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가장 행복한 공부

1.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제Ⅲ부 정진


1.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 산은 산 물은 물


조사어록에 "산시산(山是山)이요 수시수(水是水)"라, 즉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라는 법어가 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우리 중생이 본 산 그대로 산이요, 물 그대로 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삼독심(三毒心)에 가려서 실제적인 실상(實相)을 못 보고 자기 본래면목도 미처 못 보며, 또한 일체 존재의 본성품도 못 봅니다. 따라서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라는 조사어록의 법어는 우리 중생이 보는 산 그대로 산이요, 보는 물 그대로 물이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에는 많은 갈래가 있습니다. 고마문령(瞽馬聞鈴)처럼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면서 그대로 공부하는 성문승(聲聞乘)이 있고, 또는 스스로 명상을 하여 인연 따라서 깨닫는 연각승(緣覺乘)도 있으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실상 그대로를 믿고 닦아 나가는 보살승(菩薩乘)의 법도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법 가운데 참선하는 법이 최상승의 법이며, 바로 불도의 정문(頂門)입니다. 그래서 불경에서도 최학도(最學道)라고 했듯이 참선 공부는 우리 불자가 배우는 공부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배움의 길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들에게 49년 동안 설법을 하셨습니다. 45년설도 있으나 49년설을 더 많이 주장합니다. 부처님의 설법은 그때그때 중생의 그릇 따라서 하는 법문이기 때문에 방편설이 많이 있습니다. 연도로 따지면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12년 동안에 하신 법문은 우리 중생 차원에서 상식적으로 보고 느끼는 '있다' '없다'의 차원에서 하신 법문입니다. 그것을 흔히 초기 법문, 즉 초기 근본불교의 법문이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일체종지, 만중생의 본성품과 현상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방편법문을 하신다 할지라도 부처님 법문 속에는 모든 심심미묘한 뜻이 다 깃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중생들은 그저 문자나 말에만 집착하여 부처님의 초기 경전에 대해서, '있다' 혹은 '없다'에 대해서, 일반 세간적인 윤리도덕의 차원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별로 깊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초기 법문은 우리 중생의 그릇에 따라서 하신 법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정도의 법문은 기독교나 유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즉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든지,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든지, 명상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정도의 법문은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그릇이 조금 익어진 때에는 부처님이 금생에 나오신 뜻이 그냥 세간적인 범주, 일반 윤리도덕적인 범주에 멈추는 것이 아니므로 사실 그대로를 말씀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법이 다 공(空)하다는 공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49년의 설법 가운데 22년은 반야설(般若說), 즉 공의 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그 심심미묘한 뜻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있습니다만, '이 소중한 내 몸이 원래 공(空)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 때까지 공부한 소중한 내 관념도 모두 공(空)이다'라고 생각할 때는 굉장히 허무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실상지혜에서 볼 때는 그 모든 것이 공임에 분명합니다.


영가현각(永嘉玄覺) 대사가 도를 깨닫고 법희선열(法喜禪悅)에 넘쳐서 지은 노래인 <증도가> 가운데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 하고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말을 풀어 보면, "꿈속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이나 아귀ㆍ축생이나 그런 것이 분명히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깨달은 뒤에는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뿐만 아니라 천지우주의 모든 대천세계가 텅텅 비어 보인다"는 뜻입니다. 이런 뜻을 우리 중생들이 쉽사리 알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이런 뜻을 모르면 우리 불자님들은 그저 '있다' '없다' '나' '너' '내 것' '네 것'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머물다가 맙니다. 따라서 번뇌에서 해탈하지 못하고 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욕계, 색계, 무색계를 다 해탈하고 모든 번뇌를 다 멸진시키는 가르침입니다. 즉 삼계를 해탈하는 가르침입니다. 번뇌에서 해탈을 해야만 참다운 자유가 있고, 참다운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바로 인간론이며, 또한 바로 행복론입니다. 본래적인 인간의 참다운 자기를 아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가장 최상의 영원한 행복을 맛보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번뇌에 구속되어서 해탈을 못하면 참다운 자유와 행복은 없습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으면 나를 위해서 나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것은 자기한테, 자기한테 싫은 것은 남한테 떠넘기는 것이 중생들의 근성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다 공이라는 공의 도리를 모르면 우리 중생심의 차원에서 약간 좋은 짓을 한다고 해도 사실은 위선을 면치 못합니다. 내가 분명히 있으니 기왕이면 좋은 음식을 자기가 먹고 싶고, 좋은 옷을 입고 싶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따라서 억지로 도덕을 부린다 하더라도 이런 제법공의 도리를 모르는 차원에서의 위선은 절대로 면치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 깨달은 성자 외에는 모두 위선자의 범주를 못 벗어납니다.


