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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3. 순선안심 탁마법회

7. 광명 ㆍ광명열반

         광명 ㆍ광명열반



열반사덕(涅槃四德)


제가 말씀을 진행하는데 있어 광명이란 것을 좀 풀이를 해 드려야 다른 것을 이해하시기가 편리하실 것입니다.


'광명'이란 데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광명과 광명을 이렇게 두 번 되풀이 한 것은 우리가 느끼는 중생의 시각으로 보는 그런 광명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른바 청정 광명이라. 청정 광명은 청, 황, 적, 백이 아니요, 푸른색이라든가 또는 누런색이라든가 붉은 색이나 흰색이나 이른바 상대 유한적인 광명이 아니란 뜻입니다.

 

물질도 아니며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존재도 아닙니다. 또는 인과법도 아니니,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상대적인 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불타의 본원이며', 부처님과 일체 중생의 근본이란 말입니다. 한 번 더 읽습니다. 광명, 이것은 지금의 전기 같은 것도 광명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켤 수가 없을 것이고 이 마이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와 같이 광명의 혜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광명은 전자가 진동을 해서 이루어지는 현상이지만 그렇게만 본다 하더라도 광명은 우리에게 굉장히 큰 혜택을 줍니다. 사실 광명 없이는 우리는 곧 어두운 세계 아닙니까. 그런데 참다운 청정광명, 이것을 푸르고 누르고 붉고 또는 희고 하는 청, 황, 적, 백도 아니요, 우직 부처님이라 하는 우주의 순수생명이고 부처님의 본원이며, 일체중생 즉 사람이나 모든 존재의 근본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대승경인 범망경 전문에 나와 있는 법문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광명이라 하면 그냥 세간적인 광명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광명 이것은 세간적인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광명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처님 후불탱화를 보시면 부처님 정수리에서 빛이 나와서 그 빛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무량무변의 우주를 다 비춘단 말입니다. 후불탱화에 나와 있는 부처님 정수리의 광명이란 것은 그냥 광명이 아닙니다. 청정한 광명이기 때문에 그 광명은 바로 우주를 다 비추는 것입니다. 우주를 비췄다가 다시 부처님에게로 돌아오는 그런 상징인 것입니다. 부처님만 그럴 것인가? 우리 중생도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도 부처님 차원에서 볼 때는 똑같은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도 자기 광명이 우주를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단 우리 스스로가 어두워서 못 볼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금바라화 꽃을 들고 대중에게 보이니 그 많은 대중이 아무도 그 뜻을 몰랐단 말입니다. 오직 공부를 많이 한 마하가섭 존자만이 그것을 보고 빙긋이 미소를 띠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심심미묘한 열반법을 그대에게 전하노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열반이란, 진여불성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공부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참다운 성자가 미처 못되었기 때문에 결국은 부처님께서 금바라와 꽃을 들고 계셨지만은 손만 보았지 꽃은 안보였던 것입니다. 마하가섭만이 '아 부처님께서 진리의 상징으로 저 꽃을 들어 보이시는구나.' 이렇게 알고 미소를 지으니까. '심심미묘한 열반법을 그대한테 전하노라.'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째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보였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안보이니까 좋다, 궂다, 말을 못하고 모두가 다 벙어리 같았단 말입니다.


그 꽃은 범천왕이 부처님께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범천이 보입니까. 눈에 보이는 세계만 따지는 분들은 범천이나 천상 같은 말을 하면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말한 것이지 천상이 어디 있는 것인가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님 말씀은 거짓말이 없습니다. 우리 눈이 까막눈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중생 눈은 탐욕심이나 어리석은 마음이나 또는 분노하는 그런 삼독심에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하면 미워하는 순간 그만치 우리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욕심을 내면 그 순간 그만치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금생에도 우리는 나라는, 자기 몸뚱이가 소중하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는 자기 가족이겠지요. 자기 몸뚱이라는 생각 또는 자기 가족이라는 생각 때문에 금생 내내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우리 눈이 어두워졌다 말입니다. 시력이 2.0이요 1.5요 하지만 그런 것은 물리적으로 눈을 잰 것이지 본래 눈의 시력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래 눈은 석가모니나 예수같이 되어야 본래 눈이란 말입니다. 그런 눈을 본래는 다 타고 나는 것입니다. 다만 번뇌에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범천왕이 와서 부처님께 금색 바라화 꽃을 드렸지만은 일반 대중들은 보면서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하가섭은 범천도 보이고 꽃도 보였기 때문에 범천이 부처님께 진리의 상징으로 꽃을 드려서 들고 계시는구나. 하고 부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며 미소를 지은 것입니다.


