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삼성(唯識三性)
그 다음 법문은 유식삼성이라. 오직 유(唯)자, 알 식(識)자. 식 이것은 의식(意識)이란 식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식, 이것은 우리 의식만의 식이 아니라 의식보다도 더 깊은 이른바 말나식(末那識)이라. 그 다음 깊은 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그 다음 깊은 식은 암마라식(菴摩羅識)이라. 그리고 모든 식의 근본 바닥은 부처입니다.
우리 마음 바탕은 다 부처가 되어버립니다. 불교는 여기까지 알고 보면 알기가 참 쉬운 것입니다. 우리 지금 쓰고 있는 이 마음의 바닥은 '말나식'이라는 그런 마음인 것이고, 그 마음이 또 '아뢰야식'이라는 모든 종자를 갈무리하는 그 마음인 것이고, 그 바탕이 또 '암마라식'이라는 청정한 마음입니다. 또 그 바탕이 부처님이라. 이른바 불성(佛性)입니다.
그래서 유식(唯識)이라 할 때 이것은 다 통해서 천지 우주 모두가 다 오직 식(識)뿐이다. 이런 도리입니다. 이 때 유식은 물질이나 정신이나 어느 것이나 다 포함됩니다. 천지 우주가 모두가 다 오직 식뿐이라는 이런 뜻입니다.
유식삼성(唯識三性)이라.
모두가 식 뿐인 것인데 이것도 역시 나누면 세 차원이 있습니다. 식을 다 아는 사람이 따지는 것과 우리 인간의 의식밖에 모르는 사람이 따지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에 앞서서 삼계(三界)가 유심(唯心)이라.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나, 우리 중생이 태어나고 죽고 하는 그렇게 흘러가는 세계가 삼계 아니겠습니까.
삼계도 역시 오직 마음뿐입니다. 마음 잘 못 먹으면 나쁜데 태어나고, 마음 잘 먹으면 좋은데 태어나고, 그러나 실은 무생물이고 자연계고 모두가 다 오직 마음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단단한 금(金)이나 은(銀), 이런 금속은 유심이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을 마십시오.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금이나 은도 역시 내내야 금의 원소, 은의 원소로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들 역시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걸로 된 것이고 따라서 어느 것이나 따지고 보면 결국은 모두가 에너지뿐입니다. 장(場) 에너지의 본질 마음 즉, 유심(唯心)뿐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나와서 굉장히 편리합니다. 물리학이 모든 물질은 다 에너지다. 이렇게 부처님의 '색즉공'을 제대로 말해 있단 말입니다.
그 근본 바탕을 다 말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선 공 도리를 말해 있습니다. 따라서 공도리만 알아도 굉장히 살기가 편합니다. 그냥 직속으로 가뿐하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 우리 몸뚱이 간수하고 지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옷도 기왕이면 좋은 옷 입혀야 하고, 멋도 내주어야 되고, 음식도 영양 가치가 있어야 되고, 집도 살면서 이리저리 돌봐 주어야 되고, 저같이 다 포기하고 지내다 보면 자기 몸뚱이 별로 관심을 안 두면 참 편합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말고, 지내다 보면 어느 분이 생각한다고 뭘 갖다 주시면 좀 먹어 놓으면 몸만 무겁고, 지금 우리 인간만이 음식에 너무나 곪아 빠져 있습니다. 천상(天上)에 올라가면 음식이 없습니다. 귀신도 냄새만 맡습니다.
우리 생각으로 인간이 다인 줄 알지만 인간은 저 지옥보다는 훨씬 높고 짐승보다 높고 아귀 귀신보다도 높다 하더라도 천상에 비해서는 저 밑이란 말입니다. 인간이 절대로 만물의 영장이 아닙니다. 우리 상식으로 생각해서 만물의 영장이지 영혼의 차원에서 보면 인간보다 높은 것이 훨씬 많습니다. 따라서 그런 높은 세계는 음식이 필요치가 않습니다.
색계에만 올라가도 남녀이성도 없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남녀가 다 각각 쌍쌍인데 귀하게 살 것이지 중 돼서 뭘 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느 세계나 다 남녀 양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욕계 내에만 남녀가 있습니다. 색계 이상은 남녀가 없습니다. 하물며 극락에서는 어디 남녀가 있겠습니까.