성자는 우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달은 분입니다. 내 마음의 본체가 무엇인지, 우주의 참다운 본모습이 무엇인지, 참다운 실체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분이 성자입니다.


우리가 남의 글을 본다 하더라도 깨달은 입장에서 쓰인 글은 조금도 막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분들은 여기 부딪히고 저기 부딪히면서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시비를 미처 떠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22년 동안이나 우리 중생이 보는 이 모든 것이 다 비어 있다고 반야의 도리를 말씀했던 것인데, 그냥 비었다고 하면 우리 중생은 잘 납득을 못합니다. 어째서 비어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은 인연 따라서 생겨납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결합되어 있는 것이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화해 마지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연생(因緣生)이고 연기법(緣起法)이기 때문에 다 비어 있단 말입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항상성이 없으니까 무상(無常)이요, 공간적으로 보면 '나'라고 할 것이 없으니까 공이요, 무아입니다. 이것은 다행히도 현대물리학이 다 증명한 것입니다. 물리학이라 하는 것은 물질의 도리를 체계 있게 공부해서 밝힌 것으로, 바로 과학입니다. 그런 물리학이 모든 것은 본바탕에서 보면 다 비어 있다는 도리를 증명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은 제로(zero), 공(空)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다 증명했습니다. 부처님처럼 철저하게 증명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모든 법이 공이다" "모든 것이 다 허망무상하다"라는 반야의 도리는 이미 과학자들도 다 증명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도 저것도 다 비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공부할 필요가 무엇이며, 그야말로 허무주의에 빠지기 딱 쉽습니다. 다 비어 있는데 무슨 행복이 있으며 선악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공에 그치지 않고, 모두가 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이며, 인연 따라 모아져도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바로 무상이요, 따라서 공간적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공이요, 또한 이런 것에 대해서 '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의 참다운 실상은 우리 중생이 보는 것같이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반야사상에서 말하는, 단지 비어 있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본 것이 비어 있는 것이지, 참말로 있는 것은 진여불성이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초기 불교에서 있다, 없다, 좋다, 궂다와 같은 차원만 공부한 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의 전부를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까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산은 저런 푸른 산이고, 물은 저런 영롱한 물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근래에 와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하는 그런 도리를 그렇게만 생각하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중생이 삼독심에 가려 있는 범부심에서 보는 것이지 청정한 불안(佛眼)이나 혜안으로 보는 안목은 아닙니다. 독심을 다 떠나버리고 번뇌를 다 여의어 버린 부처님 눈, 성자의 눈으로 보는 것만이 사실을 사실대로 봅니다. 따라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시는 그런 안목에서는 산은 그냥 산이 아니고, 법성(法性)의 산, 법계성품 그대로의 산이란 말입니다. 물론 물도 그냥 물이 아니고 법성의 수(水)입니다. 법성인 산이요, 법성인 수요, 실상인 산이요, 실상인 수란 말입니다.



-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현대의 병은 무엇인가? 유물주의(唯物主義)라는 병입니다. 내 몸도 물질이고, 다이아몬드도 물질이고, 산도 물질이고 다 물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물질, 이것이 우리 중생이 보는 그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물론적인 제도는 설사 인간의 간혜지(乾慧地)로 이모저모 변용시킨다 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우주의 도리에 어긋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을 간 뒤에 봄이 바로 오겠습니까? 응당 겨울이 와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천지우주의 도리 그대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법이자연(法爾自然)이라고 합니다. 즉 조금도 무리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보는 눈이 짧아서 자기의 본래면목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자기가 아는 것이 절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대체 무엇을 아는 것입니까? 제법이 허망한 것인데 공도리를 모릅니다. 연기법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공의 도리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사상은 법계연기(法界緣起)입니다. 우주의 실상, 우주에 충만해 있는 끝도 갓도 없는 진여불성이 인연 따라서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진여연기(眞如緣起), 법계연기(法界緣起)라 합니다.


