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는 없다. 차음(此陰;이 망념(妄念)덩어리)이 멸(滅)하면 피음(彼陰)이 상속(相續)할 뿐이다.
* 우리가 나의 존재(存在)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삶의 그림자가 모여 있는 망념(妄念)덩어리다.
* 불꽃이 타면서 나오는 빛은 있지만 기름을 태우면서 타고 있는 촛불은 존재(存在)하지 않듯이 업보(業報)는 있으나 업(業)을 지어 과보(果報)를 받는 나의 존재(存在)는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아(無我)이고 우리 존재(存在)의 실상(實相) 즉(卽) 현재(現在)이다. 이러한 사실(事實)을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이 있을 때 욕탐(欲貪)이 생(生)겨서 허망(虛妄)한 존재(存在)의 세계(世界)가 벌어지는데 이것은 세속(世俗)의 법(法)이다.
* 우리 참 모습은 법계(法界)와 함께 연기(緣起)하고 있는 현재(現在)이다.
* 우리가 사는 삶의 세계(世界)는 우리의 마음에서 연기(緣起)한 법계(法界)이다. 연기(緣起)하는 법계(法界)는 시간(時間)도 없고 공간(空間)도 없고 존재(存在)도 없다. 나의 존재(存在)가 삼세(三世)라는 시간(時間)과 세계(世界)라는 공간(空間)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세계(世界)는 항상 한 곳에 함께 나타난다. 내가 있는 곳에 나의 세계(世界)가 있고 내가 나타날 때 나의 세계(世界)가 나타난다. 이것이 연기(緣起)하는 법계(法界)의 모습이다. 이때의 나는 존재(存在)하는 나가 아니라 행위(行爲)하는 나이다. 나의 세계(世界)는 내가 짓고 있는 업(業)의 과보(果報)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업보(業報)의 인과관계(因果關係)는 필연적(必然的)이며 무시간적(無時間的)이다. 업(業)을 짓는 나와 그 과보(果報)로서의 세계(世界)가 시간적(時間的)으로 분리(分離)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연기(緣起)한다. 우리 모두는 절대(絶對)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지닌 자유(自由)로운 존재(存在)이다. 이것이 우리의 참 모습이다.
- 큰스님 친필노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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