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즉불
육즉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금번 법회용으로 준비한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유인물 구성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요약해 놓았습니다.
맨 처음에는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불타론(佛陀論)을 위주로 하고, 그 다음에 연기법(緣起法)에다 가장 역점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윤곽만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마음의 고향 16집 참조)
연기법(緣起法)과 동체대비(同體大悲)
우리가 연기법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부처를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연기법을 알면 나를 아는 것이고 연기법을 모르면 부처란 나를 모른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럴 정도로 연기법은 불교의 대강령(大綱領)입니다. 실은 연기법이라 하는 우주의 대법(大法) 위에 불교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연기법이 바로 우주의 대법입니다.
따라서 우주가 바로 인연·연기이므로 다른 종교나 다른 철학도 표현은 좀 달리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연기법에 포섭되고 특히 불교는 연기법으로 체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불교에서 '동체대비'라는 것은 남하고 나하고 같은 몸이기 때문에 참다운 사랑과 참다운 자비가 나온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불보살(佛菩薩)은 일체 중생을 동일체로 관찰하기 때문에 대자비심(大慈悲心)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째서 다른 사람과 나와 같을 것인가? 분명히 현상적인 세계에서는 뿔뿔이 있는 것인데 왜 한 몸, 한 마음일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내린 것이 이른바 바로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이 우주(宇宙)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참다운 생명자체(生命自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생명자체는 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분열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우주 자체가 바로 한 덩어리 생명(生命)입니다. 이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분할(分割)할 수가 없습니다.
한계가 없는 우주가 하나의 부처님 덩어리입니다. 하나님 덩어리입니다.
따라서 거기서 인연 따라 잠시간 이렇게 저렇게 전변무상(轉變無常)한 모양만 나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은 같다 하더라도 한 번 모양을 나투면 뿔뿔이 다르지 않겠는가? 이렇게 보통은 의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의 어려운 말로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조금도 한계가 없는 순수생명(純粹生命)이기 때문에 바늘구멍만큼 적은 현상적인 존재나 히말라야 산같이 큰 존재나 부처님의 정기(精氣)라는 뜻에서는 원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相對)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주는 빈틈도 없이 부처님 진여불성이란 한 생명만으로 충만(充滿)해 있기 때문에 어떻게 구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나한테 있는 불성(佛性)이나 너한테 있는, 예수한테, 공자한테, 석가모니한테 있는 불성이나 다 똑같습니다. 다만 개발하고 못하고 하는 그 차이 뿐입니다.
그러기에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도 아시이성불(我是已成佛)이요, 나는 이미 부처를 성취한 사람이요. 나 아(我)자, 바로 시(是)자, 이 시자는 옳을 시, 바로 시, 그렇게도 쓰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는 바로, 이미 이(已)자, 이룰 성(成)자, 부처 불(佛)자, 나는 이미 부처를 성취한 사람이고, 여시당성불(汝是當成佛)이라. 그대는 바로 당성불(當成佛)이라. 마땅 당(當)자, 앞으로 그대 역시 필히 부처가 될 사람이다.
이렇게 차이만 있을 뿐이지 원래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이라 하는 생명 자리는 호리(豪釐)도 차이가 없습니다. 어두워서 겉으로는 나같이 보이고, 남같이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가 근본 성품 자리, 근본 본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습니다.
넓은 바다에서 바람 따라 천파만파(千波萬波) 파도(波濤)가 친다 하더라도 똑같은 물이듯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순수한 생명자리에서 나온 너나, 나나 일체의 존재는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습니다.
진여불성을 깨달은 분이 도인이고 진여불성을 깨닫지 못하면 제아무리 무엇을 분별지로 많이 안다 하더라도 도인이 아닙니다. 생명 자체를 깨달아 체증(體證)해야 도인(道人)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를 성취한 분들은 그때는 나와 남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나한테 들어 있는 것이나 너한테 들어 있는 것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는 진여불성이 들어 있으므로 어떻게 남을 무시하고 다르게 구분 지어서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말은 그런 자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도덕(道德)이라는 것도, 우리가 이제 자기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해야 참다운 도덕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나와 남을 구분하기 때문에 아무리 남을 돌본다 해도 항시 자기가 중심이 돼 있단 말입니다. 누구한테 재물을 보시하고 어디다 봉사를 하나 항시 자기라는 것이 전제가 돼 있고 자기라는 흔적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른바 상(相)을 떠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보통은 쉽게 상을 떠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이런 말을 누구나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중생들은 언제나 위선(僞善)이 깔려 있습니다. 자기라는 것을 미처 못 떠났기 때문에 위선을 미처 떨쳐 버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나나, 너나,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자리, 그 자리를 체험을 해버려야 비로소 위선을 떠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하지 못하면 조금 양심이 더 있고 덜 있고 하는 상대적인 차이 뿐이지 온전히 상을 떠나서 조금도 흐림 없는 베풀음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기독교나 가톨릭 계통에서도 하고 있는 한마음 한 몸 운동, 그런 것도 참 굉장히 좋은 운동이지요. 그러나 그네들로 해서는 한마음 한 몸을 제대로 해석을 못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창조했고, 한 번 창조한 사람들은 뿔뿔이 있고, 하나님과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고, 이런 이론 체계로 해서는 한마음이나 한 몸이 성립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상대적으로 될수록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고서 남을 돕는다는 그런 의미인 것이지 불교와 같이 바로 철학적으로 온전히 나와 남이 본래로 둘이 아니다. 이렇게는 안 됩니다.
무아(無我)의 구조화(構造化)
우리가 '내가 없는 무아(無我)라' 이렇게 말하면 보통은 다 본래 나와 남이 구분이 있고 내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부처님께서 나가 없다고 그런 말씀은 이웃을 사랑하게 하고 평화와 화해를 위해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겠지? 이렇게 천박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전문 술어로 본래로 무아(無我)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만 달리 했기 때문에 생명자체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본질적으로 본래로 무아의 구조화(構造化)가 되어 있습니다.
본래로 나가 없고 네가 없는 그런 오직 하나의 생명이 다만 현상적으로 모양을 나툰다 하더라도 모양이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상(假相)만, 그림자만 나투고 있습니다.
수심결(修心訣)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범부미시(凡夫迷時), 범부는 미혹되어 참다운 지혜가 없어서 거꾸로 본단 말입니다. 범부가 미혹했을 때는 사대위신(四大爲身)이요,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 이것을 내 몸, 내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망상위심(妄想爲心)이라. 잘 못 생각하고 이래저래 스스로 망상하고 무지로운 이것을 내 마음이라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진여불성의 자리, 우리 생명의 고향자리, 그 마음자리를 증명을 못했을 때는 다 이것은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거꾸로 뒤바꿔서 보는 것입니다. 실지로 있는 실상은 없다고 보고, 실지로 없는 가상은 있다고 봅니다.
앞서 세 가지 차원으로 소견을 말씀 드렸습니다만 우리 중생은 망견(妄見)으로 보고서 고집(固執)을 합니다. 그러나 성자(聖者)가 되어야 사실을 사실대로 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본래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닙니다.
사실 본래 우주 구조 자체가 나라고 내세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 중생들이 바탕을 못 보고서 겉만 보기 때문에 나와 같이 보고 너와같이 보는 것입니다.
우리 이 몸뚱이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신진대사해서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는데, 자기라는 존재가 한 순간도 같은 존재가 없는 것인데 그걸 보고 어떻게 우리가 실지로 있다고 하겠습니까?
