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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33호 성륜사 정기법문

 

                          <제 33 호>

*20001001-성륜사 정기법문 


염불선念佛禪과 진여불성眞如佛性


이 시대를 문화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문화의 시대는 바로 평화의 시대입니다. 어떠한 것이 문화인가? 이런 것을 우리가 알아야 문화의 시대에 우리가 살 수 있는 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다시 회고해 보면 그렇게 처참했던 6.25사변 때 또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남북대결 상황에서 아주 살벌한 분위기 그런데 그런 것이 다 지나갔습니다. 지나가고 그야말로 남북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돼있는 이때에 이렇게 우리가 청명한 가을을 맞이해서 정말로 축복된 마음입니다.

이 문화의 시대에 있어서 문화가 어떠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현대 문화의 특성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우리가 대체로 알아야 우리 스스로도 거기에 역할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또 우리 스스로도 거기에 따라서 행복을 더욱더 많이 받을 수가 있지가 않겠습니까.

 

헌대 이 문화의 시대 현대문화의 시대의 특징은 이것은 좀 어려운 술어로 하면 그 뉴에이지new age시대, 이런 것이 앞으로 자주 말씀이 될 것입니다. 하기 때문에 잘 기억해 두십시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른바 새로운 시대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뉴에이지라는 조류潮流가 서구지방에서는 이미 싹터서 흘러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 서양문명西洋文明, 서양문명이 한계에 이르렀단 말입니다.

서양문명의 특색은 모두 이렇게 나누어서 보지 않습니까. 분석적이고 또는 유물 과학적이고 말입니다. 사람과 자연도 나누어서 보고, 자연 이것은 우리 사람이 마음대로 점유하고 이용해서 지배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단 말입니다.

또는 일체 만상은 모두가 다 그 자연과학적인 유물론적唯物論的으로 관찰을 한단 말입니다. 사람 몸뚱이도 하나의 물질이다. 자연도 하나의 물질이 아닌가.

 

그래서 모든 문화가 거기다 초점을 맞춰서 지내 왔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내온 서양문명이, 서양문명의 스스로의 내부에서 스스로 안에서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아무리 애쓰고 해봐야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그 양 대전을 치루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까. 또 자연 파괴는 더욱 이루 말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서양문명의 그 2분법적인 인간과 자연과 나누고 또 하느님과 사람과 둘로 보고 이런 사상은 한정 돼서 도저히 더 발전 될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그 서구사상 서양사상을 비판한 위에 동양사상을 거기에 접목을 시킨단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를 전체적으로 그 통괄적으로 보는 그런 사조가 이른바 뉴에이지 그런 새로운 시대의 사고방식입니다.

 

또 한 가지는 신과학시대新科學時代라, 새로울 신자, 그러면 오래 구자 구과학시대舊科學時代는 어떤 것인가? 구과학시대는 가사 뉴톤이나 그런 분들은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모든 존재를 유물론唯物論적인 기계론機械論으로 본단 말입니다.

자연 이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우리 몸뚱이도 역시 하나의 세포의 집합체인 것이지 몸뚱이가 무슨 생명이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른바 구과학시대입니다.

그러나 신과학시대 새로울 신자, 새로운 과학시대 이것이 이른바 현대의 뉴에이지 시대에 걸맞은 그런 과학시대인데 이것은 어떤 것인가 하면 모든 물질을 파괴하고 파괴하고 또 분석하고 분석해서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결국은 원자가 남곤 한단 말입니다. 원자가 남고 소립자가 되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주라는 것은 하나의 에너지energy의 그 장에 불과 하다.

 

가령 중력장重力場 또는 전자기장電磁氣場 약력장弱力場 강력장强力場, 우주라는 것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모두가 다  에너지의 하나의 장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주라는 것은 결국은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하나의 에너지라는 우주의 기가 어떻게 운동하는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이런 여하에 따라서 그런 차별이 있는 것이지 본래는 그것은 하나다.

그러나 좋든 굳든 간에 새로운 과학이라 하는 것은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딱 통합시킨단 말입니다.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하여튼 과학적으로 아무리 분석해 놓고 본다 하더라도 내내야 존재라는 것은 모두가 다 하나의 전자가 되고 양자가 되고 또는 소립자가 되고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단계에서는 결국은 모두가 다 하나가 될 수밖에는 없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새로운 과학시대, 신과학시대입니다. 구 과학시대는 나누어서 보고 둘로 보고 셋으로 보고 하는 것인데 새로운 과학 시대라 하는 것은 아까 말씀마따나 현대과학의 그런 비약적인 발전에 따라서 모든 존재를 하나의 에너지로 다 귀일歸一 시켰단 말입니다.

