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3. 순선안심 탁마법회

11. 염불

                           염불(念佛)




이번 법회의 제목이 순선안심법회(純禪安心法會)라, 순선이라는 말이 처음 듣는 사람들은 좀 생소하실 것입니다. 참선에 무슨 순수한 참선이 따로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드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참선이 너무 흐트러져 있습니다. 종파적인 참선, 자기들 식만 옳다고 고집하는 그런 참선, 그렇게 되면 참선법도 법집(法執)이 되고 맙니다. 성자들의 분상에서 법집(法執)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법집이란 자기만 옳다는 주장입니다. 특히 아집(我執), 이른바 개인적인 이기심이라든가 자기가 속한 단체에 따른 집단적 이기심 이런 것들이 모두가 다 아집(我執)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라는 것이 본래 없는 것입니다.


무아(無我)라는 개념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가? 그것은 인연법(因緣法)이라, 나라는 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거짓 모양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무아(無我)에 대해서 우리 불교인들이 처음에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연법을 생각해보면 그냥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사람 같은 모양, 동물 같은 모양, 식물 같은 모양을 나툰 것이지 실존적인 고유한 나(我)가 있지가 않습니다.





사실은 무아(無我)를 알면 불교의 전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상(相)만 보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고집하는 것이지 본 성품, 본래 바탕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라는 존재가 물에 비친 달그림자 같은 것이지 실존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시초의 본 성품은 무엇인가?


 소승에서는 본 성품 자리를 제대로 말을 못합니다. 그러나 대승에서는 분명하게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또는 법성(法性)이라,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이렇게 성품자리를 말씀했습니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생불멸하는 생명 자체, 이 자리에서 잠시간 인연 따라서 천지만물이 상(相)을 나타낸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많이 들으신 법문 중에 상(相)을 떠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시를 하더라도 상을 떠난 무주상보시라, 좋은 일을 하더라도 상을 떠나지 않으면 위선의 찌꺼기만 남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중생들은 근본 성품을 못보고 겉에 나타난 상만 보기 때문이지요. 좋고, 싫고 하는 상을 떠나지 못하고 아상(我相), 또 내 생명이 얼마나 길 것인가 하는 수자상(壽者相), 나는 사람이고 개나 소는 짐승이다, 라는 인상(人相)등, 중생들은 이런 수많은 상 때문에 여기서 못 벗어납니다. 아무리 상을 빼고 보라고 해도 중생차원에서 그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성자의 입장은 다릅니다. 성자는 항시 근본 성품을 직관하기 때문에 성자가 보는 이 세상의 삶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명예나 감투나 부귀영화 같은 것들이 한낱 무상한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성자도 현상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다 꿈같이 봅니다. 꿈같이 보니까 집착을 안 하게 되겠지요.


따라서 원효스님이나 의상스님, 또 고려 초기의 대각국사, 나옹스님, 태고대사, 보조국사,  이조 때 와서 벽송지엄 스님, 서산대사, 사명대사, 이런 위대한 분들의 책을 보면 조금도 옹색한 데가 없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분들은 상을 떠나있으니까 이른바 법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꼭 내가 하는 식만 옳다라고 하는 고집이 그분들에겐 없습니다. 따라서 그분들은 모두 원통불교(圓通佛敎)입니다. 특별히 통불교(通佛敎)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법 자체가 원융무이(圓融無二)한 원통불교(圓通佛敎)인 것입니다. 종파에 치우치거나 교에 치우치거나 또는 참선에만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해에 해남 대흥사에서 4, 5년 동안 지낸 경험이 있습니다마는 그곳에서 다행히 『초의선사 문집』을 봤습니다. 그 전에는 본 일이 없었는데 그때 처음 읽었습니다. 대흥사는 우리 스님 네들은 다 잘 아십니다마는 신라불교는 경주를 중심으로 해서 빛난 것이고, 고려불교는 송광사로 꽃 피었고, 이조불교는 대흥사로 해서 빛났습니다.


대흥사에서 13대 종사, 강사가 나왔는데 그 가운데서 초의선사는 12대 종사입니다. 그 분은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다도(茶道)의 할아버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의스님이 계셨던 일지암에서 일년에 한 번씩 모여서 다신제(茶神祭)라 해서 잔치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차 마시는 한 가지 예식만 치르지 초의 스님의 핵심인, 즉 말하자면 『초의선사 문집』 가운데에서 『사변만어(四辨漫語)41)』라, 『사변만어』는 굉장히 중요한 책입니다.


*『사변만어(四辨漫語)』1권, 초의의순(草衣 意恂)이 저술한 것으로 백파(白坡)의 『선문수경(禪文手鏡)』을 반박한 글.


그래서 제가 그 때 번역을 하려고 주지스님께 사정을 해서 원고를 가져다가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데 그런 저런 사정으로 번역을 못해서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제가


생각할 때는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다음으로는 이조 불교사에서 그렇게 좋은 책은 처음 보았습니다. 『사변만어』가 그렇게 좋은 책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기회가 있으시면 구해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걸 보면 조금도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그 문집은, 이조 말엽에 한국 불교를 대변하다시피 한 백파 스님을 비판해서 낸 글입니다.


초의스님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추사 선생과 절친한 도반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 선생과도 절친했습니다. 문장도 당대 버금가게 유려하고 그 내용이 아주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용이 좋다는 것은 아집과 법집이 없다는 말입니다.