열반이라.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열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열반이라 하면 보통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것을 열반이라고 생각들을 하는데, 그러나 죽음만을 열반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번뇌가 다 녹아버리고 나쁜 마음이 다 죽어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나쁜 마음이 다 없어져 버리면 성자가 되겠지요. 본래가 다 부처인지라. 그래서 적멸이라. 번뇌가 다 녹아버려서 조금도 나쁜 흔적이 없는, 조금도 번뇌의 움직임이 없는 아주 맑고 참다운 진리의 경계를 적멸이라 합니다.


우리가 금생에 죽으면 금생의 업장을 짊어지고 업장대로 태어나겠지요.

그러나 업장을 녹여버리면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영생불멸하는 극락세계에서 영생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또 해탈이라. 번뇌의 허물을 다 벗어버렸다는 얘기입니다. 요새 우리가 자유를 부르짖고 자유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고 하지 않습니까. 민주화도 자유를 위해서 부르짖지만 참다운 민주화, 참다운 자유는 자기의 번뇌를 다 해탈해 버려야 참다운 자유인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감옥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번뇌가 조금도 없다고 할 때는 바로 자유란 말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어서 웬만한 것은 자기 멋대로 다 한다 하더라도 역시 그런 자유는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중생은 번뇌가 있는 한 어느 누구나가 참다운 자유인이 못되는 것입니다. 번뇌를 벗어버려야 참다운 자유인입니다. 번뇌를 벗어나려면 자기라는 생각, 자기라는 아상을 떠나야 합니다. 아상을 떠나야 욕심을 버리고 진심을 버리는 것인데, 자기라는 생각을 못 떠나면 나한테 좋은 것은 욕심 부리고, 자기한테 싫은 것에는 분노심을 낸다 말입니다. 이런 마음 때문에 우리 마음이 더욱 더 어두워집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번뇌를 벗어버리면 바로 거기가 극락인 것입니다. 위없는 행복이 극락 아니겠습니까. 그 자리는 죽지 않는 영생의 자리입니다. 우리 중생은 과거 업으로 금생에 태어나고 금생의 업으로 다시 내생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영생이 아닙니다. 항시 죽었다 살았다. 나고 죽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번뇌를 벗어버리면 아까 말씀대로 중생이 불쌍해서 일부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몸을 받아 올망정, 우리가 업장에 묶여서 오지는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대체로 과거 전생에 잘 닦아서 금생에 중생이 불쌍하니까 오신 그런 분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앞으로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평화스럽게 못 됩니다.


우리 한국인에게나 미국인에게나 누구한테나 제일 좋은 선물이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제가 승려라 해서 아전인수격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명예도 필요 없고, 아무 것도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진리의 가르침이 많이 있지만은 불교의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에는 그 모든 진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다른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역시 자연주의 철학자 탈레스(Thales)라는 철인은 물을 보고서 우주의 근본은 물이다. 이렇게 말하고 헤라클레이토스(Hearkleitos)는 우주의 본질은 불이다. 이렇게 말하고 엠페도클레스(Empedokles)는 우주의 본질은 흙 기운이고 물 기운, 바람기운이고 땅기운이라고 말했습니다. 각기 철인마다 견해가 다 달랐습니다.