다만 현대과학이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에너지라는 것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우주의 기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모른단 말입니다.

 

이런데 있어서 우리 불교인들은 우리 신앙을 조금 더 깊이 점검을 해 봐야 합니다. 내가 믿는 신앙이 지금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말입니다. 이런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는 우리 불교만이 다다. 우리 불교만이 옳다. 이렇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지금 언어가 4천종 이상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어 또는 일본어 중국어 그런 세계적인 나라에서 언어의 종류가 4천종이나 있다고 하니까.  우리는 부처님 이렇게 말한다 하더라도 또 다른 언어에서는 다른 말을 쓰는 나라에서는 부처님이라는 뜻을 다르게 표현 할 수가 있겠지요.

따라서 부처님이라는 뜻을 꼭 부처님이다. 이렇게만 해야 할 것인가. 다르게 말하면 진리가 아니다. 이럴 수가 없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이 새로운 시대에는 정말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서 모든, 진리라 하는 것은 본래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떻게 표현이 되던 간에 가령 하나님이라고 했던 또는 알라(신이)라고 했던 어떻게 표현 되던 간에 그 뜻이, 개념 내용이 그 하나의 생명, 하나의 우주적인 생명, 하나의 생명을 의미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 스스로 우리가 믿는 종교에 관한 그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체계적인 지식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지금은 그렁저렁 살 때가 아닙니다. 확고한 체계적인 지식이 없으면 자기 신앙에 대한 신념도 못 갖는단 말입니다. 신념을 못가지면 그때는 그렁저렁 믿다 말겠지요.

내 신앙은 이럴 수밖에는 없다. 내 온 혼신의 생명을 바치고서 이렇게만 믿어야 되겠다. 이렇게 확신이 서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봐 같이 이 뉴에이지 시대 이른바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그 서양문명을 비판도 하고, 비판하면 또 우리가 비판한 뒤에 새롭게 다른 대안이 있어야 되겠지요.

아무런 대안도 없이 비판만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렇게 해서 새로운 문명을 우리가 인제 구축한다고 생각을 했을 때는 이 동양문명 쪽에다가 관심을 안 둘 수가 없단 말입니다.

동양문명 쪽에다가 관심을 둔다고 생각할 때는 동양문명의 대표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 우리 불교 아닙니까. 불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안 둘 수가 없습니다.

 

다행이도 우리 부처님 법은 모두를 나누어서 보지를 안는단 말입니다.

일체존재가 일미평등一味平等이라, 일체 존재를 하나의 평등平等 무차별無差別의 하나의 생명자체로 봅니다.

우리는 불법佛法 그러면 연기법緣起法이라, 불법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고 인연 따라서 없어지고 하는 연기법이라, 이렇게 보통은 믿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만 믿어버리면 그런 연기법은 모든 것을 다 포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같은 인연법도 소승小乘에 있어서는 이것과 저것과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서 무엇이 이루어지고 인연이 다 하면 흩어진다. 인연생因緣生 인연멸因緣滅이라, 인연이 있으면 만나고 인연이 다하면 헤어진다. 우리가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현상적인 의미에서 인연이 있다 없다하는 이렇게만 믿는 이것은 소승적 인연법 해석입니다.

 

대승적大乘的인 인연법의 해석은 어떤 것인가. 우리 불자님들 대승적인 인연법 해석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대승적인 인연법 해석 이것은 마명보살馬鳴菩薩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

마명보살은 서기 1세기경 때 분입니다. 서기 1세기경 분인데 마명보살이 내신 책 가운데서 훌륭한 책이 대승기신론이라, 이러날 기자, 믿을 신자,  대승의 믿음을 일으키는 그런 책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대승불교 하면 마명스님을  대승불교의 할아버지라고 합니다. 용수보살은 대승불교의 아버지라고 그렇게 말하고, 그런데 대승기신론 가운데서 그 대승적인, 소승과 대승의 한계는 대체로 아시지 않습니까.

 

소승은 아까도 말씀마따나 이렇게 저렇게 구분해서 보기도 하고 또는 차원이 낮은 정도에서 보는 그런 가르침이나, 대승적인 가르침은 모두를 다 통괄을 합니다. 모두를 다 하나의 생명으로 본단 말입니다. 이른바 우주 에너지 우주 생명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 대승적인 인연법은 무엇인가 하면 진여연기眞如緣起라, 그 불자님들 앞으로 두고두고 이런 말씀이 불교에서나 또는 다른 스님네들 설법에서나 많이 나올 것입니다.

