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가장 행복한 공부

3. 만 갈래 마음을 하나로 모아

3. 만 갈래 마음을 하나로 모아



- 여러 갈래 길


'만양당(萬羊當)'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르는 양떼가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날 경우에, 그 양들을 잡는 방법이 오직 한 길이면 수월하겠으나, 길이 너무 많으므로 쉽게 잡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길이 많으면 한편으로는 좋은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어느 길이 옳은지를 선택하는 데 대단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의 공자나 맹자 같은 분들이 출현한 때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도 역시 어느 정도 개명되어서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하고, 인간 정신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끝에 가지가지의 유파가 생겼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인간의 본성은 착한 것이다"라고 하는, 소위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있는 반면에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라고 하는 성악설(性惡說)도 있었습니다.


부처님 법문도, 우리가 본래 부처이므로 부처가 되고 나면 쉬울 텐데, 우리 중생들의 업연이 하도 복잡해서 또는 과거 숙세로부터 지어 내려온 업장이 두터워서 갑자기 성불이 안 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법문도 팔만 사천 갈래의 법문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불교의 수행방법 또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참선법입니다. 참선을 할 때는 마땅히 이런저런 생각을 다 정리해서 자기에게 알맞는 성불의 방법이 딱 정립되어야 공부가 잘 됩니다. 제가 여러 스님네도 만나보고, 또 재가불자들도 만나 보았습니다만, 모두 자기 수행법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굉장히 회의를 품습니다.


경(經)을 보면, 의심이라는 것은 잘하면 좋은데, 잘못 하게 되면 괜히 큰 망상만 됩니다. "의시해본(疑是解本) 의시혹본(疑是惑本)"이란 말처럼, 의심이란 우리 마음을 풀고 열어주는 근본이 될 수도 있지만, 미혹을 더하는 근본도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 공부 하시는 분들은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는 말을 외워 두시길 바랍니다. 그 의미는 모든 천만 갈래의 마음을 하나에 다 모아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 타성일편이 안 되면 사실은 참선이 안 됩니다. 따라서 참선할 때는 타성일편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이란 무엇이고, 또 물질이란 무엇인가? 혹은 유주무주(有住無住), 유상무상(有相無相)의 존재가 많은데 그런 존재는 대체로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철학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공부를 바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선도 교(敎)를 다 보고 나서 사상이 통일된 뒤에 들어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고 합니다. 즉 타성일편을 하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이래저래 생각하는, 물질인가 정신인가 또는 무슨 주의(主義)인가 자연인가 하는 모든 생각을 하나의 도리로 해결시켜 버려야 합니다.



-《무문관》


《무문관(無門關)》은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가 공부하는 화두법을 48칙으로 꾸민 책입니다.《무문관》의 대의는 우리 중생들이 보고 듣고 아는 모든 것이 다 '무'요, 모든 것이 다 허망하다는,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라 하는 그 관문을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런 무의 관문을 뚫고 못 넘어가므로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모두가 없다는 무의 관문은 공부를 시키자고 억지시설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부처님 법문이나 도인들 법문은 모두가 다 사실 그대로를 말한 법문입니다. 진실법문입니다. 이른바 우주의 실상 그대로를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따라서 무문관도 있는 것을 어거지 방편으로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없는 것이기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번뇌 때문에 '무'를 느끼지 못합니다. 삼독심에 가린 흐리멍덩한 우리 중생의 안목으로는 '무'를 못 느낍니다. 현상만 보고, 현상만 실제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욕계, 색계, 무색계가 모두가 다 마음뿐인, 즉 삼계유심(三界唯心)이요, 또는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바로 식(識)뿐이라는, 즉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하지 않습니까?


만법은 모든 존재를 의미합니다. 깨달은 차원에서 볼 때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모든 법계가 다 마음뿐인 것입니다. "일체존재가 다 식뿐이다"라고 말은 할 수 있지만, 우리 중생들의 눈에는 실제로 그렇게 보이지가 않습니다. 우리 중생들에게는 만법이 다 물질로 보입니다. 만법이 다 물질로 보이기 때문에 유물론이 생기고, 따라서 공산주의가 생기고 그러는 것입니다. 일체존재가 부처님의 사상대로 마음뿐이고 식뿐이라고 생각할 때는 유물론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유물변증법에 의한 공산주의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모든 것을 있다고만 봅니다.


내 몸뚱이도 이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므로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맙니다. 자기 몸뚱이를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권속도 중요하겠지요. 따라서 자기 권속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희생 같은 것은 별로 안중에 없습니다. 자기가 소속한 단체를 위해서는 다른 단체는 배격해야 하는 것이고, 자기 나라를 위해서는 국수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만 제일이라고 하는 그러한 주의를 신봉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보는 이 모든 환경과 물질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반야심경》


그러나 부처님이나 성자들이 보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데 우리 수행이나 공부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정견(正見), 즉 바로 보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늘 대하는《반야심경》을 보십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다 허망하다고 부정합니다.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육식(六識)의 모든 것, 즉 우리 중생의 생리적인 눈ㆍ귀ㆍ코ㆍ입ㆍ촉각ㆍ신근(身根) 등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있지 않다면, 우리가 보는 색(色)이나 소리나 형태나 맛이나 감촉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라는 주관도 없고 객관적인 환경도 없다면, 이를 토대로 일어나는 우리의 판단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이나 판단이라는 것은 우리의 주관과 객관이 합해져서 일어나지 않습니까? 나라는 주관이 있고, 상대적인 대상이 있어서 판단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반야심경》에서는 우리의 육근, 즉 우리 자신의 근(根)이나 외계의 대상이나 또는 이 둘의 만남으로 일어나는 식(識)은 없다고 누누이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반야심경》이 전하는 그런 소중한 진리를 그때그때 놓쳐 버립니다.


신중불공 모실 때,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반야심경》을 생략해 버립니다. 그러나 신중불공 모실 때는 꼭《반야심경》불공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신분(神分)이라고 합니다. 신중불공이라 하는 이것은 삼마외도(三魔外道), 즉 마귀나 나쁜 기운들을 몰아내고 좋은 선신을 청해서 가피를 받게끔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삿된 기운들이 있으면 소원을 성취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선신들의 가피를 얻으려면, 나쁜 신들을 물리쳐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에 적합한 법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바른 견해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견해를 지니지 못하면 나쁜 신이 됩니다. 천상(天上)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것만 긍정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은 없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디 저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정화되어서, 탐내는 마음과 분노하는 마음,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인 삼독심이 차근차근 가벼워지면, 바로 그 자리가 천상입니다. 삼독심이 무거워질수록 욕계의 아래 차원으로 떨어집니다.


지옥은 그야말로 완전히 닫혀 있어서 욕심과 성내는 마음,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뿐인 의식을 갖는 존재가 바로 지옥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보다 훨씬 삼독심이 희박한, 가볍고 맑은 존재가 바로 천상입니다. 그것 역시 욕심을 완전히 떠나버리면 색계인 것이고, 또 물질의 관념을 떠나버리면 그대로 무색계입니다. 이러한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를 떠나야 비로소 참다운 깨달음이 온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신중불공을 모실 때《반야심경》을 외우면 나쁜 신들은 그냥 물러갑니다. 모든 것이 있다고만 생각하므로 나도 있고 너도 있습니다. 삼독심에 가려진 안목으로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우리 중생은 나쁜 마음을 품습니다.


그러나 나도 원래 허망한 것이고 너도 허망한 것이며, 좋다는 것도 또한 허망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귀신들이 우리를 해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반야심경》을 한 번 외우면 그냥 옆에 있는 사람만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잠재의식도 정화되고 우리 주변도 정화됩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오염이라 하면 일산화탄소나 이산화탄소 혹은 아황산가스 같은 것만 오염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장 짙은 오염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중생의 나쁜 마음입니다. 탐욕의 마음만 품어도 벌써 그 마음이 우리 분위기를 오염시킵니다. 그 반대로 선량한 사람들은 우리 분위기를 정화시킵니다. 우리 스님네나 불자님들이 선방에서 공부할 때, 공부하는 분들이 누가 악심을 품겠습니까? 따라서 모든 상을 떠나서 오로지 성불하겠다고 하는, 성불을 지향하는 그 마음이 벌써 우주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는 의병장으로 칼을 들고 나가서 싸웠지만, 진묵대사 같은 분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전장에 한 번도 안 나가신 분입니다. 요즈음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분들에게 진묵대사 같은 분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법은 그렇게 얕은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있다는 사실 혹은 칼을 잡고 안 잡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몸소 사회에 참여하느냐 혹은 칼을 들고 나아가 싸우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의식이 얼마만큼 정화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중불공을 모실 때는《반야심경》을 외우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쁜 귀신은 못 배겨 냅니다.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해서 나쁜 맘이 생기는 것인데, 그런 것이 모두 허망하다고 풀어 버리므로 나쁜 마음도 차근차근 풀어집니다. 나쁜 귀신도 우리와 똑같이 자성은 진여불성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잘못 생각해서 마음이 얽히고설켜 나쁜 귀신이 된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귀신들은 이런 몸뚱이가 없습니다. 그런 상태를 유체(流體)라 합니다. 유체는 보다 미세한 몸이기 때문에 말을 잘 알아먹습니다. 자기 몸뚱이가 어떻게, 밥을 얼마나 먹어야 하고 칼로리를 얼마 섭취해야 하고, 이럴 때는 욕심을 내거나 하겠지만, 그런 유체라는 것은 미세한 분자 같은 몸이기 때문에 밥 같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따라서 말을 더 잘 알아듣습니다.


그러므로 삿된 아귀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법문을 하면 우리 사람보다 더 잘 알아먹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신들이 있다가도《반야심경》을 외우면 "아! 그렇구나" 합니다. 석가모니 같은 분은 거짓말을 절대로 않는 분인데, 그분이 비었다고 했으니까 정말로 비었구나 하고 물러갑니다. 악신들이 물러가면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선신들은 부처님 법문을 제대로 다 알아듣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 모여듭니다. 때문에 신중불공을 모실 때는《반야심경》을 꼭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변의 모든 삿된 것을 물리치고 선신들의 가호를 받으면서 원력을 세우고 축원을 해야 훨씬 더 효과적으로 되겠지요.



- 물질은 허망한 것


지금 이 사회를 둘러볼 때, 누구나 이 사회가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병을 퇴치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에 대해서는 다 무모합니다. 우리 종단도 그야말로 지독한 병을 앓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견해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어느 분들은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그러기도 하고, 별스런 말을 다 합니다. 물론 그런 것도 의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자세입니다. 감투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몸뚱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단체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반야심경》에 있는 바와 같이 내 몸이라는 것은 산소나 수소, 탄소, 질소 등 각 원소가 인연 따라서 잠시 모여 있는 것에 불과하며, 지금도 변화해 마지않습니다. 그래서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한 것입니다. 오온이란 색(色)온, 이른바 물질인 몸뚱이와 수(受)온ㆍ상(想)온ㆍ행(行)온ㆍ식(識)온을 말합니다. 수온은 느낌을 말하며, 상온은 상상하는 것, 행온은 의지를 말하며, 식온은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우리 몸과 마음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잠시 인연 따라 모여서 우리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의 모음인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말은 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몸뚱이는 잠시 각 원소가 인연 따라서 생겨난 것이므로 한 찰나도 머물지 않고, 어느 순간도 고유한 것이 없습니다. 변동해 마지않는 것이므로 이 몸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내 마음이 아프다 혹은 좋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도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든, 상상하고 의혹을 품는 것이든 혹은 분별 시비하는 것이든 모두 자취가 없습니다. 내가 "기분이 사납다"라고 한들, 그 기분 사나운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혜가스님이 달마스님한테 가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자, 달마스님께서는 "그대 불안한 마음을 내놓아 봐라!"라고 하셨다지 않습니까?


