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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행자의 편지/광전스님의 염불선 이야기

염불선이야기13-중국의 선① 달마이전

염불선이야기13-중국의 선① 달마이전


서력기원을 전후한 무렵인 서한(西漢) 초 한무제 때 장건의 서역개척으로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의 경제와 문화의 교류 속에 양한(兩漢) 말 왕조의 부패와 농민의 봉기 등 사회의 동요는 중국인들에게 불교라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불교가 중국의 전통사상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종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불교가 중국의 문화를 수용해 중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상류사회는 도교 유파 중의 하나인 ‘황로(黃老)사상’이 유행했는데 황(皇)은 황제를, 노(老)는 노자를 가리킨다. 그 사상은 도교의 청정무위(淸靜無爲)에 의한 무위의 정치를 베풀 것을 제창하였다. 그런데 중국에 유입된 불교의 가르침이 도교의 청정무위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게 생각되었고 불교의 용어를 번역하면서 유사한 의미를 가진 도가(道家)의 용어를 차용(借用)하여 중국인들의 정서에 맞게 불법을 설명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사회에 불교가 큰 거부감 없이 정착할 수 있었다.


서기 2세기 중엽 안식국(安息國)의 안세고(安世高)가 낙양으로 와 20여 년 동안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음지입경(陰指入經)>, <선행법상경(禪行法想經)>, <도지경(道地經)> 등을 중심으로 한 소승선경(小乘禪經)을 번역하고 직접 수식관(數息觀), 사념처(四念處),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등을 실천한 것이 중국 선불교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월씨국(大月氏國) 사람으로 안세고보다 조금 늦게 중국에 온 지루가참(支婁迦讖)은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등 대승선경(大乘禪經)을 번역하였는데 그 내용은 주로 반야공관(般若空觀)과 염불삼매를 비롯한 삼매(三昧)에 관한 것이었다.


300권 이상의 경전을 번역한 대역경가인 후진의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은 서기 401년에 장안에 와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선비요법경(禪秘要法經)>, <사유약요경(思惟略要經)> 등의 선경을 번역하였는데 그 내용은 오정심관(五停心觀)과 10종 관법(觀法)에 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구마라집보다 조금 더 늦게 장안에 온 인도 가비라국 사람인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359~429)는 선경(禪經)인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과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을 번역하였다. 그 중 <달마다라선경>의 내용은 수식관(數息觀), 부정관(不淨觀), 사무량관(四無量觀), 오온관(五蘊觀), 육입관(六入觀), 십이인연관(十二因緣觀)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관불삼매경>은 관불관(觀佛觀)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상 살펴 본 바와 같이 달마 이전의 중국의 선(禪)은 주로 외국에서 온 역경승(譯經僧)들에 의해 전해졌으며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의 선법(禪法)이 함께 혼재(混在)하였다. 이는 처음 불교가 중국에 유입될 때 중국인들은 소승과 대승에 대한 교리적 이해가 부족했을 뿐 아니라, 요즈음같이 정보가 발달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각 지역마다 다양하게 유입된 대소승의 선법이 혼재해서 전파되고 수행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