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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영가천도법어

미타회 천도법어

     미타회 천도법어

 

현시대에 있어서 가장 결핍된 분야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철학의 빈곤입니다. 철학이라 하는 것은 순수하게 인과율因果律을 따져 들어가서 ‘가장 최초의 원인은 무엇인가? 내 생명의 근본뿌리는 무엇인가? 우주의 근본도리는 무엇인가?’ 이런 것을 밝혀 아는 것이 철학이란 말입니다.

 

일반 중생들은 근본뿌리는 모르고서 그냥 겉만 본단 말입니다. 겉만 보고 사는 세상은 갈등이나 반목이나 불행이 항상 연속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경전에도 “상을 떠나지 못하고 사는 생활은 괴로움이요 또는 가시의 종기”라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상만 보고 삽니다. 현상적인 상에만 구속 되어서 사는 생활, 이것은 부처님 말씀대로 괴로움입니다. 천지개고天地皆苦라, 천지가 다 괴로움뿐이란 말입니다. 낳고 죽고 병들고 다 괴로움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 중생이 괴로움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다른 묘방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 중생이 잘못 본 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상을 떠나는 것은 어떻게 떠나는 것입니까? 우선 자기 존재를 객관적으로 봐야 합니다. 결국은 자기 존재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생기는 것인데 또는 이 공기가 아니면 내가 살 수 없는 것이고 물이 아니면 살 수 없고 흙이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와 같이 종종무진으로 이렇게 얽히고 저렇게 얽히고 우리 생명이 이와 같이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고리 가운데서 한 고리만 떼어버려도 안 됩니다.

 

