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 ㆍ 근본선(根本禪)
이 시간에는 주로 참선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참선 공부는 우리가 가령 수영을 한다 할 때는 물에 들어가서 실지로 헤엄을 치는 법을 배워야 하듯이, 참선공부도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우리가 닦아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른바 실참실수(實參實修)라.
정말로 우리 몸으로 부딪혀서 참선을 해 나가야 됩니다. 그러나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대강 이치로 체계가 서야 흐트러짐이 없고 또 능률도 빠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덮어놓고 공부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모두가 다 어느 분야에서나 세밀하게 밝혀 놓은 그런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 가르침들을 충분히 참구해서 우리의 부질없는 분별시비는 끊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많이 해 보신 분들은 짐작을 하시겠지만, 사실 맨 처음부터서 쑥쑥 잘되는 것은 없습니다. 참선의 가장 큰 두 가지 원수가 불교 전문 술어로 하면 도거(棹擧)와 혼침(惛沈)입니다.
도거(Auddhatya)란 이것저것 따지고 분별하는 것이고, 혼침(Styand)이란 앉으면 꾸벅꾸벅 졸아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졸아버리는 시간은 죽은 시간과 똑같아서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은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그야말로 참 맑고 청정해 본래 면목자리만 가지고 나가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서 참선을 좀 했다 하더라도 한도 끝도 없는 분별시비가 나온단 말입니다. 평소에 그렁저렁 생활을 할 때는 안 나오다가도 정작 참선이라 해서 들어 앉으면, 과거에 섭섭했던 일, 미워한 일, 좋은 일들이 자꾸만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면 머리나 몸이 가볍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습인(習忍)이라. 익힐 습자, 참을 인자, 오랫동안 공부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몸에 배여 습관성이 생깁니다. 처음에 참선공부 할 때 좀 안 된다 해서 그냥 놓지를 마십시오. 우리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란 것은 무한 공덕이라. 무한공덕이 들어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향해서 공부를 하다보면 차근차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거기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근기나 선근에 따라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습니다마는 보통 차원에서는 이른바 경안심(輕安心)이라. 경안이라는 것도 불교전문 술어인데 여러분들께서는 외워 두십시오. 가벼울 경(輕)자, 편안할 안(安)자, 경안이라는 것은 몸도 마음도 가뿐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가뿐할 때는 다른 헛된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가뿐해지는 경안이 서야 피로를 모른단 말입니다. 그래야 이른바 내 몸을 어느 정도 조복을 받는 것입니다. 보통으로 참선하는 사람들이 다 그러겠습니다마는 한 십 년쯤 선방에서 고생 고생해야 경안이 좀 나오는 것 같아요. 좀 빠르고 느린 차이는 있으나, 몇 십 년 된 사람도 역시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참선에 들어가면 몇 십분도 못 되어 끄덕끄덕 좁니다. 그런 분들은 아직 경안이 못 나온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스님 네들은 경험들도 많고 해서 새삼 말씀드릴 필요가 없지만, 처음으로 참선을 배우는 일반 재가 불자님들은, 참선공부, 이것은 불도의 정문(頂門)이라. 부처님 가르침 이것이 정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다른 가르침은 방편설도 많이 있고 여러 가지 중생의 근기 따라서 하는 법문도 많지만은 참선 법문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바로 내 마음이 부처요, 마음 떠나서 부처를 구하면 이것은 사도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직통으로 들어가는 그런 직설법문이기 때문에 불도의 정문(頂門)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공부를 하던 지간에 종당에는 우리가 참선을 해서 깨달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자라면 다 해야 되는 것이고,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참선을 해야 됩니다. 가사 기독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바깥에다 설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바로 내 마음의 본체이고 우주의 본체다. 하나님은 무소부재라 안 계시는 데가 없다. 이렇게 법신불 차원에서 하나님을 보면서 참선을 해야 되겠지요. 참선을 불교인만 닦는 정문이라고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어서 다른 종교의 우수한 점이라던가 발전적인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또 수용해야 합니다.
저 쪽 기독교 인구도 지금 17 - 8억인데 그 많은 사람들을 대립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부처님의 일통법문으로 인도해 가면서 같이 공부하는 쪽으로 나가야 할 것이고, 또 그네들이 나가는 공부도 역시 참선공부로 유도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을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의 본뜻도 하나님이 밖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 마음이 맑은 자는 행복할 지어다.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요, 하는 대목들을 우리가 허심탄회하게 볼 때는 부처님 경전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고, 특히 법화경과 유사한 대목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어느 분야이던 간에 다른 공부도 그렇겠지만 특히 참선공부는 마음을 활짝 열어야 됩니다. 앞서 시간에 배운바와 같이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또는 진여연기(眞如緣起)라. 모든 존재는 진여불성으로부터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양을 달리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항시 의심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진여불성 자리에서는 하나일망정, 현상만 볼 때는 이것과 저것이 다르고 나와 네가 분명 다르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지만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현상만 보니까 다르다고 보는 것이지 본 성품자리, 본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혼연일체라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사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다 마음의 현상이요, 마음은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없으므로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은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현상적으로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달리 했을 뿐 진여불성이라는 차원에서는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상만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바닷물이 바람 따라서 파도가 크고 작고하더라도 작은 파도나 큰 파도나 똑같은 물 아닙니까.
그와 같이 우리가 인연 따라서 어떻게 상황이 바꿔지던 간에 진여불성이라는 그 자리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너나 나나 모두가 같은 몸이요, 같은 몸이기 때문에 동체대비(同體大悲)라. 거기에서 참다운 자비가 나오고 참다운 도덕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강사가 아닙니다. 어찌 됐던 참선하는 선사이기 때문에 강의는 잘 못합니다마는 그것은 여러분들이 아시고 이해하시리가 믿습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중요한 대목들만 딱딱하게 일러주고 본인들이 스스로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참선하는 사람들의 방법인데, 여기는 미국인지라 또 미국의 풍토는 다르지 않습니까. 더러 타이르고 밝히고 해서 납득을 시켜야 하는 자리이므로, 특히 재가 불자님들은 그런 것을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참선한다고 해서 제 상식으로 해버리면 재미가 없겠지요. 그러나 이 선(禪)이란 것은 특히 문자를 되도록 절감을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편의상 말을 해야 하겠지요.
시간이 촉박하여 될 수록 읽어가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선(禪)
선(禪) 이것은 이른바 젠(Zen), 우리 한국 선은 세계적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선은 많이 알려져서 그 사람들이 Zen 그러니까 일본 쪽에서도 선을 제나(Zana)라고들 발음합니다. 그리고 선과 정을 구분을 하는 분도 있고 구분 않고 합해서 선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선(禪)은 관(觀)을 위주로 하고, 관(觀) 이것은 관찰을 뜻하는 것입니다. 정(定 : samadhi)은 이른바 삼매에 든다고 하지요. 삼매란, 마음에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한 생각에 머무르는 것이 삼매입니다. 독서도 역시 독서만 열심히 하면 독서삼매라 하는 것이고, 여기서의 정은 그냥 나쁜 생각으로도 한 곳에 머무를 수가 있는 것인데, 나쁜 생각이 아니라 정념으로 한 생각에 머무는 것이 이른바 사마디(samadhi)란 말입니다. 정념이란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 마음의 본래 성품자리, 본래 성품은 바로 진여불성이 아닙니까.
그 진여불성 자리에다가 오로지 우리 마음을 머무르게 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사마디(samadhi)라고 합니다. 선은 그 자리를 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관조를 한다는 말입니다. 가사 실상관(實相觀)이라. 실상관은 우주법신을 관찰하는 것이고, 그래서 선(禪)은 관찰을 위주로 하고 정(定)은 지(止)를 위주로 하나 합하여 정혜균등(定慧均等)의 묘체(妙體)를 정(定)이라고 합니다. 정혜균등이란 말을 참선 배우는 사람들은 꼭 외워 두셔야 됩니다. 정은 우리 마음이 오로지 한 곳에 머무는 것을 정(定)이라고 하고, 즉 고요한 것을 정이라 하고 또 혜(慧) 이것은 참다운 지혜, 우주의 실상을 비춰보는 그런 지혜(智慧)를 혜라고 합니다. 여기 있는 지혜는 보통 지식적으로 아는 지혜가 아니라 참다운 반야의 지혜, 우주의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가 여기 있는 정혜(定慧)의 혜에 해당합니다. 정(定)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념(正念)이라. 정념(正念)이 한 군데 모이는 것이 정(定)이란 말입니다.