성자들은 본질을 보기 때문에 욕심을 낼래야 낼 수가 없고 탐심을 낼래야 낼 수가 없고 남하고 싸우려야 싸울 수가 없습니다. 억지로 싸우지 말라, 남한테 베풀어라, 이래서 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철학적으로 기본적인 도리를 바로 알고 깨달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저절로 남을 사랑하고 남한테 베풀어지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어느 면에서나 바르게살기 위해서는 자동적으로 저절로 바로 서는 형태가 되어야 참말로 위선이 없는 참다운 화평(和平), 참다운 민주화(民主化) 사회가 되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요약된 이것은 구성이 앞서 말씀드린 연기법을 주로 했습니다. 연기법에서 풀어 나가야 모두가 술술 풀립니다.
부처님이나 도인들이나 과거 선지식들의 비유를 본다 하더라도 우리가 연기법을 바로 안다고 생각할 때에는 여룡득수(如龍得水)라! 용이란 놈이 제 아무리 올라가고 싶어도 물이 없으면 올라갈 수가 없지요. 그러나 연기법을 바로 안다고 생각할 때에는 우리 공부가 순풍에 돛단배나 용이 물을 얻어서 승천하는 거나 같단 말입니다.
호랑이란 놈이 제아무리 힘이 세고 날뛰고 한다 하더라도 역시 언덕이 없으면 하룻밤에 몇 백리고 몇 천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언덕이 있어야 기대서 호랑이가 몇 천리를 갈 수 있듯이 이 연기법이 있어야 연기법으로 해서 모두를 술술 순수하게 풀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 말씀에도, 조사 어록에도 다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문제가 되어 있고, 논쟁이 되어 있는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문제, 그런 문제를 제가 무엇이 옳다 그러다 해서 여기다 기록을 해 놓은 것이 아니라 조사 스님들 과거의 도인들 또는 경에 있는 중요한 대목을 여기에 소개만 해서 해답은 여러분 스스로가 내리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육조단경(六組檀經)이라든가 능엄경(?嚴經)등 여러 경전 또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을 보시면 여러분 스스로 충분히 해답을 내릴 수가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번 3일 동안에 시간이 부족하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시고 나중에 보셔도 그냥 아실 수가 있습니다.
염불은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는 것
그리고 다음에는 염불(念佛)과 참선(參禪)문제. 염불과 참선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보통 불교인도 '염불은 하근중생(下根衆生), 근기 낮은 사람들이 하고 참선은 근기가 높은 사람들이 한다.' 이렇게 소박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 말씀이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도 아닐뿐더러 정통 조사 말씀도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염불은 우리가 본래로 부처인데 그 부처가 부처를 생각한단 말입니다. 내가 참 나를 생각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또는 부처 가운데는 끝도 갓도 없는 신비(神秘) 부사의(不思議)한 생명의 공덕(功德)이 거기에 충만해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자기 마음에 들어 있는 무량공덕(無量功德)을 생각하고, 무량공덕의 이름을 외우고 그렇게 하는 그것이 방편(方便) 공부가 될 수 있습니까?
다만 염불을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부처님은 저 밖에 어디 계신다. 극락세계(極樂世界)에 부처님이 계신다.' 이렇게 할 때는 그것이 방편 염불이 됩니다.
그러나 참 염불 그것은 시심시불(是心是佛) 시심작불(是心作佛)이라. 앞서 우리가 배우지 않았습니까. 본래 우리가 부처기 때문에 이 마음으로 부처를 성취하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욕심도 부리고 못난 이 마음, 이 마음의 본 성품이 바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본래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는 그 공부가 어떻게 해서 그것이 방편이라든가 낮은 차원의 공부가 되겠습니까? 사실 어떠한 공부나 주문(呪文)을 외우거나, 화두(話頭)를 참구하건, 염불을 하나, 기도를 모시나, 모두가 다 사실은 부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눈에 안 보이니까 이렇게 저렇게 방편을 내 세우는 것이지 본래 부처가 없다면 불교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천지 우주가 바로 하나의 법신(法身) 부처님이고 그대로 충만해 있는 생명의 광명(光明)입니다. 때문에 염불은 부처를 대상적으로 밖에서 구할 때 이것이 낮은 공부 방식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 '내 마음의 본 성품이 바로 부처요, 우주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바로 부처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염불을 하실 때에는 사실 가장 가까운 공부입니다.
우리 심리학에서 자기암시(自己暗示)라, 자기 암시라는 것은 가사 '내가 나쁜 놈이다. 나는 아무 힘도 없다. 나는 시험만 보면 매번 떨어만 진다.' 이렇게 자기 비하(卑下)를 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사람은 꼭 떨어지고 맙니다.
내가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의사가 잘 못 오진(誤診)을 해서 '당신은 무슨 병입니다.' 한 둘이 아니라 몇이서 그래 놓으면 정말로 아파버립니다. 이것이 이른바 자기암시 아닙니까?
우리 참다운 자기가 누구입니까? 참다운 자기가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나는 본래 부처다. 그러므로 나는 무한공덕을 본래 갖추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자기 암시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부처가 어디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내가 바로 부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가운데 무엇이 옳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위대한 도인들이 안 나왔으면 모르거니와 그 분들이 다 증명하시고 구구절절이 말씀을 하셨지 않습니까.
달마(達磨) 스님, 그리고 이조(二祖) 혜가(慧可) 스님 말씀이나, 육조(六祖) 혜능(慧能)대사 말씀이나 그냥 직설(直說)로 바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비었으면 '비었다', 부처면 '부처다.' 그리고 육조단경에서도 '심즉시불(心卽是佛)' '시심시불(是心是佛)' '시심작불(是心作佛)' 우리의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그런 말씀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매 번 달마스님과 혜가스님의 일화를 소개해 드렸습니다마는 우리 마음이 어디가 별도로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좋고, 궂고 어디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우리가 버릇을 잘 못 붙였기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자리' 그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부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부처가 지금 보입니까? 자기는 못나게 보이고 이상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많이 있곤 하니까, 아! 저 따위 사람들한테 무슨 부처가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자기 아들딸한테나 친구한테나 그 사람을 가장 잘 대접하는 것이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본래대로 부처같이 보고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그렇게 먼저 부처님같이 봐 놓고서 '다만 인연 따라서 내 아들로 태어났구나. 저 사람도 본래는 부처인데 인연 따라서 잠시간 나쁜 행동을 보일 뿐이구나.'
부처님의 은혜(恩惠)에는 열 가지가 있습니다. 실은 무량한 은혜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가 은승창열은(隱勝彰劣恩)이라. 부처님의 은혜가 많지만 부처님의 좋은 점은 숨기시고 나쁜 점을 우리한테 보인 은혜(恩惠)란 말입니다. 도둑놈이나 그런 사람들도 본래는 부처인데 부처란 좋은 점을 지금 가리고서 도둑이라는 나쁜 걸로 해서 우리에게 보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대하나 딸, 남편, 아내, 누구를 대하든지 먼저 '아! 저분도 본래 부처다' 이렇게 생각하여 놓고서 그 다음에는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다 보니 아들딸이 되고 남편이 되었구나' 그래야 바르게 관계가 섭니다.
이것이 이른바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라. 연기법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연기법이기 때문에 본래 무아(無我)고, 본래 무아기 때문에 사실 내 소유(所有)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큰 빌딩을 가지고 있고 또는 막대한 재벌가가 된다 하더라도 마음만은 탈탈 다 털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괴롭지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우리가 기업도 경영하고, 장사도 잘하고, 남한테 베풀기도 하고, 그래야 사회도 풍요롭게 되고 그렇겠지요.
