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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8. 마음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고 아무런 자취도 없는 것


●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고 아무런 자취도 없는 것


일찍이 달마(達磨)대사는 인도의 향지국 왕자였는데, 제27조(祖)인 반야다라존자를 스승으로 하여 진리를 깨닫고, 바른 불법(佛法)을 중국에 펴기 위하여 천신만고 끝에 중국 광주(廣州)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중국 불교는 경론(經論)의 교리에만 집착하고 정작 마음공부는 소홀히 하여 달마대사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사는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 뒷산에 있는 석굴에 들어앉아 걸식하러 나가는 외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벽을 향하여 바윗덩이처럼 깊은 선정(禪定)에 잠겼습니다. 이러구러 9년 세월 동안 말 한 마디 없는 벙어리로 일관하였습니다.


이때 신광(神光)이라는 젊은 스님이 달마대사의 위대함을 전해 듣고 눈보라를 무릅쓰고 소림석굴을 찾아왔습니다. 신광은 달마대사의 등 뒤 석굴 어귀에 꿇어앉아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한 밤을 지새웠습니다.

눈발이 무릎을 덮고 온몸이 얼어붙어 사뭇 저려 왔으나, 죽음을 각오로 신광의 뜨거운 구도 열기는 추호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듯 호젓한 침묵 가운데 하루해가 지나자, 목석마냥 앉아만 있었던 달마대사는 넌지시 돌아앉아 신광을 굽어보았습니다.


신광은 반색하여 큰절을 올리고 나서 "스승님, 이 어리석은 제자가 법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불쌍히 여기시어 거두어 주옵소서"라고 여쭈었습니다.

달마대사는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위없는 대도(大道)는 엷은 지혜나 가벼운 덕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 이니라"고 답했습니다. 이에 신광은 비장한 마음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단숨에 왼팔을 잘라서 달마대사께 바쳤습니다. 솟음치는 선혈로 하얀 눈은 붉게 물들었으나, 이내 상처에서 희뿌연 젖이 솟아나와 상처를 아물게 했습니다. 이때 사납게 울부짖던 눈보라도 숨을 죽이고, 달마대사의 엄숙한 표정에도 깊은 감동의 빛이 역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광의 지극한 구도의 정성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신광의 마음은 좀체 안정을 얻을 수가 없어서 스승 앞에 나아가 청했습니다.

"스승님, 저의 마음은 아직도 편안하지 않사옵니다. 자비를 베푸시어 제 마음을 다스려 주옵소서."

"그러면 편안치 못한 그대 마음을 가져오너라. 내가 편안케 하여주리라."

그러자 신광은 당혹하여 어리둥절했습니다. '본시 마음이란 형체가 없거니, 불안한 마음이나 흐뭇한 마음이나 간에, 마음이란 아예 형상화시킬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스승님, 마음이란 모양이 없사옵기에 드러내 보일 수도 얻을 수도 없지 않사옵니까?"

 

 "그렇다, 마음이란 필경 더위잡을 자취가 없는 것이니라. 그것을 분명히 깨달았으면 그대 마음은 이미 편안해졌느니라." 이리하여, 어두운 무명(無明)에 갇힌 신광의 불안한 마음은 활짝 열리고, 맑은 하늘같은 훤칠한 마음으로 정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대도를 성취하고 제2조 혜가(慧可)대사가 되었습니다.


그 뒤, 혜가대사의 회상(會上)에 오랜 병마에 찌들어 몹시도 초췌한 젊은 수행자가 찾아와 여쭈었습니다.  "스승님, 저는 죄업이 무거워서 불치의 풍병으로 여러 해를 앓는 몸입니다. 아무쪼록 불쌍히 여기시어 저의 죄업을 소멸하시고, 가엾은 목숨을 구제하여 주옵소서."   "정작 그렇다면 그대의 죄업을 이리 내놔 보게. 내가 바로 소멸시켜 줄 터이니." 이에 말문이 막힌 젊은 수행자는 이윽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마음이란 본래 허공과 같이 텅 빈 것, 이미 마음이 그 자취가 없거니, 죄업인들 어디 흔적이나 있을 수 있겠는가.'