불안한 마음, 좋은 마음이 자취가 어디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흔적도 없는 것을, 다만 우리의 습관 때문에 괜히 슬퍼하고 미워하고 좋아하고 하는 것입니다. '오온은 모두 공한 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내 몸뚱이나 의식, 관념과 같은 것을 비추어 봄으로써 일체의 고난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반야심경》에 '조견오온개공'이라 한 것입니다.


우리 불법이나 다른 종교, 철학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인생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일체 고난을 해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을 제거하려고 할 때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선 무명심의 극단이 되어 있는 '나'라는 존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실제로 느껴야 합니다. 사실은 빈 것인데 우리가 잘못 보아서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따라서 백 가지 천 가지의 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검은 것인데 억지로 희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와 똑같이 부처님 지혜로 볼 때는 이 몸뚱이는 물질이 아니라 텅텅 비어 있습니다. 양자물리학으로 본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화두나 염불 같은 것을 복잡하게 공부하지 않더라도 사실은《반야심경》만 잘 보고 느낀다면 다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다 비었다는 것을 알아서 차근차근 마음을 비워 버린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허무하게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히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내 몸이 이렇게 나오고 천지우주가 생겨나겠습니까? 완전히 빈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 몸도 나오고 다른 것들도 나옵니다. 따라서 우선 우리가 잘못된 것, 잘못 있다고 생각한 것만 비워 버리면 실제로 있는, 실제적인 진여실상이 나온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이라고도 하는 실재가 나오는 것입니다.


《무문관》의 화두 제일 칙의 평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구구순숙(久久純熟)', 즉 화두ㆍ염불ㆍ주문 할 것 없이 무슨 공부를 하든 간에 오랫동안 익혀 나가면 자연히 안이나 밖이나, 다시 말해서 정신이나 물질 모두가 다 하나로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화두를 든다고 해서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공부하시는 분들은 대개 우선 마음만 급해서 "저는 자꾸만 이런저런 망상이 나옵니다"라고 말합니다만, 망상이 전혀 안 나오면 그 사람은 도인이겠지요. 응당 망상이 나오므로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범부와 성자의 차이가 어떤 것인가 하면, 우선 범부는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하지 못했으므로 어리석은 마음으로 세상을 봅니다. 아직 불성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과 저것을 구분해서 봅니다. 즉 '나'라고 구분하고, '너'라고 구분하며, 좋다고 구분하고, 나쁘다고 구분합니다. 반대로 도인은 구분하는 분별의식의 뿌리를 뽑아버린 사림입니다. 그러므로 망령되게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가 청정미묘한 진여불성뿐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대로 봅니다. 사실의 본바탕인 진여불성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체의 모든 존재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평등하게 보입니다. 진여실상과 같이 보는 것입니다. 나나 너, 좋은 것, 또는 어떤 것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진여와 똑같이 봅니다.


사실 우리는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법문을 듣지 않아도 저절로 불성의 훈기가 배어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큰 선지식을 만남으로써 밖으로부터 배워서 불성의 훈기가 안으로 배어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을 안과 밖에서 서로 훈습한다고 하여 '내훈외훈(內薰外薰)'이라고 합니다. 안에 있는 불성광명으로 인하여 서서히 밝아지는 것을 내훈이라 하고, 타인이나 어떤 대상에 의하여 밝아지는 것을 외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40대에 어느 법회에 나가서 서투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공부를 하신 분이 "지옥에 한번 떨어진 중생들에게는 스승도 없을 터이므로 영원히 지옥에서 못 빠져 나오고 그곳에만 있겠지요?"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때 답변을 못해서 창피를 당했습니다. 지옥중생도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다하면, 즉 지옥중생으로서의 과보가 끝나면 결국은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천상의 중생도 역시 천상에서의 인연이 다하면 다시 내려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옥중생은 물론이고 천상의 중생들도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도 변화합니다.


불성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발랄하게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 자체의 법칙으로 움직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중생을 다 성불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주의 중력인 인력도 모두가 다 그런 까닭입니다.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중력이요 인력인데, 우리 불교적인 뜻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모든 부처님의 원력인 일체중생을 다 근본자리로 이끄는 힘입니다.


우리가 법회 때마다 마지막에 외우는 사홍서원도 원칙은 다 그런 뜻입니다. "모든 중생을 다 해탈시킨다" "모든 번뇌를 다 끊는다" "모든 법문을 다 배운다" "완벽한 깨달음을 다 얻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본래 그런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우주의 일체 존재는 근본적으로 이와 똑같은 본질, 즉 부처님의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설사 잘못 살고 잘못 생각하고 행동해서 지옥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이 차근차근 배어 나와서 좋아집니다.


이것은 마치 탁수가 가만히 두면 앙금이 가라앉아서 바닥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설사 지옥에 있는 존재라도, 누가 옆에 가서 제도를 하지 않는다 해도 저절로 부처가 되어서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밖에서 부처님 교법을 만나는 인연이 있으면 좀 더 쉽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불의 과정은 내훈외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배어 나오는 향기로운 불성의 훈기를 차근차근 내 것으로 만들고, 또한 동시에 공자나 예수나 석가나 소크라테스 같은 성자들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차츰 불성 쪽으로 몰아세워야 합니다. 성인들의 가르침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철저하고 덜 철저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본래 마음자리, 본래 진리로 우리를 몰아세우는 법문이라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아직 공부가 순숙되지 못했으므로 타성일편이 못 되겠지요. 순숙이라는 것은 공부를 아주 순순하게 해서, 공부가 익어간단 말입니다. 익어 가면 본래가 부처인지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마음이 맑고 몸이 가벼워 옵니다. 공부를 하고 있는데도 마음이 상쾌하지 못하고 몸도 천근만근으로 무거우면 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겁니다.


본래 우리 불성은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나'도 없는데 어떻게 무게가 있겠습니까?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은 겉만 보므로 물질로 보이는 것이지만 그 바닥에서 볼 때는 물질이 아니라 그때는 그야말로 다 불성뿐이기 때문에 원래는 무게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지만 만약 우리가 물질을 존중하고 중요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안 싸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통제가 있고 정해진 깨끗한 규범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내 물건이 있고, 네 물건이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안 싸울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주의, 공자주의, 예수주의는 모두가 다 "물질이라는 것은 허망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말씀한 것이 석가모니의 가르침 아닙니까?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도 그러한 공(空)사상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금강경》,《반야심경》입니다.《화엄경》,《법화경》은 제법실상의 자리, "모두가 다 부처뿐이다" "천지우주가 다 부처님 세계다"라고 적극적으로 표현했지만,《금강경》과《반야심경》은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허망한 것이라는, 부정을 주로 해서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잘못 본 것을 우선 부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부가 제대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모든 법이 다 비어 있는 실상에서 보면 그때는 색의 세계도 없고 소리도 없고 다 없습니다.



- 텅 빈 것


우리 중생은 모든 법이, 자신과 주변의 모든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이 모든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한 부처님 참선 공부는 이것저것 다 글러져 버립니다. 모든 존재를 있다고 생각하면 바로 집착이 생기게 되므로, 단체를 꾸며 보나 가정을 꾸며 보나 다 불화와 갈등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가 오직 한 성품의 진여불성뿐이라고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타성일편이 되어야 합니다. 믿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단 말입니다. 여태까지 배운 것이나 느낀 것이나 모두가 다 있다고만 배웠으니까, 쉽게 공(空)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구구순숙이란 말이 그토록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래오래 두고두고 '다 비었다' '다 비었다' '내가 없다' '내가 없다' 이렇게 되뇌어야 합니다. 자기 암시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내가 원래 부처다' '부처다' 이렇게 하다 보면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가 되어 버립니다. 염불의 본뜻은 그런 데 있습니다. 본래 부처인지라 자꾸만 부처님 이름을 외우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결국은 부처가 되어 버립니다. 자꾸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참말로 마음이 어둡고 나쁘게 되어 버립니다. 자기 암시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화두나 주문이나 염불 같은 공부는 모두가 다 원래의 자리, 진여불성 자리, 원래 모든 존재가 하나인 자리를 구하는 것입니다. 본래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자리를 구한다 하더라도 딱 믿고 구해야지 본래 하나임을 믿지 않고 구하면 항시 괴롭습니다. 백 년 묵은 체증(滯症)도 좋은 사약(瀉藥; 설사약)을 먹으면 그냥 내려갈 수 있듯이, 우리는 그 있다, 없다 ― 있다, 없다는 결국은 있다고 생각하니까 없다는 것도 나오겠습니다만 ― 고 하는 것만 버리면 됩니다. 그런 관념을 못 떠나면 우리의 병은 가실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병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리적인 병도, 마음도, 몸도 다 빈 것이기 때문에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즉시 우리 몸에 가서 반영됩니다.


참선할 때, 젊은 분들은 여러 모로 괴로워도 하고 고생도 하실 겁니다.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인가? 모든 괴로움의 근원은 자신의 관념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있다는 생각에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원래 없기 때문에 원래 없다는 생각이 투철해 버리면 나도 없고 우리 주변도 다 없습니다. 참말로 있는 것은 오직 진여불성뿐입니다.


지금 갑이라는 사람과 을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 사이가 이렇게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원소의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산소나 수소가 없는 공간이 어디 있습니까? 원소의 차원에서만 본다 하더라도 나와 남은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있지 않단 말입니다. 더구나 그보다 더 근원적인 불성 차원에서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불성, 이것은 어디에는 있고 어디에는 없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 자체가 바로 불성이고, 우주는 바로 불성뿐입니다.


이렇게 확실히 알아 버려야 합니다. 화두나 염불을 해도 이렇게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선 내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단지 '깨닫고 보면 위대한 도인도 되고 무엇이든 많이 알게 되겠지'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암중모색으로 하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선을 할 때나 무슨 공부를 할 때는 우선 큰 믿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른바 믿음이라는 큰 뿌리가 없으면 바른 공부를 못하는 것입니다. 참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우리의 믿음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고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고 참선하면 머리도 맑아지고 몸도 가벼워집니다.


다 놓아버려서 모두가 다 텅 빈 것이라고 생각할 때는 가사 우리에게 심장병이 있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텅 빈 것인데 심장병만 따로 어디에 존재하겠습니까? 본래 내 몸뚱이 전체가 비어 있는 것인데, 내 세포가 다 비어 있는데, 심장병이나 암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회에서 하도 많이 듣고 그렇게 배웠으므로 모든 게 있다고만 생각합니다. 백퍼센트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도 역시 공부를 하다 보면, 오랫동안 순수한 마음으로 익히고 익히다 보면, 즉 구구순숙하다 보면 그때는 차근차근 비어 옵니다. 누구든 참선을 막 배울 때부터 그냥 시원스럽고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눈앞이 깜깜하고 목구멍도 깔깔하고 어쩐지 호흡이 잘 안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툭 트여 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몸 전체가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물론 그냥 쉽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선근을 바탕으로 용맹 정진하여 쉽게 성취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가장 중요한 것은 굳은 믿음입니다. 우선 부처님 법을 확실히 믿어야 참선에 진전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비었다'는 반야의 진리, 반야바라밀을 굳게 믿고 시작해야 참선이 됩니다. 반야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참선은 어렵습니다.


