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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영가천도법어

덕원암 천도법어

덕원암 천도법어

 

 

이 세상에서 가장 부사의不思義하고 알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은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우리 인간 존재가 실존적으로 있다고 생각할 때 마음도 실재합니다. 그와 똑같이 부처님이라는 우리가 숭앙하는 신앙대상도 역시 지금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생각을 하는 분들은 ‘우리 마음도 허망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실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실존적으로 분명히 있다고 생각할 때 부처님도 분명히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과 부처님은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똑같은 생명의 실상實相입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 최상의 그런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마음의 본체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가장 비열하고 가장 위선적인 그것도 역시 우리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잘 쓰면 부처요, 마음 잘 못쓰면 바로 지옥이요, 축생畜生이고, 또는 아수라阿修羅인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을 지금 제대로 공부하고 계십니까? 저는 법회 때마다 가끔 인용을 합니다만 그 마하트마간디 같은 성인成人이 기독교를 평할 때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천을 싫어한다. 왜 그런가 하면 그네들이 예수를 따르지 않으니까 싫어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점은 우리 불교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가 부처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 것인가? 부처님을 제대로 닮고 있는 것인가? 칠순이 될 때까지 부처님을 의지해서 한 50년 세월동안 지내온 저 같은 사람 역시 ‘부처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 것인가? 부처님을 닮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참괴무참慙愧無慙합니다. 과거를 생각해 보면 조금씩 애는 썼지만 온전히 부처님을 닮아 보지를 못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궁무진 합니다. 우선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의 구분을 여러분들이 분명히 아셔서 소승적인 차원을 떠나서 대승적인 차원으로 우리 마음을 열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소승이고 어떠한 것이 대승인가? 여러 가지 복잡한 교리체계가 있지만 우선 간단히 한 말씀으로 하면 소승은 부처님을 석가모니부처님으로 한정 짓지만 대승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과거나 현재, 미래 언제나 실존적으로 계시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이른바 법신法身부처님입니다. 소승의 가르침은 법신부처님이란 말이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우리 마음과 부처님은 온전히 한 몫, 한 생명입니다. 내 마음 이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시간성이나 공간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성이나 공간성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마음은 내 몸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끝도 갓도 없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생명의 존재입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도 자비를 좀 베풀고 남한테 봉사도 좀 하고 자기 가족은 훨씬 더 사랑하고, 자기 이웃에게는 우리가 더 관심을 두고 이런 정도로 연다는 것은 참다운 것은 못됩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이른바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는 소식을 알아야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 것인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은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으면서도 분명히 있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내 소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닮아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님의 공덕功德, 무한 공덕이 우리한테도 미치는 것이지 부처님을 닮지 않고서 부처님 공덕이 우리한테 올 수가 없습니다. 법신부처님, 석가모니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영생불멸하게 나지 않고 죽지 않는 그런 참다운 부처님, 이 부처님은 그냥 영생불멸하는 그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가운데는 만공덕장滿功德藏이라, 헤아릴 수 없는 무수무량의 공덕이 온전히 거기에 다 갖추어 있습니다. 법신부처님이 바로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도 역시 그와 같이 한없는 그런 공덕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만 믿으면 그런 마음 공덕功德을 다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마태복음서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가 자기 제자들한테 하는 말씀인데 “그대들이 겨자씨만한 신앙심이 있다고 하면 앞에 보이는 산을 보고 저쪽으로 옮겨가라고 하면 틀림없이 옮겨가는 도다.” 이랬단 말입니다. 불자님들 실감이 안 나시지요. 아무리 공부를 한 성자라 하더라도 산을 어떻게 움직일 수가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거짓말을 할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법신法身부처님, 불성佛性이라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마음이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몸뚱이라 하는 것은 우리마음의 그런 업식業識 따라서 잠시간 인연으로 합해진 것입니다. 물질이 아닌 시간성, 공간성이 없는 업식이라 하는 것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인 세포가 우리 몸이기 때문에 이것도 사실은 참말로 있다고 보기는 힘든 것입니다. 부처님을 믿는데 부처님의 실상實相을 알고 믿어야 우리에게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공덕이 온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실상이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믿고 있는 신앙의 대상을 너무나 소홀히 생각합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100% 믿어야 하는 것인데 그 신앙대상의 공덕이 제한된다거나 또는 인격이 온전하지 못하면 참다운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허망虛妄무상無常한 것이 자기생명, 자기 몸뚱이를 다 바친다 하더라도 조금도 회한이 없다 할 정도로 신앙이 되어야 온전한 신앙이 될 것인데, 신앙대상에 대한 그런 공덕을 믿지 못하면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많은 영가들을 천도薦度 합니다만, 우리가 잘못하면 부처님 법을 닦는 것을 뒤로 미루고 영가천도에만 매달리는 폐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가들이 모양이 안 보인다 해서 없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마음이 모양이 없으면서 존재하듯이 영혼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죽어지면 죽어있는 생이라, 이른바 쉬운 말로 하면 저승입니다. 저승에서 헤매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바로 살았으면 지은대로 극락極樂도 가고 또는 십선업十善業을 닦았으면 천상도 가고 또는 오계五戒를 잘 닦았으면 인간으로 다시 인도환생도 되고 하는 것입니다. 오계마저도 제대로 못 닦았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자기가 지은대로 분명히 지옥도 가는 것이고 축생畜生도 되는 것이고 또는 아귀餓鬼라 하는 그런 귀신도 되는 것입니다. 현상적인 눈에 보이는 그런 세계만 긍정하는 현대인들은 ‘영가를 천도薦度한다.’ 라고 하면 자칫하면 미신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이것은 미신이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시아귀施餓鬼라, ‘베풀 시施’자 아귀는 음식을 구하지만 미처 얻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귀 귀신세계인데, 구하기는 구하지만 얻지를 못하는 그런 고통이 굉장히 크지 않습니까. 이른바 구부득고求不得苦라, 그 구부득고가 우리 중생세계에도 있지만 특히 아귀세계는 더욱 더 치성한 것입니다. 먹고는 싶지만 사람처럼 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귀 목구멍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음식을 넘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애써 구하지만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자기 후손들이나 또는 불자님들이 음식을 차려놓고 바치지만 가까스로 냄새만 맡지 먹을 수가 없습니다. 냄새, 그것 역시 부처님법문이 들어가야 이른바 법식法食이라, 비로소 냄새를 맡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귀의 음식이 됩니다.

