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3. 순선안심 탁마법회

10. 삼종사선(三種邪禪)

                          삼종사선(三種邪禪)




우리는 지금 가장 큰 일을 위해서 모였습니다. 불교 말로 하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이 세상만사 중대한 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공부가 가장 중요한 일대사(一大事), 즉 가장 큰일입니다.


우리는 보통 초상을 당한다던지 기타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있으면 그런 일을 큰일이라고 합니다마는 그것은 세간적(世間的)인 큰일인 것이고 정작 큰일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사해탈의 문제입니다. 비단 지금 금생뿐이 아니라 영생불멸 하는 문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윤회를 벗어나는 문제, 우리 인간이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을 지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고 그리하여 뱅뱅 도는 그런 지겨운 윤회를 떠나서 해탈의 길로 가는 이 일이야말로 어느 누구한테나 가장 중요한 대사(大事)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인 것은 그 대사를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그럼 대사를 어떻게 치러야 할 것인가? 일대사인연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간단명료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 열 개(開)자, 부처님 법문을 열어서 보인다는 말입니다. 불경이나 조사어록들은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에게 열어서 보이신 것입니다. 개시(開示)는 진리를 열어서 보이시는 것이고 그 다음에 오입(悟入)이라, 깨달을 오(悟)자, 들 입(入)자입니다.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성이 무엇인가?, 우리 자아 문제는 또 무엇인가? 사람들이 흔히 자아의 상실이라는 말들을 합니다마는 사실로 보면 성자 이외에는 모두가 다 자아를 상실해 있습니다. 성자만이 우주의 도리인 참다운 자아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의 일대사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들에게 생사해탈을 열어서 보이고 동시에 깨달아서 그 속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깨달아서 우리 스스로 증명을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와 같이 철저합니다. 그냥 교리적인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이해도 알아야 되겠지만 그와 아울러서 꼭 증명해 들어가야 생사해탈이라는 불교의 구경(究竟) 목적을 달성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도 할 때도 역시 꼭 그 사람에게 부처님 법을 여실하게 진리에 어긋나지 않게 가르쳐야 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깨달아서 자기 스스로 증명하도록 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깨닫는 법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먼저 번 시간에 공개했던 참선입니다. “선(禪)”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고 비중을 갖는 문제입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참선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찾는 공부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수행법이 참선인데, 모르면 할 수 없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안 다음에는 꼭 참선을 해야 합니다. 참선 그러면 아주 고도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세간적인 사람은 엄두도 못내는 어려운 것이라 생각들을 합니다마는 참선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제일 쉬운 것입니다. 제가 결코 과장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참선이 왜 제일 쉬운 것인가, 참선은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몸에도 제일 편한 자세가 바로 가부좌한 자세입니다. 반듯하게 가부좌한 자세가 소화도 제일 잘되고 피도 가장 맑게 하는 것입니다.

 

용수 보살의 지도론에도 보면 “시가부좌좌 최안온불피극”(是跏趺坐坐 最安穩不疲極)이라, 가부좌 한 자세가 가장 편안하고 피로를 없앤다는 말입니다. 자세가 좋은 사람들은 건강도 좋습니다. 어디 앉더라도 삐뚤게 앉고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소화도 잘 안되고 병도 오기 쉽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않고 단정하고 꼿꼿하게 앉는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상도 건전하고 건강도 그에 따라서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형태 구도 중에서도 정삼각형 같이 안정된 모습이 없지 않습니까. 피라미드를 보십시오.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것도 역시 심심 미묘한 기하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삼각주의 중심에다가 무엇을 두면 썩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바로 가부좌한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습 가운데 가장 안정된 모습인 동시에 제이 석가라고 불리는 용수보살, 그 분 말씀에 “마왕견지 기심수포”(魔王見之 其心愁怖)라, 마왕들이 이 모습만 봐도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사상이 확실하고 자세가 단정할 때는 그 어떤 삿된 기운도 우리를 침범하지 못합니다. 비스듬히 드러눕거나 엎드리거나 하는 자세 가운데 망상도 생기고 하는 것이지 우리가 바른 사색을 하고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자세를 취한다고 할 때는 나쁜 기운이 근접을 못하는 것입니다. 남하고 대화를 할 때도 똑바로 단정하게 앉아서 정식으로 하게 되면 그 사람은 권위가 섭니다. 절대로 남이 섣불리 못하게 됩니다. 부처님 제자는 부처님 뜻에 따릅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어떤 면에서나 가장 좋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고, 따라서 우선 가부좌한 모습 자체가 그와 같이 훌륭한 것이고, 우리 마음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참선할 때는 가부좌하는 것이 원칙입니다마는 우리 마음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설사 모양은 태산같이 든든하게 앉아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남을 미워하고 욕심내고 해서는 참선이 못 됩니다. 참선은 꼭 가부좌만 틀고 앉아서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주인공은 역시 마음인지라 육조단경에 보면 “내 법은 본체를 여의지 않는다.” 성자의 법이란 어느 때나 본체를 떠나지 않습니다. 본체란 것은 근본 성품을 떠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절대적인 근본본체를 떠나서 자기 배운 대로 느끼고 현상만 보고 상식적으로 따집니다.


우리 상식이란 것은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배운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따라서 십인십색(十人十色)이, 갑은 갑대로 느끼고 을은 을대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사상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겠지요. 배운 대로 느낀 대로 따지기 때문에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서로 뜻이 충돌하고 노동자나 사용자도 역시 자기 배운 대로 느낀 대로 주장하기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본체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다 동일한 본체입니다. 불교의 위대한 점은 하나의 진리로 해서 귀결을 시키는데 있습니다. 마음의 근원으로 귀결시키는 것이 성자들의 가르침의 특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사 우리가 어디 공장에 가서 일을 한다하더라도 할 일이 생기면 마땅히 해야겠지요. 부처님 법은 절대로 인연을 소홀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인연 따라서 최선을 다하고 남보다 훨씬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상황에 임해야 합니다.