하나의 공부 방법을 가지고 먼저 확실히 제법공 자리를 믿어야 합니다. 이때 공(空)은 다만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의 공이 아닙니다. 공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허무주의에 떨어지고 맙니다. 공의 알맹이, 공 그 자체는 바로 진여불성입니다. 일체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이 내 본성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나 몸에 끼치는 공덕은 굉장히 큽니다. 설사 묵은 병이 있다 해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확실하다면 그냥 순식간에 그 병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인도의 심령요법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바라문교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초기 원시불법도 사념주관(四念住觀)입니다. 일체가 다 괴로운 것이고 모두가 다 무상한 것이고 이 몸뚱이는 결국 우리가 잘못 보아서 그렇지 참 더러운 것일 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냥 이 몸 이대로 좋다, 이 몸 이대로 귀엽다고 생각하므로 탐심을 내고 하겠지요. 그러나 이 몸 이대로는 귀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깊이 보면 더러운 것만 충만해 있습니다. 사념주관도 이 몸이 더럽다는 부정관(不淨觀) 아닙니까? 우리가 부정한 것을 좋다고 생각하고 구하려고 하므로 그때는 고통이 안 될 수 없습니다. 과학적으로 본다 해도 이 몸은 결국 무상한 것이고 무아입니다.


내 몸뚱이가 무상한 것이고 무아인데 자기 소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사회도 앞으로는 마땅히 우리 승가의 생활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이런 삶을 본받아라' 하면 되겠습니까? 먼저 우리 승가부터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사람 마음부터 제도해서 자기 마음으로 느끼게 해야지 공산혁명처럼 억지로 공평하게 분배하려고 하면 그때는 싸움이 일어납니다. 적어도 출가 수행자는 자기 평생 내 소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만약 출가 수행자가 내 몸뚱이도 내 것이고 내 책도 내 것이고 내 사는 집도 내 것이라고 할 때, 그때는 수행자가 아닙니다.


사실이 빈 것이므로 부처님께서 사실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딱 비우고 공부에 임해야 합니다. 물론 다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량공덕을 분명히 갖추고 있지요. 경(經)에도 보면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확신해 버리면 그 즉시부터 공부가 후퇴하지 않습니다. 나에게도 석가나 예수의 그런 모든 신통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른바 삼명육통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내가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내가 아픈 것이나 내가 모르는 것이나 내가 부족한 것이나 문제될 게 없습니다. 계발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중생을 일컬어서 '금덩이를 짊어지고 빌어먹는 거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원래 우리는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소유가 없다고 해서 조금도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장에 죽는다 하더라도 손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 몸뚱이는 자기 것이 아니지요. 지금 몸을 버리면 금방 다른 몸 받는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했으면 바로 극락으로 가는 것이고, 극락은 진여불성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업에 실패하든, 자기가 죽든, 자기 이웃이나 가까운 사람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든, 어떤 경우든 아무런 손해도 없습니다. 다만 중생의 있지 않은 상(相)만 바뀌고 변동이 있는 것이지 본바탕은 그대로 가만히 있습니다.



- 가부좌


공부하기에는 가부좌가 제일 좋은 자세입니다. 어째서인가 하면 가부좌를 하고 있는 모습이 정삼각형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기하학을 배워서 아시겠지만 결국은 삼각추가 제일 안정된 것 아닙니까? 따라서 가부좌한 정삼각형 자세가 모든 모습 가운데 제일 안정된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 모습이 지혜가 가장 발동하기 쉬운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용수보살도 "차가부좌자(此跏趺坐者) 최안온불피급(最安穩不疲及)"이라 한 것입니다. 가장 편안하고 피로를 모른단 말입니다. 다리를 양쪽으로 서로 엇갈리게 맞끼우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다만 반가부좌를 하여도 무방한데, 아무튼 가부좌하는 모습이 가장 편안하고 가장 피로가 없는, 즉 최안온불피급한 자세라는 것입니다. 가장 편안하고 가장 피로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차도급자(此道及者)"라 하였습니다. 도가 빨리 통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마왕견기(魔王見其) 기심수포(其心愁怖)"라고도 하였습니다. 도가 빨리 통하므로 그때는 마왕도 그를 보면 두려워서 접근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안정되고 가장 지혜가 발동하기 쉬운 모습이기 때문에 이 모습만 보고도 결국은 마구니가 침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금상첨화로, 그야말로 다시없는 큰 힘이 되어서 무서운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부좌를 하실 때는 꼭 단정히 앉아서 해야 합니다. 허리를 구부리거나 하면 역시 상하호흡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단정히 앉아야 호흡이 순탄하게 되고 소화도 잘 됩니다. 이른바 수승화강(水昇火降), 즉 맑고 시원한 기운인 수기(水氣)가 위로 올라가고, 따뜻한 불의 기운이 아래로 내려가게 됩니다. 수승화강이 되어야 생리적으로 가장 정상적인 상태가 됩니다. 따라서 이렇게 되면 호흡도 차근차근 맑아 옵니다. 또는 그 반대로 호흡 공부를 하다 보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시원스런 기운이 올라가고 더운 기운이 내려갑니다.


그래서 좌선할 때 몸이 좀 거북한 분이나 바르지 못한 자세로 하는 분은 오랫동안 하다 보면 자기 호흡이 무슨 원수 같습니다. 호흡이 원수가 되어서 빡빡해지고, 거기다 방이 좀 덥기라도 하면 콧물도 나오곤 합니다. 그런 때는 호흡을 적당히 조절하거나 단전호흡을 하면 그런 증상이 대부분 사라집니다.


부처님 경전 가운데《아나파나경(阿那波那經)》이라는 경이 있습니다. '아나파나'란 호흡이란 뜻입니다. 입식출식(入息出息)을 말합니다. 그런 경이 있을 정도로 호흡을 중요시했던 것입니다. 호흡 공부만 해서 성불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마음 활동과 호흡은 둘이 아닙니다. 마음이 거칠면 호흡도 거칠어지고 호흡이 고요해지면 마음도 고요해집니다. 따라서 자기 마음 다스리기가 굉장히 어려운 때는 간단히 호흡을 단속해도 무방합니다.


처음에 가부좌를 하고 막 들어앉아 아직 산란한 마음이 안 가시고, 밖에서 보는 것이 자꾸만 걸릴 때는 가만히 호흡운동을 합니다. 호흡운동을 할 때도 잘못하면 도리어 병이 나기 쉬우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어떻게 주의해야 하는가? 거기에는 표준이 있는데, 깊고 길게 하며, 가늘고 고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심장세균(深長細均)'이라 합니다.


그러나 억지로 그와 같이 하려고 하면 그때는 호흡 때문에 병이 생기는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깊고 길게, 그리고 가늘고 고르게 하되 무리가 없도록 하면 좋습니다.


호흡으로 공부하시는 분들이《아나파나경》을 보아도 좋으나, 그 경은 간단한 것이라 깊고 구체적인 가르침을 얻기는 곤란합니다.《요가수트라》같은 경전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서는 호흡에 대한 상세하고 깊은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요가 경전은 인도의 파탄잘리라는 분이 체계를 세운 것입니다. 중국권에서는《혜명경(慧命經)》이라 하여, 화양(華陽) 도인이 낸 경전이 있습니다.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어서 그대로 따르기는 좀 곤란하지만 아무튼 참고는 됩니다.


그러나 설사 그런 경을 모른다 하더라도 심장세균법(深長細均法)으로 호흡을 하시면 됩니다. 한 가지 주의하실 점은 이른바 유식(留息)입니다. 유식은 숨을 들이마신 뒤에 오랫동안 멈추는 것을 말합니다. '숨을 멈춘다' 하여 유식입니다. 숨을 조금 멈추고 있으면 숨이 아랫배로 가서 전신으로 갑니다. 대개는 숨이 이렇게 가슴까지 가서 횡격막에 미처 못 가고 나와 버리기 때문에 전신으로 호흡이 못 갑니다. 그러나 흡(吸)을 해서 가만히 멈추고 있으면 그때는 호흡이 전신으로 갑니다.


따라서 오랫동안 멈추면 멈춘 만큼 더 많이 갑니다. 그러나 억지로 너무 오래 멈추면 그도 역시 부작용이 옵니다. 따라서 심장세균 방식으로 깊고 길고 가늘고 고르게 하되, 처음에는 무리가 없도록 숨을 들이마셔서, 5초나 1분 정도까지 호흡을 멈춥니다. 그렇게 멈추는 동작을 차근차근 더해 갑니다. 가령 오늘은 5초 정도 숨을 멈추었으면, 점차로 늘려 가다가 나중에는 1분, 2분, 3분 동안 늘려 가면서 숨을 멈춥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드디어 숨이 우리 전신에 골고루 삼투됩니다. 그러면 그때는 몸이 시원해 옵니다.


우리 몸이 거북한 것은 호흡이 제대로 안 되고 혈액순환이 제대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호흡을 통하여 산소가 잘 공급되고 혈액순환이 왕성해지면, 그때는 몸이 항시 상쾌하고 가볍단 말입니다. 그래서 드디어는 자기 호흡이 딱 끊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지식(止息)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삼매에 들려면 자기 호흡 소리도 스스로 의식 못하고 호흡이 거의 끊어질 단계가 되어 버려야 비로소 삼매에 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머리가 무겁다든가 또는 상기가 온다든가 하는 분들은 억지로 화두나 염불을 하려고 하지 말고 호흡만 해도 무방합니다. 호흡을 하다가 너무 졸리면 그때 다시 화두도 챙기고 염불도 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공부인들에게 우선 중요한 것은 '모두가 똑같이 모든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뿐'이라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확실히 믿어야 하는데 우리의 버릇이 잘못 되어서 쉽게 믿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하루 공부하면 한 만큼 차근차근 그에 따른 믿음이 더 깊어 갑니다. 따라서 우선 그와 같이 믿음을 가진 후에 부처님 법문을 되뇌이면서 그 믿음을 확립시켜 가야 합니다. 모두가 마음뿐인데 내가 잘못 보아서 좋다 혹은 궂다고 보는 것이라고 자꾸만 자기를 타이르면서 부처님 법문 쪽으로 우리를 다스려 가야 합니다. 가다 보면 결국은 우리의 잠재의식에도 모두가 빈 것이라는 인상이 차근차근 박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믿고서 자기한테 맞는 방법을 골라서 하면 됩니다.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두나 염불이나 다 좋은 것입니다. 주문도 좋습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 법이요 도인들의 법입니다. 모두가 다 우리에게 진여불성 자리를 제시하기 위하여, 우리를 진여불성으로 이끌기 위하여 하신 법문입니다.


