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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가장 행복한 공부

2. 참선이 뭔가

                                             2. 참선이 뭔가



- 무명


우리는 바른 생각을 하고, 거기에 따른 바른 행동을 함으로써 바른 깨달음과 위없는 행복을 얻습니다. 따라서 우선 바른 생각이 없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무명심'이나 '무지'로는 부처님 가르침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겪는 가지가지의 온갖 고난은 모두 무명에서 비롯됩니다.


십이인연법을 다 배워서 아시는 바와 같이 무명이 있음으로 해서 거기에 행동이 따르는 것이고, 행(行)으로 인해 식(識)을 받습니다. 또는 무명이 없음으로 해서 우리의 모든 업장이 소멸되어 깨달음과 행복이 수반되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무명이고 무엇이 바른 지혜이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바른 지혜의 가르침, 이른바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입니다. 무명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나의 본래면목도 바로 못 보고 우주의 본바탕도 본래 있는 그대로 못 보는 흐리멍덩한, 어리석은 마음, 이것이 무명심 아니겠습니까?


《기신론》에 무명심의 풀이가 아주 간략히 나와 있습니다. 즉 "부달일법계고(不達一法界故) 홀연념기명위무명(忽然念起名爲無明)"이라는 것인데, 그 뜻은 "본래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다 청정미묘한 법계실상인데, 우리가 그것을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득 일어나는 한 생각, 그것을 일러 무명이라 한다"는 법문입니다.


한사코 무명을 여읜 반야지혜에 입각한 공부를 해야만 참선(參禪)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냥 방편 공부, 즉 세간적인 공부는 반야지혜가 없어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만, 이른바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인 진지(眞智)를 가지고 하는 공부가 되어야만 참다운 수행인 동시에 이른바 '참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법계(一法界)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질과 정신이 따로 있거나, 나와 남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주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청정미묘한 하나의 법의 세계입니다.《화엄경》의 입장을 빌려 말하면 화장세계(華藏世界)입니다.《정토경》입장에서 말하면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 혹은 화장세계라 불리는 일법계는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과거ㆍ현재ㆍ미래 그런 시간적인 제한도 없으며 항시 그대로 있는 것인데, 법계의 뜻을 통달하지 못한 우리 중생이 어리석어서 이래저래 분별하는 생각이 나온단 말입니다. 즉 '나'라는 생각, '너'라는 생각, 또는 물질이라는 생각, 마음이라는 생각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 참선 수행자는 그런 무명심을 단연코 떠나야 합니다.


우리 사고와 우리 건강은 절대로 이원적인 게 아닙니다. 따라서 별개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다만 한 생각 잘못하면, 이른바 무명심 때문에 성도 내고 탐욕심도 냅니다. 무명심 때문에 우리에게 '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나'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나한테 좋게 하면 탐심을 내고, 싫게 하면 응당 진심을 내겠지요.


무명심이 없을 때는 자기라는 것에 대해서, 자기 권속이나 자기 소유나 자기 권력에 대해서 집착할 아무런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무명심을 떠난 자리, 참다운 법계자리, 실상자리에 입각해서 하는 공부를 이른바 대승적인 공부라 합니다. 바꿔서 말하면 반야지혜, 반야바라밀의 지혜에 입각해야만 가정(假定)도 유루법(有漏法)도 아니고 때 묻은 공부도 아닌, 참다운 무루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돈 만 원 한 장을 베푼다 하더라도 '나'라는 관념이 있고 '너'라는 관념이 있고, 돈이 많다 적다하는 그런 관념이 있다면, 이것은 참다운 보시가 못 됩니다. 이른바 상이 있는 유주상(有住相) 보시입니다. 무주상(無住相) 보시, 즉 상이 없는 참다운 보시가 되려면, 나라는 상, 너라는 상, 또는 물질이 많다 적다하는 상을 떠나야 합니다.


참선 공부는 그러한 무명심을 제거하고 참다운 반야지혜에 입각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참선이 됩니다. 가치관의 혼란 때문에 우리는 지금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불교 내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다종교사회인지라 다른 종교와의 상호 관계도 마찬가지이고, 또는 정치 경제 모두가 다 혼란 가운데 있습니다. 어떠한 것이 바른 정치이고, 어떠한 것이 바른 경제이고, 또는 종교는 어떠한 것이 바른 종교인가?