 

또 유물론과 유신론이 있습니다. 유물론은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 다인 것이다. 또 유신론은 물질이란 것은 결국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며 싸워 온 인류문화사를 다 수용해서 하나의 진리로 똘똘 뭉쳐서 명확하게 풀이 한 것이 부처님 진리입니다. 부처님 진리를 안다고 할 때는 자기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며 가정도 편하고 다 편한 것입니다. 천지 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다. 일원주의다. 이렇게 분명히 알아버리면 그때는 싸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상대적인 법이 있고, 이분법으로 나누어서 보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싫든 좋든 간에 불교의 진리가 세상을 다 덮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일당 천입니다. 여러분들 한 분, 한 분이 꼭 천사람, 만 사람을 제도 하셔야 합니다. 그런 의무를 여러분들은 타고 나신 것입니다. 학식은 둘째 문제입니다. 자기 행동이 바르면 말을 안 해도 저절로 통해 버리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심에 사무치면 다 통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열반이라는 것은 진여불성을 말하는 것이고, 일체존재의 근본성품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번뇌가 다 가셔버린 자리이며 또는 다시 나쁜 갈래로 태어나지 않고 해탈해 버려서 참다운 자유인 것입니다. 참다운 자유는 항상 열려 있습니다. 거기가 바로 극락이고 다시 위없는 행복입니다. 이 자리는 영생불멸의 자리입니다. 부처님같이 위대한 분은 덕이 하도 많아서 다 헤아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열반의 덕이나 진여불성에 갖추어진 덕은 불가설 불가설(不可說 不可說)이라…


이는 위대한 성자가 몇 백 년, 몇 억 년을 헤아려도 그 영생불멸한 우리 마음자리인 진여불성에 갖추고 있는 덕을 다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갖추고 있는 덕은 이와 같은 덕입니다. 이러한 덕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캐내는 것보다 더 급하고도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른 것들은 그렇게 길지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대부분 젊으시니까 잘 모르겠지만 저같이 칠십을 넘어서면 금방 금방입니다. 봄눈 녹듯이 금방이지요. 여러분들도 이윽고 그렇게 됩니다. 죽음의 물결 속에 잠시 흘러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생명을 절대로 헛되게 하지를 마십시오. 부처가 꼭 되는 것이 우리 생명의 참된 의미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가 다 헛것입니다. 재산을 모으는 것도, 나와 나의 자손과 내 이웃들이 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돈도 모으고 절도 짓고 하는 것입니다. 좋은 정치란 것도, 남과 더불어서 부처가 되기 위한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입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열반에 들어있는 덕이 한도 끝도 없는데, 우리 중생들에게 부처님께서 알아듣기 쉽게 네 가지 차원으로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한도 끝도 없는 부처님의 무량공덕인데, 따라서 이 정도는 우리가 알아야 하겠지요. 내 마음에 들어있는 부처님의 공덕이 한도 끝도 없는데, 간추리면 '상락아정'입니다. 이 항상 상(常)자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 생명이 끊어지지 않고 영생불멸한다는 뜻입니다.


현상적인 것은 무상하지만 우리 생명 자체, 근본적인 진여불성 자체는, 즉 열반은 영생한단 말입니다. 영생이라. 우리 생명이 허망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몸뚱이가 허망하고 물질이 허망한 것이지 우리 생명은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본래 없기 때문에…


예수만 영생한 것이 아니고 석가모니만 영생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가 다 영생합니다. 따라서 우리 본래 마음자리는 영생불멸하는 상(常)이고 또는 안락이라. 우리 마음자리는 영원한 행복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것이 락(樂)이라, 안락입니다. 그냥 우리 중생은 좋은 사람 만나면 기분이 좋고 물질이 많으면 좋다고들 하나, 그런 것은 모두 허망한 안락 아닙니까. 영원히 변치 않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변치 않는 참다운 행복이란 말입니다. 완벽한 행복, 이것이 락(樂)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 아(我)자라. 이것은 그냥 작고 망령된 소아(小我)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은 대아(大我)라. 대아란 무엇인가?


대아는 바로 우주를 안다는 말입니다. 불경에 보면 팔대자재아라. 어려워서 안 내놨습니다마는 이 아(我) 가운데는 팔대자재아라. 우주를 마음대로 날을 수도 있고, 모두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다 알 수 있는 지혜를 갖추고 있는 아(我)란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지혜가 과거만 보겠습니까. 또는 미래만 보겠습니까. 과거나 미래나 다 볼 수 있단 말입니다. 불경에 보면 우주에서 내리는 빗방울 수까지 헤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성자의 지혜란 것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무소부재요 무소불능이란 말입니다. 성자의 지혜는 능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지금 원자력 같은 것도 무시무시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은 유가 아니란 말입니다. 원자력도 내내야 근본자리에 가면 불성이란 말입니다. 원자력도 상당히 고성능일 것인데, 무한 성능이 우리 불성입니다.