 일본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풍요로운 기술문명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 사상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네들은 불교가 아주 체질화가 되어 있어요. 저번에 고베의 대지진때 신문을 보니까 그 고도에서 사람들이 굉장히 침착하고 질서 있게 남보다 앞서 구출되려고 서두르지 않는 모습을 보고 미국 사람들이 아주 찬탄을 하고 박수를 보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봤습니다마는 그 사람들은 불교가 몸에 배어 있어서 남이 보나 안 보나 매사에 성심을 다합니다. 그것은 부처님이라 하는 진리의 실체를 그들이 여의지 않고 산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를 잘 믿는 분들도 역시 하느님을 항시 여의지 않고 삽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주의 실체 아닙니까. 우리가 불교도라 해서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가질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 어디에나 안 계시는 데가 없고 또는 능하지 않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진리인 동시에 우주의 실상입니다. 따라서 우선 그 개념으로 본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법신이라, 석가모니가 나오고 안 나오고 관계없이 진리 자체인 부처님은 바로 우주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석가모니는 인간으로 해서 진리를 깨달았을 뿐인 것입니다. 예수도 사람으로서 우주의 진리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주의 도리를 깨달으면 곧 우주와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그 때는 하나님이라 부르나 무엇이라고 부르나 상관이 없겠지요. 지금은 세계화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그리고 경제는 벌써 세계화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다국적 기업 같은 것은 우리가 싫으나 좋으나 세계화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 사상적으로 교류하지 않을 수가 없고 인간적으로 교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다종교ㆍ다민족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지금은 사상의 혼란기입니다. 사상이 혼란스러우면 도덕도 혼란스럽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에서는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는 통일원리가 필요합니다. 그 지도 원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21세기의 지도 원리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그 원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고 이끌어간다고 할 때는 그것에 맞는 철학이 우리 불교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느끼면서 참선 문제도 생각해야 됩니다. 참선은 그러한 우주의 참다운 진리를 순간도 떠나지 않고서 공부하는 게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진리란 것이,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면 어려운 것이겠지만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기 때문에 그저 마음의 도리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마치 기차가 레일을 바로 따라가야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전복되지 않듯이....... 우주의 도리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성자의 진리란 것은 우주의 궤도(軌道)입니다. 우리가 성자의 길을 따르지 않는 것은 우주의 길에서 탈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이 우리도 역시 우주의 도리에 따라야 살기가 편한 것입니다. 인간도 하나의 자연이니까. 우주의 도리란 무엇인가? 바로 우주는 하나의 생명이고 하나의 동일체입니다. 천지우주는 나와 더불어서 한 뿌리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우리들도 모두 하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도리에 따르는 것이 참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은 중생의 그릇 따라서 하신 방편법문도 있지만 참선만큼은 바로 직설(直說)로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 즉심시불(卽心是佛) 일체종지(一切宗旨)의 근본성품(根本性品)이 부처다, 따라서 모든 여러 가지 사설을 다 배제하고서 그냥 바로 직통으로 우주의 핵심 진리로 들어간 것이 참선 공부입니다.


그래서 여러 방법으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사 외도인 들이 하는 그것은 모양은 가부좌도 하고 그럴듯하지만은 그들은 인과도 믿지 않고 또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합니다. 명상을 하고, 참선을 하면 기분도 좋아지고 힘도 나고 건강에도 좋다하는 정도로 하나의 유위공덕, 자기 이익을 위해서 계산부터 하는 그런 선은 진정한 참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선 공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한테 복이 온다거나 재물이 온다는 따위는 생각조차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일념(一念), 부처가 되면 그 어떤 복락도 그것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가볍게 생각할 때는 지금은 현대화 시대니까 생활불교를 해야 할 것인데 생활은 어떻게 하고 참선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참선을 하는 것이 생활불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참선이라는 것은 근본도리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근본도리에만 따라 살면 남하고도 틀릴 일이 없고 집안도 화목하게 되고 또는 국가 간이나 민족 간에도 화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동일한 생명이라, 이렇게 생각하고 참선공부를 한다면 자기 몸이 어디에 있으나 무슨 일을 하던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간에 모두가 다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증도가(證道歌)에 보면 그냥 가부좌 틀고 앉는 것만 참선이 아니라 행주좌와(行住坐臥)라, 앉으나 서나 모두 참선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본체를 여의지 않아야 그렇게 됩니다. 가사 우리가 밤에 잘 때도 삿된 생각이나 하고 텔레비전 같은 것에 정신을 팔고 잠이 들면 잠 잘 동안에 별별 꿈을 다 꾸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에 몇 시간을 자도 몸만 피곤하고 휴식은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는 순간에 마음을 정리하고 우리 생명의 고향이요 일체 진리의 고향인 부처님을 생각하고 잠이 든다고 생각 할 때는 잠자는 그 순간에 우리 마음은 부처님 쪽으로 지향을 합니다. 마치 시골들에서 논에 물꼬를 낼 때에 물꼬를 내는 대로 물이 흘러가듯이 그와 똑같이 우리가 자는 그 순간에 마음의 코스를 부처님한테로 고정 시키고 잔다면 우리 의식은 잠들어도 잠재의식은 부처님 쪽으로 끊임없이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꿈도 꾸지 않고 몸도 개운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법은 모든 면에서 다 편안한 것입니다. 이 참선 공부도 동양권의 대승불교에서(중국, 일본, 한국 등) 하는 참선법이 최상승법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이 말은 석가모니만이 천상천하에 제일 높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부처님이고 하느님입니다. 다만 자기가 번뇌에 가려서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그렇게 느끼고 공부를 해야 이른바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가장 높은 최고의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삼종사선(三種邪禪)이라, 삿될 사(邪)자, 고요할 선(禪)자입니다. 참선을 해 가는 데는 장애가 많이 있습니다. 그 장애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 또 어떤 것이 나쁜 방법인가, 이런 것도 알아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참선은 선방에서 앉아서 하는 것만이 참선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우리 마음이 진리의 고향인 부처님한테 가 있을 때는 참선인 것입니다. 선방에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부질없는 망상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선이 못됩니다. 꼭 부처님만 부르고 ‘이뭣꼬?’ 화두만 든다고 참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사 하느님을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생명의 실상이요 우주만유의 본체인 진여불성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을 부르나 ‘이뭣꼬’를 하나 ‘옴마니 반메훔’을 외우나 다 참선인 것입니다. 참선은 좁은 의미가 아니라 훌훌 털어 버리는 넓은 의미입니다. 참선은 부처에도 착(着)하지 않고 조사에도 착(着)하지 않습니다. 오직 진리에 따를 뿐입니다.

 

삼종사선(三種邪禪)이라, 세 가지 삿된 참선을 말하는 것인데 그 하나가 암증선(暗證禪)이요, 그리고 문자선(文字禪)이라. 오직 문자나 이론적인 개념으로만 따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야호선(野狐禪)이라, 들 야(野)자, 여우 호(狐)자. 여우란 놈은 재주와 꾀가 있어서 자기가 필요할 때는 세 개의 구멍을 판다고 합니다. 구멍을 한 개 파놓으면 적들이 침범하면 바로 잡히니까 세 개를 파놓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피한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여우 모양으로 잔꾀를 부려 미처 못 통하고 통했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주가 좀 있고 위풍도 좀 갖추고 큰 소리 치면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도인처럼 보이기도 하겠지요. 못 통했으면서 통했다고 하고 증명하지 못했으면서 증명했다고 거짓말 하는 것이 야호선, 즉 여우같이 삿되게 하는 참선입니다.

 

먼저 암증선은, 부처님 가르침이나 조사 스님들 가르침에는 참선하는 방법과 진여불성 자리를 증명해 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극명하게 밝혀 놓았는데도 게으른 사람들은 책도 보기 싫어하고 더구나 불경이 한문으로 되어 있는지라 보기가 좀 어렵고 하니까 그저 화두만 들고 다른 것은 다 무시를 해 버립니다. 우리 선방에서도 전혀 경을 못 보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해서, 물론 정진 할 때 경을 보면 방해가 되는 수가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부처님 경전은 소중한 생명의 글입니다. 다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금옥 같은 글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서나 훌륭한 선지식들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서 덮어놓고 하는 참선을 암증선이라 합니다.