정혜균등이란, 정과 혜가 평등하게 나가는 것이고, 고요한 것은 정이고 혜는 비춰보는 것인데 무얼 비춰보는고 하면은 실상(實相)을, 우리 불성을 비춰본단 말입니다. 이것이 가지런히 되어야 참선진도가 빨라집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우리 본래 면목, 우리 불성 자체는 원래 정, 혜가 같이 구족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성이나 우주의 본성인 진여불성 자리는 정과 혜가 본래적으로 원만구족하게 갖춰져 있기 때문에 우리 공부도 거기에 걸맞게끔 정, 혜가 가지런히 균등하게 나가야 이른바 개안이 빠르단 말입니다. 정에만 치우치고 혜에만 치우치더라도 공부가 안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공부 진도가 더딘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때나 중도를 추앙합니다. 중도란 것은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 아니라, 다 갖추고 있는 온전한 자리를 제대로 참구하는 것이 중도란 말입니다. 이른바 진여불성이 바로 중도인 것이고, 우리 본성이 바로 중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할 때는 꼭 고요하니 우리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정(定)과 또는 우리 불성 자리를 비추어 보는 혜(慧)와 같이 아울러 나가야 공부가 빠른 것입니다. 그런데 관찰만 많이 하고 혜 쪽으로만 치우쳐서 고요히 머무르지 않는다면 공부가 더디단 말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六組檀經) 부촉품에서 일상삼매(一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 말씀을 제가 드렸지요. 일상삼매 이것은 혜에 해당합니다. 일상삼매는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인 평등무차별의 진여불성이라고 관찰하는 것이고 그리고 일행삼매는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일행삼매이고 정(定)에 해당한다 말입니다. 좀 어려운 법문이나 기본적으로 알아 두시면 공부하실 때에 큰 도움이 되십니다. 일상삼매, 일행삼매, 정, 혜 또는 간단히 천태식으로 말하면 지관(止觀)이라. 그칠 지(止)자는 정(定)에 해당하고 관(觀)은 혜(慧)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우리 불심에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참다운 지혜 또는 조금도 번뇌가 없는 고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공부도 거기에 맞게 해야 우리 번뇌의 습관성을 빨리 녹이고서 참다운 진여불성을 견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선정을 사유수(思惟修)라. 사유수란 것은 바르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바르게 생각을 해야지 그냥 덮어놓고 생각한다고 그것이 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 만유란 것은 오직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이렇게 뚜렷이 생각해야 그것이 정사유(正思惟)가 됩니다.
그 다음에는 기악(棄惡)이라. 버릴 기(棄), 모질 악(惡). 악을 버린단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선공덕(禪功德)입니다. 사유수라는 것은 바른 생각을 관조함으로 해서 자연적으로 악심이나 나쁜 생각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은 정려(精慮)라. 고요할 정(精), 생각할 려(慮). 고요히 조금도 삿된 생각 없이 바르게 참다운 진리를 생각한다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선정의 뜻풀이 입니다. 공덕총림은 무엇인가 하면, 공덕, 이것은 자기나 남이나 누구나 간에 유익되게 하는 것이 공덕입니다. 총림 이것은 그야말로 수풀모양으로 하나 둘 있는 것이 아니라 숲처럼 무한공덕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참선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무한공덕이 거기에서 우러나온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하나의 참선공덕이 따르는 것입니다. 아까 기악, 악을 없애는 것도 참선을 하면 차근차근 사람이 선량해져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여불성하고 가까워져 가니까...
마땅히 진여불성자리는 만능의 자리인 동시에 오직 하나의 생명자리이기 때문에 나쁜 마음이 생길 수가 없겠지요. 자타(自他)라는 구분도 역시 참선을 해 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차근차근 자기 모서리가 끊어져서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는 생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본래가 무아이기 때문에 공덕총림 또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오직 마음이 하나로 묶인단 말입니다. 처음에는 이 생각, 저 생각이 다 나오지만은 마음이 정화가 되면 오직 하나의 생각으로, 영원적인 그 맑은 생각, 부처님 마음 같은 그런 생각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오직 부처님 경지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현법락주(現法樂住)라. 이것 역시 참선공덕입니다. 우리가 지금 재미있는 것도 있고, 싫은 것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의 재미있는 것은 속락(俗樂)이라. 세속적인 오욕 같은 것은 재미는 좀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허망 무상한 안락인 것입니다.
그러나 법락(法樂)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안락이 아닙니다. 법락, 이것은 공부를 해서 원래 우리 불성에 갖추어져 있는 공덕을 얻으므로 참다운 안락이 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신통자재나 그런 것도 모두가 다 법락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겠지요. 현법락주라. 법락이 나온다는 말이고 아까 얘기한 경안이라. 몸도 마음도 가뿐하니 환희심에 차서 닦아 나가는 것이 경안인데, 그것 역시 법락입니다. 그것이 견성오도(見性悟道)한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이 법락이 나타나는 것이 현법락주(現法樂住)인데 참선이라는 뜻에서 이런 등등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종(禪宗)의 선(禪)은 고요히 생각도 하고 사유(思惟) 정려(精慮)하는 뜻을 취하고 있으나 그 체(體)는 열반묘심(涅槃妙心)이라. 열반묘심은 불심입니다. 일체종지의 근본자리. 본래면목자리인 불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냥 선정이라고 할 때는 관찰도 하고 그러겠지만 선종(禪宗)에서 선이라 할 때는 훌쩍 뛰어 넘어 이것저것을 다 초월한 하나의 불심을 바로 선이라고 합니다.
불심만을 문제시하고 견성만을 문제시하는 그런 것이 선종(禪宗)의 선(禪)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의 교리 내에서 보통 선정이라고 할 때와 선종에서 '선' 할 때는 차원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문화가 상충하지 않고 같이 화해가 되어 더불어서 발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불교 내에서 부질없는 소모를 안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도 무슨, 무슨 종파가 오십 종파요, 일본도 지금 팔십 종파라 합니다. 더구나 미국은 종교박람회장 같아서 불교도 지금 별의 별 파가 다 들어와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 각축하고 다투는 마당에서는 우리가 굉장히 주의를 해야 합니다. 다른 쪽을 이해도하고 살피기도 해야겠지요. 제 입장도 그런 처지에 입각해서 근본선도 우리는 알아야 되겠고, 또 스리랑카 사람들이 공부하는 것도 참고를 해야 되고, 일본의 임제종이나, 화두를 참구하는 의미도 알아야 되겠으며, 또는 화두 없이 잠자코 비춰보는 묵조선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간단히 윤곽만 살폈지마는 그런 것을 다 취급을 했습니다.
근본선(根本禪)
근본선은 바로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 어째서 구차제정이라 하는가 하면 사선정(四禪定)과 사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을 합하면 이것이 아홉이 되지 않습니까. 근본선 이것은 아함경을 근간으로 합니다. 아함경은 부처님 육성 같은 경입니다. 부처님께서 초기에 참선하는 법은 모두가 다 근본선에 입각해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직접 근본선으로 성도(成道)하셨고, 도 열반 드실 때도 열반경을 보면 근본선으로 해서 사선정과 사공정에 드시고, 멸진정에 들어 가셨다가 다시 또 내려오셔서 사선정에 들어가서 열반에 드셨다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근본선으로 공부를 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아함경을 보면 '그대들이 철저한 계행을 지키고 그래서 초선에 들고 이선에 들고 삼선, 사선에 들어서 멸진정을 성취해서 아라한을 성취한다.'라는 말씀이 수십 군데 있습니다. 따라서 근본선에 대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사선(四禪) 이것은 초선, 이선, 삼선, 사선. 등의 차원의 차이이기 때문에 사선이라 그럽니다. 그러면 초선은 어떤 것인가. 대체로 윤곽을 좀 아셔야 되겠지요. 초선 이것은 참선을 오래 해서 안정이 되어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우리 마음에 산란스런 생각이 들어가지 않고 이른바 삼매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삼매에 들어가면 산란스런 마음이 없어집니다. 이른바 무간정(無間定)이라. 다른 망상이 사이에 끼어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처음 앉으시면 다른 망상이 많이 나오지만 그것은 초기에 그럴 뿐입니다.
재가 불자님들은 주로 조석으로 오랫동안 앉으셔야 되겠지요. 그리고 평소에 장사를 하시던지 어디를 가시던 지간에, 미운 사람을 보더라도 우리가 연기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본래 성품은 다 부처인데 현상적으로 해서 남자고 여자고 그러는 것이지 본래는 다 부처가 아닌가. 누구를 만나도 부처같이 생각하고 부처같이 대접하도 보면 참선공부도 손해를 안봅니다. 우리 마음을 항시 하나로 추스르고 다스려야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꼭 집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 참선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도 이것저것 생각하면 참선이 아닙니다. 마음이 내는 것이 모양이 내는 것이 아니니까요. 따라서 우리 생활에서 무엇을 하던지 부엌에서 공양을 짓던지 누구랑 얘기를 하던 지간에 모두를 다 부처님 화신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항시 생각을 하나로, 근본적인 자리로 돌리면 공부에 손해가 없이 참선이 진전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딴 생각이 안 나온단 말입니다. 참다운 진리만 생각하고, 참다운 진리만이 옳은 것인데 그것이 확신이 됐는데, 다른 생각이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이른바 삼매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초선에 들어갑니다. 초선에 들어갈 때는 경에 보면 우리 생리가 바꾸어집니다. 마음이 바꾸어짐에 따라서 우리 몸도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팔촉(八觸)이 발생하게 됩니다. 팔촉이라는 것은 몸이 어떤 때는 뜨겁고, 어떤 때는 춥고, 또는 몸이 공중에 뜨기고 하고 그런 저런 경험이 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 생리가 바꾸어지는 증거입니다. 이른바 요새 도가(道家)식으로 말하면 환골탈태(換骨奪胎)란 말입니다. 우리가 그냥 생각할 대는 참선은 많이 하나 적게 하나 그대로 가만히 있는게 아닌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지 몸이야 그대로 가만히 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몸과 생리가 바꿔지는 것입니다.
