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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부처님. 그 분(2)

신사빠 숲에서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얼마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가는 녹야원에서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신사빠 숲의 말씀에서 다시 확인된다.


한 때 세존께서는 꼬삼비(알라하바드 근처)의 신사빠 나무숲에서 머무셨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신사빠 나뭇잎들을 손에 들고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에 있는 신사빠 잎사귀와 저 숲에 있는 잎들 중, 어느 쪽이 더 많은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손에 드신 잎사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저편 숲에 있는 잎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렇다. 비구들이여, 내가 완전히 깨닫고서도 너희들에게 설하지 않은 것은 많다. 내가 너희들에게 설한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비구들이여! 왜 내가 그 모두를 설하지 않는가? 그것들은 유익하지도 않고 청정한 삶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싫은 마음을 일으킴[厭離 nibbidā], 탐욕을 멀리 함[離慾], 멸진[滅盡], 적정[寂靜], 완전한 지적능력[神通智 abhiññā), 완전한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어 주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내가 그것들을 설하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내가 설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괴로움이다. - 이것을 나는 설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 이것을 나는 설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멸진이다. - 이것을 나는 설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 - 이것을     나는 설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왜 이러한 진리를 설하는가?


이 진리들은 실로 유익하고 청정한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들은 싫은 마음을 일으킴, 탐욕을 멀리 함, 멸진, 적정, 완전한 지적능력, 완전한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어 준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내가 이 진리들을 설하는 이유이다. 비구들이여! 따라서, 이것이 괴로움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멸진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멸진에 이르는 길임을 깨닫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느니라.”32)


부처님은 역설하신다.


“나는 오직 한 가지를 알려 줄 따름이니 괴로움과 괴로움의 멸진이노라.(dukkhamceva paññāpemi, dukkhas- sa ca nirodham)”33)


이렇듯 명쾌하게 일러주신 말씀을 올바로만 이해한다면 불교를 다 이해한 셈이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이 한 가지 원리의 적용일 뿐 다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부처님이든 발견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이 사성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사성제야말로 어떤 시대의 부처님일지라도 한결같이 가르치실 전형적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명의(名醫) 중의 명의


우리는 부처님을 또한 가장 뛰어난 명의(名醫), 최고의 의왕(醫王)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분은 실로 필적할 이 없는 치유자이시다.


무엇보다도 부처님이 네 가지 진리를 설하시는 방법부터가 의사가 취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의사로써 그 분은 먼저 병을 진단하고, 그 병의 원인과 발생 과정을 찾아낸 다음 병의 제거 방법을 검토한 후 처방을 내렸다.


고(苦 dukkha)는 병이다[苦]. 갈애가 병의 발생원인 또는 근본 원인이다[集]. 갈애를 없앰으로써 병이 제거된다. 그것이 치유이다[滅]. 여덟 가지 성스런 길은 그 처방이다[道].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께 ‘스승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부처님이라고 불리십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 부처님이 해주신 대답은 명확했다. 바로 네 가지 진리에 대해 완전한 지혜를 갖췄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대답은 이러하다.


“나는 알아야 할 바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노라.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이노라.”34)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은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을 선포하시어, 법륜이 구르기 시작하였고, 또 다섯 고행자가 귀의한 곳이기 때문에 교법[法]과 승단[僧]의 탄생지가 되었다.35)


법의 전파


그 해 부처님은 우기(雨期)36)를 녹야원에서 보내셨다. 이 석달 동안 부유한 집안 출신의 젊은이인 야사를 필두로 새로이 50여명의 젊은이들이 승단에 들어왔다. 이제 부처님은 60여명의 제자를 거느리게 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아라한으로서 법을 깨닫고 충분히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분들이었다. 우기가 끝나자, 부처님은 이들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인간계와 천상계의 모든 결박에서 해방되었도다. 그대들도 역시 인간계와 천상계의 모든 결박으로부터 벗어났도다. 비구들이여! 이제 나아가 많은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이 세상에 대한 자비심에서,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과 안녕, 행복을 위해 두루 다니라.


두 사람이 한 방향으로 같이 가지 말라. 그래서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한 이 법을, 의미와 표현을 구족하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이 법을 선포하라. 청정한 삶을, 완전하고 순결한 이 성스런 삶을 선포하라. 세상에는 눈이 과히 흐리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법을 듣지 못하면 그런 사람들마저 바른 길에 들 기회를 놓치게 되고 말 것이다. 세상에는 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우루웰라로, 세나니가마로 가서 법을 가르치겠노라.”37)


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입멸하시는 날까지 계속하게 되는 성스런 전법활동을 시작하셨다. 제자들과 더불어 부처님께서는 인도의 크고 작은 길을 두루 편력하시며 무한한 자비와 지혜의 광명으로 그 모든 길을 가득히 채우셨다. 처음 승단은 겨우 60여명으로 시작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수천으로 늘어났다. 비구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많은 사원이 지어지게 되었고, 마침내는 날란다, 위끄라마실라, 자갓달라, 위끄라마뿌리, 그리고 오단따뿌리 등과 같은 인도의 사원대학들이 나타나 일대 문화 중심지를 형성, 그 영향력은 전 아시아 대륙에 미쳤고 나아가 전 인류의 정신생활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45년 간 성공적으로 교화사업을 펴신 후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유훈(이 책의 106쪽 참조)을 남기신 다음 꾸시나라38)의 말라 족들의 살라나무 숲39)에서 80세를 일기(一期)로 입적하셨다.