초의스님이 봤을 때 백파스님이 분명히 오류를 범했는데, 오류를 범했다 함은 과거 선지식들의 말씀에서 빗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 실력이 부족하니까 섣불리 반박 할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일지암에서 사십 년 동안 공부를 해서 나중에 『사변만어』라는 책을 내어 백파 스님을 비판했습니다. 나중에 추사 선생을 비판한 글도 있습니다마는 제가 굳이 이런 말씀을 하는 까닭은 적어도 정통 조사라고 하는 분들이나 도인들은 남을 함부로 비난하지 못하고 또 자기만 옳다고 내 세울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결국 나도 없는 것이고 본질적으로 생각할 때 개념 같은 것도 다 허망한 것인데 이른바 법집이나 아집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를 오직 하나의 진리, 통달 무이한 하나의 진리로 보는 분상에서 어떻게 핏대를 세워 옳다 그르다 시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일본에서도 화두만 하는 임제종과 묵조만 하는 조동종, 또는 염불을 화두로 하는 황벽종이 있습니다. 또 대만에는 주로 염불을 화두로 합니다. 따라서 황벽종에서는 자기들 방법만 옳다고 하고 임제파에서는 화두 없이 꾸벅꾸벅 졸아 버리는 묵조사선(黙照邪禪)이라, 삿된 참선이라 매도를 하는가 하면 또 묵조선에서는 화두 하는 임제파에게 본래가 부처인데 무슨 필요로 이것인가 저것인가 의심할 것인가? 이렇게들 서로 주장들을 합니다.


우리 한국도 가만히 보면 참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화두선만 참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다른 방법들은 다 부정해 버리겠지요.


원효스님의 위대함을 세계가 다 아는데도 화두로 안 했다고 그 분을 부정해 버립니다. 하물며 기독교 같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편협하기 짝이 없겠지요. 그것이 외도인 것 같으면 2천년 동안이나 순교자도 나오고 지금까지 발전해 오겠습니까. 이렇게 개명 천지에서 17억 인구가 믿고 있는 것인데 그네들을 아무 필요 없는 외도라고 간주해 버리면 결국은 싸움밖에 일어날 게 없습니다.


정보화 시대란 것은 온갖 정보와 가치가 뒤섞이고 교류가 되기 때문에 자기 것, 자기들 문화권만 옳다고 주장할 때는 결국 싸움밖에 더 나올 것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교류를 자주 못하니까 내 것, 네 것을 성을 쌓고 살았지만 정보화 시대에는 세상 사람들과 매일매일 교류가 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도 구십육 종 외도라, 불교 아닌 가르침이 구십육 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원효 스님 계실 때도 여러 가지 종파로 화엄경 좋아하는 사람은 화엄경이 옳다 하고, 각기 다르게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종십문화쟁론(十種十門和諍論)이라, 모든 종파를 하나로 회통(會通)시킨 것입니다. 어떤 도인들이나 그 분들의 행적을 보면 당대 일어난 문화현상을 하나의 도리로 회통시킵니다.


보조국사도 역시 염불이나 참선, 교리 등을 하나로 회통시켰습니다. 태고 스님도 마찬가지고 위대한 도인들은 하나같이 다 회통불교를 지향했던 것입니다.


중국도 원나라 때 중봉 명본 스님(中峰 明本 1263-1323), 그 분은 원나라 고봉 원묘(高峰 原妙)의 제자인데 아주 훌륭한 선사입니다. 당대 원나라 임제종에서 나왔는데도 교(敎)와 선(禪)과 염불(念佛)을 하나로 체계를 세웠습니다. 이조 때 서산 대사도 참선하는 사람들은 선가귀감(禪家龜鑑)이라, 도교(道敎)에는 도가귀감(道家龜鑑), 유교에는 유가귀감(儒家龜鑑)이라, 이렇게 하나로 통일을 시키려고 무진 애를 다 썼습니다.


아까 제가 말한 초의 스님의 위대한 점은 그 분이 아무리 명석하게 불교진리를 말했더라도 집착을 가졌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겠지요. 설사 유교를 말하나 도교를 설하더라도 집착을 떠나면 그것은 다 도(道)인 것입니다. 그렇게 시원스럽게 툭 터져야 합니다.


그래서 순선(純禪)이라, 부처님께서 하셨고 달마에서 육조 혜능까지 정통조사들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습니다. 후대 그 자손들이 남종이니 북종이니, 돈오다 점수다 하면서 문제를 만든 것이지 정작 그 당시 육조 스님이나 신수 대사 같은 분들은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조 홍인(五祖 弘忍) 스님 회상에서 칠백 대중이 공부하는데 그 칠백 대중의 상수(上首) 제자가 신수 스님입니다. 그런데 오조 스님께 도를 받은 사람이 열 분이 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각기 성격상 개인적으로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그분들이 도가 아닌 엉뚱한 말을 했다고 볼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신수 대사도 나중에는 육조 스님의 제자들은 점수파라 틀렸다고 비판을 했습니다마는 칠백 대중의 우두머리 되는 스님이 도를 모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나중에 피차 정통 종파를 세우려고 그렇게 시비들을 했던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내세우면 될 일이지 도인들이 무슨 이유로 종파를 세우고 분파를 일으키겠습니까.


후대인들이 자기들 동아리에 권위를 세우려는 불순한 마음 때문에 종파를 내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달마스님 때부터 육조 스님 때까지의 선을 가리켜서 순선(純禪)이라고 합니다. 아무 종파도 없고 또는 어떤 행법만 옳다는 주장도 없는 그야말로 상을 떠나버린 그런 선(禪)이기 때문에 순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안심(安心)은 무엇인가?


부처님 법문은 본래가 안락 법문입니다. 부처님 법을 들으면 항시 마음이 편안스러우니까 안심(安心)입니다. 누가 옳고 그르고 따지고 해야 마음이 불안스러운 것이지 부처님 법은 툭 틔어서 어디에도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 드렸듯이 전문술어로 아집과 법집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집과 법집을 떠나버리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또 참선 자체가 안심법문입니다. 참선이 아닌 다른 공부는 방편설도 많고 여러 가지 사설이 많아서 이렇게 저렇게 분별하고 따지고 합니다마는 참선이라는 것은 간단명료합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바로 부처라. 본래 부처란 것은 내 마음만 본래 부처가 아니라 일체만물의 그 당체는 즉불(當體卽佛)이라, 처음에는 좀 어렵습니다. 가사 앞에 꽃병이 있다고 한다면 그 꽃병의 본질은 무엇인가? 꽃병도 그 당체는 곧 부처입니다.


