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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가장 행복한 공부

4. 빛의 자리

                                              4. 빛의 자리



 

 

- 참선은 쉬운 것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이내 다시 가을이 오고하는 것은 누가 막으려고 해야 막을 수도 없을뿐더러, 가장 쉬운 일인 동시에 불변의 우주섭리입니다.


우리가 하는 참선 공부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쉽습니다. 보통은 참선을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어려운 공부로 압니다. 그러나 참선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장 쉬운 공부입니다. 그래서 불교용어로 편안하고 즐거운 법문, 즉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고 합니다. 참선은 어디서 빌려 온 것도 아니고 또 다른 것을 보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본래 자기의 생명 자체인 마음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쉽고 경비도 가장 적게 드는 공부입니다. 이토록 쉬운 것이 어려운 한자문화권을 거쳐 오면서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참선 공부가 어째서 쉬운가? 이는 우리가 원래 갖추고 있는 생명의 보배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쉽습니다. 나한테 갖추어져 있는 마음자리, 나한테 갖추어 있는 보배 가운데 최상의 보배 마니보주, 이것이 마음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도인들은 자기 마음 찾는 공부를 비유해서 '기우멱우(騎牛覓牛)'라 했습니다. 소를 타고서 소를 찾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소가 어디에 있는지 안 보이니까, 지금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소를 찾는 격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과 깨달은 도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깨달은 분들은 모든 현상의 본모습을 봅니다. 본성품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본성품을 못 보고 겉의 현상만 봅니다. 우선 우리는 깨달은 분과 우리 중생의 이런 차이를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선이 쉽다는 이유는 어차피 현상적인 것은 본성품으로 자연히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봄이 가면 반드시 여름이 오듯이 우리 중생들은 본래성품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방황하는 나그네가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기왕이면 우리 중생들은 잘 먹고, 잘 입고, 많이 쓰고, 많이 놀고, 또 높은 감투까지 쓰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현상적으로 거기에 얽매여 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 사람도 역시 어느 땐가는 죽어서 윤회하다가 결국은 본성품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돌아가야 할 것이며 또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그 고향을 부처님 또는 여래(如來)라고 합니다. 여래란 무슨 뜻인가 하면 진리 그대로의 성품을 말합니다. 진리에서 나와서 진리로 간다 하여 여래라 합니다. '같을 여(如)'라는 글자는 바로 진여(眞如)를 말합니다. 진여란 진리(眞理)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여래란 말은 진리에서 조금도 흠축 없이 왔다는 그런 뜻입니다. 따라서 진리에서 왔으니까 다시 진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생각할 때, 진리를 고정불변한 어떤 교리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 같은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모든 생명을 다 감싸고 있는 일체 존재의 근본자리입니다. 다시 한 번 확실히 말씀드리면 우주의 본체가 바로 진리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고 언제나 그대로 있습니다.



- 광명세계


우리는 지금 과학만능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자력이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원자력 저쪽 세계는 광명의 세계입니다.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을 위시해서 다른 동물이나 식물을 포함한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생물학적인 술어로 말하면 광합성(光合成), 즉 광명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어떤 식물이든 태양광선이 안 들어간 게 없습니다. 물질의 가장 미세한 저편 세계는 하나의 방사능 같은 방사광명입니다. 그러므로 빛으로 합성되는 광합성이라는 말 이전에 사실은 모두가 다 광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진여불성 자리는 바로 광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참선을 해서 깨닫고자 합니다만,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른바 목적을 뚜렷이 설정해야만 그곳에 도달하려고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고, 또한 거기에 걸맞는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 자기 목적의식이 희미하면 가고자 하는 열성도 적을 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도 거기에 계합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진여불성 자리, 여래 자리, 또는 부처님 자리는 그냥 무조건 어디에 인격적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빛입니다. 그 빛은 우리가 볼 수 있는 태양광선과 같은 가시적인 광명만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볼 수 없는 비할 데 없이 청정한 광명입니다.