극락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마음을 깨달은 성자만 지내는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다 부인해 버리지만 부처님 말씀은 사실은 사실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욕계, 색계, 무색계 모두가 다 마음뿐입니다. 무색계에 올라가면 마음만 존재합니다. 모양도 없고, 색계는 욕심도 없고, 우리 몸은 훤히 빛나는 광명(光明)뿐입니다.
인간 세계만이 이와 같이 오염된 몸뚱이가 있습니다. 오염된 것을 많이 먹으므로 항시 오염될 수밖에 없겠지요. 최초에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몸에서도 광명이 나왔단 말입니다. 그래서 비행자재(飛行自在)라. 천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지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가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지구에 내려와서 이것저것을 먹다보니 오염되고 무게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다 남녀 차이가 생기곤 했습니다. 애초에는 남녀 차이도 없었습니다. 먹다 보니까 신진대사(新陳代謝)할 필요 때문에 차근차근 남녀 성(性)이 구별된 것입니다. 색계 이상 올라가면 남녀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부나 수녀나 비구나 비구니가 그렇게 독신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남녀 양성이 꼭 결합해서 같이 부부가 돼야 한다는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부가 되어도 좋고 안 되면 더욱 좋고 말입니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그래서 천지 우주의 성품이 모두가 다 식으로 되고, 마음으로 되고 한 것인데 그것도 역시 차원 따라서 구별하면, 번뇌(煩惱)에 때 묻은 우리 중생이 쓰는 마음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란 말입니다. 편(遍)을 '변'으로도 발음합니다만 음으로만 썼습니다.
변계소집성이라.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 중생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않고서 치우치게, 모든 것을 두루 치우치게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변계(遍計)라는 것은 모든 것을 치우치게 이리저리 억측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갑(甲)이 보면 밉지도 않은데 을(乙)이 볼 때는 밉단 말입니다. 별로 예쁘지 않은 사람도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가 보면 예쁘게 생각된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모두가 치우치게 보는 것입니다. 치우치게 봐서 집착하는 성품을 가리켜서 편계소집성이라 합니다.
따라서 변계소집성. 이것은 중생들 차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사물의 실상을 못보고, 사물의 실상은 불성 아닙니까.
우리가 있다고 보는 것은 다 빈 것이고, 참다운 실상은 불성인데 진여불성에서 봐야 바로 보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바로 보지 못하니까 업장에 가리 운대로 고집해서 본다는 것입니다. 자기한테 좀 베풀어주면 좋은 것이고, 자기한테 해코지 하면 별로 안 좋고, 그래가지고 항시 꽁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변계소집성입니다.
이런 것은 따지고 보면 정유리무(情有理無)라.
우리 중생의 망령된 마음에 이렇게 보이는 것이지 원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남을 미워할 때나 지나치게 좋아하실 때도 꼭 이런 것을 생각을 하십시오.
이것은 우리 중생의 망령된 잘 못 보는 그 마음에 있는 것이지, 즉 정(情)에 있는 것이지 원래 우주의 도리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인들이 남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정유리무의 범부 소견이라. 진리를 모르는 우리 범부의 하나의 견해에 불과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때그때 우리 스스로의 생활을 반조(返照)하고 돌이켜 봐서 바른 길을 나가기 위해서 하신 경책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이와 같이 자기 스스로 잘못 봐서 집착하여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생의 망령된 마음에서 비로소 있다고 하는 것이지 진리에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다, 궂다 하는 이런 집착은 어두운 범부의 소견일 뿐입니다.
불교는 가장 심오한 하나의 철학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그리 생각하시고, 제가 아무리 쉽게 말씀드리려 해도 쉽게 말할 수도 없고, 특히 저는 말주변이 없기에,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옮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하면 또 말이 안 되고, 그래서 제 말씀이 어렵더라도 이것은 하나의 인생관적인 철학적인 문제이므로 해득을 각자 하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부처님 법은 우주의 보배입니다. 지금 세계의 석학들이 누구나가 말해 있습니다. 앞으로 세계 인류를 구제하고, 동서 양 진영이 화합하고, 21세기를 참다웁게 이끈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구나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위대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과연 무엇일까?
다른 가르침이나 다른 철학에서는 역설하지 못한 가장 궁극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가르침, 이것이 이른바 중도(中道)입니다. 중도가 되어야 참다웁게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가 빌린 것이 되는 것이고 동시에 그래야만이 세계의 문화 현상을 하나로 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인류가 잘못하면 국가 간에 문화의 골이 깊어질 수가 있습니다.