그렇게 암증선을 하면 자기 공부가 얼마나 진전 되었는지 스스로 점검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 놓으면 섣부른 걸 가지고 다 되었다고 교만심을 부리기도 하겠지요. 선지식들의 말씀도 곧이듣지 않고 남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할 때는 틀림없이 아만심(我慢心)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는 겸허하게 앞서간 선배들, 선지식들, 부처님 경전들을 충분히 참고로 해서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그 말씀들은 모든 중생들이 성불에까지 이르는 길을 명료하고 소상하게 밝혀 놓은 길잡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길을 게으름 부리고 업장이 많으면 더디게 갈 것이고 부지런하고 업장이 가벼우면 훌쩍 뛰어 빨리 갈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그런 길을 무시하고 외면할 필요는  절대로 없습니다. 따라서 암증선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경전도 많이 보시고 특히 참선에 관한 여러 가지 책들도 보고 선배들에게 묻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암중모색하는, 모르면서 헤매는 암증선을 피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문자선(文字禪)이라, 참선이라 하는 것은 실제로 마음을 닦아야 하는 것인데 경만 많이 보고 이론적인 쪽으로 너무 치우쳐서 실지로 참선을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아무리 바빠도 조석으로 한 삼십분 정도는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갈 때는 자기 몸뚱이마저 버리고 가지만 오직 생전에 닦은 법력만은 가지고 갑니다. 이것이 우리한테는 가장 큰 재산입니다. 따라서 평소에 조석으로 삼십분이면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정도면 그렁저렁 헛생각도 하고 그냥 지나가 버리는 그런 시간입니다. 여기 젊은 스님들도 있지만 이 분들은 하루에 다섯 시간도 못 잡니다. 재가 불자들도 하루 다섯 시간 정도 자면 충분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스님들은 안자고 몇 달이고 몇 년도 배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 우리 본성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우리가 정작 의지를 가지고 한다면 능히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바구라(Vakkula)존자라, 바구라존자는 부처님 십대 제자 중의 한 분입니다. 그 분은 140세를 사신 분인데 장수 제일 바구라라, 그 분은 자기 평생에 한 번도 누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장좌불와(長坐不臥)라, 항시 앉아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요새 장좌불와 하는 사람들을 보면 벽에 기대기도 하고 합니다마는 그 분은 한 번도 벽에 기대지도 않고 오로지 앉아서만 지냈다고 합니다. 장수제일(長壽第一)의 바구라존자는 음식도 하루 한 끼만 먹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또 무병제일(無病第一)이라, 승려가 되어서 140세까지 살면서 한 번도 앓아누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 할 때는 그렇게 무리를 하면 몸이 어떻게 당해 낼 것인가, 신경통도 생기고 영양실조로 쇠약해져서 쓰러지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무병제일(無病第一), 장수제일(長壽第一)의 바구라 존자, 그 분은 그와 같이 평생을 앉아서 하루 한 끼만 먹고도 무병하게 장수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한테 들어있는 부처님 기운, 우주의 정기 에너지는 무한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원자력 같은 것은 광파(光波)의 속도로 초속이 30만km나 되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훨씬 더 고성능의 기운이 우리에게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불성에 들어있는 그 기운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대승신앙은 우리한테 들어있는 무한의 공덕을 믿는 것입니다.


불경(佛經)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들어있는 그 무한의 공덕을 믿으면 바로 “즉시입필정(卽時入必定)”이라, 그 믿음으로 바로 선정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나한테 있는 무한력을 믿으면 즉시에 삼매에 들어간다는 것인 데도 못 믿으니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것은 성자의 말씀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문자도 많이 배우고 불경도 많이 봐야 되겠지만 참선을 해서 우리 마음을 자꾸 맑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하신 것처럼 반야심경 한 편을 보더라도 참선 한 철하고 볼 때와 두 철하고 볼 때와는 해석이 다릅니다. 똑같은 법문이지만 성자의 법문은 우주의 본질을 말한 법문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면 정화된 만치 해석을 달리 합니다.


참선을 오랫동안 하고서 경을 보면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고 평소에 풀리지 않던 까다로운 문제가 자면서 꿈속에서도 문득 풀려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일구월심으로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란 것이 원래 뿌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풀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도 젊었을 한 번은 꿈을 꾸었는데, 도륜 스님이라는 도반하고 꿈에 어디를 가는데 아주 장엄한 궁전이 나왔어요. 그 궁전 앞에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 문지기가 문 앞을 가로 막고 서서 자기가 묻는 말에 답을 못하면 못 들어간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물어보라고 하니까 저한테 먼저 묻기를 “지옥이 어디 있는가?”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더라면 그때 당시는 삼십대도 미처 못된 나이라 선명한 답을 못했겠지요. 그런데 꿈에서는 아주 명쾌하니 “혜안관시지옥공(慧眼觀時 地獄空)”. 이렇게 대답이 나온단 말입니다. 혜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은 공(空)이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질문에 그 대답이 나오기가 어려웠을 텐데 꿈에서는 아주 명쾌하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투철하게 혜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지옥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혜안관시지옥공(慧眼觀時地獄空)”이라, 지옥이라는 것이 우리 중생의 어두운 눈으로 봐야 있는 것이지 정말로 맑고 투철한 마음으로 보면 지옥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무던하게 부처님 생각하고 정진하다보면 이런 때 신기하게 꿈에도 나올 수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불교를 안 믿는 분도 고도의 수학문제 같은 것을 골똘하게 생각하다 보면 꿈에 그 문제가 풀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정신이라는 것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게 무한의 힘이 있는데도 우리는 아주 조금밖에 못 쓰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 세포가 백억 개가 넘는다고 하지마는 결국은 십분의 일도 못 쓰고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사상은 뇌 세포 문제가 아니라 무한의 능력을 내포해 있는 것이고 꼭 인간의 뇌에만 그것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정기는 우주에 충만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성자들은 꼭 뇌 속에 들어있는 뇌세포만 가지고 이래저래 쓰는 것이 아니라 우주 에너지를 그대로 끌어다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허상(虛相)과 법상(法相)이 나옵니다. 허상 이것은 부질없는 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않고 한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허상(虛相)과 법상(法相)을 구분 못합니다. 법상은 차근차근 챙기고 허상은 그냥 부정을 해 버리면 되는 것인데, 그 구분을 못하면 이래저래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이나 선지식들 말씀을 참고로 해서 암중모색하는 그런 선은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문자만 따지고 실수(實修)하지 않는 그런 문자선도 경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전을 대할 때도 적어도 그 경을 보기 전에 다만 몇 분이라도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고 참선을 하고 봐야 경전의 뜻과 내용의 갈래가 잡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경장과 논장을 다 외운다 해도 그것이 갈래가 안 잡히고 통일이 안 되면 자기 것이 못 됩니다. 이른바 문리(文理)를 알아야 할 것인데 문리를 모르면 가닥을 못 잡습니다. 참선과 더불어 해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하나하나 가닥이 잡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야호선(野狐禪)이라, 여우같이 교만한 짓은 정말로 우리가 피해야 됩니다. 기독교 사회나 불교 사회나 여우같은 무리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 놓으면 자기도 망치고 남도 망칩니다. 한 소경이 무수 소경을 인도하다가 수렁으로 몰아놓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불경에도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일맹인중맹(一盲引衆盲)이라, 한 소경이 많은 소경을 데려다가 한 함정에 빠져 죽는다는 얘기지요. 그것은 잘못된 스승이 이끌면 그리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을 지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두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잘못 지도한 사람은 불교 말로 병도사(病導師)라 그럽니다. 우리 중생을 병들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법대로 여실하게 말하고 증명하지 않고서 꼭 자기 의견을 보태서 함부로 말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남을 지도할 때 병도사(病導師)를 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 법을 말할 때 자기가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꼭 그대로 옮겨주고 자기가 정리한 것만 남한테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선(禪)의 삼종병(三種病) 과 팔재환 (八災患)