그러기에 진리라는 것은 우주 가운데 티끌 하나만 없어도 진리가 못 된다 말입니다. ‘나쁜 놈 저놈 때문에 우리가 불행하다. 저놈을 그냥 지구상에서 온전히 소멸을 시켜버려야 되겠다.’ 이래서 우리가 이제 사형선고를 내려 가지고 사형을 시킨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소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원한을 품고 죽으면 원한을 품은대로 어디 가서 태어난단 말입니다. 생명자체는 영원불멸한 것입니다.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영생불멸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천지우주가 모두 다 개별적이 아닌,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현대에 있어서 가장 부족한 것은 ‘무슨 지식이 부족하다. 또는 무슨 재산이 부족하다.’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 그 궁극적인 철학, ‘내 생명은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우주의 본바탕은 무엇인가?’ 하는 철학의 빈곤이란 말입니다. 우리 사회나 가정이나 또 학교나 대학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투철하게 생명의 본질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무슨 도덕적인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와 남이 본래로 둘이 아니고 천지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다.’ 이런 때는 자기 가장 가까운 인연인 자기 부모한테 함부로 하겠습니까. 형제간에 함부로 하겠습니까.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우리가 생각할 때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만 생각한 사람들은 ‘영가 따위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한번 죽어 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자기 스스로를 생각할 때는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내 생명이 어딘가에는 남아있겠지.’하고 기대를 갖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 생명이 본래로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기대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마음, 석가모니 마음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보통은 ‘나는 그렇게 정직하게 살지도 않고 그렁저렁 살았기 때문에 내 마음은 석가모니 마음과 다르지 않은가.’ 이렇게 자기를 비하하기가 쉽지만 우리 불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지금 현제 어떻게 살고 있든지 간에 우리 마음은 순수하고 정다웁고 또는 무한의 공덕功德을 갖추고 있는 것이 석가모니 부처님과 똑같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나쁜 버릇 때문에 가리어서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지 실상實相의 상태에서는 똑같습니다.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우수한 특징입니다. ‘나는 잘못 살았으니까 내 마음은 그야말로 참 못된 마음이다.’ 그러나 마음이 모양이 없지 않습니까. 모양이 없는 것은 오염시킬래야 오염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 나쁜 버릇 때문에 옹고집을 내가지고서 자기 스스로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할 때에 돈오頓悟라, 문득 깨닫는 것 아닙니까. 돈오라, 나쁜 짓도 많이 하고 때 묻은 그런 마음이라고 하면 문득 깨달을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나쁜 짓이라는 것도 역시 흔적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모양이라 하는 불교말로는 상이라, 모양이라 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연구를 하십시오. 깊이 공부를 하셔야 됩니다. 모양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잘못 하시면 우리 생활도 역시 깊은 생활이 못됩니다. 