조금 더 불교의 전문적인 말로 하면 소조사대(所造四大)라. 오염된 지수화풍 사대가 청정한 명정사대(明靜四大)로 바꿔진단 말입니다. 바꾸어지는 과정에서 나오는 공덕입니다. 그것은 불경에 다 있습니다. 그렇게 바꾸어져서 육근청정이 되는 것입니다. 생리가 청정하게 되어야 초선에 들어갑니다. 초선에 들어가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재가 불자님들이 참선을 좀 했다고 해서 나는 지금 초선인가 이선인가 이렇게 갑자기 생각을 마시고 공부를 끊임없이 하셔야 됩니다. 그냥 쉽게 누구나가 초선에 쑥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공부가 좀 되어서 초선에 들어가도 그렁저렁 해버리면 또 후퇴가 되겠지요. 공부란 것은 지속을 시켜야 됩니다. 그렇게 지속을 시켜서 초선에 들어가면 그 삼매의 기운을 아주 소중하게 아껴서 보임(保任)을 해야 됩니다. 보임이라는 것은 공부하는 참선기운이 흩어질세라 소중하게 말도 가만가만히 하고, 행동도 조심하고, 서두르지 말고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함부로 하면 선정 기운이 흩어져 버립니다. 따라서 음식도 조금씩 먹고, 될 수 있으면 말도 적게 하고, 말 많이 하면 그만큼 선정기운이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정에 들어가려면 가급적 말도 않고 혼자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마는, 일단 사회생활을 하려면 그렇게 하기가 어렵겠지요. 그래서 재가불자님들도 평소에 그렇게 공부하시다가 일 년에 한두 번쯤은 내외간에 함께 절에 오셔서 일주일이나 며칠씩 오로지 공부하는 용맹정진의 기회를 가지셔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본래대로 한 차원씩 올라갑니다. 참선공부,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어느 누구나가 본래의 참 자기, 영생해탈의 열반경계, 참다운 행복을 바라는 이들은 누구나가 꼭 가야할 길입니다. 게으름 부리면 못 가겠지요. 가고 안 가고는 본인한테 달렸겠지만, 우리가 인간인 한에는 꼭 가야 됩니다. 또 못 간다고 할 때는 끝없이 윤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선에 올라가면 정심(靜心)이라. 마음이 청정해서 욕계번뇌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초선까지는 아직 욕계번뇌의 종자가 좀 남아 있습니다. 평소에는 별로 생각이 안 나오다가도 경계에 부딪히면 욕심이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선에 들어가면 남녀의 음욕도 다 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이선을 가리켜서 불교 전문 술어로 하면 구족지(具足地)라. 구족지가 무엇인가 하면은 계행을 참답게 지킬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선까지 못 들어가면 계행은 억지로 지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니 지키는 것입니다. 이선에 들어가면 음욕이 떨어져 버리니 그때는 다른 생각이 나올 수 없습니다. 계행이 원만히 갖춰지는 때입니다. 구족지라.
삼선에 들어가면 재미있기는 삼선이 제일 재미있다 그럽니다. 이 세상에서 삼선 들어간 재미같이 큰 재미가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삼선락이라. 그래서 아주 재미있고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광명이 훤히 비춰서 이것저것 다 알게 되고, 사선 들어가면 그때는 호흡이 끊어져 버립니다. 사선은 부동지(不動智)라. 사선에서는 호흡이 끊어집니다. 그때는 산란스런 마음이 조금도 안 나옵니다. 이렇게 들어갔어도 아직은 견성은 못됩니다. 우리가 견성 그러면은 쉬운 것 같지만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저도 여러 선방에서 공부하면서 보았지만 가벼운 사람들은 이런 근본선을 모르고 좀 재미있으면 그만 공부 다 배웠다고 말려도 튀어 나간단 말입니다. 공부를 더 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근본선을 우리가 꼭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 선정을 증명해 나가는 한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몰라 놓으면 환희심만 나면 그만 다 된 줄 압니다. 참선을 하고 있으면 기분 좋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닌 것인데 그러면 공부 다 되었다고 그만 뛰쳐나간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무렇게나 먹고 아무렇게 행동하면서 견성 했으니 무애행(無碍行)이라 아무렇게 행동해도 본래 청정이다 이런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선만 올라가도 음욕이 끊어져 버려서 음탕한 생각도 안 나고 음탕한 짓도 못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삼선은 그러한 정도가 더욱 더 증장 되고 사선은 호흡도 끊어져 버려서 참다운 삼매에 들지요. 그래서 부동정(不動定)이라 합니다. 선정 중에서는 가장 고요한 것이지요. 그렇게 되었어도 역시 아직은 성자가 못됩니다. 그러다가 저 멸진정이라.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면 그때는 모든 번뇌를 모조리 끊어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我)의 뿌리를, 자기라는 그 뿌리를 뽑아 버린단 말입니다.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해야 성자요, 도인입니다.
그래서 사공정(四空定) 이것은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이라. 모두가 다 텅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는 광대무변한 세계를 관찰하는 그런 선정(禪定)이고, 식무변처(識無邊處)는 모두가 다 그냥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식(識)이라 하는 하나의 마음의 그림자가 우주에 충만한 때고, 그 다음 무소유처(無所有處)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공(空)도 아니요 식(識)도 아닌 알 수 없는 그러한 청정무비(淸淨無比)한 것이 충만해 있는 때고,
그 다음의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생각이 전혀 없지도 않고 아주 미세한 생각, 극미(極微)한 생각만 남아 있는 때라. 이것이 비상비비상처입니다. 따라서 비상비비상처까지 올라가도 아직은 성자가 못됩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셔서 스승을 찾아서 공부하실 때의 부처님의 일대기는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부처님께서 거쳐 가신 하나의 행로를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맨 처음에 발가바 선인, 고행을 위주로 하는 선인에게서 고행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지독한 고행을 다 했습니다. 하루에 씨앗 한 톨이나 보리 한 알을 드시면서, 하여튼 누가 따를 수 없는, 어느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고행을 다 했습니다. 그렇게 고행해서 발가바 선인이 올라간 선정에 들어갔습니다. 발가바 선인은 고행으로 해서 범천에 올라가는 공부를 했던 분입니다. 범천도 욕계가 아니라 색계입니다. 따라서 굉장히 청정한 곳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공부해 가지고 범천에 올라가는 선정에 드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범천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범천 역시 영생의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의 천상이라는 제한된 곳에 올라간 것이지, 그것이 해탈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구하는 것은 생사 해탈인데 천상에만 올라가면 된다는 스승을 뿌리치고 그 당시에 제일 훌륭하다는 이른바 아라라카란에게 갔던 것입니다.
아라라카란은 이른바 무소유처라. 무소유처까지 올라가는 선정을 닦는 분이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발가바에게 범천까지 올라가는 선정을 배웠고, 석가모니께서는 본래 천재적인 분이라 쉽게 무소유처까지 올라가도 결국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지 이 또한 해탈의 법은 아니었기 때문에 거기서도 떠나면서, "스승이시여, 어디로 가면 더 높은 공부를 배우겠습니까? 당신보다 더 나은 분이 있으면 알려 주소서."라고 물으니까 아라라 스승이 "내 아들이 우까다인데 나보다 더 공부를 많이 해서 삼계에서는 제일 꼭대기 하늘인 비상비비상처까지 올라가는 선정을 닦았으니 거기 가서 공부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소유처까지 올라간 지 얼마 안 되어서 바로 삼계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선정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도 역시 생사해탈, 즉 말하자면 영생의 자리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 곳도 역시 복이 다하면 다시 떨어집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생사 해탈인데 천상에 올라 천상복만 받고 말 것인가. 그래서 다시 "스승이시여, 다른데 가서 해탈의 법을 구할 수 없겠나이까?" 라고 물으니까,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더 큰 스승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보리수 아래로 가셔서 자기 스스로 무사도(無師道)라. 스승 없이 닦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밀교에서 보면 삼세제불이 다 경각하고 지켰다 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곳에서는 사람만 스승이겠지만 밀교보다 더 심오한 형이상학 쪽에서 볼 때는 우주에는 무량의 법신불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법신불의 경각(驚覺)을 받고서 무상대각을 성취했다고 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지금 계발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꼭 되어야 하고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과정을 전적으로 무시해 버리면 미처 가지도 못하고 갔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증상만(增上慢)이라는 허물을 범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일단은 내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또는 내 마음이 바로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마음 깨달으면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라고 하더라도 금생에 나와서 잘못 듣고, 잘못 배우고, 잘못 느끼고 하는 그런 것이 우리한테 나쁜 습관과 습기로 남아 있고, 바로 전생에도 무수 생 동안을 중생으로 윤회하는 과정에서 또 습기가 남아 있고, 그러기 때문에 불교말로 하면은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라. 여러 생과 더불어서 묻어나온 번뇌와, 그리고 금생에서 온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라. 금생에 나와서 다시 잘 못 배우고, 듣고, 느끼고 한 그런 번뇌들 때문에 우리가 번뇌의 습관성을 깨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자가 되기는 꼭 되어야겠는데, 우리 마음은 본래 조금도 오염이 안 된 불성이라 하더라도 나쁜 습관성이 거기에 배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오랜 시일이 걸려야 차근차근 정화가 됩니다. 근기가 수승한 분은 빨리 정화가 되고 근기가 더딘 분은 좀 더디게 되는 그 차이가 있는 것이지,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급한 사람들은 단박하면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이사 빨리 되면 될 수록 좋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공부하다 보면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갖가지 경계가 많이 나옵니다. 부처 같은 사람도 나오고, 평소에 모르던 것도 척척 알아지고 광명도 비추고 하면 한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공부가 다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도인 행세하는 사람을 굉장히 많이 봤습니다. 그래 놓으면 참 딱합니다. 그러면 자기도 죄를 범하고 그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도 결국은 죄를 범합니다. 일맹인중맹(一盲引重盲)이라. 한 소경이 뭇 소경을 데려다가 함정에 빠뜨린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근본선,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육성으로 설하신 근본직설을 참고로 해서 우리 공부가 얼마만치 되어 있는가를 화엄경 십지보살이나 능엄경의 사십육지 등을 비추어 우리가 그런 위차를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공부가 뛰어 넘으면 넘은 만큼 알아둬야 자기 경계를 정확히 점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 증상만(增上慢)이라. 증상만이란 것은 미처 못 증(增)하고 증했다고 합니다. 못 통하고 통했다 하고, 증상만이 되면 성자를 기만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근본선이 바로 구차제정(九次第定)입니다.