원자 속에 들어 있는 기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위만 하더라도 굉장히 기기묘묘한 힘을 내지 않습니까? 하물며 원자력보다도 더 순수한 가장 근원적인 광명인 부처님 광명을 그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무한의 환희광명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광명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신비로운 힘을 냅니다. 과거의 도인들은 삼명육통하고 신통 자재하였습니다. 또는 그곳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조금만 모셔도 부사의한 힘으로 아픈 것이 그냥 나아 버리는 원리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오염된 생명이 차근차근 정화되어서 그러한 광명세계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부사의한 힘을 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천지우주의 근본생명인 광명 자체는 일체 공덕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상적으로 잘나고 못난 것, 또는 학문적으로 지식이 많고 적음은 마음의 본바탕을 닦아가는, 즉 생명의 본질인 광명을 향해서 가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일자무식인 사람이라도 상관이 없고, 또 과거에 설사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는 앙굴리마라는 나중에 부처님 제자가 되어 아라한과를 성취해서 도인이 되었지만, 그 전에는 바라문교 스승을 섬겨서 공부했습니다. 그의 스승은 바라문교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어서 한 500명 이상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앙굴리마라가 제일 미남이고 똑똑하고 또 능력이 제일 특출했습니다. 바라문 스승의 아내는 제법 잘나고 예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남편은 나이가 많으니까 나이 젊고 똑똑하고 미남인 앙굴리마라에게 호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호감이 짙어져서 애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바라문 스승이 외출하여 다른 곳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에 앙굴리마라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앙굴리마라는 마음이 진실한 사람이었고 스승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조금도 변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의 요구를 안 들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의 부인은 원망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남편이 돌아오니까 일부러 자기 옷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또 옷에다 자기가 할퀴어서 핏자국을 내놓고는, "당신이 없을 때 앙굴리마라가 욕보이려고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모함하였습니다. 바라문 스승은 아직 무아의 도를 성취한 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분노의 기운이 차올랐습니다. 그래서 앙굴리마라를 파멸시키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앙굴리마라에게 말하기를 "그대에게 내가 여태까지 아껴오던 신비스러운 비결을 전수할 테니 그리 알아라" 하고는 "그대가 백 명의 사람을 죽여 한 사람한테서 손가락 하나씩을 잘라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공부하면 공부가 완성된다"고 하였습니다.


앙굴리마라는 매우 정직하고 단순할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승을 숭배했기 때문에 그 말을 곧이듣고 차례로 사람을 죽여 나갔습니다. 그래서 정말 99명까지 사람을 죽여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전생에 선근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아셨습니다. 마지막에 부처님의 인연에 도래했다는 것을 아시고 그 앞에 나섰단 말입니다.


앙굴리마라가 99명을 죽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피해 버리고 마을이나 거리에서는 사람을 찾으래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앞에 나오시자 기운이 장사이고 용맹스러운 앙굴리마라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칼을 내리쳤지만 팔뚝을 딱 잡혀 꼼짝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굴복을 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선근이 깊어서, 크게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몇 년 안 가서 아라한과를 성취하였습니다.


이것을 봐도 현상적인 모양은 설사 사기를 치고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본성품은 조금도 오염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은 교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 자기가 갖추고 있는 마음을 깨닫는 것이므로, 참선 공부를 할 때는 군더더기나 복잡한 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오직 마음만을 닦아 나가야 합니다.



- 지름길


그렇다면 참선하는 공부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가장 빠른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왕이면 빠른 지름길로 가야 하겠지요. 그러나 사람의 근기가 여러 계층이라서 과거세에 학문을 많이 하고 경(經)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은 금생에 경을 보다가 깨닫기도 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새벽에 계명성, 즉 금성을 보고 깨닫듯이, 당나라 때 영운대사(靈雲大師) 같은 분은 복숭아꽃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또한 동산(洞山) 양개(良价)스님은 무정설법(無情說法)을 하였습니다. 무정은 인간이나 기타 동물처럼 식(識)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무정설법이란 사람이 설법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동물이 설법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무나 흙이나 돌이 설법을 하는 것이 무정설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그 말을 곧이듣기가 곤란스럽겠지요. 그러나 밝은 눈으로 볼 때는 분명히 무정설법이 존재합니다.