 

우리 불자님들이시여!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전쟁에서 죽은 그런 영가들, 또는 돼지 영가, 소 영가, 닭 영가 또는 뱀들의 영가 말입니다. 그런 영가들이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연계 천변지이天變地異라, 폭풍우가 일어나고 그런 몹쓸 병이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도 영가들하고 관계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다 있겠지만 우주의 그런 부조화스런 기류 또는 모든 곤충이나 이른바 병균들도 역시 영가들하고 아주 상당히 깊은 관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영가니까 우리 주변에서 그러한 것이 더 번식이 되더라도 알 길이 없단 말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부처님 법문을 깊이 들으시고 중음계中陰界라 하는 그런 세계를 떠나셔야 합니다. 영가들도 우리 사람의 마음과 똑같이 영가들의 마음도 바로 불심佛心입니다. 또는 개나 소나 그런 영가들의 마음도 역시 불심입니다. 우주만유가 불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도리가 불교 술어로 하면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또는 법성연기法性緣起라,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란 말입니다. 불심佛心이라 하는 그 한도 끝도 없는 생명의 실체가, 모든 공덕을 갖춘 생명의 실체가 그때그때 자기의 갖추어진 인연 따라서 태양이 되고, 달이 되고, 해가 되고, 인간이 되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란 것은 깊이 들어가 보면 모두가 다 부처님뿐입니다. 부처님 아니고는 아무 것도 없는 이른바 화엄사상의 화장세계華藏世界라, 화장세계란 특별히 빛나는 어느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사는 이렇게 모순으로 차 있고 이렇게 위기일발의 무섭고 어려운 세계 역시 화장세계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의 때 묻은 눈으로 봐서 제대로 볼 수가 없을 뿐입니다.

 

우리는 복을 짓지 않고 복을 받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복만 지으면, 원인만 지으면 그때는 ‘복불가피福不可彼’라, 복은 피할 수 없이 우리에게 오고야 맙니다. 그런데 우리 행동이 그 반대의 행동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고불가피苦不可彼’라, 인생고를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것이 인생고를 초래하는 원인인 것인가? 어떠한 것이 우리의 참다운 행복과 아울러서 영생의 행복을 우리한테 보장하는 그런 원인이 될 것인가?’ 이런 것을 아는 것이 불교입니다.