진여연기라, 진여眞如란 말은 참 진자, 같을 여자, 우주의 진리眞理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진리라고 말하면 진리 따로 있고 부처님 따로 있고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기가 쉽겠지요. 그러나 불교에 있어서는 진리가 이치로 해서 따로 있고 또 생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그대로 바로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인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바로 그 우주의 도리로 우리가 표현 할 때는 진여眞如, 참 진자, 같을 여자,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고,

또 그 자리가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우주 생명이기 때문에 그때는 부처 불자, 성품 성자, 진여불성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기법도 진여연기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주라는 것은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여 불성만 우주에 항시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영원히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통해서 진여불성이 항시 존재하고 있습니다.

대승경전의 뜻은 다 그렇습니다. 화엄경華嚴經이나 법화경法華經이나 열반경涅槃經이나 다 그런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언제나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또는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언제나 우주에 그대로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믿어야 대승입니다.

아, 내가 대승이다. 아무리 큰소리 해본대자 자기 그 믿는 내용이 대승적이지 않으면 대승을 믿는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봐 같이 그 진여불성 우주를 하나의 이치로 이야기 할 때는 논리로 이야기 할 때는 진여라고 하는 것이고,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 성품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진여불성 그런단 말입니다.

따라서 진여연기라, 진여연기는 무엇인고 하면 진여불성이 스스로의 공덕功德 따라서 스스로의 에너지 따라서 우주 만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산이요 냇이요 별이요 우리 인간이요 모두가 다 그 근본적인 근원적인 의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진여불성이라는 우주의 순수생명純粹生命으로 부터서 나온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을 떠나서는 일체 존재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주의 순수생명이 일체 존재가 돼있어 놓아서 비록 태양이 되었던 진여불성에서 태양이 나오든 또는 다른 별이 나오든 또는 사람이 나오든 내내야 진여불성은 그대로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이것은 하나의 물질이라든가 시간 공간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그 때는 생사를 초월한단 말입니다.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항시 우주에 그대로 있는 것인데 그 자리에서 이루어진 이 만상이라 하는 것도 역시 사람으로 진여불성이 나오든 산으로 진여불성이 나오든 진여불성 자리는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존재도 역시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나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도 내 가운데는 다른 것은 없이, 무슨 심장이 있고 무엇이 있고 인제 폐가 있고 하겠지요.

그런 것은 물적으로 물질화된 그런 자리에서 우리 인간이 다 더러운 것이지 근원적인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비록 나한테 심장이 있고 별것 다 있다하더라도  진여불성으로 돼 있단 말입니다. 심장도 피도 신경도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쉽게 성자가 보면 다 부처로 보이고 우리 범부가 보면 그때는 범부로 보이고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말씀도 우주 모든 존재가 진여불성으로 돼서 진여불성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변화가 된다 하더라도 진여불성 자리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앞서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우주의 본래 근원적인 생명입니다.

우리가 인간 존재로 해서 이렇게 저렇게 살지만은 다 그 무궁한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을 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여기 나오신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 나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행복 가운데도 가장 무궁한 행복, 그 행복도 시원찮은 것은 있다 없어지고 아, 행복을 추구해 봐도 다른 것이 생겨버리고 그럴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어느 때까지도 내 생명이 금생 다 할 때까지 또는 죽은 뒤에도 영원히 변치 않는 그런 행복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무엇이고 하면 우리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될 때만 그러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오! 주여!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 같은 분도 그 마음을 닦아서 하나님하고 하나가 딱 됐단 말입니다. 하나가 딱 됐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느끼고 있는 하나님한테 들어 있는 모든 속성을 모든 공덕을 다 스스로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기적도 부릴 수가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부활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불교도 그래요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공부를 바로 해서 그 자기라 하는 그 보잘것없는 자기라하는 개성만 초월하면 어느 누구나가 다 석가모니 부처님 같이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온전히 우리가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된다고 생각할 때는 일체 신통묘지神通妙智를 다 부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윤회輪廻를 초월한다. 우리가 생사윤회를 하지 않고서 윤회를 벗어난다. 이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윤회를 벗어나는 것은 그 어떤 의미인 것인가. 우리 중생이 개인적인 나요 너요 하는 개인적인, 진여불성을 떠나서 진여불성을 외면해서 오직 자기 애고 자기 이기적인 자기 생활만 하는, 그런데서 우리가 벗어나서 영원적인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될 때에만 그때는 우리가 윤회를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몇 천생 몇 만생을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윤회를 더 하고 싶어도 인제 할 수가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며는 우리 마음의 본 성품자리 우리 생명의 본래자리가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아무땐가는 진여불성이 된단 말입니다.

