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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30호 부산kbs홀 대법회

                <제 30 호> 

19930905-부산KBS홀 대법회


진여연기眞如緣起

  

  우리 중생이 사는 세계는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나 한 세상 나그네길입니다. 욕계도 색계도 무색계도 바로 고생의 바다요 불구덩이나 똑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법회장분위기는 우리 불자님들의 지극한 자비심慈悲心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산승도 마치 고향 같은 아늑한 그런 환희심歡喜心과 행복幸福에 넘치고 있습니다.


  안심법문安心法門    

  

 우리가 대체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법문은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우리 중생이 마음도 편안하고, 또는 몸도 편안하고, 사회도 편안하고 모두를 다 편안하게 하는 그러한 안심법문입니다.

  고생의 바다고 이 불구덩이를 어떻게 우리가 편안하게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부처님 법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안심이 되려면 그냥 안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갈 길이 어떻게 어느 길로 가는 것인가? 우리 목적지는 어디멘가? 또 목적지까지 가는 우리 가는 방법은 길의 순로는 어떠한 것이고, 어떻게 길을 걸어가야 빠른 것인가? 그런 것을 몰라서는 마음이 안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문도 우리 중생의 안심을 위해서, 우리 중생의 근본이 무엇인가? 또는 우리가 떠나온 고향은 어딘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고향은 어딘가? 이런 것을 아주 극명하게 우리 중생들에게 밝히신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의 대요를 살펴보면,  상식적으로 보면 세간의 인간들이 보통 느끼는 그런 차원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모든 현상계가 우리 중생이 보는 그대로 존재한다. 이런 가르침입니다.

  불교 술어로 말하면 이것을 유교有敎라. 있을 유자 가르칠 교자,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을 그대로 긍정하는 이러한 유교 입니다.이런 차원도 있고,

 그러나 우리 중생이 보는 차원, 이런 유교만 가지고서는 우리가 제대로 근본 뿌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현대 유물주의 사회, 이 물질 지상주의 사회, 이런 사회는 모두가 이른바 ‘있다’‘없다’ 하는 그런 것에 근거된 사회가 되지 않습니까.  자본주의도 마찬가지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물질은 물질 그대로 존재한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런 차원이란 말입니다.


 그러한 있는 것이 전부고 우리 중생의 눈에 안 보이는 세계는 없는 것이 아니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있는 것 가지고 서로 많이 가지려고 눈에 보이는 것이 화려하면 좋은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 빈약하면 나쁜 것이고, 이렇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은 우리 중생들이 보는 그대로 존재한다. 이런 유교有敎 차원에서는 인생의 참다운 행복幸福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욕계도 고생뿐이고, 또는 더 올라가서 색계도 고생이고, 또는 무색계도 고생이다. 이런 것은 왜 그런고 하면 그 중생들이 눈에 보이는 세계, 눈에 보이는 그러한 존재, 이런 것이 전부다하는 그런 견해에서 그런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우리 중생들이 있는 것에 집착하는 한에는 고생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일체종지一切種智라.모든 존재의 근본 뿌리를 훤히 알으십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이것은 연기법緣起法으로 해서 인연법因緣法으로 해서 잠시간 나온 것에 불과하다.

 불자님들은 대체로 아시겠습니다. 초기 아함경阿含經같은 부처님 근본 불교의 초기 법문도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고” 불교에서 법(法)이라 할 때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우주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하는 그런 법과 또는 만법이라 하는 제법의 법, 그런 두 가지 개념槪念이 있습니다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고 생각할 때는 먼저 연기를 보아라,

 

 따라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우주의 근본 도리를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 즉 석가모니, 세존인 나를 본다.” 이런 말씀입니다.

 따라서 사실은 연기를 모르면 우주의 도리, 법도 모르는 것이고 또 부처님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기는 어떠한 것인가?

 불교를 믿는 여러분들은 인연법, 연기를 모르시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그러나 가만히 보면 연기를 낮은 차원의 연기는 제법 아시는 분들이 많지만 본질적인 연기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기회에 꼭 그런 본질적인 연기법을 알으셔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또는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런 식의 연기법은 보통 차원의 연기법 아닙니까.

  그러나 그런 식의 연기법은 이것은 일로해서는 우리 인생고를 인생의 본질적인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 부처님의 연기법의 도리도 이런 연기법은 소승적인  연기법인 것이고, 대승적인 부처님께서 꼭 하시고자 하는 본래 연기법의 뜻은 아닙니다.

  현대 과학적으로 말하면 상대성 원리, 소승적인 연기법은 마치 상대성 원리 같은 그런 범주를 미처 못 벗어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근본 도리에서 이뤄지는 연기법은 이것은 진여연기眞如緣起라. 또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


  우리 중생의 때 묻은 마음에서는 미처 모른다 하더라도 삼천대천세계 우주에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우주의 참다운 생명生命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부처님 법에 대해서 신을 갖지 안하면 부처님 법을 닦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도 못하고 우리의 때 묻은 눈으로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우주의 청정법계淸淨法界에는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주의 참다운 생명자체가 충만해 있습니다.

어디가 있고 어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체적인 인간도 머리카락 끝부터 발끝까지 진여불성이 충만해 있습니다. 여기 계시는 우리 불자님들도 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진여불성이라 하는 순수생명, 현대적인 말로 하면 순수 에너지 이것이 충만해 있습니다.

 

 그리고 진여 불성이라 하는 그 자리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법성法性이고, 불성佛性이고, 참나眞我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이고, 열반涅槃이고, 또는 도고, 진리眞理입니다. 표현은 다르나 모두가 다 진리의 별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진여 불성이 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불생불멸不生不滅 본래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또는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러운 것도 없고 청정할 것도 없는, 부증불감不增不減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자리입니다.

  하여튼 어떤 분야로 보나, 즉 능력으로 보나 지혜로 보나 자비심으로 보나 또는 행복으로 보나, 어떤 면으로 보나 완벽한 자리, 충만한 생명 자체가 바로 진여 불성입니다.

  이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 산이고 냇이고 인간이고 또는 삼천대천세계의 별이고 달이고 해고 모두가 다 우주에 본래로 충만한 진여불성으로부터서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그래야 대승적인 연기법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법계연기라. 또는 진여연기라.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무엇인가?