그래서 최선으로 한다 하더라도 본래 이것은 나도 내 것이 아닌데,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닌데 저 따위 것들이 무슨 내 소유일 것인가?
다만 이것은 우주의 모든 존재, 모든 인간들의 공유물인데 내가 지금 관리하고 있다. 그러니까 최선으로 관리해야 내가 인간으로서 내 책임을 다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 불자로서 우리 기업인으로서 자기 사업에 대해서 가지는 바른 태도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우리 인간 세상에 참다운 평화가 옵니다. 그렇지 않고서 연기법으로 보지 못하고서 그냥 세간적인 지혜로 분별시비(分別是非)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우리 인류 사회에 갈등(葛藤)과 반목(反目), 전쟁(戰爭)과 부패 여러 가지 비리(非理)같은 것을 도저히 끊일 사이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인 것이지 그것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염불을 저는 강조했습니다. 해서 참선을 하신 과거의 선지식(善知識)이라든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인용해 가지고서, 내가 원래 부처인데, 내 이름 내가 부르는데, 사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그런 이름이 바로 내 진짜 이름입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 그것은 금생에 작명가나 부모가 붙인 가짜 이름입니다.
내 진짜 이름은 바로 부처가 진짜 이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침에 쇳송을 들어보면 알 수 있듯이 아미타불이 어디 한두 군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십일만구천오백 동명동호아미타불(同名同號阿彌陀佛)이라! 한도 끝도 없이 아미타불뿐이란 말입니다. 이름도 같고 호도 같고,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그런데 가서 '두두물물'이란 말씀이 해당됩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이고 아미타불이란 말씀입니다.
인생(人生)이란 마음 한 생각 돌이키면 참 행복뿐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계가 바로 그대로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다 아미타불인데 극락세계가 안 될 수가 있습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가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바뀌고 우리 행동도 바뀌는 것입니다. 1년이나 2년이나 부처님 믿고 변신하지 않으면 믿은 보람이 없지요. 부처님이 되고자 해서 부처님이 되어 가는 그런 쪽으로 우리가 조금씩, 조금씩 바꿔져야 합니다.
우리 근기가 약해서 단박에 비약적으로 바꿔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바꿔져야 신앙인으로서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만 좋은 것이 아니라 천지신명(天地神明)이 다 지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천지신명이 지킨다는 이른바 호법신장(護法神將)이 지킨다는 것을 꼭 명심(銘心)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만 믿어도 36부 선신들이 우리를 다 지킵니다. 오계(五戒)만 우리가 지켜도 오오는 이십오라. 이십오 선신이 우리를 지킨단 말입니다.
천지 우주라는 것은 우주의 도리, 우주의 법도(法道)에 따르기 때문에 신장이나 하늘에 있는 천신(天神)들이나 모두가 다 우주의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우주의 법도를 따른다고 생각할 때에는 또 그런 신장들이나 천신들이 우리를 가호(加護)합니다.
그래서 염불과 참선이 본래로 둘이 아니라는 그런 쪽으로 제가 정리를 했습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과거 위대한 사람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원효(元曉) 스님, 의상(義湘) 스님 또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서산(西山)대사, 태고(太古) 대사 모두가 그리했습니다. 이조 십삼대 종사의 글을 다 봤습니다만 그 분들 글도 역시 다 그렇습니다. 조금도 집착이 없단 말입니다.
참선과 염불이 둘이 아닙니다. 참선할 때도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 자리에 입각해 있으면 참선이 되지만 그냥 덮어놓고 '이뭣고' 한다고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화두(話頭) 나올 때 그 자체가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참구하고자 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화두를 들던 지간에 분명히 본래면목 자리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른 참선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염불도 부처님이 저 밖에 어디 계신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참선이 못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천지우주가 그대로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하면서 염불할 때는 그것이 바로 참선(參禪)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우리가 참구할 때도 하나님을 저 밖에서만 생각할 때는 그것은 참선이 못되겠지요. 그러나 내 마음이 본래 하나님이고 천지 우주는 하나님 기운으로 충만해 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안 계신데 가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오! 주여' 할 때는 그것도 참선이란 말입니다.
참선이 꼭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본래적인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떠나지 않으면 다 참선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종교도 비로소 화해(和解)가 되고 그렇게 되어야 자기 마음이 넓어지곤 합니다.
본래 우주 구조 자체가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온 것인데 진여불성 안 여의고 생각한다고 할 때에는 모두가 술술 풀이가 됩니다.
그리고 끄트머리에 가서는 우리 공부를 북돋을 수 있는 게송(偈誦), 즉 말하자면 불교 시(詩)를 몇 구절 넣어서 마무리를 잡았습니다.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것만 생각하시면 사실은 그냥 보기만 하셔도 쭉쭉 같은 도리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육즉불(六卽佛) 이것 풀이만 하시도록 하십시다. 이것 풀이만 해도 한 두 시간은 걸립니다.
육즉불(六卽佛)
1. 리즉불(理卽佛)…다만 불성(佛性)을 갖춘 자(者)…외범(外凡)
2. 명자즉불(名字卽佛)…다만 불성(佛性)이란 명(名)을 해(解)한 자(者)…외범(外凡)
3. 관행즉불(觀行卽佛)…사가행위(四加行位 : 난(煖), 정(頂), 인(忍), 세제일법(世第一法))…내 범(內凡)
4. 상사즉불(相似卽佛)…육근청정위(六根淸淨位), 무간정위(無間定位)…내범(內凡)
5. 분진즉불(分眞卽佛)…보살 초지(初地)에서 십지(十地)까지…성위(聖位)
6. 구경즉불(究竟卽佛)…묘각(妙覺) 또는 대각(大覺)…성위(聖位)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이 천태지의(天台智?) 선사, 선사의 천태 철학이 불교 철학으로는 제일 높은 철학입니다. 때문에 적어도 불교학도면 꼭 천태학(天台學)을 거쳐야 한다는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참선 법문(法門)이나, 무슨 법문이나 하나의 체계로 공부할 때는 천태 학문이 필요합니다. 천태스님의 여러 저서 가운데서 마하지관(摩訶止觀) 이것은 어렵기도 하지만 하나의 위대한 체계적인 작업입니다. 이것은 지관법에 있는 하나의 법문입니다.
육즉불(六卽佛)이라. 여섯 단계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맨 먼저 리즉불(理卽佛)이라. 원리로 봐서 부처란 말입니다.
다음이 명자즉불(名字卽佛)이라. 다만 이름만 부처입니다. 부처란 이름만 좀 들었지 부처의 옆에는 조금도 가지 못했단 말입니다. 우리가 불교인이라 하더라도 공부를 않고 그냥 지내면 이름만 좀 들었을 뿐이지 조금도 결심도 못하고 부처님께 한 걸음도 못 가 있습니다.
그 다음은 관행즉불(觀行卽佛)이라. 실지로 우리가 닦아서 차근차근 부처가 돼 간단 말입니다. 부처란 생각도 하고 부처의 경계도 관찰하고 염불도 하고 화두도 참구하고 그렇게 공부를 해 나가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관행즉불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애써 공부하시는 사람들은 세 번째 단계인 관행즉불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공부가 좀 익혀져서 네 번째 가서 상사즉불(相似卽佛)이라. 거의 닮아 있는 부처란 뜻입니다. 부처가 확실히는 못되었지만 거의 비슷한 부처란 말입니다. 모든 면에서 신통도 못하고 하지만 해석하는 데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마음이 바꿔지고 또 도리에 대해서 밝아서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분진즉불(分眞卽佛)이라. 비로소 우리가 닮은 정도에서 용맹정진을 거듭해 가지고서 참말로 진여불성을 증명하는 단계입니다. 진리는 증명했습니다. 증명은 했으나 완벽한 단계는 아직 못됩니다. 따라서 차근차근 진리가 더욱더 익어져서 우리가 습관성(習慣性)을 녹이고서 불교 말로 보임수행(保任修行)이라. 그래서 차근차근 완벽한 부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완전한 부처가 될 때가 이른바 구경각(究竟覺), 조금도 흠축이 없이 번뇌(煩惱)는 다 떨쳐서 자기 성취도 완벽하고, 다른 사람에게 완벽하게 법문도 하고, 제도도 하고, 이런 경지가 이른바 구경각을 성취한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시 자기 공부를 점검해야 합니다.