부처님 경전 가운데《화엄경》을 보면 "진진찰찰(塵塵刹刹)이 구설구청(俱說俱聽)"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의 티끌이나 어떤 미물 또는 흙이나 사바세계의 모든 두두물물(頭頭物物)이 함께 말씀도 하고 함께 듣기도 한다는 말이 '진진찰찰 구설구청'입니다.


우리 법사가 설법을 하고 사람만이 무슨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을 보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소중한 설법은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나무나 흙이나 돌이나 어떤 것이나 다 같이 설법을 하고 있고, 또한 동시에 같이 듣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도 소도 모두 다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상식 범위 밖의 일이니까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속에서는 그것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우리 중생의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차원에서는 동물이 있고 사람이 있고 식물이 있고 이렇게 구분이 있다 하더라도, 본성품에서 볼 때는 모두가 다 생명 하나뿐입니다.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면 사람이나 동물만 중생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부처님의 근본도리에서 볼 때는 유정무정(有情無情), 즉 식(識)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또는 모양이 있는 것이나 모양이 없는 것[有像無像]이나 모두 다 중생입니다. 따라서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 즉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는 말은 어떠한 것이나 사바세계의 두두물물, 천지만유(天地萬有)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가슴에 있는가, 머리에 있는가? 불성은 우리 머리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고 가슴 또는 심장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몸 전체가 불성의 화신(化身)입니다. 나무의 경우에도 나무의 핵심인 목심(木心)에 불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무 전체가 불성의 화신입니다.


가끔 말씀을 드립니다만, 부처님 이 법은 현대의 과학적인 차원에서도 웬만한 것은 다 밝혀졌습니다. 물질이라는 것 역시 우리 중생이 보아서 이것저것 하는 것이지 물리학도가 생각할 때 물질은 종국에 가서는 공간성과 시간성이 없습니다. 공간성이 없다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 소박한 상식으로 보면 무슨 분자이고 또는 산소요 수소요 하지만 이런 것도 역시 어느 정도까지 대체적으로 말한 것이지 더욱 깊이 들어가서 이른바 미시적인 미세한 분야까지 들어갈 때는 텅텅 비어 버리고 물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과학이라는 것은 공간성이 있는, 즉 모양이 있는 것은 알지만 모양이 없는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과학은 시ㆍ공간의 범주 내에 든 것만을 아는 것이지 그 밖의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또는 그 밖의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는 가르침도 많이 있지만, 우리를 분명하게 납득시키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물질을 떠나버린 저쪽 소식을 하늘이요, 하느님이요, 태극이요, 음양이요, 이런저런 말로 이야기하지만, 우리를 확실히 깨닫게 하는, 분명하게 입증된 가르침은 불교밖에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그런 범주에 드는 가르침입니다.


시ㆍ공간성의 세계는 물질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물질세계의 모든 것은 아무리 소중한 것도 분석해 놓고 보면 별것 없이 텅텅 비어 버리고 맙니다. 무상할 뿐입니다. 그것은 실체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물질 밖의 소식, 가장 근원적인 생명 자체는 어떻습니까? 이미 수차례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우리 현대인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부처이므로 부처가 되어야만 우리 마음의 불안의식을 해소시킬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잣대로 알 수 없는 세계가 이른바 성품세계입니다. 즉 이 세계는 생명 자체인 것입니다. 불성이라는 말이나, 부처님이라는 말이나, 혹은 생명이라는 말이나 모두 똑같은 말입니다. 불교는 바로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즈음 생명해방운동을 부르짖고 있습니다만, 이 역시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모두가 다 생명뿐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서, 불교 말로 견성을 해서 생명의 성품을 딱 체험해 버려야 비로소 안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가장 쉬운 지름길이 참선 공부입니다.


참선 공부는 우리가 분명히 생명자리를 느끼는 공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선 공부를 통해서 그 생명자리를 분명히 느끼도록 해야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치를 얻어야 합니다. 내 생명의 뿌리와 네 생명의 뿌리가 다른 것이라면 문제가 복잡해지겠지요. 공간성도 있다고 생각하면 내 생명, 네 생명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물질이 아닌 이 생명은 자취나 모양과 같은 흔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 생명, 네 생명은 뿌리가 둘이나 셋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생명 차원에서 보면 일체 존재의 생명이 모두가 다 하나입니다. 일체 존재 가운데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천지우주는 바로 보면 생명뿐입니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할 때는 생명의 소재가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마음이 열립니다. 참선 공부는 마음을 열고 하는 공부입니다. 마음을 열고 하지 않으면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을 외우고, 또는 화두를 들고 하더라도 참선 공부가 못 됩니다.