잘나나 못나나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두가 다 진여불성 자리에서 이렇게 저렇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바다에서 바람 따라 이루어진 파도가 똑같은 물이듯이, 법성에서 이루어진 일체 존재 모두가 그대로 진여불성입니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생물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 도리입니다. 돌이요, 나무요, 사람이요 다 다르지만, 본성품에서 본다면 모두가 다 하나의 부처님 성품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겉으로 드러난 상(相)밖에는 못 봅니다. 현상밖에는 못 봅니다. 현상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무상이요 무아요 공이란 말입니다.


참선이란 어떤 것인가? 부처님 공부는, 부처님께서 설사 유루적(有漏的)인 간단하고 쉬운 말씀을 하셨다 하더라도 가상(假相)을 떠나고, 가명(假名)을 떠나서 실상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는 그와 같이 유루적인, 있다 없다 하는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을 떠나야 합니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원래는 실상이 없습니다. 다만 가상으로만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공도 그냥 공이 아닙니다. 허무한 공이라 하면 인연 따라서 일어날 필요가 없겠지요. 진여불성, 우주의 본성은 바로 내 마음의 본성입니다. 내 마음이라는 것은 물질이 아닌 하나의 정신 아니겠습니까? 생명입니다. 우주는 어떤 형상으로 있든 간에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생명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한정적으로 여기에 있거나 저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공간성이 있는 물질이라면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고, 대소 장단이 있겠습니다만, 공간성과 시간성이 없는, 따라서 물질이 아닌 순수생명 자리는 여기 있고, 저기 있고 또는 생겨나거나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반야심경》에서도 분명히 말씀하신,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또는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다는 도리를 그냥 방편설로 우리한테 하신 게 아닙니다. 우주의 실상 그대로를 말씀하신 겁니다.


참선 공부는 이런저런 방편설을 다 제해 버리고 심즉시불(心卽是佛), 즉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깨닫자는 공부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나무 그러면 나무 그대로 부처이고, 꽃 그러면 꽃 그대로 부처입니다. 우주의 실상 그 자리, 불성 그 자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두워서 못 볼 뿐, 밝은 눈으로 본다면 모든 것이 바로 그대로 부처란 말입니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천파만파의 파도라든가 수십 억 개 되는 거품 모두가 다 그대로 물이듯이, 이 현상계를 이루는 삼라만상, 하늘에 있는 모든 별이라든가 일체 존재가 그대로 바로 부처입니다.


이렇게 믿고 하는 공부가 참선 공부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돈오입니다. 이것이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의 도리입니다. 참선 공부라 하는 것은 마음 열고 하는 공부입니다. 마음을 닫아 놓고서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저것이 있고 이것이 있고, 이렇게 걸림이 있는 공부는 참선 공부가 못 됩니다. 석가모니와 내가 둘이 아닙니다. 또는 한 마리 곤충과 내가 둘이 아닙니다.