부처님의 교화사업



45년이라는 긴 교화기간 동안, 부처님은 인도의 북부지방을 널리 편력하셨다. 그러나 우기(雨期)의 안거철에는 대개 한 곳에 머무셨다.

다음은 부처님이 안거하신 지역들을 경전에서 간추린 것이다.


첫해 : 바라나시(베나레스) - 7월 보름에 처음으로 법을 선포하신 후 부처님은 첫 우기를 이시빠따나에서 보내심.


2, 3, 4년째 : 라자가하[王舍城]의 웰루와나[竹林精舍] - 유명한 재가 후원자 수다따 장자가 부처님께 귀의한 것은 이 3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그는 자선가로 유명해 아나타삔디까 즉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돌봐 주는 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꼬살라국의 사와티[舍衛城] 사람인 그는 마가다국의 라자가하에 왔다가 부처님이 출현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 친견하고 법문을 들었다. 삼보에 깊은 신심을 발하게 된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예류과40)를 성취했다. 그 후 그는 부처님의 주요 후원자로 유명해졌다. 오늘날 사헤트-마헤트로 불리는 사와티에 그 유명한 제따와나 사원[祇園精舍]41)를 지어 부처님과 그 제자들에게 바쳤다. 이 사원의 유적지는 지금도 볼 수 있다.


5년째 : 웨살리 - 부처님은 중각강당(重閣講堂)에서 지내셨다. 숫도다나 왕이 이 해에 병이 들었다. 부처님은 부왕(父王)을 찾아가 법을 설해 드렸다. 법문을 들은 왕은 완전한 청정(아라한과)을 얻게 되었고, 일주일 동안 해탈의 즐거움을 누린 후 입적했다. 비구니 승단이 생긴 것도 이 해였다.(이 책의 비구니 승단 장(章), 79쪽을 참조.)


6년째 : 만꿀라 언덕 - 여기에서 부처님은 쌍신변(雙身變)42)을 나투셨다. 친족인 석가족의 아만심을 꺾기 위해서 까삘라와투에서 이러한 신통을 처음으로 보여주신 적이 있다.


7년째 : 삼십삼천 - 이 해에 부처님은 삼십삼천에 올라가 마야 부인을 필두로 한 천신들에게 수승한 법인 아비담마를 설하셨다. 마야 부인은 싯닷타 왕자를 낳고 이레만에 죽어서 삼십삼천에 남자천신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43)


8년째 : 베사깔라 숲 - 부처님이 여기 계실 때 금슬 좋은 나꿀루삐따 부부가 부처님을 친견하고 그들의 행복한 결혼생활이 다음 생에도 이어지기를 발원했다. 부처님은 이 두 사람을 제자들 중 가장 의좋은 사이로 인정하셨다.


9년째 : 꼬삼비의 고시따 정사


10년째 : 빠아릴레이야까 숲 - 꼬삼비에서 한 비구가 저지른 사소한 잘못을 놓고 비구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 바로 이 해의 일이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훈계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였으므로 부처님께서는 이 숲으로 물러나셨다. 안거가 끝날 무렵 분쟁은 해결되어 비구들은 사와티 성으로 와서 부처님께 용서를 빌었다.


11년째 : 에까날라 마을(마가다 국) - 『숫따니빠따』에 나오는 유명한 「밭을 가는 바라드와자 경」을 설하신 곳이 바로 여기다. 농사짓는 바라문 바라드와자가 부처님께 무례하게 말을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특유의 침착성으로 이를 응대하여 결국 그 바라문을 열렬한 신도로 만드셨다.


12년째 : 웨란자 마을 - 부처님께서 율(律)을 제정하기 시작하신 것이 이 해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유명한 웨란자의 사건이 생긴 것도 이 안거기간 중이었다. 그는 부처님을 친견하고 불교 수행에 관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한 다음 부처님의 대답에 만족하여 불자가 되었다. 그는 부처님과 승단이 그 해 안거를 웨란자 마을에서 보내도록 청했다. 마침 그 해에 기근이 들었다. 부처님과 제자들은 말장수들이 올리는 매우 조악한 음식(말들이 먹는 보리)으로 그 철을 지내야 했다. 비록 브라만이 약속은 저버렸으나 부처님은 당신이 늘 행하시는 관례대로 안거를 마치고 행각을 떠나기 앞서 초청자에게 하직인사를 했다. 바라문 웨란자는 자신이 부처님과 제자를 청해 놓고도 가사에 골몰한 나머지 한철 내내 초청자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허물을 사과한 후 다음날 부처님과 승단에 음식과 옷을 보시했다.


