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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3. 순선안심 탁마법회

4. 삼시교판

삼시교판 


삼시교판이라!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의 설법을 49년 설(說)이라 합니다. 더러는 45년 설도 있으나 부처님이 30세에 깨달았다고 보면 보통 49년 설이 정설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법문을 한꺼번에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때그때 중생 근기에 따라서 하신 것입니다.

그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인도(印度)란 나라는 지금도 9억쯤 되는 인구를 수용하고 있는 큰 나라이고 땅덩이도 넓은 나라이기 때문에 그 때 당시는 교통이 아주 나빠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80평생을 사셨지만 부처님이 금생에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3분의 1도 못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어디서 위대한 사람이 태어났다 하면 금방 알곤 합니다만 석가모니 같이 위대한 성인(聖人)이 인도에 태어나서 80년 동안 지냈지만 3분의 1도 몰랐다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문을 제대로 소화시키는 분들은 아주 극소수가 되었겠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초기 법문은 아주 쉽게끔 어느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애초에는 부처님계서 신중(神衆)들이나 고급 영(靈)이나 그런 중생들한테 화엄경(華嚴經)을 법문 하셨다 합니다. 화엄경 법문은 석가모니께서 깨달은 그대로 아주 에누리 없이 말씀하신 고도의 법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못 알아듣는단 말입니다. 신장이나 알아듣지 우리 인간은 통 못 알아듣습니다. 때문에 할 수 없이 차원을 낮추어서 일반 사람들한테 낮은 법문을 하셨습니다.


제일시교(第一時敎)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우리 중생들이 느끼는 그런 차원에서 중생 시각에 맞추어서 하신 법문이 제일시교(第一時敎)입니다.

따라서 보통 우리가 아는 것은 제일시교.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짓도 하고, 앞서 업감연기(業感緣起)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쁜 짓 하면 거기에 상응된 벌을 받고 좋은 일하면 그만큼 정화가 되고 행복이 온다. 그런 정도의 법문들은 모두가 제일시교에 해당된 법문입니다.

 

이것을 있을 유(有)자 유교(有敎)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 중생들이 보는 것이 있다 하는 세계 아닙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산이 있고, 무엇이 있고 하는 세계가 우리 중생들이 보는 세계고 그리고 거기에 맞는 가르침이 유교입니다.

유교 이것은 아함경(阿含經) 등 소승경이 유교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보는 대로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차원의 유교 이것은 대승(大乘)이 못됩니다. 이것은 소승(小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비록 소승경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 가운데는 다 대승이 갈무리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문자로 해서는 표현은 안했다 하더라도 다 깨달은 우주의 만유를 제대로 온전히 통달한 부처님 차원의 말씀이기 때문에 중생이 불쌍해서 중생에 걸맞게끔 낮은 법문을 했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는 대승 법문이 다 깔려 있습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셔야지 '소승 법문에는 대승은 전혀 없고 소승뿐이다.' 그래 버리면 또 허물이 됩니다.

아무튼 아함경같은 그런 경은 초기에 부처님께서 일반 대중들한테 설하신 법문이기 때문에 부처님 육성 같고 동시에 우리 수행면에서는 아주 중요한 법문이 많이 들어 있는데 지금 와서 이 쪽 대승권에서는 좀 소홀히 합니다.

 

불교는 대승권, 소승권이 있습니다. 대승권은 중국(中國), 한국(韓國), 일본(日本) 이런 나라가 대승권이지요. 소승권은 저 쪽 스리랑카, 또는 네팔이라든가 동남아 지방에 있는 불교는 대체로 소승권이라 합니다.

그래서 소승권들은 주로 아함경같은 경을 합니다. 소승권에서 허물이 무엇인가 하면 앞서 우리가 누누이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 생명이 본래로 부처다' 이런 말을 소승권에서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소승권에서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이란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가 소승과 대승을 구분하여 보았을 때 스리랑카나 동남아에서 온 불교는 수행면에서는 중요하기도 하고 모양은 좋게 보이지만 불교로 봐서는 소승권이기 때문에 안심법문이 못됩니다. 항시 갑갑합니다.

본래 모든 것이 바로 부처다. 이런 소식을 그네들은 모른단 말입니다.

 

대승은 거기에 대해서 가장 근원적인 본체를 딱 들어낸단 말입니다. 본래적인 형이상학 그런 것이 완전히 대승권에는 다 들어 있습니다.

