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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가장 행복한 공부

2. 가장행복한 공부

2. 가장 행복한 공부



- 감로의 맛


부처님 법은 그 본성품으로 본다면 자취도 없고 말도 끊어지고 어떻게 헤아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인연에 따른 상대적 차원에서는 가지가지 정도에 따라서 높은 법문, 낮은 법문의 차별이 있습니다.


《법화경》에서는 최상의 법문을 법설주(法說周)라 했습니다. 그것은 조금도 방편을 곁들이지 않고 실상 그대로, 법성 그대로 표현한 법문으로, 법설설법(法說說法)입니다. 그 다음에는 비유주(譬喩周)라, 법설설법으로는 일반대중이 다 알아들을 수 없으므로 비유를 들어 하신 법문이 있습니다. 그것을 비유주라 합니다. 다음에는 공부가 별로 안 되어서 비유담도 못 알아듣는 소승 근기의 사람들에 대해서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 그것을 인연주(因緣周)라 합니다. 그것은 과거 전생의 인연이라든가 또는 금생에 자기가 지은 인연이라든가, 그런 인연을 밝혀서 하신 법문입니다.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지금 우리는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 이러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복잡다단해서 조직이 많이 생깁니다. 따라서 갈수록 많은 조직 또는 내용으로 보면 보다 규율이 복잡한 조직 속에 우리 현대인들은 함몰되어 있는 딱한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한시도 편안할 때가 없습니다. 기계문명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정밀함이 더 깊어가고, 저 같은 구닥다리는 사실 그런 현대의 정밀문명을 다 향수할 수 있는 지식도 없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우리는 그런 불안한 상황을 이기기가 곤란스럽습니다.


길을 가는데 물안개가 끼여 있으면 앞도 투명하게 보이지 않고, 또 이미 지나온 뒤쪽도 어두워서 잘 안 보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긴 다리가 하나 놓여 있는데, 만일 그 다리의 뒤끝도 안 보이고 지금 나가고 있는 앞도 안 보인다면 마음이 굉장히 불안할 것입니다. 우리 사바세계 중생들은 지금 그와 똑같습니다.


대체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시초에 떠나온 곳은 어디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지금 확실히 모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일체 현상계라 하는 것은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스로 판단할 때는 내가 아는 지식은 확실하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이 알고 있는 것은 모두가 유한 상대적인 것입니다. 엄격히 말씀드리면 어떤 학자라도, 제아무리 박식하고 정밀한 물리학자라 하더라도 머리카락 한 개도 확실히는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를 압니다. 전자, 중성자, 혹은 양성자 같은 차원에서는 모든 물질이 근본적으로 하나의 입자이기 때문에, 이런 미립자들은 확실하지 않은가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에서도 지적되는 것처럼 가령 미립자의 위치를 측정하려고 하면 운동속도를 알 수가 없고, 역으로 진동하는 운동속도를 측정하려고 하면 위치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불확실한 것들, 즉 위치나 운동에 대하여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는 전자, 양자, 중성자들이 모여서 불확실한 원소들이 결합되어서 세포가 되고 우리 몸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부처님 명호(名號) 가운데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라는 명호가 있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감로라는 것은 맛 가운데서 가장 좋은 최상의 맛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체험하는 맛 중에는 감투의 맛도 있을 것이고 또는 물질의 맛도 있을 것이고 음식의 맛 등 가지가지가 있지만, 그러한 것은 모두가 허망무상한 맛입니다. 참다운 맛은 감로의 맛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감로의 맛을 모르면 참다운 자유와 참다운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감로의 맛을 모르면 우리에게 칭칭 감겨 있는 구속을 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속박을 다 풀어버리는 참다운 경계, 참다운 일체 존재의 근본성품, 그런 자리를 완벽하게 깨닫고, 우리 중생들한테 감로수 같은 법문을 주시는 분이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많은 명호 가운데 감로왕여래라는 명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감로수 같은 맛을 얻을 것인가? 감로의 맛은 늙지 않고 죽지 않고 또는 이별도 없고 모든 지혜, 자비, 일체 능력이 온전히 완전하게 구비된 맛입니다. 그 맛을 어떻게 알 것인가? 감로 맛을 알기 위해서는 오온환신(五蘊幻身)의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정신과 몸뚱이 또는 일체 존재가 다 오온법(五蘊法)에 해당합니다. 허깨비 환(幻)자 몸 신(身)자, 오온환신이라, 즉 오온법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허깨비 같은 몸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의식을 비롯해서 우리 몸뚱이나 일체 존재, 삼천대천세계 모두가 다 오온법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는데, 그렇게 소중한 몸이 오온법의 환신, 다시 말하여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고 허망한 몸'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굉장히 실망하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오온이 허망무상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감로의 맛, 즉 죽지 않고 늙지 않고 또는 병들지 않는 참된 행복의 맛을 음미할 수 없습니다.


