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 호>
20000814-성륜사 하안거해제법문
<우리 마음이 보배의 곳집>
말복末伏은 지났습니다만 아직도 늦더위가 가시지 안 했습니다.
이런 때는 어떠한 재미있는 법문 보다는 차라리 시원한 바람이 더 좋으신데 바람을 제가 선사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 마조馬祖스님, 마조스님 그러면 이분도 정통正統 조사祖師입니다. 훌륭한 조사스님인데 이분한테 불자님들이 많이 와서 법문法門을 청하면 나한테 문법을 청할 것이 아니라 나는 당신들한테 드릴 그런 보배가 없으니 바로 돌아가서 자기 보배 곳집 자기 보배 곳집을 파내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이렇게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보배 곳집은 어디가 별도로 자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안에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자성自性이란 말씀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자성이라, 자성이란 말은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그 모든 것의 본성인 동시에 바로 우리 자신의 근본 성품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범부 중생들은 자성을 잘 모릅니다. 자기 성품을 자기가 잘 모른단 말입니다.
내성품은 금생에 나와서 부모님한테 유전적으로 받아 온 그런 자기 개성에다가 금생에 이것저것 배우고 생각하고 이런 것이 자기 성품이 아닌가? 이렇게 보통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것은 우리 범부 중생이 느끼는 이러한 자성은 하나의 가상에 불과 합니다. 참다운 자기 성품이 아니 단 말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께서 우리한테 해주신 법문의 대요도 우리 중생들이 느끼는 우리 중생들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참다운 자기가 아닌 이것은 망령된 자기라, 이른바 망아妄我라, 망령될 망妄자, 나 아我자, 망아란 말입니다.
우리가 무슨 깊은 공부를 할러면 우선 자기 스스로 자기 존재의 한계성을 알아야 됩니다. 자기 존재의 한계성을 모르면 그보다 더 훨썩 훌륭한 것이 우리한테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충당 할라고 생각할 때는 묽은 것을 다 없애야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도 우리 스스로 그 잘 못된 자기 하나에 가짜에 불과한 것을 진짜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망령된 불교 말씀으로 하면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거꾸로 본단 말입니다. 뒤 바꿔 본단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몰아내야 그래야 인제 참다운 자기 근본성품根本性品 아까 말씀 드린 봐와 같이 자성自性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성이라,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자성이란 그런 술어를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자성을 조금 더 부연시켜서 말씀을 하면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그럽니다. 자기 본성품은 이것은 오염된 것이 아니라 청정한 분별시비라든가 또는 자타의 시비라든가 모든 것을 다 떠난 청정한 성품이기 때문에 자성청정심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대도大道를 통한다. 또는 그 참다운 진리眞理인 보리菩提를 얻는다.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자성청정심을 깨달아서 얻는 것에 지니지 않습니다.
오늘 같이 이렇게 더운 날도 그 더위를 없애는 가장 최상의 방편은 무엇인가? 가장 훌륭한 청량제淸凉劑는 무엇인가? 이것도 역시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시원한 바람도 너무 쌔면 우리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그냥 싫증이 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 몸도 마음도 시원스럽게 하는 것은 부처님 법, 우리 자성에서 우러나오는 참다운 진리眞理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 드린 봐와 같이 마조馬祖스님도 나한테 오지 말고 자기 각자에 가추고 있는 보배 곳집을 스스로 찾아서 스스로 발굴을 하라, 이렇게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만 해서는 우리가 납득이 잘 안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떠한 방법으로 해서 자기한테 있는 자기 보배 곳집을 우리가 발굴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그 우리한테 있는 못된 집착執着 못된 고집固執을 버려야 됩니다. 우리 범부 중생들은 다 고집이 있습니다. 불법佛法 부처님 법을 배운다 하더라도 꼭 자기 식으로 배울 라고 한단 말입니다.
또는 요즘은 그 여러 가지 사이비 종교가 얼마나 많습니까. 참다운 종교 같으면서도 또 내부를 보면 아주 야릇한 그런 것이 많이 들어 있는 사이비 종교도 있습니다.
그러고 그 무슨 명상운동, 무슨 운동, 무슨 기 운동, 저는 그 로스앤젤레스 거기서 인제 조금 살았습니다만 로스앤젤레스는 국제도시가 돼 놓아서 세계 각국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여러 가지 그 사람 몸을 만져서 병도 낫게도 하고 여러 가지로 해서 그냥 이렇게 가만히 보고서 병을 나을 수 있다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그 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겠습니다만 그런 것은 완전한 치유법이 못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사람의 몸이 어디가 불편한 것도 역시 그냥 몸만 불편한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우리 마음이 조화를 잃어 버렸단 말입니다. 마음이 부조화不調和스러워서 그런 하나의 위화감 때문에 자기 정신과 육체의 위화감 때문에 또는 주변 사람과의 그런 조화스럽지 못한 관계 때문에 이런 것에서 우리 병이 주로 많이 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선 몸의 불편에 따른 부분적인 국부적인 그런 것만 치유한다고 그래서 우리 병이 낫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님이다.