리즉불(理卽佛)
맨 처음에 리즉불이라.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라는 말 한 번도 안 들어도 이슬람을 믿든 또는 과학을 하든 상관없이 내내야 부처는 부처란 말입니다. 본래는 다 부처입니다.
그와 같이 이치로 봐서는 누구나 다 부처인 단계입니다. 이것은 불교인이 되고 안 되고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튼 모든 사람이 다 이치로 봐서는 부처란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다만 불성만을 갖추고 있을 뿐입니다. 원래 갖추고 있으니까 뱀이나 곤충이나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즉불 단계는 모두가 다 갖추고 있습니다.
명자즉불(名字卽佛)
그러나 그 다음에 명자즉불이라. 이름이나 문자로 해서 우리가 부처란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품, 본래면목은 다 부처다. 우주의 모든 존재의 근본성품은 다 부처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번뇌만 다 녹이면 부처가 된다. 이치로만 좀 알고 부처의 이름을 좀 외울 정도입니다. 다만 불성이란 뜻이나 이름을 해석할 정도입니다.
이 리즉불 단계와 명자즉불 단계를 불교 전문술어로 외범(外凡)이라. 외래범부라 합니다.
이 외범은 불교의 문중에 온전히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름만 들어서 상식적으로 알뿐이기 때문에 그것은 외도 범부입니다. 따라서 이름만 듣고 조금도 자기 수행을 안 한 분들은 외도 범부의 부류에 속해 있는 셈입니다.
관행즉불(觀行卽佛)
그 다음에 관행즉불이라.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불교수행을 한다고 볼 수 있지요. 이것은 사가행(四加行). 가행이란 우리의 노력을 가속화 시켜서 온 힘을 경주해서 공부한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불교 말로 하면 가행정진(加行精進)입니다.
우리가 겨울철에 공부할 때 즉, 가행정진을 할 때에는 시간을 훨씬 더 많이 할애해서 쉬지 않고 밀어붙입니다. 지금 나한테 있는 내 본 성품은 부처다. 부처가 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길은 없다. 이렇게 한 번 알고 이해한 다음에는 자기의 온 힘을 경주해서 부처가 되기 위해 노력 정진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가행위(加行位)입니다.
이 가행위도 역시 네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이른바 사선근(四善根)이라. 우리의 공부함에 따라서 착한 성품은 차근차근 더 깊어집니다. 맨 처음에는 별 것도 아니었다가 참선도 많이 하고, 염불도 많이 하고, 불경이나 바이블도 많이 읽고 그러다 보면 차근차근 우리의 품성은 더 고상해집니다.
첫째 단계가 난법(煖法). 이것은 다스울 난(煖)자입니다. 두 번째가 이마 정(頂)자 정법(頂法)이라. 다음이 참을 인(忍)자 인법(忍法)단계고, 마지막 네 번째가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이 세계에서는 가장 높은 법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도인들 세계는 빼놓고서 세간적인 세계에서는 제일 높은 법이란 뜻입니다.
이 네 가지가 즉, 말하자면 우리의 착한 성품입니다. 이것은 미처 성인이 되기 전에 우리 범부 중생들이 닦아 나아갈 때에 그 닦아 나아가는 품성의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일 낮은 것이 난법인데 난법은 우리가 참선도 많이 하고, 염불이나 주문도 많이 외우고 이렇게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몸도 마음도 시원해 온단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대체로 그런 경계를 다 맛보셨겠지요.
몸도 마음도 시원해 와서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 단계로 불교 전문 술어로 말하면 그때는 경안(輕安)이라. 몸도 마음도 가뿐하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이제 난법이라 하는 품성이 비로소 발휘가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이런 네 가지 법을 사람들이 별로 말을 잘 안 해요. 원래 불경에 다 있는 것인데, 앞으로는 차근차근 올라가는 법을 알아야 '내가 지금 어디만치 갔구나' 점검을 할 수 있습니다. '단박에 성불해 버린다' 이렇게 말씀하는 분들이 더러 있으니까 우리가 이런 과정을 자칫 무시해 버립니다.
난법 이것은 우리가 바로 믿어 가지고서 우리 몸도 마음도 가뿐할 정도로 어떠한 고행도 충분히 할 수 있구나 하는 그런 용맹심도 나고 이렇게 되어야 난법이 나한테 발득(發得)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 전문 술어로 발득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미 내 업장이 녹아져서 선정의 맑은 지혜가 얻어졌단 말입니다.
이런 단계에서도 오히려 공부를 놓치지 않고 더욱더 가행정진하면 정법이라. 그때는 맑아진 기운이 더욱더 맑아 옵니다. 온 전신이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르르 할 정도로 아주 개운합니다. 그러면 자기 몸에 대해서 아무 무게도 느끼지 않습니다. 이 정도 되면 불식(不食)이라 해서 안 먹어도 되는 경지입니다.
이렇게 자기 품성이 더 고상하게 되어 가다가 인법(忍法)이라. 인법에 가서는 그렁저렁 살아 버리면 쑥 내려간단 말입니다. 내려가 후퇴하지만 한 번 그런 맑은 기운을 오랫동안 경험을 하고 지속적으로 우리 몸에 딱 베여 버리면 후퇴를 않습니다.
그것이 참일 인(忍)자 인법입니다.
이 단계에서도 공부를 그만 둬 버리면 항시 그 자리에서 제자리걸음밖에 안되겠지요. 그러나 용맹정진이라. 더욱더 애써 공부를 하고 마음을 애써 닦고, 우리 마음을 장사를 한다거나 다른 사업을 하고 집에서 밥을 먹거나 항시 부처님한테 가 있게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공부가 한 차원 올라가서 그 때는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도인이 미처 못된 단계에서는 이것이 제일 높은 단계입니다.
세제일법이 되면 이때는 부처님의 광명(光明)이, 부처님은 바로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의 자비 광명입니다. 빛입니다. 불성광명은 눈부신 태양광선과 같은 그런 빛이 아니라 청정광명(淸淨光明)입니다. 생명의 빛, 진리의 빛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도 광명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빛이요, 나는 길이요, 나는 생명이다.' 기독교 복음서의 이 '나'라는 것은 우리 불교적인 의미로 볼 때는 '참 나', 참다운 나라는 뜻입니다. 참 나는 광명이고, 진리고, 그야말로 하나의 순수 생명입니다.
성인(聖人)들의 진리(眞理) 말씀이 이렇게 똑같은 걸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때 굉장히 크게 환희심(歡喜心)을 주고 희망을 갖게 합니다. 지금 내 문중, 네 문중 하고 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될수록 각 종교 간의 문호를 타파해야 됩니다.