참선을 한다는 것 역시 방금 말씀드린 감로의 맛을 좀 봐야 제대로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오온환신, 오온법이 다 공(空)인 도리를 모르면 참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평소에 저는 참선 수행자를 자주 만납니다. 그러나 바른 이해, 바른 반야바라밀, 바른 반야지혜를 얻지 못하고 단지 선방에 앉아서 그냥 하나의 테크닉으로, 하나의 기능으로 가부좌를 틀고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참선 공부의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조금씩은 나아간다 하더라도, 참선 공부할 때는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이 되어야 참다운 참선입니다. 이것은 지금 동남아에서 하고 있는 비파사나(毘婆舍那)와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조사선이란 어떤 것인가? 어떠한 것이 참다운 참선인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가장 소중하게 알고 있는 우리 몸부터, 그리고 내가 느끼고 있는 수상행식, 우리가 분별 시비하는 의식, 다시 말씀드리면 감수(感受)ㆍ상상(想像)ㆍ의지(意志)ㆍ의식(意識)하는 것 모두가 다 비었다고 분명히 느껴야 참다운 반야지혜가 되고, 반야지혜가 되어야 내 몸뚱이가 본래로 비어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느끼고 선방에 들어앉아야 공부가 됩니다.



- 먼저 마음을 열고


참선에 대해서는 선오후수(先悟後修)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먼저 막힘없이 마음을 열어놓고 나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이른바 중국에서 들어온 조사선의 도리입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부처님은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고, 이런 식으로 공부하는 것은 참다운 조사선이 못 됩니다. 천지우주를 오직 하나의 생명으로 합해 버려야 비로소 참선 공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천지우주는 오직 하나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인슈타인도 이미 과학적으로 이론을 제시한 바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우주는 하나의 통일장(統一場)이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을 모으고 참선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으로 아는 헤아림은 딱 끊어져야 합니다.


《반야심경》이나《금강경》의 도리는 모두가 다 비었다는, 즉 공(空)도리 아닙니까? 꿈속에서 볼 때는 삼천대천세계가 명명백백하게 있지만, 깨어나서 보면 모두가 다 텅텅 비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이라는 것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두가 다 마음으로 짓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어 있다는 확신이 선 상태에서 공부를 해야 참선 공부가 됩니다.


보통 불자님들은 알기 어려운 그런 문제보다 우선 복 받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지요. 그러나 모두가 하나의 진리라는 부처님의 실상을 제대로 모르면서 하는 복 받는 공부는 제한된 복밖에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공부는 불교의 근본 목적인 성불(成佛)로 인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우리 몸뚱이를 포함하여 이른바 물질이라는 것은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경에서는 또한 지불가득(地不可得)이라 하여 땅기운도 결국은 얻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수불가득(水不可得)이라 하여 물기운도 얻을 수가 없다고 하고, 불기운이나 바람기운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나 일체의 모든 것을 구성하는 땅기운, 물기운, 불기운, 바람기운 이런 요소들도 부처님의 말씀에 따른다면 '불가득', 즉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은 바로 모든 것이 비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현대물리학은 이런 사실들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물질이든 여러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각 원소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가 어떤 형태로 모여 있는가, 이러한 소립자들의 결합 형태에 따라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됩니다. 이 사실도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는 무엇인가? 미세한 차원에 이르면 모두가 다 장(場) 에너지라는 것입니다. 이 공간 속이나 성층권, 삼천대천세계 어디에나 충만해 있는 장 에너지 말입니다.


그러면 장 에너지는 무엇인가? 우주에 충만해 있는 장 에너지는 전자기장(電磁氣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전기나 자기는 무엇인가? 전기나 자기, 이것은 본래 물질이 아닌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물질은 분석해 들어가면 결국에는 모두가 텅텅 비어 버린단 말입니다.


다이아몬드든 금이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석해 들어가면 비어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내 몸뚱이는 이대로 소중히 있지 않은가?'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로 빛나고 있지 않은가?' '분석해 가면 공(空)이라 하더라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 말씀은 분석해서 공인 것이 아니라, 물질 그대로 공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외우신《반야심경》에 있는 것처럼 색즉공(色卽空)입니다. 여기서 색이라는 것은 일체 물질을 다 지칭합니다. 따라서 내 몸 이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왜 그런가? 부처님 법문은 철두철미하게 과학적이고 철학적입니다. 불교는 가장 수승한 종교입니다. 과거의 미개한 시대에는 이런 어려운 말을 하면 아무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대체적인 물리학 지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 물질 그대로 공인가? 이것은 가장 미세한 물질인 전자나 양자 같은 미립자들은 사실 공간성을 지니지 않으며,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우주의 정기(精氣)인 힘만 진동하고 파동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동하면 전자가 되고 저렇게 진동하면 양자가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을 물질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 현대물리학의 결론입니다.


따라서 물질의 가장 미세한 곳으로 가면 결국은 텅텅 비어 버립니다.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으니 응당 비어 버리겠지요.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는 것이 이렇게 활동하고 저렇게 진동하고 결합되어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된다 하더라도 빈 건 빈 것입니다. 산소나 수소도 결국은 빈 것이 모여서 된 것이기 때문에 결국 공은 공입니다.


우리의 무명(無明)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모두가 다 비었다고 생각할 때 모두가 다 하나가 되겠지요. 어떤 물질이 있고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가 되려야 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유마거사를 비롯해서 모두가 다 이 하나의 도리, 즉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을 말씀했습니다.


그 하나가 물질이 아니라면, 그러면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성도 없고 시간성도 없는 진여불성입니다. 자취가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문자와 말을 떠나버린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한 그 자리가 바로 불성입니다. 진실로 있는 것은 진여불성뿐입니다. 다른 것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비었으니 서로 다른 것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다 진여불성뿐이다, 이렇게 알고 공부하는 것이 조사선의 도리입니다.