매미나 뱀이 허물을 벗듯이, 우리 중생들은 중생의 허물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언제 벗어도 벗는 것입니다. 그러나 게으르면 금생에도 못 벗고 내생에도 못 벗고, 몇 천 생 동안 윤회바퀴를 돌다가 더욱더 고생을 하겠지요. 기왕에 벗을 바에는 금생에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미는 허물을 못 벗으면 성충이 못 됩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집니다. 중생의 허물을 못 벗으면 내내야 참다운 자기는 못 되는 것입니다. 가짜 자기, 망령된 자기 때문에 자기도 고생하고 남도 고생을 시킵니다. 따라서 그렇게 바로 믿고, 꼭 단정히 가부좌를 하고 앉아야 합니다. 그러나 긴장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긴장하면 그것이 마음에 그만큼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긴장을 다 풀어 버리고 단정히 앉아서 해야 합니다. 단정히 앉아야만 호흡도 잘 되는 것이고, 동시에 망념도 덜합니다. 앉아 있는 그 모양 자체가 벌써 사특한 마구니나 외도를 물리치게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되기는 어렵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지면 가부좌로 며칠 동안 있어도 무방하게 됩니다. 그러나 맨 처음에 공부하실 때는 꼭 포행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한 시간 동안 앉으시고 나머지 10분 동안 포행해서 풀어 버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저희같이 나이 먹은 사람들은 귀찮으니까 그냥 앉아 있어 버립니다만, 사실은 한 시간씩 앉고 풀어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참선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하십시오. 일본의 선방에서도 의무적으로 포행을 시킵니다만, 공부 정도에 따라서 그때그때 알아서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가급적이면 한 시간 하시고 포행을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 관법


관법을 주로 하시는 분은 눈을 뜨시는 것이 좋지요. 그러나 관법을 않고 화두나 염불을 하시는 분들은 감고 뜨는 것은 알아서 하시지만 원칙은 반폐반개(半閉半開)라 하여, 본 듯 만 듯 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도 아니고 안 보는 것도 아닌 상태입니다. 그와 같이 모두가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정면을 똑바로 보는 것이 낫습니다. 훨씬 혼침이 덜합니다. 고개를 아래로 숙여 버리면 그때는 꾸벅꾸벅 혼침이 더 빨리 옵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인데 우리는 진여불성 부처님을 보지 못합니다. 모든 관법이나 주문이나 화두 등은 보지 못하는 우리 중생이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령 일상관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고서 공부하는 관법입니다. 서쪽으로 해가 넘어가는 것을 자꾸 생각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거기에 따라서 마음이 모아지고 정말로 해와 같은 광명이 보인단 말입니다. 원래 광명이 없으면 그렇게 보이겠습니까? 원래 천지우주에는 우리 중생이 보는 눈부신 빛이 아닌, 청정미묘한 빛이 항시 충만해 있습니다. 진여불성은 생명의 빛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공부하든지 공부가 사무쳐서 정말로 마음이 모아져서 망상이 줄어들면 차근차근 빛이 비춰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할 때, 이렇게 공부해 나가면 아주 행복스러운 진여불성의 빛이 비추어 오겠구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해야 좋습니다. 없는 허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빛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빛을 미리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은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광명관 또는 일상관이라는 관법이 있습니다.


또는 법계관도 있습니다. 법계관은《화엄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관법인데, 우주 모두가 다 진여불성의 순수 청정미묘한 광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공부에 손해가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내가 지금 한 치 앞의 진여불성 자리를 못 본다 하더라도 일체 존재가 어김없는 진여불성뿐이다' 이렇게 믿고 화두나 주문 혹은 염불이나 관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어떤 공부를 해도 무방합니다. 손해가 없습니다.


다만 혼침이 올 때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 애써 화두나 염불이나 관법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좀 들뜨면 가만히 놓아 버리고서 그냥 호흡만 해도 무방합니다. 따라서 마음에 혼침이 올 때 일깨우는 요령 또는 마음이 들뜰 때 가라앉히는 요령, 그런 것은 자기 스스로 해보시면 짐작이 됩니다.


이렇게 해야 이른바 정(定)과 혜(慧)가 쌍수(雙修)가 됩니다. 우리 진여불성 자리는 원래 지혜와 선정이 같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공부도 지혜와 선정이 병행되어야 진여불성하고 빨리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항시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있는 것은 결국 청정미묘한 진여불성뿐이다' 이렇게 비추어 보는 반야의 지혜를 닦아야 하며, 거기다가 진여불성을 생각하는 우리 마음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 마음을 지속시키는 것이 이른바 참다운 삼매입니다. 그렇게 해야 정혜쌍수가 됩니다.《보조국사 어록》의 대요는 돈오점수(頓悟漸修)입니다. 즉 먼저 문득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고서 그 다음에 거기에 입각해서 차근차근 닦으라는 것입니다. 돈오점수나 돈오돈수(頓悟頓修)나 원래는 다 똑같은 뜻입니다. 해석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리고《도서(都序)》나《화엄경》이나《보조국사 어록》이나 모두가 다 그 대요는 돈오점수와 정혜쌍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록 일체 존재의 본래면목이 부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아직 범부이므로 그것을 증명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러므로 이치로써 깨달은 힘을 따라서 그 자리를 점차로 닦아 나아간단 말입니다. 닦아 나가되 모두가 부처라는 반야의 지혜를 놓치지 않고 지속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정(定)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이제 지관균등(止觀均等)이라는, 즉 지(止)와 관(觀)이 어우러지는 것이고 정(定)과 혜(慧)가 같이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마치 부처님 경전이나 논장(論藏)에서, 새는 양쪽 날갯죽지가 있어야 잘 날고, 달구지는 양쪽 바퀴가 있어야 잘 달린다고 비유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공부도 본래 불성이 갖추고 있는 지혜와 자비를 함께 닦게 되어, 이른바 진여불성과 계합이 잘 됩니다.



- 적게 먹기


이렇게 해서 공부를 하시되 음식도 가려야 합니다. 음식은 우리 공부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그야말로 그런 원수가 없습니다. 공부할 때는 항시 위장이 좀 빈 듯한 상태라야 혈액순환이 빠르고 몸이 가볍습니다. 그런데 위에 무엇이 많이 들어 있으면 뇌에 있던 산소가 위장의 음식을 소화시키려고 위장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면 결국 머리도 무겁고 혼침도 오고 그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많이 먹으면 식곤증이 옵니다. 음식과 우리 공부는 굉장히 밀접합니다. 이런 관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화두를 많이 하려면 고기도 먹어야 하고 다른 음식도 많이 먹어야 기운을 내고 공부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런 분들은 정말로 뜨겁게 생명을 내던지고 공부를 해본 경험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 계율은 모두가 우리 중생들의 공부를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에는 거짓말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우리 중생의 허물을 벗겨서 성자의 몸이 되고 성자의 마음이 되게 하려는 법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적게 먹으라고 했으면 적게 먹어야 합니다. 따라서 될수록 배가 고플 정도로 잡수시면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공부가 잘 되어 갑니다.


적게 먹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계(五戒)에는 없지만 사미십계(沙彌十戒)에는 "때가 아닌 때에는 먹지 말라"고 하는 불비시식(不非時食)이란 계가 있습니다. 지금은 모두들 계율도 그냥 잊어버리고 '적당히 하면 되겠지' 하지만, 부처님 경전에서 하신 말씀은 모두가 다 꼭 우리 중생을 성불로 이끄는 말씀입니다.


'때 아닌 때'라는 것은 오후를 통틀어 말합니다. 때 아닌 때에 먹지 않으면 소음(少淫), 즉 음탕(淫蕩)한 마음이 줄어들고, 소수(少睡), 즉 잠이 줄어들고, 득일심(得一心), 즉 마음이 하나로 빨리 모아지고, 무하풍(無下風), 즉 몸에 방귀도 안 생기고, 신득안락(身得安樂), 즉 몸에 안락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신,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한 사람에게 오는 다섯 가지 복입니다.


우리 젊은 스님 네들은 이성에 대한 음욕 때문에 항시 괴로움을 받습니다. 혈기가 왕성할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음욕을 줄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기를 많이 안 먹고 기름기 있는 것을 많이 안 먹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그런 데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음욕은 줄어들고, 욕심도 잠도 줄어듭니다.


우리가 백 근, 이백 근 무거운 짐을 지고 어디를 간다면 모르겠지만, 마음공부 하려고 한다면 많은 활력이 필요치 않습니다.


갑자기 오후불식을 하려면 장애가 있을 것입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그렇다는 것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알고서 공부해야 손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장청규(百丈淸規)에도 역시 조죽중재(朝粥中齋)라 하여, 아침에 죽을 먹고 낮 한 때 재를 먹습니다. 오후에는 안 먹는다는 말입니다. 작업을 할 때는 간식을 조금 먹습니다만, 그래도 오후불식이 원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사람들은 근기가 약해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들 합니다만, 지금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에 비해서 근기가 절대로 약하지 않다고 봅니다. 두뇌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훨씬 더 영리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장수하는 것 보십시오. 옛날에는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였는데 이제 한국도 평균 수명이 70이 넘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면 지금 사람들의 근기는 절대로 약하지가 않습니다. 다만 자기 몸 관리를 너무 과다하게 합니다. 너무 많이 먹고 함부로 합니다. 따라서 어디서 공부하든지 우리 불자님들이 금생에 성불하려고 마음먹을 때는 꼭 음식을 염두에 두고, 부처님 계율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겁초(劫初)에 인류는 음식을 먹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겁초 인간은 우리처럼 이런 몸이 아니고 광명으로 이루어진 몸이었기 때문에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오염되어서 이렇게 각 원소 집합체인 세포가 우리 몸을 이루게 되었고, 따라서 에너지가 소모되므로 이것을 보충하기 위한 음식이 필요해졌습니다. 설사 그렇더라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정도만 섭취하자는 게 계율의 근간입니다. 도인들이 우리 생리를 관찰해서 계율을 세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법문에 대해서 어떤 면에 대해서든 생리나 심리 모두 전폭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선오후수(先悟後修), 돈오돈수(頓悟頓修)하셔야 합니다. 이런저런 모든 것을 타성일편(打成一片)해야 합니다. 하나로 모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열립니다. "마음을 열어 버려라"라고 하지만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면 열려고 해도 열어지지 않습니다.


천지우주는 물질이 아닙니다. 공간성과 시간성, 또는 인과율도 초월해 버리면 결국은 다 마음인 진여불성뿐입니다. 이것만이 실상이고 딴 것은 모두가 다 없습니다. 이렇게 분명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 말씀입니다. 이렇게 느끼고 공부하시면 종전에 몸이 좀 거북했다 하더라도 정말로 믿는다면 반드시 가볍게 풀릴 것입니다.


설사 우리 집안의 영가(靈駕)가 와서 우리를 침노한다 하더라도 그냥 제도가 됩니다. 정말로 영가 몸도 비었고, 분명히 모든 것이 다 비어 있는 것이므로 확실히 비었다고 믿고 되뇌이며 공부를 한다면 자기 주변의 영가도 제도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공부에 진일보하시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불기 2535년 12월, 동안거 결제중인 스님들께 하신 소참법문>




 

3. 만 갈래 마음을 하나로 모아



- 여러 갈래 길


'만양당(萬羊當)'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르는 양떼가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날 경우에, 그 양들을 잡는 방법이 오직 한 길이면 수월하겠으나, 길이 너무 많으므로 쉽게 잡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길이 많으면 한편으로는 좋은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어느 길이 옳은지를 선택하는 데 대단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의 공자나 맹자 같은 분들이 출현한 때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도 역시 어느 정도 개명되어서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하고, 인간 정신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끝에 가지가지의 유파가 생겼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인간의 본성은 착한 것이다"라고 하는, 소위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있는 반면에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라고 하는 성악설(性惡說)도 있었습니다.