부처님 가르침과 같이 여법한 생활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모양, 이것이 본래로는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모양이 있지가 않은 도리를 알기 위해서는 눈을 부릅뜨고 자기 정신을 가다듬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본래 실상實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 모양이 어째서 있지가 않은 것입니까? 천지우주가 모양 때문에 서로 ‘좋다, 궂다, 싸우고 죽이고’ 하는 것인데 성자들의 그 맑은 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명명백백히 모양은 없는 것입니다. 모양이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승려들이 우리 중생더러 욕심을 내지 않기 위해서 모양이 있는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어째서 모양이 없는 것입니까? 아까 인연법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느 것이나 인연 따라서 잠시간 가상假相을 낸단 말입니다.『반야심경』에 있는 법문 아닙니까. 우리 몸뚱이나 우리 몸은 가화합假和合이란 말입니다. 법이 가짜로 임시간 이렇게 모여 있단 말입니다. 오온가합五蘊假合이라, 오온五蘊은 다 아시지 않습니까. 『반야심경』 해설을 보셨지요. 오온 이것은 물질을 구성한 색인 지地 ‧水 ‧火 ‧ 이라, 물질을 구성한 지 풍과 또는 우리가 감수하고 상상하고 또는 우리가 응용하고 우리가 분별하고 말입니다. 수水 ‧ 이란 말입니다. 지 풍인 물질과 또는 우리가 감수하고 상상하고 응용하고 분별 시비하는 그 마음이 모인 것이 내 마음과 몸이란 말입니다. 그것을 떠나서는 내 몸이나 마음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러분들 다 아시지 않습니까. 현대식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그런 것으로 우리 몸뚱이를 구성해 있습니다. 그런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이 고유하게 있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에너지 기운이 어떻게 진동하는가?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이 어떻게 모여 있는가? 그것 따라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각 원소가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가장 분석하고 분석해서 더 분석할 수 없는 작은 알갱이가 전자, 중성자, 양성자 그런 것 아닙니까. 전자 그것이 본래로 고유한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우주의 정기가, 우주의 기운이 어떻게 지금 움직이고 있는가? 어떻게 진동하는가? 우주의 정기가 어떻게 운동하는가? 그것 따라서 전자라 이름 붙이고 양자라 이름 붙인단 말입니다. 마이너스 기운을 내면 전자고 플러스 기운을 내면 양자란 말입니다.

 

따라서 일체 모든 물질의 구성은 가장 작은 알맹이가 결국은 따지고 보면 결국 우주정기, 하나의 에너지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에너지란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란 것은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있기 때문에 물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에너지는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이 아닌 것이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여서 가짜 상을 낸단 말입니다. 가짜 모양을 낸 것입니다. 그림자 같이 말입니다.

 

항상 말씀드립니다만 이 ‘다 비었다.’는 ‘모양이 본래 없다.’는 소식을 우리가 알기가 어려워서 그때그때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드립니다. 모양이 분명히 있는데 부처님은 ‘없다’ 했단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 가운데 ‘모양이 없다’는 것을 알아들어야 그래야 비로소 소승을 떠나서 대승이 됩니다. 그걸 모르면 『반야심경』『금강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을 모르면 그때는 참다운 불자가 못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생각할 때는 분명히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천지만물 각 산소, 수소, 철이요, 금이요, 다이아몬드가 있지만 성자들은 근본바탕에서 보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근본뿌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비어 있단 말입니다. 아무리 어려우셔도 이 도리는 꼭 아셔야 됩니다.