진리만 가지고서 진리만을 말하고, 하나님도 바로 진리고, 부처님도 바로 진리입니다. 부처님, 하나님은 바로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이요, 빛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서 자기 얼굴도 밝아 온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그러한 부처님을 생각하고, 우리 마음이 정화 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몸 전체가 광명으로 차근차근 비춰 옵니다.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몸에 부처님의 광명이 가까이 온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나쁜 것이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지신명이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가 되어서 우리 마음에서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훤한 빛을 보는 것입니다. 실지로 눈을 감아도 그 훤한 빛은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가 되면 그때는 세제일법이라. 도인은 미처 못 되었지만 이 인간 세상에서는 가장 높은 지위 즉, 말하자면 성자(聖者)가 못되었어도 현자(賢者)란 말입니다. 현인(賢人)입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나쁜 짓을 하려고 해도 못하는 것입니다. 벌써 정화가 되었단 말입니다. 환골탈태(換骨奪胎)가 되어 가는 것이고 자기 생리(生理)가 바꿔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마다 그냥 쉽게 깊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한계를 아셔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열심히 공부해서 난법상에서 자기 몸도 마음도 시원스럽게 조금도 부담이 없는 그런 것을 느끼셔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잔병은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좌선(坐禪)할 때 다리가 아파서 거북한 것도 역시 이 난법상이 이루어질 때쯤 사르르 풀려 오는 것입니다. 참 묘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 가르침이나 다 신비(神秘)에 차 있습니다.
우리 중생의 분별시비나 중생의 생각을 초월(超越)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원해 오다가 정법상에서는 더욱더 맑아 옵니다. 더욱 더 맑아 와서 어렴풋이 빛이 비춰 옵니다. 그 다음 인법상이 되면 빛이 더욱 더 밝게 비춰 오고 그러다 세제일법이 되면 그야말로 훤한 빛이 비춰 옵니다.
이렇게 되면 별로 후퇴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관행즉불,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화두를 참고하고, 실지로 기도를 모시고, 기도나 참선이나 다 똑같습니다. 부처님만 떠나지 않으면 다 하나입니다. 참선인 동시에 염불이고 다 같은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것저것 구분해서 피차 그런 것 때문에 서로 의를 상하고 불화스럽게 될 아무런 필요도 없습니다. 본래 근본 자리에 우리 마음만 두고 산다고 생각할 때는 가장 위대한 공부가 됩니다.
따라서 그렇게 해서 사선근, 난법이라. 우리 마음이, 몸이 정화돼서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맑아지면 몸도 정화가 됩니다. 더 맑아지면 그야말로 시원하고 맑은 기운과 가벼운 기운이 느껴지고, 그때는 정법이라. 삼계(三界)로 말하면 욕계(欲界)의 끄트머리란 말입니다. 욕계 정천입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그냥 욕계 내에서 첨벙거리고 지냅니다. 욕심의 바다 가운데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생만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다 꿈같이 생각하고 욕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도 안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각자 책임은 다해야 하겠지요. 가사 우리가 음식점을 하면서 남한테 밥을 판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내가 파는 음식을 먹고 마음이 정화되고 건강하게 되어서 빨리 부처가 되소서! 빨리 천국에 가소서!'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것이 큰 공덕이 됩니다.
그러나 꼭 내가 돈 벌어서…, 저 사람들 맛있게 먹던 말든…, 그러면 결국 죄만 짓지요. 어떤 분야나 어느 직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고기 장사를 하나 무엇을 하던 지간에 나와 남이 더불어서 똑같이 빨리 부처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담겨 있으면 다 옳은 것입니다.
상사즉불(相似卽佛)
그 다음은 상사즉불(相似卽佛)이라. 서로 상(相)자, 닮을 사(似)자. 부처와 꼭 닮아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태어나서 비록 성불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적어도 부처님의 가르침, 빤히 길이 다 나 있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성불의 길을 새로 개척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무수한 도인들이 난행고행(難行苦行) 해가며 못 먹고, 못 입고, 못 자고 이렇게 해서 훤히 길을 내 놨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길도 못 따라 간다고 생각할 때에는 참 억울한 일입니다.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사실은 제일 쉬운 길입니다.
우리 모두가 꼭 승려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아내가 되던, 남편이 되던, 자기의 위치는 어디가 되던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내 생명의 근본자리가 바로 부처님이고 하나님이다. 그것은 석가나 예수나 나나 똑같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개발 여하에 따라서,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 개발하기 위해서는 본래로 나나 누구한테나 무한한 공덕이 갖춰져 있다. 대 천재인 예수나 석가나 그런 분들도 나하고 본래로 역량이 똑같다. 이렇게 분명히 믿는 그것이 자기 암시가 되어서 우리 업장이 녹아지고 우리가 차근차근 부처의 길로 영생 해탈의 길로 인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여기까지, 구경각까지는 못 간다 하더라도 거의 닮은 정도는 되어야 사람 몸 받은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부지런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나와서 개나 소나 돼지로 안 태어나고서 또 지옥으로 안 떨어지고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한국에 태어났고 부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한국불교가 세계불교 가운데서 제일 빛납니다. 이건 틀림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의 인간으로 해서 정말로 불교 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입니다. 우리가 백 만생 동안 헤매다 다행히도 어쩌다 하필이면 한국에 태어나고 부처님 믿게 되었단 말입니다. 사업이 잘 안되고, 무엇을 하다 실패하고, 자기 마음대로 안 되어도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참 불교를 믿는 그것만 가지고도 이미 행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관행즉불, 정작으로 우리가 닦아 나아가는 그것과 닦아서 거의 부처와 닮아 있는 그런 지위. 이때는 육근 청정이라. 우리의 눈이나 귀나 코나 입이나 몸이나 머리나 모두가 청정한 기운이 돈단 말입니다. 청정기풍(淸淨氣風)이라.
아직 부처가 못 되놔서 완전한 청정은 못 되었겠지요. 그러나 오염은 받지 않습니다. 이런 정도가 되면 독을 먹여도 독살을 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약간 무얼 함부로 먹여도 뱃병도 안 난단 말입니다.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 우리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우리 눈이 밝아지고, 귀도 밝아지고, 후각도 밝아지고, 촉각도 맑고 이와 같이 육근청정이 됩니다.
아직 온전한 것은 아니어도, 따라서 부처님 공부라는 것은 내 몸도 좋고 다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자기 집안에서도 아들이나 딸이나 남편이나 다 자기를 숭배한단 말입니다. 침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나 남편도 되지만 공부해서 부처를 닮아 갈수록 누가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저절로 산신(山神)을 숭배하고, 어느 산에 척 들어앉으면 그야말로 산신도 굽어보고서 지켜 준단 말입니다.
사람 정기(精氣)가 우리 마음 아닙니까. 산 정기가 산신입니다. 집 정기가 택신(宅神)이고 물 정기가 용왕(龍王)입니다.
모두가 다 본래로 부처입니다. 부처가 별한테 가 있으면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입니다. 부처가 태양에 있으면, 불성 기운이 태양에 있으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 불성기운이 달에 있으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란 말입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는 모두가 부처님 기운이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고 그래가지고서 이래저래 현상적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근본은 다 똑같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관행즉불' 정작으로 닦아 나가는 우리 수행 과정, 이렇게 해서 난법상, 우리 마음이나 몸도 개운하고, 더 개운해서 정법상, 빛이 어렴풋이 빛나고, 또 후퇴가 없을 정도로 더욱 더 맑고 개운하고(忍法相), 그러다가 더 나아가서는 훤한 빛이 나온단 말입니다(世第一法). 그 때는 눈이 흐릿한 사람도 눈이 밝아지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육근청정이라. 우리 눈이나 귀나 코나 입이나 몸이나 정신 모두가 청정하게 되어서 그때는 무간정(無間定)이라. 무간정은 무엇인가 하면 없을 무(無)자, 사이 간(間)자. 참선이라는 정(定)자. 나쁜 생각이 우리한테 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사이에 낄 수가 없습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항시 좋은 생각만 이어 간단 말입니다. 도인들이 나쁜 짓을 하래야 그때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사즉불(相似卽佛), 이 자리는 아직은 미처 도인이 못 되었다 하더라도 나쁜 생각이 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진여불성을 훤히 볼 정도는 못됩니다.