어느 날 내가 아는 어느 대학교수 한 분이 와서 “저는 이제 반야심경을 통달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으로 공부를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통달을 하셨느냐고 물었더니, 답하기를, 반야심경의 내용은 바로 색즉공(色卽空)인데, 색은 바로 물질을 말하는 것이고 공은 에너지를 말하는 것인데, 물질을 분석하면 결국은 에너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 물질ㆍ소리ㆍ향기ㆍ맛ㆍ감촉 등도 분석해 놓고 보면 결국은 다 공이 아닌가? 이렇게 알면 반야심경을 다 안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렇게 아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마는 색즉공(色卽空)은 그렇게 분석한 뒤에 공(空)이라는 것이 아니라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이 바로 공이라, 당체즉공(當體卽空)이라, 사람은 사람 바로 공이고 금은 금 즉 공(卽空)이란 말입니다.


물리학을 좀 배운 사람들은 물질은 결국 원소의 결합에 불과한 것이니까 그런 식으로는 다 짐작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공은 그런 공이 아닙니다. 따라서 공을 그런 식으로 알면 불교를 바로 아는 것이 못됩니다. 그것을 보고 분석할 석(析)자, 석공(析空)이라 합니다. 즉 공(卽空)이라, 금 쪽같이 아끼는 내 몸 이대로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의 법문이 굉장히 어렵다고들 그럽니다마는 물론 일반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일반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렵다고 해서 아까 말했듯이 석공(析空)식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형이하학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다 통달한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생의 삼독심에 가려진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이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은 부사의 해탈법문(不思議 解脫法門)입니다. 소승에서는 부사의 할 것이 없으나 대승에서는 부사의 해탈법문입니다.


화엄경 초기경전에 보면 아부타 달마(阿浮陀 達磨), 즉 미증유(未曾有)라, 십이부경(十二部經) 가운데 한 부분인 아부타 달마는 우리말로 풀이하면 아주 부사의한 경이란 뜻입니다. 우리 중생의 차원에서는 알 수 없는 그런 경이란 말입니다. 거기에 보면 그 당시에 부처님이나 도인들이 하신 삼명육통이나 신통 자재한 법문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것은 종교라면 응당 어느 것에나 들어있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당체(當體)가 바로 공(空)이라, 제가 며칠 동안 그런 저런 말씀을 많이 했어도 당체가 바로 공(空)이라는 소식을 여러분들이 이해를 못하시면 제가 헛말을 한 것이 됩니다. 어째서 당체가 바로 공인가? 모든 것이 인연법을 따르기에, 연기법(緣起法)은 우주의 대법(大法)입니다. 우리 중생은 연기법을 모르지만 성자는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모니께서도 “연기법을 보는 사람은 진리를 보고 따라서 나(如來)를 안다.” 라고 하셨습니다. 연기법을 모르면 불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연기법도 단순하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그런 식으로만 알면 소승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요즘 불교신문이나 교양지 같은 데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연기법을 강설해 놓은 걸 봤습니다마는 그런 식은 아주 기초적인 차원이라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마땅히 그 다음에 진여불성이 연(緣)따라서 잠시간 나툰 것이 일반 세상의 현상임을 잘 밝혀 놓아야 합니다. 진여불성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상(相)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은 바로 우주에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이사무애(理事無碍)라,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지만 본래 성품은 진여불성으로 똑같은 부처라, 여기서 어려운 것은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갖가지 모양으로 사람도 되고 축생도 되고 했으니 분명히 다른 것이 아닌가. 하지만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해야 연기법을 압니다.


부처님께서는 비유로 가사 물이 바다에 있다고 생각할 때 바람 따라서 천파만파 파도가 치고 거품이 일어나지만 파도나 거품도 결국은 똑같은 물이듯이 그와 같이 인연 따라서 진여불성이 산이 되고 물이 되고 사람 되고, 바람 되고 하지만 결국 진여불성에서 파생된 파도와 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하나의 같은 성품인 것입니다. 도둑이나 강도도 진여불성 차원에서 연기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부처님이고 잘나고 똑똑해도 결국은 다 똑같은 성품의 부처님입니다.


석가모니께서 보리수하에서 대각을 성취해서 깨달은 뒤에 보니까 나만 부처가 된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일체가 다 부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참다운 연기법이 되고 비로소 참다운 도덕률도 확립이 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고 자기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 남에게 베풀고 하는 것은 위선이지 도덕이 못됩니다. 자기 자발적으로 심오한 철학적 근거를 가지고 상(相)이 없이 베풀고 기쁘게 행(行)을 해야 참다운 도덕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사를 잘하고 물건을 많이 만들고 하는 기능인을 만드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고, 또는 스스로 자기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자기를 깨닫고 많은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육의 참 가치입니다. 참사람을 만드는 것이 이른바 전인교육(全人敎育)이라, 기능면이나 지혜나 어느 것에나 치우침이 없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야 할 것인데 지금의 교육은 기능적인 교육입니다.


무얼 많이만 외우고 기능적으로 컴퓨터나 무슨 조작 같은 것만 잘하면 우수한 사람인줄 압니다마는 그런 것은 아주 작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제 아무리 인류가 외적인 발달을 이루었더라도 바른 인간상을 구현하지 못한다면 참다운 평화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분야에서나 어떤 경우에나 연기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여러 불자님들 어느 누구를 보더라도 연기법을 적용해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자식이나 부부간에나 또 남에게도 연기법을 적용해서 보아야 오류를 안 범합니다. 연기법은 바로 우주의 대법이기 때문에 그 법에 따라야 우리 마음도 편안하고 동시에 부처님께 보다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안심법문은 부처님의 진여연기(眞如緣起), 법계연기(法界緣起), 우주의 대법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불경을 다 외우고 통달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완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바로 한 몸이요 하나라는 각성은, 상을 온전히 떠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요새 김지하 시인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생명운동”이라는 걸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역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참 다르구나하고 생각을 했습니다마는 그네들이 하는 생명운동의 이론을 들어보니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니까 자연의 생명도 중요하다는 차원의 개념인 것 같았습니다.