다시 바꿔 말하면 선오후수(先悟後修)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먼저 이치나 이해로 깨닫고 난 후에 닦아야 참선 공부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치나 이해로 깨닫는 방법은 물질이란 결국 텅텅 비어 버리고 생명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하는 것입니다. 만법이란 일체의 모든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만법귀일이란 일체의 모든 존재가 다 하나의 생명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종당에는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천지우주는 하나의 생명일 뿐인 것입니다. 그 생명이 바로 빛입니다. 하찮은 생명 같으면 그 생명으로 해서 저 태양이 나오고 은하계가 나오고 사람이 나오고 하겠습니까? 생명의 빛은 일체 공덕과 지혜를 갖춘 자리이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것저것 다 창조해 냅니다. 그래서 그 생명자리를 여의주(如意珠)로 비교해서 말합니다. 모든 것을 뜻대로 하는 마음 구슬이 여의주입니다. 따라서 생명인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다 나옵니다. 달도 나오고 해도 나오고 모두가 다 나옵니다. 나오되 무작정 혼란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연을 따라서, 연기법적(緣起法的)으로 나옵니다. 그 생명 자체는 완전하고 완벽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이 다 들어 있습니다. 생명 가운데 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ㆍ인간ㆍ천상ㆍ성문ㆍ연각ㆍ보살ㆍ부처의 세계가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도 고구정녕(苦口叮嚀)으로 생명의 세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세계는 광명의 세계이고 무량한 정토세계입니다. 또한 광명장(光明藏)이면서 공덕장(功德藏)입니다. 하여튼 좋은 것은 다 들어 있습니다.



- 참된 길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보살의 이름도 얼마나 많습니까? 무장애보살(無障碍菩薩), 미륵보살(彌勒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 등등. 그리고 부처님 이름도 굉장히 많습니다. 천지우주에 부처님 이름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님 이름을 적은 책이《삼천불명경(三千佛名經)》이듯이 부처님 이름이 삼천 가지나 있습니다. 그래서 삼천 부처님께 일 배씩 올린다는 의미로 삼천 배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소박한 사람들은 그런 부처님들이 뿔뿔이 다 인격적으로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불교가 아닙니다. 어떠한 형체가 있어서 공간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면 그런 입장은 이미 불교가 아닙니다. 부처님들은 각각 뿔뿔이 있지 않고 생명체 내에 들어 있는 무량한 공덕입니다. 그렇기에 무장무애(無障無碍)라고 합니다. 조금도 장애가 없는 것이고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까지 가야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見性), 즉 성품을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품을 보는 경지까지 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단박에 되어 버리기도 어렵습니다. 일언지하에 확철대오(廓徹大悟), 즉 말 한마디에 깨달아 버린다는 말씀도 있습니다만, 사실은 우리가 깨달음을 얻으려면 해오(解悟)가 앞서야 합니다. 이치로 아는 해오 정도는 재주 있는 분들은 단박에 깨달을 수 있겠지요. '정말 따지고 보아도 별것이 아니고 물리학에서도 종당에는 다 비었다고 하는데 결국 남는 것은 생명뿐이 아닌가?'라고 유추해서 믿는 사람들은 '그냥 모두가 생명뿐이구나!' 이렇게 생각만 합니다. 진실로 마음으로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명을 하려고 하면 또한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증명을 해야만 온전히 자기 생명 가운데 들어 있는 무량공덕을 우리가 다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맛도 좀 볼 수 있는 것이지, 증명을 못하면 아무런 맛도 못 봅니다. 팔만사천 경전을 앞으로 외고 뒤로 외운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무량공덕을 느끼지 못합니다.