《보조국사 어록》을 보신 분들은 상기해 보십시오. "자성청정(自性淸淨) 자성해탈(自性解脫)"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일체 존재의 근본성품이 자성입니다. 일체 존재의 근본성품은 원래 청정한데, 어떤 물질이 있다거나 오염이 있다거나 또는 번뇌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자성청정이 못 됩니다. 자성청정하기 때문에 본래 해탈이 되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참선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인류문화사를 통하여 가장 고도의 문화형태가 참선입니다. 사실은 참선을 모르면 진리를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유교나 기독교, 도교나 이슬람교를 다 긍정합니다. 왜 긍정하는가? 모두가 다 부처님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보면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모두가 다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자성청정 자성해탈'인 것입니다. 본래 내 몸뚱이는 비어 있습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 중생의 차원에서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는 말과 같이, 마음이요 부처요 중생이요 하는 모두가 다 차별 없이 불성뿐입니다. 이렇게 알고 믿는 것이 참다운 대승적인 신앙입니다. 대승적인 신앙을 가져야 참다운 참선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근본실상, 우리 생명의 근본실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불성(佛性)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지금 불성을 체험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체험하지 않은 지식은 다 간혜지(乾慧地)입니다. 바싹 마른 지혜입니다. 간혜미능(乾慧未能)이라 하였습니다. 즉 바싹 마른 이론적인 개념만으로는 우리가 참다운 감로의 맛을 못 본다는 뜻입니다. 참다운 해탈의 맛을 못 보는 것입니다.



- 참선의 맛


참선의 공덕을 일컫는 말 가운데 '현법락주(現法樂住)'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락을 맛본다는 말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 분들은 '참선 공부해도 고통스럽고 다리도 아프고 별 맛이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참선을 하면 분명히 법락이라는 맛이 있습니다. 법락이라는 맛은 우리 공부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더 '환희용약(歡喜踊躍)'으로 우리한테 온단 말입니다. 몸과 마음이 정말로 개운하고 뛰놀듯이 행복한 것이 환희용약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참선 공부나 염불 공부에 분명히 있습니다.


참선 공부는 우리의 생명을 모조리 바쳐서 갈 만한 소중한 생명의 길입니다. 이 점은 이미 여러 다른 훌륭한 선지식 스님들한테 들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 같은 사람도 45년 동안이나 참선한다고 다소나마 애는 썼으니까 체험담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정말로 참선 공부는 가장 행복한 공부입니다. 어째서 행복한가 하면 그것은 우리의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병을 고칠 수 있는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한국병이니 무슨 병이니 하는 '병'소리가 많이 나옵니다만, 사실 우리 중생들은 누구나 무명병(無明病)에 걸려 있습니다. 한국병이나 미국병이나 모두가 다 근본적으로는 무명병입니다.


그러면 무명병이란 무슨 병인가? 무명병은 '있다, 없다' 하는 병입니다. 우리 중생은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참말로 있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텅 비어 있는 물질은 있다고 하고 참말로 있는 진여불성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생병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하므로 한국병이 생기고 무슨 병이 생깁니다. 또는 우리 몸뚱이에 있는 이런저런 병, 암이나 에이즈 같은 것도 결국은 우리 마음의 병, 바로 그 무명병 때문에 생깁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명병을 치유하는 것이 우리 중생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가장 급선무입니다.


그러면 무명병 가운데서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병'이 무엇인가? 이것은 유루병(有漏病)이라는 병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부처님의 시각, 성자의 견해에서 본다면 내 몸뚱이도 명명백백  빈 것인데, 우리는 있다고 본단 말입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무명으로 해서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일체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거기서 모든 중생들의 병이 파생됩니다.


감투병이나 남을 미워하는, 혹은 좋아하는 병이나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아랫물을 맑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윗물부터 다스려야 하듯이 무명병만 다스리면 그때는 모든 병이 자동적으로 다스려지고 모두가 정화되고 다 풀립니다.


있다는 병, 내가 있다는 병, 무엇인가 대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병, 이 병은 우리 불자님들이 일생을 통하여 다스려야 할 가장 근본적인 병입니다. 이 병을 쳐부수어야 합니다. 있다는 병을 쳐부수지 못하면 참다운 불자가 못 됩니다. 따라서 참다운 참선도 할 수 없습니다. 서로간의 갈등, 가정의 불화, 여러 가지 불평등 등의 모든 문제는 바로 이 '있다는 병'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일러 주는 법문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있다는 병을 쳐부숴서 없다는 자리로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있다는 병 때문에 칭칭 묶여서 마음이 폐쇄되어 있습니다. 있다는 병이 있으면 교만심 등 별것이 다 나옵니다. 그러나 본래는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래 없다는 도리, 이것이 곧《금강경》의 도리요《반야심경》의 도리이며, 반야공 도리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부처님의 정법을 이야기하려면 누구든 꼭 반야의 공 도리, 모든 존재가 본래는 공이라는 도리를 분명히 말씀해야 합니다.


자신의 몸뚱이도 본래 없으므로 자기 몸뚱이도 자기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자기 소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 절, 자기 물건, 어느 것도 자기 소유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인생이라는 잠깐의 나그네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그네길의 짐이 너무나 무겁습니다. 집도 기왕이면 좋은 집, 옷도 기왕이면 좋은 옷, 음식도 가장 좋은 음식, 자기 배우자도 가장 좋은 사람, 이러한 짐들을 다 짊어지고 어떻게 텅텅 비어 버린 공의 고향에 갈 수 있겠습니까?