부처님 법문도, 우리가 본래 부처이므로 부처가 되고 나면 쉬울 텐데, 우리 중생들의 업연이 하도 복잡해서 또는 과거 숙세로부터 지어 내려온 업장이 두터워서 갑자기 성불이 안 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법문도 팔만 사천 갈래의 법문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불교의 수행방법 또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참선법입니다. 참선을 할 때는 마땅히 이런저런 생각을 다 정리해서 자기에게 알맞는 성불의 방법이 딱 정립되어야 공부가 잘 됩니다. 제가 여러 스님네도 만나보고, 또 재가불자들도 만나 보았습니다만, 모두 자기 수행법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굉장히 회의를 품습니다.


경(經)을 보면, 의심이라는 것은 잘하면 좋은데, 잘못 하게 되면 괜히 큰 망상만 됩니다. "의시해본(疑是解本) 의시혹본(疑是惑本)"이란 말처럼, 의심이란 우리 마음을 풀고 열어주는 근본이 될 수도 있지만, 미혹을 더하는 근본도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 공부 하시는 분들은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는 말을 외워 두시길 바랍니다. 그 의미는 모든 천만 갈래의 마음을 하나에 다 모아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 타성일편이 안 되면 사실은 참선이 안 됩니다. 따라서 참선할 때는 타성일편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이란 무엇이고, 또 물질이란 무엇인가? 혹은 유주무주(有住無住), 유상무상(有相無相)의 존재가 많은데 그런 존재는 대체로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철학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공부를 바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선도 교(敎)를 다 보고 나서 사상이 통일된 뒤에 들어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고 합니다. 즉 타성일편을 하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이래저래 생각하는, 물질인가 정신인가 또는 무슨 주의(主義)인가 자연인가 하는 모든 생각을 하나의 도리로 해결시켜 버려야 합니다.



-《무문관》


《무문관(無門關)》은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가 공부하는 화두법을 48칙으로 꾸민 책입니다.《무문관》의 대의는 우리 중생들이 보고 듣고 아는 모든 것이 다 '무'요, 모든 것이 다 허망하다는,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라 하는 그 관문을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런 무의 관문을 뚫고 못 넘어가므로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모두가 없다는 무의 관문은 공부를 시키자고 억지시설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부처님 법문이나 도인들 법문은 모두가 다 사실 그대로를 말한 법문입니다. 진실법문입니다. 이른바 우주의 실상 그대로를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따라서 무문관도 있는 것을 어거지 방편으로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없는 것이기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번뇌 때문에 '무'를 느끼지 못합니다. 삼독심에 가린 흐리멍덩한 우리 중생의 안목으로는 '무'를 못 느낍니다. 현상만 보고, 현상만 실제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욕계, 색계, 무색계가 모두가 다 마음뿐인, 즉 삼계유심(三界唯心)이요, 또는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바로 식(識)뿐이라는, 즉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하지 않습니까?


만법은 모든 존재를 의미합니다. 깨달은 차원에서 볼 때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모든 법계가 다 마음뿐인 것입니다. "일체존재가 다 식뿐이다"라고 말은 할 수 있지만, 우리 중생들의 눈에는 실제로 그렇게 보이지가 않습니다. 우리 중생들에게는 만법이 다 물질로 보입니다. 만법이 다 물질로 보이기 때문에 유물론이 생기고, 따라서 공산주의가 생기고 그러는 것입니다. 일체존재가 부처님의 사상대로 마음뿐이고 식뿐이라고 생각할 때는 유물론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유물변증법에 의한 공산주의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모든 것을 있다고만 봅니다.


내 몸뚱이도 이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므로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맙니다. 자기 몸뚱이를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권속도 중요하겠지요. 따라서 자기 권속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희생 같은 것은 별로 안중에 없습니다. 자기가 소속한 단체를 위해서는 다른 단체는 배격해야 하는 것이고, 자기 나라를 위해서는 국수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만 제일이라고 하는 그러한 주의를 신봉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보는 이 모든 환경과 물질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반야심경》


그러나 부처님이나 성자들이 보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데 우리 수행이나 공부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정견(正見), 즉 바로 보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늘 대하는《반야심경》을 보십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다 허망하다고 부정합니다.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육식(六識)의 모든 것, 즉 우리 중생의 생리적인 눈ㆍ귀ㆍ코ㆍ입ㆍ촉각ㆍ신근(身根) 등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있지 않다면, 우리가 보는 색(色)이나 소리나 형태나 맛이나 감촉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라는 주관도 없고 객관적인 환경도 없다면, 이를 토대로 일어나는 우리의 판단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이나 판단이라는 것은 우리의 주관과 객관이 합해져서 일어나지 않습니까? 나라는 주관이 있고, 상대적인 대상이 있어서 판단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반야심경》에서는 우리의 육근, 즉 우리 자신의 근(根)이나 외계의 대상이나 또는 이 둘의 만남으로 일어나는 식(識)은 없다고 누누이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반야심경》이 전하는 그런 소중한 진리를 그때그때 놓쳐 버립니다.


신중불공 모실 때,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반야심경》을 생략해 버립니다. 그러나 신중불공 모실 때는 꼭《반야심경》불공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신분(神分)이라고 합니다. 신중불공이라 하는 이것은 삼마외도(三魔外道), 즉 마귀나 나쁜 기운들을 몰아내고 좋은 선신을 청해서 가피를 받게끔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삿된 기운들이 있으면 소원을 성취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선신들의 가피를 얻으려면, 나쁜 신들을 물리쳐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에 적합한 법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바른 견해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견해를 지니지 못하면 나쁜 신이 됩니다. 천상(天上)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것만 긍정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은 없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디 저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정화되어서, 탐내는 마음과 분노하는 마음,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인 삼독심이 차근차근 가벼워지면, 바로 그 자리가 천상입니다. 삼독심이 무거워질수록 욕계의 아래 차원으로 떨어집니다.


지옥은 그야말로 완전히 닫혀 있어서 욕심과 성내는 마음,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뿐인 의식을 갖는 존재가 바로 지옥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보다 훨씬 삼독심이 희박한, 가볍고 맑은 존재가 바로 천상입니다. 그것 역시 욕심을 완전히 떠나버리면 색계인 것이고, 또 물질의 관념을 떠나버리면 그대로 무색계입니다. 이러한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를 떠나야 비로소 참다운 깨달음이 온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신중불공을 모실 때《반야심경》을 외우면 나쁜 신들은 그냥 물러갑니다. 모든 것이 있다고만 생각하므로 나도 있고 너도 있습니다. 삼독심에 가려진 안목으로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우리 중생은 나쁜 마음을 품습니다.


그러나 나도 원래 허망한 것이고 너도 허망한 것이며, 좋다는 것도 또한 허망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귀신들이 우리를 해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반야심경》을 한 번 외우면 그냥 옆에 있는 사람만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잠재의식도 정화되고 우리 주변도 정화됩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오염이라 하면 일산화탄소나 이산화탄소 혹은 아황산가스 같은 것만 오염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장 짙은 오염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중생의 나쁜 마음입니다. 탐욕의 마음만 품어도 벌써 그 마음이 우리 분위기를 오염시킵니다. 그 반대로 선량한 사람들은 우리 분위기를 정화시킵니다. 우리 스님네나 불자님들이 선방에서 공부할 때, 공부하는 분들이 누가 악심을 품겠습니까? 따라서 모든 상을 떠나서 오로지 성불하겠다고 하는, 성불을 지향하는 그 마음이 벌써 우주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는 의병장으로 칼을 들고 나가서 싸웠지만, 진묵대사 같은 분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전장에 한 번도 안 나가신 분입니다. 요즈음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분들에게 진묵대사 같은 분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법은 그렇게 얕은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있다는 사실 혹은 칼을 잡고 안 잡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몸소 사회에 참여하느냐 혹은 칼을 들고 나아가 싸우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의식이 얼마만큼 정화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중불공을 모실 때는《반야심경》을 외우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쁜 귀신은 못 배겨 냅니다.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해서 나쁜 맘이 생기는 것인데, 그런 것이 모두 허망하다고 풀어 버리므로 나쁜 마음도 차근차근 풀어집니다. 나쁜 귀신도 우리와 똑같이 자성은 진여불성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잘못 생각해서 마음이 얽히고설켜 나쁜 귀신이 된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귀신들은 이런 몸뚱이가 없습니다. 그런 상태를 유체(流體)라 합니다. 유체는 보다 미세한 몸이기 때문에 말을 잘 알아먹습니다. 자기 몸뚱이가 어떻게, 밥을 얼마나 먹어야 하고 칼로리를 얼마 섭취해야 하고, 이럴 때는 욕심을 내거나 하겠지만, 그런 유체라는 것은 미세한 분자 같은 몸이기 때문에 밥 같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따라서 말을 더 잘 알아듣습니다.


그러므로 삿된 아귀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법문을 하면 우리 사람보다 더 잘 알아먹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신들이 있다가도《반야심경》을 외우면 "아! 그렇구나" 합니다. 석가모니 같은 분은 거짓말을 절대로 않는 분인데, 그분이 비었다고 했으니까 정말로 비었구나 하고 물러갑니다. 악신들이 물러가면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선신들은 부처님 법문을 제대로 다 알아듣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 모여듭니다. 때문에 신중불공을 모실 때는《반야심경》을 꼭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변의 모든 삿된 것을 물리치고 선신들의 가호를 받으면서 원력을 세우고 축원을 해야 훨씬 더 효과적으로 되겠지요.



- 물질은 허망한 것


지금 이 사회를 둘러볼 때, 누구나 이 사회가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병을 퇴치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에 대해서는 다 무모합니다. 우리 종단도 그야말로 지독한 병을 앓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견해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어느 분들은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그러기도 하고, 별스런 말을 다 합니다. 물론 그런 것도 의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자세입니다. 감투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몸뚱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단체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반야심경》에 있는 바와 같이 내 몸이라는 것은 산소나 수소, 탄소, 질소 등 각 원소가 인연 따라서 잠시 모여 있는 것에 불과하며, 지금도 변화해 마지않습니다. 그래서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한 것입니다. 오온이란 색(色)온, 이른바 물질인 몸뚱이와 수(受)온ㆍ상(想)온ㆍ행(行)온ㆍ식(識)온을 말합니다. 수온은 느낌을 말하며, 상온은 상상하는 것, 행온은 의지를 말하며, 식온은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우리 몸과 마음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잠시 인연 따라 모여서 우리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의 모음인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말은 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몸뚱이는 잠시 각 원소가 인연 따라서 생겨난 것이므로 한 찰나도 머물지 않고, 어느 순간도 고유한 것이 없습니다. 변동해 마지않는 것이므로 이 몸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내 마음이 아프다 혹은 좋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도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든, 상상하고 의혹을 품는 것이든 혹은 분별 시비하는 것이든 모두 자취가 없습니다. 내가 "기분이 사납다"라고 한들, 그 기분 사나운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혜가스님이 달마스님한테 가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자, 달마스님께서는 "그대 불안한 마음을 내놓아 봐라!"라고 하셨다지 않습니까?