그것을 모르면 자기 상을 못 떠나고 참다운 행복은 없습니다. 자기 몸을 구성한 것이나 우리 마음을 구성한 것이나 오온법五蘊法이 다 비었다고 깨달아야 비로소 인생고를 떠난단 말입니다. 우리 정신이나 우리 몸뚱이나 일체 물질이 비었다는 소식을 모르면 그때는 인생고를 못 떠납니다.

 

불교는 인생고를 떠나는 것입니다. 슬기롭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불교란 말입니다. 무엇이 슬기입니까? 참다운 지혜라는 것은 부처님 지혜, 제법諸法이 공한 도리, 제법이 공한 도리를 모르니까 우리 승가나 속가나 부질없이 분별하고 싸운단 말입니다. 다 비었다는 소식을 알아야 몸도 시원하고 가뿐합니다. 정말로 우리 번뇌의 뿌리가 다 뽑혀서 정말로 확실하게 비었다고 확신이 생기면 우리 몸이 하늘로 뜨는 것입니다. 본래로 빈 것이니 모여서 금이 되고 몸뚱이 되고 했거니 본래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에너지가 무슨 무게가 있습니까. 무게가 없는 것이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여서 운동함으로 해서 가상假相이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런 가상을 ‘참말로 있다.’고 생각한데서 마음도 무거워지고 몸도 무거워지고 한단 말입니다. 남을 지독하니 미워할 때 우리 몸도 훨씬 무겁습니다. 무게로 재서 무거운 것이 아니라 우리 기운이 무겁습니다.

 

정말로 예수의 기적이라든가, 석가모니 삼명육통三命六通 그런 것이 거짓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에게 보다 더 깊은 신앙을 주기위해서 그런 기적을 말하고 부처님 신통을 말했다.’ 이렇게 보통 봅니다. 우리 스님네도 그렇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신통神通은 외도外道나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함경』은 부처님 육성 같은 초기 경전인데, 아함경 수십 군데에 ‘삼명육통’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하면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인간성, 내 마음 자리, 내 마음의 본바탕인 불성佛性자리를 분명히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내 마음 가운데 모든 행복과 모든 공덕功德이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밖에서 안 구해도 다 들어있습니다.

 

성인들은 그 자리를 깨달아서 그 자리에 자기 마음이 머물러 있으니까 다른 헛된 짓을 않습니다. 예수가 큰 교회당을 짓고 설법했습니까. 갈릴리 해안에서 그 구차한 사람들과 그 같이 모여 가지고서 베드로나 요한이나 모두가 다 어부 입니다. 이리 저리 다니면서 설법했단 말입니다. 석가모니도 집을 나간 뒤에 팔십 노인이 어디 집에 들어가 돌아갔겠습니까. 나무 밑에서 도를 통하고 동시에 나무 밑에서 가셨단 말입니다. 가장 존귀한 우리 교조가 나무 밑에서 도를 깨닫고 한데서 자고 돌아가실 때도 한데서 낙엽을 깔고 다 떨어진 누더기 걸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만 생각한다 하더라도 절 가지고 싸우겠습니까. 뭘 가지고 싸우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지금은 본질적으로 문제를 생각할 때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살면 절대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의 병은 가벼운 병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은 무명無明병이라, 무지無知병입니다. 밝지 못한 병입니다. 어떻게 밝지 않는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한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그와 같이 난행고행을 해가지고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우주의 실상實相을 그대로 다 깨닫고서 우리한테 말씀해 주셨건만 우리 중생들은 믿지를 않습니다. 꼭 쥐꼬리만 한 자기 범부소견 이른바 관견管見이라, 바늘구멍으로 하늘을 보면 다 보이겠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지금 동굴에 갇힌 어두운 안목으로 삽니다. ‘나요 너요 좋다 궂다’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어두운 동굴에서 어두운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흐리멍덩한 눈으로 행복을 추구하면 행복이 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은 절대로 다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다 우리 인간을 마음 편하고 번뇌를 다 해탈하고 참다운 행복으로 인도한단 말입니다.