또는 우리 인간 존재라는 것은 제한된 무상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 존재는 어느 누구나가 다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면 할 수가 없습니다.
과거 전생의 업장業障 따라서 금생에 태어나지 안할 수가 없는 것이고 업장이 없으면 사람으로 안 태어납니다. 천상으로 태어나고 그렇지 않으면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서 영생永生을 누립니다.
그러나 사람 정도 밖에는 과거 전생에 못살아 나서 그 할 수 없이 업장에 묶여서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난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그 낳을 때부터서 모순을 짊어지고 나왔기 때문에 우리 인생고人生苦라는 것은 피할래야 피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피한다 하더라도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그런 한계상황은 우리가 넘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만약 우리 인간 밖에 없고 다른데 좋은 데가 없다고 한다면 사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각박하고 망막하겠습니까. 그러나 다행이도 인간보다도 더 나은 곳이 또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희망이 있습니다. 또는 그 더 나은 곳은 이것은 어떠한 우리 노력으로 해서 갈 것인가? 어떤 방법을 취 할 것인가? 그것도 어려운 것이 아니라 굉장히 쉽단 말입니다.
그 인간보다도 더 나은 곳 또는 인간 세상에서 사는 동안도 가장 쉽게 사는 법 이것은 사실은 가장 이것이 어느 누구나가 지키기 쉬운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그 우주의 도리 자연의 도리에 따른단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여름인데 참 덮지만 가을이 없으면 오는 가을이 없으면 얼마나 망막하겠습니까. 금방 또 찬바람이 나온단 말입니다.
그와 똑 같이 우리 인간도 그 아무리 금생이 망막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최상의 행복이 항시 보장되고 약속 돼있습니다.
그런 방법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 우리 사람들을 그냥 난행고행難行苦行 시키고 그래가지고서 우리를 그냥 못되게 고생을 시키는 그런 법이 아니단 말입니다.
성불成佛이라 하는 그런 훌륭한 열매가 있다 라더라도 너무나 고생스러우면 갈 수가 없는 문제 아닙니까. 그러나 사실은 성불의 법이 제일 쉬운 법입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남 듣기 싫은 말하기보다도 남 듣기 좋은 말하기가 훨썩 더 쉽습니다. 남한테 욕을 하기보다도 남을 칭찬하기가 훨썩 쉽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은 것보다도 우리가 남한테 베푸는 것이 훨썩 쉽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그 보배 곳집을 우리가 보배 창고를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것인데 그걸 어떻게 우리가 발굴하고 파낼 것인가?
이것은 그 우리한테 있는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그 못된 고집固執을 없애야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그 고집을 가리켜서 아집我執 법집法執 그럽니다. 아집 법집이라. 그 부처님 말씀 가운데서 좀 어려운 말씀이어도 꼭 필요한 간단한 것은 우리가 외우는 것이 좋습니다.
아집은 이것은 불교가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 대체로 중국 문화권 중국 한문漢文 권을 거처 왔기 때문에 우리가 한문 표현을 떠나서 불교佛敎를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한문을 우리가 쓰면 훨썩 또 쉽게 납득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집이라, 나 아我자, 집착할 집執자, 아집이란 말입니다. 나라는 고집 우리 범부 중생은 나라는 고집을 떠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 내 몸뚱이 이 금쪽 같이 그 귀한 내 몸뚱이 또는 자기 내외간 같으면 자기 내외간 부부간의 그 몸뚱이 자기 자녀간의 몸뚱이, 자기란 존재가 대관절 무엇이 간데 내 몸뚱이를 이와 같이 아끼고 자기 가족을 아껴야 되는 것인가?
인연因緣 따라서 같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까 마땅히 아껴야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엄밀히 부처님 법문으로 비춰보나 또는 현대 과학적으로 비춰보나 나라는 존재라는 것은 사실은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한 거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과 다른 가르침과 기본적인 차이의 하나가 무엇인가. 이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두가 다 무상하단 말입니다. 무상無常하단 말은 허무虛無하단 말과 똑 같습니다. 무상하다.
말 그대로 하면 없을 무無자, 항상 상常자, 그 항상한 것이 없이 항시 변화무쌍變化無雙 하단 말입니다. 항시 변화무쌍 한 것이 이것이 무상입니다.
따라서 어느 것도 우리가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어느 것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금생에 살다 보면 자기가 아주 싫어한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자기한테 손해를 끼치고 자기 하는 일에 대해서 훼방毁謗을 놓으면 응당 싫어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얼마 안 가서 다 죽고 만단 말입니다. 몇 백 년 가는 것도 아닌 것이고 아니 벌써 삼사십 먹었으면 몇 십 년 살다 다 죽지 않습니까. 금방 죽을 랑가도 모르는 것이고, 또는 남을 미워하는 자기 스스로도 마찬 가지입니다.
자기 스스로도 무상하고 다른 사람도 무상하고 다 다 허무하단 말입니다. 잠시간 인연 따라서 잠시간 만나고 헤어지고 할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무상한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지금 어떤 관계가 있든 좋든 굳든 간에 어차피 헤어지고 말 것이고 또는 금생에 설사 무슨 사업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성공하려면 여러 가지 그 장애나 애로가 얼마나 많습니까.