우리 부처님같이 “모두가 다 일미 평등한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투철하게 알고 그 운동을 하면 훨씬 더 신념과 열성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 스님 네들이 그 분들에게 기본적인 지도 원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사, 음악을 창조한다고 하더라도 영원적인 생명자체의 도리를 알고 할 때는 훨씬 더 위대한 음악이 나올 것입니다. 베토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는 말년에 음악가에게는 생명과 같은 청각을 잃고 치명적인 불구가 되었지만 그는 바로 그때 가장 위대한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것은 현상적인 육신의 귀로는 미처 못 듣는 영원적인 순수 멜로디를 들은 것입니다. 위대한 클래식 음악은 다 그런 것입니다. 일반 중생들은 들을 수 없는 신묘한 우주의 음을 듣는 것입니다.


아미타경이나 관무량수경에 보면 극락세계의 장엄한 모양이 나와 있습니다. 극락세계의 모양을 보면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 극락세계의 나무나 숲이나 새나 모두가 다 염불ㆍ염법ㆍ염승이라, 부처님의 무량법문을 항시 노래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말로 해야 법문이 되지만 영원적인 실상세계, 참다운 성품세계에서는 새는 새 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흙은 흙대로 다 우주의 진리를 그대로 설법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모래, 한 송이 장미꽃 가운데서도 우주의 신비와 진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비단 불경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봅니다. 그렇게 해서 ‘순선안심’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제가 여러 가지 말씀을 드린다 하더라도 뜻은 오직 그것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것을 보다 더 탁마(琢磨)해서 서로 토론도 하고 질문도 하면서 부처님 법의 핵심인 아집과 법집을 떠난 참다운 불자가 되어서 금생에 사람 몸 받았을 때에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철저하게 탐구를 하시기 바랍니다. 톨스토이는 그렇게 대단한 작가이고 백작이었지만 팔십이 넘어 집과 재산과 가족을 다 버리고 승려가 만행 하듯이 괴나리봇짐 하나 지고 천하를 떠돌았습니다. 일대사인연, 생사해탈의 인연이라는 것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청춘의 쾌락 같은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가 불자님들이 그렇게 하시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그런 셈치고 기업을 하던지 장사를 하던지 최선을 다 하면서 마음으로는 집착을 떠나야 합니다.


 저는 많은 기업가를 만나기도 하고 또 그분들에게 시주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마는 대 기업가들을 보면 역시 보통사람들 하고는 좀 틀립니다. 남모르는 가운데 굉장히 공부도 많이 하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제가 아는 어느 기업가의 말이 “스님, 이것은 모두 제 것이 아닙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다 털어버리고 승려가 되면 좋겠는데 제가 맡고 있는 사람들이 몇 만 명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관리로 있습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오억이나 십억을 시주하는 일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단돈 몇 백 만원 때문에 남의 목숨도 뺏고 부모를 죽이는 패륜을 우리는 봅니다. 자기 부모도 형제도 아닌 일개 스님한테 몇 억이나 되는 돈을 조건 없이 내준단 말입니다. 저의 집안은 복이 없어서 몇 천 만원 시주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몇 억이나 되는 기금을 부처님께 바치는 분들을 보면 정말 눈물겹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본래무아(本來無我)라, 자기가 없는 것이고, 자기 집도 재산도 본래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이 나서 타 버릴 수도 있고 누가 몽땅 털어서 가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죽을 때는 자기 몸뚱이도 못 가져가는데 금은 패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우리 목숨은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이란 말입니다. 언제 꺼질지 모릅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이 아니면 우리는 한시도 안심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말씀드릴 이 법문도 역시 안심법문을 중점적으로 하면서 될수록 정통 도인들 말씀을 함께 인용하겠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회통적인 면에서의 불타관(佛陀觀), 즉 우리가 부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소승에서는 석가모니만 부처님으로 봅니다. 그러나 대승에서의 참다운 부처님은 바로 부처님이 하신 말씀대로 석가모니가 세상에 나오고 안 나오고 상관없이 영원히 우주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법신 부처님(法身佛) 말입니다. 법신부처님을 깨닫게 되면 누구나 다 산 부처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달마 스님이나 원효 스님, 서산 스님 등 수 많은 선지식들은 다 산 부처님들입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경전인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서에 보면 “그대들은 나를 따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따르라. 그러면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기독교가 소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당시에 유대민족들은 갈릴리 해안에서 고기 잡는 어부였던 베드로를 비롯해서 대중들의 지적 수준이 고등법문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허심탄회하게 요한복음이나 마태복음서의 중요한 대목을 보면  똑같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들은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리라.” 이렇게 대중에게 이르니 그 소리를 들은 바리세인들이 “당신은 그렇게 말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이와 같이 반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지만, 그대들은 그대 자신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줄을 모르지 않는가. 내가 하는 말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교식으로 해석하자면 위대한 사람들은 그냥 자기 마음대로 자기 개념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인 진여불성(眞如佛性), 생명의 실상에 어긋남 없이 그것에 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 자리를 체험하지 못했으니까 부처님 말씀대로 그 자리에서 빗나가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고 성자는 바로 그 자리와 하나가 되었으니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해도 우주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타관(佛陀觀)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석가모니만 부처님이고 다른 부처님은 없는 줄 아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미국에 있으면 큰스님들의 법문이나 교리를 쉽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불교란 것이 하도 방대해서 말로나 글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기도나 참선으로 꾸준히 오랜 시간 몸에 배어야 합니다. 반야심경 한 편을 보더라도 한 철 참선하고 보는 것과 두 철 참선하고 보는 것은 그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같이 공부하고 토론도 해서 제가 잘못 말하면 지적도 해주시고 그래서 탁마(琢磨:옥석을 쪼고 가는 것같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하자는 뜻에서 이번 법회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불타관을 정립하는 동시에,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강령은 삼위일체입니다. 서기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에서 통과가 되었지요. 그 당시에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란이 많았는데 그런 논란들을 제치고 하나님 즉, 천지 우주의 본성인 성부와 그 기운인 성신과, 그리고 화신인 예수(聖者)가 바로 셋인, 즉 하나다, 삼위가 한 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법신, 보신, 화신이 본래 하나다라고 했듯이, 제가 생각하기에는 틀림없이 그때 문화가 교류되어서 불교의 법신ㆍ보신ㆍ화신(三身一佛)사상이 기독교로 흘러갔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 전에는 삼위일체라는 말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서기 325년에 가서야 그 당시 주교나 신부, 신학자들이 모여서 니케아 회의를 통해 삼위일체설(說)을 통과시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를 모르면 기독교가 성립될 수 없겠지요.