참다운 우리 고향은 불심의 고향입니다. 불심의 고향에 가기 위해서는 '일락서산(日落西山)에 월출동(月出東)', 즉 해가 떨어져야 달이 솟아오르듯이 유루병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제아무리 요설변재(饒舌辯才)로 이렇게 저렇게 법문을 많이 한다 해도 참다운 불성자리에는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런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가? 먼저 바른 이해,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신해행증(信解行證), 즉 먼저 믿고 해석하고 또는 행하고 증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자주 들으셔서 그런 도리는 이미 충분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선 어떻게 믿을 것인가? 아직 우리는 공부도 못하고 증명도 못한지라 우선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공이라고 하면 공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믿은 다음에 어째서 공인가 하는 도리는 앞서 말한 것처럼 물리학적으로 또는《구사론(俱舍論)》같은 부처님의 논장(論藏)을 보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모든 물질이 본래 에너지일 뿐이다, 모든 물질은 공간성과 시간성이 없는 에너지뿐인데 에너지가 진동해서 상(相)을 나타내기 때문에 모양이 있는 것같이 보일 뿐이며 사실은 있지 않다, 이런 정도는 현대물리학에서 다 증명되고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인 우리가 이러한 도리를 모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해한 다음 우리는 이에 따른 공부를 해야 합니다. 먼저 이해한 다음에 공부한다는 것은 어느 방면으로 보나 중요합니다. 가령 우리가 주문을 외운다 하더라도 그런 도리를 알고 주문을 외워야 훨씬 더 가피도 많이 입고 마음도 빨리 정화됩니다.



- 우주의 멜로디


주문이라는 것도 그냥 그렁저렁한 말이 아닙니다. 다 빈자리에 있는 우주의 음(音)이며, 우주의 멜로디입니다. 실은 다 비어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실상자리인 진여불성은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자비, 지혜, 행복 또는 가장 청정한 범음(梵音)이 있습니다. 영원한 우주의 멜로디가 있단 말입니다.


'옴마니반메훔'이나 광명진언(光明眞言)의 음(音)이나, 또는 대다라니(大陀羅尼)나 모두 다 우주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냥 그것만 외운다 하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약간의 공부가 되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주문에 불과한 것이며, 참선은 못 됩니다.


기왕이면 주문을 외우면서 참선을 하고 싶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면서도 참선을 하고 싶은 것이 우리 아닙니까?


"참선 공부는 제일 높은 공부이고, 다른 공부는 저 밑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 관세음보살을 몇 십 년 동안 해왔는데, 관세음보살을 안 외우면 내 마음이 허전하다. 그런데 참선도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자님들은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근본자리, 근본 성품자리에다 마음을 두고 하시면 됩니다. 성품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마음을 둘 것인가? 이것도 부처님 말씀에 우선은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다 비어 있지만, 단지 그대로 비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의 모든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이 충만해 있다, 이렇게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상(相)에 안 걸립니다.


《금강경》을 몇 천 번 하신 분들도 계십니다.《금강경》도리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떠나는 것입니다. 또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우리 마음이 상에 걸리지 않고, 상이 없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또는 좋은 것이 있고 싫은 것이 있다는 상을 두면《금강경》도리를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상은 본래 비어 있다, 이렇게 아시고서 '옴마니반메훔'을 외우시면, 주문을 하시는 것 자체로 참선을 하시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외운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이 저 밖 어디 계신다, 아미타불은 십만 억 국토 저 밖에 계신다' 하는 식으로 염불하면 그것은 그저 칭명염불(稱名念佛)인 것이지 참선은 못 됩니다.


또는 법성이고 불성이고 진여불성이고 다 없애버리고 그냥 무자(無字) 화두나 '이뭣고' 화두만 들고 있으면 참선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화두라는 것이 어째서 나왔는가? 우리 불자님들은 화두나 염불, 또는 그 둘의 상관관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이 투명해야 번뇌가 안 생기고 확신이 섭니다.


그러면 참선은 무엇이고 또 염불은 무엇인가? 이에 관해서 뿔뿔이 생각하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어긋납니다. 둘이 아닌 법문에 어긋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실 필요 없는 논쟁들이 많습니다.


돈오돈수니 또는 돈오점수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보조국사 가신 지 적어도 팔백 년 세월 동안, 나옹(懶翁), 지공(指空), 태고(太古), 서산(西山), 진묵(震默) 등 여러 도인들이 다 옳다고 긍정을 했으므로 새삼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부질없이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 지금 누구를 비방하자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은 모두 다 진실한 법문입니다. 깨달은 분들은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다 같습니다. 깨달은 분의 입장에서는 돈오돈수라고 말하든 돈오점수라고 말하든 아무런 흠이 될 게 없습니다. 다만 중생의 그릇 따라서 도인들은 그때그때 성품을 안 여의고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무자 화두나 이뭣고 화두는 모두 다 근본성품에서 나온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 결국은 근본성품을 깨닫기 위해서 오신 것 아닙니까? '여하시 불(佛)잇고?' 즉 부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기 위함인 것입니다.


대개 화두라는 것은 서쪽에서 달마스님이 이쪽으로 오신 뜻이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또는 제일의제(第一義諦)가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 따라서 나온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근본성품이 무엇인가, 근본성품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으로 도인들이 상(相) 없이 그때그때 내뱉는 말이 무(無)가 되고 이뭣고가 되고 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화두를 참구할 때도 우리 마음이 상을 떠나버린 진여불성 자리에 딱 입각해 있어야 됩니다. 그러는 것이지 진여불성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의심만 한다면, 상기(上氣)가 되고 공부가 잘 나가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땅히 바른 철학,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가치관은 무엇인가? 불이법문이라, 일체 존재가 다 진여불성, 불심뿐이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바른 가치관입니다. 우리 눈에는 명명백백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다 하더라도, 이 모두가 참말로 바로 본다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있지 않은 것을 있지 않다고 분명히 보는 것이 수행자입니다.


