서 오실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또한 보리심과 공성(空性)에 대해 깊이 성찰을 한 후, 부처님은 여느 사람과는 다른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분에 대한 큰 신심이 생겼습니다. 이 신심은 어렸을 때 가졌던 신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부처님께 귀의합니다!”하고 말합니다. 또 부처님은 아주 소중하고 위대한 분이라고 믿습니다. 어린 시절의 이런 신심은 전통적인 관습에 의해 생긴 것입니다. 우리 티베트 사람 대부분은 불자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처님은 소중한 분”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랍니다.


그래서 다들 ‘그런가 보다.’ 합니다. 그렇게 믿습니다. 어릴 때부터 관습이나 환경에 의해 생기는 이런 신심은 필요하기도 합니다. 또 많은 사람이 이런 방식-관습과 환경-에 의해 신심을 냅니다. 그러다 점차 보리심과 공성에 대해 알아가면서 ‘부처님’이라는 분이 아주 특별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리심과 공성을 알아가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는 마음도 생길 것입니다. 이렇게 지혜에서 비롯되는, 타당한 근거와 이유가 뒷받침 되는 신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신심이야말로 법에 대한 올바른 신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법의 계보

티베트에서는 전통적으로 법문을 시작하기 전에 법상에 오른 이가 어떤 경로로, 누구를 통하여 법을 전해 받았는지 ‘법의 계보’를 분명하게 밝힌다. 그래서 달라이라마께서도 [입보리행론]을 배운 스승을 먼저 밝히는 것이다.


찬탄품 4

[입보리행론]을 보겠습니다.

서두의 예찬은 이 논을 쓰신 분의 맹세 그리고 본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불보살을 찬탄하는 내용입니다. 열반에 잘 가신 분(선서善逝)의 법신을 지니신 보살과 예경을 받으실 모든 분께 정례하오며 선서의 아들(보살)이 율의(律儀)에 들어가는 것을 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요약하여 말하겠습니다. “열반에 잘 가신 분의 법신을 지니신 보살과 예경 받으실 모든 분께 정례하오며..” 여기까지가 위대한 성인들을 예찬하는 글귀입니다.

        

“선서의 법신을 지니신”의 의미는 선서이신 부처님께서 법신을 지녔다 혹은 부처와 그 분신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부처님과 그 분이 지니신 법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보살..”이라는 말은 부처의 경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스스로 노력하며 다른 중생을 인도해주는 승보를 나타냅니다. “예경을 받으실” 대상은 보살들과 계사(戒師), 큰 스승들입니다. 그래서 “예경을 받으실 모든 분께 정례하오며”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서’는 산스크리트어로 수가타sugata라 합니다. ‘수’의 뜻은 ‘즐거운’ 또는 ‘행복한’이며 ‘가타’의 뜻은 ‘갔다’입니다. ‘수’란 [집량론(集量論)]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 뜻을 더 광범위하게 설명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선서는 ‘완전히 가버린 선서’와 ‘완전히 깨달은 선서’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보리를 향해 마음을 내어 행복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입보리행론] 제7장에서 말씀하신 “보리심의 말을 타고 행복에서 행복으로 나아가는 이 마음을 안다면 누가 나태할 것인가?” 이 구절처럼 이 논에서 말하는 티 없이 정화된 보리심이 마음에서 일어난다면 일체지를 이루는데 씨앗을 심는 것과도 같습니다. 세세생생 이 보리심만 잘 지닌다면 행복할 것이며 이로 인해 좋은 곳으로 갈 것입니다.