13년째 : 짤리야 바위산(짤리까 시 부근) - 이 철에는 메기야 장로가 부처님의 시봉을 들었다. 장로는 강가의 아름다운 망고 숲에 마음이 끌려 그곳에 가서 선정을 닦고 싶다고 부처님께 허락을 구했다. 다른 비구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부처님이 만류하셨건만 그는 거듭 졸랐다. 마침내 부처님의 허락을 받고 그곳에 갔지만 장로는 뜻밖에도 선정은커녕 감각적 쾌락, 악의, 해악심 따위에 시달리기만 하다가 실망해서 돌아왔다. 그러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메기야여! 성숙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이 성숙하는 데는 다음의 다섯 가지가 도움이 된다. 첫째 좋은 벗(선지식), 둘째 기본적 계율에 따른 덕 있는 행위, 셋째 탐욕을 멀리함, 고요․멸진․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끌어 주는 훌륭한 조언, 넷째 나쁜 생각들을 버리고 건전한 생각들을 지니려는 노력, 다섯째 사물의 발생과 소멸을 분명히 보는 지혜의 획득이 바로 그것이다.”44)(이 예비 수행은 보다 높은 단계의 선정을 익히기 위해 반드시 닦아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14년째 : 사와티의 제따와나 정사 - 이 철에, 이제껏 사미였던 라훌라 존자가 구족계(비구계)를 받았다. 율장에 따르면 구족계는 20세가 되어야만 받을 수 있는데 라훌라 존자가 그 나이가 된 것이다.


15년째 : 까삘라와투 - 싯닷타 왕자의 탄생지. 이 해에 야소다라 비의 아버지 수빠붓다 왕이 죽었다.


16년째 : 알라위 시(市)-이 해에 부처님은 사람 잡아먹기를 즐기는 야차 알라와까를 제도하여 추종자로 만드셨다. 알라와까와의 문답은 『숫따니빠따������의 「알라와까 경」에 자세히 나온다.


17년째 : 라자가하의 웰루와나 정사 - 이 철에 유명한 고급 창녀이며, 의사 지와까의 누이동생인 시리마가 죽었다. 장례식에 참석하신 부처님은 왕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그 시체를 사갈 사람을 찾는 공고를 내어 보라’고 하셨다. 살아있을 때 그토록 사람들을 매혹시키던 그 몸뚱이. 그러나 누구 하나, 돈은커녕 거저 주어도 그 시신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이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대중들을 향해 읊으셨다.


“보라, 이 분칠 한 모습을

상처 투성이의 (뼈마디로) 엮어 이루어진

병든, 뭇사람들의 관심의 적이던

이 몸을, 거기 어디에 항상함이 있고

견고함이 있는가.”45)


18년째 : 짤리야 바위산 - 이 철에 한 직조공의 어린 딸이 부처님을 친견하고, 죽음을 염(念)하는 공부법46)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 가르침을 잊지 않고 부지런히 닦았던 소녀는 다음에 다시 친견했을 때 부처님이 던지신 네 가지 질문에 정확히 대답했다. 소녀의 대답은 매우 철학적이어서 부처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부처님은 소녀를 칭찬하면서 대중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이 세상은 눈멀었도다. 분명히 보는 자 적도다.

겨우 몇몇 사람만이 좋은 세계(천상계)로 가는구나.

그물을 벗어난 새처럼.”47)

소녀는 법을 듣고 성위(聖位)의 첫단계(예류과)를 성취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녀는 요절하고 만다.48)


19년째 : 짤리야 바위산


20년째 : 라자가하 - 웰루와나 정사


21년부터 43년까지 : 사와티에서


이 스물네 번의 안거 중 열여덟 안거는 기원정사에서, 나머지 안거는 동원정사(東園精舍, 鹿子母講堂)에서 지내셨다. 이 기간 동안은 아나타삔디까와 위사카49)가 주된 시주였다.


44년째 : 벨루와 마을(웨살리 근처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추정됨) - 이곳에서 부처님은 크게 앓으셨으나 의지력으로 이겨내셨다.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의 98쪽 참조.)


성도 후 45년째, 부처님은 우기가 시작되기 전인 5월에 꾸시나라(혹은 꾸시나가라)에서 반 열반에 드셨다.


정각을 이루신 후 처음 20년 간은 다음의 스님들이 수시로 스승을 시봉했다. 비구 나가사말라, 나기따, 우빠와나, 수낙카따, 사가따, 라다 그리고 메기야와 사미 쭌다였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후 부처님께서는 일정한 시자를 정하기를 원하셨다. 그러자 사리뿌따, 마하 목갈라나 등 80여 명의 대 아라한들이 기꺼이 모두 스승을 시봉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부처님께서는 이들 아라한들이 당신을 시봉하기보다는 인류에게 직접 보다 큰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음에 틀림없다.


