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호>
19920908-대구불교 교육원초청 설법
<마음의 고향 9집에서 인용>
현대불교現代佛敎와 참선參禪
부처님 법法은 본 성품性稟으로 말하면 자취도 없고 말도 끊어지고 어떻게 헤아릴 수가 없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인연因緣에 따른 상대적相對的인 차원에서는 가지가지의 그런 정도에 따라서 높은 법문法門 낮은 법문 차별이 있습니다.
그것을 법화경法華經 말씀으로 옮기면 법설주法說周라, 법설설법法說說法은 조금도 방편方便을 거기에 곁들이지 않고서 실상實相 그대로 법성法性 그대로 표현한 법문이 법설설법입니다.
그 다음에는 비유주譬喩周라, 법설설법으로는 일반대중이 다 알아 듣을 수가 없으므로 비유담譬喩談으로해서 하신 법문이 비유설법譬喩說法입니다.
그 다음에는 비유담도 못 알아듣고, 공부가 별로 안 된 소승小乘 근기根氣,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인연주因緣周 설법이라, 과거 전생의 인연이라든가 또는 금생에 자기가 받은바 그러한 인연이라든가, 모두 인연을 밝혀서하신 법문이 인연설법因緣說法입니다.
오늘 산승山僧은 너무나 분수에 넘치는 원장스님의 소개 말씀을 받아서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또 정성어린 꽃다발을 받아서 감사하는 합장合掌을 드립니다. 그래서 지금 제 마음도 조금은 불안스럽습니다. 제가 어떻게 잘 보답을 해서 정말로 의의意義있는 유익한 말씀을 해드려야 할 것인데, 저는 그러한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서 제 마음은 조금은 불안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고도 산업사회産業社會, 이러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복잡다단複雜多端해서 모든 조직이 많이 생깁니다. 따라서 가면은 갈수록 많은 조직체, 또는 구성적으로 보면 보다 규율적規律的인 그런 조직체, 이러한데 우리 현대인들은 함몰되어 있는 딱한 상황狀況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한시도 편안할 때가 없습니다.
기계문명機械文明도 가면 갈수록 그 정밀도精密度가 더 깊어가고, 저 같은 구닥다리는 사실 그런 현대의 정밀문명精密文明을 다 향수享受할 수 있는 지식도 없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우리는 그런 불안한 상황을 이기기가 곤란스럽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빗길에 왔습니다만 물안개가 끼어서 앞의 시계視界도 불투명하고 또 이미 지나온 그 뒷쪽도 어두어서 잘 안보인단 말입니다. 지금 우리들 앞에는 긴 다리가 하나 놓여 있는데, 그 다리의 뒷 끝도 안보이고, 지금 나가고 있는 앞도 안보이고, 이렇다고 보면 굉장히 우리 마음이 불안스러울 것입니다. 우리 사바세계 중생들은 지금 그와 똑 같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지금 어데로 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시초에 떠나온 곳은 어디인가? 이러한 것을 우리는 지금 확실히 모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일체 현상계現象界라 하는 것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내가 아는 지식知識은 확실하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하실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중생이 알고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것이고, 엄격히 말씀드리면 어떠한 학자學者라 하더라도 제아무리 정밀한 물리학자라 하더라도 머리카락 한개도 확실히는 모르는 것입니다.
아시는 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라. 전자나 중성자나 양성자나 그런 차원의 그런 것은 모든 물질의 근본적인 하나의 입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확실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러한 것도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있는 바와 같이 가사 조그마한 소립자의 위치를 측정하려고 하면 운동속도를 알 수가 없고 또 진동하는 운동속도를 측정하려고 하면 위치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불확실한 것들 즉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나 그들 위치는 어떤 것이고 또 운동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확실히 모르는 그러한 것들이 모여서 모든 물질의 원소인 산소나 수소나 그러한 것이 되었습니다. 또 그런 불확실한 원소들이 결합 되어서 이와 같이 세포가 되고 우리 몸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부처님 명호名號 가운데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라는 명호가 있습니다. 감로甘露라는 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맛 가운데서 가장 좋은 최상의 맛이 감로미甘露味 아니겠습니까. 감투의 맛도 있을 것이고 또는 물질의 맛도 있을 것이고 음식의 맛 등 가지가지의 맛이 있지만 그러한 것은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 맛입니다. 참다운 맛은 감로의 맛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감로의 맛을 모르면 우리 참다운 자유自由와 참다운 행복幸福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째서 그러는 것인가? 그것은 감로의 맛을 모르면 우리한테 칭칭 감겨 있는 구속拘束을 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풀어버리는 참다운 경계, 참다운 일체존재의 근본성품, 그런 자리를 완벽하니 깨닫고, 우리 중생들한테 깨닫는 감로수甘露水 같은 법문을 주시는 그 분이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많은 그러한 명호 가운데서 감로왕여래라 하는 그런 명호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러한 감로수甘露水 같은 맛을 얻을 것인가? 감로수는 늙지 않고 죽지 않고 또는 이별도 없고 모든 지혜智慧 자비慈悲 일체능력一切能力이 온전히 완전하게 갖춘 맛이 감로 맛입니다.
감로 맛을 어떻게 해서 알 것인가? 감로 맛을 알기 위해서는 오온환신五蘊幻身이라, 오온五蘊이라하는 것은 우리 정신과 몸뚱이 또는 일체존재가 다 오온법五蘊法에 해당하지 않습니까. 헛께비 환幻자, 몸 신身자, 오온환신五蘊幻身이라, 그런데 이 오온 법은 실재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헛께비 같은 몸이란 말입니다. 사람의 의식意識을 비롯해서 우리 몸뚱이나 일체존재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모두가 다 오온법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우선 내 몸부터가 굉장히 소중하고 중요한데 그렇게 소중한 오온법이 환신이라, 실재로 실존적인 존재가 아니고 허망한 몸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굉장히 실망을 느끼겠지요. 그러나 시실은 오온이 허망 무상한 존재다. 이렇게 알지 못하면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감로수 같은 죽지 않고 늙지 않고 또는 병들지 않고 영생불멸永生不滅한 행복 된 맛은 음미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 주제가 「현대불교와 참선」입니다. 이제 참선 말씀을 해야 하겠습니다만 이 참선을 한다는 것도 역시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감로 맛을 좀 봐야 참선공부가 제대로 되는 것인데 감로 맛을 보지 않고서는 참선공부가 안됩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오온환신, 오온법이 다 공空인 도리를 모르면 참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평소 참선參禪 수행자修行者를 많이 만나보고 있습니다, 바른 이해理解 바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바른 반야지혜般若智慧를 얻지 못하고서 선방禪房에 앉아서 그냥 하나의 테크닉technique으로 하나의 기능技能으로 해서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참선공부가 잘 나아가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앉으면 조금씩은 나아간다 하더라도 참선공부 할 때는 - 지금 동남아東南亞에서 하고 있는 비파사나毘婆舍那하고도 이것은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이 되어야 참다운 참선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조사선인가? 어떠한 것이 참다운 참선인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가장 소중하게 알고 있는 우리 몸부터서, 그리고 내가 느끼고 있는 수受․상想․행行․식識, 우리가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의식意識, 다시 말씀 드리면 감수感受나 상상想像나 의지意志나 의식意識하는 것, 모두가 다 비었다고 분명히 느껴야 참다운 반야지혜般若智慧가 되고, 반야지혜가 되어야 ‘내 몸뚱이가 본래로 비어있다.’ 이렇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느끼고서 선방禪房에 들어가 앉아야 공부가 됩니다.
