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보통은 참선을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어려운 공부로 압니다.
그러나 참선(參禪)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장 쉬운 공부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 용어로 안락스러운 법문 즉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고 합니다. 다른 것은 까다롭고 경(經)도 많이 외워야 하지만 참선공부는 경을 많이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선(參禪)은 어디서 빌려온 것도 아니고 또 다른 것을 보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가 본래(本來) 갖추고 있는, 본래 자기의 생명(生命) 자체인 마음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쉽고 가장 경비(經費)도 안 드는 공부입니다. 그렇게 가장 쉬운 것이 어려운 한문(漢文) 문화권(文化圈)을 거쳐 오면서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참선 공부가 어째서 쉬운가?
이는 우리가 원래 갖추고 있는 생명(生命)의 보배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쉽습니다. 나한테 갖추어져 있는 마음자리, 나한테 갖추어 있는 보배 가운데 최상(最上)의 보배 마니보주(摩尼寶珠), 이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래서 과거(過去)에 도인(道人)들은 자기 마음 찾는 공부를 비유(譬喩)해서 기우멱우(騎牛覓牛)라 했습니다.
소를 타고서 소를 찾는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소가 어디에 있는지 안보이니까 지금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소를 찾는 격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과 깨달은 도인(道人)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깨달은 분들은 모든 현상(現象)의 본모습을 봅니다. 본 성품(本性品)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본 성품(性品)을 못보고 겉의 현상(現象)만 봅니다. 우리는 우선 깨달은 분과 우리 중생과의 이런 차이를 분명히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선(參禪)이 쉽다는 이유는 어차피 현상적(現象的)인 것은 본 성품(性品)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봄이 가면 반드시 여름이 오듯이 우리 중생들은 본래(本來) 성품(性品)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방황(彷徨)하는 나그네가 결국은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듯이 그와 똑 같습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기왕이면 잘 먹고, 잘 입고, 많이 쓰고, 많이 놀고 또 높은 감투까지 쓰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현상적으로 거기에 얽매어 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 사람도 역시 어느 땐가는 죽어서 윤회(輪廻)하다가 결국은 본 성품(本性品)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돌아가야 할 것이며 또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故鄕)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부처님이라고도 하고 여래(如來)라고도 합니다. 여래란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꼭 진리(眞理) 그대로의 성품(性品)을 보고 여래(如來)라고 합니다. 진리에서 나와서 진리로 가고 - 같을 여(如)자, 올 래(來)자 - 같을 여(如)자, 그 자(字)는 바로 진여(眞如)라! 진리를 의미하는 것인데, 여래란 말은 진리에서 그대로 조금도 흠축(欠縮)이 없이 왔다는 그런 뜻입니다.
따라서 진리에서 왔으니까 다시 진리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眞理)를 생각할 때는 진리는 고정 불변한 어떤 교리(敎理)가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 같은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진리(眞理)는 모든 생명(生命)을 다 감싸있는 일체(一切) 존재(存在)의 근본자리입니다. 다시 확실히 말씀드리면 우주(宇宙)의 본체(本體)가 바로 진리입니다.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을 위시해서 다른 동물(動物)이나 식물(植物)이나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생물학적(生物學的)인 술어로 말하면 광합성(光合成), 즉 광명(光明)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어느 식물도 태양광선(太陽光線)이 안 들어가서 된 것이 없습니다. 물질(物質)의 가장 미세(微細)한 저편 세계(世界)가 하나의 방사능(放射能)같은 방사(放射) 광명(光明)입니다.
그러므로 빛으로 합성되는 광합성(光合成)이라는 말 이전에 사실은 모두가 다 광명(光明)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바로 광명(光明)인 것입니다.
우리는 참선(參禪)을 해서 깨닫고자 합니다마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른바 목적(目的)을 뚜렷이 설정을 해야 만이 그곳에 도달하려고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고 또한 거기에 걸 맞는 수행(修行)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자기 목적의식(目的意識)이 희미하면 가고자 하는 열성도 적고 또 공부하는 방법도 거기에 계합(契合)된 걸 맞는 공부를 못합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 여래 자리, 또는 부처님 자리, 이 자리는 그냥 무조건 어디에 인격적(人格的)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빛입니다.
우리 중생이 볼 수 없는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청정광명(淸淨光明)입니다.
원자(原子) 속에 들어있는 기운(氣運)도,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위만 하더라도
굉장히 기기묘묘(奇奇妙妙)한 힘을 내지 않습니까? 하물며 원자력(原子力)보다도 더 순수(純粹)한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광명(光明)이 부처님 광명인데 거기에는 무한(無限)의 환희광명(歡喜光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 광명(光明)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신비로운 힘을 냅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이 삼명육통(三明六通)을 하고 신통자재(神通自在)를 하였습니다.
도는 그곳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조금 모셨지만 부사의(不思議)한 힘으로 아픈 것이 그냥 나아버리는 원리(原理)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오염(汚染)된 생명(生命)이 차근차근 정화(淨化)되어서 그러한 광명세계(光名世界)로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부사의(不思議)한 힘을 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천지우주(天地宇宙)의 근본 생명(生命)인 광명(光明) 자체는 일체(一切) 공덕(功德)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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