더러는 남을 속여야 되고 또 장사하려면 이익을 또 많이 넘겨야 되니 정직 일변도로 가서는 장사해서 남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이 산다는 것은 이렇게 모두가 다 불교 말씀으로 하면 업을 짓는단 말입니다. 그 업도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남한테 손해를 끼치는 악업惡業을 지을 수가 있고 또는 좋은 업 남한테 베풀기도 하고 남의 마음을 기쁘게도 하고 또는 법문으로 해서 남한테 진리를 인도하기도 하고 이와 같이 선업善業을 지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걸로 해서는 우리 장차 행복을 보장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우리 행복을 보장하는 참다운 좋은 업이 될 것인가? 이것은 불교 말 씀으로 도업道業이라. 길 도道자, 업 업業자, 도업이란 말입니다. 도업 이것은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우리가 우리 행위를 절제하고 행위를 거기다 맞춘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듣더라도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꼭 자기 식으로 불교를 믿을 라고 한단 말입니다.
가령 학문이 좀 있어 가지고 경을 보기를 좋아한 사람들은 덮어 놓고서 경을 많이 보고 부처님 법문을 많이 외이는 것이 참다운 불법이라고 고집을 합니다. 불교 학자나 그런 분들은 대체로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재주가 있고 아무리 불경 책을 많이 본다 하더라도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다 보고 다 외울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권수로 하면 해인사 팔만대장경으로 해서 한 5000권이 넘습니다. 그걸 어떻게 다 볼 수가 있습니까.
따라서 그런 사람 식으로 불경을 많이 외이고 부처님 말씀을 많이 외이는 것이 참다운 불법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런 투의 그런 불교 수행자나 불교인도 있을 것이고, 더러는 그 문자라는 것은 다 마음 깨닫는 법인 것이니까. 문자는 별로 필요가 없다. 그저 마음 닦는 참선법參禪法만 닦으면 된다. 이렇게 해서 그 문자를 무시하고 또 참선만 주로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인 경을 무시하고 참선만 주로 한다는 그런 것은 불교 말씀으로 암증선暗證禪이라, 어둘 암暗자, 증명할 증證자, 그냥 의미만 어떤 방법으로 참선을 할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마음을 정화를 시킬 것인가. 또는 공부를 하고 있으면 그 참선參禪 하는 그 차서次序나 순서는 어떤 것인가. 이런 것도 잘 모르면서 덮어 놓고 참선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다가는 가령 한 단계, 참선 할 때는 그 깊이가 여러 단계가 있는 것인데, 그런 단계 단계 올라 갈 때 마다 여러 경계가 나오는 것입니다. 재미도 지고 아, 더러는 별로 경계가 재미도 없고 그런 것이 나오는 것인데, 그런 때 마다 경계를 자기가 안다고 생각할 때는 내가 지금 이만큼 와 있구나, 이만큼 진전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나 그런 경계를 전혀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캄캄하단 말입니다.
한 단계 올라가 놓고서 훨썩 더 높은 단계에 올라갔다고 그렇게 교만심驕慢心을 부릴 수도 있고, 또는 마음이 좀 쾌적快適 하고서 마음이 툭 트이면 내 공부가 다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근래에도 보면 아, 무슨 21살 먹어서 도인 되어 깨달았다. 25세에 깨달았다 그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작 깨달았는가 안 달았는가 저는 잘 모릅니다. 모르나 대체로 너무, 수련하는 그런 과정도 별로 거치지 않고서 너무 빨리 깨달은 분들은 대체로 보면 그런 과정을 잘 모른단 말입니다.
잘 모르면 또 다른 사람한테 가서 이른바 인가를 받아야 되겠지요. 훌륭한 큰스님한테 인가를 받아서 깨달았다고 그런 증명을 받아야 되겠지요.
그러나 또 그 증명할 만한 큰스님이 없으면 그 사람도 별로 신통치 않으면 깨달음이 아닌데도 도를 성취를 미처 못 했는데도 ‘지금 그대가 도를 성취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오류를 범하는 것이 과거나 또는 근래에나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래 놓으면 자손손타自損損他라, 자기도 손해를 보고 남도 손해를 끼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도인이라고 인정을 받아 놓으면 그 때는 공부를 더 할라고 마음을 먹겠습니까. 공부가 부족하다고 해야 공부를 더 할 것인데 아, 그대는 공부가 다 성취가 되었다. 그래서 인정을 해버리면 그때는 도인 행세하느라고 평생 동안 공부도 못하고 알둥말둥한 소리 하다가 가고만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선만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경을 상당히 배워서 어떻게 참선을 할 것인가. 또 참선을 해서 올라가는 경계는 어떤 경계가 있는가. 이런 것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땅히 그냥 경을 보지 않고서 참선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참선 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경전 아까 말씀드린 대로 어떻게 참선을 할 것인가. 또는 참선을 해 갈 때에 그 차서는 어떤 것인가. 이런 높고 낮은 단계를 우리가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교학敎學 교리敎理 공부는 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는 어느 분들은 염불念佛하는 공부가 제일 좋지 않는가. 염불은 그 무슨 교리를 안 배워도 염불은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염불하면 그때그때 마음도 재미지고 몸도 개운하고 또는 우리한테 부처님의 가피加被도 있고 또는 선신善神들이 우리를 도와주고, 이러니까 꼭 염불하면 다른 것은 거기에 다 들어간다. 물론 다 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염불도 역시 염불도 우리가 염불삼매念佛三昧라, 염불삼매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삼매란 우리 맘을 오로지 하나로 모우는 것이 삼매지 않습니까.