  

  모두가 다 그런 연기법에서 왔거니, 모두가 다 그런 진여불성에서 왔거니, 그러면 진여불성은 물질物質 인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물질이라 하는 것은 공간성과 시간성이 있어야 물질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떠한 질량이 있다고 생각 할 때에는 동시에 공간성도 시간성도 있어야 질량이 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물질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물질이라고 한다고 생각할 때는 고유한 그런 공간성, 또는 시간 따라서 변화가 되는 그런 시간성, 이런 것이 있어야 할 거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인연 따라서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 만유의 근본 생명인 진여불성 즉 법성 또는 불심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이기 때문에 바로 불심입니다. 또는 우주 만유의 본체이기 때문에 법성이란 말입니다. 또 우주 만유의 참다운 모습이기 때문에 실상實相이라.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는 그러한 도리이기 때문에 중도中道입니다. 모두가 다 같은 그러한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자리는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니라는 말은 어디가 있고 어디가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디에나 존재해 있고 또는 언제나 존재하고 이래야 물질이 아닌 참다운 생명 자리가 되겠지요. 바로 이 자리는 우리 마음자리입니다.

 마음이 물질이 아니니까. 마음이 어디가 있고 어디가 없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남을 미워한다. 또는 남을 좋아한다. 미워하면 그 마음이 어디가 있습니까. 남을 미워하는 그 마음도 자취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감투를 좋아하고, 또는 어느 물질을 좋아하고 이런 것도 그냥 우리가 잘 보지 못하니까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이지 좋아하는 마음이 어디가 흔적이 없습니다.

 이조二祖 혜가慧可스님이 달마 스님한테 가서 ‘제 마음이 불안스럽습니다. 제 마음을 안심安心케 해주십시요’ 이렇게 간청을 드렸습니다.

 여러 가지 사연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달마 스님께서 ‘아! 그러면 그대 불안한 마음을 내놓아 봐라’ 혜가스님이 제아무리 돌아봐도 자기 마음이 어디에도 존재하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마음이 물질이 아닌데, 무처소無處所라. 어느 처소가 고유하게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모양도 있는 것도 아니고, 이름도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마음이라는 것은 명상名相을 떠난 것입니다. 이름도 떠나있고 모양도 떠나 있습니다. 

  진여불성도 그와 같이 물질이  아니고, 우리 마음도 물질이 아니고, 그렇다고 생각 할 때는 결국 하나가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내 마음 따로, 네 마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나 네 마음이나 다 하나의 마음입니다.

  또 별 마음이나 태양 마음이나 나무 마음이나 흙 마음이나 물 마음이나 물질이 아닌 순수 생명 자리는 모두가 다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이 자리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이라. 또는 불심 법성이라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인연법 따라서 모든 존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대승적大乘的인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연기법 이것이 왜 이것이 바로 우주의 법인 동시에 우리 불교를 통괄하는 그런 진리인가?  이 자리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자기 마음 떠나서 불행이 있고, 마음 떠나서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 마음도 우주에 충만해 있는, 그러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그 자리로 부터서 인연 따라서 자기 마음이 됐습니다.

 자기 몸은 무엇인가?  자기 몸도 역시 연기법 따라서 인연법 따라서 잠시간 진여불성으로 부터서 모양을 나투었습니다.

  진여불성이 원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공간성도 시간성도 없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진여불성이 인연 따라서 사람 몸이 되었다 하더라도 사람 몸도 사실은 물질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림자 같이, 물속에 비친 그런 달그림자 같이, 또는 아지랑이 같이, 그와 같이 상만 나툴 뿐인 것이지, 자기 몸이라고 그래서 이것이 물질이 아닌 것입니다. 


  가장 행복스러운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은 철두철미徹頭徹尾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고, 또 진리 그대로 조금도 굴곡이 없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과학 가장 궁극적인 철학 가장 행복스러운 종교 이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은 마음도 편안하고 몸도 편안하고, 누구나가 다 그러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행복 자체가 이것이 어데서 오는 것인가?

  어떻게 돼야 행복스러울 것인가?

 

  자기 마음의 본질도 우리가 훤히 알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또는 미워하는 사람이나 이 사람의 본질도 알고, 또는 우리가 숭상하는 물질의 본질도 알고,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막힘없이 알아 버려야 그래야 우리 마음이 편안합니다. 불안하지 않아야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갈 길도 모르고, 가장 소중한 자기 존재 파악도 못하고, 이런 차원에서는 행복이 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봐와 같이 그냥 그렁저렁한 행복, 찰나 무상한 그런 무상한 행복, 이런 것은 모르거니와 이른바 적어도 불멸의 행복, 영생불멸한 행복을 추구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물질적인 차원, 우리 중생이 보는 그런 현상적인 차원에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같이 투철한 본질적으로 보는 안목에서 볼 때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사는 욕계 색계 무색계 3계가 모두가 고생 바다 밖에는 아닙니다.

 어느 종교나 근본적인 신앙의 그 목표 의식이 모호 할 때는 참다운 불 같은 신앙이 못됩니다.

  

 이른바 불타관佛陀觀! 불자는 먼저 확실한 불타관을 확립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역시 그냥 방편적인 그런 가르침이 아니라 본질적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금생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고난을 뿌리부터서 구제할 수 있는 그런 일승법문一乘法門 대승법문大乘法門, 이런 법문으로 해서 자기 불교 인생관을 확립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현대와 같은 그러한 뿌리 깊은 문명의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현대병이 얼마나 지금 무겁습니까? 물질병 또는 그야말로 이데올로기 같은 그런 사상병思想病 말입니다.

 

 예술이고 또는 현대 종교고 철학이고 한도 끝도 없이 인간의 관념의 형태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사 하나의 종교를 예를 두고 봅시다. 하나님은 저기가 있고 나는 여 기가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나를 창조했을랑가 모르겠지만 지금 현재는 하나님은 저기 어디가 있을 것이고, 나는 여가 있고 또는 자기 남편은 저가 있고 나는  여가 있고,

  일반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다른 종교는 모두가 다 그와 같이 대립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 따로 있고 사탄은 또 따로 있고, 따라서 사탄은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사탄은 사탄인 것이지 사탄인 악마나 마귀가 하나님은 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남을 사랑하라. 남을 위해서 봉사하라. 여러 가지 지금 캠페인이 성행되고 있습니다. 또는 자연보호 보호, 자연 파괴나 환경오염이 우리 인간 생활을 위협하는 굉장히 큰 문제 아니겠습니까.

 세계적으로 떠들썩하고 굉장한 그런 운동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런 환경 운동에 같이 동참하여야 할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짊어져야 할 필수적 의무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 같은 것도 근본적인 해결을 생각해 볼 때는, 나 따로 있고, 남 따로 있고,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런 인생관으로 해서는 우선 자기의 편의 자기 이익을 먼저 앞세웁니다.  또는 자연 따로 있고, 나 따로 있고, 저 산은 산이고 나는 나고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잘 모르는 분들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이런 법문이 있으니까 우리 중생이 보는 산은 별도로 그렇게 산일 따름이고, 물은 우리 중생이 보는 그런 물일  따름이다. 이렇게 잘못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연기법이라 하는 부처님의 근본 도리, 이 도리는 바로 우주의 도리입니다. 우주의 법칙입니다. 연기법으로 볼 때는 산 따로 나 따로 가 아닙니다.