오직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을 진심으로 내어 보리심을 실천하면 남도 행복하고 나도 기쁠 것이며 일시적으로 즐거운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도 좋은 과보를 받을 것입니다. 이런 행복의 도(道)에 의해 궁극적으로 최상의 진리라 할 수 있는 일체지를 증득하여 영원히 행복하기 때문에 ‘선서’라 하는 것입니다. 팔리어로 된 경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오셔서 처음으로 해탈을 이루셨다고 합니다. 태어나서 해탈을 성취하시기 전까지는 번뇌를 버리지 못한 중생이었지만 6년 동안 고행을 하신 후 보드가야에서 새로이 깨달음을 얻으신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신 후에 법륜을 굴리셨습니다. 십이상성도(十二相宬道) 즉 팔상성도(八相成道)에서는 번뇌를 버리기 전에 중생이었던 때와 부처가 되신 후로 나누고 있습니다.


마이트레야께서 지으신 [보성론(寶性論)]에서는 “법신에서 어떤 움직임도 없는 가운데 여러 모습의 화신을 나타나게 하셨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화신(化身)도 사업화신(事業化身). 수승화신(殊勝化身). 수생화신(壽生化身) 등으로 다양하게 나눌 수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수승화신으로 중생을 위해 몸을 보이신 것입니다. 중생을 위해 새로이 부처가 되신 것을 보이셨지만 사실은 이 사바세계에 오시기 전부터 이미 부처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우리들에게 입멸의 행장(行裝)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 모두가 부처님의 십이상성도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같이 십이상성도를 보인 분은 화신인 색신(色身)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은 근기가 낮은 중생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이 화신은 보신(報身)이 분신한 것으로 이 또한 미세한 색신입니다. 보신은 보살 중에서도 견도(見道)의 경지에 오른, 성자의 범주에 든 보살만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신은 독특하게 오직 보살. 성현들만 볼 수 있는 색신입니다. 이 두 분의 색신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지혜의 본연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지혜의 본연의 몸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법신(法身) 때문입니다. 법신이라는 것은 본래 마음이 공한 법계로부터 완전한 정화를 통해 객진청정자성신(客塵淸淨自性身)을 성취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객진청정자성신 상태가 되려면 근본적으로 내면 안에 자리한 청정한 자성을 뒤집힌 의식으로부터 정화시켜야 합니다. 이는 분명 정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자성 그 자체는 빛이며, 자성이 본래 공한 것이 청정자성신입니다. 밖에서 들어온 객진의 허물은 그것을 다스리는 대치(치료)법으로 모두 없앨 수 있는데, 이를 이룬 상태를 자성신이라 합니다. 자성신이 있기에 법신이 있는 것이며, 법신에 의해 보신이 존재하는 것이며, 보신에서 화신으로 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신(四身, 화신. 보신. 객진청정자신. 자성청정신)은 한순간에 이루어집니다.  내면의 허물과 그 잠재적 성행조차도 청정한 지혜로 바꾸면 사신은 자연히 성취됩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습니다. 대승에서는 사신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합니다.


더 자세한 것은 밀교의 금강승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금강승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금강승을 근거로 하면 사신을 성취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 것이며 금강승을 배우지 않고는 사신에 대해 명확하게 알기 어렵습니다. 특히 보신과 같은 색신을 일반적으로 있다고 주장하기가 힘들지만 금강승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진짜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사신을 이룰 수 있는 근원 즉 뿌리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의식의 흐름인데 이것을 통해 사신을 성취하는 것이며 다른 곳에서 부처가 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삼독 같은 번뇌로 둘러싸여 있는 의식의 허물을 서서히 없애고 나면 사신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의식 자체에 사신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 능력을 깨닫기 위해 이생에서 실천하고, 그 결과 능력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상시 독송하는 [반야심경]을 보면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며,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고 공과 색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에 대해 잘 생각하고, 또 어느 정도 생각할 수 있다면 미세한 번뇌이자 뒤집힌 견해인 미세한 무명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미세한 무명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 것이고 사성제 가운데 ‘집성제’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멸성제’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생길 터이고, 그런 다음 공성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성현이 된다는 ‘도성제’에 대해서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멸성제’에 포함된 법보가 진정 존재하며, 스스로에게도 이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멸성제’와 ‘도성제’가 있는 이들을 ‘승보’라고 합니다. 깨달음을 이루려고 한다면, 견도에 오른 보살들은 점차 허물이 사라지고, 깨달음의 지혜가 점점 증장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청정해질 것도 없으며, 위없는 지혜를 성취한 상태를 위없는 승보인 부처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알면 오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삼보께 귀의할 때 그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나보다 앞서 깨달음을 이룬 삼보이기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신심이 우러날 것이며, 삼보에 귀의하면 스스로의 마음에 서서히 법보가 생길 것이고 이로 인해 나중에 ‘위 있는 승보’가 되는 것은 물론 ‘위 없는 승보’ 즉 부처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생길 것입니다.