 

따라서 그 무한 성능이 나한테 갖추어져 있단 말입니다. 성자들의 나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아(我)는 우리 같은 보통 나가 아니라, 때가 다 가셔버린 참다운 나란 말입니다. 이 가운데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 우주를 다 알 수가 있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며, 자기 몸뚱이를 공중으로 쏴 올릴 수도 있는 것이고, 삼매에 들면 자기 몸에서 불을 낼 수도 있고, 물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명대사가 일본에 갔을 때 가마솥에 불을 넣은 뜨거운 방에서 거처를 하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밑에는 쇠로 된 가마솥이기 때문에 금방 타서 죽겠지요. 그러나 사명당은 삼매에 들어서 얼어버리니까 방안에는 고드름이 달렸습니다. 사명당이 삼매(三昧)에 드는 사람이 못되었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사명당은 삼매에 들 수 있는 위대한 분이셨기 때문에,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느 사람 같으면 뜨거워 타서 죽었을 것인데, 삼매에 들어 얼음을 생각하니 전부가 다 얼음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힘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찮은 몸뚱이,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이 몸뚱이, 우리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과거 전생에 이 몸이 있었습니까? 죽은 뒤에 이 몸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금생에 잠시간뿐이란 말입니다. 하찮은 이 몸뚱이 때문에 속아서 삽니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중생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못 박혀 돌아가신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성인들이 무슨 필요로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것인가. 성자라면 그 일들을 다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자가 자기 죽음 하나 마음대로 못하겠습니까. 다만 중생들에게 이 몸뚱이는 허망한 것이고, 몸뚱이는 어느 때 어떻게 되어도 무방하며 인연 따라서 죽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우리 참 생명은 영원한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또 일반 중생들의 죄를 위해서 그런 성자를 죽게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성인들을 죽게 해 놓으면 그때는 그 나라는 전체적으로 큰 해를 받습니다. 성자의 마음을 괴롭히기만 해도 큰 해를 받는 것인데, 여러분들이 선량한 행동을 하고 있는데 나쁜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음해하고 비방하면 그 사람들은 틀림없이 해를 받습니다. 우리가 착실하고 훌륭한 행동을 하는데 그 사람들이 음해하고 비방하면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스스로 해를 받아서 잘못되고 맙니다. 그러나 선량한 입장에서 볼 때에 누구나가 잘 못 되어서는 안 되겠지마는 그것은 자기 스스로 지어서 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민족도 역시 그 당시에 그리고 예수가 돌아가신 후에 굉장히 비참한 꼴을 많이 당했습니다. 따라서 나한테 갖추고 있는 능력이 빌딩이나 하나 짓고 하늘에 있는 별을 발견하고 하는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니라, 한도 끝도 없는 힘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빌딩을 지었다든가, 무슨 책을 몇 권 냈다든가, 그런 것은 자랑거리가 못되는 것입니다. 오직 부처가 되는 것만이 자기 삶의 의의를 다 하는 것입니다. 그 외의 것들은 우리가 부처를 이루는데 있어서 방해가 된다면 손해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했을 때는 다른 사람의 성불을 위해서 공헌한 바가 되겠지요.

 

아무튼 나라고 하는 것은 조그마한 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나요, 불경에 있는 말로하면 팔대자재아라.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두를 다 알 수 있는 지혜란 말입니다. 누구나가 다 갖추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지금 계발을 못해서 조그마한 나밖에 못쓰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뇌 가운데는 뇌세포가 백억인데 그 십분의 일밖에 못쓴다고 합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뇌세포 가운데 십분의 일밖에 못쓰고 죽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진여불성이라는 참다운 우리 마음은 뇌세포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에 들어 있는 정기이기 때문에 무한의 지혜입니다. '상락아정'을 꼭 깊이 외워두십시오.