 너 따로 나 따로가 아닙니다. 동일한 동일 생명인 일미평등一味平等이라. 조금도 차이가 없는, 물질이 아닌 것이니까 차이가 없어야 되겠지요.

 좋다 궂다 많다 적다 말입니다. 그러한 상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닌 절대적으로 어떠한 것이나 완벽하게, 자비 지혜 능력 기능 행복 어떠한 것이나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그 자리에서 그 자리의 기운 따라서 일어나는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따라서 산도 물도 달도 거기서 왔습니다. 도둑놈도 또는 어떤 사람도 제아무리 표독한 사람도 모두가 거기서 왔습니다.

 따라서 그 자리, 진여불성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산도 나와 조금도 둘이 아닙니다.  너와 나도 조금도 둘이 아닙니다.  물과 나도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법성法性자리에서 볼 때는 우주는 중중무진이라. 조금도 차이가 없는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산을 함부로 하면 그만큼 우리가 보복을 받는 것이고 물을 함부로 해도 우리가 보복을 받습니다.

 불자님들은 제가 지금 말씀드린 봐와 같이 다른 것은 미쳐 모른다 하더라도 그 에누리 없는 방편이 아닌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진여연기眞如緣起 연기법의 도리를 항시 명심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기도가 되고 참다운 참선이 됩니다.   

 

  가사 우리가 무 무자無字 화두를 든다고 생각하여 봅시다. 개도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 조주스님께서 ‘무’라, 무라고 하셨으니까 무 무 하고 나아가면 우리 마음이 정화되면 견성오도見性悟道가 되겠지. 오랜 세월 동안 하다보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덮어놓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덮어놓고 하나님을 믿어라. 그런 식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지혜의 가르침입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전제로 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안 나오셨으면 우리가 더듬고 암중모색暗中摸索을 해서 길을 발견하여야 하겠지요. 그러나 세존이 나오신 뒤에는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생명의 낭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 그대로 우리가 신하면 됩니다.

 신시보장제일법信是寶藏第一法이라! 그러기에 믿음 이것이 모든 보배 가운데 제일법이란 말입니다.  

 자기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 만유의 근본 생명 자리, 그 자리는 우주에 충만한 자리요. 완벽한 자리인데, 그 자리로 부터서 잠시간 자기가 있고 남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저 사람은 나한테 해꼬지 해서 지독하게 밉다. 누가 안보면 당장 죽이고 싶다. 우리 사회를 보면 그런 일이 허다히 많지 않습니까?  자기 부모도 미운 때는 죽이게 되고 말입니다. 중생이라 하는 것은 그런 조건만 되면 자기 부모도 죽입니다.

 

 조건이 조금 좋으면 그냥 친하게 사귀다가도 조건이 좀 사나워져서 자기한테 손해가 온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친구도 형제간도 배신을 합니다.

 우리가 지금 위대한 정객들을 봐도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자기 이익에 맞아 합당 할 때는 서로 껴안고 악수하고 하지마는 감투를 서로 빼앗고 빼앗기고 한다고 생각 할 때는 잔인하게 배신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중생심衆生心인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곧 죽일듯이 밉다 하더라도 저 사람도 생명의 본질은 근본 마음 바탕은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철학적으로 생각이 될 때는 그 사람을 끝까지 지독하게 지나치게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불자들이 그냥 당장에 쉽게시리 부처님같이 도인들같이 ‘나와 남이 본래로 둘이 아니다. 천지 우주가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다.’ 그 자리는 증명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증명은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해야 합니다.

 견성見性이라. 볼 견자 성품 성자. 내 성품의 본성인 동시에 우주의 본 성품을 깨달아야 견성입니다.

 

  이렇게 되면 저절로 자기가 마음을 조작 않더라도 바로 저 사람과 나와 원래 둘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느껴 버리는 것이고,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분명히 봐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는 설사 이렇게 법의法衣를 입었다 하더라도, 알기로는 제법알지만 알기는 모두가 다 연기법이 아닌가. 원래가 일미평등한 진여불성에서 온 것이 아닌가. 이렇게 제법 알기는 알아도 여실하게 말로 뜻으로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윤리의 퇴폐 이런 문제를 호소하고, 또는 가정에서나 어디서나 절감하고 있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남한테 함부로 하지 말아라, 베풀러라, 이런저런 윤리적 덕목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지금 윤리의 길로 나아가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지금 기독교 인구만 보더라도 세계적으로 18억쯤 믿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불교는 그 반틈도 못됩니다.

 그러나 유교 도교 이슬람교, 그런 종교 인구를 합할 때는 세계 인구 반틈을 훨씬 상회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마땅히 그와 같이 종교 인구가 반 이상 된다고 생각 할 때는 세계가 보다 화평스럽고 화해하고 정말로 평화스런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못되고 있습니다.

 어느 종교마다 봉사를 역설하고 또는 사랑을 역설하고 자비를 역설합니다.

 왜 그렇게 못되는 것인가?    

 이것은  바른 철학이 바른 가치관이 확립이 안 되어 있습니다.

 우리 불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양보하면 모두가 쉬울 것인데,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라. 모두가 서로 양보하고, 부처님 사상대로 따르면 다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순식간에 한 줌의 눈을 뜨거운 화롯불에 넣으면 순식간에 녹아 버리듯이 그와 같이 모두가다 만사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사상이 제대로 안 박혀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거짓말 한 분 아니지 않습니까.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고 하면 분명히 둘이 아닙니다. 천지 우주가 오직 동일 불성, 일미평등한 동일 불성에서 나왔다고 생각할 때는, 나와 가지고서...,

 나는 제법 양심이 바르고 나는 지금 승복을 입었는데 그대는 불교도 안 믿고 승복도 안 입고 그대는 죄가 많치 않는가? 그대와 나는 거리가 굉장히 멀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이 드시겠지요.

