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27호 성륜사정기법회

 

                <제 27 호>

                 20010401-성륜사정기법회

       

   <공․가․중中, 3체三諦>


 우리가 불교를 공부할 때는 소승小乘과 대승大乘, 그러한 그 소승 대승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정립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하룻길을 간다하더라도 마땅히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떤 순로順路로 갈 것인가 하는 그러한 선행적인 계획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헌데 하물며 우리가 평생 공부하는. 자기 신명身命을 걸고서 공부하는 그런 부처님 공부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

 소승은 대체로 어떠한 것이고 대승은 어떠한 것이건데 그 관계는 또 어떠한 그런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명확한 그런 지식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소승은 형식적인 그런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승은 형식보다는 우리 마음, 모두를 다 우리 마음에 관련을 지은단 말입니다.  

 염불念佛을 하나 또는 우리가 좌선坐禪을 하나 모두가 다 우리 마음에서 우리 마음을 정화하고 마음을 깨닫는 거기다가 역점을 두고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방금 그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독송을 다 했습니다마는 그 보리방편문도 맨 허두가 그 마음이 무엇인가. 마음이 그 어떠한 존재인가. 이 마음의 그런 해설이 들어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잘 모르는 분들은 아, 뭐 우리 스님네가 적당히 지어서 만든 그런 법문法門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것은 그런 피상적인 법문이 아니라 그 부처님 법문의 핵심核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기독교도 이른바 삼위일체三位一體가 있지 않습니까. 이른바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또는 성령聖靈과 그 셋이 하나의 진리眞理란 말입니다.   

 성부 따로 있고 또는 성자가 따로 있고 또는 성령 따로 있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원융한 그 하나의 진리인데 하나의 진리를 일반사람들은 잘 납득이 안가니까, 그 영원적인 영원불멸한 즉 말하자면 하느님에 대한 그런 깊은 뜻을 잘 모르니까, 원래는 셋으로 구분할 수가 없는 것인데...

 그 하느님이란 그런 하나의 그야말로 참 신앙의 대상에 대해서 보다 더 깊은 것을 거기에 들어있는 그 성품性品 공덕功德을 밝히고자 해서 이른바 만든 것이 삼위일체 법문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 그 당시는 삼위일체 그런 법문이 없었습니다. 그 예수님 말씀에 그런 뜻은 다 포함돼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개념적으로 정리가 되어서 삼위일체라, 성부고 또는 성자고 성령이라, 이것이 원래 또 셋이 아니다. 이런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이른바 기독교, 그 기독교基督敎 역사歷史를 보면 니케아Nicaea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는 서기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렸습니다마는 그때사 비로소 삼위일체의 학설이 적립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에서는 그보다 더 훨씬 앞서서 삼신일불三身一佛 법문이 대승불교에서 말씀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이 직접적으로 삼신일불 법문을 말씀한 적은 없습니다. 없으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우리 인간성의 그 본래면목本來面目이 어떠한 것인가,

 우리 인간성에 들어있는 성품공덕은 얼마나 광범위하고 깊을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하다보니까 이른바 대승불교에서 비로소 삼신일불이라는, 삼위일체라는 거기에 비교해서 볼 때에 훨씬 더 빠른 시기에 이루어지고 또 그 범위도 기독교에서 말씀한 것보다도 훨씬 더 범위가 넓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성자가 말씀한 것은, 성자란 것은 여러분들도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형식적으로만 아는 것을 근본적으로 깨달은 그런 분이 성자아니겠습니까.

 이른바 우주만유의 모든 그런 성품과 그런 현상문제, 모두를 다 원만히 깨달은 분이 이른바 다 성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이 그와같이 그런 그 하나의 우리 신앙의 근본체성根本體性을 거기다가 다 드러내놓고서 깊은 심오한 뜻이 간직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비단 그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불교와 다른 종교는,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 그 불교는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우리 마음과의 그런 연관성 밑에서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마음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도 많이 들으신 바와 같이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라, 일체가 유심조라. 모든 것이 다 마음으로 이루어졌다,

 또는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이라, 만법이 유식이라. 모든 법이 유식이라. 오직 유자, 알 식자, 하나의 의식뿐이란 말입니다.