금생에 우리가 태어나서 잘못 배우고 잘못 생각하고 잘못 느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이 우리 잠재의식에 꽉 차 있습니다. 우리 생명 가운데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옥을 포함한 육도(六道)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무량 세월 동안에 어떤 사람이든 모두 다 과거 어느 생엔가는 아수라 세계로 갔다가 지옥으로 갔다가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 생명 가운데는 지옥에 가서 지은 업장, 또는 아수라 세계에 가서 지은 업장이나 축생계에서 지은 업장 등의 수많은 업장들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업장 때문에 단지 이치로 조금 안다 하더라도 생명의 본바탕인, 본 고향자리인 진여불성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증명을 쉽게 못하니까 사흘이나 한 달, 또는 일 년의 별시수행(別時修行)이 필요합니다.


홍인(弘忍)스님 같은 분들은 60년 동안 산에서 안 나오고 공부했습니다. 과거 중국 당나라 때나 혹은 우리나라의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위대한 신통묘지(神通妙智)를 갖춘 분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 때는 자기 생명의 본바탕인 진여불성을 확철대오하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아무튼 단박에는 못 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갈 길은 오직 한 길뿐입니다. 우리는 본래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는 길밖에는 참다운 안심입명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 길을 알아야만 가정과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의 참다운 평화를 추구할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인 토인비는 불교를 숭상했으며 "현대 원자력시대에 사람들이 집단자살을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석가모니나 예수, 혹은 칸트나 플라톤과 같은 분들이 의도했던 인생관으로 돌아가는 일밖에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핵무기라는 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대량 살상무기 아닙니까? 우리가 참다운 자유, 참다운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 길을 걷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것, 공자의 가르침이나 노자의 가르침의 핵심은 '나'와 '일체 존재' 가 모두가 다 허망무상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빨리 하고 싶습니다. 용(龍)이 제아무리 용맹스럽고 힘이 세다 하더라도 구름이 없으면 승천을 못하고, 물이 없으면 힘을 못 씁니다. 호랑이도 영악스러운 동물이지만 언덕이 있고 산이 있어야 비비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힘을 못 씁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성불하고 싶어서 몸부림치고 애쓰지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내 소유가 있다는 관념이 있으면 성불을 못합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이며 자기 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존재에 대한 바른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우리 중생들이 반야의 지혜, 즉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얻어야 공부가 바로 됩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분들을 보면 "염불만 많이 하면 된다" 또는 "화두만 의심하면 쉽게 깨달아 버린다"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일심으로 하면 마음은 모아지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성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효스님이나 보조국사도 말씀하셨듯이 정혜쌍수(定慧雙修), 즉 항시 부처님 공부에는 지혜가 함께해야 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제법공의 지혜, 즉 모든 것은 허망하다는 지혜입니다.


현대의 불교는 생활불교이므로 생활불교를 하려면 있는 것, 즉 현상적인 것을 좋게 해야 되는데, 모두가 다 허망하다고 하면 어떻게 생활불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반문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는 실존 따라서, 있는 것은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은 없다고 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원적이고 실존적인 사람이 분명히 비었으면 비었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 입각해야 공부도 되고, 자기 마음도 몸도 편하고, 집안이나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가 다 편합니다.


토인비는 불교인이 아니면서도 그런 바른 말을 했습니다. 예수나 석가나 공자 등 성인의 인생관을 자기 인생관으로 하고 행동을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참다운 평화, 참다운 행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 허공무일물