그 다음에 선(禪)의 삼종병(三種病)이라, 선에는 세 가지 병이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미도주작(未到走作)이라, 미처 이루지 못하고 이럴까 저럴까 방황하고 헤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력을 다하고 부지런히 노력해서 하루 빨리 부처가 되어야겠다는 분신(奮迅)은 좋습니다마는 그렇게 공부는 별로 않고 기분만 앞서서 빨리 도인 행세하고 싶고 남 앞에 나서고 싶어서 서둘러서 가는 것을 미도주작이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만 바쁩니다. 참선할 때 마음이 차분해야 호흡도 조용해집니다. 호흡과 참선은 중요한 상관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호흡법도 중요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도 초기에는 중생을 제도 할 때에 부정관(不淨觀)이라, 우리 몸뚱이는 모두가 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부정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죽으면 썩어서 문드러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더러운 것뿐이다. 우리가 죄업을 짓는 원인은 대체로 자기 몸뚱이를 금 쪽같이 아끼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이렇게 부정하고 더러운 몸뚱이를 아끼고 말고 할 것이 없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부정관입니다. 그런 관법(灌法)이 있고 또 한 가지는 호흡관(呼吸觀)이 있습니다. 호흡수를 헤아리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그렇게 해가면서 참선을 하는 것인데 호흡법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도의 요가수트라 같은 것은 주로 호흡법을 수행으로 하는 방법인데, 결국 참선하는 자세를 올곧게 만드는 행법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마음이 산란스러워서 참선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은 참선하기 전에 얼마 동안이라도 호흡을 고르게 하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호흡을 고르게 하려면  되도록 숨을 느리게 쉬고 들숨과 날숨을 조절해서 될수록 들숨보다 날숨을 길게 쉬어야 합니다. 또는 유식(遊息)이라 해서 호흡을 오래 멈추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호흡이 저 아래 단전까지 쑥 들어가서 마음이 차분해지고 호흡도 점점 느려져서 차근차근 참선이 익어지면 그때는 자기가 숨을 쉬고 있는지 없는지도 느끼지 못하는 단계가 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호흡이 딱 끊어져 버립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자기 호흡이 끊어질 정도로 숨결의 고요함을 느껴야 됩니다. 그러면 지식(止息)이라, 지식(止息)이 되어야 참다운 삼매에 들어갑니다. 그와 같이 호흡은 우리 마음의 상황 따라서 그것에 상응된 문제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은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자기 인연 따라서 해야 되지만 잘 안 되는 경우는 처음 몇 분 동안을 자기 호흡을 다스리고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하나의 방편으로 중요합니다. 따라서 너무 서두르지 말고 해야 합니다.


다음이 이도주착(已到走着)이라, 공부가 무던히 되어서 재미가 붙는다는 말입니다. 몸과 마음이 텅 비어 오고 지적인 면에서도 그 전보다 훨씬 명석해지고 그 만족감에 이만하면 되었다 싶어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린단 말입니다. 그것이 도인의 경지가 아닌데 몸과 마음이 좀 개운해지면 그만 그 자리에 집착을 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공부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도주착(已到走着)이라 합니다. 이미 어느 경계에 이르러 그것에 머물러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투탈무의(透脫無依)라, 투탈무의는 아무 것에도 의지 할 바 없이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하고 텅텅 비어있다 이렇게 너무나 공(空)사상에 젖어서 공에만 치우치고 다른 것에는 조금도 의지를 두지 않는 것이 투탈무의입니다. 따라서 이런 세 가지 참선병을 치유하셔야 합니다.


또 참선에 있어서 팔재환(八災患)이라, 여덟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참선하다 보면 쑥쑥 잘 나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도 좋고 신심도 있고 또 방법도 잘 알지만은 그렇다고 그냥 잘 나가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전생에 지은 번뇌도 있고 금생에 잘 못보고 배운 습들도 있어서 그런 것들이 걸려서 장애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런 때는 이것이 바로 장애들이구나 하고 바로 알고 극복을 하셔야 됩니다.


팔재환은 어떤 것이고 하면 우(憂)라, 우리는 지금 닥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공연히 지어 근심을 합니다. 가까운 인연이 죽지나 않을까, 사업이 망하지 않을까, 내 자식들이 잘못되지 않을까 등등으로 필요 없는 걱정을 자꾸 많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 자체가 그러한 분별시비를 끊임없이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사회활동을 하다보면 자연히 부질없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그런가 하면 또 남이 나를 칭찬할 것인가, 큰 상을 받을 것인가, 이런 생각도 합니다. 이것은 기쁠 희(喜)자, 희(喜)라. 그 다음은 고(苦)라, 여러 환경적인 요소가 춥고 덥고 또 너무 편해도 혼침이 와서 괴롭고 따뜻하고 안락하면 혼침이 더 빨리 옵니다. 추우면 추워서 따뜻한 것을 바라는 망상이 나오고 이런 것들이 다 고(苦)에 해당됩니다.


그 다음은 찾을 심(尋)자, 심(尋) 이것은 거치러 운 분별을 심으로 표현하고 살필 사(伺)자, 이것은 조금 더 미세한 분별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자가 되어서 우주를 통관하는 하나의 진리, 그 자리를 보기 전에는 항시 망상이 나옵니다. 인생과 우주의 근본자리인 진여불성을 견성해 버려야 망상이 끝나지 그전에는 공부를 좀 했다하더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항시 다소간의 망상이 나옵니다.


따라서 거치러 운 분별인 심(尋) 또는 미세한 분별인 사(伺), 여기에서 거친 분별은 바로 근래에 당한 분별이고 미세한 분별은 과거 어렸을 때 또는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그런 일들이 자꾸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평소에는 잊고 있었던 것들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마치 연기처럼 망상이 피어나옵니다.


우리가 생활 하면서 세속적인 탁류에 휩싸여 같이 흘러 버리면 모르는데 세속적인 버릇들과 대항해서 성불의 길로 갈려고 생각할 때는 마치 시냇물로 비유하면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만 장애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걸리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하면서….