우상숭배 같은 것도 본래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것도 787년 두 번째 로마 공의회 때 비로소 우상숭배를 배제한다는 것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근래에 와서 로마의 바티칸 궁에서 열린 1962년에 2차 공의회에서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문제가 나왔습니다.


신앙의 자유란 것은 바꿔서 말하면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완고한 가톨릭에서도 지금 벽을 무너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전에 중세기 때는 자기들 교리에 위배 되었다고 그 많은 사람들을 불태워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독교가 근래에 와서 그야말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종교의 자유를 용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新ㆍ舊敎) 하나로 합해야 된다고 논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는 지금에 와서도 종파가 분열하고 같은 종파끼리도 서로 반목하는 걸 보면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지금 한국의 불교 종파가 약 50여 개가 난립하고 있고 지금도 자꾸만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법왕이라고 떠들고 다니기도 하고, 감투 쓰기 좋아하는 사람 중에 우리 한국 사람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총무원에 한 번 들어갔다 하면 몇 십 년이고 끝끝내 거기서 버티려고 한단 말입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데 그까짓 감투 남이 쓰면 어떻고 내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따라서 종교인만큼은 그런 허명(虛名) 문제에 선거 같은 것도 다 던져버리고 서로 추대해서 앙금이 없이 올려놔야 서로 존경도 받고 종교인답지 않겠습니까.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모두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제 염불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아래 염불에 대한 개요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o염불(念佛) : 본래시불(本來是佛)이니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염(念)함을 의미함. 일                    체만유(一切萬有)가 부처요, 둘이 아닌 불이불(不二佛)이기 때문에 언제                    나 부처를 여의지 않는 불리불(不離佛)이다.





  o염불(念佛)의 방법(方法)


   1. 칭명염불(稱名念佛) ; 부처를 생각하며 입으로 불명(佛名)을 칭(稱)함.


   2. 관상염불(觀想念佛) : 정좌(靜座)하고 불(佛)의 상호공덕(相好功德)을 관념(觀念)함.


   3. 실상염불(實相念佛) : 불(佛)의 법신(法身)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고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리(理)를 관조(觀照)함.





 o 염불삼매(念佛三昧) : 인행삼매(因行三昧)와 과성삼매(果成三昧)의 이종(二種)이 유(有)                           함.


   1. 인행삼매(因行三昧) : 일심(一心)으로 불명(佛名)을 칭(稱)하든지 또는 일심 (一心)으로                            불(佛)의 상호(相好)를 관(觀)하든지 또는 일심(一心)으로 법신                             (法身)의 실상(實相)을 관조(觀照)하는 수행법(修行法)을 인행(因                            行)의 염불삼매라 함.


   2. 과성삼매(果成三昧) : 인행(因行)의 염불삼매가 성숙(成熟)되면 마음이 선정(禪定)에                              들어가고 혹은 시방불(十方佛)이 현전(現前)하며 혹은 법신(法                             身)의 실상(實相)에 계합(契合)되는데 이를 과성(果成)의 염불                             삼매라 함.





염불(念佛)이라는 대문(大門)이 있습니다. 특히 미국에 계시는 분들은 한문을 잘 모르시기 때문에 한글로 다 달았으니 읽기는 쉬울 것입니다. 염불이라는 것이 부처를 우리 마음 밖에다 두고 할 때는 방편염불에 그치고 맙니다.


부처님은 저 멀리 극락세계에 계신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방편이 되겠지요. 기독교도 역시 본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안 계시는 곳 없이 다 계시니까 내 마음속에나 공기 속에나 다 계신다고 봐야지요. 따라서 불교도 마찬가지로 이른바 부처님은 우주의 생명으로 계신다, 우주에 두루 계신다, 이렇게 생각해야 참다운 부처님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순선법문 맨 처음에도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부처란 결국 우주를 몸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 어디에나 안 들어 있는 곳이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 그대로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4조 도신(道信) 스님도 “부처를 생각하면 우리가 바로 부처고, 분별시비하면 중생이다.” 라고 했습니다.


염불이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니 닦은 뒤에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본래 부처인데 부처인줄을 모를 뿐입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다’ 라는 말을 듣고서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완전히 믿지를 못하니까 우리에게서 아무런 힘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부처라는 사실을 완전히 믿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순식간에 우리한테서도 위대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하게 믿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신앙이란 의심 없이 온전히 믿는 것, 믿어야 부처님 공덕이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우리 마음이 본래는 청정심입니다. 우리가 설사 나쁜 생각을 하고 남을 미워도 하지만 우리 본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 할 때는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나쁜 생각도 많이 하면 우리 마음이 오염되어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근본성품에서 볼 때는 오염이 된다거나 크고 작고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자체, 성품으로 볼 때는 조금도 오염이 안 되는 청정심인 것입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니,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염(念)하는 것이 참다운 염불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을 저 밖에다 두고, 부르고 외우면 복을 주고 도움도 준다는 식으로 염불을 합니다. 이런 것은 참선이 못 됩니다. 오로지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요, 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해야 진정한 염불선(念佛禪)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 주여”를 외친다 해도 역시 하나님은 저 하늘 위에 계신다, 이렇게 소박하게 믿어버리면 참선은커녕 참다운 신앙도 못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내 마음 속에나 우주 어디에나 두루 계신다, 이렇게 믿으면 그 때는 오! 주여! 를 해도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본래의 본바탕 본 성품을 여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참선이 되는 것이고 근본성품, 근본바탕을 떠나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가 부처와 다르지 않는 불이불(不二佛)이라. 우리 중생들이 잘못 생각해서 부처는 부처고, 나는 나다 이렇게 불신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부처로 환원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사, 티벳에서 하는 “옴 마니 반메 훔”도 실제의 주문 뜻을 그대로 풀이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영생불멸하는 진리의 보배’라는 뜻입니다. 그네들은 다른 것 없이 ‘옴 마니 반메 훔’만 합니다. 그것도 ‘옴 마니 반메 훔’이란 ‘옴’ 자체가 영생불멸한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심으로 하다보면 본래 성품인 부처님께로 가까워지겠지요.