삼매도 깊은 삼매 또는 낮은 삼매 그런 삼매의 종류가 많이 있습니다. 헌데 아무튼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우는 공부가 삼매란 말입니다.
삼매나 참선이나 다 같은 뜻입니다. 참선도 이렇게 하다보면 차근차근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아진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산란스럽기 때문에 마음을 하나로 모우고 모아야 그래야 그 뭉친 힘, 뭉친 힘으로 해서 우리 근본根本 번뇌煩惱를 다 녹인단 말입니다. 그래가지고서 깨달음이 오는 것인데,
염불도 마땅히 오랫동안 하다보면 그때는 염불삼매에 들어갑니다. 염불삼매에 들어가면 그때는 어떤 것이 있는 고 하면 다른 삼매도 물론 그러나 특히 염불삼매는 그 삼매 가운데서 극락세계極樂世界를 훤히 맛본단 말입니다.
그 우리가 금생에 산체로 극락 갔다 온 사람도 있고 또 여러 가지 그런 말씀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께 그런 것도 역시 그런 염불삼매라든가 그런 것에 대해서 확실한 증거를 다 제시한 그런 경전도 보고 했으면 좋은데 경전을 안 보고서 그냥 덮어 놓고서 암중모색暗中摸索 같이 그렇게 해서 삼매를 좀 얻어 놓으면 그때는 그 극락세계에 갔다 왔다는 그것이 말입니다. 그런 표현들이 아주 그냥 서투런 표현들이 많이 있단 말입니다.
어떤 서투런 표현인가 하면 꼭 이 몸 가지고 간다든가 또는 우리 몸을 어디다 두고 간다든가 이런 말씀들이 사실은 우리 불교적인 의미에서는 굉장히 서투런 표현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비단 염불삼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참선을 하던지 간에 우리가 오로지 마음이 딱 모아지면 정말로 극락세계를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어째서 극락세계를 우리가 보는 것인가. 우리 불자님들 극락세계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 이 세계는 이른바 사바세계裟婆世界라고 하지 않습니까. 극락세계 반대말이 사바세계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바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있는데 사바세계와 극락세계가, 사바세계는 여기가 있고 또 어느 한계 저 공중에 높이 올라가면 극락세계가 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 공중에 얼마만치 타고 올라가면 그때는 아, 공중에 공해도 없고 좋은데 가서 극락세계가 있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불자님들 깊이깊이 잘 명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극락세계와 사바세계가 여느 국경이나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그 아까 제가 허두에 우리 마음의 그런 창고, 우리 마음의 보배 곳집을 발굴하라 그런 말씀을 드리지 안했습니까. 우리 마음이 얼마만치 우리 마음의 그런 보배를 얼마만치 파낼 것인가. 우리 마음이 얼마만치 깊을 것인가. 거기에 따라서 똑 같은 세계도 더 흐리게 보이고 더 맑게 보이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양을 먹을 때도 기분 좋아서 먹을 때와 기분 나빠서 먹을 때와 소화 기능이 다르지 않습니까.
또는 똑 같은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여건이 자기 마음이 쾌적할 때는 모두가 다 좋게 보이고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슬플 때는 그렇게 그 영롱한 달빛만 본다 하더라도 눈물이 펑펑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나 또 기분이 좋은 사람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달님이 빵긋이 웃고 또 보일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모든 존재라 하는 것은 우리 마음 따라서 그때그때 변동이 된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이 사는 사바세계와 극락세계도 우리 마음이 청정해서 성자의 그런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 자리 이대로 다 극락세계로 우리한테 그렇게 투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디에 가고 오고 사실은 하는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꼭 여기 떠나서 날개 타고 어디 가 가지고 날아서 인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앉아서 염불삼매라든가 참선삼매라든가 삼매에 든다고 생각할 때는 극락세계를 훤히 체험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대승불법大乘佛法의 돈오법문頓悟法門에 있어서는 사바세계裟婆世界 즉적광토卽寂光土라! 사바즉적광裟婆卽寂光이라!
적광토란 말 이것은 극락세계란 뜻입니다.
사바세계는 아까 말씀드린 봐 우리가 사는 세계란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 이것이 극락세계와 그런 국경이나 한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 우주라는 것은,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천지 우주라는 것은 본래로 극락세계입니다. 본래로 적광토라, 적광토 이것은 청정淸淨한 광명토光明土란 뜻입니다.