 

나가르주나는 [중론(中論)]의 부처님 찬탄 예찬문에서 “(부처님께서) 연기(緣起)인 공성(空性)을 말씀하셨노라!” 하셨습니다. 공성에 대한 것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티베트의 큰 스승이신 쫑카파Tsongkhapa 대사께서는 “그와 같이 보셔서 바르게 말씀하신 당신 뒤를 따를 때, 끝도 없이 우리를 타락의 길로 끌어내리려는 모든 허물의 뿌리를 없앨 수 있네. (만약) 당신의 불법의 반대 방향으로 간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고생을 한다 해도 도리어 모든 허물을 불러들이는 것과 같아서 ‘나’가 있다는 견해를 더욱 견고하게 하네. 아! 지혜로운 사람은 이 둘의 차이를 알아서 마음으로 깨달아 골수에 사무치니 어찌 당신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보셔서 바르게 말씀하신..” 이것은 대상의 진정한 그 뜻 즉 진정한 실체를 보시고 말씀하신 부처님을 따른다면 고통의 뿌리인,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는 뒤집힌 식(識)을 없앨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뒤를 따를 때 끝도 없이 우리를 타락의 길로 끌어내리는 모든 허물의 뿌리를 없앨 수 있네.” 이 말씀은 부처님을 따르면 모든 허물의 뿌리인 법집을 없앨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당신의 불법과는 반대 방향으로 간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고생을 한다 해도 도리어 모든 허물을 불러들이는 것과 같아서 ‘나’가 있다는 견해를 더욱 견고하게 하네.” 이것은 부처님 당신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다른 가르침들이 이롭기는 하지만 윤회계의 뿌리인 법집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아(人我)’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영혼Atman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가 있다고 여기는 견해를 더욱더 견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착과 같은 번뇌와 여기서 비롯된 생. 노. 병. 사의 고통이 끊임없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아! 지혜로운 사람은 이 둘의 차이를 알아서 마음으로 깨달아 골수에 사무치니 어찌 당신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구절의 의미는 이렇게 깊고도 수승한 공성을 보여주신 부처님은 아주 특별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고도 수승한 공성과는 반대로 ’‘나’가 있다고 설한 교주와 ‘무아’를 설한 교주이신 부처님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알면 수승한 가르침을 보여주신 부처님이야말로 정말로 뛰어난 분이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열반에 잘 가신 분(선서善逝)의 아들(보살菩薩)이 율의에 들어가는 것을 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요약하여 말하겠습니다.” 이 구절까지가 이 논을 지으신 샨티데바의 서언입니다. “선서의 아들이 율의에 들어감을..”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입행. 원행. 과행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경에서와 같이..”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샨티데바 스스로가 지으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은 [반야부]를, 논서는 나가르주나의 [고귀한 화환] 같은 많은 경론을 토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전에 있었던 경에서 먼저 말씀하셨으니 중복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경에서 아주 광범위하게 풀어 말씀하신 것을 샨티데바께서는 여기서 간략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중복되는 허물을 범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논서는 네 가지 필요한 조건(요등사법僥等四法)을 갖추어야 합니다. 네 가지 필요한 조건이란 ‘논서의 주제. 목적, 필요성, 상관성’입니다. 다시 말해 이는 논서의 주제를 알면 논서의 목적을 알고, 목적에 의해 필요성의 핵심을 아는 상관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논의 목적은 논서의 주제에 의한 것으로, 서로 필요에 의해 의지하는 것을 요등사법이라 합니다. 이렇게 논서를 배우는 것입니다.