그러자 장로들은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던 아난다 장로에게 시자로 받아주실 것을 청해 보라고 권유했다. 아난다 장로의 대답이 흥미롭다.


“스승님께서 나를 시자로 삼기를 원하신다면 직접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다른 사람들의 권유를 기다리지 말라. 너 혼자서 나를 시봉하도록 하여라.”


  부처님의 깨달음과 아라한의 깨달음


완전한 깨달음, 즉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발견과 실현은 결코 신의 섭리에 의해 선택된 어떤 특정인의 특권도 아니고, 인류사에 되풀이될 수 없는 일회성의 일도 아니다. 완벽한 청정과 지혜를 구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또 성불의 필수요건인 십바라밀50)과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불퇴전의 의지로 닦아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아득한 먼 옛날에도 여러 부처님들이 계셨고, 또 미래에도 필요성이 있고 조건이 성숙되면 부처님들이 나타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먼 미래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지금 우리들의 이 시대에도 ‘불사(不死)에의 문’은 여전히 활짝 열려 있다. 그 문에 들어서기만 하면 누구나 완전한 청정(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해서 괴로움으로부터의 궁극적인 해탈(즉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번뇌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얻었다는 점에서 이 사람들은 당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장엄하게 선언하셨다.


“번뇌의 소멸을 얻는 사람들,

그들은 실로 나와 같은 승리자들이로다.”51)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또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붓다와 여느 아라한52)들과의 차이점도 분명히 밝히셨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아라한이면서 대각자이노라. 여래는 일찍이 알려진 적이 없는 길을 선포한 사람이도다. 실로 그는 길을 아는 사람이고, 길을 이해하는 사람이고, 길에 숙달한 사람이도다. 이에 반해 여래의 제자들은 여래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는 사람들이노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 차이로다. 아라한이면서 대각을 성취한 여래와 통찰에 의해 자유를 얻은 제자들과의 차이점이노라.”53)


  정법의 특징


비밀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 그릇된 교의임을 드러내는 표시라고 말씀하시면서 부처님은 비밀교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부처님께서는 아난다 장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나는 법을 가르침에 있어 드러난 교리와 비밀스런 교리를 각각 따로 세우지 않았다. 아난다여! 여래는 드러난 교의와 비밀스런 교의를 구별짓지 않고 법을 설해왔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아난다여, 여래에게는 주요한 지식을 제자들에게 감추는 ‘주먹 쥔 손’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54)


이 우주를 다 감싸는 무한대의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가지신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윤회라는 끝없는 헤맴의 족쇄에서 풀려나는 데 필요한 지식이라면 그 무엇 하나 감추는 일 없이 모든 것을 설해 주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눈 있어 볼 수 있고 마음 있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열려 있다. 또 불교는 어떤 사람에게도 총검이나 대포를 들이대고 믿음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강요에 의한 개종은 불교도들 사이에서는 알려진 적도 없으며,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모순된다.


필딩 홀(H. Fielding Hall)은 그의 저서 『어느 한 무리의 넋������에서 부처님의 자비정신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불교전쟁이란 있을 수 없다. 일찍이 그 어느 나라도 불교도들이 무력으로 약탈한 적은 없으며, 붓다의 이름으로 단란한 가정을 피로 물들인 적도 없으며, 한에 사무친 여인네들이 붓다의 이름을 입에 올려 저주한 적도 없었다. 이렇듯 붓다와 그 분의 가르침은 피의 얼룩으로 더렵혀진 적이 없다. 붓다야말로 사랑으로 이루어진 평화, 베풂으로 이루어진 평화, 연민으로 이루어진 위대한 평화를 가르치신 분이며,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그것을 잘못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기독교 성직자 조셉 웨인(Joseph Wain)은 평한다. ‘불교는 통제가 아니라 원칙에 의한 생활, 우아한 생활을 가르치며, 그 당연한 귀결로 불교는 관용의 종교다. 태양 아래 가장 자비로운 종교체제가 불교이다. 교법의 전파과정 그 어디에서도 피를 본 적이 없는 종교이다. 신앙이 다르다고 해서 남을 박해하거나 함부로 대한 적이 없었다. 이는 기독교가 아직까지도 배워야만 할 교훈이다. 붓다는 사람들에게 오늘을 아름답게 만들고 현 순간을 성화(聖化)시키도록 가르쳤다.’