‘나’ 라는 것은 분명히 비어있습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 있는 것일 뿐 ‘나’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진면목은 텅 빈 것입니다. 인(因)과 연(緣)도 비어 있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사바세계에 있는 모든 물질은 생명체가 그때그때 상(相)을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본래가 물질이라면 이렇게 변하고 저렇게 변해도 그대로 물질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물질은 본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제 아무리 상(相)을 이리저리 낸다 하더라도 물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제로를 몇 천 번 곱하고 더해도 제로인 것처럼, 물질이 아닌 것이 구름 같은 모양을 내나 개 같은 모양을 내나 결국은 다 물질이 아닙니다. 다만 진동과 운동의 차이로 해서 이 모양 저 모양, 나요 너요 하는 것이지, 본바탕인 진여불성 자리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앙굴리마라가 99명의 사람을 죽였다 하더라도 본성품의 자리에서는 조금도 오염이 안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지옥이나, 아귀 혹은 축생이나 사람으로 와서, 우리 업장이 잠재의식에 차곡차곡 축적 되어 있다 하더라도, 본성품에서 볼 때는 조금도 오염이 안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비판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버릇을 한 번 붙여 놓으면 떼어 내기가 어려워서 그 버릇 때문에 시간을 오랫동안 끌게 됩니다. 시간을 단축하여 빨리 떼기 위해서는 비록 지금 내가 사람 모양을 하고 금생에 나와서 잘못 배우고 잘못 느끼고 해서 업장이 많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성품, 즉 광명과 하나 되어 부처님의 안목으로 볼 때는 내 머리카락 끝에서 발끝까지, 혹은 천지우주가 아무런 차별 없이 심심 미묘한 부처님의 광명으로 보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무슨 욕심을 낼 것이며 무슨 미움과 사랑, 즉 애증을 낼 것입니까? 우리 인간은 그 곳까지 꼭 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생물이 살 때인 주겁(住劫)인데 이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 가지 못해서, 차차 파괴가 되는 시기인 괴겁(壞劫)이 옵니다. 기독교 일각에서는 1992년 10월28일에 지구에 종말이 온다고 했고 휴거라 해서 기독교인만을 하느님이 들어 올려줌으로써 구제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이런 식의 비과학적인 말은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철두철미 합리적입니다. 지구나 다른 천체가 오랫동안 주겁을 거치다보면 차츰차츰 불가역(不可逆)의 에너지인 엔트로피(entropy)가 증장하여 다 불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물리학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국의 호킹 같은 분도 약 100억년 정도 되면 우주가 점진적으로 파괴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천지우주 물질세계는 결국 다 파괴되고 그 후에는 텅 텅 비어 버립니다. 허공무일물(虛空無一物)이 되는 것입니다. 즉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비록 물질은 없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생명자체인 진여불성광명으로 환원되어 버린 것이므로 불성광명 자체는 조금도 흠축(欠縮)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때는 성불하기 싫어도 성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경을 보면, “겁진소시(劫盡消時) 일체중생(一切衆生) 개당선정(皆當禪定)”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괴겁(壞劫)이 다해서 천지가 파괴 될 때는 모든 중생이 다 깊은 삼매에 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싫든 좋든 간에 종당에는 꼭 성불해야 합니다. 다만 성불을 빨리 못하면 사람으로 태어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또 가르치고 아프고 죽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공부는 제일 쉬운 공부입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도리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성불할 것이라고 하여 지금 낮잠을 자고 게으름 부리고, 또는 망상을 한다 하더라도 성불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더디 간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섭리에 편승해서 성불하는 것입니다. 가만 두어도 몇 억년 뒤에는, 우주가 다 파괴 될 때는 깊은 선정에 들어갑니다.


 마음을 열고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합니다. 성자만이 실상을 봅니다. 성자의 청정안목에서 보는 것만이 진실이고 사실이며, 범부가 보는 것은 설사  학문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바로 온전히 실상을 못보고 가상만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안 보이지만 성자의 가르침 따라, ‘너요 나요 이것이요 저것이요’가 없이, 우주가 모두 진여불성이며 본래 부처라고 느끼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화두도 그러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염불도 그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참선공부가 되는 것이지, 아미타 부처님은 저 극락세계에 계신다, 또 화두만 의심하면 깨달아 버린다는 식으로 해서는 지름길이 못됩니다. 석가모니나 각 성자가 말씀한 이치를 우리 마음에 딱 두고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그렇게 이치를 안 여읜다는 것은 다른 말로 바꿔 말씀드리면 본체를 안 여읜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인 부처님, 혹은 생명의 실상을 안 여읜다는 말이며, 우리 마음의 고향을 안 여읜단 말입니다.


 고향 떠난 사람들이 고향에 가고 싶을 때 고향의 소재도 모르고 갈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갈 곳은 성불의 길이므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길목을 알아야합니다. 길목이 화두요, 염불이요, 주문입니다. 길목을 안다 하더라도 고향생각을 수시로 끊임없이 해야 가는 길이 바르게 됩니다.