너무나 거기에 치우쳐 '본래 부처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또 그런 사람들도 나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행동이라든가, 계율이나 그런 것을 대승권에서는 함부로 하는 분이 있습니다. '술이나 고기나 그런 것도 먹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함부로 말입니다.

'본래 때 묻지 않은 것이고 본래가 부처인데 그것이 뭐 허물이 될 것인가?' 어떤 아주 특별한 경우에 먹기는 먹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합리화 시켜서 먹어서는 안 됩니다.

 

소승경에서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말씀하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고기 먹는 것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고기를 먹어서 이른바 단백질은 좀 많아지고 스테미너는 나아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걸로 해서 우리 세포는 더욱 오염되는 것입니다. 돼지나 소나 닭이나 그런 축생들은 사람보다는 진화가 훨씬 덜 된 동물들 아닙니까. 불교 말로 하면 업장이 훨씬 더 무거운 것입니다. 업장이 무거운 세포가 내 몸 세포로 들어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좋을 턱이 없습니다.

 

다행히도 현대 병리학자들은 이 문제를 다 밝히고 있습니다. 이른바 문명병인 당뇨병, 고혈압, 심장병들이 훨씬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성자가 하신 말씀은 지금 인류 과학자들이 미쳐 다 밝히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 신앙인(信仰人)들은 일단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자는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를 내다봅니다.

 

과거를 환히 내다보는 이른바 숙명통(宿命通), 또는 미래를 내다보는 천안통(天眼通)을 하십니다. 우주의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천안통은 미래 세상을 다 알고 동시에 이 현세를 모두 다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또 남의 마음을 다 꿰뚫어 보고, 일체 세간의 음성(音聲)을 다 듣는 것이고, 가령 개가 멍멍 짖으면 저 개가 무슨 생각을 하고서 짖는가? 그걸 다 안단 말입니다.

 

또는 신여의통(身如意通)이라. 이른바 신족통(神足通)이라. 신여의통 이것은 쉽게 말하면 축지법(縮地法)이란 말입니다. 순간동안에 마음을 먹으면 천리만리 가버립니다. 그와 동시에 모양을 바꿔서 중생한테 다른 모습으로 나투는 것입니다. 중생이 불상하면 중생한테 극락세계의 훤한 빛나는 모양을 그대로 다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많은 사람 수대로 빵을 기적적으로 만들어 내 놓곤 하신 것이 모두가 거짓말이 아닙니다.

성자의 경계라는 것은 무시무시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부사의(不思議)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물질세계를 초월한 부사의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종교를 믿는 분들이 물질세계만 가지고서 눈에 보이는 세계만 가지고서 종교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종교의 가장 중요한 본체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종교는 결국 형이상학적인 문제입니다.

물질을 떠난 것은 우리가 볼 수가 없습니다. 성자들은 훤히 보고 느끼지만, 우리가 불성(佛性)이 보입니까? 여래(如來)가 보입니까?

 

불교를 믿는 분들도 눈에 보이는 세계만 긍정하려고 합니다. 우선 중생제도(衆生制度) 하려면 무슨 빌딩 많이 짓고, 물질적으로 혜택을 많이 주고, 물론 그런 봉사 사업도 필요는 합니다. 필요하나 그것이 더 큰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구제하는 일이 더 급선무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하는 것이지 물질로 배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것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사회복지 사업으로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종교가 종교인 점은 우리 정신구제(精神救濟)에 있습니다. 거기다 덧붙여서 힘이 닿으면 유치원도 짓고, 무엇도 하고 다 좋겠지요.

 

그러나 가장 큰 것은 설사 유치원도 못 짓고, 노인당도 못 짓는다 하더라도 정신 구제하는 일이 제일 급하고 큰일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의 한계를 우리가 알아두어야 그래야 자기 점검을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제이시교(第二時敎)

 

 처음에는 우리 중생 차원에서 있다, 없다 하는 이른바 유교(有敎), 우리 중생의 유무를 따지는 그런 경계를 가르치는 것이고.