논서를 배울 때 먼저 그 논서를 관찰해야 합니다. 부처님 법을 배우는 사람이 대근기여야 하는 까닭은 대근기의 중생은 논서에 대해 먼저 관찰하고 입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유와 근거를 관찰할 때도 먼저 의심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한쪽으로 치우친 의심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의심은 ‘좋아하고 싫어함’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의심으로는 진실을 볼 수 없습니다. 실제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고 싫은’ 자신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정확한 마음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평정한 마음, 올곧은 마음으로 관찰해야 진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욕심에 차 관찰하면 진실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곧은 마음을 바탕으로 하고, 더불어 ‘그래 그것이 그냥 거기에 있으니까..’ 하는 마음이 아닌, 의문을 갖고 관찰해야 합니다. 곧은 마음으로 의심을 하는 관찰을 하면 논서에 어떤 주제가 있는지, 그것의 필요성이 무엇인지, 그 필요성의 핵심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관찰할 때 비로소 그 논서의 주제와 필요성이 크고 수승하다는 것을 알며, 그 논서를 기쁘게 배우게 합니다. 여러분도 경이나 논서를 볼 때 항상 곧은 마음으로, 앞에서 설명한 ‘서로 의지하여 갖춰야 하는 네 가지 필요한 조건’에 합당한지 먼저 관찰하고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항상 그런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법을 들을 때 바른 동기를 갖고 들어야 합니다. 바른 동기를 갖고 듣는다는 것은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 이 논서는 ‘보리심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법을 들을 때 허공과 같이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이 나와 같이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모든 중생이 고통의 뿌리로부터 벗어나 영원히 행복한,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일체지一切智)의 경지-부처의 경지-로 이끌겠다는 마음으로 들어야 하며, 내가 깨달음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 법을 듣는 것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바른 동기를 갖고 잘 들어주십시오. 어제 설명한 “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요약하여 말하겠습니다.”의 다음 게송을 보겠습니다.


2    이전에 없었던 것을 여기에서 새롭게 말하는 것은 없으며

      나에게 뛰어난 문장력이 있어서도 아니며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생각 또한 없으며

      (오직) 나의 마음에 올바른 습성을 길들이기 위해

      이 논서를 짓네.


이 논을 지으신 목적에 대해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이전에 없었던 내용을 새롭게 말한 것이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훌륭하고 아름다운 문장력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생각 또한 없다.”고 하신 것은 만약 듣는 사람이 수행에는 관심이 없고 새로운 이야기 꺼리를 찾는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혹은 ‘듣기 좋은 아름다운 글귀는 없나?’하는 생각으로 본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게송은 [집량론] 예경문에 있는 제자의 맹서에서, 법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 근기가 낮아 법을 받아들일 수 없는 허물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과 같은 의미입니다.

 