참선 공부는 그냥 앉아서 이런저런 모양만 의젓하게 취한다고 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다 털어버려서 내 걸망이나 내 몸뚱이까지도 몽땅 다 비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참선을 하면, 용이 물을 얻어서 하늘로 올라가고 또는 호랑이가 언덕을 얻어서 천리만리 달려가듯 우리 공부도 나아가게 됩니다.


참다운 생명의 창조는 제법공의 도리, 반야지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생명이 창조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것은 윤회의 법입니다. '있다, 없다'를 느끼는 그 마음을 일러 일승법(一乘法)에서는 도심(盜心)이라 했습니다. '나'라는 것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면, 그 마음은 도둑의 마음입니다. 또는 '이 집은 영구히 내 집이다' 하는 그 마음도 부처님 시각에서 보면 도둑의 마음입니다. 모두가 다 본래 비었습니다. 자기 몸뚱이든 무엇이든 자기 것이 아닙니다.


금생의 이 몸뚱이는 어디서 왔는가? 과거 전생에 이와 같은 몸이 있었을 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미래 내생에 이와 같은 몸이 있을 것도 아닙니다. 금생에 몇 십 년 동안 사는 이 몸뚱이는 분명히 있지 않은가? 이 몸뚱이도 찰나찰나 신진대사 해서 어느 순간도 같은 공간에 같은 몸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정확히 새겨 봐야 합니다. 어느 한순간도 지금 이 몸이 똑같은 형태로 있지 않단 말입니다. 우리 몸은 한 찰나도 똑같지 않습니다. 찰나, 즉 75분의 1초 동안도 같은 몸은 없습니다. 신진대사 해서 먼젓번 세포가 죽고 나중 세포가 생겨납니다. 사실은 매순간 주름살이 더 깊어지는데, 우리 중생들은 몇 십 년 되어서야 늙었다 합니다. 평소에는 그냥 내 몸 그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몸뚱이는 한순간도 같은 몸이 아닙니다. 순간 찰나도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사실 내 몸도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제법공인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제법공 도리를 알아야 참다운 대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소승교는 그저 '있다, 없다'고 하는 차원의 유교(有敎)입니다. 대승이 되려면 적어도 제법공의 도리, 반야지혜에서 출발해야 됩니다. 반야지혜, 반야의 보배가 있어야 참다운 염불이 됩니다. '모든 것은 진여불성뿐이다, 다른 것은 다 헛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염불하면 그것은 바로 염불인 동시에 염불선(念佛禪)인 것입니다.



- 바른 참선 방법


화두를 참구할 때는 바로 그 자리, 진여불성 자리를 놓치지 말고 참구하십시오. 이것은 '이뭣고' 선(禪)에 여실히 다 밝혀져 있습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한 물건은 무엇인가? 이것은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고 오직 생명의 본래면목 자리란 말입니다. '이뭣고'는 '나에게 있는 본래면목 자리가 무엇인가'를 참구하는 것입니다. 검기는 칠보다 검고 밝기는 해와 달보다 더 밝으니 천지우주를 두루 비추는 광명의 생명이며, 또한 하늘을 떠받치고 땅을 괴고 있는 것, 천지우주에 가득 차 있는 그것이 나와 더불어 있는데,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한 그것이 무엇인가를 참구하자는 겁니다. '이뭣고'는 나에게 있는 '오직 하나의 도리, 오직 하나의 진여불성, 그게 무엇인가'이지 그냥 아무렇게나 '이뭣고'가 아닙니다. 이것은 육조(六祖) 혜능(慧能)스님께서 분명히 밝혀 놓으신 가르침입니다.


부처가 무엇인가?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이쪽으로 오신 뜻이 무엇인가? 그런 데 1천 7백 공안(公案)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화두를 참구하든지 근본성품 자리를 놓치지 않아야 참다운 조사선이 될 수 있습니다. 어디에, 즉 상(相)에 의지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에 의지해서 공부하면 참선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상에 의지하지 않고, 자취도 모양도 없고 이름도 붙일 수 없는 그 자리, 우리의 본래 성품자리에 마음을 고정시키고 있어야 참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다고 보면 참선은 선방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집안에 있으나 어디에 있으나 운전을 하든 밥을 먹든 언제나 우리 마음이 상에 걸리지 않고 우리 마음이 일체 존재 나나 너나 모든 존재의 실상자리, 이른바 생명의 실상자리에 입각하면서 공부하면 어느 공부나 다 참선입니다.


비록 지금까지 기독교를 믿어 '오 주여!' '하나님이시여!' 하는 것이 더 좋은 사람들은 말은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모든 상을 떠나서 진여불성 자리에 두고 '오 주여!' 해도 아무런 허물이 없습니다.