불교에서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일체중생개당작불一切衆生皆當作佛이라, 모든 중생은 본래로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다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응당 부처가 되는 것인데 우리가 빨리 못 되면, 우리 인생도 좋은 때는 좋지만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어떤 경우도 떠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생로병사를 위주로 한,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이런 것을 위주로 한 모든 인생고人生苦, 그 인생고를 우리가 떠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 인생고를 떠나서 우리가 인간의 윤회, 윤회의 그런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가 본래 생명자리인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 내내야 우리 불교에서 말 하는 여러 가지 팔정도八正道라든가 이른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라든가 다 그런 가르침입니다. 모두가 다 자기라는 그런 그  보잘것없는 자기라는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난 척 해도 역시 얼마만치 우리 생명존재가 진여불성하고 가까이 됐는가. 거기에 따라서 인간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본래면목자리 진여불성하고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때는 별 볼 것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공양주를 지내나 무엇을 하나 어디 가서 어떠한 직책을 가졌던 간에 그의 마음이 본래 생명의 고향인 진여불성하고 가까이 있어 놓으면 그때는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여불성하고 빨리 가까워 질 것인가? 그것이 인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이 그 화두를 들고 참선한다고 애를 많이 쓰고 우리 스님네도 여름이나 겨울이나 3개월 동안 그냥 그 선방에서 화두나  염불을 들고서 부처님의 명호를 들고서 공부를 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다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럽니다.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딱 돼버려야 비로소 그 때는 성인聖人이란 말입니다. 그래야 견성오도見性悟道라, 견성見性은 볼 견자, 성품 성자,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진여불성을 우리가 인제 그대로 훤히 본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을 봐버려야 그래야 그때는 오도悟道라, 깨달을 오자, 길 도자, 우주의 참다운 진리를 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되는 그런 작업이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고구考究히 생각해보고 또 여러 해 동안 경험도 해 보았습니다만 저는 제일 쉽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우리가 진여불성하고 다른 존재 같으면 모르거니와 내내야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다 진여불성으로 돼있단 말입니다. 또는 천지 우주가 우리가 바른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진여불성뿐이란 말입니다. 진여불성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제한制限된 안목眼目으로 보니까 미운사람 고운사람 산이요 냇이요 그러는 것이지 우리가 근원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든 것이 다 진여불성 뿐이란 말입니다.

또 우리가 진여불성이 안되고 그대로 산다면 모르거니와 어느 땐가는 결국은 진여불성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사는 인간적 존재의 의의가 무엇인가?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존재는 우리가 우주적인 뜻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 되려는 하나의 이것이 수련장修鍊場이란 말입니다. 인생은 그렁저렁 향락하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본래 고향자리로 가기위한 하나의 수행도량修行道場이란 말입니다.

우리한테 가장 행복幸福한 생각은 어떤 생각인가?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생각은 역시 한계限界가 있습니다. 한계가 있으나 부처님을 지향하는 부처님 생각은 한계가 없단 말입니다.  깊이하면 할수록 더욱더 깊어지고 더욱더 재미도 있어지고 또는 집안 운수도 훨썩 좋아지고 말입니다. 아, 어느 사람들은 그 재미는 있을 란가 모르겠지만 집안 운수 하고는 상관이 없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안된 것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자리를 차근차근 충만하게 된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것도 거기에 다 곁들여 옵니다.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자기 마음 진여불성은 원래 늙음이나 젊음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마음은 항시 젊단 말입니다.