염불의 방법에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라, 부처를 생각하며 입으로 명호를 외운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한 가지로만 통일되어 있으면 간단하고 좋을 텐데 불명(佛名)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 부처님 명호를 두고 저한테 와서 그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절대로 이름에 걸리지 마십시오. 부처님 명호는 다 그 공덕 따라서 다를 뿐입니다. 항시 제가 그때그때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꾸 그 이름에 걸리니까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만약에 내 부처님, 네 부처님이 따로 있고 이름 따라 다 뿔뿔이 열이고 백이고 따로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부처님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부처님의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자비도, 지혜도 다 원만해서 하나의 개념으로는 다 표현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무량공덕을 갖춘 부처님을 자비로운 쪽에서 보면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 봐서는 문수보살, 대세지보살, 또는 그 원력으로 해서 중생을 제도하는 쪽으로는 보현보살, 우리 중생의 영혼을 극락세계나 천상이나 인도환생으로 인도하는 면에서는 지장보살입니다.


그 다음에 관상염불(觀想念佛)이라, 이것은 볼 관(觀)자, 생각할 상(想)자,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부처님의 원만덕상을 생각하거나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는 염불입니다. 따라서 꼭 이름만 외우는 것이 염불은 아닌 것입니다. 염불 소리를 안내더라도 부처님의 모양만 바라보고서도 부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부처님을 닮아가야 됩니다. 부처님 상호라는 것은 삼십이상(三十二相)이라, 만덕(萬德)을 갖추면 부처님 같은 상호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얼굴 잘난 사람들은 그냥 어디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전생에 그만치 공덕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금생에 타고난 얼굴이야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부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눈은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고 수용하고 포섭하는 그런 눈빛입니다. 그렇게 부처님을 닮아가는 그런 염불이 관상염불입니다.


실상염불(實相念佛)은 모든 상을 떠나서 부처님의 진리,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이른바 우주에 두루해 있는 부처님의 참다운 생명의 실상, 그 자리를 생각하고 하는 염불입니다. 따라서 실상염불이 되면 그 때는 바로 염불참선이 됩니다. 실상염불은 염불선과 둘이 아닙니다. 실상염불은 부처님의 법신(法身)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고 만 공덕(萬功德)을 갖춘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원리(原理)를 관조하는 것입니다.


염불삼매라, 삼매란 것은 어느 한 곳으로 몰두하는 것이 삼매 아니겠습니까. 인행삼매(因行三昧)와 과성삼매(果成三昧)가 있는데, 인행삼매(因行三昧) 이것은 처음에 일심(一心)으로 부처님 이름을 외운다던지 또는 일심으로 부처님의 상호를 관찰한다던지 또는 일심으로 법신불(法身佛)을 실상으로 관조하는 것을 말하고, 과성삼매(果成三昧)는 그렇게 일심으로 함으로 해서 마음이 선정에 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 마음은 항시 산란스러워서 선정에 들기가 어렵습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우리의 근본번뇌를 없앨 수 있는 것인데, 따라서 삼매에 들려면 오로지 지속을 시켜야 됩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을 지속시켜야 마음이 한 곳으로 모아지고 그래야 선정에 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삼매에 들어가면 우리 업장이 녹아져서 부처님의 광명이 자기 앞을 훤히 비추고 동시에 부처님의 실상에 계합(契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과성삼매라, 인행삼매가 근본이 되어 그 결과로 열매가 맺어서 염불삼매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실 때 여러분들은 어느 것이나 좋습니다. 화두를 드나 또는 티벳의 불교처럼 ‘옴 마니 반메 훔’을 외우나 염불을 하나 어느 것이나 다 무방하고 도는 간경자혜안통도(看經者慧眼通途)라, 부처님 경만 읽어도 됩니다.


불경도 모두가 다 부처님의 근본성품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경만 읽어도 마음을 본체에서 안 여의면 성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좋지만, 본 성품을 관조하는 그 마음을 지속시켜야 됩니다. 염불도 계속하다 보면 나중에는 가만히 있어도 자기 몸 전체가 염불이 되는 경지가 옵니다. 바람 불면 바람소리가 염불로 들리고, 물소리도 부처님 음성으로 들리게 됩니다. 화두도 무(無)라 무(無)라 하다 보면 바람소리도 무자 화두로 들린단 말입니다.


선방에서 대중이 다 자는데 가만히 들으면 화두 하는 사람은 잠자면서도 “무(無)라 무(無)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도록 까지 해야 됩니다. 그렇게 익어지면 놓아버려도 놓아지지가 않고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염불이나 화두를 오래 일심으로 한 사람들은 안  할래야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밥을 먹으나 길을 가나 항시 염불, 화두가 떨어지지 않고 그렇게 이어지면 기분이 굉장히 좋아집니다. 그렇게 되도록 까지 해야 삼매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온전히 증명을 할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꼭 삼매에 들어가도록 까지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과거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들은 천 팔십 개로 꿰인 염주를 들고 몇 시간이고 헤아리면서 염불을 합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뭘 저렇게 미련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할머니나 어머니들의 얼굴을 보면 자비심이 가득히 넘칩니다. 왜 그럴 것인가? 오직 일심으로 염불을 하니 삼매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속을 시키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저는 한국에서나 여기서나 여러분들에게 염주를 많이 드립니다. 처음 올 때 오백 개를 가지고 와서 다 드리고 나중에도 더 가지고 와서 대원사에다 풀어놓았습니다. 염주를 드리는 것은 그냥 팔목에 감고 다니라고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부처님 공부는 자기한테 가장 손해가 안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성불을 해야 됩니다. 본래 부처거니 부처가 돼 버려야지, 부처가 될 바에는 다툼도 많고 전쟁도 많은 이 불안스러운 금생에 되어야 너도나도 인간계의 여러 재앙을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을 하시라고 염주를 드리는 겁니다.