의타기성(依他起性)
그 다음에는 좀 더 차원이 높은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다른 것에 의지해서 즉,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성품이란 말입니다.
나라는 것도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지고 또 내가 미워하는 마음도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고 이 세상에 인연이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인연생(因緣生)입니다. 그리고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이것은 여환가유(如幻假有)라. 마치 허깨비같이 가짜로 잠시간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나 너라는 존재나 태양계(太陽系)나 뭣이든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이것은 허깨비같이 가짜로 모양을 나툰 것입니다.
저번 신문에 보니까 수 억 광년의 은하계 속에서 별들이 충돌하여 하나의 빛으로 화해 버렸다고 합니다. 우리 지구도 오랫동안 몇 백 억년 지나면 하나의 광명(光明)으로 화해 버리는 것입니다. 허망하단 말입니다.
소중한 내 몸뚱이나 그대 몸뚱이나 내 집이나 모두가 다 가짜로 잠시간 중생의 망식에 있어 보이는 것이지 실재로는 있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가짜로 잠시간 인연 따라서 존재라는 것이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설사 집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원래 가짜로 있는 것 허망한 것이니까 무방하지 않겠는가. 집이 없어지면 모처럼 수행자(修行者)같이 내 공부 한 번 해 보겠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는 훌륭한 백작으로 여러 사람들을 많이 지도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라면 자기 집의 농노(農奴)를 다 해방시키고 토지(土地)를 다 나누어주고 싶은데 자기 아내가 반대한단 말입니다. 백작부인 입장에서는 식구도 많고 하므로 역시 반대할 만도 하지요. 그러나 톨스토이 자기는 도저히 합당하지 않습니다.
본래 무소유(無所有)가 아닌가. 나라는 것도 본래 없는데 내 소유가 어디가 있는가? 농토(農土)는 농민들이 짓는 것이지 왜 내가 가지고 있을 것인가? 이렇게 해서 항시 아내와 싸웠단 말입니다. 아내는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자기는 남한테 다 분배하여 버리려 했습니다.
그러다 겨우 87세가 되어서 비로소 자기 아내한테 편지를 써 놓고 집을 나섰단 말입니다. '당신이 나한테 당부한 것은 당신 차원에서는 다 옳았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그렇더라도 나는 진리(眞理)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죽음에 임박해서 정말로 무소유, 아무것도 없이 다 버리고 진리만 따라 간다' 이렇게 써 놓고 오직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집을 떠났던 것입니다.
아내한테 마지막 하직의 글을 남겨 놓고 집을 홀로 나와 눈보라 속을 헤매다 결국 쓰러져서 죽지 않았습니까? 톨스토이 역시 진리를 믿고 스스로 집을 나와서 하나의 수행자가 되어서 죽었던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불행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자기 마음속으로는 행복스러웠겠지요. 그 분한테는 죽음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위대한 분들은 그와 같이 다 통합니다. 어떠한 경우도 손해가 없습니다. 진리로 해서 인생의 무상(無常)을 느끼고, 자기 몸뚱이 아프면 아픈 대로…
여러분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 염불삼매보왕론)을 보셨습니까?
보왕삼매론에 보면 아프면 아픈데서 배우고, 배신하면 배신당하는데서 배우고, 만사(萬事)에서 배웁니다.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이것은 허깨비같이 가짜로 잠시간 있는 전변무상(轉變無常)의 소지입니다.
모두가 변화해 마지않는 무상한 존재입니다.
너무 행복스러운 사람들은 무상을 모릅니다. 부모님 덕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들은 무상을 모르기 때문에 항시 우쭐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에 나아가서 감투를 쓰게 되면 어쩔 줄 모르고 당황을 하지요. 그러나 시험에 떨어져도 보고 부모가 학비를 못 대줘서 고생도 해보고 그런 사람들은 세상을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구나 하고 허무를 좀 느끼고 무상을 알아차립니다.
어느 누구나 실패를 해봐야 무상을 느끼고 고생을 해봐야 인생을 좀 느낍니다. 자기 영혼이 보다 더 성숙되는 것입니다. 성숙이 되어야 비로소 진리에 눈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불행도 우리한테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서 우리 인간을 보다 더 영생해탈(永生解脫)로 성불(成佛)의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되고 안 되고 그런 것에 대해서 너무나 집착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그때 최선만 다하면 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리, 어머니는 어머니의 도리, 자식은 자식의 도리, 기업하면 사업의 도리를 최선만 다하면 됩니다. 잘 되고 못 되고는 인연에 맡기시면 됩니다.