사선, 사공정, 멸진정, 근본선을 생각해 두셨다가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아함경을 보십시오. 지금 아함경 풀이가 꽤 많이 나와 있지만은 풀이를 하신 분들이 근본선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안두고 했기 때문에 근본선의 역서(譯書)를 별로 안 해놨어요. 그러니까 중요한 점을 모두 놓쳐버리지요. 일본 사람들이 한 풀이도 봤는데 그것도 역서를 해야 할 것인데 역서를 안했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참고로 들으시고, 아함경을 보시면 근본선은, 사선, 사공정, 멸진정이라는 말씀을 그 안에서 누누이 하신 것을 우리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출가를 한 것은 모두가 그 뜻이 어디 있는가 하면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고 계율이 청정해야 삼매에 빨리 들어갑니다. 계율이 부실하면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시라청정(尸羅淸淨)은 삼매현전(三昧現前)이라. 시라는 계율을 말하는 것인데 계율이 청정해야 삼매에 들어갑니다.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악행한 사람이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함경을 보면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고 조그마한 나쁜 행동에도 마음으로 두려움을 품고 마음을 추슬러서 초선에 들어가고, 이선 들어가고 삼선, 사선 들어가고 그렇게 하다가 멸진정에서 자기라는 아(我)를 몽땅 소멸하고서 이른바 견도, 아라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이란 것이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공부를 상당히 하신 분들도 혼돈을 느낍니다. 그래서 여러 재가 불자님들은 정확하게 윤곽을 잡으셔야 됩니다.
선, 이것은 우리가 진리를 바로 비춰보는 공부입니다. 정, 이것은 주로 고요한 쪽으로 바른 마음을 분별없이 나가는 것이고 그것을 합한 것이 바로 선정인데 선정을 보통 합해서 많이 씁니다. 참선 할 때에 가장 큰 원수가 무엇인가 하면은 제가 허두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분별 시비하는 것과 꾸벅꾸벅 조는 것이란 말입니다. 선방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보면 다 압니다. 아무리 참선을 오래 했다 하더라도 꾸벅꾸벅 졸아버리면 그 사람은 참선을 잘못했지요. 따라서 우리는 한사코 자기의 신심과 원력을 다 발휘해서 꼭 이 꾸벅꾸벅 하는 혼침 즉, 졸리는 것과 또 분별 시비하는 이른바 도거(掉擧)라, 마음이 항시 흔들리는 것 말입니다.
모두중생(毛頭衆生)이라, 바람이 안 불어도 터럭 끝이 항시 움직이고 있듯이, 우리 범부 마음은 다 그렇습니다. 항시 동요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마음을 다 잡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혼침 없이 앉기는 단정히 앉아 제법 잘하는 것 같지만, 마음으로부터 분별시비하면 참선은 되지 않고 망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두 가지를 꼭 우리가 이겨내야 합니다. 꾸벅꾸벅 조는 것과 분별 시비하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우리가 보조어록을 보더라도 정혜쌍수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육조단경에도 나오고 어느 성전에나 다 들어 있습니다. 정혜쌍수라. 정 이것은 마음을 고요하니 하나에 머물게 하고 혜는 바로 진여불성 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우리가 훤히 비춰본다 말입니다. 이뭣고. 시심마(是甚磨)도 그냥 단순히 이뭣고가 아니라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검기는 칠보다 검고,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이고, 그런 것이 나와 더불어 있지만은 이것이 무엇인가. 그 자리를 들어야지 덮어놓고 이뭣고만 한다고 선이 될 것입니까?
우리는 화두가 나올 때 의의를 알아야 됩니다.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도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가. 또는 부처가 무엇인가. 이런데 따라서 화두가 나왔단 말입니다. 따라서 본래의 자리, 본래면목자리를 분명히 들어야 화두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 상대적으로 의심만 한다고 화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면목 자리가 진여불성이고, 진여불성자리는 끝도 갓도 없는 광대무변한 생명의 실체이고 실상입니다. 따라서 이런 실상자리를 비추어 봐야 합니다. 우리 참선하는 사람들은 꼭 주의해야 합니다. 참선을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비춰보는 지혜란 말입니다. 단경에 보면 반야관조(般若觀照)라. 그 반야관조란 말이 무슨 말인고 하면 반야의 지혜도 역시 우리 마음을 관조한다는 말입니다.
반야의 지혜는 무엇인가. 가상과 가명을 떠나서 참다운 지혜로 해서 우리 본래 자리를 비춰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돼야 혼침과 분별시비가 줄어듭니다. 그냥 덮어놓고 아무 것도 없이 묵묵부답으로 앉아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부처님 명호도 모두가 다 그런 진여불성의 하나의 대명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혜균등이라. 정과 지혜가 균등하게 나가는 그야말로 신묘한 경지를 바로 선정이라 하고 그리고 선정의 이름을 다시 말하면 바르게 생각하는 정사유(正思惟)라. 그러므로 해서 우리한테 있는 악덕이 가신단 말입니다.
참선을 하면 저절로 선량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뒤에 참선공덕이 나옵니다마는 마음이 거친 사람도 부드러워지고 유연선심(柔軟善心)이라, 그리고 정려(靜慮)라. 항시 자세가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가사 고요하지 못하고 서두르는 사람들은 자기반성을 해야 됩니다. 서두르는 것은 마음이 항시 움직이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거일동이 사급취완(捨急取緩)이라. 버릴 사(捨)자, 급할 급(急)자, 급한 것을 버리고서 취완이라. 취할 취(取)자, 늘어질 완(緩)자. 급한 마음 버리고서 느릿느릿하니 그래야 우리가 실수를 안 합니다. 급해서 그냥 서두르는 사람들은 결국 마음이 고요하게 못됩니다.
참선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또 그 공덕은 공덕총림이라. 거기에 따르는 공덕이 끝도 갓도 없이 많단 말입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도 그 공덕의 한 예지요. 지금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삼명육통 하면 그것은 하나의 신화가 아닌가, 신통은 외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만 부처님 경전에 삼명육통이란 말씀이 얼마나 나와 있습니까. 만약 그것이 외도의 말이라면 부처님께서 거짓말 하신거지요. 삼명육통이란 말이 다른 경전에서도 수 백 군데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 본래 불심은 그와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과거를 다 훤히 알고 미래도 다 알고 우주 만물을 다 무불통지(無不通知)하고 말입니다. 또는 누진통(漏盡通)이라. 일체번뇌를 다 깨버리는 그런 지혜와 또는 다른 사람 마음을 아는 타심통(他心通)이라. 우주에 있는 모든 음성을 헤아려서 듣는 천이통(天耳通)이라. 우주의 것을 다 볼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이라. 또는 신여의통(身如意通)이라. 우리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 것을 신화나 기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우리한테는 상관없다고 생각 마십시오. 우리 마음은 그렇게 위대한 힘을 갖추고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 등은봉스님, 그이는 마조스님 제자입니다. 등은봉 스님이 공부를 많이 하신 후 오대산에서, 내가 이제 나이도 많이 먹었으니까 열반에 들어야겠구나. 하고 암자에서 나섰는데 오대산 위에서 정부군과 반란군이 싸운단 말입니다. 그 싸우는 꼴이 아주 피비린내 나는 참극을 연출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안타깝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해서 저들이 무지해서 저와 같이 업을 짓고 싸우다가 죽으면 다시 윤회하고 지옥도 가고 할 것인데, 어떻게든지 제도를 하려고 해도 그렇게 싸우는 사람들이 누구 말을 듣겠습니까? 그런 말을 하면 중놈이 허튼소리나 한다고 하겠지요. 그래서 주장자를 하늘로 휙 던졌단 말입니다. 그래가지고 몸을 솟아 하늘로 올라가서 그 주장자를 타고 싸우는 전장을 빙빙 돌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때는 장엄하고 신비스러운 광명도 비추었겠지요. 그러니까 싸우던 사람들이 그걸 보느라고 넋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사람이 수양을 하면 저렇게 위대한 힘이 나오는 것인데 우리가 뭣 때문에 싸울 것인가. 그렇게 해서 전쟁이 끝나 버렸단 말입니다.
그 등은봉 스님은 실존적인 인물입니다. 당나라 때니까 그렇게 멀지도 않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성 불성은 다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삼명육통을 우리가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의 습관성을 온전히 떼어버리지 못하니까 우리가 미처 못 한단 말입니다. 물론 견성오도 했다고 해서 신통이 다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견성오도 했어도 신통 못하는 분들도 많지만은 그러나 견성오도한 분들은 앉아서 가만히 잠기면 신통은 저절로 다 나온다는 것입니다. 삼매에 들면 말입니다. 다만 중생들이 불쌍하니까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삼매에 들지 않고 중생들한테 훌륭한 법문이나 들려주려고 그러는 것이지 그래서 같은 성자도 비증보살(悲增菩薩)이라. 자기가 수승하지 못하면 공부를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수승한 분들은 삼매를 초월해서 그와 같이 신통도 발휘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대에서는 여러분들이 아는 빈두로 존자도 신통을 하다가 부처님께 견책을 맞고 서구야니로 가 계시다가 나중에 옆에 사람들이 하도 빈두로 존자를 보고 싶다고들 하니까 부처님께서 허락해서 비로소 빈두로 존자가 천상에 있다가 다시 내려오자 부처님께서 말씀이 '너는 신통을 함부로 한 죄로 열반에 들지 말고 영원히 사바세계에 남아서 중생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항시 우리 절집에서 모시고 있는 이른바 나반존자 독성이 바로 그 분 빈두로 존자입니다.