 이와 같이 분별시비가 걸리고 몸이 피로하면 또 혼침이 오고…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께서 나중에 참선을 오래 하시게 되면 가급적으로 활동도 좀 줄이고 말도 줄여서 에너지 소모를 막아야 합니다. 에너지를 너무 소모하면 머리도 흐릿해지고 잠도 더 빨리 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할 때는 될수록 불교 전문술어로 말하면 신구의삼함(身口意三緘)이라, 석 삼(三)자, 봉할 함(緘)자. 될 수록 활동을 적게 하고 말도 적게 하고 뜻으로 헤아리지 않고 이 셋(신ㆍ구ㆍ의)을 닫아버리면 참선하기가 쉬운데, 그렇게 못하면 어렵습니다.


저도 옛날에 혼자 공부하다가 장작을 패보기도 하고 지개 지고 나무도 해보고 그러다가 너무 과로해서 도리어 공부에 장애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와 같이 너무 피로하게 일을 해도 참선 공부에는 손해가 되니까 참선 할 때는 모든 생활을 너무 긴장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긴장하면 그만치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니까 몸과 마음을 느긋하게 조절해야 됩니다.


앞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일거일동(一擧一動)이 사급취완(捨急取緩)이라, 하나하나의 행동을 느긋하게 할 것이지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분별 시비를 여의고, 그 다음에는 입식(入息)이라, 우리가 들이마시는 숨입니다. 출식(出息)은 내쉬는 숨이고, 참선을 오래 하신 분들은 짐작을 하시겠습니다마는 호흡이 장애가 됩니다. 호흡이 잘 안되어서 공부가 잘 못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던하게 오래 하다 보면 어느 땐가는 자기 호흡을 스스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고요해지는 경계가 옵니다. 목과 머리가 툭 틔어서 온몸이 어느 한 곳 막힘없이 시원한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상당히 오랫동안 수련을 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초기에는 숨 쉬는 호흡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방이 따뜻하면 한 대로 코가 막히고 추우면 또 감기 같은 질환이 공부를 방해합니다. 축농증이 있는 사람들은 다 고쳐 가지고 참선을 해야지 그냥 앉아 버티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따라서 호흡 즉 들숨, 날숨 이런 숨들이 자기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까 말한 사선정(四禪定)에서는 호흡이 딱 끊어지는 것입니다. 호흡이 끊어지면 그 때는 통신호흡(通身呼吸)이라, 우리의 생명 파장이 법계로 들어가서 우주의 순수 에너지와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자의 경지입니다. 호흡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번뇌가 많으면 많을수록 거칠고, 번뇌가 적으면 적을수록 호흡이 고요해서 공부도 그것에 정비례해져 가다가 나중에는 딱 정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복식호흡, 아랫배 단전으로 하는 호흡에서 더 나아가서 통신호흡(通身呼吸)이라, 스스로는 느낄 수 없으나 몸 전체가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주호흡, 법계호흡이라. 그 때는 우주의 파장과 맞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조금도 자기 몸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단계가 되면 삼매에 들어 신통 자재할 수가 있겠지요.


요가수트라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 시간 동안 호흡을 멈추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손가락 하나 위에다가도 자기 몸을 세울 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은 훈련하기 따라서 아주 기기묘묘한 것입니다. 서커스 같은 것도 보십시오. 훈련에 의해서 그런 고난도의 재주를 다 부리는데 하물며, 성자의 길에서 우리 마음을 수련시켜 무한의 공덕이 있는 불성까지 도달한다고 생각할 때는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아무튼 우리가 부질없이 근심하고 지나치게 기뻐할 것이 없습니다. 젊었을 때는 참선하다가도 큰 소리로 웃기도 하고 그럽니다마는 그러는 것은 참선이 깊어지지 않아서 그럽니다. 그러는 동안에 참선 기운이 도망가고 맙니다. 될수록 고요한 기운이 세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합니다. 이른바 보임수행(保任修行)이라, 이렇게 해야 우리 공부가 차근차근 익어집니다.





선정십종공덕(禪定十種功德)


그 다음에는 선정십종공덕(禪定十種功德)이라, 경에 보면 참선을 하면 많은 공덕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무량공덕이 있으나 간추려서 열 가지로 정리합니다.


제일의 안주의식(安住儀式)이라, 이것은 우리가 참선을 하면 항시 점잖은 행동을 취한다는 말입니다. 거친 말과 행동이 가라앉고 남에게 나쁜 말도 하지 않게 되며, 오직 우주의 도리, 참다운 진여불성에 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그것에 가까워지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몸도 마음도 안정이 취해지고 또는 부당한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생활을 위해서 장사를 하더라도 그것이 나와 남을 위해서 유익한 것인가, 설사 돈을 많이 번다하더라도 자기와 남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당한 행동을 취하게 되는 이것이 안주의식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행자경계(行慈境界)라, 이것은 자비심이 절로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비심을 안 나오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나와 남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본래 한 생명에서 나온 한 몸이요, 우주는 결국 동일률(同一律)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생각하고 공부를 해 나간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비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자비스러우며 용서도 잘 하는 것입니다.


제 삼에는 무 번뇌(無煩惱)라, 번뇌가 없다는 말입니다. 쓸데없는 생각이 번뇌 아닙니까, 진리에 입각해서 항시 진리만 생각하고 진리에 따라서 정화가 되고 하는 사람들은 번뇌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선공덕을 무 번뇌라 하고,


제 사에는 수호제근(守護諸根)이라, 이것은 눈ㆍ코ㆍ입, 우리가 보는 시각ㆍ청각ㆍ후각 등은 몸에 문제가 생기면 온전치 못하게 됩니다. 물론 병적인 것도 있겠지마는 참선을 하면 이런 것이 다 풀리는 것입니다. 눈이 나쁜 사람들도 참선을 많이 하면 시력과 청각이 밝아집니다. 따라서 칠, 팔십이 되도록 끝끝내 참선한 사람들은 늙어도 노소를 별로 타지 않습니다.


수호제근(守護諸根), 이것은 시각ㆍ청각ㆍ후각ㆍ미각 등 이런 것들이 온전하게 보호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큰스님들은 중생제도 때문에 항시 무리를 많이 합니다. 힘든 데를 가시기도 하고 묵언하고 싶어도 말을 해야 하고, 할 수 없이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니까 무리를 해서 몸을 상하게도 되지요. 그렇지 않고 선방에서 공부만 하고 지낼 수 있다면 항시 병 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오에는 무식희락(無食喜樂)이라, 먹지 않아도 기쁨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일반 사람들이야 만반진숙에 맛있는 음식으로 기쁨을 느끼겠지만, 공부하는 사람들은 참선하는 맛이 음식에서 느끼는 맛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몸과 마음도 개운하고 평소에 몰랐던 것도 다 알아지고 항시 컨디션이 가볍고 좋은데 무슨 음식에 마음이 가겠습니까. 많이 먹으면 먹은 만큼 부담스럽고 몸도 무거운 것입니다. 음식은 적게 먹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식으로 먹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세제불일종(三世諸佛日種)이라, 삼세제불은 다 하루 한 끼만 자시는 것입니다. 원래 선방도 백장청규에서 보면 아침에 죽 조금 먹고 낮에 한 끼 먹고 오후에는 불식(不食)을 다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변하고 너무나 환경도 오염 되고 해서 건강을 유지하기가 어려우니까 조금씩 먹는 것은 무방하겠습니다마는 가급적이면 적게 먹는 것이 우선 비만증을 방지하고 소식(小食)을 하면 소화도 잘되고 또 피도 맑아지며 머리도 훨씬 더 총명해 집니다.