제자들에게 법을 전하는 데 있어서도 부처님은 조금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특별히 선택된 애제자란 없었다. 제자들 가운데서 아라한과를 성취했던 제자들은 모두 청정을 완성하여 애욕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존재에로 옭아매는 족쇄들을 풀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는 각각 특수한 지식과 수행에 뛰어나고 또 타고난 성품에도 차이가 있어 남다른 위치를 차지하게 된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스승은 그들이라 하여 특별한 총애를 주지는 않았다. 예컨대 우빨리는 낮은 카스트의 이발사 집안 출신이었지만 바라문이나 크샤트리아 계급에 속했던 수많은 아라한들을 제치고 계율에 관해 으뜸가는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사리뿌따와 마하 목갈라나는 바라문 계급 출신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장구한 전생동안 세워온 원력 때문에 부처님의 상수(上首)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사리뿌따는 지혜에 뛰어나고, 마하 목갈라나는 신통에 뛰어났다.


부처님은 제자들이 당신이나, 당신의 가르침에 맹목적이고 굴종적인 믿음을 바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 분은 항상 지성적 탐구와 면밀한 고찰을 강조하셨다. 자유사상의 최초의 헌장이라고 일컬어 마땅할 어느 경전에서, 부처님은 깔라마인들의 질문에 답하는 가운데, 단호하게 비판적 탐구자세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계시다.


“그렇소, 깔라마인들이여! 그대들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대들은 세평이나 구전(口傳), 풍문에 이끌려서도 안 되며, 또 종교의 경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아니면 단순히 논리나 유추만으로, 또는 외양만을 취하여 또는 어떤 이론에 미루어 볼 때 타당하다고 해서, 또는 그럴싸한 가능성 때문에, 또는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 하는 생각 때문에 끌려가서는 아니 됩니다. 깔라마인들이여! 당신들 스스로 생각해서 이런 것들은 건전하지 못하고, 이런 것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며 이롭지도 못하다고 알았을 때, 그때는 당연히 그러한 것들을 거부하도록 하시오. (……)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서 ‘이런 것들은 건전하고, 나무랄 데 없고 이롭다’고 알았을 때는 그것을 받아들여 거기에 머물도록 하시오.”


그런 연후 부처님은 물으셨다.


“자, 깔라마인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여기 어떤 사람에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일어났다고 칩시다. 이런 것들은 그 사람에게 이득이 되겠소, 손실이 되겠소. 탓할 일이겠소, 탓하지 않아야 할 일이겠소?”

“존사(尊師)시여! 그런 것들은 그에게 손실이 되며, 그런 것들은 탓할 일입니다.”


“자, 깔라마인들이여!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어떤 사람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칩시다. 이것은 그에게 이득이겠소, 손실이겠소, 탓할 일이겠소, 아니겠소?”

“존사시여! 그에게 이로움이 되고 탓할 점이 없습니다.”

“그렇소, 깔라마인들이여! 방금 내가 그대들에게, ‘그대들은 세평이나 구전, 풍문에 이끌려서도 안 되며, (……) 건전하고, 나무랄 데 없고, 이롭다고 알았을 때는 받아들여 거기에 머물도록 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말하려 함이오.”55)


순전히 믿음 때문에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불교의 정신과 어긋난다. 그래서 부처님과 제자들 간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자연스레 이루어지고 있다.


“(나의 가르침을) 알고 이를 따르면서 그대들이 ‘우리는 스승을 기리고 존경하기 때문에 스승의 가르침을 받든다’고 말할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고 스스로 찾아낸 사실만을 말하는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56)


부처님은 항상 사실을 직시하였으며 진리와 부합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인정하거나 양보하지 않으셨다. 또 그 분은 우리 역시 어떤 것을 정당한 이유 없이 무분별하게 진실로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분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여실히 이해하는 것, 그리고 필요한 노력을 기울여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해탈을 스스로 이룩해 내는 것이다.


“그대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래는 다만 길을 일러줄 따름이다.”57)


“그대 스스로가 자신의 섬이 되라, 그대 스스로가 자신의 피난처가 되라. 남을 피난처로 의지하지 마라. 법을 섬으로 삼고, 굳건히 붙들어라. 법을 피난처로 삼고, 굳건히 붙들어라. 그 밖에 다른 어떤 피난처에도 의지하려 들지 말라.”58) 이렇게 말씀하시는 부처님이야말로, 사상 최초로 인류에게 해탈은 스스로 찾아야지 그 어떤 구원자에게, 그것이 인간이든 또는 신이든 간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분이시다.


남이 우리를 낮은 단계의 삶에서 높은 단계로 끌어올려 주고 또, 궁극적으로 해방시켜 준다는 관념은 우리를 게으르고 나약하며, 무기력하고, 어리석게 만들기 쉽다. 이런 종류의 신앙은 품위를 떨어뜨리고, 도덕적 존재로서 인간이 발할 수 있는 위엄을 여지없이 짓눌러 버린다.