그 안락만 있고 행복만 있고 영원적인 그런 아주 그야말로 조금도 고통이 없는 사무친 그런 행복스런 세계가 극락세계 아닙니까. 그런데 극락세계가 그 우리 세계 떠나서 저 어디 공간에 올라가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극락세계라는 것은 무변무량無邊無量의 세계입니다. 끝도 갓도 없는 세계란 말입니다. 끝도 갓도 없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세계도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세계도 극락세계에 다 포함해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보배는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극락세계에 가서 보배를 우리가 얻어오는 것도 아닌 것이고, 어느 신통자재神通自在한 도인들한테 타가지고 오는 것도 아닌 것이고 우리 스스로 마음의 곳집 우리 스스로 마음의 보배 그 보배 문만 열러 놓으면 언제 어느 곳이나 모두가 다 극락세계 아님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극락세계를 우리가 감견感見이라, 느낄 감感자, 볼 견見자, 우리가 평소에 없는 것을 느껴서 보는 것보고 감견 그럽니다. 그런데 삼매에 들면 극락세계를 우리가 스스로 감견 한단 말입니다. 느끼고 보고 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서 삼매에 딱 든 그대로 이 몸 그대로 이 몸을 어디 공중 까지 솟아 올라가서 어디에다 맡기고 가고 그럴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참선으로 하나 염불로 하나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 삼매에 들면 그때는 참선參禪 염불念佛 주문呪文이나 다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삼매에 든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무념무상無念無想 상태에 든단 말입니다. 우리 생각은 그래저래 잡스러운 생각들 때문에 항시 산란스러우니까.
우리가 물을 본다 하더라도 명경지수明鏡止水라, 밝을 명明자, 거울 경鏡자, 티끌이 없는 그런 밝은 거울이나 또 그칠 지止자, 물 수水자, 파동이 치지 않는 그런 잔잔한 물이나 이렇게 되어야 이제 만상萬象이 거기에 비춰오지 않습니까.
바다 물에서 파동이 치면 그냥 여러 가지 모양도 이그러져 온단 말입니다. 그와 똑 같이 우리 마음도 산란스런 마음에서는 바른 것이 비춰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잔잔하니 우리 마음을 모아서 우리 마음을 모우기 위해서는 우선 철저한 계행을 지켜야 됩니다.
도덕적인 계행戒行이 없으면 되는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말씀도 시라불청정尸羅不淸淨 삼매불현전三昧不現前이라! 계행이 청정해야 그래야 인제 삼매가 나온단 말입니다.
우리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삼매를 얻을 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준비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준비가 필요한 것은 이것은 세간적으로 도덕을 철저히 지켜야 됩니다.
부부간에도 아주 절조를 지켜서 정말로 절조 있는 내외간이 되어야 할 것이고, 또는 나이 자신 어른들한테는 우리가 공경해서 받들어야 할 것이고, 또는 본래 진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남한테 많이 베풀어야 한단 말입니다.
베풀 것이 없으면 그때는 말로 베풀면 됩니다. 부드러운 말, 또는 유연스러운 말, 자비로운 말, 이런 것은 말로 베푸는 것입니다. 또는 표정으로 베푼다, 우리 얼굴로 베푼단 말입니다.
그 업장이 많은 사람들은 얼굴도 찌푸리고 그냥 보면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항시 명량한 사람은 다시 보고 싶고 또 보고 싶고 한단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얼굴로 보시布施 하는 것입니다.
마음 보시라, 마음 보시도 돈 안 드리고 하는 보시입니다. 마음으로 그 사람의 행복을 우리가 기원 한단 말입니다. 어떻게 그 사람의 행복을 기원 할 것인가 자기와 그 사람과 딴 사람이 아니 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항시 기본적인 근원적인데서 우리가 출발해야 됩니다.
남한테 베풀 때도 저 사람이 지금 곤란스러우니까 이제 내가 베풀어야 되겠다. 이렇게 베푸는 것은 범속한 사람들이 베푸는 것이고, 불교 신앙을 갖은 사람들이 베푸는 것은 저 사람과 나와 절대로 본래로 둘이 아니다. 그 본래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새삼스럽게 지금 지어서가 아니라 본래 그대로 본래 생긴 대로가 본래 둘이 아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법은 이것은 자기 마음을 자기 범부심凡夫心을 온전히 비우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온전히 비운다고 생각할 때는 그 보다도 더 행복스럽고 그 보다도 더 축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것은 금생에 지금 자기 남어 있는 몇 십년 인생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고, 또는 금생으로 해서 우리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이 세속적인 사람들 그 좋지 못한 견해 가운데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무엇인가 하면 끊을 단斷자, 단견斷見이라.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인생은 금생뿐인 것이지 과거도 없고 또는 미래도 없다. 금생에 우연히 태어났다. 이 세상은 한번 일생 이것은 한번 뿐이다. 이것 보고 단견 그럽니다.
그러나 분명히 과거도 있고 미래도 있단 말입니다.
비록 과거나 미래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그냥 끊임없이 과거도 이와 같은 몸으로 태어났고, 또 미래도 이와 같은 몸으로 태어날 것은 아닙니다.