불안한 마음, 좋은 마음이 자취가 어디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흔적도 없는 것을, 다만 우리의 습관 때문에 괜히 슬퍼하고 미워하고 좋아하고 하는 것입니다. '오온은 모두 공한 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내 몸뚱이나 의식, 관념과 같은 것을 비추어 봄으로써 일체의 고난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반야심경》에 '조견오온개공'이라 한 것입니다.


우리 불법이나 다른 종교, 철학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인생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일체 고난을 해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을 제거하려고 할 때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선 무명심의 극단이 되어 있는 '나'라는 존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실제로 느껴야 합니다. 사실은 빈 것인데 우리가 잘못 보아서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따라서 백 가지 천 가지의 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검은 것인데 억지로 희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와 똑같이 부처님 지혜로 볼 때는 이 몸뚱이는 물질이 아니라 텅텅 비어 있습니다. 양자물리학으로 본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화두나 염불 같은 것을 복잡하게 공부하지 않더라도 사실은《반야심경》만 잘 보고 느낀다면 다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다 비었다는 것을 알아서 차근차근 마음을 비워 버린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허무하게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히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내 몸이 이렇게 나오고 천지우주가 생겨나겠습니까? 완전히 빈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 몸도 나오고 다른 것들도 나옵니다. 따라서 우선 우리가 잘못된 것, 잘못 있다고 생각한 것만 비워 버리면 실제로 있는, 실제적인 진여실상이 나온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이라고도 하는 실재가 나오는 것입니다.


《무문관》의 화두 제일 칙의 평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구구순숙(久久純熟)', 즉 화두ㆍ염불ㆍ주문 할 것 없이 무슨 공부를 하든 간에 오랫동안 익혀 나가면 자연히 안이나 밖이나, 다시 말해서 정신이나 물질 모두가 다 하나로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화두를 든다고 해서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공부하시는 분들은 대개 우선 마음만 급해서 "저는 자꾸만 이런저런 망상이 나옵니다"라고 말합니다만, 망상이 전혀 안 나오면 그 사람은 도인이겠지요. 응당 망상이 나오므로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범부와 성자의 차이가 어떤 것인가 하면, 우선 범부는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하지 못했으므로 어리석은 마음으로 세상을 봅니다. 아직 불성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과 저것을 구분해서 봅니다. 즉 '나'라고 구분하고, '너'라고 구분하며, 좋다고 구분하고, 나쁘다고 구분합니다. 반대로 도인은 구분하는 분별의식의 뿌리를 뽑아버린 사림입니다. 그러므로 망령되게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가 청정미묘한 진여불성뿐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대로 봅니다. 사실의 본바탕인 진여불성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체의 모든 존재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평등하게 보입니다. 진여실상과 같이 보는 것입니다. 나나 너, 좋은 것, 또는 어떤 것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진여와 똑같이 봅니다.


사실 우리는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법문을 듣지 않아도 저절로 불성의 훈기가 배어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큰 선지식을 만남으로써 밖으로부터 배워서 불성의 훈기가 안으로 배어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을 안과 밖에서 서로 훈습한다고 하여 '내훈외훈(內薰外薰)'이라고 합니다. 안에 있는 불성광명으로 인하여 서서히 밝아지는 것을 내훈이라 하고, 타인이나 어떤 대상에 의하여 밝아지는 것을 외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40대에 어느 법회에 나가서 서투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공부를 하신 분이 "지옥에 한번 떨어진 중생들에게는 스승도 없을 터이므로 영원히 지옥에서 못 빠져 나오고 그곳에만 있겠지요?"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때 답변을 못해서 창피를 당했습니다. 지옥중생도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다하면, 즉 지옥중생으로서의 과보가 끝나면 결국은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천상의 중생도 역시 천상에서의 인연이 다하면 다시 내려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옥중생은 물론이고 천상의 중생들도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도 변화합니다.


불성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발랄하게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 자체의 법칙으로 움직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중생을 다 성불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주의 중력인 인력도 모두가 다 그런 까닭입니다.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중력이요 인력인데, 우리 불교적인 뜻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모든 부처님의 원력인 일체중생을 다 근본자리로 이끄는 힘입니다.


우리가 법회 때마다 마지막에 외우는 사홍서원도 원칙은 다 그런 뜻입니다. "모든 중생을 다 해탈시킨다" "모든 번뇌를 다 끊는다" "모든 법문을 다 배운다" "완벽한 깨달음을 다 얻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본래 그런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우주의 일체 존재는 근본적으로 이와 똑같은 본질, 즉 부처님의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설사 잘못 살고 잘못 생각하고 행동해서 지옥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이 차근차근 배어 나와서 좋아집니다.


이것은 마치 탁수가 가만히 두면 앙금이 가라앉아서 바닥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설사 지옥에 있는 존재라도, 누가 옆에 가서 제도를 하지 않는다 해도 저절로 부처가 되어서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밖에서 부처님 교법을 만나는 인연이 있으면 좀 더 쉽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불의 과정은 내훈외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배어 나오는 향기로운 불성의 훈기를 차근차근 내 것으로 만들고, 또한 동시에 공자나 예수나 석가나 소크라테스 같은 성자들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차츰 불성 쪽으로 몰아세워야 합니다. 성인들의 가르침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철저하고 덜 철저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본래 마음자리, 본래 진리로 우리를 몰아세우는 법문이라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아직 공부가 순숙되지 못했으므로 타성일편이 못 되겠지요. 순숙이라는 것은 공부를 아주 순순하게 해서, 공부가 익어간단 말입니다. 익어 가면 본래가 부처인지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마음이 맑고 몸이 가벼워 옵니다. 공부를 하고 있는데도 마음이 상쾌하지 못하고 몸도 천근만근으로 무거우면 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겁니다.


본래 우리 불성은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나'도 없는데 어떻게 무게가 있겠습니까?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은 겉만 보므로 물질로 보이는 것이지만 그 바닥에서 볼 때는 물질이 아니라 그때는 그야말로 다 불성뿐이기 때문에 원래는 무게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지만 만약 우리가 물질을 존중하고 중요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안 싸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통제가 있고 정해진 깨끗한 규범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내 물건이 있고, 네 물건이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안 싸울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주의, 공자주의, 예수주의는 모두가 다 "물질이라는 것은 허망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말씀한 것이 석가모니의 가르침 아닙니까?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도 그러한 공(空)사상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금강경》,《반야심경》입니다.《화엄경》,《법화경》은 제법실상의 자리, "모두가 다 부처뿐이다" "천지우주가 다 부처님 세계다"라고 적극적으로 표현했지만,《금강경》과《반야심경》은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허망한 것이라는, 부정을 주로 해서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잘못 본 것을 우선 부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부가 제대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모든 법이 다 비어 있는 실상에서 보면 그때는 색의 세계도 없고 소리도 없고 다 없습니다.



- 텅 빈 것


우리 중생은 모든 법이, 자신과 주변의 모든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이 모든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한 부처님 참선 공부는 이것저것 다 글러져 버립니다. 모든 존재를 있다고 생각하면 바로 집착이 생기게 되므로, 단체를 꾸며 보나 가정을 꾸며 보나 다 불화와 갈등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가 오직 한 성품의 진여불성뿐이라고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타성일편이 되어야 합니다. 믿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단 말입니다. 여태까지 배운 것이나 느낀 것이나 모두가 다 있다고만 배웠으니까, 쉽게 공(空)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구구순숙이란 말이 그토록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래오래 두고두고 '다 비었다' '다 비었다' '내가 없다' '내가 없다' 이렇게 되뇌어야 합니다. 자기 암시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내가 원래 부처다' '부처다' 이렇게 하다 보면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가 되어 버립니다. 염불의 본뜻은 그런 데 있습니다. 본래 부처인지라 자꾸만 부처님 이름을 외우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결국은 부처가 되어 버립니다. 자꾸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참말로 마음이 어둡고 나쁘게 되어 버립니다. 자기 암시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화두나 주문이나 염불 같은 공부는 모두가 다 원래의 자리, 진여불성 자리, 원래 모든 존재가 하나인 자리를 구하는 것입니다. 본래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자리를 구한다 하더라도 딱 믿고 구해야지 본래 하나임을 믿지 않고 구하면 항시 괴롭습니다. 백 년 묵은 체증(滯症)도 좋은 사약(瀉藥; 설사약)을 먹으면 그냥 내려갈 수 있듯이, 우리는 그 있다, 없다 ― 있다, 없다는 결국은 있다고 생각하니까 없다는 것도 나오겠습니다만 ― 고 하는 것만 버리면 됩니다. 그런 관념을 못 떠나면 우리의 병은 가실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병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리적인 병도, 마음도, 몸도 다 빈 것이기 때문에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즉시 우리 몸에 가서 반영됩니다.


참선할 때, 젊은 분들은 여러 모로 괴로워도 하고 고생도 하실 겁니다.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인가? 모든 괴로움의 근원은 자신의 관념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있다는 생각에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원래 없기 때문에 원래 없다는 생각이 투철해 버리면 나도 없고 우리 주변도 다 없습니다. 참말로 있는 것은 오직 진여불성뿐입니다.


지금 갑이라는 사람과 을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 사이가 이렇게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원소의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산소나 수소가 없는 공간이 어디 있습니까? 원소의 차원에서만 본다 하더라도 나와 남은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있지 않단 말입니다. 더구나 그보다 더 근원적인 불성 차원에서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불성, 이것은 어디에는 있고 어디에는 없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 자체가 바로 불성이고, 우주는 바로 불성뿐입니다.


이렇게 확실히 알아 버려야 합니다. 화두나 염불을 해도 이렇게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선 내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단지 '깨닫고 보면 위대한 도인도 되고 무엇이든 많이 알게 되겠지'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암중모색으로 하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선을 할 때나 무슨 공부를 할 때는 우선 큰 믿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른바 믿음이라는 큰 뿌리가 없으면 바른 공부를 못하는 것입니다. 참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우리의 믿음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고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고 참선하면 머리도 맑아지고 몸도 가벼워집니다.


다 놓아버려서 모두가 다 텅 빈 것이라고 생각할 때는 가사 우리에게 심장병이 있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텅 빈 것인데 심장병만 따로 어디에 존재하겠습니까? 본래 내 몸뚱이 전체가 비어 있는 것인데, 내 세포가 다 비어 있는데, 심장병이나 암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회에서 하도 많이 듣고 그렇게 배웠으므로 모든 게 있다고만 생각합니다. 백퍼센트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도 역시 공부를 하다 보면, 오랫동안 순수한 마음으로 익히고 익히다 보면, 즉 구구순숙하다 보면 그때는 차근차근 비어 옵니다. 누구든 참선을 막 배울 때부터 그냥 시원스럽고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눈앞이 깜깜하고 목구멍도 깔깔하고 어쩐지 호흡이 잘 안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툭 트여 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몸 전체가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물론 그냥 쉽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선근을 바탕으로 용맹 정진하여 쉽게 성취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가장 중요한 것은 굳은 믿음입니다. 우선 부처님 법을 확실히 믿어야 참선에 진전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비었다'는 반야의 진리, 반야바라밀을 굳게 믿고 시작해야 참선이 됩니다. 반야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참선은 어렵습니다.