저번에 신문을 보니까 텍사스 주립 대학에 있는 교수가 한국 사람인데 올해 64세가 된 사람입니다. 그이가 노화방지 위원장인데 그분은 일반 교수인데도 하루 한 끼만 먹는다고 했어요. 오후 두시에 한 끼만 먹는데도 몇 십 년을 한 번도 아파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장수의 비결은 결국 소식(小食)이라, 적게 먹는데서 장수의 비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정확한 실험과 데이터를 낸 것이니까 거짓말이 아니겠지요. 그런 것은 참고로 해야 할 문제입니다. 나이 많은 분들도 억지로 배고프게 할 필요는 없다하더라도 가급적이면 미식을 마십시오. 고기나 기름기 많은 음식들은 문명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 현대 병리학자들이 다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그 다음 육에는 원리애욕(遠離愛慾)이라, 이성간의 욕심이 애욕 아닙니까. 공부하는 분들이 가장 깨기 어려운 것이 역시 이성간의 애욕입니다. 우리 스님이라 해서 애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일수록 애욕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간 주의하고 조심하며 공부를 해야 이루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고 어떤 상황을 함부로 취하고 조금만 방심하면 걸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보리수하에서 성불하실 적에 마지막 순간까지 삼천녀(三天女)라, 삼천녀가 나와서 방해를 합니다. 삼천녀는 결국 우리 마음의 애욕의 상징이 되겠지요. 그와 같이 욕계 중생은 몸을 받은 이상 그런 욕심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남ㆍ여 이성간의 욕심, 음식 욕심, 또는 잠 욕심, 이것이 욕계의 세 가지 큰 욕심이고 그 나머지의 부수적인 욕심은 한도 끝도 없는 데 가장 큰 것이 이성욕(異性慾)ㆍ수면욕(睡眠慾)ㆍ식욕(食慾)입니다. 그러나 다른 천상에는 이런 욕심이 없습니다. 우리 욕계에만 있는 것입니다. 욕계를 떠나 버리면 그런 욕심은 없어집니다. 따라서 색계(色界)라, 눈에 보이는 세계만 따지는 분들은 색계나 무색계를 다 무시 합니다. 그런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어디 실지로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합니다마는 그러는 우리 인간도 제법공도리(諸法空道理)에서 보면 인간 세상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지금 가상(假相)으로 꿈같이 존재하는 것이지 실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불공을 모실 때에 수월도량(水月道場)이라, 수월이란 물 수(水)자, 달 월(月)자, 물속에 있는 달은 실재가 아니라 달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듯이 우리가 불공을 모시는 절이나 모든 도량이 물속에 달그림자처럼 사실로 있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도 달 속에 비친 그림자 같이 또는 허깨비같이 가상(假相)으로 존재(存在)하는 것을 우리는 잘 모르고서 곧이곧대로 참말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인간은 실존(實存)이 아닙니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soren Aabye 1813-1855)같은 사람도 아주 훌륭한 실존주의 철학자이기 때문에 굉장히 좋은 말을 많이 했습니다. “참다운 실존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 영원적인 차원에서 참다운 실존이 있는 것이지 다른 모든 것들은 항시 무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달 속에 비친 그림자와 마찬가지고 또 색계나 무색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있기는 있습니다. 결코 허무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도 허망(虛妄)한 것이지만 이와 같이 있지 않습니까. 내일 죽을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한시도 멈춤 없이 변화무상하고 허망하지만 이렇게 인간이 존재하듯이 색계도 존재합니다. 색계에 올라가면 남녀 이성은 없습니다. 우리 사람 같은 존재만이 남녀가 결합을 합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성한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신부나 수녀, 비구ㆍ비구니처럼 독신을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결혼을 하지 말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오로지 본래의 자기, 신성한 본래의 생명을 찾는다고 할 때는 가정을 가져 놓으면 분명히 장애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자기의 아들이나 딸도 참다운 종교를 만나고 친척이나 가까운 인연들도 참된 종교생활을 하고 또 열심히 일해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그렇게 하면 공덕이 되겠지요.


원리애욕(遠離愛慾)이라, 우리가 참선을 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애욕이 희박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차츰 희박해지다가 우리가 불성광명(佛性光明)의 참다운 진리를 체험한 뒤에는 완전히 애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제 칠에 가서 수선불공(修禪不空)이라, 우리가 제법(諸法)이 공(空)이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이다, 물질도 공이고 모두가 공이다, 이렇게 공 도리를 말로 너무 많이 들어 놓으면 마음이 허무해져서 허무주의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참선을 해보면 마음은 비어 가지만 그냥 빈 공간이 아니라 그 속에는 무량공덕으로 환희심이 충만해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텅 비어오면 거기에 정비례해서 환희심이 더욱 더 증가가 되어옵니다.


따라서 수선불공(修禪不空), 참선을 닦으면 허무주의적인 그런 공(空)은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환희심과 공덕이 충만하기 때문이지요. 이론적으로 공을 느끼면 허무주의로 빠지기 쉽지만 참선을 한 사람들은 공에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제 팔에 가서 해탈마견(解脫魔羂)이라, 우리가 살다보면 남한테 원망 될 일을 하기도 합니다. 과거 전생에 남을 핍박한 일도 있었을 것이고, 금생에도 어쩌다 더러 섭섭하게 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모두가 다 우리 운명에 장애가 됩니다. 금생에 자기는 무던히 잘 하고 사는데도 어려움을 당하고 더러는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는 경우는 과거 전생에 우리가 지은 업장이 장애가 되어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런 것도 우리가 참선을 하면 그 원인들을 차근차근 풀어갈 수 있겠지요.


 업장을 많이 지어놓으면 정업불멸(定業不滅)이라, 그 업을 참선으로 다 풀어 버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웬만한 것은 다 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참선하는 그 마음은 바로 생명의 실상인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은 자기를 정화시키고 우주를 정화시키고 다른 사람을 정화시키기 때문이지요. 가사 자기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는데 참회는커녕 더 욕심을 부리고 이기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더욱 더 미워하고 원망이 깊어지겠지요. 그러나 그 사람이 정말로 인간적으로 충실하고 도덕적으로 바른 행동을 취하고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 훈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그 사람에게 옮겨가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면 그 순간에 우리 몸의 산소는 더욱 더 치성(熾盛)해지고 욕심을 부리면 우리 몸에 있는 수소는 더욱 치열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자가 말한 것입니다. 우리 생각 하나하나가 다 물질로 화(化)하는 것입니다. 에너지라는 것이 결국은 물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지독하게 미워하면 그 미워하는 것이 쌓이고 쌓여 암이 되고 병이 되고 한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동성애라든가, 너무 애욕적으로 나간다든가, 우주의 도리를 벗어나면 그것이 에이즈 균이 되고 천재지변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에이즈 균 같은 것은 정말 무서운 것 아닙니까. 물론 앞으로 백신을 발명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불확실한 것이고,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바로 사는 것입니다.