선(禪) ․ 근본선(根本禪)
이 시간에는 주로 참선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참선 공부는 우리가 가령 수영을 한다 할 때는 물에 들어가서 실지로 헤엄을 치는 법을 배워야 하듯이, 참선공부도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우리가 닦아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른바 실참실수(實參實修)라.
정말로 우리 몸으로 부딪혀서 참선을 해 나가야 됩니다. 그러나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대강 이치로 체계가 서야 흐트러짐이 없고 또 능률도 빠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덮어놓고 공부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모두가 다 어느 분야에서나 세밀하게 밝혀 놓은 그런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 가르침들을 충분히 참구해서 우리의 부질없는 분별시비는 끊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많이 해 보신 분들은 짐작을 하시겠지만, 사실 맨 처음부터서 쑥쑥 잘되는 것은 없습니다. 참선의 가장 큰 두 가지 원수가 불교 전문 술어로 하면 도거(棹擧)와 혼침(惛沈)입니다.
도거(Auddhatya)란 이것저것 따지고 분별하는 것이고, 혼침(Styand)이란 앉으면 꾸벅꾸벅 졸아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졸아버리는 시간은 죽은 시간과 똑같아서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은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그야말로 참 맑고 청정해 본래 면목자리만 가지고 나가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서 참선을 좀 했다 하더라도 한도 끝도 없는 분별시비가 나온단 말입니다. 평소에 그렁저렁 생활을 할 때는 안 나오다가도 정작 참선이라 해서 들어 앉으면, 과거에 섭섭했던 일, 미워한 일, 좋은 일들이 자꾸만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면 머리나 몸이 가볍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습인(習忍)이라. 익힐 습자, 참을 인자, 오랫동안 공부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몸에 배여 습관성이 생깁니다. 처음에 참선공부 할 때 좀 안 된다 해서 그냥 놓지를 마십시오. 우리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란 것은 무한 공덕이라. 무한공덕이 들어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향해서 공부를 하다보면 차근차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거기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근기나 선근에 따라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습니다마는 보통 차원에서는 이른바 경안심(輕安心)이라. 경안이라는 것도 불교전문 술어인데 여러분들께서는 외워 두십시오. 가벼울 경(輕)자, 편안할 안(安)자, 경안이라는 것은 몸도 마음도 가뿐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가뿐할 때는 다른 헛된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가뿐해지는 경안이 서야 피로를 모른단 말입니다. 그래야 이른바 내 몸을 어느 정도 조복을 받는 것입니다. 보통으로 참선하는 사람들이 다 그러겠습니다마는 한 십 년쯤 선방에서 고생 고생해야 경안이 좀 나오는 것 같아요. 좀 빠르고 느린 차이는 있으나, 몇 십 년 된 사람도 역시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참선에 들어가면 몇 십분도 못 되어 끄덕끄덕 좁니다. 그런 분들은 아직 경안이 못 나온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스님 네들은 경험들도 많고 해서 새삼 말씀드릴 필요가 없지만, 처음으로 참선을 배우는 일반 재가 불자님들은, 참선공부, 이것은 불도의 정문(頂門)이라. 부처님 가르침 이것이 정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다른 가르침은 방편설도 많이 있고 여러 가지 중생의 근기 따라서 하는 법문도 많지만은 참선 법문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바로 내 마음이 부처요, 마음 떠나서 부처를 구하면 이것은 사도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직통으로 들어가는 그런 직설법문이기 때문에 불도의 정문(頂門)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공부를 하던 지간에 종당에는 우리가 참선을 해서 깨달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자라면 다 해야 되는 것이고,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참선을 해야 됩니다. 가사 기독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바깥에다 설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바로 내 마음의 본체이고 우주의 본체다. 하나님은 무소부재라 안 계시는 데가 없다. 이렇게 법신불 차원에서 하나님을 보면서 참선을 해야 되겠지요. 참선을 불교인만 닦는 정문이라고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어서 다른 종교의 우수한 점이라던가 발전적인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또 수용해야 합니다.
저 쪽 기독교 인구도 지금 17 - 8억인데 그 많은 사람들을 대립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부처님의 일통법문으로 인도해 가면서 같이 공부하는 쪽으로 나가야 할 것이고, 또 그네들이 나가는 공부도 역시 참선공부로 유도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을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의 본뜻도 하나님이 밖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 마음이 맑은 자는 행복할 지어다.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요, 하는 대목들을 우리가 허심탄회하게 볼 때는 부처님 경전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고, 특히 법화경과 유사한 대목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어느 분야이던 간에 다른 공부도 그렇겠지만 특히 참선공부는 마음을 활짝 열어야 됩니다. 앞서 시간에 배운바와 같이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또는 진여연기(眞如緣起)라. 모든 존재는 진여불성으로부터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양을 달리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항시 의심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진여불성 자리에서는 하나일망정, 현상만 볼 때는 이것과 저것이 다르고 나와 네가 분명 다르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지만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현상만 보니까 다르다고 보는 것이지 본 성품자리, 본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혼연일체라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사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다 마음의 현상이요, 마음은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없으므로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은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현상적으로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달리 했을 뿐 진여불성이라는 차원에서는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상만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바닷물이 바람 따라서 파도가 크고 작고하더라도 작은 파도나 큰 파도나 똑같은 물 아닙니까. 그와 같이 우리가 인연 따라서 어떻게 상황이 바꿔지던 간에 진여불성이라는 그 자리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너나 나나 모두가 같은 몸이요, 같은 몸이기 때문에 동체대비(同體大悲)라. 거기에서 참다운 자비가 나오고 참다운 도덕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강사가 아닙니다. 어찌 됐던 참선하는 선사이기 때문에 강의는 잘 못합니다마는 그것은 여러분들이 아시고 이해하시리가 믿습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중요한 대목들만 딱딱하게 일러주고 본인들이 스스로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참선하는 사람들의 방법인데, 여기는 미국인지라 또 미국의 풍토는 다르지 않습니까. 더러 타이르고 밝히고 해서 납득을 시켜야 하는 자리이므로, 특히 재가 불자님들은 그런 것을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참선한다고 해서 제 상식으로 해버리면 재미가 없겠지요. 그러나 이 선(禪)이란 것은 특히 문자를 되도록 절감을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편의상 말을 해야 하겠지요.
시간이 촉박하여 될 수록 읽어가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선(禪)
선(禪) 이것은 이른바 젠(Zen), 우리 한국 선은 세계적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선은 많이 알려져서 그 사람들이 Zen 그러니까 일본 쪽에서도 선을 제나(Zana)라고들 발음합니다. 그리고 선과 정을 구분을 하는 분도 있고 구분 않고 합해서 선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선(禪)은 관(觀)을 위주로 하고, 관(觀) 이것은 관찰을 뜻하는 것입니다. 정(定 : samadhi)은 이른바 삼매에 든다고 하지요. 삼매란, 마음에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한 생각에 머무르는 것이 삼매입니다. 독서도 역시 독서만 열심히 하면 독서삼매라 하는 것이고, 여기서의 정은 그냥 나쁜 생각으로도 한 곳에 머무를 수가 있는 것인데, 나쁜 생각이 아니라 정념으로 한 생각에 머무는 것이 이른바 사마디(samadhi)란 말입니다. 정념이란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 마음의 본래 성품자리, 본래 성품은 바로 진여불성이 아닙니까.
그 진여불성 자리에다가 오로지 우리 마음을 머무르게 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사마디(samadhi)라고 합니다. 선은 그 자리를 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관조를 한다는 말입니다. 가사 실상관(實相觀)이라. 실상관은 우주법신을 관찰하는 것이고, 그래서 선(禪)은 관찰을 위주로 하고 정(定)은 지(止)를 위주로 하나 합하여 정혜균등(定慧均等)의 묘체(妙體)를 정(定)이라고 합니다. 정혜균등이란 말을 참선 배우는 사람들은 꼭 외워 두셔야 됩니다. 정은 우리 마음이 오로지 한 곳에 머무는 것을 정(定)이라고 하고, 즉 고요한 것을 정이라 하고 또 혜(慧) 이것은 참다운 지혜, 우주의 실상을 비춰보는 그런 지혜(智慧)를 혜라고 합니다. 여기 있는 지혜는 보통 지식적으로 아는 지혜가 아니라 참다운 반야의 지혜, 우주의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가 여기 있는 정혜(定慧)의 혜에 해당합니다. 정(定)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념(正念)이라. 정념(正念)이 한 군데 모이는 것이 정(定)이란 말입니다.