인연因緣이 다해서 금생에 우리 몸뚱이가 그대로 다 한계가 되어가지고서 몸뚱이를 버리고 간다 하더라도 진여불성이라 하는 생명자체는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죽는다 하더라도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순교도 하고 십자가에 자기 몸도 받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 어디에다 자기 몸을 버린다 하더라도, 자기 몸을 버릴 수 있는,  자기 이 육체적인 이 몸을 버릴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지면 그런 마음 자체가 벌써 우리 마음이 그만만치 진여불성하고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 과거 전생담前生談 보셨지요. 더러는 그 굶주린 범한테 자기 몸을 몽땅 바치기도 하고, 또는 중생을 다 건지기 위해서 저 큰 바다 속에 들어가서 그 용궁龍宮에서 마니보주摩尼寶珠를 얻기 위해서 여의주如意珠를 얻기 위해서 바닷물을 몇 백 년 걸려서 다 퍼내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 사람 손으로 해서 바닷물을 다 퍼내겠습니까. 그나 그 정성精誠이 하도 사무치니까. 그때는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보고서 무수한 천상사람들을 대리고 와서 물을 퍼내니까 용왕이 두려워서 마니보주를 내 놓았단 말입니다.

 

우리정성이 사무치면 다 통하는 것입니다. 산도 진여불성으로 돼있고 산에 들어있는 진여불성 기운이 즉 말하자면 산신山神이란 말입니다. 또 물에 들어있는 진여불성 기운은 용왕龍王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같은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사무치면 부처님 사상 진여불성에 사무치면 다 통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 성륜사聖輪寺 절이 있습니다만 여기 사는 우리 스님네들이나 관계있는 신도님들이 정말로 신심信心이 깊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불사佛事가 모두 문제가 될 것이 없단 말입니다. 산신이 도와주고 하늘이 도와주고 다 도와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사하기도 우리가 얼마만치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하느냐 그것에 매여 있는 것이지 되고 못되고 하는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하나로 딱 모아져야 그래야 이제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데 좀체 우리 마음이 하나로 다 잘 모아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 생활해야 되고 또 무엇해야 되고 또 지금까지 어려서 부터서 여러 가지 버릇을 많이 붙여 와 놓아서 그 버릇 가운데 모든 중생의 그런 헤아림 가운데 우리가 이제 공부를 하려고 들면 여간 맘으로 해서는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쉬운 방법을 골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장 쉬운 방법이고 부처님께서 말씀도 제일 많이 하셨고 또 부처님 경전 가운데 제일 많이 나와 있는 부처님 되는 공부가 염불念佛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우리스님네나 일반신도들이나 염불하면 아, 염불 그것은 너무나 쉬운 것이니까 그것은 방편方便공부다. 그 방편공부를 부처님께서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오! 주여! 하느님이란 그 말이 방편공부라 해서 않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주 하느님을 부르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는 기독교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기독교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와 똑 같이 우리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인들이 부처님을 생각 않고 부처님을 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어떻게 불교가 되겠습니까.

 

다른 여러 가지 공부가 많이 있지만 내내야 결국은 우리가 부처님 찾는 공부란 말입니다. 부처님이 어디가 있는 것인가. 아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린 봐와 같이 진여불성은 바로 부처님 아닙니까. 진여불성이 어디에나 있듯이 부처님은 어디에나 언제나 존재합니다.

다만 존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성품공덕性品功德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아까 우리가 입정入定할 때에 입정은 내내야 명상冥想에 잠길 때 아닙니까. 우리가 명상할 때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공부를 하셨지요. 그런데 보리방편문 공부 할 때도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라, 삼신三身을 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해설이 돼있는 것을 들었단 말입니다.

그 부처님이라 하는 그 공덕 가운데는 우리가 가장 간추리면 법신․보신․화신이란 삼신으로 그렇게 집약이 됩니다. 그러나 또 부연시킨다고 생각할 때는 한도 끝도 없는 무한공덕無限功德이란 말입니다. 부처님한테 들어있는 그 공덕은 무한공덕입니다.

 

헌데 그 무한공덕인 부처님이, 우리 몸도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다 진여불성으로 돼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몸은 이것은 자각적自覺的으로 우리가 구할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자각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선택도 하고 또는 분별도 하고 해가지고서 보다 더 우리가 결단을 내려야할 것인데 우리 몸 이것은 그냥 세포로 돼버렸기 때문에 이것은 자각증상自覺症狀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의식이라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생명을 그대로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겉에 의식은 다른 여러 가지 그런 복잡한 걸로 해서 얼키고 설키고 가려있을 뿐인 것이지 우리 의식 가운데는 부처님이라 하는 생명 자체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나무를 본다고 생각할 때에 나무줄기나 이파리나 그런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뿌리는 안보이니까 어린 사람들은 그런 뿌리 같은 것은 잘 이해를 못하는 어린 사람들은 그냥 나무는 줄기나 이파리만 있다고 생각하고 뿌리는 무시한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도 마음의 근본, 우리 마음의 근본은 바로 진여불성자리 바로 부처님인데 우리 스스로는 그 과거 전생에 업장業障을 짓고  금생에 나와서도 이렇게 저렇게 업을 지어놓아서 업을 지어놓은 그것만이 결국은 자기 마음이고 말입니다.