이것은 '똥 마른 막대기'라는 화두에서도 입증됩니다. 운문(雲門) 스님한테 가서 '여하시불(如何是佛)잇고' 하니 '똥 마른 막대기라!' 하였는데, 상을 떠나버린 자리에서는 똥 마른 막대기가 되었든 또는 쇠막대기가 되었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금생에 잔뜩 무명병(無明病), 그 가운데서도 유루병(有漏病), 즉 '있다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진여불성도 텅텅 비어 있는 것이지 진여불성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무병(無病), 없다는 공병(空病)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무병이란 말입니다. 단견상견(斷見常見)이라, 우리는 항시 있다는 유루병도 끊어야 하고 아무것도 없다는 공병도 끊어야 합니다. 우리 중생의 어두운 눈으로는, 상이 있는 눈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상이 없는 청정한 우리 마음은 분명히 진여불성을 봅니다. 그것은 우주에 충만한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그냥 가장 소중한 내가 없고, 가장 소중한 저 사람도 공이라 하니 허무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실 거기까지만 생각하면 굉장히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실상은 일체의 행복과 지혜, 자비를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가 진전되면 진일보한 만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감로수 같은 맛이 옵니다.


동산양개(洞山良价) 화상한테 "더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고 추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까 동산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대는 어째서 춥고 더움이 없는 그 자리를 구하지 못하는가?"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미우면 미운 채로 좋으면 좋은 채로 더우면 더운 채로 고생합니다. 그러나 더위도 추위도 미움도 좋아함도 다 떠나서 오직 청정한 해탈의 자리에 가버리면 그런 것은 다 조복(調伏)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 저부터 그런 자리에 온전히 못 갔으므로 분명히 저도 덥고 춥습니다. 더위도 추위도 없는 자리가 바로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다 초월해 있습니다.


참선을 많이 해보신 분들은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뜨거운 선방에 앉아서도 공부가 잘될 때는 그냥 시원한 기운 때문에 자기 눈에서도 분명히 시원한 바람이 푹푹 일어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렇게 신비로운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한없는 지혜, 한없는 자비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유루병과 무병 때문에, 있다는 병과 없다는 병 때문에, 우리의 그러한 무한한 공덕을 딱 틀어막고 있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를 하실 때 지금까지 해오던 지장보살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아미타불이나 무자 화두 같은 공부 방법을 바꾸실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이런 공부 방법들은 현상 따라서, 인연 따라서 제시된 방편일 뿐입니다. 그런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모두가 다 본래의 성품자리를 말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본래 성품자리에 가 있다면 지장보살을 하나 무엇을 하나 다 한가지입니다.


따라서 지장보살을 외우는 분들이 관세음보살하고 다르다고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는 화두를 해야 참선인데 지장보살을 하면 참선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의 명호자리, 모든 보살님의 명호자리는 본래가 하나입니다. 하나의 진여불성 자리인데, 그 자리는 무한한 공덕이기 때문에 한 말로 표현을 못합니다. 다만 자비로운 쪽으로 표현할 때는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 표현할 때는 문수보살, 또는 중생의 영혼을 극락세계나 천상세계로 인도하는 쪽에서 보면 지장보살, 중생의 병고를 다스리는 쪽에서 본다면 약사여래 등으로 표현을 하지만, 부처님에 대한 총 대명사는 아미타불입니다. 원래 둘이 아닙니다.


불교는 이런저런 신이 따로따로 있다고 보는 다신교(多神敎)가 아닙니다.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다 그 속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경도《논어》도《도덕경》도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하고 있는 공부 방식을 바꿀 필요 없이, 다만 마음만 돌이키면 됩니다. 그것을 회광반조(回光返照)라 합니다. 우리가 분별하고 있는, 즉 상을 두고 있는 마음만 돌이켜서 상이 없는 그 자리만 훤히 비추고 있으면 됩니다. 정말로 그 자리는 훤히 빛나는 자리입니다.


가시적인 태양광과 같은 눈부신 광명이 아니라 청정적광(淸淨寂光)입니다. 청정광명(淸淨光明)이, 청정생명(淸淨生命)의 광명이 언제나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한 번 생각하면 한 번 생각한 만큼 마음의 어둠이 가십니다. 바르게 화두를 참구하면 그만큼 우리 마음의 어둠은 가시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에 파사닉이라는 왕녀가 있었는데, 얼굴이 굉장히 못생겼었습니다. 얼굴이 하도 못나서 자나 깨나 얼굴 생각만 합니다. 얼굴 때문에 남편한테 소박을 당하고, 문 밖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임금님도 자기 딸이 부끄러워서 밖에 내놓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왕녀가, 세상에 둘도 없는 추녀가, 부처님한테 간절히 기원을 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정말로 제가 이와 같이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 저도 좀 예쁜 사람으로 바꿔 주십시오' 하고 몇 달 몇 년을 두고 간절히 기원을 드렸습니다. 차츰 공덕이 쌓이고 쌓여서 자기 업장이 소멸될 만큼 되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 방 문틈으로 부처님의 자비로운 광명이 훤히 비춰 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광명을 보자마자 왕녀의 추한 얼굴이 아주 절세미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 내용이 팔상록(八相錄)에 나와 있습니다. 추녀가 얼굴을 다시 바꿔 미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남을 미워할 때 자신의 얼굴을 보십시오. 그 얼굴이 얼마나 추악합니까? 남에게 베풀고 자비로울 때 자신의 얼굴을 보십시오. 얼마나 온화하게 보입니까?



- 부처님께 가까이


우리는 본래로 무한의 지혜공덕과 행복을 갖추고 있는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느껴야 바른 신앙입니다. 부처님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분명히 느끼고 나도 최선을 다해서 부처가 되고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되게끔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 남편한테나 자기 아들한테나 자기 친구한테나 누구한테나 가장 큰 선물이고 가장 큰 공덕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가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닦으면서 그 사람도 부처님이 되게끔 인도하는 것입니다.