과거세에 지은 업業 따라서 그 업에 맞추어서 업에 비례해서 금생에 이와 같은 몸을 받았고, 또 금생에 자기가 어떻게 행동을 했는가, 금생에 업 따라서 또 미래에 있어서 그 업에 맞추어서 업에 비례해서 또 우리가 미래 몸을 받는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 몸이나 또는 금생 몸이나 또는 내생 몸이나 같은 몸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보고 같다고 하는 나뿐 견해 이것보고 상견常見 그래요. 항상 상常자, 상견이라, 우리 중생들은 보통 단견 상견을 갖습니다.
우리 인간은 꼭 금생뿐이다. 금생뿐인데 아무렇게나 살면 어쩌는 것인가. 남의 등을 치나 남한테 기분 나쁘게 하나 금생에 잘 살면 그만이 아닌가, 이런 투는 그 단견입니다.
그러나 비록 전생과 내생이 있다 하더라도 전생과 내생이 똑 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인들 가운데서 아까 말씀마따나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든 것이 다 무상하다. 무상하다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참 진리입니다. 어느 것도 무상의 굴레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일체 존재는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습니다. 다 그렇습니다. 이른바 인연생멸因緣生滅의 법이란 말입니다.
산이요, 냇이요, 또는 제아무리 강도가 강한 다이아몬드요,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툰 것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도 그대로 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 거시적인 두두러진 현상만 보기 때문에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그렇게 생각이 안 되겠지요, 자주 만나면 오늘이나 내일이나 똑 같이 늙지도 않고 같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한 몇십년만에 만나면 상당히 변모가 되어서 처음에는 잘 몰라본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그런 속임수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 사실은 어떠한 것이나 어느 순간 찰나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 순간 찰나찰나 변화해서 마지않는단 말입니다.
변화해서 마지않기 때문에 아무리 집착해 봐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설사 우리가 친구지 간에 아주 친한 친구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느 때 인연이 다 하면 그냥 헤어질 수 밖에는 없단 말입니다.
그럴 때 무상無常의 도리를 모르면 저 사람은 꼭 나만을 좋아해야 할 것인데 저 사람은 왜 그러는고 이러나, 그러나 인연이 금생에 만날 인연이 다 하면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죽을 수도 있는 것이고 또 달리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도 더 좋아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럴 때 무상을 안다고 생각 할 때는 아, 당연히 그러는 것을 내가 새삼스럽게 무어 그럴 필요가 있을 것인가. 그냥 체념이 온단 말입니다.
그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런 아집이라, 나라는 고집 나라는 것이 이것이 본래本來 없는 것인데 이른바 무아無我인 것인데, 부처님 공부 하면서 무아를 모르면 부처님 공부 했다는 보람이 없습니다.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말입니다. 정말로 참 무아인 것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가 도를 통하기 위해서 본래 무아가 아닌데 억지로 아, 무아를 공부해라 그러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무아란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와 같이 지금 형상을 현상적으로 모양을 나툰 것이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공부도 많이 하셔서 그 18세기 유명한 철학자 칸트를 대체로 아르시겠지요. 칸트를 연구는 안했어도 대체로 인제 칸트 말씀을 들르셨겠지요, 칸트가 한 유명한 말 가운데서 간단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물物 자체自體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 사물의 본래 모습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물의 본래 모습은 우리 중생이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중생의 업장 따라서 우리가 굴곡해서 우리가 왜곡歪曲해서 잘 못 보는 것이지 본래 모습을 그대로 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성자聖者가 돼야 때 묻지 않은 안목으로 비로소 사실을 사실대로 봅니다. 이른바 실상實相을 본단 말입니다. 요새 철학 가운데도 실존철학實存哲學이라,
그런데 굉장히 모다 어렵게 말을 하고 있으나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실상을 그대로 보는 것이 이것이 실존철학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가상假相 밖에는 못 보는 것이고,
그런데 가상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을 본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원어는 실상을 볼라면 성자가 돼야 한단 말입니다.
성자가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닌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봐와 같이 성자가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장 쉬운 일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자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어떻게 살든지 간에 금생에 인연 따라서 우리가 장사도 하고 또 다른 직업도 가지고 있고 여러 가지로 여러 형태로 살고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사실은 지금 성불成佛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성불의 길을 우리가 더듬어 왔고 금생도 그러고 죽은 다음에도 단박에 미래 세에 우리가 부처는 못 된다 하더라도 그래도 하여간 차곡차곡 지금 성불하는 즉 말하자면 우리가 공덕功德을 지금 쌓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인간은 본래로 부처이기 때문에 꼭 장차 부처가 되고 만단 말입니다. 부처가 못 되면 어떠는 것인가. 부처가 못되면 또 뱅뱅 우리가 윤회輪廻 길에서 태어났다 죽었다 태어났다 죽었다, 이와 같이 그런 그 고생 세계에서 우리가 윤회를 한단 말입니다.
욕계欲界라든가 색계色界라든가 무색계無色界나 그러한 곳은 우리 중생이 죽고 살고 윤회하는 처소입니다. 윤회 합니다.
욕심을 미처 못 떠난 세계는 욕계 아니겠습니까. 또는 미세한 물질적인 그런 것을 미처 못 떠난 세계는 색계입니다. 또는 무색계는 그 물질은 없지만 인간의 번뇌煩惱가 모양도 없고 몸도 없지만 우리 의식 자체가 미처 번뇌를 못 떠난 세계가 무색계란 말입니다.
