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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영가천도법어

ΟΟΟ거사 49재 천도 법어

ΟΟΟ거사 49재 천도 법어

 

 

 

ΟΟ후인 ΟΟΟ 영가여! ΟΟΟ 영가여!

영가를 뵌 지가 꽤 오래 되었습니다. 영가는 비록 백수풍신白首風神이시지만 늠름하시고 당당하신 그런 풍채이셨습니다. 그러한 것은 과거 전생에 바로 사셨고 또는 금생今生에 나오셔서 정직하게 인생을 사신 그러한 상으로 생각됩니다.

 

한번 생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 하는 이른바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 생은 반드시 멸하는 것이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일체 모든 현상은 모두 무상한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인생인지라 각 성인成人들의 가르침은 이러한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한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영가는 지금 저승이라 하는 세계에 계신 것입니다. 사람이 막 태어나서는 ‘생유生有’, 사는 동안에는 ‘본유本有’, 죽는 동안에는 죽을 ‘사’자를 써서 ‘사유死有’, 그리고 저승에 가는 것은 ‘중유中有’, 즉 저승길입니다. 영가는 지금 저승길에 계시다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타고서 이 자리에 계시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나와서 바로 살기도 어려운 것이고 그 가운데서 참다운 종교를 만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종교라 하는 것은 물론 다른 종교도 그렇지만 특히 불법佛法은 인생과 우주의 참 도리를 밝히는 가르침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대체로 무엇이고 대체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인생은 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다행히 과거 전생의 선근공덕善根功德으로 해서 금생에 나오셔서 불법을 만나셨습니다. 불법을 만났어도 복이 적은 사람, 게으른 사람들은 바로 못 믿습니다. 바로 못 믿으면 자기만 그르칠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라 하는 소중한 법도 그르치고 마는 것입니다. 승가에서나 속가에서나 부처님 법을 빙자하고서 바로 못 사는 사람들은 자기도 죄를 짓고 부처님법도 망치는 것입니다. 영가가 비록 세속에 계신다 하더라도 그렇게 의젓하고 당당하신 것은 바로 사셨고 부처님법도 바로 믿으셨다는 그런 증거였습니다. 영가가 그렇게 바로 살고 부처님 법을 바르게 실천하셨기 때문에 임종 때도 여여하게 도인 행색같이 그렇게 조용한 가운데 흔연스럽게 가신 것입니다.

 

영가여! 몸은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그런 각 물질이 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합한 것은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고 맙니다. 바로 전생의 인연, 부모님의 인연 따라서 사람 몸 받아서, 인연이 다하면 다시 그런 것은 흩어지고 맙니다. 본래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뚱이는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는 동안에 몸뚱이가 얼마나 소중합니까만 사실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전생에 이런 몸뚱이가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죽은 뒤에 이런 몸뚱이가 다시 또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영가여! 영가는 지금 저승길에서 극락으로 가는, 우리 인생이 종단에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가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영가는 응당 극락에 가실 것을 믿습니다. 영가와 깊은 인연이 있는지 한 번 밖에 안 만나 뵈었지만 백수풍신白首風神의 그 늠름한 모습이 산승山僧의 눈에는 지금도 선합니다. 그러한 인연 따라서 산승의 노파심으로 마지막 천도薦度법어를 하는 것입니다.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인간이 자기라는 것이 허망한 것인데 허망한 것에 집착할 적에 가지가지의 재앙을 만나는 것입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있는 것은 사람 몸이나 물질이나 지위나 모든 것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중생은 그림자 같은 것을, 그림자에 불과한 것을 그림자가 아니고 실제라고 생각하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 몸도 허망한데, 자기 몸도 두고 가는 것인데, 자기 처자식도 데리고 갈 수도 없는 것이고 자기가 쓰던 재산이나 권력이나 모두 다 팽개치고 가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못 따라 갑니다. 몸도 못 따라 가는데 다른 것이 따라 갈 수가 있겠습니까.