그 다음은 공교(空敎)라! 빌 공(空)자 공교는 참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공교를 해석을 못하면 반야(般若)를 모르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모르면 중도(中道)를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 혼신의 힘을 다해서 공교를 알아야 합니다. 공교를 알아서 정말로 무상(無常)이 우리 몸에 배어야 합니다. 무상이 몸에 배어야 그래야 우리 행동이 빗나갈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 공교를 말씀한 경이 반야경(般若經)이라. 반야경 이것은 600부라.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모두가 다 본래로 공이라.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라. 색(色)이 공(空)이라. 이런 것을 말씀하신 부처님 경전이 600부란 말입니다. 이렇게 방대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반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아주 집착돼 있는 그런 마음을 풀어서 모두 다 해방시켜야 할 것인데, 해방시키려면 본질대로 진실 그대로 말씀해야 할 것인데 사실 그대로 말하다 보니까 모두가 다 비었다는 그 말씀을 안 할 수가 없고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째서 있는 것보고 비었다고 할 것인가? 이것을 우리 불교인들이 알기가 어렵습니다. 불교인 아닌 사람들뿐만 아니라 불교인들도 불교를 제법 아는 소리를 하지만 말씀들 들어보면 결국 공 도리(空道理)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왜 공(空)일 것인가? 앞 시간에 우리가 연기법(緣起法)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연기법이란 인연(因緣) 따라서 모두가 다 잠시간 모양을 낸단 말입니다.

사실 실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강물 속에 비친 달그림자같이 우리 중생들이 사실로 착각하여 있다고 집착하는 세계가 중생계입니다.

휘영청 밝은 달이 강물 속에 비친다고 생각할 때에 분명히 물속에 달이 있어 보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있지가 않은 그림자이듯이 우리 중생이 나라고 생각하고, 너라고 생각하고, 밉다고 생각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틀림없이 물속에 비치는 달그림자나 같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앞서도 누누이 말씀을 했습니다만 우리 중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흘러가는 흔적에 불과합니다. 흔적을 잡을 수가 있습니까. 얻을 수가 있습니까.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것입니다.

우리 어제 마음, 오늘 마음이 같지가 않습니다. 마음이 순간 찰나(刹那)도 머물지 않습니다. 변화무쌍(變化無雙)하단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 항상 이대로 같지 않는가? 몸뚱이도 역시 순간순간 신진대사(新陳代謝)해서 마지않습니다. 일초의 몇 억 분의 일도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연기법(緣起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다. 이렇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物質)이란 공간성(空間性)도 없고 따라서 시간성(時間性)도 없고 인과(因果)도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있어야 인과도 있겠지요.

연기법이기 때문에, 나중에 나오는 법문에도 있습니다만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 따라서 일어나는 법은 결국 모두가 다 비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는 '인연생'이라는 말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인연생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확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비어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흘러가는 것을 잘 파악을 못하니까 실제로 있다고 고집한단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몇 천 번 외운다 하더라도 이 공 도리를 모르면 반야심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색즉공(色卽空)이라. 또 내 의식(意識)도 공이요, 소리도 공이요, 맛도 공이요, 다 공이라 했지 않습니까.

어째서 공일 것인가? 인연생이기 때문에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실지로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있는 것같이 보일뿐입니다.

 

젊은 나이에는 사무치게 느끼기가 좀 곤란스럽겠지요. 나이가 육십이 되고 칠십이 되면 젊은 시절의 청춘도 별 것이 아닌 것이고 몇 년 안 지나면 무덤에 들어가겠구나. 죽어지겠구나. 죽어지면 또 뭐가 남는가?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이렇게 인간의 경륜(經綸)으로 해서는 느낄 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냥은 잘 못 느낀단 말입니다. 자기 청춘이 항시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예쁜 얼굴이 항시 그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무상을 느껴야 신앙의 문에 참답게 들어 올 수가 있습니다. 무상을 못 느끼면 신앙의 문에는 못 들어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내 몸뚱이 그대로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대로 있고, 항시 이별도 없고, 재산도 차근차근 불어나고 이렇게만 생각하다가는 깊은 신앙에 못 들어옵니다. 기본적인 범주에서만 뱅뱅 돈단 말입니다. 복(福)이나 빌고 하는 정도밖에는 안됩니다.

내 생명의 본질을 내 스스로 밝혀서 내가 참답게 나를 알고, 우주의 도리를 참답게 밝혀서 알려고 생각할 때는 싫든 좋든 간에 공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무상의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무상하지 않는 참다운 생명을 우리가 추구하고 구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기독교 바이블에도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을 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은 그대에게 주어지리라.' 먼저 근본적인 진리를 구하면 다른 것은 따라 옵니다. 일반 중생들은 그냥 부스러기만 구하려고 생각합니다. 부스러기는 사실은 있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니까 허물어지기가 알맞지요. 있다간 없고 없다간 있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먼저 생명 자체, 생명의 본체인 영생불멸(永生不滅)한 도리를 우리가 참으로 구할 때는 다른 것은 적당히 다 우리한테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남한테 봉사하고 남한테 바치고 하려는 경우 같으면 몰라도 정말로 우리가 영원적인 진리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생각할 때는 필요한 만큼은 다 갖추어집니다.