이런 것을 다 떠나야 그래야 이제 우리가 본래 부처의 자리로 갑니다. 본래 고향 자리로 간단 말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서 성자가 되고 못 되고 성자가 될 수도 있고 못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우리한테는 본래로 성자가 될 수 있는 요소가 갖추어 있고 또는 본래 우리 마음은 본래로 바로 성자의 마음하고 똑 같단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나는 금생에 나와서 무던히 내가 잘 못 살고 망상妄想도 많이 하고 또는 짓궂게 남을 성가시게 하기도 하고 했건이 나 같은 사람 마음은 상당히 오염汚染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염려를 하시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염려하실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그것은 오염이 안 된단 말입니다.
어째서 오염이 안 되는 것인가. 그 오염이 되고 무슨 더럽히고 더럽지 않고 하는 것은 그 모양이 있어야 더럽다 안 더럽다 할 것인데 모양이 없는 것은 오염 할 래야 오염 시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오염 시킬 라야 시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금생에 설사 우리가 잘 못 살았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본래 마음자리 아까 제가 말씀드린 그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자리, 우리 자성自性은 바로 불성佛性인데, 그 청정심자리 청정한 자리는 조금도 오염이 안 됩니다.
따라서 부처님 당시에 7살에 그 단 7살에 성자가 된 분도 있단 말입니다. 또는 14살에 출가해서 단 2년 동안 닦아서 16세에 성자가 된 분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그와 같이 본래로 청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 딱 믿고서 바로만 닦으면 아, 그렇게 오래지 않은 것인데 우리가 필요 없이 기우杞憂한단 말입니다.
나는 지금 잘 못 살아서 상당히 내 마음은 오염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그야 말로 불경佛經도 훨썩 많이 보고 아, 몇 생을 더 경과해야 내가 공부가 성취가 되겠지 이렇게 느긋이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나이를 많이 먹고 적게 먹고 그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또는 이렇게 승려僧侶가 되고 승려가 안 되고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그 도덕적道德的으로 원만한 생활을 해야 된단 말입니다. 내외간에 같이 절조를 지키고 같이 도반道伴이 되어서 말입니다. 참선도 그 조석으로 같이 하고 그러면 얼마니 좋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가족적으로 자기 가정을 하나의 수행 도량道場을 만든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공부하면 훨썩 좋습니다. 우리 같이 출가 했다고 그래서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때그때 또 장애가 많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신라 때 부설거사浮雪居士는 지지리 승려가 되었다가 승려를 그만 두고 처사가 되어서도 도인이 되었습니다. 자기 아내도 도인이 되고 자기 딸과 아들도 다 도인이 되었습니다. 네 식구가 다 도인이 되었습니다.
도인道人 되는 것이 이것이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우주宇宙의 도리道理에 따른단 말입니다. 본래가 부처기 때문에 우주라는 것은 이 땅덩이나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모두가 다 지금 부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불교 우주관宇宙觀에서는 텅텅 비어 있다가, 텅텅 빈 이 공간空間 덩어리에서, 텅텅 빈 공간 덩어리가 그냥 빈 공간 덩어리가 아니라, 그 부처님 자리 진여불성이라는 생명은 그대로 있습니다. 모양만 존재하지 않은 것이지 그 순수 에너지인 불성 자리는 그대로 항시 있습니다.
그러다가 인연이 되면 그때는 우주가 형체가 이루어지고 형체가 이루어진 뒤에 식물이 생기고 각 동물이 생기고 우리 인간이 생긴단 말입니다.
또 그런 뒤에는 오랫동안 세월이 흐르면 또 다시 우주가 파괴가 됩니다. 파괴가 된 뒤에 또다시 우주가 텅텅 비어서 에너지만 남습니다.
이와 같이 4겁四劫이라, 텅텅 비었다가 또 형체가 생겼다가 또 생물이 살다가 또 파괴가 되었다가 또 텅텅 빈 공으로 갔다가, 이와 같이 공겁空劫 또는 성겁成劫 주겁住劫 또는 괴겁壞劫이라, 이와 같이 네 가지 형체가 바꿔지는 것이 불교 우주관입니다.
따라서 제아무리 바꿔지고 몇 천 번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생기고 변동이 된다 하더라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봐와 같이 그 근본 성품자리 근본 생명 자리인 진여불성은 조금도 그때는 변질이 없습니다.
