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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50년 정근

 나무아미타불 50년 정근


 고려시대 성종 1년(982년) 때의 일이다.

 신라 때에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사(聖師)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함께 포산(경북 달성군 비슬산)에 숨어 살았으니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지었고 도성은 북쪽 굴에 살았다. 서로 10리쯤 떨어졌으나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매양 서로 왕래했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자 하면 산중 나무가 모두 남쪽을 향해서 굽혀 서로 영접하는 것 같으므로 관기는 이것을 보고 도성에게로 갔다. 간기가 도성을 맞이하고자 하면, 역시 이와 같이 나무가 모두 북쪽으로 구부러지므로 도성도 관기에게로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를 지냈다.

 도성은 그가 살고 있는 뒷산 높은 바위 위에 항상 좌선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바위 사이로 몸을 빠져나오니 온몸이 허공에 날리며 떠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으니 혹 수창에 가서 죽었다는 말도 있다. 관기도 또한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 두 성사의 이름으로써 그 터를 도성암이라 명명하였는데 모두 남은 터가 있다.

 

 도성암(道成巖)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굴 아래에 절을 지었다. 고려 성종 1년(982)에 성범(成梵)스님이 처음으로 이 절에 와서 살았다.

 만일미타도량(萬日彌陀道場)을 열어 50여년을 정근했는데 여러 번 특이한 상서로운 일이 있었다. 이때 현풍(玄風)의 신도 20여 명이 해마다 결사(結社; 수행을 약속하고 모인 여러 사람의 조직)하여 향나무를 주워 절에 바쳤는데 언제나 산에 들어가 향나무를 채취해서 쪼개어 씻어서 발에 펼쳐두면 그 향나무가 밤에 촛불처럼 빛을 발하였다.

 이로부터 고을 사람들이 그 향도(香徒)들에게 보시하고 빛을 얻는 해라 하여 하례(賀禮)라 하였다. 이는 두 성사의 영감이요, 혹 산신(山神)의 도움이었다. 산신의 이름은 정성대왕(靜聖大王)으로 일찍이 가섭불 때에 부처님의 부탁을 받았으니 그 본서원에 말하기를 산중에서 일천 명의 출가를 기다려 남은 과보를 받겠다고 했다.

 이 두 성사는 오랫동안 산골에 지내며 인간세상과 사귀지 않았다. 모두 나뭇잎을 엮어 옷으로 입고 추위와 더위를 겪었으며, 습기를 막고 하체를 가릴 뿐이었다. 그래서 반사(搬師: 피나무스님), 첩사(師: 떡갈나무스님)로 호를 삼았던 것이다.

《삼국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