수행자는 "죄업을 아무리 찾으려 하여도 도무지 그 형상이 없사옵니다"라고 다시 여쭈었습니다. "진정, 그러하니라. 마음이란 본래 공(空)하여 형체가 없고 이름붙일 수도 없는 것이니, 그대를 괴롭히는 죄업 또한 그 뿌리가 없느니라. 그대가 정녕, 그러한 도리를 깨달았으면 이미 그대는 죄업을 참회하여 소멸해 버렸느니라."


이 말씀에 총명한 수행자의 마음은 활연히 열렸습니다.

"스승님, 저는 앞으로 스승님을 섬기려 하옵니다."

"그대 같은 풍병 환자가 나를 따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젊은 수행자는 "몸은 비록 병이 있사오나, 제 마음은 스승님의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사옵니다"라고 여쭈었습니다.

혜가대사는 그를 대견하게 받아들이니, 차차 건강도 회복하고 정진에 더욱 노력하여 드디어 제3조 승찬(僧璨)대사가 되었습니다.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러 승찬대사가 환공산(晥公山)에 머무를 때, 아직 13세의 영특한 사미(沙彌) 동자가 찾아와 큰절을 하고는 대뜸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스승님, 자비를 베푸시어 저에게 번뇌를 해탈하는 길을 알러 주옵소서." 승찬대사는 기특하게 여긴 나머지 "누가 너를 속박하였기에 풀어 달라고 하는 것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동자는 불현듯 가슴이 막혀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참으로 생각해 보니 스승님의 말씀대로 그 누가, 그 무엇이 내 마음을 구속했단 말인가? 그저 마음 안에서 공연스레 일고 스러지는 번뇌 망상이 아닌가? 마음 자체가 형상이 없고 가뭇없으니, 대체 번뇌 망상이 그 어디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스승님, 아무것도 제 마음을 속박하는 것이 없사옵니다."

"속박하는 것이 없다면 다시 무슨 해탈을 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 한 마디에 갸륵한 동자는 문득, 본래 비어 있는 허공같이 장애 없는 마음자리를 훤히 깨달았습니다.


이 동자가 장차 대도를 성취하고 제4조 도신(道信)대사가 되었습니다. 도신대사는 출가하여 60여 년 동안이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여, 아예 자리에 눕는 일이 없었습니다. 평소에 눈을 감은 듯 지냈으나 눈을 바로 뜨고 사람을 바라보면 그 위엄 있는 촉기에 사람들이 움츠러들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깊은 삼매에서 우러나온 초인적인 도력(道力)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정통 법맥(法脈)은 끊임없이 이어져 제5조 홍인(弘忍)대사를 거쳐 제6조 혜능(慧能)대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달마대사로부터 혜능대사까지는 오로지 순수하게 마음의 해탈만을 문제시하였다고 하여 순선(純禪)시대라 하고, 그 무렵에 주로 제창한 법문을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합니다. 사실, 마음이란 허공과 같이 광대무변하고 무장무애(無障無碍)하여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고 아무런 자취도 없는 것인데, 그렇다고 다만 허무하게 비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상은 무한한 능력을 원만히 갖춘 생명의 광명으로서, 바로 불성 곧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경전에 이르신 바, '마음이 바로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心卽是佛 佛卽是心]'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일체 만유는 모두 한결같이 불성의 광명으로 이루어진 화신(化身) 부처님이며, 우주의 실상은 바로 장엄 찬란한 연화장세계요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두운 번뇌에 가리운 중생들이 그러한 자기 근원을 모르고 만유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잠시 인연 따라 이루어진 전변무상(轉變無常)한 가상만을 집착하여 너요 나요 내 것이요 하며 탐착(貪着)하고 분노하고 아귀다툼하면서, 파멸의 구렁으로 내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온 누리에 넘실거리는 역사적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유일한 길은, 이미 부처님과 정통조사(正統祖師)들이 순선시대에도 극명히 밝히신 바, 중생 차원에서 인식하는 일체 만법은 바로 그대로 비어 있는 공한 도리, 곧 제법공상(諸法空相)을 번연히 깨달아서, 우선 불안한 마음을 여의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을 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공만이 아닌, 그 공의 근본성품인 부처님을 성취하기 위하여 공의 도리에 걸맞는 무아, 무소유의 생활에 안간힘을 쓰고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인류의 파멸을 면하고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약속하는 오직 하나의 청정한 백도(白道)인 것입니다. ◈



                          [- 불기 2530년 10월《금륜》제6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