경제나 정치나 모두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인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모르고서는 바른 정치, 바른 경제학을 성립시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법학을 하던 경제학을 하든 또는 교육학을 하든, 어떤 분야의 학문을 하던 간에 우선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아직 정치학도 없고 경제학도 없는, 미개한 원시공산시대라든가 중세시대라면 또 모르지만, 어차피 학문이 다양하게 분화되고 주의 주장이나 종교가 이렇게 혼재해 있는 지금, 이런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모두를 다 종합하는 올바른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참선한다고 애쓰고,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서 모입니다만, 참선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길을 잘 모른다면 우리는 단지 소중한 힘을, 생명 같은 시간만 낭비하게 됩니다. 저 같은 경우도 승려가 되어서 한 10년 동안은 걸망 지고 왔다 갔다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확철대오(廓徹大悟)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저래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자기한테 꼭 맞는 수행법을 확립하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선방에 처음 오신 분들도 대체로 제가 방황하던 그런 때나 비슷하리라 여겨서, 노파심 때문에 몇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참선의 방법


대승권에서는 참선하는 방법을 대체로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대승권이라 하는 것은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 이루어진 불법의 형태를 일컫습니다.


이른바 정통조사 ― 흔히 말하기를 석가모니부처님을 포함, 마하가섭부터 육조 혜능스님까지의 33대를 말하는 것으로서 삽삼조사(卅三祖師)라 합니다 ― 들께서 말씀한 것은 조금도 오류가 없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달마스님 때부터 육조 혜능스님 때까지는 별로 분파가 없었습니다. 달마스님은 중국에 와서는 초조(初祖)가 되지만, 저 인도까지 합하면 28대 조사가 됩니다. 아무튼 혜능스님 때까지만 해도 분파 없이 그냥 마음을 관조하는 관심일법(觀心一法)으로만 쭉 이어져 왔습니다.《달마 혈맥론》을 보거나《석실소문(釋室疏門)》이라든가 달마가 스스로 말씀했다는 어록을 보거나, 승찬(僧璨)스님의《신심명(信心銘)》을 보거나, 도신(道信)스님이나 홍인(弘忍)스님의 어록을 보거나, 여러분들도 다 보신 바와 같이《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거나 별로 분파(分派)가 없습니다.


그런데 중국 당(唐)나라 이후 북송(北宋) 때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근기에 따라서 교파가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맨 처음에는 마음을 관조하는 하나의 법만 있었습니다. 왜 마음을 관조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른 지혜로 마음을 관조하면 우리 인간이 보는 현상계라는 것이 다 허망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반야심경》이나《금강경》의 도리 그대로 사실 모두가 허망무상합니다.


《금강경》의 도리를 압축하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또는 중생이라 할 것도 없고, 수명이 길다, 짧다 하는 시간적인 관념도 원래 없다는 것, 그게 바로《금강경》의 핵심 아닙니까?


따라서《금강경》도리는 현실을 바로 본 도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 몰라서 현실이라 하면 '이대로 내가 있고 저대로 그대가 있다. 또한 물질은 물질대로 있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부처님 법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바른 눈으로 볼 때는 나도 공(空)이고 너도 공이며, 또는 중생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어서 중생 또한 공이고 따라서 결국은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시간까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분명히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어제가 있고 내일이 있으므로 있다고 보겠지요. 이런 것마저 없다면 우리에게 허무감이 듭니다. 여태까지 배운 것은 그렇게 안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반야사상, 반야공은 다른 종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구별 짓는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야의 지혜가 있으면 불교이고, 반야의 지혜가 없으면 외도(外道)입니다.


결국 물질이라고 할 것이 없으므로 마음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물질이 아니므로 개별적인 내 마음, 네 마음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마음이 물질이라고 생각하면 여기도 가 있고, 저기도 가 있고, 내 마음, 네 마음이 따로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물질이 아닌지라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시간성과 공간성이 있어야 하는데, 마음은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이라는 것은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가득 차 있다고밖에 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바로 부처, 즉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내 마음 따로, 네 마음 따로 있다면, 이렇게 좁은 마음은 부처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참으로 깨달으면 마음이 부처이기 때문에 한계가 없습니다. 어디에나 언제나 있는 그러한 생명의 본체가 바로 마음의 본체인 동시에 부처입니다. 따라서 달마 때부터 육조 혜능까지는 그와 같이 마음을 관조하는 법으로 말씀했습니다. 육조 혜능스님도 "내 법(法)은 항시 본체를 여의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현상계가 연기법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천차만별로 구분된다 하더라도 결국 그 본래적인 마음자리, 부처님 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자리, 부처님 자리를 안 떠나야 바른 법을 이탈하지 않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마음을 관찰하는 하나의 법으로 일관하다가, 그 다음 이루어진 것이 오종칠파(五宗七派)입니다. 즉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曺洞宗), 법안종(法眼宗), 운문종(雲門宗), 위앙종(潙仰宗)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사실 지금 말한 다섯 종파도 두부 자르듯 절연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조사 스님들의 경향이나 개성 따라서, 또는 부처님 법을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뒤 송(宋)나라 때 참선의 형태가 세 가지로 구분되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어느 하나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깊이 의심함으로써 공부를 해나가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화두법입니다. 화두라는 것은, 어느 스님이 깨달은 도인들에게 무어라고 법을 물을 때, 깨달은 도인들이 그때그때 간명한 해답을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해답을 내리지만 그분들이 "그대는 이 문제 가지고 의심만 해라" 그런 말은 안 했습니다.