 

을 쭉쭉 외운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공부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나’라는 상, ‘너’라는 상,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그런 상을 떠나면 성자고, 상이 있으면 범부凡夫란 말입니다. 상을 두고서 행복을 구하면 연목구어緣木求魚라, 나무에 올라가서 고기를 구한단 말입니다. 아집我執, 법집法執을 떠나지 않으면 자기 마음의 평화도 없고 지상의 참다운 평화나 어떠한 안락安樂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경전에도 우리가 상을 떠나지 않고서 진리를 구하려고 할 때는 증사작반蒸沙作飯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을 한단 말입니다. 모래를 삶으면 밥이 되겠습니까. 우리 중생은 그런 모양입니다. 감투를 구하고 황금을 구하고 욕심으로 행복을 구합니다. 모양만 갖춘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모래를 삶아서 밥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맨날 노력해도 안 됩니다. 유구한 역사가 다 증명하지 않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정말 깊이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철저한 공식입니다. 한 치도 오류가 없습니다. 상을 떠나면 이것은 참다운 행복과 성자의 길로, 해탈의 길로 가는 것이고 상을 못 떠나면 범부로서 항상 부딪치고 남과 갈등되고 반목되고 합니다. 우리 범부가 어떻게 상을 떠날 것인가? 우리 범부는 상 가운데 사는데 어떻게 상을 떠날 것인가? 그렇게 절대로 낙담을 말으십시오.

 

우리한테는 본래로 불성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께서 보리수하에서 도를 이루셨습니다. 석가모니 당신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산천초목이나 중생이 모두가 다 부처란 말입니다. 요새 지존파 같은 나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석가모니가 보면 어떻게 볼 것인가? 그 나쁜 사람도 역시 겉만 그런 것이지 성자가 본 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 뿌리를 못 봅니다. 그 뿌리를 보지 못하니까 상만 내세운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 뿌리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나쁜 사람이다 해서 사형선고를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사실은 불성佛性을 말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적어도 상을 못 떠나는 우리 중생들은 다 공범자입니다. 허물이 더 많고 적고 차이뿐인 것이지 성자가 아닌 한에는 모두가 다 공범자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욕심도 내고 더러는 음욕淫慾도 내고 말입니다.

 

우리 병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골수에 사무쳐있는 무명無明병입니다. ‘남한테 조금 베푼다, 조금 참는다.’ 그런 걸로 해서 고칠 수가 없습니다. 도덕이 부재不在라, 도덕성은 지금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왜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인가? 인간성을 바로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지키지 말라고 해도 자동적으로 다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어느 누구한테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자연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라 때 무상無相대사는 중국 사천성에 들어가서 그 당시에는 청나라인데 아주 험준한데 들어가서 어떻게 음식을 얻을 수 없단 말입니다. 산중에서 황토를 먹고 살았습니다. 황토에도 영양이 있습니다. 흙도 영양이 있습니다. 공기도 영양이 있습니다. 하물며 물 같은 액체가 영양이 없겠습니까.

 

인간이라는 것이 꼭 무슨 단백질 얼마를 먹고 칼로리 얼마를 섭취하고 그래야만이 건강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인간의 물질관을 고쳐야 됩니다. 우리 한국은 지금 선진국으로 가고자해서 발돋움을 합니다. 그러나 너무 먹거리 때문에 힘을 굉장히 낭비 합니다. 지금 미국 같은 곳도 관광지에 가서 보면 음식점이 통 눈에 안 보입니다. 관광지에서 나와서 다른 곳에는 있겠지만 관광지에서는 음식점이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조용하게 그렇게 관광만 즐기고 감상한단 말입니다. 한국 관광지 가면 횟집이고 갈비집이고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로 우리는 우리 몸뚱이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질로 해야 된다고 생각할 때는 행복은 절대로 얻을 수가 없고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에 제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설사 우리가 참선을 해서 우리 마음을 맑히고자 해도 우리 몸뚱이가 맑혀져야지 몸뚱이는 마약도 하고 또 술도 먹고 담배도 피우고 함부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몸뚱이가 정화가 안 됩니다. 마땅히 부처님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매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범부심으로 해서 함부로 모양에 취해서, 모양에 노예가 되어서 살던 것을 돌이켜서 회광반조回光反照라, 다시 속된 흐름을 역류해서 영생해탈의 그런 청정한 흐름에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동안에는 약간 무리가 되겠지요. 고기 먹던 사람이 안 먹으면 그것도 약간 무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뿐입니다. 단식을 안 해본 사람들은 단식을 일주일이나 이주일이나 한 뒤에 그때 소생되는 그 무서운 힘을 느끼지를 잘 못하실 것입니다. ‘생명은 얼마나 먹어야 된다. 칼로리를 얼마나 먹어야 된다.’ 그런 공식만 생각한 사람들은 단식을 일주일이나 이주일이나 한 뒤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솟아나오는 힘을 느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해를 못합니다.