 

우리불자님들 우리 눈에 마음이 안 보여도 분명히 있고 부처님이 안 보여도 부처님이 우주에 충만히 계시듯이 부처님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계가 있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나 우리 몸에나 또는 공기에나 물에나 어디에나 다 들어 계십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안목이 밝다고 생각할 때는 흙을 보나, 물을 보나, 사물을 보나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입니다. 우리 중생의 업에 가리어서 인간 정도의 업을 짓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한계 있게 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밉다’고 해서 꼭 실존적으로 미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좋다’고 해서 꼭 좋은 것도 아닙니다. 영원적인 차원, 그 불성佛性의 차원에서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인데 불성차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성자만이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같은 물도 사람이 볼 때는 먹는 물 아닙니까. 거기에 사는 고기가 본 다고 할 때는 고기가 사는 집이란 말입니다. 천상사람들이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청정한 유리보배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보실 것인가? 청정한 부처님 안목, 번뇌를 떠나 버린 실상實相을 실상대로 볼 수 있는 부처님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존재, 물이나 산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그런 세계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시여!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극락세계만이 실제 존재하는 실존적인 세계입니다. 또는 그 세계는 이 우주가 형성되기 전에도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계는 물질적인 한계가 있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때는 사람의 생사에도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이루어지고 또는 중생이 살고 파괴가 되고 또는 텅텅 비어버리는 공겁空劫이 되고 이런 것에도 극락세계라는 참다운 세계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낳지 않고 죽지 않는 것입니다. 이른바 무생無生의 세계입니다. 낳지 않는 세계란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새삼스럽게 낳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또 그때는 없어질 필요도 없단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짤막한데도 그런 도리가 다 들어있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원래 진리란 것은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하지도 않고 덜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염될 것도 없고 오염을 받을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일체의 가르침을 다 포함해 있습니다. 우리가 금생今生에 부처님 가르침을 믿었다는 것은 얼마나 전생前生에 복을 많이 지었던가 스스로 우리가 반조를 안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행복스러운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지금 겪고 있는 이 경제 한파 또는 세계적인 위기상황 또는 무서운 이데올로기 싸움 말입니다. 이러한 것도 모두가 다 우리 인간존재가 바로 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바른 가치관, 인생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꾸어서 말하면 철학의 부재, 철학의 빈곤이라, 현대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과학만능시대이고 과학으로 해서 우리의 생활이 편리하고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라 하는 것은 형체가 있는 한계, 상대적인 경계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물질의 근본 본체를 아는 것은 종교뿐입니다. 종교도 부처님 가르침 같은, 아주 궁극적으로 다른 성인들은 부처님처럼 진리당체를 궁극적으로 다 밝히지는 못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하나부터 백까지 모두를 다 훤히 밝게 가르친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그 중음계中陰界라 하는 어두운 세계를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과거 생에 잘못 살아서 원인을 지어서 지금 옥고를 받고 있습니다. 욕심이 너무 많아서 욕심 때문에 아귀餓鬼라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철학도 못 배우고 과학도 못 배우고 참다운 진리를 못 배웠기 때문에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축생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또는 투쟁을 좋아하고 걸핏하면 진심瞋心을 많이 내고 그러한 생활을 한 분들은 틀림없이 아수라阿修羅 세계에서 싸움으로 자기 생명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계시든지 간에 그러한 모든 생명의 근본은 부처님입니다. 지옥도 근본은 부처님이요, 아귀도 근본은 부처님이요, 또는 축생畜生도 근본은 부처님이요,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세계도 근본은 다 부처님입니다. 사람을 살해하고 사형선고를 받아서 곧 사형집행이 될 그런 사람들 역시 똑같이 다 본래성품은 부처님입니다. 이런 것을 본래로 다 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사회의 부조화는 순식간에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관심론觀心論』에서, 『관심론』은 그 전에는 달마達磨스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요즈음은 신수神秀스님의 저작이라 하기도합니다. 달마스님의 말씀이 아닌 신수스님의 말씀이라 해도 모두가 다 진리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약능요심若能了心만덕구비萬德具備”라 제가 풀어서 말씀 드리면 만약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 깨닫는다면 만덕萬德이 구비具備라, 만덕을 갖추게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고뇌나 개인적인 그런 몸의 아픔이나 가족적인 그런 갈등이나 우리 민족적인 그런 불행이나 모두가 다 마음을 깨닫는 쪽에 초점을 두고 생활한다고 할 적에는 모두가 다 해소가 됩니다.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뜨거운 화로에 한 점 눈이 녹아내리듯이 해소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우리 생활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어려운 길이 절대로 아닙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이 제일 쉬운 길입니다. 부처님을 애쓰고 찾으려고 몇 십 년 동안 지내온 저 같은 사람도 그때그때 많은 경험도 하고 또는 체험을 해서 실증도 어느 정도는 많이 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대로 믿는 것이 제일 쉽고 제일 편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마스님 법문에도 ‘안심법문安心法問’이라는 법문이 있어요. 안심법문이라, 부처님법문은 안락법문安樂法問입니다. 참 쉬운 법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주란 것은 우주의 법 따라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모두가 다 우주의 법도 따라서 움직입니다. 그런데 의식이 발달된 우리 인간은 우주의 법도대로 잘못 따른단 말입니다. 잘못된 생각으로 잘못된 말도하고 잘못된 행동도 합니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고통의 씨앗을 심은 것이니 필연적으로 인생고를 받습니다.