이무기가 용龍이 되어서 제아무리 하늘로 올라가고자 발버둥쳐도 물이 없으면 바로 올라가지를 못합니다. 여용득수如龍得水라. 용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꼭 물이 필요합니다. 또 하룻밤에 천리도 가고 백리도 가는 호랑이라는 놈이 언덕이 있고 비빌 곳이 있어야 비호飛虎가 되는 것이지 그냥 사막 같은 벌판에서 호랑이가 하룻밤에 천리만리 갈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물론 모든 존재가 본래로 부처입니다. 그러나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싹 마른 간혜지乾慧智로 아는 것이지 참말로 자기가 못 느낀단 말입니다.
참말로 못 느끼는 것은 왜 못 느끼는 것인가? 그것은 반야지혜 용이 물이 없으면 하늘로 올라갈 수 없듯이 우리는 반야의 지혜가 있어야 활발발지活鱍鱍地라, 그래야 활발스럽게 정말로 창조적으로 우리 불성 자리에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온환신五蘊幻身! 그러면 어떻게 해서 우리 몸뚱아리나 우리 관념 이것이 텅텅 비어 있단 말인가?
우리 불자님들 불교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모든 것이 둘이 아닙니다.
둘로 보고 셋으로 보고 하는 이것은 서구사상西歐思想에서 나온 것이고, 중생들의 세속적인 관념인 것이지 부처님의 성품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일체 존재가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라는 도리를 알아야 부처님의 제자이고 참다운 신심信心을 갖춘 제자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둘이 아니면 하나는 무엇인가? 하나 이것은 오직 마음뿐입니다. 우리는 마음 그러면 우선 자기 마음이 생각이 나서 내 마음 같으면 남을 미워도 하고 좋아도 하고 욕심을 내고 이러한 마음이 무슨 불심佛心일 것인가?
그러나 내 마음도 자취가 없지 않습니까. 저 사람 마음도 자취가 없고, 내 마음도 자취가 없습니다. 또 우리 중생이 생각할 때는 우리 사람한테만 마음이 있는 것이지 개나 소나 돼지 같은 짐승은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동물들도 다 마음이 있습니다. 풀도 나무도 흙도 다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흙은 흙대로 마음이 설사 흙속에 에너지로 해서 들어있다 하더라도, 흙 모양 그것은 물질이지 않는가? 물질과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물질과 마음 둘이지 않는가?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 불교인들이 이해하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은 거짓말이 조금도 없습니다. 조금도 꾸며서 하신 말씀도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부처님 말씀이 오직 모두가 다 하나다. 일여평등一如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 진여불심眞如佛心 뿐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말씀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나쁜 습관성習慣性 때문에 내 몸 따로 마음 따로, 저 풀이나 나무나 일반 짐승이나 그러한 것들이 설사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마음은 그들 가운데 에너지로나 있고 모양은 그대로 있지가 않는가? 그러나 모양 그것은 사실은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온환신이라. 이 몸뚱이가 이대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대로 이렇게 있지가 않습니다.
원각경圓覺經에 보면 범부미도凡夫迷道, 우리 범부가 미혹되게 시리 잘 못 보니까 사대위신四大爲身 망상위심妄想爲心이라.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가 합해진 이것보고 내 몸이라 하고, 또는 우리가 느끼고 상상하고 또는 의욕도 하고 분별시비 하고 이것 보고 마음이라 하지만,
이런 것은 마치 우리 눈에 눈병이 생겨서 공중에 꽃이 헛것이 보이듯이, 물속에 달그림자가 보이듯이, 물속에 있는 달 이것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지 달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들은 몸뚱이 이것이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우리가 삼독심三毒心에 가려서 잘못보아서 우리가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소식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참선 말씀에는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막힘없이 마음을 열어 놓고서 공부해야 이른바 중국에서 들어온 조사선祖師禪 도리입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부처님은 저기가 있고 나는 여기가 있고 이러한 식으로 공부하는 것은 참다운 조사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를 오직 - 아인슈타인 말로하면 통일장원리統一場原理란 말입니다. - 우주를 오직 하나의 것으로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합해버려야 그래야 참선 공부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하고 들어가서 적어도 우리 마음으로 해서 아는 헤아림은 딱 끊어져야 합니다.
저는 어느 때나 서투른 물리적 화학적인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문외한門外漢입니다만, 왜 그런고 하면은 내 몸뚱이가 본래로 비어있다. 우리 눈에 보고 있는 이 대상적對象的인 세계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가 다 본래로 비어있다. 이러한 소식을 알기가 어렵단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 도리나 금강경金剛經 도리는 모두가 다 비었다는 도리 아닙니까. 꿈속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삼천대천세계가 명명백백明明白白이 있고, 깨달은 뒤에 보면 모두가 다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 다 텅텅 비어 있습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눈꼽만큼도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었습니다.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어 있다는 확신이 서고 공부를 해야 참선공부가 됩니다.
이 자리에 오신 불자님들은 그런 우리가 알기 어려운 문제보다도 우선 복福을 받는 문제, 그런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시겠지요. 그러나 그런 본래적인 부처님의 실상대로 모두가 하나의 진리眞理이다. 이렇게 부처님의 실상대로 모르고서 하는 복 받는 그런 공부는 제한된 복 밖에는 안 됩니다. 오래 가지도 못하고 그런 공부는 불교의 근본 목적인 우리를 해탈解脫 성불成佛로 인도 할 수가 없습니다.
불교 말로하면 우리 몸뚱이나 일체 물질이라 하는 것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구성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불경 속에도 그러나 땅 지地자, 땅기운, 그것은 어디가 있는가? 지불가득地不可得이라, 땅기운 그것도 결국은 얻을 수가 없고, 또 물 기운은 무엇인가? 수불가든水不可得이라, 물 기운도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화불가득火不可得이라, 불기운도 온도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또 운동하는 동력인 바람 풍風자, 풍불가득風不可得이라, 바람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몸뚱이나 일체 것을 구성한 땅기운 물 기운 불기운 바람기운 이러한 것도 부처님의 말씀으로 해서 불가득不可得이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은 바로 비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행이도 현대물리학은 그러한 것을 명증적明證的으로 증명해 있습니다. 어떠한 물질이나 각 원소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알지 않습니까. 각 원소는 앞서 얼핏 언급 했듯이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 그러한 것이 어떻게 모였는가? 그러한 입자들의 결합여하에 따라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한다는 것도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면은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는 그러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한 미세한데 이르면 그러한 것은 모두가 다 우주에 충만해 있는 장場에너지, 이 공간 속에나 성층권이나 삼천대천세계 어디에나 충만해 있는 그러한 장 에너지 말입니다.
그러면 장場에너지는 무엇인가? 우주에 충만해 있는 장 에너지는 전자기장電磁氣場이 거기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면 전기나 자기는 무엇인가? 전기나 자기 이것은 본래에 있어서는 물질이 아닌 에너지의 파동波動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물질을 분석하고 들어가면 종당에는 다이아몬드나 금이나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이나 모두가 종당에는 텅텅 비어 버린단 말입니다.