정혜균등이란, 정과 혜가 평등하게 나가는 것이고, 고요한 것은 정이고 혜는 비춰보는 것인데 무얼 비춰보는고 하면은 실상(實相)을, 우리 불성을 비춰본단 말입니다. 이것이 가지런히 되어야 참선진도가 빨라집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우리 본래 면목, 우리 불성 자체는 원래 정, 혜가 같이 구족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성이나 우주의 본성인 진여불성 자리는 정과 혜가 본래적으로 원만구족하게 갖춰져 있기 때문에 우리 공부도 거기에 걸맞게끔 정, 혜가 가지런히 균등하게 나가야 이른바 개안이 빠르단 말입니다. 정에만 치우치고 혜에만 치우치더라도 공부가 안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공부 진도가 더딘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때나 중도를 추앙합니다. 중도란 것은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 아니라, 다 갖추고 있는 온전한 자리를 제대로 참구하는 것이 중도란 말입니다. 이른바 진여불성이 바로 중도인 것이고, 우리 본성이 바로 중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할 때는 꼭 고요하니 우리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정(定)과 또는 우리 불성 자리를 비추어 보는 혜(慧)와 같이 아울러 나가야 공부가 빠른 것입니다. 그런데 관찰만 많이 하고 혜 쪽으로만 치우쳐서 고요히 머무르지 않는다면 공부가 더디단 말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六組檀經) 부촉품에서 일상삼매(一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 말씀을 제가 드렸지요. 일상삼매 이것은 혜에 해당합니다. 일상삼매는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인 평등무차별의 진여불성이라고 관찰하는 것이고 그리고 일행삼매는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일행삼매이고 정(定)에 해당한다 말입니다. 좀 어려운 법문이나 기본적으로 알아 두시면 공부하실 때에 큰 도움이 되십니다. 일상삼매, 일행삼매, 정, 혜 또는 간단히 천태식으로 말하면 지관(止觀)이라. 그칠 지(止)자는 정(定)에 해당하고 관(觀)은 혜(慧)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우리 불심에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참다운 지혜 또는 조금도 번뇌가 없는 고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공부도 거기에 맞게 해야 우리 번뇌의 습관성을 빨리 녹이고서 참다운 진여불성을 견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선정을 사유수(思惟修)라. 사유수란 것은 바르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바르게 생각을 해야지 그냥 덮어놓고 생각한다고 그것이 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 만유란 것은 오직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이렇게 뚜렷이 생각해야 그것이 정사유(正思惟)가 됩니다.
그 다음에는 기악(棄惡)이라. 버릴 기(棄), 모질 악(惡). 악을 버린단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선공덕(禪功德)입니다. 사유수라는 것은 바른 생각을 관조함으로 해서 자연적으로 악심이나 나쁜 생각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은 정려(精慮)라. 고요할 정(精), 생각할 려(慮). 고요히 조금도 삿된 생각 없이 바르게 참다운 진리를 생각한다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선정의 뜻풀이 입니다. 공덕총림은 무엇인가 하면, 공덕, 이것은 자기나 남이나 누구나 간에 유익되게 하는 것이 공덕입니다. 총림 이것은 그야말로 수풀모양으로 하나 둘 있는 것이 아니라 숲처럼 무한공덕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참선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무한공덕이 거기에서 우러나온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하나의 참선공덕이 따르는 것입니다. 아까 기악, 악을 없애는 것도 참선을 하면 차근차근 사람이 선량해져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여불성하고 가까워져 가니까...
마땅히 진여불성자리는 만능의 자리인 동시에 오직 하나의 생명자리이기 때문에 나쁜 마음이 생길 수가 없겠지요. 자타(自他)라는 구분도 역시 참선을 해 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차근차근 자기 모서리가 끊어져서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는 생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본래가 무아이기 때문에 공덕총림 또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오직 마음이 하나로 묶인단 말입니다. 처음에는 이 생각, 저 생각이 다 나오지만은 마음이 정화가 되면 오직 하나의 생각으로, 영원적인 그 맑은 생각, 부처님 마음 같은 그런 생각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오직 부처님 경지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현법락주(現法樂住)라. 이것 역시 참선공덕입니다. 우리가 지금 재미있는 것도 있고, 싫은 것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의 재미있는 것은 속락(俗樂)이라. 세속적인 오욕 같은 것은 재미는 좀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허망 무상한 안락인 것입니다.
그러나 법락(法樂)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안락이 아닙니다. 법락, 이것은 공부를 해서 원래 우리 불성에 갖추어져 있는 공덕을 얻으므로 참다운 안락이 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신통자재나 그런 것도 모두가 다 법락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겠지요. 현법락주라. 법락이 나온다는 말이고 아까 얘기한 경안이라. 몸도 마음도 가뿐하니 환희심에 차서 닦아 나가는 것이 경안인데, 그것 역시 법락입니다. 그것이 견성오도(見性悟道)한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이 법락이 나타나는 것이 현법락주(現法樂住)인데 참선이라는 뜻에서 이런 등등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종(禪宗)의 선(禪)은 고요히 생각도 하고 사유(思惟) 정려(精慮)하는 뜻을 취하고 있으나 그 체(體)는 열반묘심(涅槃妙心)이라. 열반묘심은 불심입니다. 일체종지의 근본자리. 본래면목자리인 불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냥 선정이라고 할 때는 관찰도 하고 그러겠지만 선종(禪宗)에서 선이라 할 때는 훌쩍 뛰어 넘어 이것저것을 다 초월한 하나의 불심을 바로 선이라고 합니다.
불심만을 문제시하고 견성만을 문제시하는 그런 것이 선종(禪宗)의 선(禪)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의 교리 내에서 보통 선정이라고 할 때와 선종에서 '선' 할 때는 차원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문화가 상충하지 않고 같이 화해가 되어 더불어서 발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불교 내에서 부질없는 소모를 안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도 무슨, 무슨 종파가 오십 종파요, 일본도 지금 팔십 종파라 합니다. 더구나 미국은 종교박람회장 같아서 불교도 지금 별의 별 파가 다 들어와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 각축하고 다투는 마당에서는 우리가 굉장히 주의를 해야 합니다. 다른 쪽을 이해도하고 살피기도 해야겠지요. 제 입장도 그런 처지에 입각해서 근본선도 우리는 알아야 되겠고, 또 스리랑카 사람들이 공부하는 것도 참고를 해야 되고, 일본의 임제종이나, 화두를 참구하는 의미도 알아야 되겠으며, 또는 화두 없이 잠자코 비춰보는 묵조선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간단히 윤곽만 살폈지마는 그런 것을 다 취급을 했습니다.
근본선(根本禪)
근본선은 바로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 어째서 구차제정이라 하는가 하면 사선정(四禪定)과 사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을 합하면 이것이 아홉이 되지 않습니까. 근본선 이것은 아함경을 근간으로 합니다. 아함경은 부처님 육성 같은 경입니다. 부처님께서 초기에 참선하는 법은 모두가 다 근본선에 입각해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직접 근본선으로 성도(成道)하셨고, 도 열반 드실 때도 열반경을 보면 근본선으로 해서 사선정과 사공정에 드시고, 멸진정에 들어 가셨다가 다시 또 내려오셔서 사선정에 들어가서 열반에 드셨다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근본선으로 공부를 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아함경을 보면 '그대들이 철저한 계행을 지키고 그래서 초선에 들고 이선에 들고 삼선, 사선에 들어서 멸진정을 성취해서 아라한을 성취한다.'라는 말씀이 수십 군데 있습니다. 따라서 근본선에 대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사선(四禪) 이것은 초선, 이선, 삼선, 사선. 등의 차원의 차이이기 때문에 사선이라 그럽니다. 그러면 초선은 어떤 것인가. 대체로 윤곽을 좀 아셔야 되겠지요. 초선 이것은 참선을 오래 해서 안정이 되어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우리 마음에 산란스런 생각이 들어가지 않고 이른바 삼매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삼매에 들어가면 산란스런 마음이 없어집니다. 이른바 무간정(無間定)이라. 다른 망상이 사이에 끼어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처음 앉으시면 다른 망상이 많이 나오지만 그것은 초기에 그럴 뿐입니다.
재가 불자님들은 주로 조석으로 오랫동안 앉으셔야 되겠지요. 그리고 평소에 장사를 하시던지 어디를 가시던 지간에, 미운 사람을 보더라도 우리가 연기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본래 성품은 다 부처인데 현상적으로 해서 남자고 여자고 그러는 것이지 본래는 다 부처가 아닌가. 누구를 만나도 부처같이 생각하고 부처같이 대접하도 보면 참선공부도 손해를 안봅니다. 우리 마음을 항시 하나로 추스르고 다스려야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꼭 집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 참선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도 이것저것 생각하면 참선이 아닙니다. 마음이 내는 것이 모양이 내는 것이 아니니까요. 따라서 우리 생활에서 무엇을 하던지 부엌에서 공양을 짓던지 누구랑 얘기를 하던 지간에 모두를 다 부처님 화신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항시 생각을 하나로, 근본적인 자리로 돌리면 공부에 손해가 없이 참선이 진전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딴 생각이 안 나온단 말입니다. 참다운 진리만 생각하고, 참다운 진리만이 옳은 것인데 그것이 확신이 됐는데, 다른 생각이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이른바 삼매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초선에 들어갑니다. 초선에 들어갈 때는 경에 보면 우리 생리가 바꾸어집니다. 마음이 바꾸어짐에 따라서 우리 몸도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팔촉(八觸)이 발생하게 됩니다. 팔촉이라는 것은 몸이 어떤 때는 뜨겁고, 어떤 때는 춥고, 또는 몸이 공중에 뜨기고 하고 그런 저런 경험이 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 생리가 바꾸어지는 증거입니다. 이른바 요새 도가(道家)식으로 말하면 환골탈태(換骨奪胎)란 말입니다. 우리가 그냥 생각할 대는 참선은 많이 하나 적게 하나 그대로 가만히 있는게 아닌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지 몸이야 그대로 가만히 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몸과 생리가 바꿔지는 것입니다.