마지막 정(淨) 이것은, 조금도 번뇌가 없는 청정무비하다는 말입니다. 본래 열반마음은 이와 같이 청정 무비합니다. 조금도 때가 묻어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잘못 살아서 때를 묻히고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음탕한 소설이라든가 또는 별로 좋지 않은 텔레비전 같은 그런 것이 나오면 바로 즉시 꺼버리십시오. 그런 걸로 해서는 우리한테 도움이 못 됩니다. 소중하고 맑은 우리 마음에다가 무엇 때문에 중생들의 죄스런 때를 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손해고 가정적인 손해고 나아가서는 우주적인 손해입니다. 한 사람이 잘못 되면 그만치 우주를 오염시킵니다. 우리가 성을 내면은 그때는 자기 마음이 어두워지고, 그 성을 받는 상대방도 어두워지고 우리 공기도 그마만치 오염됩니다. 천재지변 같은 것도 우리 마음하고 상관없다고 생각 마십시오. 부처님 경전 보십시오. 사람들이 다 평화스럽게 진리를 지키면 천재지변도 별로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쁜 생각 많이 하고 함부로 행동하고 욕심 부리고 하면 그것이 우리 주변을 오염시킵니다. 오염시키면 그것이 지진이나 지변들을 일으키는 요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에이즈 같은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잘 못 살고 악념(惡念)들이 깊으니까 에이즈 균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자의 깊이란 것은 우주에 두루 다 통하는 것입니다. 청정한 사람한테 무슨 필요로 에이즈가 걸리겠습니까. 우리가 바르게 살면 그런 균들은 우리 사회에 생길 수가 없습니다. 음탕하게 동성애고 뭣이고 그렇게 사니까 그런 균들이 생겨난다 말입니다. 우리한테 갖춰져 있는 본성인 덕, 이것이 상락아정. 무한한 공덕인데, 간추리면 영생불멸하고 또는 락(樂)이라, 위없이 완벽한 행복이고, 또는 아(我)라, 모두를 다 알 수 있고, 모두를 다 할 수 있는 신통 자재한 지혜를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


이것을 경에 보면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 나중에 보십시오. 정(淨) 이것은 청정무비해서 조금도 때 묻지 않은 맑고 풍요한 그런 마음이란 말입니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생들이 자꾸만 거꾸로 봅니다. 거꾸로 보기 때문에 팔전도(八轉倒)라. 반야심경에 보면 전도몽상이 있지요. 전도몽상은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구를 전(轉)자, 자빠질 도(倒)자. 거꾸로 본다 말입니다, 바로 못보고. 그런데 여기 있는 것은 본래가 상락아정이라는 소중한 보배가 갖춰져 있는 것인데.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못하니까 거꾸로 보이는 것입니다. 거꾸로 보는 것이 수도 없이 많지만은 그냥 이것도 간추려서 여덟 가지 유별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범부의 사전도(四轉倒)라. 범부의 네 가지 유별로 거꾸로 보는 것과 그 다음에는 이승(二乘)이라. 앞서 말씀드린 성문 연각들처럼 도는 좀 알았지마는 확실히는 모르는 사람들, 공(空)만 깨닫고 공의 참다운 중도를 깨닫지 못한 성문, 연각 즉 이승이 보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범부가 거꾸로 보는 네 가지가 무엇인가 하면은 범부 세간의 무상하고 항상이 없는, 유상(有相)한 것은 모두 무상한 것이고, 자기 몸도 무상하지만 재물도 감투도 다 무상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무상한 거란 말입니다. 대통령을 지낸 이들도 그 자리에 있을 때는 좋았지만 청문회다 교도소다 모두 얼마나 곤욕들을 치렀습니까.