이렇게 분석하면 비었다 하더라도 내 몸뚱이는 이대로 소중히 있지 않는가.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로 해서 빛나고 있지 않는가. 소중한 귀금속이 아닌가. 그러한 것을 어떻게 분석해서 공空이라 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알 수가 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만 부처님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니라 부처님 말씀은 분석해서 공인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앞서 반야심경 외우신 바와 같이 색즉공色卽空이라. 색이라는 것은 일체 물질을 다 지칭합니다. 물질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내 몸 이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부처님 법문은 철두철미하게 과학적科學的이고 철학적哲學的이고 가장 수승한 최상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과거에 미개한 때는 이런 어려운 말을 하면 다 나가버리고 듣지도 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들은 물리학적인 지식을 대체로 아시기 때문에 말씀을 제가 드립니다.
왜 물질 그대로 공인가? 이것은 가장 미세한 물질인 전자나 양자나 그러한 것은 사실은 공간성空間性이라고 할 것이 없이 에너지의 파동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정기精氣인 힘만 진동하고 파동 하는 것이, 이렇게 진동하면 전자, 저렇게 진동하면 양자, 이렇게 되는 것이지 그것이 물질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지금 물리학자의 증명입니다.
따라서 물질의 가장 미세한 곳에 가서는 결국은 텅텅 비어 버립니다.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으니 응당 비어 버리겠지요.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는 것이 이렇게 활동하고 저렇게 진동하고 결합되어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이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것도 공이 모여서 된 것이기 때문에 내내야 공은 공입니다. 공은 공이란 말입니다. 제로zero를 몇 천 번 곱하고 몇 천 번 더해도 제로는 제로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원래 공인 것이 이렇게 활동하고 저렇게 진동해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그러한 것들이 모여서 분자의 구조로 해서 세포가 된다 하더라도 결국은 내내야 공은 공이란 말입니다. 그림자를 천개 만개 더해도 하나의 그림자일 뿐이지 물질이 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은 도리 입니다.
다행이도 현대 물리학은 그렇게 어려운 제법공諸法空도리 색즉공色卽空도리를 증명해 있습니다.
우리 무명無明은 어데서 오는 것인가? 모두가 다 비었다고 생각할 때에 모두가 다 하나가 되겠지요. 무슨 물질이 있고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가 될라야 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유마거사나 누구나 다 이 입불이법문이라. 오직 하나의 도리를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물질이 아니면 그것이 무엇인가? 물질이 아니면서 공간성空間性도 시간성時間性도 없으면서 있는 것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자취가 없고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문자와 말을 떠나버린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한 그 자리가 바로 불성입니다.
따라서 있는 것은 사실은 진여불성 뿐입니다. 다른 것은 눈꼽만큼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비었으니 서로 다른 것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어느 것이나 진여불성 뿐이다. 이렇게 알고 공부를 하는 것이 조사선祖師禪 도리입니다.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을 보신 분들은 상기해 보십시오. 자성청정自性淸淨 자성해탈自性解脫이라. 우리 자성, 일체존재의 근본성품이 자성입니다. 일체 존재의 근본 성품은 원래 청정해서, 무슨 물질이 있다거나 또는 오염이 있다거나 또는 번뇌가 있다거나 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성청정이 못됩니다. 자성청정하기 때문에 자성해탈이라, 본래로 해탈이 되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참선을 누구나가 하려고 애를 씁니다. 인류문화사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문화형태가 참선입니다. 사실은 참선을 모르면 진리를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유교儒敎나 기독교基督敎나 도교道敎나 이슬람교나 다 긍정합니다. 왜 긍정하는가? 모두가 다 부처님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보면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모두가 다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긍정하기는 합니다만 그들의 가르침은 본래청정本來淸淨 본래해탈本來解脫이라, 자성청정自性淸淨 자성해탈自性解脫이라, 그러한 말씀은 미처 못 합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세간적인 차원에서 인과적因果的인 차원에서 우리가 선악을 구분해서 악을 행하면 반듯이 거기에 따라서 고통스러운 과보果報가 있고, 또는 선한 덕德을 지으면 반듯이 행복幸福이 있고, 금생에 잘살면 천당天堂가고, 그런 삼계三界 내에서 우리 중생이 무던히 잘사는 공부인 것이지 삼계를 해탈하는 공부는 못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자성청정 자성해탈이라. 내 몸뚱아리도 본래가 비어 있고,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이지 물질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마음이요 부처요 모두가 다 차별이 없이 다 불성佛性 불심佛心 뿐입니다.
이렇게 알고 믿는 것이 참다운 대승적大乘的인 신앙입니다. 대승적인 신앙을 갖어야 참다운 참선參禪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우리 근본실상根本實相, 우리 생명의 근본실상은 무엇인가? 우리 모든 중생의 생명의 근본실상은 바로 불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지금 불성을 체험한 것이 아닌단 말입니다. 체험한 것이 아닌 지식은 다 간혜지乾慧智입니다. 바싹 마른 지혜입니다. 간혜미능면생사乾慧未能免生死라. 바싹 마른 이론적인 개념 지식만으로 해서는 우리가 참다운 감로 맛을 못 봅니다. 참다운 해탈 맛을 못 보는 것입니다.
참선의 공덕 이름 가운데 이런 이름이 있습니다. 현법락주現法樂住라, 법락을 우리가 맛본단 말입니다. 잘 생각을 못한 분들은 참선공부해도 고통스럽고 다리도 아프고 별 맛이 없지 않는가. 이상스러운 맛이 있으면 안 되겠지요. 그러나 법락이라는 맛은 분명히 있습니다. 법락이라는 맛은 우리 공부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 더 환희용약歡喜踊躍으로 우리한테 온단 말입니다.
우리는 불경을 볼 때에 환희용약이라. 이러한 소중한 술어를 많이 보지 않습니까. 어떠한 때에 환희용약이 오는 것인가. 그런 때는 자기의 몸뚱아리와 자기의 관념에 대해서 별로 부담이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정말로 개운하고 뛰놀듯이 행복스러운 것이 환희용약입니다. 이러한 것이 참선공부나 염불공부나 분명히 다 있습니다.
오늘 제 말씀이 제한된 시간이고 무던히 이렇게 덥고, 또 구변口辯이 없는 사람이 너무 지리하게 하면 큰 고역이 되십니다. 그래서 될수록 간단히 줄이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참선 공부는 우리 생명을 모조리 받쳐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생명의 길입니다. 이러한 길이므로 지금까지 훌륭한 선지식善知識 스님들한테 잘 말씀을 드르셔서 아시겠지만 저 같은 사람도 45년 동안이나 참선한다고 다소나마 애는 썼으니까 체험담을 드릴 수밖에는 없습니다.
정말로 참선공부는 가장 행복스러운 공부입니다. 어째서 행복스러운가 하면은 우리의 병, 지금 한국병韓國病이시 무슨 병이시 하는 그런 병소리가 만이 나옵니다만 우리 중생들은 사실은 누구나가 다 무명병無明病에 걸려 있습니다. 한국병이나 미국병이나 모두가 다 근본 병은 무명병입니다.