조금 더 불교의 전문적인 말로 하면 소조사대(所造四大)라. 오염된 지수화풍 사대가 청정한 명정사대(明靜四大)로 바꿔진단 말입니다. 바꾸어지는 과정에서 나오는 공덕입니다. 그것은 불경에 다 있습니다. 그렇게 바꾸어져서 육근청정이 되는 것입니다. 생리가 청정하게 되어야 초선에 들어갑니다. 초선에 들어가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재가 불자님들이 참선을 좀 했다고 해서 나는 지금 초선인가 이선인가 이렇게 갑자기 생각을 마시고 공부를 끊임없이 하셔야 됩니다. 그냥 쉽게 누구나가 초선에 쑥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공부가 좀 되어서 초선에 들어가도 그렁저렁 해버리면 또 후퇴가 되겠지요. 공부란 것은 지속을 시켜야 됩니다. 그렇게 지속을 시켜서 초선에 들어가면 그 삼매의 기운을 아주 소중하게 아껴서 보임(保任)을 해야 됩니다. 보임이라는 것은 공부하는 참선기운이 흩어질세라 소중하게 말도 가만가만히 하고, 행동도 조심하고, 서두르지 말고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함부로 하면 선정 기운이 흩어져 버립니다. 따라서 음식도 조금씩 먹고, 될 수 있으면 말도 적게 하고, 말 많이 하면 그만큼 선정기운이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정에 들어가려면 가급적 말도 않고 혼자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마는, 일단 사회생활을 하려면 그렇게 하기가 어렵겠지요. 그래서 재가불자님들도 평소에 그렇게 공부하시다가 일 년에 한두 번쯤은 내외간에 함께 절에 오셔서 일주일이나 며칠씩 오로지 공부하는 용맹정진의 기회를 가지셔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본래대로 한 차원씩 올라갑니다. 참선공부,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어느 누구나가 본래의 참 자기, 영생해탈의 열반경계, 참다운 행복을 바라는 이들은 누구나가 꼭 가야할 길입니다. 게으름 부리면 못 가겠지요. 가고 안 가고는 본인한테 달렸겠지만, 우리가 인간인 한에는 꼭 가야 됩니다. 또 못 간다고 할 때는 끝없이 윤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선에 올라가면 정심(靜心)이라. 마음이 청정해서 욕계번뇌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초선까지는 아직 욕계번뇌의 종자가 좀 남아 있습니다. 평소에는 별로 생각이 안 나오다가도 경계에 부딪히면 욕심이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선에 들어가면 남녀의 음욕도 다 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이선을 가리켜서 불교 전문 술어로 하면 구족지(具足地)라. 구족지가 무엇인가 하면은 계행을 참답게 지킬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선까지 못 들어가면 계행은 억지로 지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니 지키는 것입니다. 이선에 들어가면 음욕이 떨어져 버리니 그때는 다른 생각이 나올 수 없습니다. 계행이 원만히 갖춰지는 때입니다. 구족지라.
삼선에 들어가면 재미있기는 삼선이 제일 재미있다 그럽니다. 이 세상에서 삼선 들어간 재미같이 큰 재미가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삼선락이라. 그래서 아주 재미있고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광명이 훤히 비춰서 이것저것 다 알게 되고, 사선 들어가면 그때는 호흡이 끊어져 버립니다. 사선은 부동지(不動智)라. 사선에서는 호흡이 끊어집니다. 그때는 산란스런 마음이 조금도 안 나옵니다. 이렇게 들어갔어도 아직은 견성은 못됩니다. 우리가 견성 그러면은 쉬운 것 같지만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저도 여러 선방에서 공부하면서 보았지만 가벼운 사람들은 이런 근본선을 모르고 좀 재미있으면 그만 공부 다 배웠다고 말려도 튀어 나간단 말입니다. 공부를 더 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근본선을 우리가 꼭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 선정을 증명해 나가는 한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몰라 놓으면 환희심만 나면 그만 다 된 줄 압니다. 참선을 하고 있으면 기분 좋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닌 것인데 그러면 공부 다 되었다고 그만 뛰쳐나간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무렇게나 먹고 아무렇게 행동하면서 견성 했으니 무애행(無碍行)이라 아무렇게 행동해도 본래 청정이다 이런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선만 올라가도 음욕이 끊어져 버려서 음탕한 생각도 안 나고 음탕한 짓도 못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삼선은 그러한 정도가 더욱 더 증장 되고 사선은 호흡도 끊어져 버려서 참다운 삼매에 들지요. 그래서 부동정(不動定)이라 합니다. 선정 중에서는 가장 고요한 것이지요. 그렇게 되었어도 역시 아직은 성자가 못됩니다. 그러다가 저 멸진정이라.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면 그때는 모든 번뇌를 모조리 끊어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我)의 뿌리를, 자기라는 그 뿌리를 뽑아 버린단 말입니다.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해야 성자요, 도인입니다.
그래서 사공정(四空定) 이것은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이라. 모두가 다 텅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는 광대무변한 세계를 관찰하는 그런 선정(禪定)이고, 식무변처(識無邊處)는 모두가 다 그냥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식(識)이라 하는 하나의 마음의 그림자가 우주에 충만한 때고, 그 다음 무소유처(無所有處)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공(空)도 아니요 식(識)도 아닌 알 수 없는 그러한 청정무비(淸淨無比)한 것이 충만해 있는 때고,
그 다음의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생각이 전혀 없지도 않고 아주 미세한 생각, 극미(極微)한 생각만 남아 있는 때라. 이것이 비상비비상처입니다. 따라서 비상비비상처까지 올라가도 아직은 성자가 못됩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셔서 스승을 찾아서 공부하실 때의 부처님의 일대기는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부처님께서 거쳐 가신 하나의 행로를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맨 처음에 발가바 선인, 고행을 위주로 하는 선인에게서 고행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지독한 고행을 다 했습니다. 하루에 씨앗 한 톨이나 보리 한 알을 드시면서, 하여튼 누가 따를 수 없는, 어느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고행을 다 했습니다. 그렇게 고행해서 발가바 선인이 올라간 선정에 들어갔습니다. 발가바 선인은 고행으로 해서 범천에 올라가는 공부를 했던 분입니다. 범천도 욕계가 아니라 색계입니다. 따라서 굉장히 청정한 곳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공부해 가지고 범천에 올라가는 선정에 드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범천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범천 역시 영생의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의 천상이라는 제한된 곳에 올라간 것이지, 그것이 해탈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구하는 것은 생사 해탈인데 천상에만 올라가면 된다는 스승을 뿌리치고 그 당시에 제일 훌륭하다는 이른바 아라라카란에게 갔던 것입니다.
아라라카란은 이른바 무소유처라. 무소유처까지 올라가는 선정을 닦는 분이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발가바에게 범천까지 올라가는 선정을 배웠고, 석가모니께서는 본래 천재적인 분이라 쉽게 무소유처까지 올라가도 결국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지 이 또한 해탈의 법은 아니었기 때문에 거기서도 떠나면서, "스승이시여, 어디로 가면 더 높은 공부를 배우겠습니까? 당신보다 더 나은 분이 있으면 알려 주소서."라고 물으니까 아라라 스승이 "내 아들이 우까다인데 나보다 더 공부를 많이 해서 삼계에서는 제일 꼭대기 하늘인 비상비비상처까지 올라가는 선정을 닦았으니 거기 가서 공부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소유처까지 올라간 지 얼마 안 되어서 바로 삼계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선정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도 역시 생사해탈, 즉 말하자면 영생의 자리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 곳도 역시 복이 다하면 다시 떨어집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생사 해탈인데 천상에 올라 천상복만 받고 말 것인가. 그래서 다시 "스승이시여, 다른데 가서 해탈의 법을 구할 수 없겠나이까?" 라고 물으니까,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더 큰 스승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보리수 아래로 가셔서 자기 스스로 무사도(無師道)라. 스승 없이 닦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밀교에서 보면 삼세제불이 다 경각하고 지켰다 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곳에서는 사람만 스승이겠지만 밀교보다 더 심오한 형이상학 쪽에서 볼 때는 우주에는 무량의 법신불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법신불의 경각(驚覺)을 받고서 무상대각을 성취했다고 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지금 계발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꼭 되어야 하고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과정을 전적으로 무시해 버리면 미처 가지도 못하고 갔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증상만(增上慢)이라는 허물을 범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일단은 내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또는 내 마음이 바로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마음 깨달으면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라고 하더라도 금생에 나와서 잘못 듣고, 잘못 배우고, 잘못 느끼고 하는 그런 것이 우리한테 나쁜 습관과 습기로 남아 있고, 바로 전생에도 무수 생 동안을 중생으로 윤회하는 과정에서 또 습기가 남아 있고, 그러기 때문에 불교말로 하면은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라. 여러 생과 더불어서 묻어나온 번뇌와, 그리고 금생에서 온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라. 금생에 나와서 다시 잘 못 배우고, 듣고, 느끼고 한 그런 번뇌들 때문에 우리가 번뇌의 습관성을 깨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자가 되기는 꼭 되어야겠는데, 우리 마음은 본래 조금도 오염이 안 된 불성이라 하더라도 나쁜 습관성이 거기에 배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오랜 시일이 걸려야 차근차근 정화가 됩니다. 근기가 수승한 분은 빨리 정화가 되고 근기가 더딘 분은 좀 더디게 되는 그 차이가 있는 것이지,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급한 사람들은 단박하면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이사 빨리 되면 될 수록 좋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공부하다 보면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갖가지 경계가 많이 나옵니다. 부처 같은 사람도 나오고, 평소에 모르던 것도 척척 알아지고 광명도 비추고 하면 한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공부가 다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도인 행세하는 사람을 굉장히 많이 봤습니다. 그래 놓으면 참 딱합니다. 그러면 자기도 죄를 범하고 그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도 결국은 죄를 범합니다. 일맹인중맹(一盲引重盲)이라. 한 소경이 뭇 소경을 데려다가 함정에 빠뜨린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근본선,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육성으로 설하신 근본직설을 참고로 해서 우리 공부가 얼마만치 되어 있는가를 화엄경 십지보살이나 능엄경의 사십육지 등을 비추어 우리가 그런 위차를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공부가 뛰어 넘으면 넘은 만큼 알아둬야 자기 경계를 정확히 점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 증상만(增上慢)이라. 증상만이란 것은 미처 못 증(增)하고 증했다고 합니다. 못 통하고 통했다 하고, 증상만이 되면 성자를 기만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근본선이 바로 구차제정(九次第定)입니다.