- 맑아지는 몸과 마음

 공부하면 차근차근 자기 몸도 마음도 맑아옵니다.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계행을 잘 지켜서 몸이 청정하면 마음도 청정해지고, 그 역으로 마음이 청정하면 몸도 따라서 청정해집니다.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그렇게 마음부터 익어져서, 정말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확 트일 때가 있습니다. 확 트일 때 가서는 자기 몸에 대한 아무런 부담이 없습니다. ‘이 몸이 내 것인가?’ ‘이것이 내 몸인가?’ 이 만큼만 되어도 자기 몸을 위해서 남을 희생시킨다거나, 자기가 당선 되고 싶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한다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금생에 우리가 확철대오하여 석가모니부처님 정도는 못 된다 하더라도, 공부를 해서 마음이 일념(一念)이 되면 자기 몸도 마음도 쏙 빠져버립니다. 이것이 불교용어로 신심탈락(身心脫落)이며, 그러한 때의 기분은 허망한 것이 아니라 환희가 충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잘 입고 잘 먹고 좋은 집에서 살아야 행복한 줄 알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참다운 행복은 자기 몸에 대해서 아무런 부담 없이 마음은 더욱더 맑아지고 또 모든 사람이 다 귀엽게 보이고 천지우주 모두가 생명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행복은 어디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행복을 우리가 놓치고 안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어 가다가 더 밝아지면 그때는 정말로 빛을 보는 것입니다.


 전깃불도 원래 우주에 빛이 있으니까 그렇게 빛이 나오는 것이지, 무(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정말로 빛을 보는 것입니다. 광명, 즉 빛을 보고 몸이 가벼워지면 유연선심(柔軟善心)이 되어 착한 마음이 차근차근 깊어집니다. 애매하게 자기를 비방한다 하더라도 별로 싫지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 타사비 왕비는 그야말로 못난 얼굴이었는데 불성인 빛을 봄으로써 한 순간에 미인이 되었습니다. 부처님 법에는 아름다움도 예술도 다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온전히 빛을 볼 때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진 만큼 우리한테 그것이 온단 말입니다. 공부를 해도 실지로 얻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얻는 것이 무궁무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금 그런 광명이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생명자체이고, 광명이며 나나 너나 이것이나 저것이나 우주에는 빈틈도 없이, 눈부신 광명이 아니라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적광(寂光)이 충만해 있다고 생각하면서 화두도 의심하고 염불도 하면, 이른바 도인들이 말씀하신 선정과 지혜가 쌍수가 되어서, 지혜와 선정이 같이 어우러져서 공부가 빠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인들도, “염념상속(念念相續) 필경위증(畢竟爲證)!” 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생각생각 부처님경계, 생명의 광명인 부처님의 본성품을 놓치지 않고, 내 밖에나 안이나 충만한 광명자리를 훤히 느끼면서, 부처님 이름이나 화두를 지속적으로 자기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참구 한다면, 열 사람이 하면 열 사람 다 성불 한다는 뜻입니다. 진실로 우리 생명은 위대한 것입니다. 잘나고 못나고, 못살고 부자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한테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런 생명을 믿고 화두를 참구하고 염불도 하면 참 쉬운 것입니다. 그렇게 할수록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하고 다 편한 것입니다.


 염불을 하고 참선을 하면 몸도 마음도 편안해지는 이유는, 그것이 천지우주의 섭리에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비심이 더 우러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집안도 나라도 평화로워집니다. 특히 우리 보살님들은 집안에서 정말로 자비로운 보살의 화신이 되셔야 합니다. 아무 말씀이나 하실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비심으로 가족을 대하셔야합니다. 공부를 참으로 했다면 유연선심(柔軟善心)이 되므로, 부드러워져서 누구하고 시비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모두가 다 부처같이 보이는데 어떻게 시비가 되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공부가 깊어지면 일체공덕이 다 드러납니다. 꼭 금생에 자기 생명의 본 고향자리로 가셔야 합니다. 다소 제대로 못 간다 하더라도, 몸도 마음도 잊을 정도의 아주 쾌적한 경안심(經安心), 또는 광명이 보일 수 있는 정도까지는 공부를 하셔야합니다. 꼭 그렇게 해서 무량공덕을 이루시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불기 2536년 2월, 태안사 동안거 해제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