한편, 샨티데바께서는 본인 스스로가 선한 마음의 습성을 길들이기 위해 이 논서를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자신을 낮추고 덕을 높이는 한편 간접적으로는 법을 듣는 사람이 스스로를 살펴보게 하고 또 참됨으로 돌아가게 하여, 그들에게 이익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에 없었던 이야깃거리는 없을까?’하는 것이 동기가 아니라 ‘이전부터 들어왔던 것이지만 반복해 들음으로써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이 논서는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문장력이나 글귀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의 깊이와 내용에 더 의존한다면, 다시 말해 뛰어나고 훌륭한 문장력과 글귀보다는 그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이 논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입보리행론]을 들을 때 ‘이전에 듣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없을까?’하는 사람이 있다면 평소 알고 있는 것을 또 다시 말하는 것이므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뛰어난 문장력이나 아름다운 글귀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입보리행론]을 짓고 듣는 목적은 세세생생 이 보살의 길을 가겠으며 이러한 방법으로 수행을 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수행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들어왔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항상 반복해서 익혀야 합니다. 익히고 습성을 들일 때 마음이 변합니다. 마음에 습성을 들이지 않고는 결코 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듣고 이해하는 정도에 그칠 뿐 그 이상이 아니라면, 이런 방법으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듣는 것을 반복함으로써 생각을 하고, 이해를 할 때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습성을 들여서 마음에 변화가 오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 논에서 설하신 가르침과 그 뜻을 반복하여 익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 예로 ‘보리심’이라는 것을 처음 들을 때 ‘아! 이것이 참 좋은 것이구나.!’하는 생각은 들지만 마음에 별 느낌은 없습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생각하면 ‘아! 나에게도 이 마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이렇게 ‘생겼으면..’ 하는 마음을 반복하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금 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몇 년 후에 보면 예전과는 달리 마음에 많은 변화가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습관을 들여서 생긴 것이지 기도를 해서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입보리행론]을 듣고, 생각하고, 수행하여 마음에 변화가 오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3    선업을 길들이는 내 선업의 힘에 의해

     이러한 신심이 순간 자라나리니.

     나와 같이 좋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만일 이것을 본다면 그 뜻을 얻게 되리라.


“선업을 길들이는 내 선업의 힘에 의해 이러한 신심이 순간 자라나리니.” 이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마음에 변화가 있으려면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마음에 어떤 허물이 있는지, 허물이 어떤 손해를 불러오는지 살피면서 이것들의 단점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하루하루 일상생활을 예로 들어봅시다. 꿈속에서조차 애착이 생기며, 성내는 마음. 자만. 질투와 같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과연 이로운지 생각해 봅시다.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이런 것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착. 질투. 성내는 마음은 자신의 삶을 타락으로 이끄는 계단과 같은 것으로 삶을 부패시키는 원인들입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 행복의 조건으로 ‘먹을 것’ ‘입을 것’ ‘명예’를 꼽을 수 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명예가 풍족하면 행복한 삶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하면 ‘어제. 오늘은 이것을 먹었지만 내일은 뭘 먹지?’ 하는 생각과 ‘올해는 잘 견뎠지만 내년에는 어떡하나?’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없는 사람들 경우, 다른 사람들이 얕잡아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하기 때문에 불행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명예를 평등하게 분배하여 모두가 동등하게 잘 살도록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보다는 친절하고 사이좋게, 그리고 사로를 돕는다면 의식주와 명예가 차례로 생길 것입니다. 먼저 나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사이좋게 지낸다면 모두가 칭찬할 것이며 명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이름을 떨치진 못해도 이웃들 사이에서 아주 선하고 좋은 사람으로 존경을 받을 것이며,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며 삶이 즐거울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오른쪽을 보아도 벗이 있으며, 힘들고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하면 도와주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왼쪽을 보아도 또한 벗이 있으며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도움을 청하면 도와줄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탐욕과 성내는 마음의 힘에 이끌려 가면 왼쪽 오른쪽 할 것 없이 어디에나 적을 만들어 놓습니다. 이렇게 되면 왼쪽으로 가도 좋은 것이 하나 없고, 오른쪽으로 가도 좋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며, 도움을 청할 사람도 도와줄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웃들도 ‘악하고 볼품없는 사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만약 이런 사람에게 재물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재물 때문에 마주하고 웃기 싫지만 웃을 것이고, 가까이 하기 싫어도 가까이 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웃들 마음속에 정이나 그를 아끼는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삼독(三毒)의 번뇌가 있다면 한순간도,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할 것입니다. 외톨이가 됩니다.  