우주가 파괴가 되어도 그 자리는 그 자리, 진여불성 그 자리, 우주가 다시 형성 되어도 그 자리는 그 자리, 우리 이 인간 존재가 이와 같이 살아도 그 자리는 그 자리,
다 그래서 그 진여 불성 자리를 볼 수 있는 성자의 안목에서는 지금 이렇게 모양을 갖추고 있는 이 자리도 다 부처님의 광명光明으로 빛나는 광명의 세계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꽝꽝하게 보고 물렁물렁하게 보고 여러 가지로 우리가 보겠지요, 그것은 우리 중생의 업장 따라서 그렇게 보일 뿐인 것이지 참말로 이 실상 참말로 실존은 이것은 부처님 광명만 우주에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비약적飛躍的으로 공부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냥 더디더디 이렇게 한 단계 두 단계 올라가면서 공부 할 것이 아니라 그냥 비약적으로 빨리 공부 하시고 싶으시겠지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주문呪文을 외이든 또는 염불念佛을 하든 또는 화두話頭를 참구하든 그 것은 본인 인연에 맡기는 것이고 어떻게 공부 하든 간에 우리 견해만은 본래 그 자리에다가 우리 견해를 두어야 됩니다.
지금 나는 이렇게 안 보인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 바로 볼 수 있다고 하면 이 모두가 다 부처님의 청정광명淸淨光明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광명光明의 화신化身으로 보이고 부처님으로 보인다.
다른 사람을 볼 때에 부처님으로 볼 수가 없으면 공부가 아직은 덜 된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아, 미운 사람마저 부처님으로 보인다고 생각할 때는 기분이 나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인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다 부처님 광명으로 보이고, 사실은 우주라는 것은 광명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불교의 부처님 말씀으로, 부처님 말씀은 그 표현도 그야말로 굉장히 참 절묘絶妙합니다.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또는 무변광불無邊光佛이라,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모두가 다 빛나는 생명이란 뜻입니다. 광불光佛이라.
부처라는 것은 참다운 생명生命이란 뜻입니다. 이 우주가 모두가 다 그런 생명의 광명으로 해서 충만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것이 이른바 돈오頓悟라 문득 깨달아 버린단 말입니다.
차근차근 공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답답합니다. 우리가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또는 지금 중생이 돼서 또는 업을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업도 이것이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도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마음으로 깨달아 버리면 그걸로 해서 다 거기에 포함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삼복三伏더위이더라도 우리 마음을 해방 시켜버리면, 우리가 얼마나 꽁꽁 묶여 있습니까. 그 자기 고집固執, 자기 독단獨斷, 자기가 잘 못 배운 것 모다 그런 것 때문에 지금 꽁꽁 우리가 층층이 감겨 있습니다.
다 털어버리고 여러분들이 공부 하시고 싶은 대로, 꼭 무슨 염불만 해야 된다. 꼭 화두만 우리가 들어야 된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팽 그 자리단 말입니다.
그 자리 깨닫는 그 자리, 그 광명으로 한도 끝도 없는 행복한 그 자리, 그 자리에 가기위한 하나의 방편인 것이니까.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대로 화두 하고 싶으면 화두를 하면서도 광명천지 내 마음의 고향 자리를 생각하시면서 하시고,
그러나 염불念佛이라는 것은 조금 달라요, 그것이 왜 그런고 하면 그냥 이것이 무엇일까 저것이 무엇일까 그보다도 그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그 동경심憧憬心 그리워하는 마음 말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고 싶어서 그리워하면 그 마음이 얼마나 참 그야말로 갸륵하고도 소중하고 또 그리워하는 그런 마음으로 해서 오늘 만나는 것보다는 당장 가서 만나는 것이 낫다는 그런 맘이 생기고 그러겠지요.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한테 가는 길도 부처님 되는 길도 꼭 그리움 간절한 그 동경심 그런 마음이 전제가 되면 훨썩 더 우리 공부가 속 빠릅니다.
그러기에 용수龍樹보살도 난행문難行門과 이행문易行門이라, 우리 공부해서 성불하는 문도 어려운 문이 있고 쉬운 문이 있단 말입니다.
그 쉬운 문은 어떤 것인고 하면 그 부처님을 그리워해서 닦는 그런 문이 쉬운 문입니다. 쉬울 이易자, 행할 행行자, 이행문 이란 말입니다.
제2의 석가釋迦란 용수보살이 이것은 아주 교판敎判을, 교리를 판별했단 말입니다.
어려운 문은 내가 원래 부처인데 닦아 가지고 내가 부처가 된다. 이것도 물론 좋은데 아직은 우리가 부처가 다 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자리를 간절히 동경憧憬하고 흠모欽慕하고 우리가 그래야 결국은 참 그야말로 우리 마음이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비약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지금 더위에 펄펄 땀을 흘리시고 계셔서 대단히 제 보기에 송구스럽고 이제 죄송스럽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 해방解放을 시켜버리시면 그런 가운데도 우리 마음은 정말로 참 청량제가 돼서 우리 마음이 행복幸福이 그야말로 충만하실 것입니다.
꼭 그 돈오頓悟하는 문득 다 깨달아서 정말로 우리가 아직 온전히 부처님 자리를 체험은 다 못했다 하더라도 그 이치理致로 만은 부처가 다 된 샘치고서 공부를 하는 것이 훨썩 더 우리 마음도 편안하고 공부도 속 빠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20000814-하안거해제법문-청화대선사설법
20000814-삼영불교음반-학무 유락재 촬영
20040613-DVD동영상작업-본정 김영동
20070823-녹취 워드작업-본정 김영동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받아 정리한 것입니다.*
<본문과 관련된 큰스님 친필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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