  그러나 부처님의 차원 성자의 차원 바른 도리 차원에서 볼 때는 지금 도둑질 한 사람과 나는 똑 같습니다. 본질도 똑 같고, 현상으로 나왔다 하더라도 사실은 원래는 똑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가 다 제법諸法이 공이라. 인연 따라서 나왔거니...,

 불자님들 더우셔도 이런 진여연기법에 대한 말씀은 잘 명심해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부산은 그야말로 부처님 가르침이 아주 치성적인 훌륭한 도읍지입니다. 그래서 기라성 같은 큰스님들도 많이 계십니다. 많이 법문을 들으셔서 우리 불자님들은 굉장히 마음이 순숙되어서 정말로 진여불성에 가까워지신 분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법이 조금 어렵더라도 그때그때 다시 또 듣고 또 듣고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다문선지식多聞善知識이라. 많이 듣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잠재의식潛在意識에 참다운 부처님 도리가 차근차근 차곡차곡 거기에 축적이 되어서 우리 마음이 불성으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나왔기 때문에 무상無常입니다.  어느 순간도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저는 어느 법회 때 마다 꼭 잊지 않고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1초 전과 1초 후의 자기가 똑 같지가 않습니다. 하물며 오늘 자기와 어제 자기는 현저한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10년 전이나 10년 후나 그렇게 상당히 오랜 세월이 지나면 나도 꽤 나이가 많이 드는구나. 그렇게 느끼지만 순간순간은 미쳐 못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 어느 순간도 같은 자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후단멸前後斷滅이라. 앞서 지나간 자기와 지금 자기가 같지 않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이것이 연속되니까 내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어느 순간도 같은 것이 없으니까. 따라서 어려운 말로 하면 어느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따라서 어느 공간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물리학적인 도리 아닙니까. 어느 순간도 같은 모습이 없다고 생각 할 때 그런 것이 어디 있다고 할 수가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당체즉공當體卽空

  

 따라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만법이라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볼 때는 무상이고 같을 수 없이 변화무쌍變化無雙한 것이고, 전변무상轉變無常이라. 그러기 때문에 어느 공간도  사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부처님 말씀에 제법이 공이라.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을 분석하고 분석해 들어가서 끝에 가면 공이라. 이렇게 보통은 생각하지요.  그러나 부처님 대승법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색즉공이라 했듯이, 색은 물질 아닙니까.  물질이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제 몸도 역시 바로 공입니다. 여기 있는 테이블도 역시 바로 공입니다.  색즉공이요. 소리도 역시 공입니다. 성즉공聲卽空이라. 다 공입니다.

 

  같은 공도 분석할 석자, 빌 공자, 석공析空이라.

 우리가 보통은 현대물리학자들 같이 분석한 다음에 공이 아닌가? 이렇게 느끼시기가 쉽습니다마는 부처님의 대승법은 그렇지 않고 바로 즉공卽空이라. 또는 몸 체자, 체즉공體卽空입니다. 당체즉공當體卽空입니다.

  왜 공인 것인가? 이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은 시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공간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니까 바로 공입니다.

  그러니까 무아無我입니다. 내가 없단 말입니다. 무상이고 공인 것을 ‘나’라고 고집할 건더기가 어디 있습니까.

 다이아몬드나 금이나 감투나 대통령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의 연기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공입니다. 이 도리가 바로 반야바라밀 즉 반야般若의 지혜智慧입니다. 

  반야의 지혜 없이 우리 중생 병 못 고칩니다. 반야의 지혜 없이 우리 행복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즉공 도리를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22년 동안 반야설般若說이라. 부처님의 요설변재饒舌辯才 그 대 웅변 가지고도 22년 동안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공 도리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부처님의 친 종제인 제바달다는 도를 깨닫지 못하고서 엉뚱한 일을 많이 했지 않습니까.

 

  반야바라밀이 존재해야 참다운 부처님의 지혜智慧입니다.  반야를 떠나서는 어느 분야에서나 바르게 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문학적인 작품을 낸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세속적인 그저 흔히 있을 수 있는 그런 글이나 쓰는 것이지 그렇게 시원스러운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야에서나 걸작을 낸 사람들은 견성오도까지는 미쳐 못 갔다 하더라도 그 무상한 도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허무하지 않는가. 그런 도리를 조금쯤은 알아야 참다운 글도 쓰고 참다운 음악도 하고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제법의 공 도리를 알아야 부처님의 가르침이 됩니다. 

  제법의 공 도리를 알아야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모든 존재가 본래로 하나다. 그런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여불성이라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앞서 언급을 했습니다마는 진여불성 이것은, 어떤 존재나 모두가다 근본 실상은 진여불성인데 거기서 부터서 모두가 나온 것인데, 거기에서 우리가 왜 나왔는가? 

  이것은 우주의 법칙 따라서 법이자연法爾自然 적으로 나온 것이지만 우리 중생 차원에서 보면 무명심無明心이라. 우리 무명심 때문에 시초에 존재가 다 나왔습니다.

  

  무명심과 십법계

  

 무명심無明心은 뭣인가? 

 천지 우주가 오직 진여불성 뿐인데 우리가 우주의 순환 과정에서 마음이 가려져서 그것을 미처 모른단 말입니다.

  학식이 많고 적고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설사 박사 학위 석사 학위가 몇10개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식에 불과한 것이지 참다운 지혜가 못됩니다. 따라서 제아무리 세간적인 학문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아직은 불교에서 볼 때에는 무명심을 못 떠나 있습니다.

 

  무명심을 어떻게 떠날 것인가? 이것은 방금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의 실상 자리 이 자리를 깨달아야 비로소 무명심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명심을 여의어 버리지 못하면 무명심을 때버리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생명의 고향인 진여불성 자리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무명심을 떠나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영원히 끝도 갓도 없이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윤회하는 것입니다.  

  10법계라, 극락세계도 분명히 존재하고 또 지옥세계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옥은 무엇인가?  우리 무명심이 가장 어두운 세계입니다.  

  앞서 범어사 주지 큰스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이와 같이 청명한 날은 우리 기분도 좋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은 밝은 것을 다 좋아합니다. 왜 좋아하는 것인가?  우리 생명 자체가 본래로 밝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미워하면 그만큼 우리 마음이 어둡지 않습니까. 남을 미워하는 그 마음은, 우리 진여불성은 미움도 좋은 것도 없는 것인데, 우리가 남을 미워하는 것은 불성에 어긋나는 행동이므로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금세 어두워집니다.

  우리가 물질에 너무 집착하여서 이렇게 욕심을 낼 때에 청정 미묘한 마음이 금시에 어두워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명심에서 말도 무명심에 따라서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해서 이렇게 함으로 해서 더욱 더 어두워져서 가장 어두운 중생 세계 이것이 지옥地獄입니다. 

  조금 밝아지면 아귀餓鬼 세계라. 더 밝아지면 개나 소나 돼지 같은 축생畜生 세계라. 조금 더 밝아서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阿修羅 세계라. 훨씬 더 밝아지면 우리 인간人間 세상입니다.우리 인간은 그래도 그런 대로 무던히 밝아 온 샘입니다.

  더 밝아서 천상天上이요. 더 밝아서 진여불성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는 세계가 성문聲聞승이요. 더 깨달아서 우주의 연기법을 깨달아서 연각緣覺승이요. 모든 중생과 더불어서 성불로 가는 참다운 중생이 보살菩薩이고 온전히 깨달아야 그래야 부처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지금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그런 요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다행히도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은 과거 전생에 다섯 가지 계율戒律 정도는 닦았단 말입니다. 살생도 별로 하지 않고 훔치지도 별로 않고 음탕한 행동도 별로 않고 이렇게 해서 다행히 인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진여불성 극락세계라 하는 우리 고향으로 갈 것인가? 그렇지 않고 다시 인간 정도로 다시 헤맬 것인가? 