무명병은 무슨 병인가? 무명병은 ‘있다 없다’하는 병입니다. 우리 중생은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또는 참말로 있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없는 물질은 있다고 하고 참말로 있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생병衆生病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하므로 한국병이 생기고 무슨 병이 생깁니다.
또는 우리 몸뚱아리에 있는 이런 저런 병 암癌이나 애이즈AIDS나 이러한 것도 역시 모두가 다 우리 마음병 무명병 때문에 생깁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명병을 치유하는 것이 우리 중생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가장 급선무입니다.
그러면 우선 무명병 가운데 없는 것을 있다고 한 병이 무엇인가? 이것은 유루병有漏病이라, 있다는 병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내 몸뚱이도 분명히 부처님의 그런 시각, 성자의 견해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명명백백明明白白이 빈 것인데, 우리가 있다고 본단 말입니다. 다른 것도 모두가 마찬가지 입니다. 이 무명으로 해서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일체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거기에서 모든 중생들의 병이 파생됩니다.
감투의 병이나 남을 미워하는 병이나 좋아하는 병이나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랫물을 맑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류上流부터 다스려야 하듯이 무명병無明病만 다스리면 그때는 모든 병이 자동적으로 다스려지고 모두가 정화가 되고 다 풀립니다.
그런데 있다는 병, 내가 있다는 병, 대상적으로 실존적으로 무엇이 있다는 병, 우리 불자님들은 평생 동안에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있다는 병을 쳐부수는 일입니다. 있다는 병을 우리가 못 쳐부수면 우리는 참다운 불자가 못됩니다. 따라서 참다운 참선을 할 수도 없습니다. 서로 피차 갈등葛藤을 하고 가정적家庭的으로 불화스럽고 여러 가지 불평등不平等이라든가 그런 모든 문제는 있다는 병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한테 우리가 알으켜주는 그러한 법문法門 가운데도 가장 소중한 것은 있다는 병을 쳐부셔서 본래 없다는 자리로 우리 마음을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있다는 병 때문에 칭칭 묶이여서 마음이 지금 폐쇄閉鎖가 되어 있습니다. 있다는 병이 있으면 교만심驕慢心 등 별스러운 것이 다 나옵니다. 그러나 본래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있지가 않은 도리 이것이 금강경金剛經 도리道理고, 반야심경般若心經 도리고 부처님의 참다운 반야般若 공도리空道理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적어도 부처님 가르침의 정법正法을 이야기 하려면 어느 누구든지 간에 꼭 반야의 공 도리, 모든 존재가 본래는 공이라는 도리 이러한 도리를 분명히 말씀해야 합니다.
자신의 몸뚱이도 본래로 없다고 생각 할 때에 자기 몸뚱이도 자기 것이 아니거든 하물며 자기 소유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절 자기 물건 어느 것도 자기 소유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모든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인생이라 하는 짧은 나그네 길을 걷고 있습니다. 나그네 길 에서 우리 짐이 너무나 무겁습니다. 집도 기왕이면 좋은 집, 옷도 기왕이면 좋은 옷, 음식도 가장 좋은 음식, 자기 배우자도 가장 좋은 사람, 이러한 짐들을 다 짊어지고 어떻게 해서 모두가 다 텅텅 비어버린 공空의 고향故鄕에 갈 수가 있습니까.
참다운 우리고향은 불심의 고향입니다. 불심의 고향에 가기 위해서는 일낙서산日落西山에 월출동月出東이라. 해가 떨어져야 달이 솟아오르듯이 우리가 앞서 말씀과 같이 유루병有漏病을 떨쳐버리지 못 하면은 제아무리 요설변재饒舌辯才로 해서 이렇게 저렇게 법문法門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참다운 불성자리에는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런 자리에 들
어갈 것인가?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바른 이해 바른 가치관價値觀, 부처님 가르침은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 먼저 믿고 해석하고 또는 행하고 증명하고 이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께서는 자주 들으셔서 그런 도리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먼저 어떻게 믿을 것인가? 우리가 아직은 증명도 못하고 공부도 못한지라 우선 부처님 말씀만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공空이라고 하면 공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믿은 다음에는 어째서 공空인가? 이러한 도리는 앞서 말씀과 같이 물리학적으로나 또는 다른 구사론俱舍論이나 부처님의 론장論藏을 우리가 인용해서 우리가 이론적으로 자기 체계를 세웁니다.
모든 물질이 본래로 에너지뿐이다. 모든 물질은 공간성과 시간성이 없는 에너지뿐인데 에너지가 진동해서 상相을 나투어 모양이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지로 있지가 않다. 이러한 정도는 지금 물리학이 다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 부처님 제자가 이러한 도리를 모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이제 이해理解한 다음에는 거기에 따라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방면으로 보나, 가사 우리가 주문呪文을 외운다 하더라도 그러한 도리를 알고 주문을 외워야 그래야 훨씬 더 가피加被도 많이 입고 우리 마음도 빨리 정화淨化가 됩니다.
주문이라 하는 것도 그냥 그렁저렁한 말이 아니라 다 빈자리에 있는 우주宇宙의 음音 우주의 멜로디melody, 실은 다 비어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생명의 실상자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 자리는 자비慈悲 지혜智慧 행복幸福 또는 음音도 가장 청정한 범음청량梵音淸凉이라, 가장 청정한 영원한 우주음宇宙音이 있단 말입니다.
「옴마니반메흠」이나 광명진언光明眞言의 음音이나 또는 대다라니大陀羅尼나 모두 다 그런 음은 우주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냥 그러한 주문만 외운다 하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약간의 공부는 되어 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하나의 주문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이 참선은 못됩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주문을 외이면서 참선을 하고 싶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하면서도 참선을 하고 싶고, 그러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참선공부는 제일 높은 공부이고, 다른 공부는 저 밑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들 말을 합니다. 나는 지금 관세음보살을 몇 십년동안 해왔는데, 관세음보살을 안 외이면 그 내 마음이 허전하다. 그런데 참선도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시는 것이 우리 불자님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근본 자리 근본 성품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고 하시면 됩니다. 성품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마음을 둘 것인가? 이것도 부처님 말씀에 우선은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다 비어 있고, 그러나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충만해 있다. 이렇게 먼저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믿고서 우리 마음이 상相에 안 걸리고, 아시는 바와 같이 이 가운데는 금강경金剛經도 몇 천 번 하신분도 계실 것입니다. 금강경 도리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나라는 상相 너라는 상,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이러한 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 마음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상에 걸리지 않고 상이 없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또는 좋은 것이 있고 이러한 상을 두면 금강경 도리를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상은 본래로 비어있다. 이렇게 아시고서 「옴마니반메흠」을 외우시면서 옴마니반메흠 주문을 하시면 바로 참선을 하시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외운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님이 저 어디 밖에가 계신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저 십만 억 국토 저 밖에가 계신다. 이러한 식으로 염불念佛하면 그런 것은 그저 칭명염불稱名念佛인 것이지 참선은 못됩니다.
그러면은 그렇게 법성法性이고 불성佛性이고 진여불성眞如佛性이고 다 없애버리고서 그냥 무자無字 화두나 ‘이뭣꼬’ 화두나 화두만 들고 있으면 참선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화두話頭라는 것이 어째서 나왔는가? 우리 불자님들은 화두나 염불이나 그러한 것들의 상관관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이 투명해야 번뇌가 안생기고 확신이 섭니다. 그러기에 참선은 어떠한 것이고 염불은 무엇인가? 이러한 것에 관해서 뿔뿔이 생각하면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둘이 아닌 법문에 어긋납니다.