깨달으신 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립심을 기르도록 권하셨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간접적인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고(苦)로부터의 해방은 각자가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갈고 닦음으로써 나름대로 이루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참된 청정



불교사상에 있어서는 신앙심이나 외경심 같은 것은 사물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법의 진리성은 오로지 통찰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을 뿐이며, 그 어떤 존재 - 그 정체를 우리가 알건 모르건 간에 - 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이나 외경심을 갖는다고 해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부처님은 맹목적으로 전지전능한 신을 믿거나 외경하는 것을 진리를 이해하는 접근방식으로서 찬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소득없는 의례․의식에 집착하는 것도 반대하셨다. 단식이라든가, 성수에 목욕한다든가, 동물을 희생으로 바친다든가, 그 밖에 이와 유사한 행위들은 겉으로 씻어내는 행위에 불과할 뿐, 참다운 의미에서 인간을 정화시키거나 성스럽고 고귀하게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바라문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은 적이 있다. 그때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해탈을 구하려면 어떻게 스스로를 닦아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신 후, 이에 덧붙여 마음의 때가 사라지고, 청정한 삶을 완성하고, 할 일을 해 마친 사람은 안으로 목욕하는 사람이라 부를 수 있다고 하셨다.


마침 부처님 가까이에 앉아 있던 바라드와자가 이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고따마께서는 바후까 강에 목욕하러 가십니까?”

“브라만이여! 바후까 강에는 어떤 공덕이 있는가?”

“고따마시여! 바후까 강은 많은 사람들이 신성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악업을 바후까 강에서 씻어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강에서 목욕한다고 해서 마음의 때나 죄가 씻어질 수는 없다는 점을 납득시킨 다음 이렇게 가르치셨다.


“브라만이여! 이 법과 계율에서 목욕하면 어떤 존재든 안락함을 얻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는다면, 또 그대가 확신에 차있고 옹졸하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가야 강59)에 가야 한단 말인가. 그대 집에 있는 우물물 또한 가야의 물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60)


『법구경』 165 게송은 가르쳐 준다.


  “악을 행하는 것도 자신이요,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도 자신이며,

악을 범하지 않는 것도 자신이요,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것도 자신이다.

청정과 더러움이 오로지 자신에게 달렸다.

아무도 남을 청정하게 해줄 수는 없다.”


카스트 문제


카스트61) 체제는 당시 인도의 바라문 계급들에게는 사활이 달린 중대 관심사였으나 부처님은 이 제도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라 하여 철저히 반대 입장을 취하셨다. 따라서 이 제도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셨다. 승단에서는 모든 카스트가 화합하여 하나가 되었으니 이는 마치 여러 강물이 바다에 들면 하나가 되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출가 전의 이름도, 카스트도, 종족도, 모두 버리고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따름이니 그것이 승가(saṅgha)다.


부처님의 혈통을 묻는 바라문 순다리까 바라드와자에게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나는 바라문도, 왕자도,

농부도 그 밖에 무엇도 아니오.

세상의 모든 계층을 다 안다오.

그러나 알기에 나는 내 길을

자아를 멸한 사람으로서 가고 있다오.

집 없이, 누더기 걸친 채

머리를 깎고, 나는

홀로 내 길을 걷소, 조용히.

나의 출신을 묻는 것은 부질없을 뿐.”62)


또 한 번은 카스트를 믿고 건방을 떠는 한 바라문이 “서라, 이 까까중아. 멈춰라. 이 천민(노예 계급에도 들지 못하는 이)아!” 하고 부처님을 모욕한 일이 있었다.


스승께서는 조금도 언짢은 기색 없이 점잖게 대답하셨다.


“출신 때문에 천민이 되는 것이 아니오.

출신 때문에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오.

행위가 사람을 천민으로도 만들고,

행위가 사람을 바라문으로도 만드는 것이오.”63)


그러고서는 정말 천민의 특징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마침내 오만하던 바라문은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뉘우치어 부처님께 귀의했다.


부처님께서는 승단의 고귀한 삶을 실천하기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그 사람의 카스트와 계급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문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셨다. 그래서 미천한 계급의 출신으로 후에 승단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부처님은 그때껏 카스트와 계급으로 사분오열 되어있던 사람들을 관용과 화합으로 서로 함께 어울리도록 노력하신 당대 유일한 스승이셨다.


승단의 계율에 관한 한 최고 권위자였던 우빨리는 원래 이발사였는데, 이 직업은 비천한 계급의 사람이 종사하는 가장 천한 직업의 하나였다. 후에 아라한이 된 수니따도 천한 직업인 청소부 출신이었고, 비구니 승단의 뿐나와 뿐니까는 노예출신이었다. 리스 데이비즈 부인에 의하면 공부를 이뤄 깨달음을 성취한 비구니의 8.5퍼센트가 글도 배우지 못한, 천대받던 카스트 출신이었다고 한다.64)


수제자들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는 부처님께서 대각을 이루신 후 맨 먼저 찾으셨던 지역 중의 하나이다. 출가 초기 수행시절에 부처님은 세니야 빔비사라 왕에게 대각을 성취하면 꼭 라자가하 성을 찾겠노라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을 뵙게 되자 크게 기뻐하여, 그 자리에서 가르침을 받은 다음 바로 재가신도가 되었다. 부처님을 열렬히 신봉하게 된 왕은 며칠 후에는 자신의 유희공원으로 쓰던 웰루와나 동산을 부처님께 바쳐 머무시도록 했다.