 

이 공 도리를 알아야 이른바 반야지혜(般若智慧)! 참다운 반야의 지혜가 있어야 우리 공부가 순풍에 돛단배가 됩니다. 우리 공 도리를 모르면 항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고 이렇게 생각할 때는 우리 공부는 항시 빡빡합니다.

'이렇게 아끼는 이 몸뚱이 이대로 공이다.' 이렇게 느껴 버려야 합니다.

 

'금 쪽같이 아끼는 이 몸뚱이 이대로 공이다.' 이렇게 느껴야 공부가 되는 것이지 이 몸뚱이 이대로 소중하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가족만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만 소중하고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 정도로는 참다운 도덕(道德)도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도덕은 진리에 따라서 진리에 맞추어서 모든 것이 다 허망무상하다. 이렇게 알아야 참다운 도덕이 확립이 됩니다. 도덕은 참다운 철학(哲學)이 있어야 참다운 도덕이 됩니다.

 

이렇게 비었다는 것을 저는 항시 말씀드립니다만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이 증명을 합니다. 현대 물리학은 모든 물질의 기본적인 작은 알갱이가 전자(電子)나 양성자(陽性子)나 중성자(中性子)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측정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떤 물질도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로 구성 안 된 것은 없습니다. 산소나 수소나 다 그렇습니다. 모든 물질이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들이 어떻게 모여 있는가? 결합 여하에 따라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무엇이 되고 그럽니다. 그런 것들이 모여서 분자가 되고 성분이 도고 우리 세포가 되고 다 그러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어떠한 것이고 모두가 다 기본적인 조그마한 알갱이는 내내야 전자, 양성자, 중성자란 말입니다. 그런데 모두를 구성한 물질의 근본 이들 알갱이는 위치나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은 무엇인가 모른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앞 시간에 말씀드린 하이젠베르그의 블확정성의 원리입니다. 그런 위대한 천재들은 그야말로 훌륭한 물리학자이면서 철학자입니다. 대 천재가 평생 동안 연구한 결과입니다. 그렇게 전자현미경을 놓고, 또 그렇게 어려운 고등 수학과 사고(思考)로 풀어 봐도 결국은 물질의 알맹이는 측정할 수 없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란 말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가 몰라버리니 그들로 이루어진 것 역시 무엇인지 모른단 말입니다. 다만 물리적인 차원의 기본은 장(場) 에너지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의 본질에 대해서는 해답을 못 내립니다.

 

그 에너지가 좌편으로 진동하면 양성자가 되고, 에너지가 우편으로 진동하면 전자가 되는 것입니다. 소위 금진좌선자기(金塵左旋磁氣)요, 금진우선전기(金塵右旋電氣)라! 순수 장 에너지가 어떻게 진동하느냐에 따라서 음양(陰陽)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역에서는 음양이 나오는 우주의 순수한 정기(精氣)를 태극(太極)이라 하지 않습니까. 우주의 정기가 어떻게 진동하는가에 따라서 전자가 되고 양자가 되고 음이 되고 양이 되곤 한단 말입니다.

이러는 것이지 고유한 물질은 없습니다. 물질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벌써 공(空)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물질이라는 것은 본래 에너지의 진동뿐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번복을 시키겠습니까. 수많은 우수한 과학자, 철학자들이 다 결론을 내린 것이고 또한 동시에 부처님께서 다 밝혀 놓고 옛날 성인들이 다 밝힌 것입니다.

그리스의 플라톤도 역시 현상계(現象界)와 이상계(理想界)라. 참다운 이상계만 존재하는 것이고 현상계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어느 철인들이나 대체로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칸트 같은 대 천재도 물(物) 자체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다.

이것이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모두가 다 비었다는 부처님의 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들은 다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좋아하고 하는 것이 모두가 다 있다는 차원에서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그렇습니다. 싸우고 아귀다툼하고 전쟁이고 다 그렇습니다.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없다고만 생각해 버리면 그런 저런 것 다 풀려버립니다. 그래서 반야사상(般若思想) 즉, 반야지혜(般若智慧)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공부는 앞서 말씀과 같이 순풍(順風)에 돛단배와 같습니다.