 

이 ‘나’라는 것의 생명이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몸뚱이는 우리 마음의 생명위에 상응되어 이루는 하나의 거품에 불과합니다. 거품 그것 때문에 우리가 너무나 힘을 낭비한단 말입니다. 미국 사람들도 보면 5분의 3이 비만 때문에 고생한단 말입니다. 몸이 비만하면 가지가지 병의 원인이 됩니다. 너무 많이 먹었을 겁니다.

 

을 못 떠나면 불자가 아닙니다. 상은 본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잠시간 허망한 모양을 내고 있단 말입니다. 그림자 같이 메아리 같이 메아리 그것이 모양이 있습니까? 그와 똑같이 우리 몸뚱이도 본질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양이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그림자를 보듯이 잘못 본단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상實相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상假相만 봅니다. 부처님 말씀이니까 그걸 믿고서 자기 스스로 그런 가상을 떠나야 한단 말입니다. 가상을 떠나기 위해서 불경이 있는 것이고, 주문이 있는 것이고, 기도를 모시는 것입니다. 지장보살이 안 보여도 우리가 지장보살을 열심히 부르지 않습니까. 지장보살은 우리 지구를 축으로 해서 충만해 있는 에너지기운이란 말입니다. 그런 기운 따라서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지장보살만 부르고 관세음보살은 부르지 말 것입니까. 그런 부처님 명호名號 때문에 지금 사람들은 굉장히 갈등을 많이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몇 십 년 동안 한 사람한테도 ‘지장보살이 좋다’는 말 듣고서 그 사람한테 ‘관세음보살 그만 두고 지장보살 하십시오.’ 합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그 분이 여태까지 생리나 심리에 ‘관세음보살’이 딱 배어있는데 그걸 그만 두고서 ‘지장보살’ 하자니 굉장히 무리가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저는 법문 때마다 말씀을 꼭 드립니다만 부처님 믿는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모양이 없는 세계 아닙니까. 형이상학적인 모양이 전혀 없는, 모양이 없는 생명자체, 생명자체의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자리란 말입니다. 근본의 뿌리자리, 현대 물리학적으로 순수에너지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자린인데 그 자리는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양이 있어야 ‘이것이 뭣이다.’ ‘저것이 뭣이다.’ 그럴 것인데 모양이 없어서 어떻게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기 때문에 어디에만 있고 어디에는 없는 게 아니라 모양이 없기 때문에 천지우주에 두루 해 있습니다. 무량무변無量無邊이라,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두루 해 있는 것이 모양이 없는 우리 마음자리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모양이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모양이 없는 마음자리가 바로 부처님인지라, 그 부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것입니까? 그 부처님 자리는 무한의 그런 공덕功德자리, 일체만덕을 갖춘 자리이기 때문에 그 덕상을 전부 다 헤아려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호가 있고 또는 이름이 있고 자가 있고 하더라도 내내야 그 사람 아닙니까. 그와 똑같이 부처님 명호도 그 무량무변의 공덕 따라서 모양이 없는 자리를 그때그때 공덕 따라서 이름이 붙기 때문에 어떻게 말하나 하나의 부처님을 부른다고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지장보살을 구태여 안 부르고 관세음보살을 왼다 하더라도 천도薦度가 되고 공덕이 됩니다. 나무아미타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이른바 총대명사가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진리만을 구할 때는 다른 보살이름도 좋습니다만 ‘나무아미타불’을 보통 많이 합니다. 또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할 때는 천지우주의 교주, 부처님의 총대명사가 아미타불이기 때문에 아미타불을 보통 많이 부르는 것입니다. 또는 참선할 때도 역시 참선을 염불로 하실 때는 나무를 떼버리고서 아미타불 넉자를 화두로 해서 ‘아미타불, 아미타불.......’ 이와 같이 부처님을 부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방법을 염불선念佛禪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아까도 말씀 드린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안 보이는 세계를 다스리고, 안 보이는 그런 우리마음을 다스리는 그런 가르침이 바로 불교이기 때문에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긍정하지 않으면 불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심信心이라,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지 우리 눈에 안 보이니까 우리가 ‘의심한다.’ ‘안 믿는다.’그래 버리면 그때는 바른 신앙이 될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그런 영가나 살아계신 분이나 다 동일생명의, 하나의 생명의 끈에 다 매어져 있습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우리 부모님이나 모두가 다 우리생명과 같은 끈으로 같은 생명의 줄로 이어져있습니다. 우리 형편이 좋지 않아 천도를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활이 부처님 앞에 정당하고 신심있고 남한테 베풀고 남하고 화해하고 그런 때는 그만치 화해한 기운, 정당한 기운이 우리 조상들한테 가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오늘 부처님의 상이 없는 법문, 무상법문無相法門을 듣고서 극락세계에 왕생하시는 그러한 도상道上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나 유명幽冥에 있는 영가들이나 모두가 다 지금 길을 가고 있습니다. 중생계에서 영생해탈의 길로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만치 내가 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모양에 집착을 해서 자기 재산 또는 자기 몸뚱이 또는 밉다. 사랑한다 하는 그런 것, 자기 관념 이런 것에 집착되면 집착된 만치 우리는 길을 잘 가지 못하고 한눈을 팔고 있는 것입니다.