 

  여느 사람들은 잘 모르고서 인본주의라. 인간이 제일 높다고 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기는 합니다만 인간이 제일 높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보다도 더 높은 천상도 있습니다. 욕계에도 천상이 있고, 색계 무색계에는 천상뿐입니다. 그런 존재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그보다 훨씬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생명의 고향 자리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것은 우리 결단에 달린 것이고, 또 우리가 인생고를 떠나서 가기 위한  가르침은 앞서도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 이외는 없습니다.

  그러면 부처님 가르침을 어떻게 믿어야 기왕이면 빨리 가고 싶은데 어떻게 믿어야 빨리 갈 것인가?

  불자님들 심리학에서 자기암시自己暗示라는 법문을 알으시지 않습니까. 법문이라기보다는 일반 심리학적인 용어입니다만 ‘내가 나쁜 놈이다’ ‘나는 별 볼일 없지 않는가?’ ‘내가 아무리 바로 살려고 해도 진심嗔心이나 욕심慾心을 도저히 제거할 수가 없다.’  이렇게 자기 비하를 하고 이렇게만 생각할 때는 우리가 자기 발전이 오겠습니까.

 

  나는 본래로 석가모니는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석가모니는 우리보다도 훨썩 위대하기 때문에 부처가 된 것이고, 나는 과거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고 금생에 타고난 좌도 역시 많지 않는가.  견성오도나 성불은 나하고는 무관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을 절대로 말으십시요.

석가모니 마음과 예수 마음과 우리 마음이 똑 같습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것도 역시 똑 같습니다.

 진여불성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더하고 덜하고, 또는 청정하고 더럽고 그런 차이가 없습니다.

  도둑놈 마음이나 도둑놈 몸이나 우리 몸이나 똑 같습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때는 변동이 없습니다. 다만 인연 따라서 그 상만 차이가 있습니다. 상의 결합적인 차이만 있습니다.

 

  같은 탄소도 결합 여하에 따라서 더러는 검은 숯 부스러기가 되고, 또는 결정체로 되면 그때는 다이아몬드라 그 검무티티한 탄소가 말입니다. 탄소가 결합 여하에 따라서 숯이 되고 다이아몬드가 됩니다.

  그와 똑같이 진여 불성이 결합 여하에 따라서 전자가 되고 양성자가 또는 중성자가 됩니다.     

  본래는 우주의 순수 생명인 그 진여불성, 현대 말로 하면 순수 에너지 말입니다. 

  물질이 아닌 순수 에너지가 그때그때 결합 여하에 따라서 양자가 되고 전자가 되고 합니다. 또 그들의 결합 여하에 따라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합니다. 세계 어느 것이나 그런 원소로 안 된 것은 없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서 한 말씀 더 명심해야 할 것을 말씀드린다면 현대 물리학과 불교는 굉장히 밀접 불가분리不可分離 합니다. 현대 물리학이 사실은 지금 부처님 가르침을 가면 갈수록 밝히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현대 물리학은 모든 것은 본래로 비었다.

  에너지는 파멸이 안 되고,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 에너지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에너지가 산이 되고 달이 되고 별이 되고 하여도 에너지 자체는 조금도 변질이 없다. 다 모양만 허망 무상한 상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본질은 변질이 없다. 이러한 것이 현대 물리학적인  증명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씀드린바 예수의 몸이나 내 몸이나 석가모니 몸이나 똑같은 몸입니다.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으므로 석가모니 마음 내 마음 차이가 없어야 하겠지요.

  다만 우리 중생이 자작범부自作凡夫라. 우리가 잘못 봐서 나는 나요,  너는 너요, 나는 못나고, 너는 잘나고, 이런 마음 때문에 스스로 우리가 범부가 되는 것입니다. 설사 범부가 되었다 하더라도 본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석가모니나 나나 누구나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마음이 바로 부처라!

  

  그러기 때문에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불자님들은 말로는 심즉시불을 모르는 분이 별로 없으시겠지요. 마음이 바로 부처라!

  우리 마음이 닦으면 부처라. 닦아서 석가모니처럼 되면 부처라. 이렇게 생각 하신 분이 많으시겠지요.

 그러나 닦을 것도  없이 바로 이 마음, 남 미워하고 욕심내고, 이 마음 바로 부처라.  이 마음 바로 부처입니다.  

  석가모니한테나 예수한테나 달마 스님한테나 누구한테나 꿀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진정으로 진정으로 내 마음 이것이 바로 부처고, 내 마음은 본래로 오염이 안 되어 있다.  100% 믿으면 그 자리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마음을 열으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그 별것도 아닌 자기 몸뚱아리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제아무리 값비싼 팔찌를 하고 귀걸이를 하고, 이런걸로 해서는 우리 가치가 높아지지가 않습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너무나 허무합니다.  이 목숨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모릅니다.

  그렇게 허망 무상한 우리 인생인데 우리가 무슨 필요로 생명의 본 고향으로 가는, 본래 부처인 우리가 잠시간 졸고 있는 그 동안을 오랜 동안 연장을 시킬 것이 아니라 다시 깨어서 본래 부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마음 이대로 바로 부처인 것이고, 석가모니 마음, 예수 마음, 공자 마음,  하나님 다 똑같은 자리입니다.  일미평등이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본래 내가 부처라! 

  

    참선參禪 염불念佛

  

  우리가 염불을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참다운 염불은 나무아미타불이 저 십만억국토 저 밖에 계신다.  우리가 애쓰고 부르고 외이면 나한테 도움을 주시겠지, 이런 식의 염불은 참다운 염불이 못되는 것입니다.

  내 본래가 바로 부처고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인데 그 부처를 재확인하는, 미운사람이나 고운사람이나 본래 부처인 것을 재확인하는 공부가 바로 참다운 염불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우리가 무자 화두를 하나, 또는 이뭣고 화두를 하나, 어떤 화두나 모두가다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진여불성 자리를 안 여의어야 참다운 참선이란 말입니다.

  인류 문화사의 우리 수행법 가운데서 가장 궁극적인 수행법이 이른바 선! 참선! 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참선은 무엇인가? 더러 대답을 잘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저 화두하고 앉아 있으면 선이다.  참선은 그런 협소한 것이 아닙니다.  화두를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화두를 한다 하더라도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 만유의 생명 자리인 진여불성 자리, 그 자리를 안 여의어야 그래야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 자리만, 그 본질적인 본래면목 자리만 안 여읜다면 비단 무나 이뭣고만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또는 하나님 또는 알라나 모두가 참선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지구촌地球村시대 세계일가世界一家시대 이런 때에 와서는 자기 종교만 옳다.  자기 민족만 제일이다.  이렇게 해서는 존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바르게 느끼게 하는 가르침은  부처님 가르침밖에는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꼭 내 방식만이 옳다. 이런 식이 아니단 말입니다. 