 

이 몸뚱이 다 빈 것이건 고행 좀 하면 무슨 상관있겠는가. 내 몸뚱이 본래 빈 것인데 덜 먹이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생명이란 것은 본래로 빈 공체(空體) 것이기 때문에 좀 덜 먹고 더 먹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꼭 몇 칼로리를 먹어야 된다. 이렇게 우리가 있다는 것에 착(着)을 하니까 그런 것을 채우려고 막 먹는 것이지 본래가 비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우리 몸무게도 본래 없기 때문에 이대로 저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본래가 빈 것이기 때문에 본래 사실은 무게도 없는 것입니다. 본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무게가 없다고 봐야겠지요. 무게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도인(道人)들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하늘로 훌쩍 날라 갈 수가 있단 말입니다.

현대 물리학적으로 생각을 해도 신통(神通)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도 신통 그러면 그것은 재주나 부리는 것이지 참다운 도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함경이나 기타 부처님 경전을 보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이나 신통 말씀이 하여튼 수 천 군데가 넘습니다. 성자의 말씀은 조금도 호리도 거짓이 없습니다.

 

이 공 소식을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있다고 집착하는 중생의 번뇌를 쳐부수기가 하도 어렵기 때문에 600부나되는 부처님 경전에서 공 소식을, 이것도 비고 저것도 비고, 금강경(金剛經)만 보아도 아상(我相)인 나라는 상도 없고, 인상(人相)인 너라는 상도 없고, 중생상(衆生相)도 없고, 또 수자상(壽者相), 목숨이 짧다 길다도 없다고 설파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내 목숨은 80년이다. 70년이다. 그렇지만 그런 연한(年限)도 역시 물질이 있다고 전제(前提)할 적에 그런 시간(時間)도 있는 것이지 물질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무슨 시간이 있겠습니까. 비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항시 느끼십시오. 느끼시고 마음이 괴롭고 지칠 때는 내 몸뚱이도 본래 빈 것이고, 생명은 본래 무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생명은 본래 꼭 칼로리만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십시오.

 

저번에 신문을 보니까 인도에서 어느 수행자는 120일 동안 물만 먹고살았어요. 120일 동안 옆에 분들이 모두 증명을 해 놨습디다.

인간이라는 것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잠재력은 우리가 정말로 마음만 굳게 먹으면 부사의한 힘을 다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밖에는 아니다. 나는 꼭 얼마를 먹어야 된다. 하루 세끼 먹고 간식도 먹어야 내 체중을 유지한다. 고기는 얼마를 먹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빈 소식을 알 수가 없지요. 그렇게 믿으니까 그렇게 안 먹으면 허기가 지고 영양실조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제삼시교(第三時敎) = 중도교(中道敎)

 

제삼시교는 삼시교 가운데 마지막 시교인데 중도교라고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다 비었다고만 해버리면 그때는 너무나 허망하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허망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한 것은 모두 비기는 비었는데 참다운 알맹이는 결국 부처님입니다. 이른바 중도교란 말입니다.


천지 우주는 그냥 아무 것도 없이 빈 것이 아니라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충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성품, 하나님의 성품이 우주에는 가득 차 있습니다. 우주는 하나님이 섭리(攝理)하시고 부처님이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잘못 아시는 분들은 기독교는 비과학적이고 현대에는 맞지 않다. 그렇게 말하지만 현대와 같이 이렇게 개명(開明)한 시대에 18억 인구가 믿고 있습니다. 예수가 가신지 1900년 세월 동안에 무수한 사람들이 믿어 왔습니다. 진리가 아니면 믿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단순 소박하게 말씀해버렸기 때문에 그것이 이론적으로 체계가 별로 안 서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기가 곤란스러운 것이지 진리 상으로 봐서는 모든 진리가 하나입니다. 우리는 따라서 어느 성자(聖者)의 말씀이나 다 존중하고 숭앙을 해야 합니다. 지금은 다 그럴 때입니다.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이런 경전들은 천지 우주는 모두가 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이다.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가르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아함경만 보신 분들은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소식만 말해 있으니까 꼭 그것만 집착해 가지고서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 반야심경, 금강경 같이 모두가 비었다고 가르치는 경만을 주로 보신 사람들은 모두는 비었으니까 허망하지 않는가. 허망한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부처님 공부를 하실 때는 꼭 이 중도사상(中道思想), 본래 부처님께서 조금도 에누리 없이 진리(眞理)를 우리한테 보여주신 그 도리를 가르친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이런 경들을 보셔야 우리 마음이 허무에 물들지 않고 마음의 번뇌만 끊어버리면 이대로 다 진여불성 중도실상이며 이 세상도 이대로 극락세계(極樂世界)일 수가 있는 것이고, 우리 마음도 바로 안심(安心)하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이 되어서 조금도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삼시교를 부처님 비유담으로 삼수도하(三獸渡河)라 합니다.