 

우주의 법도란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부처님의 계율戒律과 부처님한테다가 마음을 집중시키는 선정禪定말입니다. 또는 ‘우주 자체가 바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느끼는 지혜와 이것이 바로 불교의 정견正見이란 말입니다. 같은 정견도 소승정견과 대승정견의 구분이 있습니다. 소승정견은 그냥 ‘모두가 다 허망虛妄무상無常하다’ ‘이런 저런 것이 인연 따라 낳으니까 이것저것이 허망하고 무상하다’ 그러니까 ‘모두가 다 허망한 공이다’ 이런 정도만 말씀을 했습니다. 허망하고 무상한 것은 사실입니다. 인연 따라 생겨난 인연생의 존재는 모두가 다 허망하고 무상합니다. 실상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느끼는 ‘내가 있다, 네가 있다, 내 것이다, 좋다, 궂다’ 하는 생각은 분명히 실상實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은 무상하고 허망하고 결국은 ‘공’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 ‘공’이 허망이 아닌 생명의 본체, 이것은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진리’인 동시에 바로 ‘부처님의 성품’이란 말입니다. ‘법성法性’이나 ‘주인공’이나 또는 ‘실상’이나 ‘열반’이나 또는 ‘도’나 ‘진리’나 ‘하나님’이나 모두가 다 같은 뜻인데 이런 자리에서는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 이것은 인도음인데 ‘광명변조光明邊照’라 번역됩니다. 부처님의 마음이 안 보이듯이 우리 중생은 그 자리가 안 보이는 것이니까, 보이는 것이 다 라고 생각해서 보이는 것 때문에 노예가 된단 말입니다. 불교는 심심미묘한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눈이 안 보이는 세계,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긍정하지 않으면 불교가 못 됩니다. 어려우셔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올곧은 정견을 가져야 그래야 부처님한테서 오는 공덕功德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아까 제가 법회 시작하기 전에도 여러분들이 아프고 집안도 잘 안된다고 저한테 호소를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고생이라고 느끼는 것은 사실은 허무한 것입니다.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자취가 없는 것을 우리가 자취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 범부들은 없는 것은 있다고 생각하고 참말로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도리를 그 영가永嘉 현각玄覺스님이 『증도가證道歌』에 여실하게 표현했단 말입니다.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天’이라, 우리 인간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가 내가 있다고 생각한 이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꿈입니다. 고유한 내 아내, 내 남편, 내 아들, 내 소유인 내 재산,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꿈속의 잠꼬대나 똑 같습니다.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현각스님도 ‘몽리夢裏’, ‘꿈 몽’자, ‘속 리’자, 꿈속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명명육취明明六趣’라, 명백히 지옥이고, 아귀고, 축생이고, 인간이고, 아수라고, 천상이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지요. 분명히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축생도 있고 또는 천상은 안 보이지만 조금 맑아져서 천안통天眼通을 하면 천상도 보인단 말입니다.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天’이라, 깨달은 뒤에 정말로 우주의 실상實相을 보는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무대천無大天’이라, 내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네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하늘에 있는 천체나 달이나 별이나 태양이란 것도 사실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오온五蘊이 화합되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변하고 있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도 세포가 화합되어 변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그 변동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그렇게 아셔서 정견正見을 가지셔야 불교를 비로소 바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정견을 가지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생고를 떠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의 해탈解脫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냥 재산 좀더 많이 모이고 또는 내 몸이 더 건강한 그런 정도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또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가 온전히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어지간한 병 같은 것은 사실은 다 물러가고 마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가 그와 같이 산을 움직일 수가 있다고 정말로 100%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스스로도 신통을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몸이 하늘로 솟아오른다고 꼭 믿고 산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위시해서 위대한 도인들이 신통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신통은 외도外道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성공덕佛性功德을 본래로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도 훤히 보이고 미래도 훤히 보고 자기 몸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런 무한신통을 온전히 구족원만具足圓滿이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성은 존엄스럽고 위대한 것입니다.