필요 없는 논쟁들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頓悟漸修라. 그러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렇게 논쟁할 꺼리가 없습니다.
보조국사普照國師 가신지 적어도 팔백년 세월동안, 그 뒤 나옹懶翁 지공指空 태고太古 서산西山 진묵震黙 제대 도인들이 다 옳다고 긍정을 했으므로 새삼스럽게 논할 필요도 없는 것인데 자꾸만 부질없이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 이 말씀은 누구를 비방하는 말씀이 아니라. 부처님 법문은 모두가 다 진실한 법문 또는 깨달은 분들은 깨달은 분상에서는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깨달은 분상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말하나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말하나 아무런 흠이 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의 그릇 따라서 도인들은 그때그때 성품을 안 여의고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무자 화두나 이뭣꼬 화두나 모두가 다 근본 성품에서 나온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 내내야 근본 성품을 깨닫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까. ‘여하시 불佛잇꼬’ 부처란 무엇인가? 화두라는 것은 대체로 서쪽에서 달마스님이 이쪽으로 오신 뜻이 무엇인가? 또는 부처가 무엇인가? 또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또는 제일의제第一義諦가 무엇인가? 이러한 것 따라서 화두가 나왔습니다.
다시 한 마디로 하면 근본성품根本性稟이 무엇인가? 근본성품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런 해답으로 해서 그때그때 도인들이 상相이 없이 내벹어버리는 말이 무無가 되고 이뭣꼬是甚麽가 되고 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러한 화두를 참구할 때도 우리 마음이 상을 떠나버린 진여불성자리에 딱 입각해 있어야 화두 참구가 됩니다. 그러는 것이지 진여불성은 생각지 않고서 그냥 의심만 한다고 생각하면 상기上氣가 되고 공부가 잘 나가지 않습니다.
마땅히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른 철학 바른 가치관, 바른 가치관은 무엇인가?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일체 존재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인 것이지 불심뿐인 것이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눈으로 명명백백이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고 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것은 모두가 다 참말로 바로 본다면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있지가 않는 것을 있지 않다고 분명히 느끼는 것이 우리 수행자修行者가 됩니다.
따라서 참선 공부는 그냥 앉아서 이것하고 저것하고 모양만 의젓이 취하고 이래서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 털어 버려서 내 걸망까지도 내 몸뚱이까지도 이것저것 몽땅 다 비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참선을 하면은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용이 물을 얻어서 하늘로 올라가고 또는 호랑이가 언덕을 얻어서 천리만리 달려가듯이 그와 똑 같은 도리입니다.
참다운 생명의 창조創造는 앞서 말씀과 같이 제법공諸法空 도리에서 반야지혜般若智慧에서 출발해야 참다운 생명의 창조가 됩니다. 그렇지 못한 것은 윤회輪廻의 법입니다.
‘있다 없다’ 느끼는 그 마음보고 일승법一乘法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흠칠 도盜자, 도심盜心이라. ‘나’라는 것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면 그 마음도 도독 마음이고, 또 저 집은 영구히 내 집이다. 그 마음도 부처님 사상에서 보면 도독 마음입니다. 모두가 다 본래로 비었습니다. 어느 것도 자기 몸뚱이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금생의 이 몸뚱이는 어데서 왔는가? 과거 전생에 이와 같은 몸이 있었을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미래 내생에 이와같은 몸이 있을 것도 아닙니다. 금생에 몇십년동안 사는 이 몸뚱이는 분명히 있지 않는가? 이 몸뚱아리도 찰나찰나 신진대사新陳代謝 해서 어느 순간도 같은 공간에 같은 몸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부처님 가르침을 보다 더 정확히 생각들 하십시오. 어느 순간도 이와 같은 몸이 같은 몸이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순간순간 찰나찰나, 찰나刹那는 일초의 75분의 1초 그런 동안도 같은 몸이 없습니다. 신진대사 해서 먼저 번 세포가 죽고 나중에 세포가 생겨나고 그때그때 주름살이 더 깊어지고 하는 것을 우리 중생들은 몇십년 되어야 늙었다 하는 것이지 그냥 내 몸 그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몸뚱이는 순간 찰나도 같은 몸이 있지가 않습니다. 순간찰나도 같은 것이 있지 않커니 이렇게 있다는 내 몸도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제법공인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제법공도리諸法空道理를 알아야 그래야 참다운 대승大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저 유교有敎라. 소승교라는 것은 있다 없다 그런 차원의 가르침이 소승 아닙니까. 대승이 될라면 적어도 제법공 자리부터서 반야지혜般若智慧부터서 출발해야 그래야 대승이 됩니다.
반야지혜부터서 반야의 보배가 있어야 그래야 참다운 염불이 되고, 반야지혜가 있고서 모든 것이 진여불성 뿐이다. 다른 것은 다 헛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염불念佛하면 이것은 바로 염불인 동시에 염불참선念佛參禪인 것입니다.
화두를 참구할 때도 그 자리를 놓치지 말고 참구하십시오. 이것은 여러분들이 ‘이뭣꼬’선에 가서 여실히 다 발표가 되어 있습니다. 여실히 밝혀 있습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한 물건은 무엇인가? 이것은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고 오직 생명의 본래면목 자리단 말입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나한테 본래면목 자리가 있으되 그것은 검기는 칠보다 더 검고 밝기는 해와 달보다 더 밝으니 천지 우주를 두루 비취는 광명의 생명이고 또 하늘을 바치고 땅을 괴이고 있으니 천지우주에 가득 차있고 그러한 것이 나와 더불어 있는데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가’ 이지, ‘오직 하나의 도리 오직 하나의 진여불성이 무엇인가이지,’ 그냥 아무렇게나 ‘이뭣꼬’가 아닌 것입니다.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께서 분명히 밝혀 놓으신 가르침 입니다.
어떠한 화두나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가 무엇인가?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이쪽으로 오신 뜻이 무엇인가? 다 그런데서 천칠백공안千七百公案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화두를 참구하던지 간에 근본성품 자리를 놓치지 안해야 참다운 조사선입니다.
어디에 의지해서 상에 의지해서 공부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상相에 의지해서 공부하면 참선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상을 의지하지 않고서 자취가 없고 모양도 없고 이름도 붙일 수가 없는 그 자리, 우리 본래 성품자리에 우리 마음이 입각해 있어야 그래야 참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다고 보면 참선은 선방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집안에 있으나 어디에 있으나 운전을 하던지 간에 언제나 우리 마음이 상에 걸리지 않고 우리 마음이 일체존재 나나 너나 모든 존재의 실상자리 이른바 생명의 실상자리 이러한 자리에 입각하면서 공부하면 어느 공부나 다 참선입니다.
비록 지금까지 기독교를 믿어 와서 ‘오, 주여! 하느님이시여!’ 이렇게 말하기가 더 좋은 사람들은 말은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다 상을 떨어버리고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에 마음을 두고서 ‘오, 주여!’ 해도 아무런 허물이 없습니다.