  천지 우주를 하나로 보고서 모두를 다 동일불성同一佛性, 어느 것이나 모두가 부처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나무아미타불 장엄염불을 해보셨습니까?

  나무아미타불이 어디 계시는가 하면 도마죽위稻麻竹葦 무한극수無限極數 삼백육십만억三百六十萬億 일십일만一十一萬 구천오백九千五百 동명동호同名同號 대자대비大慈大悲 아등도사我等導師 금색여래金色如來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빽빽한 솔밭 대밭같이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일십일만 구천오백이라, 이것이나 저것이나, 억사람 천사람 모두가 다 동명동호라, 같은 이름 같은 호의 아미타불입니다.

 

  어느 사람들은 관세음보살님을 오랫동안 염한 사람보고 관세음보살보다 지장보살이 훨썩 더 영험이 있다.  이런단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지장경地藏經을 보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관음경觀音經을 보면 또 이제 관음보살님이 제일 좋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본뜻은 이것만 좋고 저것은 좋지 않고, 이경 만 좋고 다른 경은 나쁘다. 그런 의미는 절대로 아닙니다.  이 경이나 저 경이나 법화경이나 화엄경이나 어느 경이나 다 좋은 것입니다.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삼계의 윤회에 헤매지 않고 해탈의 그런 참다운 자성 참다운 불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지구촌 시대에 와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종교만 제일이다. 기독교에는 참선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시진 말으십시요.  설사 하나님을 외이고 하나님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네들 식으로 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이나 밖이나 바로 우주가 하나님뿐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무방합니다.

  사실은 예수님의 뜻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서 요한복음서 누가복음서 또는 묵시록을 우리가 허심탄회 하게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예수님의 본뜻은 지금 일부 기독교인들이 독선적으로 다른 종교를 배타하는 그런 데가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민족과 민족, 사회와 사회를 화해시킬 수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럴 것인가? 부처님 법은 바로 연기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 자리에서 온 동일한 동포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동체대비同體大悲란 말을 모르시는 분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동체대비를 너무나 얇게 생각을 말으십시요. 하나의 생명 자리, 우리는 만물과 더불어서 뿌리가 같고 일체 존재와 더불어서 생명이 똑 같은 것입니다. 그냥 적당히 똑같은 것이 아니라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온전히 똑같은 것입니다. 

  온전히 똑 같은 것이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가상만 다르게 되었습니다. 범부 중생과 성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중생들은 인연으로 이루어진 현상만 보고 있습니다.

  성자들은 현상도 보지만 현상을 상 그대로 집착하지 않고서 본질적으로 본래에서 본 성품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사상인 제법공 도리가 아니고서는 사람 사람끼리 화해도 안 되고, 세계적인 문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어떠한 문제에 있어서도 완벽한 온전한 해결은 볼 수가 없습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

  

  그리고 다만 진여불성 이것은 그냥 텅 비어 있는 공이 아니라, 허두에서도 언급을 했읍니다마는 진여불성 이 자리는 다만 물질이 아닌 텅 비어 있다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가운데는 일체 공덕功德이 다 들어 있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십니다만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진여불성 자리는 상덕常德이라. 영생해서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순수한 생명 이것은 영생불멸한 것입니다.

  또는 낙덕樂德이라. 안락무구安樂無垢라. 조금도 불행이 없습니다. 변치 않고 일체 공덕을 다 갖추었건을  그 자리에 불행이 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또는 고통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안락만 존재하는, 완벽한 행복만 존재하는, 그런 것이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그와 동시에 아덕我德이라. 나아자, 큰 덕자, 아덕 이것은, 우리 중생 이것은 망아妄我고 이것은 이른바 소아小我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잘 못 본 것이 이것이 나란 말입니다. 

 

  견성오도를 미처 못 한 사람들은 항시 자기라 해도 망령된  자기밖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참다운 자기 우주의 진여 불성과 온전히 하나 된 자리 이런 자리에서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을 위시해서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다 부리는 것입니다. 

  모두를 다 알고 모두를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깊이  느끼셔야 합니다.

 불자님들 우리 마음에 갖추고 있는 덕, 이것이 그냥 흐지부지한 보통 덕이 아니라, 아는 것도 모두를 다 알 수가 있고, 모두를 다 할 수가 있고, 일체 신통 묘지를 다 부리는 것입니다. 지식이 있고 없고 상관이 없습니다.

  육조 혜능慧能스님이 유식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닦아서 마음 깨달아서 마음이 온전히 본래면목 자리와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은 신통神通 부사의不思議해서 일체 것을 다 알 수 있고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절대로 제한을 말으십시오.

  그런데 하물며 나는 어디가 아프다. 나는 우울증이 있다.  나는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해봐도 무슨 병인지는 모르는데 아프기는 아프다. 부처님 법은 그런 아프고 조금 어디가 거북하고 이런 것을 치유할 수 없는 그런 시원찮은 법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완벽한 법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은 금생에 내가 설사 잘못 살아서 허물을 많이 범했다 하더라도 내 불성만은 내 본성만은 석가모니와 더불어서 조금도 흠절이 없다.  완벽하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할 때는 그 즉시에 우리 몸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우리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동시에 우리 잔병은 다 떨어집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다 똑같은 불성이거니, 다른 사람을 사랑해 보십시요, 그 사람도 꼭 자기를 좋게 봅니다.

  우리 몸뚱이는 우리가 생각한 것 같이 60kg, 50kg 그런 무게가 원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공인데 공이 무슨 무게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 대류권 내에서 우리 중생들이 업장으로 무명심에 가려서 무게를 느끼는 것입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리요.  육조 혜능 대사의 게송偈頌아닙니까. 본래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거니 어느 곳에 번뇌煩惱가 있고 티끌이 있을 것인가. 

 

 우리 중생이 억울하게도 무명심 때문에 잘못 봐서 밉고 좋고 이것이고 저것이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이대로 그 퇴폐頹廢하고 반목反目하고 분열分裂하고 이대로 사실은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사바세계 이대로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조금도 오염汚染이 안 되었습니다. 다만 중생들이 불쌍하니까. 본래로 극락세계인 것을 본래 부처인 것을 중생들이 잘못보고 스스로 자기를 구속하고 고생하는 것이니까 그것이 안타까워서 중생 제도濟度할려고 도인들이 교시하는 것이지 바른 차원에서는 그대로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오늘 죽어도 극락세계 내일 죽어도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자기 몸 허망 무상한 본래로 있다고도 할 수 없는 가상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자기 생명 자체는 조금도 흠축이 없습니다. 흠절이 없습니다.