삼수도하란 세 마리의 짐승이 냇물을 건너단 말입니다. 토끼와 말과 코끼리 셋이 내(川)를 건너가는데, 토끼는 몸집이 가벼워서 냇물 위에 둥둥 떠서 방정맞게 건너간단 말입니다. 말은 덩치가 토끼보다는 크고 무게가 있으므로 잠기기도 하고 뜨기도 하면서 불안스럽게 건너갑니다.

그러나 코끼리는 덩치가 훨씬 더 크기 때문에 뚜벅뚜벅 강바닥에 발자국을 내면서 안전하게 건너갑니다.

 

그래서 유교는 모든 것을 중생의 상식 차원에서 '좋다, 궂다.' '있다, 없다' 이런 것만 따지는 마치 토끼가 내를 건너가는 격이고, 우주의 진리가 깊고 심심미묘한데 깊은 진리까지는 음미를 못하고 그냥 겉만 피상적으로 흘려 간단 말입니다.

그리고 말(馬)은 조금 덩치가 크므로 가끔 깊이 잠기기도 하지만 또 역시 바닥을 미처 음미를 못한단 말입니다. 그것은 공교라. 다 비었다는 소식만 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본 것이 비었지 참으로는 진여불성으로 충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코끼리는 뚜벅뚜벅 진리의 바닥을 다 딛고 건너갑니다. 때문에 코끼리가 건너는 것을 중도교에 비유합니다.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그런 가르침은 모두가 중도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바쁘셔서 어느 세월에 이와 같은 경들을 다 보시겠습니까. 안 보신다 하더라도 이 중도교의 도리를 아시게 되면 보신 것이나 똑같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하신 최후의 가르침은 모두가 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의 가르침입니다.

첫 시간의 안심법문에서 말씀드린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다' 내 마음의 본질이나 우주 만유의 본바탕이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하신 것도 중도의 법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단한 법문 같지만 그 하나 가운데 상식을 초월하고 또 모두가 비었다는 허무주의를 초월하고 부처님이 하시고 싶은 그 말씀을 그대로 표현한 가르침입니다.

 

저는 신도님들이 오시면 반야심경을 드립니다. 반야심경을 드리는 이유가 뭣인가 하면 너무나 상식에만 끌려서 항시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일상적인 가르침에만 머물러 버린단 말입니다. 이른바 세속적인 '있다. 없다'하는 저속한데만 머물러 버립니다.

따라서 그것을 타파하려면 모두가 다 비었다. 반야심경에 있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이루어진 색온(色蘊)도 공이요,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사온(四溫)도 공이다. 따라서 육진 경계인 색(色)도 공이요, 소리도 공이요, 냄새도 공이요, 맛도 공이요, 내 감촉도 공이요, 내 뜻으로 짓는 제법도 공이다.

이런 법문으로 해서 우리가 공 소식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또 반야심경만 봐 놓으면 그야말로 모두가 다 공 인줄만 알고 참말로 진정한 알맹이는 잘 모른단 말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으로 해서 우선 우리 마음의 허망한 상을 다 쳐부수고 그 다음에는 중도실상, 참다운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여불성 자리, 본래 부처님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이 자리를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하기 때문에 '보리방편문'을 드리곤 합니다. 저희가 많이 준비가 돼 있습니다. 한국서 인쇄를 해가지고 짊어지고 미국까지 건너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실 적에 듬뿍듬뿍 가지고 가셔도 됩니다. '반야심경' '보리방편문' 말입니다.

제법 공 도리, 반야사상 또는 중도사상, 참다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공과 중도가 같이 어울려 있어야 참다운 반야바라밀이 됩니다. 우리가 법문을 할 때에 항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을 봉송하지 않습니까.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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