하나의 공부 방법을 가지고 먼저 확실히 제법공 자리를 믿어야 합니다. 이때 공(空)은 다만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의 공이 아닙니다. 공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허무주의에 떨어지고 맙니다. 공의 알맹이, 공 그 자체는 바로 진여불성입니다. 일체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이 내 본성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나 몸에 끼치는 공덕은 굉장히 큽니다. 설사 묵은 병이 있다 해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확실하다면 그냥 순식간에 그 병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인도의 심령요법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바라문교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초기 원시불법도 사념주관(四念住觀)입니다. 일체가 다 괴로운 것이고 모두가 다 무상한 것이고 이 몸뚱이는 결국 우리가 잘못 보아서 그렇지 참 더러운 것일 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냥 이 몸 이대로 좋다, 이 몸 이대로 귀엽다고 생각하므로 탐심을 내고 하겠지요. 그러나 이 몸 이대로는 귀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깊이 보면 더러운 것만 충만해 있습니다. 사념주관도 이 몸이 더럽다는 부정관(不淨觀) 아닙니까? 우리가 부정한 것을 좋다고 생각하고 구하려고 하므로 그때는 고통이 안 될 수 없습니다. 과학적으로 본다 해도 이 몸은 결국 무상한 것이고 무아입니다.


내 몸뚱이가 무상한 것이고 무아인데 자기 소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사회도 앞으로는 마땅히 우리 승가의 생활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이런 삶을 본받아라' 하면 되겠습니까? 먼저 우리 승가부터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사람 마음부터 제도해서 자기 마음으로 느끼게 해야지 공산혁명처럼 억지로 공평하게 분배하려고 하면 그때는 싸움이 일어납니다. 적어도 출가 수행자는 자기 평생 내 소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만약 출가 수행자가 내 몸뚱이도 내 것이고 내 책도 내 것이고 내 사는 집도 내 것이라고 할 때, 그때는 수행자가 아닙니다.


사실이 빈 것이므로 부처님께서 사실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딱 비우고 공부에 임해야 합니다. 물론 다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량공덕을 분명히 갖추고 있지요. 경(經)에도 보면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확신해 버리면 그 즉시부터 공부가 후퇴하지 않습니다. 나에게도 석가나 예수의 그런 모든 신통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른바 삼명육통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내가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내가 아픈 것이나 내가 모르는 것이나 내가 부족한 것이나 문제될 게 없습니다. 계발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중생을 일컬어서 '금덩이를 짊어지고 빌어먹는 거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원래 우리는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소유가 없다고 해서 조금도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장에 죽는다 하더라도 손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 몸뚱이는 자기 것이 아니지요. 지금 몸을 버리면 금방 다른 몸 받는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했으면 바로 극락으로 가는 것이고, 극락은 진여불성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업에 실패하든, 자기가 죽든, 자기 이웃이나 가까운 사람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든, 어떤 경우든 아무런 손해도 없습니다. 다만 중생의 있지 않은 상(相)만 바뀌고 변동이 있는 것이지 본바탕은 그대로 가만히 있습니다.



- 가부좌


공부하기에는 가부좌가 제일 좋은 자세입니다. 어째서인가 하면 가부좌를 하고 있는 모습이 정삼각형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기하학을 배워서 아시겠지만 결국은 삼각추가 제일 안정된 것 아닙니까? 따라서 가부좌한 정삼각형 자세가 모든 모습 가운데 제일 안정된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 모습이 지혜가 가장 발동하기 쉬운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용수보살도 "차가부좌자(此跏趺坐者) 최안온불피급(最安穩不疲及)"이라 한 것입니다. 가장 편안하고 피로를 모른단 말입니다. 다리를 양쪽으로 서로 엇갈리게 맞끼우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다만 반가부좌를 하여도 무방한데, 아무튼 가부좌하는 모습이 가장 편안하고 가장 피로가 없는, 즉 최안온불피급한 자세라는 것입니다. 가장 편안하고 가장 피로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차도급자(此道及者)"라 하였습니다. 도가 빨리 통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마왕견기(魔王見其) 기심수포(其心愁怖)"라고도 하였습니다. 도가 빨리 통하므로 그때는 마왕도 그를 보면 두려워서 접근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안정되고 가장 지혜가 발동하기 쉬운 모습이기 때문에 이 모습만 보고도 결국은 마구니가 침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금상첨화로, 그야말로 다시없는 큰 힘이 되어서 무서운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부좌를 하실 때는 꼭 단정히 앉아서 해야 합니다. 허리를 구부리거나 하면 역시 상하호흡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단정히 앉아야 호흡이 순탄하게 되고 소화도 잘 됩니다. 이른바 수승화강(水昇火降), 즉 맑고 시원한 기운인 수기(水氣)가 위로 올라가고, 따뜻한 불의 기운이 아래로 내려가게 됩니다. 수승화강이 되어야 생리적으로 가장 정상적인 상태가 됩니다. 따라서 이렇게 되면 호흡도 차근차근 맑아 옵니다. 또는 그 반대로 호흡 공부를 하다 보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시원스런 기운이 올라가고 더운 기운이 내려갑니다.


그래서 좌선할 때 몸이 좀 거북한 분이나 바르지 못한 자세로 하는 분은 오랫동안 하다 보면 자기 호흡이 무슨 원수 같습니다. 호흡이 원수가 되어서 빡빡해지고, 거기다 방이 좀 덥기라도 하면 콧물도 나오곤 합니다. 그런 때는 호흡을 적당히 조절하거나 단전호흡을 하면 그런 증상이 대부분 사라집니다.


부처님 경전 가운데《아나파나경(阿那波那經)》이라는 경이 있습니다. '아나파나'란 호흡이란 뜻입니다. 입식출식(入息出息)을 말합니다. 그런 경이 있을 정도로 호흡을 중요시했던 것입니다. 호흡 공부만 해서 성불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마음 활동과 호흡은 둘이 아닙니다. 마음이 거칠면 호흡도 거칠어지고 호흡이 고요해지면 마음도 고요해집니다. 따라서 자기 마음 다스리기가 굉장히 어려운 때는 간단히 호흡을 단속해도 무방합니다.


처음에 가부좌를 하고 막 들어앉아 아직 산란한 마음이 안 가시고, 밖에서 보는 것이 자꾸만 걸릴 때는 가만히 호흡운동을 합니다. 호흡운동을 할 때도 잘못하면 도리어 병이 나기 쉬우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어떻게 주의해야 하는가? 거기에는 표준이 있는데, 깊고 길게 하며, 가늘고 고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심장세균(深長細均)'이라 합니다.


그러나 억지로 그와 같이 하려고 하면 그때는 호흡 때문에 병이 생기는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깊고 길게, 그리고 가늘고 고르게 하되 무리가 없도록 하면 좋습니다.


호흡으로 공부하시는 분들이《아나파나경》을 보아도 좋으나, 그 경은 간단한 것이라 깊고 구체적인 가르침을 얻기는 곤란합니다.《요가수트라》같은 경전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서는 호흡에 대한 상세하고 깊은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요가 경전은 인도의 파탄잘리라는 분이 체계를 세운 것입니다. 중국권에서는《혜명경(慧命經)》이라 하여, 화양(華陽) 도인이 낸 경전이 있습니다.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어서 그대로 따르기는 좀 곤란하지만 아무튼 참고는 됩니다.


그러나 설사 그런 경을 모른다 하더라도 심장세균법(深長細均法)으로 호흡을 하시면 됩니다. 한 가지 주의하실 점은 이른바 유식(留息)입니다. 유식은 숨을 들이마신 뒤에 오랫동안 멈추는 것을 말합니다. '숨을 멈춘다' 하여 유식입니다. 숨을 조금 멈추고 있으면 숨이 아랫배로 가서 전신으로 갑니다. 대개는 숨이 이렇게 가슴까지 가서 횡격막에 미처 못 가고 나와 버리기 때문에 전신으로 호흡이 못 갑니다. 그러나 흡(吸)을 해서 가만히 멈추고 있으면 그때는 호흡이 전신으로 갑니다.


따라서 오랫동안 멈추면 멈춘 만큼 더 많이 갑니다. 그러나 억지로 너무 오래 멈추면 그도 역시 부작용이 옵니다. 따라서 심장세균 방식으로 깊고 길고 가늘고 고르게 하되, 처음에는 무리가 없도록 숨을 들이마셔서, 5초나 1분 정도까지 호흡을 멈춥니다. 그렇게 멈추는 동작을 차근차근 더해 갑니다. 가령 오늘은 5초 정도 숨을 멈추었으면, 점차로 늘려 가다가 나중에는 1분, 2분, 3분 동안 늘려 가면서 숨을 멈춥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드디어 숨이 우리 전신에 골고루 삼투됩니다. 그러면 그때는 몸이 시원해 옵니다.


우리 몸이 거북한 것은 호흡이 제대로 안 되고 혈액순환이 제대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호흡을 통하여 산소가 잘 공급되고 혈액순환이 왕성해지면, 그때는 몸이 항시 상쾌하고 가볍단 말입니다. 그래서 드디어는 자기 호흡이 딱 끊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지식(止息)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삼매에 들려면 자기 호흡 소리도 스스로 의식 못하고 호흡이 거의 끊어질 단계가 되어 버려야 비로소 삼매에 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머리가 무겁다든가 또는 상기가 온다든가 하는 분들은 억지로 화두나 염불을 하려고 하지 말고 호흡만 해도 무방합니다. 호흡을 하다가 너무 졸리면 그때 다시 화두도 챙기고 염불도 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공부인들에게 우선 중요한 것은 '모두가 똑같이 모든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뿐'이라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확실히 믿어야 하는데 우리의 버릇이 잘못 되어서 쉽게 믿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하루 공부하면 한 만큼 차근차근 그에 따른 믿음이 더 깊어 갑니다. 따라서 우선 그와 같이 믿음을 가진 후에 부처님 법문을 되뇌이면서 그 믿음을 확립시켜 가야 합니다. 모두가 마음뿐인데 내가 잘못 보아서 좋다 혹은 궂다고 보는 것이라고 자꾸만 자기를 타이르면서 부처님 법문 쪽으로 우리를 다스려 가야 합니다. 가다 보면 결국은 우리의 잠재의식에도 모두가 빈 것이라는 인상이 차근차근 박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믿고서 자기한테 맞는 방법을 골라서 하면 됩니다.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두나 염불이나 다 좋은 것입니다. 주문도 좋습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 법이요 도인들의 법입니다. 모두가 다 우리에게 진여불성 자리를 제시하기 위하여, 우리를 진여불성으로 이끌기 위하여 하신 법문입니다.