동시에 우리의 건강을 생각해 봅시다. 탐욕과 성냄이 밤낮없이 자꾸 생기면 마음이 혼란스럽고 이로 인해 몸의 시스템이 다 망가져 불편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반대로 사랑과 자비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사회생활을 할 때 스스로 사랑과 자비를 지니고 있으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벗이 됩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새나 강아지, 고양이 같은 짐승도 벗이 됩니다.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겨도 개의치 않는 마음도 생길 것입니다.


아무리 문제없는 삶을 살고 싶어도 문제가 없는 삶은 이 지구상에 없습니다. 문제가 크건 작건 간에 잠시 생겼다 사라지는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문제나 어려움이 영원히 없는 곳은 이 윤회계 그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생기는 원인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생기기 때문인데, 윤회계에 머무는 한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아무리 큰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참지 못하거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또 사랑과 자비심 덕분에 몸의 기능 역시 안정이 되어 건강할 것은 분명합니다. 탐진치 삼독과 같은 번뇌의 힘에 휘둘리고 있는 그 상태가 자신에게 어떤 이로움이 있는지, 어떤 손해를 불러오는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한국을 예로 들면,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한국 사람들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때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질이 풍요하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물질이 아주 풍부한 요즘,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즐겁지 않으며 또 다른 일이 생기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식주는 매우 풍요롭지만 마음은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무엇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까요? 잘 살펴보면, 마음속의 생각이 스스로를 혼란스럽게 할 것입니다. 외부 환경이 우리들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여기겠지만, 자신의 생각에 달렸을 뿐입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바르지 않으면 아무리 주위의 환경이 좋고 평화로워도 마음은 혼란합니다. 반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바르면 아무리 장애물이 많고, 마음에 맞지 않은 것에 둘러싸여 있어도 마음의 평화를 지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은 물질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몸의 질병은 환경이 좋아지고, 의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돈을 많이 들여 치료를 하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문제는 오직 생각으로 해결할 수 있을 뿐입니다. 돈이 많이 있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벗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는 본인 스스로가 바르게 생각하여, 문제를 없애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즐겁지 않게 하는 것을 ‘번뇌’라고 부릅니다. 번뇌는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즐겁지 않게 하는 이런 번뇌는 의식 속에 있으며, 사랑과 자비와 같이 마음에 평화를 주는 것 또한 의식 속에 있습니다.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이라 해도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정을 베풀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과 전혀 화합하지 못하고,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을 무척 아끼고 좋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리 거칠고 사악한 사람이라 해도 그 의식 속에는 사랑과 자비가 있습니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봅시다!  예로 외부적인 조건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불편하고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외부적인 조건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으면, 부족함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설과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생기는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설과 조건을 다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예와 같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번뇌가 마음속에 있음을 알아서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자애와 자비를 일으키면 그때 비로소 번뇌를 줄일 수 있습니다.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자애와 자비를 실천하려고 할 때 자애와 자비의 힘을 더 키우는 방법을 행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법을 행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행복하고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마음속에 정반대가 되는 의식을 찾아서 그들을 나누어 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번뇌의 힘을 줄이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번뇌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각각의 번뇌에 반대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대되는 것의 힘을 키우면 번뇌의 힘은 줄어듭니다. 예로 자애와 자비의 힘을 키워나가면 분노는 저절로 줄어듭니다. 한편, 사랑으로써 탐욕을 줄일 수 있습니까? 사랑은 그 대상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가까이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대상을 마음에 두고 이를 가지려는 탐욕이 자비심을 수행해서 줄어들겠습니까?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성냄이란 어떤 대상을 보면 아주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자애와 자비심은 대상을 감싸는 것이니 성냄과 정반대가 됩니다. 그래서 분노를 치료하려면 자애와 자비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주 적합합니다. 정반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탐욕을 치료하기 위해 자비를 수행한다면, 정반대가 아니기 때문에 치료가 어렵습니다. 탐욕 때문에 대상을 아름답게 보고, 이로 인해 마음이 그 대상을 향한다 해도, 그것의 아름답지 않은 허물을 보면 마음을 조금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집착을 하면 대상에게 마음이 가고 모든 면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때 아름답지 않은 더러움에 대해 명상(부정관不淨觀)하면 ‘아! 이토록 좋은 것은 아니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그것의 허물을 봄으로써 마음에서 그 대상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번뇌를 치료한다는 것은 그것과 정반대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마음의 힘을 키워나가면 반대쪽의 힘이 줄어들 것입니다. 예로 배고픔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배고픔이 사라지도록 하소서!’ 하고 기도를 한다고 해서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배고픔을 명상한다고 해결이 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음식을 먹음으로써 배고픔을 해소할 수 있을 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외적인 경우, 정반대가 되는 것을 찾아서 다른 한쪽을 없앨 수 있는 것처럼 내면에서도 정반대가 되는 것을 찾아서 실천할 때 다른 한쪽의 힘을 줄일 수 있습니다.