나쁜 생각은 낄 수 없으니까 무간정이라. 조금도 나쁜 생각이 들어가지 않는 하나의 그야말로 참 삼매에 들어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관행즉불과 상사즉불의 단계는 내범(內凡)으로 아직은 범부입니다. 성자가 아닙니다.
성자란 것은 범부를 초월해서 분명히 우주의 진여불성 자리를 체험해야 성자입니다.
인간(人間)이 태어난 보람은 성자(聖者)가 되는 것이 가장 최고(最高)의 가치(價値)입니다.
금생에 못되면 그냥 마는 것이 아니라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몇 만생이 걸리더라도 꼭 성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학식도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성자가 될 것인가? 이렇게 우리가 자기 비하를 할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이것은 지식이 많고 적고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이 얼마만큼 선량(善良)한가 그것에 달린 것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성자가 안 되고 배길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꼭 성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금생에 게으름 부리면 내생에 가서 더욱 더 부지런히 해야 되는 것이고, 금생에 욕심 부리고 죄 많이 지으면 내생 가서 오욕을 다 떼어 내야하고 그만큼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몇 만 생을 두고라도 필연적으로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분진즉불(分眞卽佛)
다섯 번째 가서 분진즉불이라. 진리를 증명한다 했는데 여기서도 차근차근 올라갑니다.
보살십지로 말하자면 보살 초지(初地)에서 이지(二地),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지(十地)까지 성인지(聖人地)까지 올라갑니다.
같은 성인도 그 습관성을 온전히 녹인 분인가? 좀 많이 녹인 분인가? 그 습관성을 녹인 정도에 따라서 일지, 이지…, 그와 같이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십지에서 온전히 녹여서 그때는 그야말로 참 불지(佛地)로 구경각(究竟覺)을 우리가 성취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도달하는 것이 물론 어렵겠지요. 어려우나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벌써 이 자리가 갖춰 있습니다. 갖춰져 있다고 분명히 믿고서 염불(念佛)도 하고 화두(話頭)도 하고 그래야 공부가 빠른 것입니다.
나는 아직 멀었다. 이렇게 공부해서는 자기 암시가 되지 못하고 그러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공부가 더딘 것입니다. 따라서 '본래 내가 부처다!' 하는 그 생각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도인들이 위차(位次)를 말씀해 놓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런 자리를 우리가 빨리 알아가지고서 이 자리가 바로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니까 그 자리에다 마음을 두고서 공부를 하라는 그런 의미가 다 포함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도 스스로 자기 비하라든가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거지가 된다 하더라도, 아파서 금방 죽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역시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성불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신을 속인 죄로 꽁꽁 묶이어 코카사스 큰 바위 위에 놓입니다. 사나운 독수리들이 날아와서 프로메테우스의 눈과 간장을 쪼아 먹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때마침 헤라클레스의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런 사람도 구제를 받습니다. 몸뚱이 이것은 허깨비인 것입니다. 어느 순간도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영생불멸하는 생명 자체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구제를 받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만을 주장하는 분들은 이와 같이 보살 초지에서 이지, 삼지…, 이렇게 올라가는 것을 부정을 합니다.
돈오(頓悟)라는 것은 성불(成佛)만이 돈오인 것이지 다른 것은 아직 견성(見性)도 못된다. 이렇게 그 분들이 말씀합니다만 사실은 부처님 경전을 뚜렷이 보고 조사 어록을 착실하게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은 다 한계가 있습니다. 같은 성인도 똑같은 정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인도 근본 번뇌는 다 없애 버려서 성인이 되겠지만 습관성은 미쳐 못 여의어 있단 말입니다.
가사 사과의 예를 들어본다고 할 때 사과가 비배(肥培) 관리를 잘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지만 아직 갓 선 사과는 먹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상당히 오랫동안 시일이 지나서 익어야 비로소 사과 구실을 한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근본 번뇌를 떼어버리고서 성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습관성이 남아 있습니다. 금생의 습관성은 빨리 끊어버릴 수 있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의 습관성, 우리 인간은 어떤 누구나 과거 전생(前生)에 지옥(地獄)으로, 아귀(餓鬼)로 또는 축생(畜生)으로 다 거쳐 왔단 말입니다. 하기 때문에 과거 무수 생 동안에 지어 내려온 버릇이 우리 마음 잠재의식(潛在意識)속에 꽉 차 있습니다. 즉 과거로부터 묻어 나온 그런 번뇌는 우리가 쉽게 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진여불성은 증명했다 하더라도 상당히 오랫동안 두고두고 이른바 보임수행(保任修行)이라. 여기서 비로소 부임수행이란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보임수행은 견성(見性), 견도(見道) 한 뒤에 차근차근 이지(二地)로, 삼지(三地)로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육조단경(六組檀經)의 맨 마지막 부촉품(付囑品)에 가서 '그대들이 만약 부처의 일체종지(一切種智)이라. 부처의 그런 조금도 흠축 없는 지혜(智慧)를 알려고 생각할 때는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닦을 지니라.' 이런 말씀이 있단 말입니다.
육조단경 그러면 참선법으로 해서는 보배 같은 경(經) 아닙니까. 그리고 같은 경에서도 부촉품은 결론적인 것입니다.
돈황본(敦惶本)에는 없고, 덕이본이나 다른 본에서는 다 있습니다만 부촉품에 가서 어떤 말씀이 있는가 하면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육조스님께서 우리 중생한테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만약 부처의 무량지혜(無量智慧)를 얻으려고 한다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닦을 지니라' 일상삼매(一相三昧)는 무엇인가 하면은 한 일(一)자, 서로 상(相)자. 천지 우주가 오직 다 부처뿐이라는 그러한 의미가 일상삼매입니다. 천지우주가 다른 것이 없이 우리 중생은 그렇게 안보이지요. 그러나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조금도 구분 없이 우주가 하나의 도리로 봅니다. 우주를 하나의 도리로 보는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우리가 본래는 그와 같이 부처이기 때문에 다 갖추고 있는 것인데, 금생에도 우리가 잘 못 배우고, 잘 못 생각하고, 잘 못 듣고, 잘 못 버릇 붙이고, 이것 때문에 그렇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또는 과거 전생의 나쁜 버릇 때문에 본능적으로 그와 같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 전생의 업장(業障)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극락세계에 벌써 다 가버렸겠지요. 업장이 가벼우면 천상에도 가 버리고, 사람정도 밖에 업장이 안 되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났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 차원에서 업장을 녹여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죄를 없애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본래가 하나이기 때문에 '천지 우주는 오직 하나의 부처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그러면 일행삼매(一行三昧)는 무엇인가?