 

영가여! 우리 중생들은 그런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는 데서 문제가 생겨서 탐욕심을 내는 것이고 또 그러한 물질이라던가, 또는 지위나 몸뚱이에 해를 끼치면 성내고 진심瞋心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인셍의 무지無知에서 오는 것입니다. 인생의 무지라는 것은 방금도 말씀한 바와 같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는 것입니다. 몸, 이것도 허망한 것인데 허망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고, 권력도 허망한 뜬구름 같은 것인데 이것도 사실로 소중하다고 본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시초에 모두가 다 극락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 본 고향은 극락인 것입니다. 어쩌다가 우리 몸뚱이에 가려서 본래 참다운 성품을 못 보는 것입니다. 참다운 성품은 어느 누구나가 다 부처님과 똑같은 것입니다. 석가모니, 예수, 공자, 또는 노자 그런 분들의 마음이나 우리 중생의 마음이나 똑같이 우주의 본바탕, 본 진리를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우주의 본바탕 진리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본바탕이 부처님이고 하느님인데 이것이 우리가 쓰다 버리는 몸뚱이 때문에, 몸뚱이 잘 먹이고 몸뚱이 치장하고 또는 자기 몸뚱이에 인연된 아들이요 딸이요 또는 친구요 하는 그런 인연 때문에 얽혀서 바로 못사는 것입니다.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여! 영가는 깊이 느끼시는 분이셨습니다. 영가는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영가가 쓰던 모든 그런 세간이라던가, 영가의 권속이나 그런 것을 가시는 길에 뒤돌아보시고 애착을 품을까 봐서 산승山僧이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영가여! 중생이 바로 못 보는 것이 모두 다 번뇌가 되어서 번뇌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저 밑에 지옥으로, 또는 좀 더 나아다면 아귀餓鬼로, 또는 더 나아지면 축생畜生으로, 더 나아지면 아수라阿修羅로, 더 나아지면 인간으로, 우리 인간도 이것이 별로 좋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나쁜 일도 해가지고 지옥으로 뚝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마음 잘 먹고 행위를 바르게 해가지고 천상이나 극락으로 갈 수도 있는 것도 인간입니다. 업장業障이 가벼우면 인간에서 천상으로, 천상에서 우주의 도리를 아는 그런 성문聲聞 또는 연각緣覺으로 또는 중생과 더불어서 진리를 깨닫는 그런 보살로 그렇게 되어서 부처가 됩니다. 이와 같이 비록 우리가 지금 저 지옥에 있다 하더라도 또는 하나의 소가 되고 개가 되고 말이 되고 한다 할지라도 근본마음은 모두 다 부처님인 것입니다. 모두가 다 업장이 무거워서 그런 곳으로 전락했을 뿐입니다.

 

영가여! 영가는 지금 극락으로 가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그냥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애착을 뿌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 대한 애착, 자기 권속에 대한 애착 또는 자기 재산, 자기권력, 자기에 관계된 그런 모든 구속을 벗어버려야 극락에 가시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몸도 마음도 무게도 없는 그런 광명의 몸, 조금도 무게가 없는 그런 중생만이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영가여! 한 생각 놓아서 몸에 대한 애착, 권속에 대한 애착 또는 생전에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한 애착을 뿌리치십시오. 그리고 영가가 눈을 들고 보시면 극락세계는 훤히 보이시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어느 중생한테나 다 보이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스스로 못 보는 것입니다.

 

‘자작범부自作凡夫’라, 우리 중생이 스스로 잘못 생각해서 업장을 짓고 스스로 고를 받는 것입니다. 번뇌를 짓는 것이고 이 무지無知 때문에 우주의 본바탕,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기 본래 실존을 잘 모르기 때문에 번뇌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고 번뇌 때문에 나쁜 말을 하게 되고 나쁜 행동이 되고 그렇게 함으로 해서 인생고를 받는 것입니다. 인생고라고 하는 것은 원인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 때문에 잘 못 봐서, 잘못 보기 때문에 잘못 행동해서 자기 스스로 자업자득으로 받는 것입니다.

 

영가여! 오는 모이신 유가족들이시여! 인생이라 하는 것은 본래 행복스러운 것인데 중생이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해서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행복스럽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삼복三福을 지어라”는 부처님말씀이 있습니다. ‘석 삼’자, ‘복 복’자 세 가지 복입니다.