 

그 하찮은 것 때문에 우리 생명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영생으로 비약 할 수 있는 것인데 있지도 않은 것 때문에 우리가 낭비를 많이 합니다.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무아無我의 도리인데 감투인들 어디에 있습니까. 간디 같은 그러한 대 철인, 양심의 표본 같은 그런 분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에 예수를 닮지 않은 크리스천이 좋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한국이나 일본이나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을 닮지 않은 우리 불교인들이 좋게 안 보이겠지요. 바로 살기가 참 쉬운 것입니다. 기차가 레일을 떠나서 비켜서면 전복되고 말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우주의 도리를 못 따라 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불행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우리나라가 위기상황을 겪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지어서 우리가 받습니다. 남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남을 지나치게 미워하고 이런 것도 모두 다 허망한 것입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나도 해치고 남도 해치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고기 먹지 마십시오. 저번에 어디 가서 보니까 생명나누기 운동을 하는 분들도 역시 고기를 먹고 있었습니다. 생명나누기 운동을 하면서도 고기를 먹는단 말입니다. 얼마나 모순이 되겠습니까. 생명나누기 운동, 그냥 ‘산 생명만 조금 보살핀다.’ 그런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또 ‘사람한테 우리가 장기를 보시한다.’ 그것만이 아니란 말입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다 똑같은 생명입니다. 근본은 다 부처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과거 전생에는 개나 소나 돼지나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르는 개가 과거 전생 어느 때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고기를 우리가 먹는단 말입니다. 죽이기는 남이 죽이고 먹기는 자기가 먹고 얼마나 용렬한 짓입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그런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을 온전히 바치고도 조금도 회한이 없는 그런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의 과거 전생담을 보면 부처님께서 살타 왕자 때 새끼를 아홉이나 낳고 주려서 죽게 된 범한테 조금도 아낌없이 자기 몸을 바쳤단 말입니다. 그 덕에 살타 왕자는 12겁이나, 무려 한 겁도 무량세월인데 12겁이나 빨리 성불成佛했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우리의 몸뚱이를 부처님 법을 위해서 몽땅 바친다고 생각할 때는 그와 같이 몇 겁을 빨리 성불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뚱이 아낀다고 그래서 더 건강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고기를 먹어서 절대로 살로 안갑니다. 피로 안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려서 돼지 죽이는 것을 여러 번 봤습니다. 돼지를 죽일 때 동네가 떠나가도록 까지 아주 원망스러운 소리를 냅니다. 거기에 진심瞋心이나 원망이 얼마나 사무치겠습니까. 그 고기에는 그 원망과 진심이 가득 차 있습니다. 돼지는 사람보다 훨씬 더 진화가 더딘 것입니다. 그런 고기가 보다 더 진화된 우리 세포에 들어온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세포가 좋겠습니까. 고기 먹고 싶은 하찮은 버릇은 버리셔야 됩니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의 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주의 궤도에 따라야 합니다. 우주의 도리를 안 따르는 그때는 우주의 궤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때는 전복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영가들이시여! 부처님 법은 영생의 행복을 보장하는 그러한 법입니다. 영가들이 지금 계시는 중음계中陰界는 괴로운 세계입니다. 구해도 구하지 못하고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세계입니다. 또는 고통이 한도 끝도 없는 무간지옥無間地獄의 고통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부처님 말씀을 깊이 새기십시오. 영가들의 본래 생명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 부처님자리를 굳건히 믿고서 조금도 의심 없이 믿어야 신앙이 됩니다. 의심 없이 믿는다고 생각할 때에는 부처님 공덕功德이 온전히 자기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바른 견해를 가지고서 바른 행동을 취하고서 꼭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바랍니다. 극락세계는 영생해탈의 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광명의 세계입니다. 행복만이 있는 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우리가 떠나온 고향입니다. 우리 중생은 실향민입니다.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계율戒律은 우리 인간이 성불하기 쉬운 하나의 법도입니다. 그 계율을 떠나면 되겠습니까? 자기가 자기의 행복을 훼손시키면 되겠습니까? 부처님 말씀, 선지식들 말씀을 신수봉행해서 꼭 금생에 본래 가지고 있는 부처의 도리, 누구한테 꿀 것도 없는 부처님 가르침을 깨달아서 영생의 행복을 누리시길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나무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