인류는 20세기의 문명사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만, 현대의 고도 산업사회는 단지 물질을 많이 만들고 자기가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면서 모두가 물질이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질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어서 내가 많이 소유하려면 다른 사람들은 적게 소유해야 되므로 싸우고 맙니다. 따라서 유물주의 사상에 입각한 자본주의, 또는 공산주의 등은 결국 우주의 진리에 따르지 않았으므로 인류에게 해악을 남기고 결국에는 붕괴되고 맙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도 한두 번 시행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공산주의가 무너졌으니까 앞으로는 자본주의 사회가 옳다고 생각해서 정말로 자유경쟁을 하고, 끝도 갓도 없이 소유관념을 확대해 간다면 그것 역시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부처님주의 혹은 생명주의, 즉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우리가 성공도 하고 마음도 편하고, 드디어는 해탈을 하게 됩니다. 살생하지 마라, 훔치지 마라, 음란한 짓 하지 말라는 등의 부처님 계율도 그냥 부처님께서 도덕적인 차원을 위해서 덕목으로 시설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도리로 보아 우주는 하나의 생명이니까 진여불성의 도리에 따르는 것이 계율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함부로 해버립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것저것, 가지, 이파리 다 제해 버리고서 근본 줄기와 뿌리만 가지고 하는 공부, 이것이 참선 공부입니다. 따라서 중국을 거쳐 온 조사선 도리는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꼭 거쳐야 하고, 가장 발전된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스님께서도, "내 법문은 본체를 안 여읜다"고 하셨습니다. 상(相)에 걸리지 않고 본체를 여의지 않는단 말입니다. 본체를 여의지 않아야 참선입니다. '이뭣고'를 하고 '무(無)'자를 들고, 어떠한 화두를 든다 하더라도 본체를 떠나서 그냥 의심만 품어서는 참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하였습니다. 참선은 바로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바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우주만물은 오로지 불심뿐입니다.


중세의 데카르트나 여러 철인들은 물질 따로 마음 따로, 이른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주장했습니다. 사실 서구문명은 대체로 이러한 물심 양원론(兩元論)과 창조주 하나님에게 우리가 섭리를 받는다는 두 가지 사상이 지배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창조주 하느님이 우주를 지배한다'는 식의 서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허심탄회하게 기독교 성경을 본다면,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확대시켜 말하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우리 사람을 떠나서 대상적으로 하늘 어디엔가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면, 기독교는 그야말로 형편없는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고 하질 않습니까? 아니 계신 데가 없고, 또 능히 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이른바 범신론이 되어야 기독교의 가르침이 참다운 진리가 됩니다.


아무튼 어설픈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하느님이 우리 밖의 저 하늘에 계시다가 우리가 잘못하면 벌을 주고, 또 종말론이 있어서 천구백 어느 해에 천지우주가 다 파괴되어 기독교를 믿는 사람만이 '휴거', 즉 선택받아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식의 가르침이 20세기의 문명시대를 풍미했습니다.



- 참철학 참종교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것은 정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입니다. 어쩌다가 금생에 다행히 부처님 법을 만났습니다. 부처님 법은 무가정(無假定)의 원리입니다. 이것저것 다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과학도 가장 참과학이고, 철학도 가장 참철학이고, 종교도 가장 참종교입니다. 따라서 참선 공부를 할 때는 먼저 신(信)이 앞서야 합니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화두를 의심하면 참선이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본체를 본 사람, 법성자리를 아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본체가 여기 있고, 저기 있고 하겠습니까?


여기 있고 저기 있다면 그것은 진여불성이 아닙니다. 우주는 진여불성 하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가르침은 진여불성 일원론입니다. 우주는 오직 불심일 뿐입니다. 불심 이외에 다른 것이 있지 않습니다. 진여불성이 연기법을 따라서, 법계연기를 따라서 우주가 이루어지고 사람이 생겨나고 다른 모든 것이 이루어지곤 합니다. 따라서 물질이 아닌 우주의 정기인 진여불성이 우주가 되고 무엇이 되고 했기 때문에 설사 상(相)으로 해서 사람 같은 상을 나투든, 산(山)과 같은 모양으로 있건 그런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산 그대로 바로 불성이고 사람 그대로 바로 불성입니다. 그러기에 보조국사가 어록의 돈오에서도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한 것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이며, 본래로 모두 부처인 것입니다.