늙으신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서 옷이고 음식을 잘 대접하는 것도 효도가 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단지 유한한, 때 묻은 효성밖에는 못 되는 것입니다.《화엄경》에 보면 하해 같고 태산 같은 부모님 은혜를 갚기 위해서 부모님한테 최상의 음식을 대접하고 최상의 화려한 옷을 입혀 드리고 그렇게 해도 부족해서 부모님을 양쪽 어깨에 태워서 천하를 몇 바퀴를 돌면서 천하의 명승지를 구경시켜 드린다 하더라도 오히려 갚음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법문이 있습니다.


세간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지극한 효도지만, 부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 역시 때 묻은 유루(有漏) 효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유위법(有爲法)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효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부모님을 생사가 없는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으로 이끌어 드리는 것입니다. 무위법(無爲法)의 효도입니다. 그것은 유루 효도에 비교할 수 없는 몇 천 배 수승한 효도인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화엄경》에도 있고《부모은중경》에도 있습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 또는 학문이 깊고 얕은 게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얼마만큼 부처님한테 가까이 나가고 있는가, 또는 모든 사람을 얼마만큼 부처님한테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우리가 부처님의 반야사상을 마음에 새겨서 무아, 무소유임을 아는 것입니다. 내 몸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본래 비어 있다는 겁니다. 죽은 뒤에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색즉공(色卽空)이라, 지금 이대로 비어 있단 말입니다. 내 몸도 비었거니 하물며 내 소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정치가든 누구든 다 부처님 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 법은 바로 우주의 도리, 우주의 진리입니다. 우주의 도리에 못 따르면 항시 역사의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든 부처님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인류 사회에 전쟁이나 불안한 요인이 항시 끊이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기에 플라톤도 그의 저서《공화국》에서 "성자가 정치가가 되고 정치가가 성자의 길을 닦기 전에는 인류의 해악이 영원히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이데거나 키에르케고르 등 실존철학자들은 순수한 불교인들은 아니지만,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무철학(無哲學)은 근본적으로 모든 존재의 허망무상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느낌을 바탕으로 참다운 실존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여불성이 참다운 실존이고 실상입니다.


모든 것은 다 허망하고 다 비어 있고 참다운 실상은 오직 진여불성뿐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느낀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그 모진 습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습관은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들고 우리를 괴롭힙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정념상속(正念相續) 오욕적중(五欲敵中) 불위소해(不爲所害)'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정념이 상속되어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공부가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일체가 진여불성이 아님이 없다, 일체가 하나의 불성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견(正見)입니다. 이러한 바른 견해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일상성에 매몰돼서 그런 정념을 상속시키지 않으면 공부가 참다운 참선으로 못 이어집니다. 이와 같이 정념을 상속시키면, 오욕적중이라, 잠이나 식욕이나 이성욕(異性慾)이나 명예욕이나 재물욕 등 오욕의 원수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원수가 우리를 해롭게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원수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못 보는 마음, 즉 무명심(無明心)에 있습니다. 무명심으로 내가 있으면 당연히 탐욕심이 있고 진심(瞋心)이 있겠지요. 오욕심은 모두가 다 무명심에서 오는 것입니다. 즉 도둑 마음입니다. 이러한 도둑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우리 마음을 침범합니다. 과거 무수생(無數生) 동안의 도둑 마음이 우리 잠재의식의 소(沼)에는 꽉 차 있습니다. 금생에도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대체로 '있다, 없다' 그런 것만 배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비었다는 반야사상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알아서 그렇게 살기는 살아야겠는데, 그 순간뿐이지 자꾸만 '있다, 없다'에 걸려 버립니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려면 정념이 지속적으로 상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삼독오욕(三毒五欲)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심독오욕의 침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간적인 상(相)을 놓고 복을 비는 것은 상의 범위 안에 구속되어 큰 복이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을 떠나버린 참다운 공부를 한다면, 우리가 굳이 부르지 않아도 진여불성 가운데는 무한의 공덕이 있기 때문에 저절로 공덕이 다 오는 것입니다.


우리 불성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압니다. 우리 진여불성은 나보다도 나를 훨씬 더 잘 압니다.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내가 "부처님이시여, 나한테 무슨 재산을 주십시오" 이렇게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진여불성은 다 미리 아신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는 불행은 진여불성 자리에서 본다면 불행이 될 수가 없습니다. 천지우주는 모두가 그 자체로 불성이기 때문에 우주는 바로 부처님 덩어리입니다.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진여불성 덩어리가 바로 우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불행이라는 것은 다만 상(相)에서 봐서 불행인 것이지 진여불성에서 본다면 불행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나 염불 공부나 무슨 공부나 다 하나의 공부입니다. 다만 우리의 본체 본성품을 안 떠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육조단경》을 보면, "내 법(法)은 본성품을 안 여읜다"고 하는 말씀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본성품을 안 여의고 공부를 해야 참다운 공부이고 그래야 참선이 됩니다. 공부하실 때는 그와 같은 마음 자세를 가지고서 꼭 정(定)과 혜(慧)가 쌍수(雙修)가 되어야 합니다. 정과 혜를 아울러서 공부를 해야 공부가 빠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진여불성 가운데는 선정(禪定)과 지혜와 자비가 온전히 원만히 갖추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공부 역시 진여불성에 걸맞는 공부를 해야 이른바 계합(契合)이 빠르단 말입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 혜는 혜대로 또는 선정은 선정대로 닦으면 공부의 계합이 더딘 것입니다.