우리 범부중생들이 사는 세간은 이처럼 무상하고 또는 무 안락이라. 안락이 본래 없다 말입니다. 우리 인간 세상은 따지고 보면 다 고통뿐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뱃속에다 두어도 고생, 뱃속에서 나올 때 고생, 또는 병들어서 고생, 헤어져서 고생, 돈 버느라 고생, 실패해서 고생…


인생개고(人生皆苦)라. 부처님 말씀 보면 결국 고생뿐이란 말입니다. 고생이 아닌 것은 결국은 순간뿐입니다. 헤어지고 만나고, 좋은 사람과는 헤어져서 괴롭고, 살아서 헤어져도 괴롭고, 죽어서 이별하면 더욱 슬프고, 따지고 보면 다 고생뿐이고 안락한 것은 어느 한 순간뿐입니다. 그것도 역시 잠시간 안락하게 보일 뿐이지 참다운 안락은 없습니다.

 

중생 세계에서는 이와 같이 항시 무상하고 또 안락도 본래 없단 말입니다. 무상, 무아라.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 몸뚱이가 있는 것인데, 이 몸뚱이도 시시각각으로 신진대사를 해서 변화해 마지않는단 말입니다. 늙어서 주름살이 생기고 기미가 생기고 젊어서는 누구나 다 피부가 고운 법인데 나이 먹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고 할 것도 없고 청정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며칠만 목욕을 안 해 보십시오. 그냥 냄새가 풍긴단 말입니다. 우리 몸도 무상하고 즐거움도 없고, 나라는 것도 없고, 또는 깨달을 것도 없고. 우리 중생생활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제법(諸法)을 우리가 거꾸로 잘 못 봐서 항상 변치 않고 안락스럽고 또는 영생하고, 참다운 내가 있고, 또는 청정하다고 우리가 고집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범부가 네 가지로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거꾸로 보지를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대체로 거꾸로 보고 삽니다. 바로 보면 결국은 인생개고(人生皆苦)라 그런 것인데, 일반 중생들은 인생개고를 바로 못 봐서 항시 오욕락이라. 잘 먹으려하고, 잠도 많이 자면 좋은 줄 알고, 또는 감투가 높으면 좋고, 재물도 많으면 좋고, 좋은 이성 만나려 하고 이러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런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허망한 것이지. 일반 중생은 이런 것을 보고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 분들은 그 자리에서 무상을 느껴야 됩니다. 물론 지금 사는 생활을 다 뿌리쳐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은 모두가 다 무상하구나. 허망하구나. 이렇게 느껴야 오류를 안 범하고 지나치게 집착을 않습니다.