본래 바로 부처라는 것은 사람만이 바로 부처란 말이 아닙니다. 어떤 당체, 책상이면 책상 모두가 다 그대로 부처입니다. 다만 중생이 못 볼 뿐입니다. 설사 중생이 못 본다 하더라도, 석가모니를 위시한 무수한 성자들이 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을 먼저 믿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참선도 먼저 신(信)이 앞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흐리멍덩한 눈으로 봐서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우주 이대로 진여불성이요, 이대로 비로자나불이요, 이대로 충만한 광명의 세계요, 이대로 극락세계입니다. 경(經)에 더러는 극락세계가 저 십만 억 국토 밖에 있다고 하나, 이것은 우리 중생이 너무 모르니까, 그렇게 말씀하셔야 중생이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같이 모든 물질이 다 비어 있고 물질의 근본이 에너지뿐이라는 대명천지 과학문명시대에 와서는 그런 법문이 통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 저 공간세계에 극락세계가 있고,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식(識)이 맑은 정도에 따라서 맑은 식이 사는 색계(色界)도 있고, 무색계(無色界)도 있습니다. 가장 맑아서 천지우주의 본래적인 진여불성과 같은, 맑은 식이 사는 세계가 극락세계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 마음이 참말로 맑아서 한 점도 티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 자리에서 바로 극락의 행복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몸이 저 공간 속에 몇 만 리 성층권에 있으나, 자기권에 있으나 또는 전리권(電離圈)에 있으나, 공중 높이에 있으나, 지금 이 자리에 있으나 할 것 없습니다. 어디에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 식이 얼마만큼 맑은가에 따라서 인간 정도 맑으면 이 대기권 속에서 고생만 하는 것이고, 더 맑으면 그때는 저 공거천(空居天)이라는 높은 차원의 세계에서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보조국사 어록에서 말한 것처럼, 본래시불, 즉 본래 부처이므로 때 묻지 않은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자성을 본래로부터 갖추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할 데 없이 깨끗하여 한 점도 때 묻지 않은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상(相)으로 볼 때는 이것은 허망한 것이지만, 본성품으로 볼 때는 우리 모두가 이대로 석가모니의 지혜, 예수의 지혜, 공자의 지혜와 같은 무량의 지혜를 갖추고 있습니다. 참선 공부하는 신앙은 이런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부터 어느 것과 비교해도, 설사 진여불성과 비교한다 해도 전혀 차이가 없는 불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불성 차원에서는 나나 너나 여기 지금 우리는 다 불성일 뿐입니다. 이 공간이라고 불성이 아니겠습니까? 공간은 산소나 수소 등으로 채워져 있는 공간인데, 산소나 수소나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본래 성품은 진여불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여불성 차원에서 본다면, 나만을 위해서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나를 위해서 남을 구박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열려서 자타(自他)가 없고, 천지우주에 참말로 있는 것은 공간성도 시간성도 인과율도 초월한 진여불성뿐이라고 생각해야 비로소 참선하는 마음의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확실히 믿을 때만 마음을 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 열고 하는 공부가 참선 공부입니다. 염불을 하던 주문을 하든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염불이나 주문이나 명상이나 부처님 공부는 모두가 다 마음 열고 하는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중생이 모르기 때문에 그때그때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이래저래 말씀하신 것이지, 부처님의 참뜻은 시간성, 공간성, 또는 인과율을 떠나버린 참다운 진여불성에 있습니다. 법계, 법성, 여래장(如來藏) 모두가 다 같은 뜻입니다. 그러한 법계 도리를 확실히 믿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런 때는 화두를 들어도 좋고, 염불을 해도 무방하고 또는 주문을 외워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인 자리를 알았다 하더라도 아직은 해오(解悟), 즉 이치로만 알았단 말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정도로는 생사해탈이 못 됩니다. 그러므로 닦고 닦아서 증오를 해야 합니다. 불성광명을 증명하는 그런 깨달음이 되어야 참다운 깨달음인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탐욕심도 번뇌도 어리석은 마음인 무명도 뿌리를 뽑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삼명육통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량하고 부사의한 부처님의 지혜를 다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진여불성은 우주의 본래면목인 동시에 삼명육통, 무량한 신통 지혜를 다 갖춘 그 자리입니다. 그렇게 믿어야 그렇게 됩니다.