 

맨 처음에는 ‘세복世福’이라, ‘인간 세世’자, ‘복 복’자 인간 복입니다. 부모한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어른들을 공경하고 또는 일반대중들한테 베풀어주고 이런 것이 세상복인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나와서 세상 복을 받는 사람들은 우연히 받는 것이 아닙니다. 금생에는 별로 안 지었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에 모두가 그와 같이 복을 지었던 것입니다. 부모한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어른들을 공경하고 친구지간 우애하고 신의가 있고 또는 남한테 모두를 베풀고 이런 사람만이 정말로 태어나면서부터 행복을 받는 것입니다. 잘못 생긴 사람, 불행한 사람은 과거 전생에 세복世福을 못 지은 것입니다.

 

그 다음은 ‘계복戒福’이라 계행戒行을 지키는 복이란 말입니다. 계복은 어떤 것이냐 하면 생물을 죽이지 않고 또는 훔치지 않고, 남이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고 정당한 수입이 아니면 갖지 않고 또는 자신의 배필 이외의 이성들 하고 음란한 짓을 않고, 또는 거짓말· 욕설· 이간질하는 말을 하지 않고 또는 술 먹지 않고 이러한 등등의 계행을 지켜야 만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 돌아가신 ΟΟ영가와 같이 그렇게 당당하시고 늠름하신 분들은 모두가 이와 같이 세상 복을 짓고 또는 계행을 지키는 그런 복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행복行福’이라, ‘행할 행’자, ‘복 복’자, 이것은 성자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자의 길이라는 것은 우주의 도리입니다. 공자나 석가나 예수나 맹자나 노자나 모두가 우주의 길을 깨닫고서 우주의 길을 가신 분들인 것입니다. 우주의 길, 우주의 도리를 따를 적에 인간의 행복이 오고 사회도 평안스러운 것입니다.

 

우주의 도리를 안 따를 적에 개인의 마음도 불안스럽고 또는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전생에 지은 복으로 인해서 금생에 좀 잘산다 하더라도 바로 못 살면 오래 못 가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이와 같이 세상 복을 짓고 계행을 지키는 복을 짓고 또는 성자의 가르침을 따라서 행동하는 그런 삼복三福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가여! 극락세계가 저 십만 억 국토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자의 눈앞에 바로 이 자리,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바로 이곳이 극락세계입니다. 이 세상이 바로 광명光明으로 빛나는 극락세계인데 중생은 무지無知로 또는 탐욕심으로 또는 성내는 진심瞋心으로 가리어서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여! 모든 그런 얽힘을 다 떠나십시오. 허망한 이름, 눈에 보이는 일체 현상들은 모두가 다 허망虛妄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중생이 꿉 같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가여! ‘가상가명假相假名’이라, 가짜 상 가짜 이름을 떠나서 저 극락세계 광명정토光明淨土 끝도 갓도 없이 빛나는 그 극락세계를 생각하십시오. 극락세계에 계시는 분은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그와 같이 무수한 부처님, 보살들, 성자만이 계십니다.

 

영가여! 그렇게 생각하실 적에 영가는 극락세계에 순식간에 가시는 것입니다.

 

영가여! 영가 앞에 있는 오색찬란한 그런 구름을 타고서 광명光明으로 빛나는 그런 구름을 타고서 영가는 순식간에 극락세계에 가시는 것입니다.

 

영가여! 아미타불은 극락세계 교주의 이름인 동시에 모든 중생의 본래 이름이고 또는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근본 뿌리입니다. 일체중생 본래성품, 본래 실상實相 자리는 아미타불입니다. 영가가 지금 생각하실 것은 광명이 빛나는 극락세계이고 영가가 지금 부르실 것은 아미타불입니다. 우주의 진리인 동시에 자기의 참 이름 극락세계의 교주인 그 아미타불을 일심으로 생각하십시오.

 

김가 박가 같은 그 이름은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잠시간 인연 따라서 붙인 가명假名에 불과합니다. 유가족들도 지금 극락세계에 가시는 어른을 위해서 추모하는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영가와 똑같이 참다운 우리 생명의 이름인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입으로 속으로 외시고 생각으로는 극락세계의 끝도 갓도 없이 훤히 빛나는 극락세계를 생각하시는 것이 돌아가신 어른을 추모하는 가장 최선의 길입니다.

 

영가여! 주저 없이 뿌리 치셔서 해탈의 마음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1989년 11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