제 구에 가서 안주불경(安住佛境)이라, 즉 부처님의 경계, 천지우주가 하나라는 영생불멸한 공덕 가운데서 항시 편안하게 머문다는 말입니다.


열 번째가 해탈성숙(解脫成熟)이라, 이렇게 차근차근 부처가 되어 가니까 모든 걸림으로부터 차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참다운 자유는 성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를 부르짖는 민주주의도 역시 우리 정신적인 수양과 더불어서 해야지 도덕은 제쳐 두고서 우선 제도적인 자유 그것만 위해 싸운다면 그야말로 백년하청(百年河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문제는 항시 도덕이 앞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열 가지 참선공덕을 항시 생각을 하십시오. 그러면 더욱 더 참선이 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우선 내 행동이 점잖고 품위가 있어지고 평소에 독한 사람도 악심이 없어지고 부드러워져서 유연선심이 되고 또 번뇌가 줄어지고 귀도 눈도 밝아지고 이런 것만 되어도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무식희락(無食喜樂)이라, 우리가 고기 먹고 술 마시지 않아도 항상 기쁘고, 술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우리 스님 네가 고기를 먹으면 입이 다 부르틉니다.


우리 불자님들! 재가 불자님들도 되도록 고기를 드시지 마십시오. 이것은 우리한테 별로 이익 될 것이 없습니다. 항시 말씀드리지만 돼지나 소나 그런 축생들은 사람보다 훨씬 더 업장이 무거운 것인데, 업장이 무거운 세포가 사람한테 들어오면 그만치 우리가 오염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비심을 손상시킵니다. 우리는 몰라도 귀신들은 다 봅니다. 선신들은 고기 많이 먹는 사람을 무서워서 피합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데, 그것은 사람만 국한시킨 것이 아닙니다. 개와 나도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에 그네들의 고기를 어떻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것 안 먹어도 우리가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한국만 하더라도 그 전에 우리가 클 때는 일 년 내내 가야 돼지나 소고기를 한번이나 먹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농가에서도 한 달에 몇 번씩 먹는다고 해요. 그렇게 외국에서 수입해서까지 외화를 낭비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더 건강한 것도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만 생명을 다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육식을 하게 되면 우리 자비심을 손상시키고 또 악신(惡神)은 그 냄새 맡고 가까이 붙고 훌륭한 선신들은 냄새 맡고 도망가고 또는 우리 마음 닦는 공부도 잘 안되고 죽어서는 악도에 떨어지기 쉽다고 불경에 그와 같이 명문으로 나와 있습니다. 금생에 깨끗이 한 세상 지내다가 가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내외간에 화목하고 하루세끼 먹을 것을 한 끼 먹는 이웃과 나누고 그러면 살기가 참 편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노사분쟁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겠지요. 이것이 도리에 따르는 것이고 참다운 자연법입니다.


그 다음에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제가 삼명육통이란 말을 자주하는 편인데 더러는 삼명육통은 외도꾼들이 하는 것인데… 하며, 뒤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더러 있는 줄 압니다. 우리가 신통을 하려고 일부러 애 쓸 필요는 없지만 부처님 말씀에, 공부가 되면 저절로 신통이 나온다고 했단 말입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무시할 것입니까.


실지로 무수한 성자가 다 증명을 했고 지금 종교인들이 불신 받는 세상에 삼명육통을 하는 도인이 있다고 생각을 해본다면 집단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컴퓨터 문화가 기기묘묘한 재주를 다 냅니다마는 우리 불성은 그런 류가 아닌 것입니다. 컴퓨터는 인간이 입력을 시켜야 나오지만 그 보다도 훨씬 더 무한성능이 우리 불성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불성을 개발하면 그런 컴퓨터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 무한 능력 중의 하나가 삼명육통입니다. 


 삼명은 무엇인가? 과거에 통달무애라, 과거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고, 여러분들도 더러 점쟁이한테 점을 쳐 본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어렸을 때 구경해 본 기억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귀신들도 과거를 조금은 봅니다. 더러는 미래를 예언하기도 하고, 사람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본래의 영명함이 많이 가려집니다.


살면서 세속적인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분별시비가 잔뜩 쌓여서 영명한 본래 생명이 흐려집니다. 그러나 어린 사람들을 보면 더러는 이상하리만치 영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놀라울 정도로 천재적인 꼬마들이 간혹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분별시비와 삼독심을 다 떠난 도인들은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요.


우리 마음을 가장 중독 시키는 것이 삼독심입니다. 탐욕심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이 삼독심 아닙니까. 그것이 제일 무서운 독입니다. 자기도 오염시키고 남도 독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모든 병이 과거 전생부터 묻어 온 업병도 있지만 금생에는 이 삼독심 때문에 우리 몸과 마음이 중독을 일으킨다고 봅니다. 삼독심만 떠나버리면 그때는 설사 독을 마신다 해도 그 독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달마대사를 죽이려고 광통 법사나 그런 사람들이 여섯 번이나 독을 드려도 그 독이 받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곱 번째 가서는 달마 대사께서 금생 인연이 다한 고로 스스로 가셨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청정한 사람들은 독도 침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독심으로 오염되어 우리 내장이 청정하지 못한 고로 온갖 병고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우리 생리가 그만치 오염돼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주의하고 육식과 과식을 피한다면 그만큼 침해를 덜 받습니다. 그것은 생리학자나 병리학자들이 다 증명을 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삼명(三明), 이것은 과거에 막힘이 없고 또는 미래에 막힘이 없고 또 우주를 모두 본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지혜를 가리킬 때 일체종지(一切種智)라, 부처님의 지혜는 일체종지입니다. 그 말은 작은 것 큰 것 할 것 없이 우주의 모두를 다 안다는 말입니다. 그냥 본질적인 것만 아는 것이 아니라 세세한 것까지 다 안다는 말입니다.


가사 정감록의 비기(秘記)들을 보십시오. 물론 비기에도 틀리는 것이 있지만 더러는 아주 신통하게 맞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계발하면 할수록 그렇게 위대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과거를 다 내다보고 미래를 보고 우주를 본단 말입니다. 이런 지혜가 우리한테 본래로 있습니다.


정감록에만 있고 도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한테나 다 있는 것인데 우리가 계발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계발하는 작업이 바로 참선이고 그 참선법이 가장 훌륭하고 지름길로 가는 방법입니다.


참선이야말로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무한공덕을 자아내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지름길입니다. 그러면 참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까도 말씀 드린바와 같이 우리 행동을 주의해서 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우리 마음을 항시 본체인 부처님한테다가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다.


