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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 나무아미타불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성불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성불


 신라 성덕여왕시대(709년)의 일이다.

 신라시대 구사군의 북쪽에 산봉오리가 기이하고 빼어났으며 그 산줄기가 수백 리에 뻗쳐있는 아름다운 산이 있었는데 그 산을 백월산(白月山)이라 하였다.

 이 산의 동쪽에 3천보쯤 되는 곳에 선천촌이 있고 마을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한 사람은 노힐부득이요, 또 한 사람은 달달박박이었다.

 이들은 모두 풍채와 골격이 범상치 않았고 속세를 초월한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좋은 친구였다. 나이 스무살이 되자 마을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지금의 창원)에 가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서남쪽 치산촌 법종곡 승도촌에 옛 절이 있는데 정신수양을 할만하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서 대불전(大佛田), 소불전(小佛田)의 두 마을에 각각 살았다.

 부득은 회진암에 살았고 박박은 유리광사에 살았다. 이들은 모두 처자를 데리고 와서 살면서 산업을 경영하고 서로 왕래하며 정신을 수양하고 평안히 마음을 길러 속세를 초월하고 싶은 생각을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몸과 세상의 무상(無常)함을 느껴 서로 말했다.

 

 “기름진 밭과 풍년 든 해는 참으로 좋으나 의식이 맘대로 생기고 자연히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다. 또 부인과 집이 참으로 좋으나 연화장세계에서 부처님과 앵무새나 공작새와 함께 놀면서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더구나 불도를 배우게 되면 응당 부처가 되고 참된 것을 닦으면 반드시 참된 것을 얻는 데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여 있는 것을 벗어버리고 무상(無上)의 도를 이루어야 할 것인데 어찌 이 혼탁한 속에 파묻혀 세속의 무리들과 같이 지내서야 되겠는가?”

 

 이들은 드디어 인간세상을 떠나서 장차 깊은 골짜기에 숨으려 했다. 어느 날 밤 꿈에 백호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빛 속에서 금빛 탈이 내려와서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에서 깨어 얘기를 하니 두 사람의 말이 똑같으므로 이들은 한참동안 감탄하다가, 드디어 백월산 무등곡으로 들어갔다.

 박박스님은 북쪽고개의 사자암을 차지하여 판잣집 8척방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판방(板房)이라 하고, 부득스님은 동쪽고개의 무더기 돌 아래 물이 있는 곳을 차지하고 역시 방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뇌방(磊房)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각각 암자에 살면서 부득은 미륵불을 성심껏 구했고 박박은 아미타불을 경례하고 염송하였다.

 3년이 못되어 709년 4월 8일은 성덕왕 즉위 8년이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나이 스무 살에 가깝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운 한 낭자가 난초 향기를 풍기면서 갑자기 북쪽 암자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면서 글을 지어 바쳤다.


 나그네 가는 길

해가 저물어 천산이 어둡고

길은 막혀 성은 멀고

인가도 아득하네


 오늘은 암자에서

잠을 자고 싶은데

자비스런 스님께서

노하지 마소서


 박박은 말했다.

 “절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요, 어서 다른 데로 가고 여기서 머물지 마시오.” 하고 문을 닫고 들어갔다.

 낭자는 부득스님을 찾아가서 전과 같이 청하니 부득은 말했다.

 “그대는 이 밤중에 어디서 왔는가?”

 낭자가 말했다.

 “담연하기가 태허와 같은데 어찌 오고 가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선비의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이 높고 굳다는 말을 듣고 장차 도와서 보리를 이루고자 해서일 뿐입니다.”

 그리고는 게송 하나를 주었다.


 해저문 깊은 산길에

가도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대나무와 소나무 그늘은

그윽하기만 하고

계곡의 물소리 더욱 새롭네


 잠잘 곳 찾는 것은

길 잃어서가 아니라

존경스런 스님

인도하려 함일세

원컨대 오직 내 청만 들어주고

다시 길손이 누군지 묻지를 마오


 부득스님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면서 말했다.

 “이곳은 여인과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행의 하나일 것이요, 더구나 깊은 산골짜기에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

 이에 그를 맞아 인사를 하고 암자 안에 있게 했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닦아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벽 밑에서 고요히 염불했다.

 밤이 늦어지자 낭자는 부득을 불러 말했다.

 “내가 불행히도 마침 산고가 있으니 원컨대 스님께서는 짚자리를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부득이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은근히 촛불을 비치니 낭자는 이미 해산을 끝내고 또 다시 목욕하기를 청했다. 부득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얽혔으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보다 더해서 마지못하여 목욕통을 준비해서 낭자를 통 안에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니 이미 통 속 물에서 향기가 강하게 풍기면서 금물로 변했다. 부득이 크게 놀라자 낭자가 말했다.

 

 “우리 스님께서도 이 물에 목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득이 마지못해서 그 말대로 하였다.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는 것을 깨닫고, 살결이 금빛으로 되고 그 옆을 보니 졸지에 연화대 하나가 생겼다. 낭자가 부득에게 앉기를 권하고 말했다.

 “나는 관세음보살인데 와서 대사를 도와서 대보리를 이루도록 한 것이오.”

 말을 마치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한편 박박이 생각하기를 부득이 오늘 밤에 반드시 계를 더럽혔을 것이니 비웃어 주리라 하고 가서 보니 부득은 연화대에 앉아 미륵존상이 되어 광명을 발하고 그 몸은 금빛으로 단장되어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말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부득이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주니 박박은 탄식해 말했다.

 “나는 마음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다행히 보살님을 만났지만 도리어 대우하지 못했으나 큰 덕이 있고 어진 그대가 나보다 먼저 이루었소, 부디 옛날의 교분을 잊지 마시고 일을 함께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부득이 말했다.

 

 “통 속의 금물이 남았으니 목욕함이 좋겠습니다.”

 박박이 목욕을 하여 부득과 같이 무량수를 이루었으니 두 부처가 서로 엄연히 마주하고 있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기를 참으로 드문 일이라 했다.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의 요지를 설명하고 나서 온몸이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경덕왕 즉위 14년(755년) 왕이 이 일을 듣고 757년에 신하를 보내서 큰 절을 세우고 이름을 백월산 남사(南寺)라 했다. 764년 7월 15일에 절이 완성되자 다시 미륵존상을 만들어 금당에 모시고 편액을 현신성도 미륵지전(現身成道 彌勒之殿)이라 했다. 또 아미타불상을 만들어 강당에 모셨는데 남은 금물이 모자라 몸에 전부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미타불상에는 역시 얼룩진 흔적이 있었다. 그 편액은 현신성도 무량수전(現身成道 無量壽殿)이라 했다.

《삼국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