음식도 너무 미식만 취하고 많이 먹으면 좋을 것이 없겠지요. 신문에 보면 외국 사람들은 오분지 일이 비만증에 걸렸다 합니다. 대개 보면 앞뒤로 퉁퉁해 가지고 절도 못합니다. 그렇게 자기 조절을 못할 정도로 사람들이 참 의지가 약합니다. 모두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 먹었겠지요. 인간이란 참 불쌍하게들 삽니다. 바르게살기가 참 편한 것인데, 적게 먹고, 개운하게 먹으면 몸도 편하고, 배설도 적게 하고, 성인병도 안 걸리고 참 좋을 것인데 인간들이 스스로 화를 자초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들은 결국 재미도 없고 항상함도 없고 또 덧없는 이런 것들을 좋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것을 중생이 네 가지로 거꾸로 보는 범부사도(凡夫四倒)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승사도(二乘四倒)라. 공(空)을 조금 깨달아서 허망한 것은 좀 알고, 무상을 알았지만 참다운 중도를 모른단 말입니다. 무상하고 허망하니까 어느 것에나 집착할 것이 없고, 그런 것들은 다 쓸데없다는 것을 알았지마는 또 역시 그 사람들은 실상열반(實相涅槃)에 대해서는 미처 못 깨달았습니다. 열반은 원래 만덕을 갖춘 것인데, 성문이나 연각들은 공(空)만 좀 알았지 만덕을 갖춘 열반은 모릅니다. 열반에는 공덕이 한도 끝도 없는 그야말로 영생불멸하고 영원히 행복하고 또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완벽한 자기가 되는 것이고, 또 청정해서 조금도 오염이 없는 것이 본래의 자기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열반 공덕도 역시 무상하고, 또는 즐거움도 없고 참다운 대아(大我)도 없고, 또는 깨끗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허무주의자들은 불쌍합니다. 정말로 참다운 자기가 있고 자유가 있고 행복이 있는 것인데, 그걸 모르고 이른바 이데올로기 때문에 딱 묶여가지고 그것만 지키다가 죽어버린단 말입니다. 스탈린이나 모택동이나 모두 생각하면 참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자기만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또 자기 사상에다 묶어 놓고서 말입니다. 그네들의 그 옹색한 이데올로기가 하마 파기 될까봐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매도합니다. 종교를 믿어버리면 그 이데올로기 같은 것은 어디에다 발붙일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북한 같은 체제는 다 종교를 싫어합니다. 지금은 하다하다 안되니까 조금씩 터놓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막아 놔도 오래 못갑니다. 우주의 법도에 안 따르는 것은 결국은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것이, 영생불멸하는 성자를 믿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러운가 여러분들께서는 충분히 아실 것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로 행복 가운데 행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때라도 혼연스럽게 순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하찮은 몸뚱이 하나 바쳐서 진리가 빛난다고 생각할 때는 조금도 회한 없이 그냥 바치는 것입니다. 바치는 그 순간에 우리 생명은 한없이 성숙되는 것입니다. 요법(樂法) 비구는 진리를 참구해 마지않는 훌륭한 비구였습니다. 즐거울 락(樂)을 즐거울 '요'라고도 풀이합니다. 법을 간절히 구하는 비구가 과거에 있었습니다. 몇 십 년을 헤매며 진리를 구했지만 그때는 부처님이 안 나오신 때라 스승이 없어서 공부를 못 배우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 때 욕계천에서 제석천이 보니까 요법 비구가 위대한 사람인데 어디 가서 법문을 들을 곳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사람 모습을 취해 가지고 나타나서 요법 비구에게 하는 말이 "그대가 진정으로 진리를 구하는가?" 이렇게 물으니까. 신명을 아끼지 않고 법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은 그대에게 내가 지금 진리를 말할 텐데, 그 진리를 그대의 피부를 벗겨서 종이로 하고 그대 피를 짜내서 먹물로 하고 뼈를 분질러서 붓으로 삼아 진리를 적을 수가 있겠는가?" 라고 물어보니, 그 말이 떨어지기 전에 칼로 자기 피부를 벗긴단 말입니다.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칼로 자기 피부를 벗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석천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저런 사람에게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만치 마음자세가 진리를 배울 준비가 다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칼로 자기 피부를 벗기니까 그 순간 공중에서 영생불멸하는 부처님의 음성이 들려왔던 것입니다. 사람한테서 안 배우더라도 정말로 위대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영원히 존재하는 진리로 부터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어느 부처님에게 법문을 듣고 배웠겠습니까. 혼자서 깨달았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우주 자체는 우주 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우리 생명을 어느 때라도 바친다 하는, 진리를 위해서는 주저 없이 바친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때는 우리 마음은 진리를 지향해서 굉장히 성숙하는 것입니다. 제사불 당시 과거 전생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미륵불하고 제사불 회상에서 공부를 하셨습니다. 저는 가끔 이 설화를 비유합니다마는, 우리가 부처님에 대해서 진리를 흠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제사불께서 두 분을 보시니 미륵불 될 분이 훨씬 더 재주가 있고 총명해 보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불도 빨리 할 수가 있었겠지요. 둘을 제도를 해야겠는데 미륵불 될 분이 훨씬 더 재주가 있고 성불을 빨리 하게 보였지만, 미륵불이 장차 제도할 일반 중생들을 관찰해 보니까 굉장히 미련하다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미륵불이 영리하더라도 제도할 중생들의 복이 저렇게 부족하니 제도하기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부처님의 지혜란 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훤히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전생의 석가모니를 가만히 보니까 그이는 미륵불만은 못해도 그 부처님이 장차 제도할 중생들은 아주 영리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기왕이면 미륵불보다 석가모니를 먼저 부처를 만들어서 빨리 보내야 되겠구나, 그래야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석가모니 될 분을 빨리 제도하기 위해 방편을 써서 내가 지금 산에 올라 갈 테니까 그대는 나를 따라서 산을 올라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사불은 신통력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삼매에 들어 계셨습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될 분은 아직 신통력이 없던 지라 가시밭길을 찔리기도 하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높은 산까지 올라갔던 것입니다. 올라가서 부처님 계시는 곳을 우러러 보니까, 부처님께서 화광삼매라. 광명을 나투는 삼매에 들어 계셨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광명을 나투는 삼매에 들어 계시는데, 그 광명이 천지 우주를 훤히 비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 광명이 어떻게 황홀하였던지 자기를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그 찬란한 광명을 보고 환희심이 넘쳐서 한발을 든 채로 이레 낮, 이레 밤을 그대로 부처님을 찬탄했습니다.