도인들이 그때그때 하신 말씀은 때 묻지 않은 말씀입니다. 상(相)이 없는 말입니다. 운문대사가 "여하시불(如何是佛)잇고?" 즉 "부처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똥 마른 막대기다!"라고 했던 말들도 우리가 똥은 더럽고 막대기는 하찮은 것이라는 식의 그 개념만 생각할 때는 그 대화는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그러나 운문대사의 말은 그런 개념적인 뜻이 아니라 상을 떠나버린 말입니다. 그러므로 도인들의 말은 '똥 마른 막대기'라고 하나 '다람쥐'라고 하거나 '하나의 흙덩이'라고 하나 모두 때 묻지 않은 말, 상에 걸리지 않은 말입니다.


따라서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인 화두도 모두가 다 그와 같이 때 묻지 않은 말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격(格) 밖의 말이라는 뜻으로, 격외도리(格外道理)라고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항시 격 내에서, 규격을 따라 말을 합니다만, 성자의 말은 전부를 보는 것입니다.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 시방세계(十方世界) 시전신(是全身)", 즉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 발을 내딛어 우리가 깨달아 버렸다고 생각할 때는, 시방세계 전체가 바로 하나의 몸이란 뜻입니다.


하나의 몸이란 법신불을 말합니다. 깨달은 분들은 그와 같이 상통해서 전체를 보기 때문에, 전체 가운데서 한 부분을 잡아서 말하거나 혹은 전체를 말하거나 관계없이 바로 전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가 즉 전체요, 전체가 즉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하나를 말하면 그것에 집착해서 말하기 때문에, 그것이 항시 때 묻은 것이고 유한 상대의 말밖에는 안 되지만, 도인들은 상대가 없는 그런 자리에서 말하기 때문에 모두가 다 격 밖의 소리입니다. 따라서 화두라는 것은 '이뭣고' 화두이든 무슨 화두이든 모두가 다 격 밖의 도리를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화두를 의심하다 보면, 거기에 마음이 모아지게 됩니다. 마음이 모아지면 마음의 본바탕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천지우주가 본래 법신부처이므로 마음이 맑아 옵니다. 우리가 무명심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흩어지고 산만하기 때문에 본래면목을 못 보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 응집만 되면 마음은 틀림없이 맑아 오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산만하다는 것은 마음이 흐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흐린 물과 똑같습니다. 탁수는 잡스러운 것이 섞여 있으므로 흐립니다. 그러나 가만히 놓아두면 잡스러운 앙금은 가라앉고 차근차근 맑아 옵니다. 맑아지면 그때는 바닥이 보이겠지요. 그와 똑같이 우리 마음에도 번뇌라고 하는 잡스러운 것이 섞여 있습니다. 진리에서 본다면 '나'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인데, 무명심으로 인하여 천지우주가 부처라는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법계의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나'라고 생각하고 '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때는 마음이 산만해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리를 비추어 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화두가 되든 무엇이 되든 그것에 집중해서 마음이 딱 모아져 흩어지지 않으면, 그때는 비록 탁수라 할지라도 서서히 앙금이 가라앉아 바닥이 드러나듯이, 우리 마음도 차근차근 맑아집니다. 맑아지면 그 자리가 본래면목 자리인 것이고, 부처이기 때문에 훤히 밝은 부처가 밖으로 나온단 말입니다. 간단명료한 도리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화두의 의단을 품음으로써 우리 마음은 차근차근 본래면목 자리로 가게 됩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즉 우리가 직접 진여불성 자리는 아직 증명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석가모니께서나 삽삼조사가 모두 말씀하시기를, "본래 다 법신불(法身佛)이다" "본래가 다 부처다!" 이렇게 말씀들을 하셨단 말입니다. 가장 정직하고 조금도 거짓이 없는 부처님과 조사님들께서 하신 말씀이므로 우리가 믿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과 조사님들께서 본래가 다 부처라고 했으니 우리가 믿어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조금의 의심도 없이 확실히 믿어 버리면 새삼스럽게 무슨 의심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확실하게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부처인가 아니면 중생인가, 혹은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것은 망상인 것입니다. 부처님과 조사님들께서 말씀하셨으니 굳건히 믿고 잠자코 부처인 '나'를 비추어 본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잠잘 묵(默) 비칠 조(照)자 묵조선(默照禪)입니다. 따라서 묵조선 계통은 "지관타좌(只觀打坐)라", 오직 앉으란 말입니다. 오직 단정히 앉아서 마음을 가만히 비추어 보면 신심탈락(身心脫落), 즉 몸과 마음이 딱 빠져 나간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몸과 마음이라는 생각이 다 끊어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 참선의 공덕