 

자기 마음은 부처님과는 상관이 없다. 이렇게 우리가 딱 갈라서 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그 근본자리 우리 마음의 바탕자리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 공부할 때도 그렇게 우리 인식을 그렇게 해야 됩니다. 비록 내가 업장에 가려서 감득은 못한다 하더라도 내 마음자리는 바로 부처님이다. 아까 말씀한 봐와 같이 바로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인제 염불을 해야 그래야 우리 공부가 속 빠르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우리가 그 본 체성을 안 떠나고 그렇게 해야 공부가 속 빠른 것이지 그냥 이름으로만 부처님을 아, 오! 주여! 부르는 그런 식으로 부른다든가 그래버리면 그것이 공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공덕이 훨썩 적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가 참선과 염불과 아울러서 하는 그런 공부를 하려고 생각할 때는 이른바 어려운 말로하면 선정일치禪淨一致라, 참선과 염불과 하나란 말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염불선念佛禪이라,

우리가 기왕이면 또 참선을 같이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참선 그러면 사람들이 높다고 생각하고 그냥 염불 하면 낮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왕이면 높은 것 낮은 것 다 합해서 함께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은 그 염불선을 하시도록 하십시오. 헌데 염불선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봐와 같이 그 본래의 자리 본래 근원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그런 자리를 항시 생각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가령 우리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인다 하더라도 지금 내 마음은 부처님하고 우주에 충만해있는 진여불성하고 절대로 둘이 아니다. 이렇게 항시 생각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阿彌陀佛이란 뜻도 그런 뜻입니다. 그냥 덮어 놓고 무슨 이름을 가져다 붙인 것이 아니라, 그 아미타불이라는 뜻이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하나의 생명의 빛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수명이 무량이라, 그 생명자체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목숨도 끝도 갓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는 지혜공덕智慧功德이 무량하기 때문에 그때는 지혜광불智慧光佛이라, 지혜광명이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그와 같이 광명으로 한도 끝도 없고 지혜도 한도 끝도 없고 또는 생명도 한도 끝도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뜻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이름을 외운다 하더라도 그런 뜻을 속으로 되새기고 하는 것과 그냥 덮어놓고 입으로 외우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이름 자체에 가서 부사의不思議한 공덕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름 자체에 가서 있다 하더라도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그냥 그 보통염불 누구나가 하는 보통염불을 할 때는 소리만 내고 해도 무방하고 또 그런대로 공덕이 있는 것이지만 적어도 염불선念佛禪을 내가 하고 싶다.

이런 때는 방금 말씀드린 봐 같이 그 우리 마음이 그때그때 염불을 할 때마다 우리 마음자리가 근본자리를 우리가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마음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을 할 것인가. 그것이 그 다행이도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에 여실히 나와 있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쓰는 이런 좁은 마음이 아니라 그 ‘마음은 허공과 같을 새’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끝도 갓도 없이 우주와 더불어서 똑 같은 것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그 마음을 열어라, 마음을 열어라,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본래 닫혀있어 가지고서 문 같이 폐쇄가 돼있다고 한다면 열라야 열수가 없는 문제 아닙니까. 본래 열려있는 것인데 한도 끝도 없이 진여불성으로,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것인데, 우리 중생이 스스로 지금 딱 가두어 버렸단 말입니다.

중생 마음이 좁아서 스스로 지금 폐쇄를 시켜 놓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의식적意識的으로 ‘내 마음은 우주와 더불어서 끝도 갓도 없다’ 또 ‘내 마음 가운데는 모든 그런 지혜공덕智慧功德이 다 원만히 갖추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서 염불을 하면 그것이 바로 염불선念佛禪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참다운 염불이 됩니다.

 

그 서산대사西山大師 염불 게송에도 이런 말씀이 있어요. 심즉연불경계心則緣佛境界라, 우리 마음은 심즉연불경계라, 우리 마음은  부처님 경계에다 마음을 딱 두고서 그 말입니다. 심즉연불경계라, 우리 마음을 부처님 경계에다 두고서, 구즉칭명불호口則稱名佛號이라, 우리 입은 그때는 부처님 이름을 분명히 외운단 말입니다. 그렇게 염불을 해야 그래야 참다운 염불인 것이고 이른바 염불선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가장 쉬운 우리 성불成佛의 법으로 해서 가장 쉬운 그런 가르침이 분명히 염불선인데 염불 할 때도 여러분들께서도 그 하는 방식을 알고서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본래의 자리 본래 근원적인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염불을 하셔야 그래야 참다운 염불이 되는 동시에 염불참선念佛參禪 입니다.