그런한 증거로 화두 가운데 ‘똥마른 막대기乾屎橛’라는 화두가 있지 않습니까. 운문雲門스님한테 가서 ‘여하시 불잇꼬’하니 ‘똥마른 막대기라!’ 상相을 떠나버린 자리에서는 똥마른 막대기가 되었든 또는 쇠막대기가 되었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금생에도 잔득 무명병無明病, 무명병 가운데 유루병有漏病, 있다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또 진여불성도 어느 분들은 텅텅 비어있는 것이지, 진여불성이 어디가 있을 것인가?
진여불성이 어디가 있단 말인가? 그런 사람은 무병無病, 없다는 공병空病에 들어 있습니다. 무병이란 말입니다.
단견상견斷見常見이라, 우리는 항시 있다는 유루병도 끊어야하고 또는 무엇이 허무해서 아무것도 없다는 그러한 공병도 끊어야 합니다.
우리 중생의 어두운 눈으로는, 상이 있는 눈에서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상이 없는 충정한 우리 마음에서는 분명히 진여불성은 우리 생명 자체로 해서 영원히 우주에 충만한 것입니다. 우주에 충만한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그냥 가장 소중한 내가 없고 가장 소중한 저 사람도 공이라 하니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거기까지만 생각하면 굉장히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그런 실상實相은 하나의 일체 행복 지혜 자비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공부가 진전이 되면 진일보 한만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허두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감로수 같은 그러한 맛이 우리한테 있습니다.
오늘도 꾀 덥습니다만 동산양개洞山良价 화상한테 더운 때는 어떻게 해야 하고 추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니까 이제 동산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대는 어째서 춥고 더움이 없는 그 자리를 구하지 못하는가?’ 춥고 더움이 본래 없는 그 자리를 구하지 못하는가? 우리 중생들은 미우면 미운체로 좋으면 좋은 채로 더우면 더운 채로 고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위도 추위도 미움도 좋아함도 다 떠나서 오직 청정한 해탈의 자리에 가 버리면 다 조복調伏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 저 부터가 그런 자리에 온전히 못 갔으므로 분명히 저도 지금 덥습니다. 더위도 추위도 없는 자리가 바로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다 초월超越해 있습니다.
참선을 많이 해보신분들은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뜨거운 선방에 앉아서도 공부가 잘될 때는 그냥 시원한 기운 때문에 자기 눈에서도 분명히 시원스러운 바람이 푹푹지나간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렇게 신비로운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한없는 지혜 한없는 자비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유루병 무병 때문에 있다는 병 없다는 병 때문에 우리의 그러한 무한無限한 공덕功德을 딱 틀어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참선공부를 하실 때는 자기가 하고 있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또는 무자無字 화두나 그런 공부 방법을 바꾸실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그러한 것은 현상 따라서 인연 따라서 제시된 하나의 방편인 것이지 그런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모두가 다 본래의 성품자리를 말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본래 성품자리에 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지장보살을 하나 무엇을 하나 다 한가지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장보살님을 외우는 분들이 관세음보살님하고는 다르지 않는가? 또는 화두를 해야 참선인데 지장보살을 하면 참선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그런 부처님의 명호자리 모든 보살님의 명호자리는 본래가 하나입니다.
하나의 자리인데 그러한 진여불성 자리는 무한한 공덕이기 때문에 한 말로 표현을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량공덕無量功德 그 자리를 자비로운 쪽으로 표현할 때는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 표현할 때는 문수보살文殊菩薩, 또는 우리 중생의 영혼靈魂을 극락세계나 천상세계나 그런한데로 인도하는 쪽에서 보면 지장보살地藏菩薩, 우리 중생의 병고病苦를 다스리는 쪽에서 보다면 약사여래藥師如來, 총 대명사는 아미타불阿彌陀佛 이러는 것이지 원래 둘이 있지가 않습니다.
우리 불교는 이런저런 신神이 따로따로 있다는 미개한 다신교多神敎의 그런 종교는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불법佛法은 모든 것을 다 거기에 포함해 있습니다. 바이불도 논어論語도 도덕경道德經도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하고 있는 공부 방식을 바꿀 필요가 없이 다만 마음만 돌이켜서 불교의 어려운 말로 회광반조回光返照라. 우리가 분별하고 있는, 상을 두고 있는 마음만 돌이켜서 상이 없는 그 자리만 훤히 비추고 있으면 됩니다. 정말로 그 자리는 훤히 빛나는 자리입니다.
가시적인 태양광太陽光과 같은 눈부신 광명이 아니라 청정적광淸淨寂光이라, 청정광명淸淨光明이 청정생명淸淨生命의 광명이 언제나 비추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한번 생각하면 한번 생각한 만큼 우리 마음의 어둠이 가십니다. 바르게 우리가 화두를 참구하면 한만큼 우리 마음의 어둠은 가시는 것입니다.
인도印度 부처님 당시에 파사닉波斯匿 왕녀가 굉장히 얼굴이 못 낫단 말입니다. 얼굴이 못나 자나 깨나 자기 남편한테도 그렇게 소박을 당하고 또는 하도 못나서 문밖을 나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임금님도 자기 딸이 못나서 부끄러워서 밖에 내 놓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추녀가 못생긴 딸이 부처님한테 간절히 기원을 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정말로 제가 이와 같이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까지 저도 좀 애뿐 사람으로 바꿔 주십시오. 그렇게 몇 달을 두고 몇 년을 두고 기원을 드렸습니다. 어느 날 공덕이 쌓이고 쌓여서 자기 업장이 소멸될 만큼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 문틈에 부처님의 자비로운 광명이 훤히 비춰왔습니다. 그래서 그 광명을 보자마자 자기의 그러한 추한 얼굴이 아주 절세의 미인美人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팔상록八相錄 보면 추녀개용醜女改容이라. 추녀가 얼굴을 다시 바꿔서 미녀가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을 미워할 때 자기 얼굴을 보십시오. 남을 미워할 때 자기 얼굴을 보면 그 얼마나 추악합니까. 남한테 베풀고 남한테 자비로울 때 자기 얼굴을 보십시오. 같은 자기 이지만 얼마나 온화하게 보입니까.
우리는 본래로 무한의 지혜공덕智慧功德과 행복을 갖추고 있는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느껴야 바른 신앙입니다. 부처님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분명히 느끼시고서 나도 최선을 다해서 부처가 되고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되게 시리 하는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 남편한테나 자기 아들한테나 자기 친구한테나 누구한테나 가장 큰 선물이고 가장 큰 공덕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가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닦으면서 그 사람도 부처님이 되게시리 인도하는 것입니다.