우리가 '모두가 오직 하나의 부처뿐이다.' 이렇게 일상삼매를 한다 하더라도 금방금방 또 우리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다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저것 생각하고 순식간에 생각이 다른 데로 달아나고 만단 말입니다. 이런데서 불교말로 '우리 범부는 모도범부(毛道凡夫)라' 터럭 모(毛)자, 길 도(道)자. 마치 터럭이 바람이 없어도 항시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 마음은 항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그 소중한 법문 '모두가 다 오직 부처뿐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 생각이 지속(持續)이 잘 안됩니다. 지속이 안 되면 우리 버릇은 녹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염주(念珠)를 헤아리고, 철야정진(徹夜精進)도 하고, 정근(精勤)도 하고, 참선(參禪)도 하고, 그러는 것은 다 지속을 시키기 위해서 합니다. 우리 참선하는 스님 네가 앉아서 90일 동안 결제(結制)하는 것도 모두가 다 바른 생각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 우주가 오직 부처뿐이다' 이 생각을 빈틈없이 지속시키는 것이 일행삼매입니다. 한 일(一)자, 행할 행(行)자, 일행삼매(一行三昧)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통틀어서 대의(大義)가 무엇인가? 그렇게 말하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입니다. 이것이 생소하므로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기가 곤란스럽겠지요.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모든 것이 오직 하나의 생명이다' '오직 하나의 부처뿐이다'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천지 우주는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상삼매인 것이고, 그리고 그런 생각을 지속을 시킨단 말입니다. 염주를 헤아리고 그런 것도 모두가 부처라는 생각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냥 덮어놓고 이름만 부르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부처님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의 광명입니다. 생명의 빛입니다. 내 몸에도 충만해 있고, 이 공간 속 어디에도 충만해 있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은 어리석어서 그 빛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공부가 되면 된 만치 우리는 그 빛과 가까워집니다.
그러다가 우리 업장이 녹아지면,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면 정말로 그 빛이 정작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구경즉불(究竟卽佛)
그러다가 묘각(妙覺)이라. 다 성취해 버리면 그 때는 우리가 이젠 자기 스스로 빛이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란 바로 무량광불(無量光佛)입니다. 끝도 갓도 없는 생명의 광명이란 말입니다.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의 광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요한복음서나 마태복음서의 중요한 대목에서도 다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빛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는 것은 참 나를 의미합니다. 부처님인 나, 하나님인 나, 이것이 참 나란 말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수하고 우리 중생하고 같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나 '관세음보살'을 외우나 우주에 충만해 있는 부처님의 광명을 상상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빨리 광명을 보게 됩니다. 본래가 광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란 것은 어둠과 광명의 싸움입니다. 남 미워하는 것은 어두운 마음입니다. 욕심 내는 마음도 벌써 어두운 마음입니다. 남을 사랑하고 베풀고 자비심(慈悲心)을 내면 이것은 벌써 밝은 마음입니다. 한 평생 동안 광명과 어둠과의 싸움입니다.
그 광명으로 가는 길을 보다 촉진시킨단 말입니다. 보다 더 가속화시킨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염불을 하고 주문을 외우고 하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더듬어 봐도 모두가 이 두 뜻으로 귀일(歸一)이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란 두 뜻으로 귀일(歸一)이 됩니다.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는 생각, 그와 동시에 그 생각을 밥을 먹으나, 길을 가나, 운전대를 잡으나 항시 그 생각을 놓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은 본래가 부처인지라 걸음걸음 부처가 되어 갑니다.
육조단경의 마지막 대문에 있습니다. '그대들이 만약 부처의 무량공덕(無量功德)을 성취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닦을 지니라' 마치 땅에다가 종자를 뿌려서 오랫동안 잘 가꾸고 있으면 저절로 열매가 맺어 가듯이 우리가 본래 부처이므로 그와 같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오랫동안 닦고 있으면 저절로 부처가 되어 간단 말입니다. 끝내는 열매를 맺어 성불(成佛)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 금생에 하직하고 가는 마당에도 가장 큰 자산은, 아무 것도 가지고 못 갑니다. 자기 몸뚱이도 가지고 못 가는데 다른 무엇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자기 남편하고 같이 가겠습니까? 누구와 같이 가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공부한 것, 그 부처님 공부 가지고 갑니다. 업(業)을 지어 놓으면 그 업을 가지고 갑니다.
게송(偈誦)
맨 나중에 장을 넘겨보십시오. 그냥 보셔도 아시겠습니다만 제가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순선안심탁마법회 유인물 21페이지입니다.
유심정토유심현(唯心淨土唯心現) 자성불타자성개(自性佛陀自性開)
억모자종보자재(憶母子終逢自在) 염향인자대향래(染香人自帶香來)
"영명연수선사(永明延壽禪師)"
'유심정토유심현'이라. 淨土란 것은 극락세계를 말합니다. 극락세계가 어디가 있는가 하면 천지우주가 다 진여불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오직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이 마음이 어두워지면 지옥이 되고, 이 마음이 맑아지면 극락입니다. 우리 마음으로 극락을 만듭니다. 오직 우리 마음의 그러한 순수한 상태 이것이 정토이기 때문에 유심현이라. 우리 마음으로 정토를 창조한다는 말입니다.
본래는 다 정토인데, 우리 마음이 어두워서 잘 못 보다가 마음이 정화되면 스스로 정토를 마음으로 이룩한다는 것입니다.
'자성불타자성개'라. 부처가 어디 있는가 하면 내 자성, 내 본래 면목이 바로 부처입니다. 때문에 다른 걸로 부처가 못되고서 내 스스로 부처가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부처가 되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내 본래면목, 나한테 원래 부처가 갖추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 닦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억모자종봉자재'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깊은 사랑은 역시 어머니와 자식입니다. 어느 사랑, 어떤 사랑 하지만 어머니와 자식 같이 순수한 사랑은 없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고 자식이 어머니를 생각하듯이, 우리의 참다운 근본은 부처님 아닙니까. 우리 중생들이 부처님 생각하는 것이 마치 어머님이 자식을 생각하고, 자식이 어머님 생각하듯이 그렇게 한다고 할 때는 자비롭게 언제나 같이 만난단 말입니다. 내가 본래 부처거니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가 안 되겠습니까?
부모님과 자식 간은 10겁이라! 열 겁이란 것은 무량 세월입니다. 무량 겁 동안 서로 자식이 되고 부모 되고 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부부간도 그렇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와 같이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고 자식을 어머니 생각하듯이 부처님을 생각한다고 할 때는 자재롭게 언젠가 설사 금생에 못되면 내생에 가서 꼭 부처가 된단 말입니다.
'염향인자대향래'라. 마치 우리가 향을 지니고 있으면 스스로 향기가 풍기듯이 우리가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고 부처님 생각하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한테서는 부처님 냄새가 풍긴단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되어 간단 말입니다.
이것은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 이 분은 참선 법안종(法眼宗)의 제 3 대 조사입니다. 이 분은 그야말로 부처 같은 분입니다. 자기 평생 청정하니 맑게 사신 분입니다.
'유심정토유심현'하니, 오직 마음이 본래 정토거니 우리 마음을 닦으므로 해서 비로소 스스로 정토를 이룩하고, '자성불타자성개'로다. 우리 자성이 우리 본래면목이 본래 부처거니 우리 스스로 부처를 성취할 수밖에는 없다.
'억모자종봉자재'라. 어머니와 자식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그리워하듯이 우리가 부처님을 흠모하고 동경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자유자재로 부처님을 만날 수밖에 없다.
'염향인자대향래'라. 그것이 마치 우리가 향을 지니고 있으면 향내가 스스로 풍기듯이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만큼 부처님 기운이 빛나 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게송은 불교의 시(詩)입니다.
장경혜능(長慶慧稜) 선사. 이 분도 중국 당나라 때의 위대한 선사입니다.