지금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운 현실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 놓아서 어느 때는 참 그야말로 몸도 몹쓸 병이 와서 낫기 어려울 때도 있고 또는 가지가지의 그런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까 누누이 말씀드린 봐와 같이 그 부처님 자리라는 것은 진여불성 자리는 그 만능萬能의 자리입니다. 만능의 자리인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그냥 보통의 그렁저렁한 자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일체존재 과학이요 철학이고 무엇이고 하여튼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산은 그대로 산이요 물은 그대로 물이요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현상적인 모양뿐인 것이고 산이나 냇이나 다이아몬드나 모두가 똑 같이 생명자체의 진여불성 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우주에너지 우주에 충만한 하나의 기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떠한 경우에 아무리 무엇이 어렵고 막히고 한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다 그 만능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집중하고, 집중하는 방법이 가장 쉬운 방법이 염불하는 방법 아닙니까.

집중하고 우리 마음을 거기다가 두고서 염불을 한다고 생각 할 때에 그러니까 우리가 아까도 말씀 했습니다만 우리 지속적으로 앞생각 뒷생각 가운데 다른 생각을 석지 말고서 지속적으로 해야 그래야 인제 불성하고 가까워집니다.

 

진여불성하고 가까워져야 그래야 그때는 진여불성에서 진여불성에 들어있는 무한한 힘이 우리한테 오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머리가 아프고 어디가 아프고 한다고 합시다. 그럴 때도 우선 약을 먹으면 좋겠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근원적인 방법은 역시 우리 마음으로 우리 마음의 개인적인 욕망을 떠나서 진여불성을 간절히 생각하면서 염불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진여불성은 무한의 공덕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스르르 다 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약을 먹는다 하더라도 그때그때 몸이 아프면 당연히 약을 또 먹어야 되겠지요. 그런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으로 그와 같이 만능의 자리인 부처님한테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서 약을 먹는다고 생각할 때는 약 효능이 그야말로 참 그때는 가속도로 훨썩 더 몇 배 올라가는 것입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시험 보는 문제라든가 여러 가지 어떠한 경우에 선거문제라든가 모든 문제도 부처님자리 진여불성자리는 그런 만공덕의 자리이기 때문에 거기다 마음 두고서 우리 마음을 통일을 시킨단 말입니다. 집중적으로 우리가 염불을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가슴도 시원하고 또는 눈도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하고 말입니다. 그래가지고서 드디어는 우리가 앉아서 부처님 세계를 훤히 불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을 하십시오.

이 우주라는 것은 모든 신비神秘로 충만해 있습니다. 극락세계에 우리가 애쓰고 걸어서 간다거나 무엇을 타고 간다거나 그렇게 안 간다 하더라도 이 자리에 앉아서 우리 마음이 사무치면 우리 마음이 바로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극락세계極樂世界라는 것도 진여불성을 그대로 깨달은 성자聖者들이 사는 세계입니다. 우리 마음인 본래면목本來面目인 그 불성을 깨달은 성자가 사는 세계가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그 별것이 아닌 우리 그 이기심利己心, 이기심을 우리가 극복을 하고서 그 순결한 그런 마음으로 해서 오로지 부처님을 생각하고 우리가 나아간다고 생각할 때는 그 맘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깊은 삼매三昧에 듭니다.

 

삼매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마음이 오로지 부처님만 생각하는 그런 명상이 삼매란 말입니다. 삼매에 든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앉아서 극락세계를 훤히 본단 말입니다.

또는 금생에 인연이 다 해서 우리 몸을 두고 간다 하더라도 몸 이것은 어차피 세포니까 그야말로 참 세월이 흐르면 없어져야 되겠지요. 따라서 몸을 두고 간다 하더라도 그냥 그대로 죽는다는 생각이 없이 산 그대로 훤히 밝은 그 마음 그대로 극락세계에 바로 간단 말입니다.

그렇게 불교는 그야말로 희망과 행복과 그 모든 만능과 그런 가능성에 충만한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나 불교나 이슬람교나 다 근원적인 목적은 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처님 가르침이 가장 확실하고 가장 체계가 서고 말입니다.