- 바른 인생관


초기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교만할 때는 더러 당신 몸을 하늘로 나투셔서 하늘을 걷고 나는 모습 등을 보이셨는데, 그것은 동화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안 믿는 분들께 알려드릴 길이 없어서 답답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정통 조사는 모두가 다 중생이 말을 안 들으면 그냥 신통지혜를 갖추셔서 몸으로 보여주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중생들의 마음을 다 조복시킨단 말입니다. 그런 지혜가 우리한테도 다 분명히 다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런 신통묘지를 갖추고 우리가 참선 공부나 염불 공부를 한다면 그런 도리에 걸음걸음 가까워집니다.


그와 같은 우리 중생들이 무엇 때문에 있지도 않은 그림자 같은 물질 때문에 다투고 싸우겠습니까? 또 권력이나 감투 같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두가 다 유루(有漏)라고 하는 유물주의에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병 때문에 사회가 혼란스럽고 도덕도 피폐했습니다. 그러나 그 병을 고치려면 그저 윤리를 바르게 한다거나 남한테 베풀라는 식으로는 곤란합니다. 그 정도로는 이 총명한 시대에 통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바른 인생관을 지녀야 합니다. 내 생명은 원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사는 집도 따지고 보면 내 것이 아니고, 내 재산이나 내 권리나 모두가 다 내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사회는 자연스럽게 평등이 되고, 평화스러워지고, 자유롭게 됩니다.


우리는 금생에 나와서 배운 것이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집에서 배운 것이나 학교에서 배운 것이나, 대학에서까지 배웠다 하더라도 모두가 '있다' '없다'고 하는 공간성과 시간성의 범위 내에서 배웠습니다.


사실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철학하는 사람들 외에는 거의 못 배웁니다. 그러므로 승려가 되어도 '있다'는 생각을 떠나기 어렵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못 느끼고는, 반야사상을 왔다 갔다 한다 하더라도 공부가 별로 진전이 없습니다. 과거 전생에 사람으로 있다가 또는 다른 동물로 있다가, 천상에도 있다가 또는 더러 보살도 되었다가, 이렇게 돌고 돌다가 금생에 왔는데, 금생에 또한 나쁜 버릇만 많이 배웠습니다. 나쁜 버릇만 많이 심어 놓아서 그 습성을 떼자니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 습성을 뽑아버리기 위해서 기도도 모시고 참선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과 싸울 때 집중적으로 공격을 해야지 싸우다 말다 싸우다 말다 하면 결국은 적이 다시 세력을 만회해 가지고 덤벼 온단 말입니다.


번뇌와 싸울 때도 집중적으로 번뇌를 조복 받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삼동결제(三冬結制)나 백일기도를 합니다. 공부하는 우리 스님들, 얼마나 소중한 스님들이십니까? 출가하신 스님네들이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상객(上客)이라 하여 '오호사해위상객(五湖四海爲上客)'이라 하지 않습니까?