  운문 스님한테 가서 어려운 때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이렇게 문법 하니까.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요, 시시시호시時時是好時라. 날마다 좋은 날이요, 때때로 좋은 때단 말입니다. 어려운 때는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날마다 좋은 날이고 때때로 좋은 때다.

  우리 중생 차원에서 현상적인 상대 유한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좋고 궂고 여러 가지 고난이 많겠지요. 그러나 진여불성자리 반야바라밀에서 볼 때는 그런 것이 흔적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자의 견해인 반야바라밀의 경계에서는 항시 좋단 말입니다. 

  

   언제나 제 말씀이 너무나 길어지는 것을 염려합니다. 그래서 될수록 제 마음을  제 말씀을 간추려서 줄여서 가겠습니다.

 

일체는 부처님 법으로 수렴된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성불하는 것이 우리의 근본 도리이고 사실은 우리 중생들은 불자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나가 성불 아니면 갈 곳이 없습니다. 갈 곳이 있는 것은 고생 바다 밖에 없습니다.

  어느 면으로 보나 고생 바다를 떠나는 길은 부처님 가르침 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석가모니 가르침이기 이전에 바로 우주의 도리입니다.  석가모니가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우주의 연기법緣起法은 항시 존재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연기법으로 볼 때에 천지 우주는 다 허망 무상하고 오직 존재하는 것은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먼저 알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과학적인 도리인 동시에 철학적인 원리입니다.

  연기법 이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바로 우주의 공덕이기 때문에 가사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라든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라든가 그런 것도 모두가다 연기법 속에 들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근본 본질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못됩니다마는 

아무튼 현대과학은 특히 정밀물리학은 부처님 가르침을 차근차근 점차로 증명해 갑니다.   

  따라서 싫든 좋든 간에 무슨 종교나 무슨 철학이나 세월이 흐르면 그때는 필연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으로 들어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냇물 저 시냇물이 종당終當에는 다 바다로 가듯이 부처님 가르침은 바다와 똑같습니다. 다른 철학, 다른 종교, 다른 이데올로기 이런 것은 모두가 바다로 흘러내려 오는 시냇물과 똑같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가 없는 천지의 도리입니다.  다행히도 우리 불자님들은 정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로 과거 무수생 동안에 닦아 내려온 그런 공덕으로 오늘날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신 것입니다.

 

  우리 눈을 찌르고 본다 하더라도, 거짓말 같으면 눈을 찔러서 소경을 만든다하더라 그것은 조금도 주저 없이 확신을 가지고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느 종교나 어느 과학이나 모두가다 가면 갈수록 점차로 부처님 가르침으로 들어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3천여 대중 박수>

  불자님들 그와 같이 바른 가치관 바른 불타관佛陀觀을 먼저 확립을 시키십시오.

  아무리 못되게 살았다 하더라도 내 마음은 석가모니와 더불어서 조금도 흠절이 없는 그러한 무한공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자비도 원만 지혜도 원만 우리 자비를 좀 베푼다고 해서 자비심이 줄어지지가 않습니다. 우리 지혜를 너무 많이 쓴다고 해서 우리 몸이 피로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먹는 음식도 이 욕계 중생이 몇 칼로리를 먹어야 한다. 지방질을 얼마나 먹어야 한다. 그러는 것이지 색계 이상 올라가면 사실은 음식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생명 자체의 생활이란 말입니다.

 

  음식 그런 것에 대해서도 너무 관심을 두지 말으십시요. 설사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리 생명 자리에다 우리 생명을 온전히 하나가 되게 시리 하는 그런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음식 같은 것은 별로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기도나 모두가 그런 공부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를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저기가 계신다. 우리가 기도를 모시면 나한테 와서 돕는다. 그런 것은 세간적인 기도법입니다.

  부처님 법은 그런 기도법이 아닙니다.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고, 천지가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하셔야 참다운 가피를 받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음식이나 그런 것도 마땅히 검소하게 자실수록 우리 몸은 훨썩 좋은 것입니다. 꼭 명심해 두십시오. 고기를 꼭 먹어야만이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생명은 생명 자체 스스로 지탱하는 것입니다.

 

  저 월남 트리캉승, 그분은 반체제 운동을 하신 스님인데 옥중에서 100일 동안 물만 먹고서 조석 염불 아침에 2시간 밤에 2시간, 4시간씩 조석 염불을 그렇게 하면서도 백일 동안 물만 먹고 지냈습니다. 그리고 지금 살아 있습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예로 우리가 극단적인 고행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마는 아무튼 우리 몸이라 하는 것도 역시 일체가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 몸도 역시 마음의 반영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업장 따라서 이와 같은 몸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청정하면 우리 몸도 그냥 즉시 반사작용으로 우리 몸도 청정해 옵니다.

  병도 꼭 약을 먹어야 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은 필요에 따라서 약을 좀 먹어도 무방하겠지마는 사실은 우리 마음이 우리 몸의 병을 꼭 낫을 수 있습니다.

  인도의 이른바 신지학神智學 이런 것은 심리요법 정신요법으로 우리 병을 낫는단 말입니다.  그런 법도 모두가 인간성의 무량무변한 공덕을 역설하고 발효한데서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부처와 나와 더불어서 일체가 호리 차이가 없는 하나입니다.


  청정淸淨 계율戒律


  부처란 것은 완벽한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확신할 때는 우리 몸도 거기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꼭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불타관을 확립하시고 그 다음은 계율을 청정히 하십시오.

  현재는 부처님 계율을 더러 함부로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거짓말이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사소한 것이나 우리 몸뚱이에 대해서나 우리 마음에 대해서나 어떤 것에 대해서나 조금도 오류가 없는 그런 말씀입니다.

  더러 세세한 계율 가운데는 인도에는 있고 우리 한국에는 없고 그런 점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음식을 어떻게 먹으라. 이성간에 어떻게 사귀라. 이런 정도는 조금도 빈틈이 없습니다. 

 

  이런 것은 꼭 우리의 마음과 몸을 정화해서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본래 성품 자리 진여불성 자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는 그런 법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계행을 지키지 않으면 그때는 우리 마음도 정화가 안 되고 우리 몸도 정화가 안 됩니다.

  어느 분들은 물질이라는 것은 허망한 것이니까 마음속으로 범하지 않으면 되겠지. 그러나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몸으로 범하면 마음도 그만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철저하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율을 지키셔야 그래야 우리  몸도 마음도 정화가 되어서 그래서 우리가 불성 자리에 더욱더 가까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인 우리 중생이 업을 지어서 어느 정도 그 업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나쁜 습관성 때문에 습관성習慣性을 떼는 것이 공부인 것입니다.