여러분들. 부처님을 찬탄한 게송시를 아십니까?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부처님은 세상에서 다시 비할 데가 없다 말입니다. 시방세계 좋은 것, 궂은 것들을 다 비춰 봐도 부처님 같이 훌륭한 분은 없습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께 대한 최상의 찬탄을 올리면서 한발을 미처 내려놓지도 못하고 든 채로 이레 낮, 이레 밤 동안 합장하고 부처님을 찬탄했었던 것입니다. 그 경에 보면 첨앙불타(瞻仰佛 )라, 부처님을 우러러 보면서 목불잠사(目不暫捨)라. 눈을 잠깐도 깜박을 못한단 말입니다. 어떻게 환희심을 내었는지 부처님을 우러러 보면서 눈도 깜빡 못하고서 칠 주야 동안 찬탄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부처님을 흠모하고 찬탄한 갈앙심(渴仰心)으로, 구겁이라는 무량 세월을 앞당겨 성불했던 것입니다. 자기 몸을 잊고 부처님을 찬탄하는 공덕이 그렇게 큽니다. 오, 주여! 하는 그런 공덕 말입니다. 그런 공덕이 자기는 몰라도 우리의 성불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마음과 부처님 마음, 하나님 마음이 한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으로 사무치면 그만큼 성불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굉장히 비약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과거 전생에 석가모니 부처님같이 칠 주야 동안 한 발을 들고서 부처님을 찬탄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 무한공덕을 갖춘 부처님 자리를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야 됩니다. 불법은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며 바로 우주의 것입니다. 그것은 또 내 생명이고 그대 생명이기도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불법을 지키는데 너무 소홀한 것 같아요. 우리가 온 힘을 기울여 지켜야 됩니다. 그러면 빨리 불국토가 되겠지요.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세상을 구할 것은 천지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부처님 가르침 외에 다른 걸로는 구제가 안 됩니다. 부처님 따로, 나 따로, 하나님 따로 있다는 생각으로 해서는 모두 각각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과 나와 둘이니 그때는 사람과 사람끼리도 응당 둘이 되고 셋도 되고 각각이 되겠지요. 나나 너나 모두가 한 생명의 부처님이기 때문에 본래가 하나란 말입니다. 이렇게 돼야 참다웁게 도덕이 섭니다. 제 아무리 삼강오륜을 말하고 별 짓을 다 한다 하더라도, 나 따로 있고 너 따로 있고 이럴 때는 항시 자기를 먼저 앞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참다운 도덕을 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다운 도덕은 자기 희생정신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닌 것이고 이런 철학이 앞서야 참다운 도덕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그런 철학은 부처님 가르침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육도 역시 교육철학이 바탕으로 돼야 합니다. 부처를 만드는 교육을 시켜야지 그냥 기능인, 직업인을 만드는 교육은 참다운 인간을 못 만듭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스승을 배반하고 그러겠지요. 우리 생명은 정말로 허망합니다. 교통사고로 오늘 죽을지, 병으로 내일 죽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생명이 붙어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우리는 부처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같이 닦고 같이 동참하고 말입니다. 이 열반사덕(涅槃四德)을 꼭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 열반이란 것은 바로 우리 본심입니다. 또 진여불성이요,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무한 공덕입니다. 무한공덕을 한 번 생각하면 생각한 만치 정화가 되어갑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번 외면 외운 만치 신장들이 우리를 굽어본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정말로 한량없는 자유와 행복을 누리시고 이 세상도 그와 같이 진리의 광명으로 빛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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