분노를 줄이기 위해 분노를 일으키는 그 대상의 허물을 본다면 누그러뜨릴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자애와 자비로 습성을 들인다.”는 것은 그 대상 즉 인간을 예로 들자면 행복하지 못하고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아, 그가 불쌍하구나!’ 하는 생각을 일으킵니다. 분노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반면 자애와 자비는 우리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의식이 서로 정반대가 될 때 좋은 것에 의해 나쁜 것이 해독(解毒)이 되는 것입니다. 자애의 이로움과 분노의 허물을 보고, 어떻게 하면 공덕이 있는 자애를 더욱 키워나갈 수 있는지를 살피고, 습성을 들여야 합니다.


자애와 자비가 분노와 대치된다는 지식만으로 자신의 생활 속에 자애와 자비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자애는 타인이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로만 하는 것도 아니며, 알고 있는 것도 아니며, 본인의 마음에 자애와 자비심이 실제로 생겨야 합니다. 자애와 자비심이 생긴다는 것은 습성을 들여 다른 대상이 행복하지 못하고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자애와 자비심을 점점 더 키우는 것을 말합니다. 화를 내는 경우를 봅시다. 화가 나는 대상에게 순간적으로 화를 낼 때, 화를 내는 이유에 대해 거듭 생각하다보면 화는 점점 더 커집니다. 예로 우리가 서로 다투고 죽이는 경우를 봐도 처음부터 죽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해로운 짓을 했다’는 이유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 때문에 그 대상에게 화가 점점 더 나는 것입니다. 화가 점점 더 커지면 상대를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마음까지 일어나고 결국 악행을 저지릅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커집니다.


그와 같이 ‘자애’ 같은 선한 의식도 근거와 이유를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공덕은 습성을 들임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한편, 아무런 동기가 없는 몸의 움직임도 어떻게 습을 들이는가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집에 새 물건을 뒀는데 그 물건 둔 곳은 어두운 방입니다. 처음에 그 물건을 가지러 갈 때는 도중에 넘어지기도 하고, 다른 물건에 부딪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점차 익숙해지면 이쪽은 돌아가야 되고 저쪽은 비켜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습성을 들이면 ‘이쪽은 돌아가야 한다.’고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돌아가게 됩니다. 