남과 얘기를 하거나 책을 볼 때나 일을 할 때나 항시 그 곳에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차근차근 걸음걸음 그것에 접근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과거에 통달하고 미래에 통달하고 동시에 자기 번뇌를 완전히 녹여 버리고.......


불교말로 하면 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누진통(漏盡通)이라, 과거에 통달무애 하는 것이 숙명통이고 또는 미래에 통달무애하고 우주를 모두 내다보는 것이 천안통입니다.


그 다음 누진통은 샐 누(漏)자, 번뇌를 다 떼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번뇌를 다 떼어 버리면 성인이 되겠지요. 과거에는 미개한 때라서 특수한 사람들만 성인이었지만 앞으로는 집단적으로 성인이 나올 때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굉장히 영리하니까, 사상적으로도 그 많은 전쟁과 반목을 통해 많은 경험을 다 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성자의 길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전쟁을 방지하고 사람으로 인한 인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성자의 길을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정보화 시대에서 정보가 교환되면 될수록 성자의 길은 더욱 더 빛날 것입니다. 그 길 밖에 다른 길은 없으니까요.


그 다음은 육통(六通, 六神通)이라, 이 육신통은 아까 말한 삼통에 다 같이 거두어져 있습니다. 천안통(天眼通)은 우주를 다 내다보는 것이고, 천이통 이것은 하늘 천(天)자, 귀 이(耳)자, 우주의 음성을 다 듣는다는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재주가 없어서 영어도 잘 못하고 영어하는 사람들 말을 잘 못 알아듣습니다마는 만약 천이통(天耳通)을 했다면 영어를 안 배워도 다 알아 듣는 것입니다. 천이통이란 그와 같이 개가 짖으면 축생의 말을 알아듣고 하는 것입니다.


타심통(他心通)이라,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타심통을 다는 못해도 사람을 척 보면 대강 그 사람을 짐작은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인격도 있으니 함부로 지적은 않지만….


그리고 숙명통은 과거를 다 아는 지혜고 다섯 번째는 신여의통(身如意通) 즉 신족통(神足通)이라, 이것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기적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정통법을 받은 분이 마하가섭이고, 그 다음 분이 아난존자인데 아난존자가 열반 드실 때에 그 열반상은 우리에게 굉장히 신심을 느끼게 합니다. 그 분은 신통을 여실하게 증명을 다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부처님의 금관을 역사들이 횃불로 불을 붙였지만 붙지를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름을 붓고 해도 불이 안 붙으니까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해서 화광삼매(火光三昧)라, 자기 몸에서 불을 내어 스스로 금관을 태우고 몸을 태워 사리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불성 가운데는 땅기운, 물 기운, 불기운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란 정말 기묘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즉 우리 불성을 가리켜 마니보주(摩尼寶珠)라, 여의주라, 온갖 것이 다 나오는 보물구슬이라고 합니다. 그런 위대한 마음을 두고서도 모르니까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금(金)을 가지고서 얻어먹는 거지라고 그럽니다. 그런 값진 보배를 가지고도 가진 줄을 모르고 하찮은 일에 생명을 낭비한단 말입니다. 금을 잔뜩 곳집에 넣어 놓고 거지 행세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무한공덕장인 우리 마음을 캐내는 작업을 하면서 사업도 하고 사회 일도 하면 훨씬 잘 될 것입니다. 우리 몸 가운데는 물과 불이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불만 생각하면 불이 되고, 물을 생각하면 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삼명육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석가모니한테 꿀릴 필요도 없고 예수한테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고 하나님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게을러서 그렇게 못할 뿐입니다.


아함경에서 하신 부처님 말씀 중에 “영생불멸하는 영생의 길은 분명히 있는데 우리 중생이 가고 안가고 하느니라.” 영생의 길은 분명히 있는데 중생이 게을러서 가고 안가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신여의통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고, 불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신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지금 원자력이 무시무시한 힘을 내지만 그 보다도 훨씬 더 무한 성능이 불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짐작을 해 보면 압니다.


다음에 누진통(漏盡通), 이것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번뇌를 모조리 다 떼어버리는 그런 신통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해탈(解脫)이라, 우리는 한사코 해탈을 해야 됩니다. 해탈(解脫)을 해야 만이 우리 삶은 완성이 됩니다. 우리 삶의 보람은 우리 스스로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가짜입니다.


우리 생명이라 하는 것은 무상한 것이어서 어느 때 갈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병들어 죽을지 사고를 당할지 또는 천재지변으로 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상한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급박한 것이 무엇인가? 가장 절박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찾는 일입니다. 참다운 자기는 바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부처가 되는 것이 우리들의 지상과업인 것입니다.


모든 번뇌의 구속을 다 끊어버리고 해탈의 길로 가야합니다. 우리는 지금 구속을 받고 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때문에 얼마나 구속을 많이 받았습니까. 또 김일성주의 때문에 우리 북녘 동포들이 얼마나 처절한 구속 속에서 고생을 합니까. 불교는 그런 구속을 다 푸는 것입니다.


관념적인 구속, 제도적인 구속을 다 풀어서 성불하기 좋은 제도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불하기 제일 좋은 제도가 바로 승가의 법인데, 진정한 승가의 법은 감투나 놓고 싸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해탈이라, 해탈에는 지혜해탈(智慧解脫)과 선정해탈(禪定解脫)이 있습니다. 지혜해탈은 먼저 이론적으로 막힘이 없게 됩니다. 우리는 이치로 해서 먼저 부처님의 경전 말씀과 선지식들이나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 따라서 기본적인 길을 알고 가야합니다. 불교 공부는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이번 법회도 성불하는 길목만은 바로 알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지혜해탈이라, 먼저 이론적으로 막히는 것을 배우고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학자들은 보통 이론적인 체계만 서면 공부를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세계에서 보면 그것은 지혜해탈에도 미처 못 간 것인데 참다운 해탈은 어림없는 것입니다. 참다운 해탈은 선정이라, 참선을 해서 우리 생리와 심리가 아울러 맑아지고 이른바 환골탈태(換骨奪胎)라, 우리 몸뚱이도 역시 정화가 되어서 나쁜 짓을 할래야 할 수 없이 돼 버려야 합니다.


공자가 칠십이 되어서 말한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이런 정도가 되어야 선정해탈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도 우주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는 정도가 되려면 평소에 우리 행동을 도덕적으로 훈련을 시켜야 하고 그와 동시에 우리 마음이 우주의 근본진리인 부처님을 여의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이라 하는 본질을 떠나지 않는 공부가 참선 공부입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무엇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주의 본바탕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 어디에 따로 있고 부처님은 극락세계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나 밖에나 어디에나 다 존재하는 하나님, 부처님 이렇게 생각할 때만이 참다운 참선공부가 됩니다. 이렇게 부지런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4. 청화 큰스님 법문집 > 3. 순선안심 탁마법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선안심탁마법회 법문요약  (0) 2011.03.04
11. 염불  (0) 2009.05.25
9.오종선  (0) 2009.05.21
8. 선.근본선  (0) 2009.05.19
7. 광명 ㆍ광명열반   (0) 2009.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