- 생명의 길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를 안 여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선정이라는 정을 안 여의는 것인가? 우리 마음을 훤히 빛나는 진여불성에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진여불성 자리는 우리 마음이 고향 길로 가는 광명의 등불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인 생명, 광명입니다. 우주에 가득 찬 오직 하나의 광명입니다. 그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는 것, 그것을 가리켜 우리 마음이 지혜에 머물러 있다고 그럽니다. 바꿔서 말하면 우리 마음이 본체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본성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이른바 육조스님의 단경 말씀대로 일상삼매(一相三昧)의 상태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그 자리를 느끼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앞생각 뒷생각 사이에 틈이 없이,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지속시켜야만 참다운 진여불성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금생에 나오신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은 무엇인가?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진여불성 자리를 알게 해서, 그 자리를 깨달아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이생에 오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중생이 진여불성 자리를 깨닫는 것을 보고 그 자리를 증명해 주고자 해서 이생에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자니까 마땅히 공부해서 진여불성 자리를 깨달아야 하겠지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핵심적인 공부가 곧 정혜쌍수입니다. 정혜쌍수는 팔만대장경의 핵심입니다. 보조국사 어록도 보십시오. 정혜쌍수입니다.《화엄경》이나 모든 경들도 정혜쌍수, 즉 지혜와 선정이 아울러야 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마음의 등불인 진여불성 자리에 딱 머물러 두고서 지속적으로 그 자리를 안 여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육조혜능 스님 말씀으로 하면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할 수 있습니다. 일상삼매는 혜적(慧的)이고 지혜를 의미하고, 일행삼매는 정적(定的)이고 선정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지혜와 선정이 어우러져 공부할 때는 참다운 참선이 됩니다. 지혜와 선정이 균등히 되어야 참말로 참선이 됩니다.


우리의 생명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어버이 도리, 스승의 도리, 남편 도리, 아내 도리를 다하셔야 합니다. 게으름 없이 각각의 도리를 다하셔야 하나, 그러는 가운데도 앞서 말씀과 같이 진여불성 자리, 자기 생명의 본고향 자리에다 마음을 두고 해야지 그 자리를 떠나버리면 우리 생명이 그냥 겉돌고 맙니다. 생사해탈의 성불과는 상관이 없어지고 맙니다.


마땅히 생명의 길을 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아무리 혼란스럽고 불확실하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은 명백합니다. 명백한 길인지라 조금도 에누리가 없습니다. 속임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결연한 마음으로 분명히 믿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금생에 꼭 이 몸 이대로 부처님의 계행(戒行)을 착실히 닦으셔야 합니다. 살생하지 말고, 자기 배필 외에 어떠한 음탕한 행위도 하지 말고, 정당한 수입 아닌 것은 갖지도 말고, 정말로 적게 먹고 적게 써야 합니다. 적게 먹고 적게 써야 해탈의 길로 가는 자기 몸도 마음도 가볍습니다. 많이 두어 봐도 자기 성불, 참다운 감로왕여래의 공부, 영생해탈의 공부에는 아무런 도움이 못 됩니다.


마땅히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최선으로 바로 살고 바로 말하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므로 다른 생명을 해쳐서도 안 되겠지요. 개와 닭과 소와 나와도 둘이 아니므로 개고기, 쇠고기 그런 것도 안 먹어야 하겠지요. 그런 것 먹어서 살로 안 갑니다. 살로 안 갈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은 세포를 오염시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분명히 느끼셔야 합니다. 나보다 더 업장이 무거운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러한 세포가 나한테 온다고 생각할 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정말로 명명백백합니다. 명명백백한 가르침인지라 우리는 단호하게 믿어야 합니다. 믿고서 철저하게 계행을 지키고, 철저한 계행을 지켜야 부처님 가르침이 빨리 이해되고 빨리 우리 몸과 마음으로 증명이 됩니다. 계행을 못 지키고 우리 몸이 더러우면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지라 부처님 마음이 증오(證悟)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이 본래로 갖추어져 있습니다. 천지우주를 훤히 볼 수 있는 힘, 우주 만유를 다 알 수 있는 힘 모두를 갖추고 있으나 우리가 제대로 바르게 못 사니까 발휘하지 못하는 겁니다. 저 같은 사람도 오랫동안 공부를 하긴 했지만, 제대로 공부를 못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분명한 가르침을 제대로 다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부처님의 행복, 자비, 지혜공덕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조금도 흠이 있거나 모자람이 없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믿으시고 앞서 말씀과 같이 그 자리, 진여불성 자리를 한순간도 놓치지 마시고 살아가십시오. 누구와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저변은 부처님, 즉 우주의 실상인 생명으로 가는 마음이 흘러가도록 하십시오. 잠잘 때도 부처님한테 가고 있는 그 마음 그대로 흐르게 하고 잠을 자면, 잠자는 가운데서도 공부가 됩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금생에 성불하십시오.


허망한 세간에서는 아무것도 실상을 지니지 않았습니다. 감투도 대통령도 아무것도 실상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허상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속지 마시고 부처님 가르침을 정말로 바르게 믿으셔서 꼭 금생에 성불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감로왕여래.


<불기 2536년 9월, 대구 불교교육원 초청 특별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