  나쁜 습관성 때문에 우리 몸도 아프고 마음도 흐린지라 그 습관성을 떼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선 계행이 청정해야 쓰겠지요.

 

계행이 청정해야 우리 마음에 선정禪定이라 하는 삼매三昧의 기운이 담깁니다.

  우리 중생 마음은 파도같이 항상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바람 잔 파도같이 또는 맑은 거울같이 그렇게 돼야 참다운 지혜가 비춰 옵니다.

  우리 중생들 마음은 마치 터럭 끝같이 항시 동요부단動搖不斷해 마지않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관념 너라는 관념에 가려서 이른바 반야바라밀을 몰라서 그럽니다.

  설사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어렴풋이 알았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습관성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철저한 계행을 지켜야 습관성이 녹아 나고 동시에 우리 마음이 가면 갈수록 우리 생활이 하루하루 부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몇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마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완전무결한 가르침인 것이고, 일미평등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른바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참다운 진리라는 것은 어느 문이 따로 있고 따로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염불하는  문이나 주문하는 문이나 참선하는 문이나 또는 기도 모시는 문이나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다만 핵심이 무엇인고 하면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이라 하는 그 반야바라밀 자리에 입각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참선도 부달성공不達性空하면 좌선무익坐禪無益이라. 제법의 공자리에 우리가 이르지 못하면 참선해도 별 볼일이 없단 말입니다. 부달성공이라, 일체 성품이 본래로 비어 있다는 그런 경계를 모른다고 생각할 때에는 좌선무익이라, 참선을 하여도 별로 이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공부가 돼내 안 돼내 그런 사람들은 보통은 다 모든 명상名相이 본래로 허망하다는 것을 잘 몰라서 그럽니다.

  자기 재산도 자기 몸뚱이도 자기 관념도 모두가 본래 바로 즉공卽空이라, 본래 공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느낄 때는 지장보살을 부르나 뭣을 부르나 다 하나입니다.  지장보살 약사여래 관세음보살 모두다 진여불성 자리의 공덕을 우리한테 표하는 자리입니다. 부처님 자리가 무슨 이름이 따로 있습니까.

  진여불성 공덕이 무한 공덕이기 때문에 한 말로 하나의 개념으로 해서는 다 표현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을 진여불성을 자비로운 쪽으로 봐서는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 봐서는 문수보살, 우리 중생들의 병고를 다스리는 쪽으로 봐서는 약사여래, 우리 영혼을 이끌어서  극락세계나 천상으로 인도하는 그런 면에서는 지장보살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순수한 생명의 광명이다.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 광명은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부처님은 바로 순수한 생명의 광명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바로 우주의 광명이다.  이런 차원에서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우리 생명의 본질인 부처님의 수명이 영생불멸永生不滅한 그런 차원에서는 무량수불無量壽佛입니다. 목숨 수자, 무량수불이란 말입니다.

  번뇌가 조금도 없이 청정한 면에서는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행복이 충만한 면에서는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 환희광불이란 말입니다.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는 것이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따로따로 뿔뿔이 있지 않습니다.  뿔뿔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부처님 가르침이 다신교라, 참다운 종교도 못되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분명히 바르게 느끼셔야 됩니다. 똑같은 것인데 다만 공덕 따라서 그와 같이 이름이 다르니까 어떻게 부르나 본래  하나다. 그렇게 생각하면 똑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바른 가치관 바른 불타관을 가지고서 계행 청정히 할 것이고, 그 다음 문제는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계행이 청정하다 하더라도 우리 공부가 지속적으로 계속이 안 될 때에는 우리가 과거 전생에 잘못 붙인 습관성, 금생에 나와서 잘못 붙인 그런 나쁜 습관, 이런 것이 순식간에 녹아 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생각 생각에 걸음걸음 소리 소리에 공부를 하여야 차근차근 더 익어져서 공덕은 더 쌓이고 나쁜 습관은 추방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산은 정말로 축복 받은 고장입니다.  저는 어제 밤에 왔습니다 마는 밤거리를 산책을 조금 해봐도 그 십자가가 별로 안 보였습니다.  십자가를 저는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 그야말로 의미가 깊은 것인데, 지금 잘못 믿는 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 같은 그런 가르침도 마귀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자기 조상 제사도 예수가 모시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조상 제사 모시는 것도 진리에 어긋난다. 다른 가르침은 모두가 다 마귀란 말입니다.

  지금도 역시 시한부 종말론이라.  얼마 안 가서 자기들 믿는 사람들만 영생으로 저위로 휴거가 되어서 올라가고, 다른 사람은 다 파멸이 온다. 이렇게 하므로 우리가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불자님들의 그런 열성으로 해서 부산은 정말로 축복 받은 고장입니다. 이것은 바로 선지식들이 그만큼 많이 계셔서 여러분들한테 감로수 같은 법음을 전달하시기에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저도 축복과 환희심을 느낍니다.

  여러 불자님들 바른 가치관, 반야바라밀을 꼭 가지십시오. 반야바라밀을 가지실 때에는 우리 마음은 천지 우주를 우리 마음으로 합니다. 우리 마음은 바로 천지와 더불어서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남을 미워하고 남을 싫어하고 하겠습니까.  물질이라 하는 것은 우리한테 필요한 필요조건은 되어도 충분조건은 못됩니다.  그걸로 해서는 우리 행복을 절대로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허두에 말씀드린 대로 안심을 바랍니다. 안락을 바랍니다. 안락을 바라면 안락스런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꼭 반야바라밀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와 같이 반야바라밀! 어느 것도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내 마음은 본래로 무량의 지혜 공덕을 다 원만히 갖추고 있다.

  이렇게 느끼고서 계행 청정하시고 거기에서 또 빠뜨리지 말 것이 지속적으로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염불도 화두도 주문도 모두가 지속적으로 공부하기 위한 그런 법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염불도 생각 생각에 화두도 생각 생각에 주문도 생각 생각에 이렇게 하셔서 우리의 그런 나쁜 습관이 다시는 우리한테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기왕 들어온 나쁜 습관은 그냥 다 온전히 나가 버려서 우리 꼭 금생에 성불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법을 닦아서 성불하기가 사실은 제일 쉬운 것입니다. 본래로 갖추고 있는 것이고 누구한테 꾸어서 성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부산 불자님들이 꼭 우리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불교의 중심지가 되도록 까지 공부를 하셔서 더욱더 빛나시기 바랍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 


*19930905-부산KBS홀대법회-청화대종사설법

*19930905-혜성주보살 촬영

*19940709-녹취-워드정리-본정 김영동

*19940812-마음의고향12집으로 발간

*20040523-DVD동영상제작-본정 김영동

*20070809-동영상자막용으로 재정리-본정 김영동


*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재정리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