또는 같은 성자도 또 높은 성자도 있고 미처, 이른바 불교말로하면 구경지究竟地라, 다 끄트머리까지 완전히 통달한 성자가 있고 미처 통달하지 못한 성자가 있습니다.

헌데 부처님 가르침은 끄트머리까지 그 진여불성을 조금도 흠절이 없이 원만무결하게 깨달은 그런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그런 부처님 가르침으로 해서 우리 마음을 깨달아서 우리 마음이 성자의 자리 불교말로하면 열반涅槃자리 말입니다. 성자의 자리로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될 때 그래서 우리 스스로 성자가 될 때 그 이상 큰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경에 보면 열반제일락涅槃第一樂이라, 우리가 안락스럽고 행복스럽고 여러 가지로 차이가 만이 있지만 그 우리 마음을 스스로 깨달아서 우리 스스로  성자가 되는 것이 가장 최상最上의 행복幸福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가 부처가 되는 길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절대로 어려운 공부가 아닙니다. 한 시간 하면 한 시간 한만치 두 시간 하면 두 시간 한만치 우리 행복은 더욱더 그때는 가속도로 가중되어 갑니다.

그 우리가 삼매에 들어서 아직 성자는 미처 못 된다 하더라도 그동안에 우리 스스로가 받는, 우리가 체험體驗해서 받는 경험이라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러운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 하늘에서는 그렇게 만다라화曼茶羅華 마하만다라화摩訶曼茶羅華 그런 하늘 꽃이 만발하고 말입니다. 그런 꽃의 꽃잎이 무수히 떨어진단 말입니다.

 

또는 영원적인 그 우주의 멜로디 한도 끝도 없는 그야말로 참 그 자기 생명을 그냥 온전히 다 순화시킬 수 있는 그런 멜로디가 항시 귀에 들려온단 말입니다.

삼매三昧에 들면 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아까도 말씀드린 봐 같이 우리가 드디어는 장엄莊嚴으로 빛나는, 훤히 빛나는 광명세계光明世界인 극락세계를 우리가 체험하는 것입니다.

산체로 극락세계를 체험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럽겠습니까.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같은 경을 보면 반주삼매라는 삼매에 들어서 극락세계를 훤히 체험하고서 행복을 느끼는 그런 자리가 있습니다.

 

금생에 나와서 대체 다른 것이 얼마나 귀하건대 그런 그 극락세계를 금생에 우리가 산체로 볼 수 있는 그런 행복을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 명호名號를 외우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르십시오. 저는 그 우리 불교에서 가장 섭섭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근래 우리 불교에서 그 염불 공부를 너무나 소홀히 생각했단 말입니다.

불교인들이 본래 내가 부처이고 부처가 돼야 할 것인데 그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를 부르는 것이 염불인데 어떻게 부처를 부르는 염불이라는 것을 소홀히 생각할 것인가.

그래서 화두들고 공부하면 그때는 아주 훌륭한 공부라고 생각하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하면 근기가 낮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폄하貶下를 시켰단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지금은 완전히 가셔야 됩니다.

 

그 세계 종교가 지금 한 마당에서 서로 피차 비교할 때란 말입니다. 이럴 때에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서구문화를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불교의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

이른바 뉴에이지 시대, 새로운 문명시대, 신 과학시대, 이런 때는 우리 부처님 가르침이 항시 중앙의 핵심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새로운 문화가 아무리 발달된다 하더라도 내내야 부처님 가운데서 그 것이 더 빛나고 덜 빛나고 할 뿐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근원적인 공부 근원적인 행복 또는 가장 깊은 철학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궁극적인 종교 또 시대가 요구하는 종교가 불교 아니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제일 쉽고 행복스러운 것이 이른바 염불 공부입니다. 염불공부를 부지런히 하셔서 꼭 금생에,

 

한 생각에 우리가 넘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로 부처기 때문에 정말로 사무치면 오랜 세월이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그냥 우리가 초월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금생에 꼭 부처님 되셔서 윤회를 초월하고 말입니다. 꼭 극락세계를 훤히 보시면서 우리 한계 있는 인간을 우리가 마치도록 그렇게 하십시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20001001-성륜사정기법회-청화대종사설법

*20001001-정안 이성도 촬영

*20050812-DVD작업-본정 김영동

*20070907-녹취워드작성-정리-본정 김영동


* 본 글은 동영상 자막 작업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정리한 법문입니다.*





<본문과 관련된 큰스님 친필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