늙으신 자기 부모님한테 봉양奉養하기 위해서 옷이고 음식을 잘 대접하는 것도 효도孝道가 되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것은 유한적인 때 묻은 효성 밖에는 못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효성은 화엄경華嚴經에 보면 부모님을 양쪽 어께에 태워서 하해 같고 태산 같은 부모님 은혜를 갑기 위해서 부모님한테 최상의 음식을 대접하고 최상의 화려한 옷을 입혀드리고 그렇게 해도 아직 자기 직성이 안 풀려서, 부모님을 양쪽 어께에 태워서 천하를 몇 바뀌를 돌면서 천하의 명승지名勝地를 구경시켜 드린다 하더라도 오히려 갑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중한 부모님인데도 그러한 효도는 아직은 때 묻은 유루有漏 효도이고 그것은 유위법有爲法이고, 참다운 효도는 무엇인가. 이것은 부모님을 무위법無爲法이라, 부모님을 생사生死가 없는 영생永生의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을 드리는 것이 가장 큰 비교할 수 없는, 유루 행복에 비교할 수없는 몇 천배 수승한 효도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화엄경에도 있고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누구한테나 내가 잘 먹고 잘살고 내가 학문이 깊고 옅고 하는 그러한 문제가 아니라, 오직 우리 마음이 얼마만큼 부처님한테 가까이 나가고 있는 것일까. 또는 모든 사람을 얼마만큼 부처님한테 가까이 나가게 하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부처님의 반야사상般若思想으로 해서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라. 내 몸도 본래로 비어있고 이대로 비어있고 죽은 뒤에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이대로 즉공卽空이라. 색즉공色卽空이라. 내몸도 비었거니 내 소유가 어디가 있는 것인가. 이렇게 정치가나 누구나 다 부처님 법대로 - 부처님 법은 바로 우주의 도리입니다. 우주의 진리입니다. - 우주의 도리에 못 따르면 항시 역사의 심판을 받습니다. 부처님 법에 정치인이나 누구나 안 따라간다고 생각하면 인류 사회의 전쟁이나 모든 불안한 요인이 항시 끊임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플라톤의 공화국共和國에서도 성자聖者가 정치가政治家가 되고 정치가가 성자의 길을 닦기 전에는 일류의 해악害惡은 영원히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떠한 것으로 보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무슨 단체나 개인이나 절대로 참다운 행복은 없습니다. 아무리 싫드라도 아깝드라도 부처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합니다.
지금 실존철학實存哲學에서 말하는 무철학無哲學은 물론 「하이덱그」나 「키에르케고오르」이나 그러한 분들은 순수한 불교인들이 아니지만 그러한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을 느끼고 있어서 그런 느낌 밑에서 참다운 실존이 무엇인가? 참다운 실존은 이것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참다운 실존이고 실상입니다.
모든 것은 다 허망하고 다 비어있고 참다운 실상은 오직 진여불성 뿐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느끼시고서, 느낀다 하더라도 그걸로 해서는 우리의 그 모진 습관성이 그때그때 머리를 들고 우리를 괴롭힙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정념상속正念相續 오욕적중五欲賊中 불위소해不爲所害라. 우리가 바른 정념이 상속 되어야지 상속이 안 되고서, 바른 정념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가 모두가 진여불성이 아님이 없다. 일체가 하나의 일원적으로 불성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른 정견正見입니다. 이러한 바른 정견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일상성에 매몰돼서 그런 정념을 상속시키지 않으면 우리 공부가 참다운 참선으로 못 이어집니다.
따라서 정념상속正念相續, 정념을 상속시킨다고 생각할 때에 오욕적중五欲賊中이라, 잠이나 식욕食慾이나 이성욕異性慾이나 명예욕名譽慾이나 재물욕財物慾이나 그러한 오욕의 원수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불위소해不爲所害라, 그러한 원수가 우리를 침범을 못합니다.
우리 원수는 다른 데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못 보는 마음, 즉 무명심無明心과 또는 무명심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내가 있으면 탐욕심貪慾心이 있고 진심瞋心이 있겠지요. 또는 오욕심五欲心 이것이 모두가 다 무명심에서 오는 잘 못 보는 것입니다. 즉 도둑 마음입니다.
이러한 도둑 마음이 그때그때 우리 마음을 침범해 있습니다. 과거 무수생無數生동안의 도둑 마음이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소沼에는 꼭 차있습니다. 금생에도 국민하교에서 부터 대학까지 대체로 있다 없다 그러한 것만 배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가 비었다. 반야사상을 우리가 다소라도 알기는 알아서 그렇게 해야 하겠는데, 그 순간뿐인 것이지 그냥 그 있다 없다 에 걸려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공부가 앞서 말씀과 같이 정념공부가 지속적으로 상속된다고 생각할 때는 삼독오욕三毒五欲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삼독오욕의 침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하시는 공부로 꼭 그와 같이 지속적으로 공부를 하십시오. 지속적으로 공부를 하시면 이것은 우리 업장業障이 녹아짐에 따라서 집안 운수도 다른 것도 모두 다 좋아 집니다. 몸에 잔병이 있다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반야사상般若思想, 지속적으로 모두가 다 본래 있는 것이 아닌데 모두가 다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진여불성 뿐인데 그 생각을 가지고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한데 있는 세간적인 유위공덕有爲功德, 세간적인 그런 액운厄運도 다 없어지고 맙니다. 그렇게 되어야 기복불교祈福佛敎도 참다운 기복불교가 됩니다.
세간적인 상을 두고 우리가 복을 비는 것은 상의 범위 내에서 구속되어서 큰 복도 올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을 떠나버린 참다운 공부를 한다면 우리가 부르지 않아도 진여불성 가운데는 무한의 공덕이 있기 때문에 저절로 우리한테 공덕이 다 오는 것입니다. 복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 불성佛性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것입니다. 우리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나보다도 나를 훨씬 더 압니다. 세삼스럽게 내가 부처님이시여 나한테 무슨 재산을 주십시오. 이렇게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진여불성은 다 미리서 아신단 말입니다.
또는 우리한테 있는 불행이나 그러한 것이 진여불성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행이 될 수가 없습니다. 천지우주는 모두가 다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우주는 바로 부처님 덩어리입니다.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진여불성 덩어리가 바로 우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네 불행이라 하는 것은 다만 상에서 봐서 불행인 것이지 진여불성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행은 조금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에 금생에 인연因緣이 다해서 자기 목숨을 버린다 하더라도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자마자 금생에 지은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런 손해가 없습니다.
지금 재산을 몽땅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그것도 아무 손해가 없습니다. 재산을 잃어버림으로 해서 우리업장이 녹아 갑니다. 고생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업장이 빨리 녹아지는 것입니다. 몸이 안락스러우면 안락스러운대로 우리 업장이 더디게 덜 녹습니다. 따라서 고생스러운 것이나 남한테 배신당해서 슬퍼하는 것이나, 슬퍼하므로 해서 우리 업장이 빨리 녹고 동시에 무상無常을 느낍니다. 허망무상을 느낀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안락스럽고 허망무상을 못 느끼면 다 비었다는 소식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모두는 다 허망하지 않는가. 결국은 다 이별하지 않는가. 이렇게 느끼고 있을 때 우리는 보다 더 진여실상 자리에 가는 관문인 제법공 자리를 빨리 느낍니다.
그래서 무문혜개無門慧開스님도 무문관無門關이라. 일체가 비었다는 무無의 관문을 지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공부나 염불공부나 무슨 공부나 다 하나의 공부입니다. 다만 우리 본체 본성품本性品을 안 떠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면 그러한 말씀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내 법法은 본 성품을 안 여읜다.’ 본 성품을 안 여의고 공부를 해야 참다운 공부이고 그래야 참선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공부하실 때는 그와 같은 마음 자세를 가지고서 꼭 정定과 혜慧가 쌍수雙修가 되어야 합니다. 정과 혜가 아울러서 공부를 해야 공부가 빠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진여불성 가운데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와 자비慈悲가 온전히 원만히 갖추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공부 역시 진여불성에 걸 맞는 공부를 해야 이른바 계합契合이 빠르단 말입니다. 그러는 것이지, 치우치고 혜는 혜慧대로 또는 선정은 선정禪定대로 닦으면 공부의 계합이 더딘 것입니다.