아미타불(Amita Buddha)





다음은 아미타불 편을 보시겠습니다.


아미타불(Amita Buddha)은 무량수(無量壽:Amita yus, 영생의 생명) 즉, 부처님의 목숨은 한량이 없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생명이 어느 한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나 현재, 미래, 영원히 존재한다고 해서 아미타 부처님을 무량수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충만하다고 해서 무량광(無量光)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행복이나 모든 좋은 것을 원만하게 갖추고 있다고 해서 감로왕이라, 제일 맛있는 것이 감로 아닙니까, 모든 행복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 아미타불은 법신ㆍ보신ㆍ화신 삼신일불(三神一佛)이라, 삼신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아(阿)는 화신을 의미하고 미(彌)는 보신을 의미하며 타(陀)는 법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은 이렇게 무량공덕을 갖춘 부처님의 생생한 명체불(名體佛)이라, 이름과 체가 둘이 아닌 그런 이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우리 사람 이름은 자기 부모나 작명가가 짓지만 부처님의 명호(名號)는 그 명호 자체에 진리가 다 깃들어 있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진리가 다 묻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외우면 외운 만치 공덕이 묻어나오고 우리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또 십이광불(十二光佛)이라, 어느 하나로 표현 할 수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이름이 이렇게 많은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광명으로 보나 생명으로 보나 행복으로 보나 어느 하나의 개념으로 해서는 다 표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름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십이광불(十二光佛)은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그 광명이 헤아릴 수 없고 무변광불(無邊光佛)이라, 부처님의 광명은 거리낌이 없지만 태양 광선은 가림이 있지요. 벽 같은 것은 못 뚫고 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처님 광명은 벽이고 땅 속이고 다 뚫고 나갑니다.


무애광불(無碍光佛)은 거리낌이 없는 광명이요, 또는 무대광불(無對光佛)이라, 상대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 염왕광불(焰王光佛), 항시 빛나 있는 광명 부처님이요,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조금도 오염이 없는 부처님이요,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 항시 행복이 충만한 부처님이요, 지혜광불(智慧光佛)이라, 지혜가 빛나는 부처님이요, 부단광불(不斷光佛)이라, 광명이 끊임이 없는 부처님이요, 난사광불(難思光佛)이라, 부사의 해서 우리 중생이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이요, 또 무칭광불(無稱光佛)이요, 어떻게 말로 감히 칭할 수 없는 부처님이요, 초일월광불(超日月光佛)이라, 해나 달이나 별보다 훨씬 더 밝은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방편력은 참 교묘하기도 합니다. 이렇게까지 우리한테 고구정녕으로 말씀했건마는 우리 중생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일축해 버리고 맙니다.


 다음은 아유월지(阿惟越地)라, 이것은 공부해서 얻은 불퇴지라, 지아유월지자(至阿惟越地者) 행제난행(行諸難行) 구내가득(久乃可得) 다시 후퇴가 없는 자리입니다. 법성을 증명해야 후퇴가 없겠지요. 이 아유월지에 이른 사람들은 난행문(難行門)과 쉬운 문(易行門)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공부하는 사람 중에는 자기 힘만 믿고 어렵게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부처님한테는 본원(本願)이라, 근본 부처님께 깃들어 있는 만 중생을 성불케 하는 원(願)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 본원이라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주에는 인력(引力)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인력도 역시 부처님한테 들어있는 공덕인 것입니다. 인력 그것은 모든 중생을 근본으로 이끄는 힘인 것입니다. 그냥 보통 물리학적인 의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명으로 생각할 때는 모든 중생을 중심으로 이끄는 부처님의 원력인 것입니다. 이른바 우주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고 흠모하며 부처님 이름을 외운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에 본래 있는 인력에 우리가 편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만 믿고 고생스럽게 가는 것 보다는 그 힘을 동경하고 따른다면 우리는 그 힘에 편승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도 빨라지고 불안한 마음도 해소가 되는 것입니다.


인능염시불 무량력공덕 즉시입필정(人能念時佛 無量力功德 卽時入必定)이라, 우리가 능히 부처님의 무량의 공덕, 무량의 힘을 분명히 믿을 때는 그 즉시에 삼매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용수보살이 지은 『십주비파사론』에 있는 법문입니다.


그 다음에 부처님에 대한 일념신해공덕(一念信解功德)은 부처님에 대한 한 생각, 바로 믿는 공덕은 오바라밀(五波羅密), 즉 보시를 하고 계행을 지키고 인욕을 하고 선정을 하는 등등의 오바라밀보다도 훨씬 수승하다.


약유중생 개불수명장원(若有衆生 開佛壽命長遠) 만약 중생이 부처님은 수명장원이라 부처님의 생명이 금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생불멸의 존재다.


여시내지 능생일념(如是乃至 能生一念) 신해소득 공덕무유한량(信解所得 功德無有限量) 이렇게 능히 한 생각을 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믿는 공덕이 한량이 없어서,


약유선남자선여인(若有善男子善女人) 위아뇩다라삼먁삼보리(爲阿耨多羅三藐三菩提) 만약 선남자 선여인, 즉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아뇩다라 삼먁삼보리, 무상대도, 위없는 대도를 위해서,


고어팔십만억 나유타겁(故於八十萬億 那由多劫) 행오바라밀(行五波羅密) 팔십 억겁 동안, 즉 오랜 세월 동안 오바라밀을 닦는다고 할 때,


단바라밀(檀波羅密) 사라바라밀(巳羅波羅密)…’ 그 공덕도 많겠지만 부처님의 영생불멸 하는 이 공덕을 비교해 본다면 상대도 안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법화경 분별 공덕품에 있습니다. 제가 한 말씀 더 드립니다.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온전히 믿는 그 힘이 우리가 육바라밀 가운데서 보시도 하고 계행도 지키고 인욕도 참선도 하는 이런 등등의 공덕, 다만 반야바라밀을 떠나서 오바라밀을 지키는 공덕을 수억 년을 한다 하더라도 그런 공덕은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한 생각 분명하게 믿는 그 공덕에 미치지 못한다는 법문입니다.


