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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행자의 편지/태호스님의 산사의 풍경소리

있는 그대로 놔둬라

있는 그대로 놔둬라


 유사 이래 인간에 대한 정의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만물의 영장’ ‘생각하는 갈대’등의 많은 정의 가운데 환경과의 관계에서는 어떤 정의들이 있을까요?


 원시시대라 할까, 그때는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인간의 부족하고 미약한 모습은 우주만유 천지의 조화 속에 너무나 보잘 것 없었습니다. 천둥 번개가 일고 폭풍우가 몰아칠 때 이겨낼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환경에 대해 굴복하고 어쩔 수 없이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지가 발달하고 문명이 일어나자 인간 정의는 달라졌습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에서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로. 환경에 따라 인류는 이동하고 수렵을 하고 농업과 축산업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근대에까지 후손들에게 환경에 적응하라는 가르침이 계속되었습니다. 다윈의 ‘인류진화설’이 풍미하면서 외부의 환경에 적응하면 진화하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현대에도 크나큰 격언이며 가르침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인간은 환경을 지배하는 동물’이라고 인간에 대한 정의는 달라졌습니다. 환경의 지배에서 벗어나 적응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환경을 이용하고 활용하자 개발하고 개척하자 그래서 환경을 지배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시 생각을 깊이 했습니다. 환경의 개발과 지배는 환경을 파괴하는 일이며 결국 인간의 생존에 위협임을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환경을 보호하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인간과 환경은 뗄레야 뗄수 없는 상의상관성의 관계임을 인식한 것입니다. 환경보호 운동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과제로 등장하고 밀물처럼 전세계에 퍼졌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인간과 환경의 공존 관계이며 진정한 환경보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식목일에 나무 심기를 했고 가지치기며 거름주기를 했습니다. 각 지역마다 학교마다 담당하는 구역을 정하고 자연보호 환경보존 운동은 여러 각도에서 일어났습니다.


 나는 어느 날 관악산 등산로를 오르다 나뭇가지에 어느 여학생이 걸어놓은 글을 보고 감격했습니다. ‘나를 꺾지 마세요. 팔이 아파요.’ 아! 드디어 말 못하는 나무도 우리와 같이 보았구나. 만물이 일심동체인 동체대비의 부처님 가르침 아닌가?


 그 뒤 신문에서 여러 산에 휴식년제를 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심고 가꾸고 기르는 일에서 산을 편안히 쉬게 해주자는 발상이었습니다. 너와 나도 동등하게 동일한 생명체로 보는 인식에서 이제는 서로 의도적으로 관여하지 말고 제 스스로 잘 자라기를 바라는 의식의 전환이였습니다.


 예전에 태안사 명적암에서 6개월 동안 혼자 지낸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조그만 텃밭에서는 더덕 싹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잡초도 함께 무성해졌습니다. “더덕아 잡초들에게 힘을 뺏기지 말고 잘 크거라.”하며 틈틈이 잡초를 뽑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보니 그 싹들이 모두 잘려있는 게 아닙니까. 유심히 살펴봤더니 산 꿩이 와서 싹들을 모두 먹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잡초 속에 섞여 서로 엉켜서 커간 더덕은 아주 넝쿨이 무성해졌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의도하지 마라. 도모하지 마라.” 의도적으로 도모하려할 때 조작이 되고 꾸밈이 됩니다. 이해 타산적이며 계획적이 됩니다. 이것을 유위법有爲法이라 합니다.


 각 종교에서도 가르침의 원리는 하나입니다. 무위자연을 내세우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라 하고 인연법에 따르라 합니다.



 출처 : LA중앙일보  2005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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