그러하면 어떠한 것이 지혜를 안 여의는 것이고, 어떠한 것이 선정이라는 정을 안 여의는 것인가?
이것은 앞서 제가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우리 마음이 훤히 빛나는 진여불성 자리 우리 마음의 등불이 고향 길로 가는 그러한 광명의 등불인 일체존재는 오직 하나인 생명의 광명입니다.
우주에 가득 찬 오직 하나의 광명입니다. 그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는 것 보고서 우리 마음이 지혜에 머물려 있다 그럽니다.
바꿔서 말하면 우리 마음이 본체本體에 머물러있다. 우리 마음이 본 성품에 머물러있다. 이른바 육조스님의 단경 말씀대로 하면 일상삼매一相三昧라. 모두가 오직 하나의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 자리를 느끼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앞생각 뒷생각 사이에 틈이 없이 염염상속念念相續으로 지속을 시켜야 만이 참다운 진여불성자리에 우리가 증명證明해 들어갑니다.
부처님께서 금생에 나오신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진여불성 자리를 알게 해서 그 자리를 깨달아 들어가게 하기위해서 이생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지여불성 자리를 알아서 또는 깨닫고서 그 자리를 증명하고자 해서 이생에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자이니까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핵심적인 공부는 무엇인가 하면, 팔만장경八萬大藏經의 핵심은 무엇이고 하면 정혜쌍수定慧雙修라!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도 보십시오. 정혜쌍수입니다. 화엄경華嚴經이나 모든 경經들이 정혜쌍수定慧雙修 정혜균등定慧均等이라, 지혜와 선정이 아울러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마음의 등불인 그 자리에 딱 머물러 두고서 지속적으로 그 자리를 안 여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육조단경 식으로 육조혜능스님 말씀으로 말하면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일상삼매는 혜적慧的이고 지혜를 의미하고, 일행삼매는 정적定的이고 선정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해서 지혜와 선정이 아울러져서 우리가 공부할 때는 참다운 진소위眞所謂 참선이 됩니다. 지혜와 선정이 균등히 되어야 참말로 참선이 됩니다.
주문呪文으로 하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로 하나 어떻게 하시나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한 것에 걸리지 마십시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이라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한 것은 하나의 상인 것인데, 상이야 어떻게 되었던 진여불성眞如佛性만 의미하면 됩니다.
다만 하나님이란 그것이 저 밖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 몸속이나 내 몸 밖이나 우주에 언제나 어디에나 있는 우주의 생명生命 우주의 바로 진여불성 이러한 자리를 의미할 때는 하등 허물이 될 것이 없습니다.
허두에서 말씀과 같이 부처님의 공부는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의 공부입니다. 감로왕여래는 죽지 않는 최상의 맛 죽지아니하고 이별도 없고 영생하는 일체 지혜공덕智慧功德을 갖춘 최상의 맛이 감로입니다. 그러한 맛을 우리가 못보고 죽는다고 생각할 때는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지극히 큰 손실입니다.
우리 생명이 그렇게 길지가 않지 않습니까. 날숨 한번 들이 못 쉬면 바로 죽음입니다. 어느 때 죽을지모르는 것입니다. 어느 것도 자기 것은 없습니다. 제법공 도리에서 보면 내 몸도 내 것이 아닌데, 다른 모든 것들이 나의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 때문에 우리 생명을 낭비할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버이 도리 또는 스승의 도리 남편 도리 아내 도리 그 도리를 다 하셔야 합니다. 게으름 없이 다 하셔야 하나, 하시는 가운데도 앞서 말씀과 같이 진여불성자리 자기 생명의 본 고향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고 해야지 그 자리를 떠나버리면 이것은 우리 생명이 그냥 겉돌고 맙니다. 생사해탈生死解脫의 성불成佛과는 상관이 없어지고 맙니다.
마땅히 생명의 길, 지금 우리 사회가 제아무리 혼란스럽고 불확실하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은 명백합니다. 명백한 길인지라 조금도 에누리가 없습니다. 속임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결단심으로 분명히 믿으셔야 우리 생명의 낭비가 없고 손해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금생에 이 몸 이대로 부처님의 계행戒行 착실히 닦으셔야 되십니다. 살생殺生하지 말고 음탕한 행위를 하지 말고 자기 배필 외에 어떠한 음탕한 행위도 하지 말고 정당한 수입 아닌 것은 갖지도 말고 정말로 적게 먹고 적게 써야 합니다.
적게 먹고 적게 써야 그래야 해탈의 길로 가는 자기 몸도 마음도 가볍습니다. 많이 두어 봐도 아무런 자기 성불, 참다운 감로왕여래의 공부,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공부에는 아무런 도움이 못됩니다.
마땅히 최선을 다 하면서 최선으로 바로 살고 바로 말하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므로 다른 생명을 해치면 아니 되겠지요. 개와 닭과 소와 나와도 둘이 아니므로 개고기 소고기 그러한 것도 안 먹어야 하겠지요. 그런 것 먹어서 살로 안 갑니다. 살로 안 갈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것을 먹으면 세포를 오염을 시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분명히 느끼셔야 합니다.
나 보다 더 업장이 무거운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러한 세포가 나한테 온다고 생각할 때에 좋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정말로 명명백백明明白白합니다.
명명백백한 가르침인지라 우리는 단호하게 믿어야 합니다. 믿고서 철저한 계행戒行지키고, 철저한 계행을 지켜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빨리 알아지고 또는 빨리 우리 몸으로 마음으로 증명證明이 됩니다. 계행 못 지키고 우리 몸이 더러우면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지라 부처님 마음이 증오證悟가 안 됩니다.
우리한테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이 본래로 갖추고 있습니다. 천지우주를 훤히 볼 수 있는 힘, 우주 만유를 다 알 수 있는 힘 모두를 갖추고 있으나 우리가 제대로 바르게 못사니까 발휘를 못하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오랫동안 공부했다 하더라도 제대로 공부를 잘은 못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분명한 가르침을 제가 제대로 다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부처님의 행복幸福 자비慈悲 지혜智慧 공덕功德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조금도 우리한테는 흠축이 없습니다.
분명히 믿으시고서 앞서 말씀과 같이 그 자리, 진여불성 자리를 순간도 놓치지 마시고 누구하고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저변은 부처님한테 가고 있는 마음이 흘러가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잠잘 때도 부처님한데 가고 있는 그 마음 그대로 흐르게 하고 잠을 드시면 잠자는 가운데서도 공부가 됩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금생에 성불하십시오.
허망한 세간에는 아무 것도 실상은 없습니다. 감투도 대통령도 아무 것도 실상이 아니라, 모두가 다 허상虛像입니다. 그러한 것에 속지 말으시고 부처님 가르침 정말로 바르게 믿으셔서 꼭 금생에 성불成佛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감로왕여래南無甘露王如來!
*19920908-대구불교교육원설법-청화대종사
*19920908-정안 이철건 촬영
*19921010-녹취워드정리-본정 김영동
*19921227-마음의 고향 5집 게재
*20050723-DVD작업-본정 김영동
<본문과 관련된 큰스님 친필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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