원성실성(圓成實性)
세 번째 가서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이것 역시 앞서 진여연기(眞如緣起)나 중도(中道)에서처럼 원만하게 이루어진 참다운 우주의 실상(實相)입니다.
인연 따라서 된 것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공(空)이지만 그러나 우주의 참다운 모습은 다만 공인 것이 아니라 결국 원성실성입니다. 자비, 지혜, 행복, 능력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원만하게 갖춰진 그 자리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 생명(生命)은 그 자리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참다운 대승적인 신앙심(信仰心)은 나한테 모든 공덕(功德)이 다 갖춰져 있다. 이렇게 믿어야 대승적인 신앙이 됩니다. 그래야 참다운 용기(勇氣)도 나오고, 사업도 그때는 큰 사업을 할 수가 있겠지요. 장군이 되던 어느 분야로 나아가던 이와 같이 본래적인 영생불멸한 것이 나한테 갖추어진 무한의 가능성, 무한의 에너지다. 이것을 분명히 믿어야 큰일을 합니다.
원성실성 이것이 우리의 본성(本性)입니다. 이것이 불성(佛性)입니다.
이것은 정무리유(情無理有)라. 원성실성 이것은 우리 망정으로는 없다고 보지만 진리에서는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불성이 지금 보입니까? 우리 중생의 망령된 마음에서는 불성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망령된 마음에는 없지만 영원한 우주의 도리에서는 분명히 있습니다. 진여불성이나 하나님이나 우주의 도리에서는 있습니다.
원성실성은 정무리유의 진여실상의 묘체(妙諦)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또한 모든 존재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우리 생각이 창조(創造)의 신(神)이다.
화두(話頭)를 들고, 염불(念佛)을 하는 것도 역시 이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우주(宇宙)의 묘체(妙諦)에다가 마음을 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염불도 실상염불(實相念佛)이 됩니다. 화두를 들 때도 '이뭣고'라고 단순히 의심하는 것만이 이뭣고가 아닙니다. 우주의 본체가 무엇인가?
생명의 실상이 무엇인가? 그 자리를 분명히 의심해야 참다운 화두란 말입니다.
달마(達磨) 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이런 것들 모두가 본래는 원만(圓滿)실상을 우리한테 참구(參究) 의심케 하는 말입니다. 화두의 근본 목적 원인이 다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묵조선(默照禪)은 화두 없이 수행하는 선(禪)이지만, 그저 묵묵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 우주는 오직 부처님뿐이다' 이 자리를 비춰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基督敎)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때 '아우구스티누스(Augustimus 354 - 430)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총(恩寵)에 의해서만이 우리는 구제될 수 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영생불멸한 그 자리를 떠나야 우리는 구제를 받는 것입니다. 실유불성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이란 자리를 떠나지 않아야 우리가 참다운 구제를 받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우리 본래 생명이요, 부처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을 떠나지 않는 것이 '오! 주여!' 하는 것이고, '나무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기분이 사나울 때나 그렁저렁 생각이 기쁠 때나 곤란스러울 때나 이런 생각은 모두가 변계소집성입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 잘 못 보고서 고집하는 경우, 바로 그냥 '아차!' 하고 '이것도 공(空)이구나' 이렇게 해 가지고서 부정을 시켜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염념참회(念念懺悔)라. 생각 생각에 우리는 참회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 생각 회개(悔改)하고서 염념상속(念念相續) 하나님, 부처님한테 우리 마음을 돌려야 됩니다. 현상적인 것은 모두가 다 허망 무상한 것이고, 참다운 것은 죽으나 사나 언제나 우주가 다 파괴되던지 말던 지간에 영원히 존재하는 우리 생명의 본 모습, 원성실성(圓成實性) 즉불(卽佛)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신도님들 오늘 저녁 바로 염불(念佛)을 하시더라도 그냥 염불이 아니라 불성 자리, 영생불멸하는 생명의 실상 자리에 마음을 두시고 염불을 하십시오.
잠자실 때도 실상 자리에 마음을 두시고 잠드시면 나쁜 꿈도 안 꾸어집니다. 그리고 잠자시는 동안도 우리 마음이 걸음걸음 차근차근 불성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은 창조(創造)의 신(神)입니다. 나쁜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 나빠지는 것이고 부처님 하나님을 생각하면 본래가 부처인지라 우리가 부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공부하시기 참 쉬운 것입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하셔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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