당시 라자가하는 새로운 사조의 중심지로서 많은 철학유파가 번성하고 있었다. 그 중에 산자야라는 사상가가 이끄는 학파가 있어 250명의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우빠띠사와 꼴리따는 뒤에 부처님께 귀의하여 두 상수제자가 되었으니 사리뿌따와 마하 목갈라나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부처님을 만난 인연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라자가하의 거리를 거닐고 있던 우빠띠사는 한 사문의 엄숙한 용모와 고요하고도 위엄있는 거동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과거 수많은 생을 통해 완성을 성취하고자 노력해 온 우빠띠사의 끊임없는 노력이 이제 바야흐로 결실을 맺을 순간에 이르렀음인지 이 날 따라 그 사문의 모습은 우빠띠사의 마음을 유달리 사로잡았다. 이 사문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최초의 다섯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아싸지였다. 우빠띠사는 이 고상한 사문이 누구의 제자이며 어떤 가르침을 받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아라한이 탁발을 마칠 때까지 계속 따라갔다.


“벗이여, 당신의 모습은 우아하고, 당신의 눈빛은 맑게 빛납니다. 누가 당신을 출가하도록 설득했습니까? 당신의 스승은 누구시며, 어떤 법(가르침)을 따르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아싸지 존자는 많은 말을 하기 꺼리는 듯 겸손하게 말했다.


“나는 교의와 계율을 길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그 대의만 간략히 말해 줄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우빠띠사의 대답이 주목할 만하다.


“좋습니다. 벗이여, 적든 많든 좋으실 대로 말해 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도 그 대의입니다. 장황한 말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러자 아라한은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포용하는 연기법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게송을 한 수 읊었다.


“원인에서 발생하는 그 모든 것,

그에 관해 여래께서 그 원인을 밝혀주셨네.

또 그것의 멸에 대해서도 설명하셨나니,

이것이 대 사문의 가르침이라네.”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m hetuṁ tathāgato āha

  Tesam ca yo nirodho

  Evam vādi mahā samano.’


우빠띠사는 이 게송을 듣자 바로 그 뜻을 이해했다.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는 것(yamkiñci samudaya dhammam sabbam tam nirodha dhammam)’임을 그 자리에서 깨닫고 깨침의 첫단계(예류과)를 성취했다.


  기쁨으로 가슴이 벅찬 그는, 서둘러 친구 꼴리따에게 달려가 아라한을 만난 사실과 가르침 받은 내용을 얘기해 주었다. 꼴리따 역시 친구가 전해 주는 게송을 듣고서 곧바로 깨침의 첫 단계를 얻었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스승 산자야에게 나아가 부처님을 따르자고 권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로서의 명망을 잃게 될까 두려워한 산자야는 제자들의 권유를 거절했다. 할 수 없이 꼴리따와 우빠띠사는 산자야의 강력한 만류를 무릅쓰고 그를 떠나 웰루와나 정사로 갔다. 부처님에게 귀의할 뜻을 사뢰자 부처님은 그들을 기꺼이 맞아들이며 말씀하셨다.


“오라. 비구들이여! 법은 잘 설해져 있도다. 고귀한 삶을 통해 고를 완전히 없애버리도록 하라.”


그리고 그들을 승단에 받아들이셨다. 그들은 해탈을 성취한 후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승단을 이끄는 두 상수제자(上首弟子)가 되었다.


부처님이 웰루와나 정사에 머무실 때 승단에 들어온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제자는 바라문 출신의 현자 마하 까사빠였다. 그는 구경해탈에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해 거대한 부(富)도 팽개치고 출가한 사람이었다.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시자 그로부터 3개월 후, 왕사성 근처의 칠엽굴에서 아라한들의 대회동(1차결집)을 주관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아자따사뚜 왕의 후원을 받아 경과 율을 최초로 정리, 편찬한 그 모임은 불교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구니 승단


초기에는 승단이 남자들로만 구성되었었다. 이는 부처님께서 여자들이 승단에 들어오는 것을 꺼리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재가여신도들 가운데는 세속을 벗어나 청정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신심깊은 여인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싯닷타 태자의 양모였던 고따미 빠자빠띠를 설득하여 그를 앞세우고 부처님에게 나아가 여인들의 출가 수계를 허용해 주시도록 탄원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여전히 이들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난다 존자가 나서서 부처님께 간청했다. 존자는 여인들의 열의에 감복하고 그리고 그들이 상심하는 모습에 동정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부처님께서 양보하셨으나 여인의 수계에 대해서는 8가지 제한조건을 더 첨부하셨다. 이렇게 하여 성불 후 5년째 되던 해에 비구니 승단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는 역사상 초유의 일로, 일찍이 여인들의 출가생활을 위해 단체가 만들어졌던 적은 없었다. 비구니 승단이 탄생되자 갖가지 인생행로를 걸어온 여인들이 속속 승단에 들어왔다. 비구니 승단의 지도자는 케마와 우빨라완나 두 장로니(長老尼)였다. 이들 고귀한 비구니들이 해탈을 향해 노력하는 정경과 마침내 해탈을 이루고서 읊조린 환희의 찬가들이『장로니게송집』에 생동감 넘치게 기록되어 있다.