몸의 행동에도 습성을 들임으로써 변할 수 있는 것처럼 마음 또한 습성을 들일 때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습성을 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기도를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습성을 들임으로써 나아갈 수 있기에 여기서 “선업에 길들여진 내 선업의 힘에 의해”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습성이라는 것은 동기를 가지고 언제나 노력을 하고 실천하여 습관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자연스럽게 익혀지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노력하고 실천함으로 습관이 되는 것을 ‘습성’이라 합니다. 자애와 자비로 습성을 들여야 한다는 것은 마음에 아무런 느낌이나 이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생각하고 익힘으로써 알고 있던 자애와 자비를 진정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습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선업에 길들여진 내 선업의 힘에 의해”와 같이 마음에 변화가 오기까지는 고통을 원하지 않고 행복만을 원하는 인간의 속성 때문에 고통을 주는 마음을 허물로 보고 이런 것을 가까이 하지 않고 되도록 멀리하며, 마음에 평화를 주는 공덕을 가까이 하는 습성을 들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마음에 변화가 올 것이고 이런 것이 바로 마음을 변화시키는 방법입니다. 몸의 외형과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 외부적인 규율을 만들어 훈련을 시킵니다. 그러면 몸의 외형과 행동이 바뀝니다. 하지만 마음은 외부에서 아무리 엄하게 해도 변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본인 스스로 바꾸려고 하는 마음이 우러나 실천하고 노력할 때만이 마음이 변하는 것이지 외부에서 아무리 엄하게 해도 마음은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변화시키려면 본인 스스로가 지금의 마음가짐이 어떤 손해를 가져오는지, 만약 바꾸면 어떤 이로움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변하려고 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선업을 길들이는 내 선업의 힘에 의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심은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신심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 이것이 좋은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청정한 믿음’입니다. ‘이것을 나도 이뤘으면..’하는 믿음은 ‘이루려고 하는 믿음(현구신現求身)’이며,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맹목적으로 믿는 것과 타당한 이유와 근거를 생각하여 믿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아! 이것은 좋은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청정한 믿음’이 있을 때 ‘아! 이것은 정말로 옳은 말씀이구나!’ 하는,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실행하는 믿음(승해신勝解身)’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아! 이것을 나도 얻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믿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변화는 습성을 들임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데 이런 습성을 들이기 위해서는 스스로 우러나는 마음이 우선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마음을 즐겁지 않게 하는 성냄과 같은 것을 일시적으로 대치하는 법이 있습니다. 자애와 자비 같은 마음의 습성을 들일 때 성냄은 일시적으로 다스려집니다. 이 방법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는 집착, 자만 같은 것이 어떻게 생기는가를 살펴봅니다.


이런 방법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에게 중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있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 그것에 집착하고, 나에게 있는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보면서 그것을 멀리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봅니다. 이와 같이 ‘누구에게 아름다운 것’이며 ‘누구에게 아름답지 않은 것’인지, ‘누구에게 가까운 것’이고 ‘누구에게 가깝지 않은 것’인지 생각을 해보면 그 중심에 바로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나’라고 말할 때 나는 분명히 있습니다. ‘나’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뒤집힌 견해를 일으키는 ‘나’라는 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해 불교에서는 아주 많은 관찰을 해왔습니다.


무아(無我)는 ‘독립적이고 단일하며 항상하는 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냄과 같은 번뇌를 생기게 하는 뒤집힌 견해를 뿌리조차 없애는 방법은 아마도 불교에만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애와 자비를 수행하는 것은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집착과 같은 번뇌를 생기게 하는 그 근원이 아집이라는 것을 알아서, 아집을 없애기 위해 무아를 수행하는 것은 불교의 남다른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와 방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냄과 같은 오직 한 가지 번뇌만이라도 일시적으로 자애와 자비를 수행해서 누구러뜨리는 방법과 성냄을 생기게 하는 근원인 ‘나’라고 여기는 뒤집힌 견해를 근본적으로 다스려서 성냄과 같은 번뇌의 힘을 줄이고 없애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은 방편으로 번뇌를 줄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혜로 번뇌를 없애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혜로 없애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편인 자애와 자비를 수행함으로써 성냄과 같은 번뇌의 힘을 줄일 수는 있지만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성냄과 같은 번뇌의 근원인 아집을 없애기 위해 무아를 깨닫는 지혜를 수행할 때 ‘나’라고 여기는 아집의 힘은 줄어듭니다. 이를 통해서 서서히 아집을 없앨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 모든 번뇌의 근원까지도 없앨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