재가불자님들께서는 우리가 공부도 제대로 못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면 '하나의 아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스님이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젊은 나이에 온갖 오욕을 뿌리치고 스님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삼동 동안, 또 여름 석 달 동안 산문(山門)도 안 나가고 오직 부처님을 지향하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있다, 없다' 하는 나쁜 습성이 별로 많지 않아서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습성이 짙은, 업장이 무거운 중생들은 할 수가 없는 노릇이 스님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스님들 가운데는 더러 명실상부하지 못한 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체로 오호사해위상객입니다. 중생 가운데 상객입니다. 우리 출가한 상객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최상의 도리인 '심즉시불(心卽是佛)', 즉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 즉 마음과 중생과 부처의 이 셋이 원래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도리를 증명해 보이도록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우주는 오직 부처님 하나일 뿐입니다. 부처님 일원주의입니다. 오직 불심인 것입니다. 물질은 중생이 잘못 보아서 상(相)을 보고 물질이라 하는 것이지, 순간마다 변화해 마지않는 것이 물질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스님네는 '물질은 없다'는 생각을 꼭 하시고 공부를 해야 할 것이고, 우리 재가불자님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 의지해 나올 때 우리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는 중음계에서 식(識)으로 헤매다가 부모님 연(緣)을 따라 태중에 들어가서 이렇게 인간이 되었습니다. 죽은 뒤에 우리 식은 식대로 갑니다. 우리 몸은 지수화풍 사대가 각각 지(地)는 지대로, 수(水)는 수대로, 화(火)는 화대로, 풍(風)은 풍대로, 산소는 산소대로, 수소는 수소대로 다 흩어지고 맙니다. 지금 이 몸은 전생이나 내생에는 분명히 없습니다. 이런 도리는 우리가 대체로 알지만, 이대로 공(空)인 줄은 잘 모릅니다. 이대로 공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물질이 그대로 공이라 하여 '색즉공'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마음만 열어서 제법이 공하다는 도리를 안다면 걸림이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공부는 순풍에 돛단배입니다. 우리 사부대중들께서도 모두가 다 허망하다고 먼저 아셔야 합니다. 허망하다고 해서 어버이 도리를 함부로 한다거나 또는 게으름 부린다거나 하는 것은 공도리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은 소중한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실상도리를 순간 찰나도 안 여의고 공부하기 위해서 염불이 있고 주문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실상도리를 안 여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화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가 무엇인가[如何是佛]?"나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如何是祖師西來意]?" 또는 "본래면목이 무엇인가[如何是本來面目]?"와 같은 것은 모두 우리가 진여불성의 도리를 깨우칠 수 있도록 이래저래 서술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선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참말로 알았으면 가만히 묵조(默照)해서 그대로 비춰 보아도 무방합니다. 본체성, 근본 진여불성 자리만 여의지 않으면 염불을 해도 선(禪)이요, 가만히 비추어 명상을 해도 선인 것이고, 화두를 의심해도 선입니다. 물론 참선 공부에는 문자와 이치로만 알고, 참답게 닦지 않는 문자선(文字禪)도 있고, 자기 마음이 얼마만큼 밝아 있는가, 혹은 내 마음이 얼마만큼 닦여 있는지도 모르면서 하는 암증선(暗證禪)도 있습니다. 그러한 잘못된 참선도 있습니다.


공부할 때는 무수히 많은 경계가 나옵니다. 성불까지 단박에 벗는 분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특수한 경우이고, 석가모니부처님도 육 년 고행을 하셨듯이, 우리 중생들이야말로 오랜 세월 동안 닦고 닦아 습기가 녹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박에 되기는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과정에서 무수한 경계가 나옵니다. 더러는 기쁘고 더러는 부처님 같은 모양도 나오고, 더러는 광명도 비춥니다. 그런 모양들은 모두 다 허상입니다.


내 몸 자체가 천지우주의 진여불성과 하나가 되기 전에는 모두가 허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경계가 오던 간에 실상이 아니라고 느껴야 합니다. 그렇게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특별히 스승도 필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꼭 마음을 훤히 열어버려서, 정말로 습기를 녹여서, 진여불성 자리를 한사코 증명하실 것을 기원하며 부탁드립니다. 사회에 참여를 한다 하더라도 나나 너나 모두가 다 하나인 본질자리, 본성품 자리를 깨닫는 데에다 역점을 두는 것이 참다운 사회참여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근본적인 사회병리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사회참여를 못했습니까? 사회주의가 사회참여를 못했습니까? 함부로 참여하면 날뛰기만 하는 결과가 됩니다. 아무 도움도 못 됩니다. 본질적으로 내 자성이 무엇이며, 우주의 본질은 또 무엇인가 하는 것, 즉 우주는 모두 다 진여불성의 생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자리를 깨닫기 위해서 나가는 길이면 다 참다운 사회참여가 됩니다. 설사 선방에 있든, 자기 방에서 명상만 하고 있든, 또는 사회에 나가서 기치를 들고 이런저런 자기주의(主義)를 표방하고 운동권이 되든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진여불성 자리, 우주의 본래성품 자리를 분명히 자기가 깨닫고자 애쓰고, 또는 만 중생이 깨닫도록 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지닐 때는 농장에 있으나 회사에 있으나 공장에 있으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진정한 사회참여입니다.


이렇게 해서 꼭 금생에 위없는 대도를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관세음보살.


<불기 2535년 11월, 태안사 동안거 결제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