사선, 사공정, 멸진정, 근본선을 생각해 두셨다가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아함경을 보십시오. 지금 아함경 풀이가 꽤 많이 나와 있지만은 풀이를 하신 분들이 근본선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안두고 했기 때문에 근본선의 역서(譯書)를 별로 안 해놨어요. 그러니까 중요한 점을 모두 놓쳐버리지요. 일본 사람들이 한 풀이도 봤는데 그것도 역서를 해야 할 것인데 역서를 안했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참고로 들으시고, 아함경을 보시면 근본선은, 사선, 사공정, 멸진정이라는 말씀을 그 안에서 누누이 하신 것을 우리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출가를 한 것은 모두가 그 뜻이 어디 있는가 하면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고 계율이 청정해야 삼매에 빨리 들어갑니다. 계율이 부실하면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시라청정(尸羅淸淨)은 삼매현전(三昧現前)이라. 시라는 계율을 말하는 것인데 계율이 청정해야 삼매에 들어갑니다.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악행한 사람이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함경을 보면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고 조그마한 나쁜 행동에도 마음으로 두려움을 품고 마음을 추슬러서 초선에 들어가고, 이선 들어가고 삼선, 사선 들어가고 그렇게 하다가 멸진정에서 자기라는 아(我)를 몽땅 소멸하고서 이른바 견도, 아라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이란 것이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공부를 상당히 하신 분들도 혼돈을 느낍니다. 그래서 여러 재가 불자님들은 정확하게 윤곽을 잡으셔야 됩니다.
선, 이것은 우리가 진리를 바로 비춰보는 공부입니다. 정, 이것은 주로 고요한 쪽으로 바른 마음을 분별없이 나가는 것이고 그것을 합한 것이 바로 선정인데 선정을 보통 합해서 많이 씁니다. 참선 할 때에 가장 큰 원수가 무엇인가 하면은 제가 허두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분별 시비하는 것과 꾸벅꾸벅 조는 것이란 말입니다. 선방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보면 다 압니다. 아무리 참선을 오래 했다 하더라도 꾸벅꾸벅 졸아버리면 그 사람은 참선을 잘못했지요. 따라서 우리는 한사코 자기의 신심과 원력을 다 발휘해서 꼭 이 꾸벅꾸벅 하는 혼침 즉, 졸리는 것과 또 분별 시비하는 이른바 도거(掉擧)라, 마음이 항시 흔들리는 것 말입니다.
모두중생(毛頭衆生)이라, 바람이 안 불어도 터럭 끝이 항시 움직이고 있듯이, 우리 범부 마음은 다 그렇습니다. 항시 동요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마음을 다 잡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혼침 없이 앉기는 단정히 앉아 제법 잘하는 것 같지만, 마음으로부터 분별시비하면 참선은 되지 않고 망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두 가지를 꼭 우리가 이겨내야 합니다. 꾸벅꾸벅 조는 것과 분별 시비하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우리가 보조어록을 보더라도 정혜쌍수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육조단경에도 나오고 어느 성전에나 다 들어 있습니다. 정혜쌍수라. 정 이것은 마음을 고요하니 하나에 머물게 하고 혜는 바로 진여불성 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우리가 훤히 비춰본다 말입니다. 이뭣고. 시심마(是甚磨)도 그냥 단순히 이뭣고가 아니라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검기는 칠보다 검고,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이고, 그런 것이 나와 더불어 있지만은 이것이 무엇인가. 그 자리를 들어야지 덮어놓고 이뭣고만 한다고 선이 될 것입니까?
우리는 화두가 나올 때 의의를 알아야 됩니다.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도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가. 또는 부처가 무엇인가. 이런데 따라서 화두가 나왔단 말입니다. 따라서 본래의 자리, 본래면목자리를 분명히 들어야 화두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 상대적으로 의심만 한다고 화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면목 자리가 진여불성이고, 진여불성자리는 끝도 갓도 없는 광대무변한 생명의 실체이고 실상입니다. 따라서 이런 실상자리를 비추어 봐야 합니다. 우리 참선하는 사람들은 꼭 주의해야 합니다. 참선을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비춰보는 지혜란 말입니다. 단경에 보면 반야관조(般若觀照)라. 그 반야관조란 말이 무슨 말인고 하면 반야의 지혜도 역시 우리 마음을 관조한다는 말입니다.
반야의 지혜는 무엇인가. 가상과 가명을 떠나서 참다운 지혜로 해서 우리 본래 자리를 비춰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돼야 혼침과 분별시비가 줄어듭니다. 그냥 덮어놓고 아무 것도 없이 묵묵부답으로 앉아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부처님 명호도 모두가 다 그런 진여불성의 하나의 대명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혜균등이라. 정과 지혜가 균등하게 나가는 그야말로 신묘한 경지를 바로 선정이라 하고 그리고 선정의 이름을 다시 말하면 바르게 생각하는 정사유(正思惟)라. 그러므로 해서 우리한테 있는 악덕이 가신단 말입니다.
참선을 하면 저절로 선량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뒤에 참선공덕이 나옵니다마는 마음이 거친 사람도 부드러워지고 유연선심(柔軟善心)이라, 그리고 정려(靜慮)라. 항시 자세가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가사 고요하지 못하고 서두르는 사람들은 자기반성을 해야 됩니다. 서두르는 것은 마음이 항시 움직이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거일동이 사급취완(捨急取緩)이라. 버릴 사(捨)자, 급할 급(急)자, 급한 것을 버리고서 취완이라. 취할 취(取)자, 늘어질 완(緩)자. 급한 마음 버리고서 느릿느릿하니 그래야 우리가 실수를 안 합니다. 급해서 그냥 서두르는 사람들은 결국 마음이 고요하게 못됩니다.
참선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또 그 공덕은 공덕총림이라. 거기에 따르는 공덕이 끝도 갓도 없이 많단 말입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도 그 공덕의 한 예지요. 지금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삼명육통 하면 그것은 하나의 신화가 아닌가, 신통은 외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만 부처님 경전에 삼명육통이란 말씀이 얼마나 나와 있습니까. 만약 그것이 외도의 말이라면 부처님께서 거짓말 하신거지요. 삼명육통이란 말이 다른 경전에서도 수 백 군데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 본래 불심은 그와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과거를 다 훤히 알고 미래도 다 알고 우주 만물을 다 무불통지(無不通知)하고 말입니다. 또는 누진통(漏盡通)이라. 일체번뇌를 다 깨버리는 그런 지혜와 또는 다른 사람 마음을 아는 타심통(他心通)이라. 우주에 있는 모든 음성을 헤아려서 듣는 천이통(天耳通)이라. 우주의 것을 다 볼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이라. 또는 신여의통(身如意通)이라. 우리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 것을 신화나 기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우리한테는 상관없다고 생각 마십시오. 우리 마음은 그렇게 위대한 힘을 갖추고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 등은봉스님, 그이는 마조스님 제자입니다. 등은봉 스님이 공부를 많이 하신 후 오대산에서, 내가 이제 나이도 많이 먹었으니까 열반에 들어야겠구나. 하고 암자에서 나섰는데 오대산 위에서 정부군과 반란군이 싸운단 말입니다. 그 싸우는 꼴이 아주 피비린내 나는 참극을 연출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안타깝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해서 저들이 무지해서 저와 같이 업을 짓고 싸우다가 죽으면 다시 윤회하고 지옥도 가고 할 것인데, 어떻게든지 제도를 하려고 해도 그렇게 싸우는 사람들이 누구 말을 듣겠습니까? 그런 말을 하면 중놈이 허튼소리나 한다고 하겠지요. 그래서 주장자를 하늘로 휙 던졌단 말입니다. 그래가지고 몸을 솟아 하늘로 올라가서 그 주장자를 타고 싸우는 전장을 빙빙 돌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때는 장엄하고 신비스러운 광명도 비추었겠지요. 그러니까 싸우던 사람들이 그걸 보느라고 넋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사람이 수양을 하면 저렇게 위대한 힘이 나오는 것인데 우리가 뭣 때문에 싸울 것인가. 그렇게 해서 전쟁이 끝나 버렸단 말입니다.
그 등은봉 스님은 실존적인 인물입니다. 당나라 때니까 그렇게 멀지도 않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성 불성은 다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삼명육통을 우리가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의 습관성을 온전히 떼어버리지 못하니까 우리가 미처 못 한단 말입니다. 물론 견성오도 했다고 해서 신통이 다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견성오도 했어도 신통 못하는 분들도 많지만은 그러나 견성오도한 분들은 앉아서 가만히 잠기면 신통은 저절로 다 나온다는 것입니다. 삼매에 들면 말입니다. 다만 중생들이 불쌍하니까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삼매에 들지 않고 중생들한테 훌륭한 법문이나 들려주려고 그러는 것이지 그래서 같은 성자도 비증보살(悲增菩薩)이라. 자기가 수승하지 못하면 공부를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수승한 분들은 삼매를 초월해서 그와 같이 신통도 발휘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대에서는 여러분들이 아는 빈두로 존자도 신통을 하다가 부처님께 견책을 맞고 서구야니로 가 계시다가 나중에 옆에 사람들이 하도 빈두로 존자를 보고 싶다고들 하니까 부처님께서 허락해서 비로소 빈두로 존자가 천상에 있다가 다시 내려오자 부처님께서 말씀이 '너는 신통을 함부로 한 죄로 열반에 들지 말고 영원히 사바세계에 남아서 중생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항시 우리 절집에서 모시고 있는 이른바 나반존자 독성이 바로 그 분 빈두로 존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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