우리는 결가부좌를 하고서 한 철 공부합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큰 도움이 될 것인가? 무슨 공덕이 될 것인가? 의심을 할 것입니다. 맨 처음 참선을 시작하면 굉장히 아프기도 하고 괴롭습니다. 참선을 많이 하신 운수납자(雲水衲子)는 다 경험하신 것 아닙니까? 맨 처음 앉으면 이 몸을 조복 받느라고 큰 탈입니다. 조금 덜 먹으면 배가 고프고, 조금 더 먹으면 소화도 안 되고 뱃속에서 콜콜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좋은 환경에서 적당히 먹고 오랫동안 앉아 수행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맑아 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중요한 것은 본래 부처라는 소식을 우리가 딱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보조국사 어록》에도, 규봉(圭峰) 종밀선사(宗密禪師)의《도서(都序)》에도 "본래시불"이라 했고,《육조단경》에서도 본래 부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소식을 믿고 나아가야 공부가 빠른 것입니다. 길을 간다 하더라도 목적지를 분명히 알아야 갈등하거나 헤매지 않지 않습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좀 괴로우면 괴로움 때문에 중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불이라고 하는 목적지가 분명하고 동시에 '나한테도 부처가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면, 설사 괴로움이 좀 있다 하더라도 별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 공부는 우리가 보는 것은 다 헛것이고,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는 것을 관조하는 것입니다. 즉 일체가 오직 마음이란 말입니다. 일체가 모두 마음뿐입니다.《육조단경》에서 혜능스님도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라고 했습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티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물질이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 소식을 분명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본래 물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분석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도 도인들은 물질이라는 것도 다 법성(法性)을 지녔으므로 그대로 부처일 뿐이라고 백 퍼센트 믿었겠습니다만, 지금은 상당히 공부한 분들도 도인이 미처 못 된 분들은 물질은 물질로 보이고 나는 나로 보이고, 너는 너로 보입니다. '본래무일물'이란 것도, 도인들이 우리한테 물질에 집착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하셨거니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분석과학, 이른바 양자역학(量子力學) 같은 현대물리학이 나온 뒤로는 물리학에서도 '본래무일물'임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분석하면 결국은 다 비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원소로 분석하고, 원자로 분석하고, 또 원자를 소립자로 분석하면 그렇습니다. 물리학적인 고찰로 소립자도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의 파동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따라서 현대물리학은 모두가 다 공(空)으로 돌아간다는 제법공 도리를 증명한 것입니다. 고전물리학은 미처 증명하지 못하고 물질은 물질, 마음은 마음, 이렇게 이원론으로 보았으나, 현대물리학은 물질이든 뭐든 일체가 다 비어 있다는 소식을 증명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따라서 현대물리학은 차근차근 우리 불교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현대물리학은 차근차근 우리 불교를 증명해 오고 있습니다. 실존철학이든 뭐든 현대학문은 모두가 다 부처님 법에 가까워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실존철학도 제아무리 연구해 봐도 아직은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는 모릅니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지금 철학도 모르고 물리학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인 반야의 도리를 믿고 알 때는, 그 가운데에 가장 오묘한 철학, 가장 궁극적인 과학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반야의 도리를 믿고 알게 될 때라야 비로소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 즉 백천만겁을 지나도록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 법을 어쩌다가 나 같은 존재가 만났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행복을 되새기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불기 2535년 11월,

동안거 결제중인 스님들께 설하신 소참법문(小參法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