 까삘라와투에서


라자가하에 계시던 중, 부왕께서 꼭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전갈을 받은 세존은 까삘라와투로 향하셨다. 그러나 까삘라와투에 이르자 부처님은 곧바로 궁전으로 드시질 않고, 관례대로 도시 밖의 숲에 머무셨다. 다음 날 부처님께서는 발우를 들고 까삘라와투의 거리에 나아가 이 집 저 집 다니며 여법히 탁발을 하셨다. 숫도다나 왕은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서 부처님께 달려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십니까? 왜 음식을 구걸하러 다니십니까? 우리 가문에서 일찍이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왕이시여, 대왕과 대왕의 가족들이 대대로 왕의 후예이듯이 나는 옛 부처님들의 후예입니다. 옛 부처님들은 음식을 구걸하며 언제나 탁발생활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법을 설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깨어 있으십시오. 마음을 챙겨 지니십시오. 법다이 사십시오. 법답게 사는 사람들은 이생에서도, 내생에서도 행복하게 삽니다.”


이런 부처님의 말씀을 듣자 왕은 확고하게 법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법을 이해한 것이다. 그런 연후 부처님께서는 궁전으로 향하셨다. 궁에서는 모든 사람이 부처님께 경배 드리러 나왔으나 야소다라 비만 나타나지 않았다.


부처님은 몸소 그녀에게 갔고, 부처님을 뵙자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음을 깨닫고 부처님 발아래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전생담을 들려주시며 그 전생에 그녀의 공덕이 얼마나 위대했던가를 낱낱이 자세하게 밝혀주셨다.65) 이런 이야기를 듣자 그녀도 드디어 법을 이해하고 받들게 되었다. 후에 여성승단이 만들어지자 야소다라도 출가하여 최초의 비구니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부처님이 궁전에 계실 동안 야소다라 비는 아들 라훌라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세존에게 보내면서 일렀다.


“라훌라야! 저분이 네 아버지이시다. 가서 너의 상속물을 달라고 하렴.”

라훌라 왕자는 부처님께 다가가 그 앞에 서서 말했다.

“현자시여, 당신의 그늘은 즐겁습니다.”


부처님께서 공양을 마치고 궁전을 떠나자, 라훌라 왕자는 따라가며 말씀드렸다.

“저에게 상속물을 주십시오.”

그 말을 듣자 세존은 사리뿌따에게 일렀다.

“그래, 그럼 사리뿌따여, 이 아이를 승단에 넣도록 하시오.”

그러고서는 사리뿌따에게 수계하는 방식을 자세히 일러주셨다.

“먼저 머리와 수염을 깎고, 황색 가사를 입힌다. 한쪽 어깨에 가사를 단정히 걸친 다음, 수계자는 스님들에게 예배한 후, 스님을 향하여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이 자세가 잘 안 되면 꿇어앉아도 된다.) 두 손을 올려 합장하고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법에 귀의합니다.

승단에 귀의합니다.


두 번째,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두 번째, 법에 귀의합니다.

두 번째, 승단에 귀의합니다.


세 번째,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세 번째, 법에 귀의합니다.

세 번째, 승단에 귀의합니다.66)


5부경67) 중 하나인 『중부에는 ‘라훌라에게 주는 말씀’이란 제목의 경이 세 개나 실려 있다.(61, 62, 147경) 어린 라훌라에게 법을 가르치고 있는 이 경들은 한결같이 계율과 선정을 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 「마하 라훌라와다경」68)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라훌라야! 자애[慈]69)를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자애로운 마음을 닦으면 나쁜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더불어 아파함[悲]을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더불어 아파하는 마음을 닦으면 잔인한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더불어 기뻐함[喜]을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을 닦으면 혐오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평온함[捨]을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평온한 마음을 닦으면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70) 라훌라야! (육신의) 더러움[不淨]을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더러움을 관하는 공부를 닦으면 애욕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무상의 개념[無常想 aniccasaññā]71)을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무상의 개념을 관하는 공부를 닦으면 아만(‘내가 있다’, ‘나다’라는 생각 asmi-māna)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출입식(出入息)을 염하는 공부(ānapāna sati)를 닦아라. 라훌라야! 출입식을 염하는 공부를 닦아 자주 익히면 얻는 바가 많아서 크게 이익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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