매미나 뱀이 허물을 벗듯이, 우리 중생들은 중생의 허물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언제 벗어도 벗는 것입니다. 그러나 게으르면 금생에도 못 벗고 내생에도 못 벗고, 몇 천 생 동안 윤회바퀴를 돌다가 더욱더 고생을 하겠지요. 기왕에 벗을 바에는 금생에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미는 허물을 못 벗으면 성충이 못 됩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집니다. 중생의 허물을 못 벗으면 내내야 참다운 자기는 못 되는 것입니다. 가짜 자기, 망령된 자기 때문에 자기도 고생하고 남도 고생을 시킵니다. 따라서 그렇게 바로 믿고, 꼭 단정히 가부좌를 하고 앉아야 합니다. 그러나 긴장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긴장하면 그것이 마음에 그만큼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긴장을 다 풀어 버리고 단정히 앉아서 해야 합니다. 단정히 앉아야만 호흡도 잘 되는 것이고, 동시에 망념도 덜합니다. 앉아 있는 그 모양 자체가 벌써 사특한 마구니나 외도를 물리치게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되기는 어렵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지면 가부좌로 며칠 동안 있어도 무방하게 됩니다. 그러나 맨 처음에 공부하실 때는 꼭 포행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한 시간 동안 앉으시고 나머지 10분 동안 포행해서 풀어 버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저희같이 나이 먹은 사람들은 귀찮으니까 그냥 앉아 있어 버립니다만, 사실은 한 시간씩 앉고 풀어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참선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하십시오. 일본의 선방에서도 의무적으로 포행을 시킵니다만, 공부 정도에 따라서 그때그때 알아서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가급적이면 한 시간 하시고 포행을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 관법


관법을 주로 하시는 분은 눈을 뜨시는 것이 좋지요. 그러나 관법을 않고 화두나 염불을 하시는 분들은 감고 뜨는 것은 알아서 하시지만 원칙은 반폐반개(半閉半開)라 하여, 본 듯 만 듯 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도 아니고 안 보는 것도 아닌 상태입니다. 그와 같이 모두가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정면을 똑바로 보는 것이 낫습니다. 훨씬 혼침이 덜합니다. 고개를 아래로 숙여 버리면 그때는 꾸벅꾸벅 혼침이 더 빨리 옵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인데 우리는 진여불성 부처님을 보지 못합니다. 모든 관법이나 주문이나 화두 등은 보지 못하는 우리 중생이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령 일상관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고서 공부하는 관법입니다. 서쪽으로 해가 넘어가는 것을 자꾸 생각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거기에 따라서 마음이 모아지고 정말로 해와 같은 광명이 보인단 말입니다. 원래 광명이 없으면 그렇게 보이겠습니까? 원래 천지우주에는 우리 중생이 보는 눈부신 빛이 아닌, 청정미묘한 빛이 항시 충만해 있습니다. 진여불성은 생명의 빛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공부하든지 공부가 사무쳐서 정말로 마음이 모아져서 망상이 줄어들면 차근차근 빛이 비춰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할 때, 이렇게 공부해 나가면 아주 행복스러운 진여불성의 빛이 비추어 오겠구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해야 좋습니다. 없는 허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빛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빛을 미리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은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광명관 또는 일상관이라는 관법이 있습니다.


또는 법계관도 있습니다. 법계관은《화엄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관법인데, 우주 모두가 다 진여불성의 순수 청정미묘한 광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공부에 손해가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내가 지금 한 치 앞의 진여불성 자리를 못 본다 하더라도 일체 존재가 어김없는 진여불성뿐이다' 이렇게 믿고 화두나 주문 혹은 염불이나 관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어떤 공부를 해도 무방합니다. 손해가 없습니다.


다만 혼침이 올 때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 애써 화두나 염불이나 관법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좀 들뜨면 가만히 놓아 버리고서 그냥 호흡만 해도 무방합니다. 따라서 마음에 혼침이 올 때 일깨우는 요령 또는 마음이 들뜰 때 가라앉히는 요령, 그런 것은 자기 스스로 해보시면 짐작이 됩니다.


이렇게 해야 이른바 정(定)과 혜(慧)가 쌍수(雙修)가 됩니다. 우리 진여불성 자리는 원래 지혜와 선정이 같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공부도 지혜와 선정이 병행되어야 진여불성하고 빨리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항시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있는 것은 결국 청정미묘한 진여불성뿐이다' 이렇게 비추어 보는 반야의 지혜를 닦아야 하며, 거기다가 진여불성을 생각하는 우리 마음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 마음을 지속시키는 것이 이른바 참다운 삼매입니다. 그렇게 해야 정혜쌍수가 됩니다.《보조국사 어록》의 대요는 돈오점수(頓悟漸修)입니다. 즉 먼저 문득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고서 그 다음에 거기에 입각해서 차근차근 닦으라는 것입니다. 돈오점수나 돈오돈수(頓悟頓修)나 원래는 다 똑같은 뜻입니다. 해석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리고《도서(都序)》나《화엄경》이나《보조국사 어록》이나 모두가 다 그 대요는 돈오점수와 정혜쌍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록 일체 존재의 본래면목이 부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아직 범부이므로 그것을 증명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러므로 이치로써 깨달은 힘을 따라서 그 자리를 점차로 닦아 나아간단 말입니다. 닦아 나가되 모두가 부처라는 반야의 지혜를 놓치지 않고 지속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정(定)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이제 지관균등(止觀均等)이라는, 즉 지(止)와 관(觀)이 어우러지는 것이고 정(定)과 혜(慧)가 같이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마치 부처님 경전이나 논장(論藏)에서, 새는 양쪽 날갯죽지가 있어야 잘 날고, 달구지는 양쪽 바퀴가 있어야 잘 달린다고 비유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공부도 본래 불성이 갖추고 있는 지혜와 자비를 함께 닦게 되어, 이른바 진여불성과 계합이 잘 됩니다.



- 적게 먹기


이렇게 해서 공부를 하시되 음식도 가려야 합니다. 음식은 우리 공부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그야말로 그런 원수가 없습니다. 공부할 때는 항시 위장이 좀 빈 듯한 상태라야 혈액순환이 빠르고 몸이 가볍습니다. 그런데 위에 무엇이 많이 들어 있으면 뇌에 있던 산소가 위장의 음식을 소화시키려고 위장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면 결국 머리도 무겁고 혼침도 오고 그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많이 먹으면 식곤증이 옵니다. 음식과 우리 공부는 굉장히 밀접합니다. 이런 관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화두를 많이 하려면 고기도 먹어야 하고 다른 음식도 많이 먹어야 기운을 내고 공부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런 분들은 정말로 뜨겁게 생명을 내던지고 공부를 해본 경험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 계율은 모두가 우리 중생들의 공부를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에는 거짓말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우리 중생의 허물을 벗겨서 성자의 몸이 되고 성자의 마음이 되게 하려는 법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적게 먹으라고 했으면 적게 먹어야 합니다. 따라서 될수록 배가 고플 정도로 잡수시면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공부가 잘 되어 갑니다.


적게 먹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계(五戒)에는 없지만 사미십계(沙彌十戒)에는 "때가 아닌 때에는 먹지 말라"고 하는 불비시식(不非時食)이란 계가 있습니다. 지금은 모두들 계율도 그냥 잊어버리고 '적당히 하면 되겠지' 하지만, 부처님 경전에서 하신 말씀은 모두가 다 꼭 우리 중생을 성불로 이끄는 말씀입니다.


'때 아닌 때'라는 것은 오후를 통틀어 말합니다. 때 아닌 때에 먹지 않으면 소음(少淫), 즉 음탕(淫蕩)한 마음이 줄어들고, 소수(少睡), 즉 잠이 줄어들고, 득일심(得一心), 즉 마음이 하나로 빨리 모아지고, 무하풍(無下風), 즉 몸에 방귀도 안 생기고, 신득안락(身得安樂), 즉 몸에 안락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신,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한 사람에게 오는 다섯 가지 복입니다.


우리 젊은 스님 네들은 이성에 대한 음욕 때문에 항시 괴로움을 받습니다. 혈기가 왕성할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음욕을 줄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기를 많이 안 먹고 기름기 있는 것을 많이 안 먹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그런 데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음욕은 줄어들고, 욕심도 잠도 줄어듭니다.


우리가 백 근, 이백 근 무거운 짐을 지고 어디를 간다면 모르겠지만, 마음공부 하려고 한다면 많은 활력이 필요치 않습니다.


갑자기 오후불식을 하려면 장애가 있을 것입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그렇다는 것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알고서 공부해야 손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장청규(百丈淸規)에도 역시 조죽중재(朝粥中齋)라 하여, 아침에 죽을 먹고 낮 한 때 재를 먹습니다. 오후에는 안 먹는다는 말입니다. 작업을 할 때는 간식을 조금 먹습니다만, 그래도 오후불식이 원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사람들은 근기가 약해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들 합니다만, 지금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에 비해서 근기가 절대로 약하지 않다고 봅니다. 두뇌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훨씬 더 영리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장수하는 것 보십시오. 옛날에는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였는데 이제 한국도 평균 수명이 70이 넘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면 지금 사람들의 근기는 절대로 약하지가 않습니다. 다만 자기 몸 관리를 너무 과다하게 합니다. 너무 많이 먹고 함부로 합니다. 따라서 어디서 공부하든지 우리 불자님들이 금생에 성불하려고 마음먹을 때는 꼭 음식을 염두에 두고, 부처님 계율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겁초(劫初)에 인류는 음식을 먹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겁초 인간은 우리처럼 이런 몸이 아니고 광명으로 이루어진 몸이었기 때문에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오염되어서 이렇게 각 원소 집합체인 세포가 우리 몸을 이루게 되었고, 따라서 에너지가 소모되므로 이것을 보충하기 위한 음식이 필요해졌습니다. 설사 그렇더라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정도만 섭취하자는 게 계율의 근간입니다. 도인들이 우리 생리를 관찰해서 계율을 세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법문에 대해서 어떤 면에 대해서든 생리나 심리 모두 전폭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선오후수(先悟後修), 돈오돈수(頓悟頓修)하셔야 합니다. 이런저런 모든 것을 타성일편(打成一片)해야 합니다. 하나로 모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열립니다. "마음을 열어 버려라"라고 하지만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면 열려고 해도 열어지지 않습니다.


천지우주는 물질이 아닙니다. 공간성과 시간성, 또는 인과율도 초월해 버리면 결국은 다 마음인 진여불성뿐입니다. 이것만이 실상이고 딴 것은 모두가 다 없습니다. 이렇게 분명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 말씀입니다. 이렇게 느끼고 공부하시면 종전에 몸이 좀 거북했다 하더라도 정말로 믿는다면 반드시 가볍게 풀릴 것입니다.


설사 우리 집안의 영가(靈駕)가 와서 우리를 침노한다 하더라도 그냥 제도가 됩니다. 정말로 영가 몸도 비었고, 분명히 모든 것이 다 비어 있는 것이므로 확실히 비었다고 믿고 되뇌이며 공부를 한다면 자기 주변의 영가도 제도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공부에 진일보하시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불기 2535년 12월, 동안거 결제중인 스님들께 하신 소참법문>




'4. 청화 큰스님 법문집 > 4. 가장 행복한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4. 빛의 자리  (0) 2009.05.24
2. 참선이 뭔가  (0) 2009.05.20
1.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0) 2009.05.18
2. 가장행복한 공부  (0) 2009.05.16
1.바로 알고 바로보십시요  (0) 2009.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