 

한눈을 팔고 있는 것인가? 않은 것인가? 이것은 상을 두는 것과 안 두는 것의 차이입니다. 상은 본래로 있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중생이 잘못 봐서 상을 두는 것입니다. 같은 상도 천상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간같이 보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 정당하다는 것도 천상에서 본다고 할 때는 부당하게 볼 수 있단 말입니다. 초등학생이 옳다고 보는 것을 대학생이 꼭 옳다고 볼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인간의 그런 성품 차원에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보는 것이 꼭 옳지가 않단 말입니다. 성자가 보는 것만이 사실을 사실로 보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성자의 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나’라는 상상, ‘너’라는 상 또는 ‘중생’이라는 상 또는 ‘우리 생명이 짧다, 길다.’는 상 이런 것이 모두가 다 허망한 상인 것입니다. 우리생명은 본래로 영생불멸한 것입니다. 우리 생명은 본래로 죽지 않는 것입니다. 죽지 않은 것인데 다만 인연 따라서 업장業障으로 해서 잠시간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지 생명은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위대한 근본을 보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까닭도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모양이 좀 아프면 큰 탈이구나.’ ‘모양이 없어지면 내 생명 전체가 손해구나.’ 이렇게 낙담, 절망할는지 모르겠지만 모양에 애착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지금 바로 살았다고 하면 내 목숨이 떠나자마자 즉시에 뒤에 보다 더 나은 좋은 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 믿는 분들은 대체로 가시자마자 훨씬 더 좋은 몸을 받습니다. 따라서 어느 때 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조금도 섭섭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영가들이시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극락세계는 모든 상을 떠난 세계입니다. 우리 인간이 번뇌를 떠나버린 세계입니다. ‘나’라는 것을 떠나보낸 세계입니다. ‘나’라는 관념, ‘너’라는 관념 또는 ‘좋다, 궂다, 밉다, 사랑한다.’ 하는 관념을 떠나버린 세계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는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극락세계의 땅이나 또는 극락세계의 물이나 극락세계의 나무나 항상 영생불멸한 미묘한 부처님법문을 연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극락세계까지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우선 천당만 간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은 들을 수 없는 음악이 항상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런 것을 듣지 못합니다. 왜 듣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상 때문에 가리어서 못 듣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중생이 ‘나’라는 관념, ‘있다’는 관념, ‘사랑한다’는 관념을 떠나버린다고 생각할 때는 들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오늘 천도법회에 나오신 우리 불자님들! 오늘 지금 법회에 계신 법주, 바라제하신 스님은 굉장히 공부를 잘 하신 스님입니다. 참다운 스님입니다. 영가란 것은 모양이 안 보이는 생명인데, 모양이 안 보이는 그런 생명이기 때문에 같은 염불소리도 굉장히 청아하고 정말로 사무친다고 생각할 때는 훨씬 더 감명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영가들은 참 행복하신 영가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인데 상에 구속된 사람들은 지옥도 가는 것입니다. 지옥이나 아수라阿修羅나 축생畜生이나 인간이나 모두가 다 얼마만치 상에 매이는가, 상의 경중 따라서 상이 무거운가, 가벼운가 따라서 삼악도三惡道로 갈 것인가 좋은 데로 갈 것인가 구분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와 남의 구분이 없이 정말로 무아행無我行이라, 이런다고 생각할 때는 즉시에 극락세계로 왕생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시여! 조상님 천도가 절대로 헛되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생명과 같은 생명의 줄로 이어져 있어서 우리 조상이 갈 곳으로 못가고 중음계中陰界라, 어두운 세계에서 헤맨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간세상도 항상 막히고 곤란스럽고 어디가 아프기도 합니다. 정말로 병원에 가서 무슨 병인지 진단도 안 나오는데 그런 아픈 병들은 대체로 영가 때문에 그럽니다. 따라서 영가천도가 절대로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영가천도를 참 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염불도 하고 법문도 하지만 여러분들께서 바르게 생활을 하셔야지 여러분들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여러분들이 바른 정당한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는 조상들이나 영가들이 자꾸만 뒤돌아보고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또는 같은 핏줄이기 때문에 우리 살아있는 분들이 정당하게 바른 생활을 하면 돌아가신 영가들의 생명을 나중에 증장시키는 것이고, 우리가 정당하지 못하면 오염된 기운이 영가한테로 미치는 것입니다. 꼭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한테 효성 하는 것이 영가천도만 해서 끝나는 것도 아닌 것이고 부모님 묘를 잘 정리해서 장엄스럽게 꾸미는 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르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성자의 길 따라서 산목숨 죽이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정당한 수입 아닌 것은 갖지 않아야합니다. 낭비하는 것도 훔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은 훔친다 그러면 꼭 남의 것을 훔치는 것만을 죄로 알는지 모르겠지만 부처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필요 없이 목걸이하고, 필요 없이 팔찌끼고 이런 것도 모두가 다 훔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우리생명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됩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생명은 저 아프리카에 있는 생명이나 우리나 같은 생명의 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네들이 불행할 때는 우리가 행복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우간다나 방글라데시나 이런 데는 지금도 하루에 몇 백 명씩 아사餓死해서 죽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우리가 둘이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은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닙니다. 진리로 여법히 가는 길입니다. 보다 더 결단을 내려서 인생을 바르게 사십시오. 바르게 살려면 될수록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는 물질은 덜 붙이고 살면 됩니다. 그렇게 바르게 사신다고 생각할 때는 영가들도 춤추고 극락세계로 빨리빨리 왕생할 것입니다.

 

오늘 천도薦度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부디 모든 허망상을 다 여의십시오. 자기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기 마음 외에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기 몸뚱이도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자기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부처님의 공덕功德위에서 영생해탈을 가기위해서 잠시간 이런 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바르게 공부하셔서 우리 살아계신 불자님들, 우리 영가들 금생에 모든 번뇌를 여의시고 금생에 극락세계로 지상의 행복을 이루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나무 지장보살마하살!

 

                                                                                 1994년 10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