설봉스님의 법제자인데 굉장히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입니다. 이 분은 12년 동안이나 자기 스승도 방문하고 또 제방도 방문하면서 어떻게 공부를 열심히 했던가, 좌복을 12개나 떨어뜨렸습니다.
하루 종일 앉아 있으니까 좌복이 빨리 떨어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좌복이 그와 같이 많이 떨어질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안 통한단 말입니다.
본래가 부처라 하더라도 부처가 되는 것이 쉬운 길은 아닙니다. 저 같은 사람도 지금 천리만리입니다.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부처가 되는 것이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이 분도 위대한 선사이지만 그렇게 12년 동안이나 자기 스승한테나 제방에 다니면서 그냥 좌복이 12개나 떨어질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허나 말이 안 통한단 말입니다. 이른바 확철대오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에 친 발을 걷는 순간, 발을 걷고서 풍광을 보는 순간 마음이 확 트였단 말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순간은 찰나인 것입니다. 깨닫는 순간까지 가기가 어려운 것이지 깨닫는 순간은 찰나입니다. 그렇게 깨닫고 읊은 시입니다.
야대차의야대차의(也大差矣也大差矣) 권기염래견천하(捲起簾來見天下)
유인문아해하종(有人問我解何宗) 염기불자벽구타(拈起拂子劈口打)
"장경혜릉선사(長慶慧稜禪師)"
'야대차의야대차의' 깨닫기 전의 자기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큰 차이로다, 큰 차이로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견성오도(見性悟道)한 사람이나 범부나 비슷하지 않는가? 모양이나 얼굴이나 별 차이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정신적인 의미에서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큰 차이로다, 큰 차이로다.
'권기염래견천하'하니, 발(無明)을 걷으니 온 천하가 다 보인단 말입니다. 온 천하가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발을 걷는 순간에 깨달아 버리니까 이제 막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인문아해하종'을, 어떤 사람이 나한테 당신의 깨달음은 어떠한 것인가?
당신의 종지는 무엇인가? 이렇게 물어오면, '염기불자벽구타'라. 불자는 총채로, 이것은 먼지떨이도 되고, 또 큰스님들이 위의를 풀기기 위해서 들기도 합니다. 총채로 그 사람의 입 아가리를 냅다 짜개 버린단 말입니다.
당신의 깨달음이 어떠한 것인가? 당신의 종지가 어떠한 것인가? 이렇게 누가 나한테 물어 온다면 총채로 그 사람의 아가리를 때려서 날려 버린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깨달음이 쉽게 그냥 말로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생명을 걸고도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공부해서 그렇게 된 것인데 그냥 분별시비로서 알아 버리려고 한단 말입니다. 도인들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그 '방'을 하고 내려치고 하는 것도 다 그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고생고생 해가며 오랜 세월 동안에 그렇게 얻어서 그와 같이 본래면목을 통한 것인데 그냥 말 몇 마디로 알아 버리려고 합니다.
따라서 똑같이 참구자득(參究自得)이라. 어느 누구나 다 똑같이 참구해서 혜릉(慧稜) 스님 모양으로 그야말로 좌복을 몇 십개나 떨어뜨리고, 신명(身命)을 걸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을 그냥 당신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와 같이 말로 알아먹으려고 하면 화가 나겠지요.
청산불착취시해(靑山不着臭屍骸) 사료하수굴토매(死了何須掘土埋)
고아야무삼매화(顧我也蕪三昧火) 선전절후일퇴시(先前絶後一堆柴)
"석옥청공선사(石屋淸珙禪師)"
이것은 석옥 청공화상의 게송입니다. 고려 말엽 태고스님께서 중국에 들어가서 법을 받으신 선사가 석옥 청공화상입니다. 청공화상이 열반에 들으실 때 읊은 게송입니다.
'청산불착취시해'요, 그 푸른 산은 이 냄새나는 시체를 붙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맑은 푸른산이 썩어서 문드러지는 시체를 묻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은 명당을 찾아서 묻고 옮기고 하지만 푸른 산도 하나의 생명인데 다 썩어가는 몸뚱이를 파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사료하수굴토매'로다. 내가 죽어서 하필이면 꼭 땅에 묻어야 할 것인가? 그 맑은 푸른 산도 냄새나는 내 시체를 붙이기를 싫어하니 내가 죽어서 하필이면 꼭 산에다 흙을 파고서 묻어야 할 것인가?
그러나 '고아야무삼매화'인을, 내가 나를 돌아보니 내 몸을 태울만한 삼매의 불이 없구나!
저는 가끔 얘기를 합니다만 과거의 위대한 도인들은 자기가 공부를 해서 자기 삼매의 불로 스스로 몸을 태웠단 말입니다. 그런 분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부터서 육조혜능 스님까지 그 분들 가운데서 대체로 7할 정도는 모두가 화광삼매(火光三昧)라. 불 화(火)자, 빛 광(光)자, 자기 몸의 심장에서 불을 내어 스스로 몸을 태웠던 것입니다.
다른 스님들도 할 수 있었지만 인연 따라서 안 하셨고, 정말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할 수 있는 참다운 깨달음에 있어서는 자기 마음대로 자기 몸에서 불을 내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서 바람내려면 바람내고, 불을 내려면 불을 내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그런 경계는 아직도 천리만리이기 때문에 부끄럽게 생각하고 지금 죽음이 온다고 생각할 때는 이런 스님 모양으로 한탄하는 노래나 부를 수밖에 없겠지요.
나를 돌아보니 삼매로 내 몸을 태울 불이 없단 말입니다. '고아야무삼매화'라. 내가 나를 돌아보니 내 공부가 아직은 선정이 부족해서 삼매의 불이 없구나!
'선전절후일퇴시'로다. 다만 지금 곧 있다가 사라질 이 몸뚱이와 화장할 나무 한 무더기만 앞에 있구나! 시체를 화장하고 나면 다 사라지고 말겠지요. 선전절후(先前絶後)라는 뜻은 지금은 있지만 곧 잠시 뒤에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꼭 삼매의 불을 내어서 자기 몸뚱이를 보란 듯이 중생한테 보일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공부를 잘 했다 하면 이런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새같이 신앙심이 부족할 때 정말로 그렇게 의젓하게 열반에 들어서 자기 심장에서 불을 내어 화장할 수 있다면 중생들의 신심을 얼마나 북돋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지금은 꼭 그런 정도의 참선을 많이 한 분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만세계화(設滿世界火) 필과요문법(必過要聞法)
요당성불도(要當成佛道) 광재생사류(廣濟生死流)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그 다음에는 대무량수경에 있는 법문입니다.
'설만세계화'라도, 설사 온 세계가 불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필과요문법'이라. 꼭 반드시 동과해서 법을 들을지라.
요(要)자는 '꼭'이라는 뜻으로 풀이가 됩니다. 반드시 통과해서 꼭 법을 들어라! 그냥 놀러 가듯이 법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가 불로 가득 차 있을 지라도, 그러면 가다가 못 가고 불에 타 죽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꼭 통과해서 법을 들을 지니라.
'요당성불도'라. 요긴할 요(要)자는 굉장히 중요하게 쓰입니다. '꼭'이란 말도 되고 '한사코'라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한사코 마땅히 불도를 성취해서, 한사코 부처가 되어서.......
'광재생사류'라. 널리 생사에 헤매는 모든 중생을 제도해야 하느니라. 이런 뜻입니다.
설령 온 세계가 훨훨 타오르는 불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반드시 통과해서 불법을 듣고 그래서 한사코 우리가 부처를 성취하여서 무량중생을 제도하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오늘 저녁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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