부처님이 과장을 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니까 마음으로 바로 믿어버리면 순식간에 우리 공덕도 그렇게 갖추어진다는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일여래(大日如來:Mahavairocana)라, 대일여래는 인도말로 비로자나불인데, 무슨 뜻인가 하면 광명변조(光明邊照)라, 우주에 두루해 있는 광명의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렇게 광명이란 말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다음은 염불 공덕편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o염불공극 어일일시시 일체처아미타불 (念佛功極 於日日時時 一切處阿彌陀佛)


진체명현기 전임명종시영입 구품연대 상품왕생 (眞體冥現基 前臨命終時迎入 九品蓮臺 上品往生)…   <보조지눌 선사>


염불공극이라 염불의 공덕이 지극해지면 나날이 어느 때든지 아미타불의 진체(眞體)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아미타불의 광명이 은은하게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가 임종할 때는 모든 성인들이 우리를 맞이하러 와서 극락세계 중에서도 제일 높은 극락세계(구품연대) 조금도 오염이 없는 성자들만 계시는 그곳에 태어난다,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보조국사 염불요문에 있는 법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o아미타불 정묘법신 편재일체중생심지 (阿彌陀佛 淨妙法身 遍在一切衆生心地)


고운심불중생 시삼무차별 (故云心佛衆生 是三無差別)


역운심즉불 불즉심 (亦云心卽佛 佛卽心)…


아미타불명 심심상속 염념불매 (阿彌陀佛名 心心相續 念念不昧)…


구구성공 즉 홀이지간 (久久成功 則 忽爾之間)


심념단절 아미타불 진체탁이현전 (心念斷絶 阿彌陀佛 眞體卓爾現前)…  <태고보우 선사 >


아미타불의 청정하고 묘한 법신, 이것은 한계가 있는 몸이 아닙니다. 우주에 가득한 생명의 실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법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 모든 중생의 마음에 두루해 있는 고로 마음이나 중생이나 부처가 차별이 없다. 부처님의 참다운 광명이 우주에 가득 차 있거니, 부처님과 나와 또는 중생이 어떻게 차이가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언제 어디에나 두루해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아미타불의 이름을 우리 마음에 두고서 염념상속이라, 생각 생각에 끊임없이 외운다고 생각할 때는 구구성공(久久成功)이라, 오랫동안 하면 잠깐 동안에 분별시비 하는 마음이 딱 끊어져서 아미타불의 참다운 몸이 훤히 나타난다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태고 보우 선사 염불법문입니다. 그 다음에





o심즉연불경계(心則緣佛境界)요 억지불망(憶持不忘)이라.


구즉칭명불호(口則稱名佛號)라.  분명불란 여시심구(分明不亂 如是心口)


상응일념일성즉 능멸팔십억겁(相應一念一聲則 能滅八十億劫)


생사지죄 성취팔십억겁(生死之罪 成就八十億劫)


수승공덕(殊勝功德)이라.    <서산대사 >


우리 마음은 부처의 경계를 인연하여 잠시도 부처님을 잊지 않고 우리 입으로는 부처님 이름을 항시 외워서 마음을 어둡지 않게 하고 이와 같이 마음으로나 입으로나 서로 상응해서 오로지 순수한 한 생각으로 한 소리로 한 번 염불을 하면 팔십 억겁 무수 세월 동안에 지은 죄를 다 없애고 동시에 무수 억겁 동안에 지을 수 있는 수승한 공덕을 성취한다. 이것은 서산 스님의 법문입니다. 다음에는 대무량수경에 있는 법문인데 우리중생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o설만세계화 필과요문법(設滿世界火 必過要聞法)


요당성불도 광제생사류(要堂成佛道 廣濟生死流)


설만세계화(設滿世界火) 설사 온 세계가 지진이 나고 불바다가 될지라도 필과요문법(必過要聞法)이라, 반드시 그 불바다를 뚫고 나가서 부처님 법을 들어라, 요(要)자 이것은 ‘꼭’이라는 뜻입니다. 꼭 부처님 법을 들을지니 요당성불도(要堂成佛道)하고 한사코 불도를 성취해서 우리가 살면서 장사를 할 수도 있고 무슨 일을 할 수도 있으나 꼭 한사코 불도를 성취해야 함은 우리의 지상명령입니다. 광제생사류(廣濟生死流)라, 널리 중생을 제도하라. 온 세계가 불바다로 휩싸이더라도 반드시 뚫고 나가서 우리 생명의 근원인 불법을 들을 것이며, 한사코 불도를 성취해서 만 중생을 제도하라, 이것이 우리 인간이 할 일입니다.


 이것으로써 이번 순선 법회를 마감하겠습니다. 모두 바쁜 생활 가운데서 이렇게 몇 시간씩 시간을 내기가 어려우실 것인데 모두 열심히 나와서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한국이 비록 약소국이지만 부처님 가르침만은 우리 한국 불교가 제일 앞서 있습니다. 원효 스님을 비록해서 의상, 보조, 대각 국사, 서산 스님 등등, 기라성 같은 대 선사들의 가르침은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입니다. 조금도 찌꺼기가 없습니다.


이런 불법을 가지고 우리가 세계로 나아간다고 생각할 때, 미국이나 일본 불교 등은 그들 나라 힘은 강하지만 그 종파성도 굉장히 강합니다. 그러니까 불법이 우선 하나가 되기 위해서 한국불법이 중심이 돼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불법을 믿는 우리 불교인이 하나가 되어야 하고 우리 한국불교의 순수하고 원통 무애한 불법을 바르게 알아야 되겠지요.


그렇게 해서 우선 불법으로 하나가 되고 그 다음에는 세계 종파가 하나가 되고, 불법만이 다른 종교를 다 포섭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공부해 나가면서 생업에도 종사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4. 청화 큰스님 법문집 > 3. 순선안심 탁마법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선안심탁마법회 법문요약  (0) 2011.03.04
10. 삼종사선(三種邪禪)  (0) 2009.05.23
9.오종선  (0) 2009.05.21
8. 선.근본선  (0) 2009.05.19
7. 광명 ㆍ광명열반   (0) 2009.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