 그 의식은 그것은 우리가 쓰는 그런 보통 우리 중생의 얄팍한 의식이 아니라 그 한도 끝도 없는 잠재의식潛在意識을 포함해서 말하는 의식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가 지금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의식아닙니까. 나라는 의식, 또 너라는 의식, 그와같이 차별적인 의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본래 마음은 차별적인 의식이 전부가 아니단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습니다.      불교 교학적인 의미에서만 본다 하더라도 우리가 쓰는 것은 이른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 아, 6개의 의식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그 의식의 저변은 또 역시 제7第七 말나식末那識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제7 말나식보다도 더 깊은 것은 무엇인가. 제8第八 아뢰야식阿賴耶識이란 말입니다.

 그 아뢰야식 단계에서는 사실은 거기에는 모두가 다 포함되어 버립니다. 의식차원에서는 아, 나 다르고 너 다르고 그렇게 되겠지요. 개 다르고 소 다르고 되겠지요.

 개나 소나 그런 동물들은 미처 진화정도가 의식까지도 발달이 못 되었단 말입니다. 이른바 5식만 5감만 발달돼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존재에 한해서 의식까지 발달된 것인데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의식 그것은 우리 인간존재의 그런 범위내에서 너다 나다  차별시비差別是非하는 그런 정도겠지만 우리 마음의 본체, 마음의 본체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훨씬 더 끝도 갓도 없이 깊단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이 깊은 것이 우리 의식의 그런 심층입니다.

요즘은 그 칼융Jung, Carl Gustav 1875-1961이라든가 모두 위대한 심리학자들, 그런 분들은 무의식단계를 연구해가지고 우리한테 여러모로 좋은 그런 연구성과를 내주고 합니다마는 그분들은 하나의 학자기 때문에 그것이 한계에 부딪친단 말입니다.

 의식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의식의 근본바탕은 무엇인가, 여기까지를 알지를 못합니다.    여기까지 안다는 것은 마음을 깨달아서 성자가 되어야만이 우리 의식의 전부를 다 온전히 안단 말입니다.

 그 온전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의식은 그러면 가장 깊은 바탕이 무엇인가. 깊은 바탕은 그때는 바로 이른바 불식佛識이라, 부처 불자, 알 식자. 부처님의 식이란 말입니다.

 학문적으로 따지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6식이 있고, 그 다음에 일곱 번째 가서 제7 말나식이라, 또 제8 아뢰야식이라, 또 보다 더 청정한 단계고 더 깊은 단계에서 제9 암마라식菴摩羅識이라,

 그 다음은 제10이겠지요. 10은 만수滿數라. 10이란 것은 원래 원만圓滿한 것을 수치로 해서라도 10을 상징적으로 쓰지 않습니까마는, 그런 그  십식十識이 즉 말하자면 부처 불자, 알 식자, 불식佛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나가 불식 차원에서는 다 똑같아 버립니다. 

 중생衆生들이 서로 지나치게 좋아하고 지나치게 싫어하고 분별시비하고 그런 것은 무엇인고 하면 그 의식 밖에는 모르니까 더 깊은 것을 모르니까 나는 나고 너는 너고 한단 말입니다.   

 그 가장 지겨운 것이 내 자기自己라는 관념觀念아닙니까. 자기라는 것은 꼭 자기 몸뚱이를 주로해서 이것이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가 인연因緣이 다해서 그대로 사라진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자체生命自體, 자기라고 하는 생명자체는 절대로 죽음이 없다는 것을 우리 불교인들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불교인들이 그 윤회輪廻를 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윤회이것은 비단 불교의 그 종교학적인 그런 술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정확한 그런 물리학적인 정확한 수학적인 도리입니다.

 인과因果란 것은 그것은 조금도 우리가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를 지으면 그때는 거기에 따라서 꼭 하나에 걸맞는 결과가 있지 않습니까. 인과란 것은. -

 그와 똑같이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던가 거기에 따라서 금생에 또 그와 상응된 그런 과보果報를 받는단 말입니다.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남한테 한번 욕을 하면 내가 남몰래 가만히 욕한 것을 누가 어떻게 알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랑가 모르지만 불경佛經 보면 일념오백세一念五百世라, 일념오백세라. 남 한번 잠시간 미워한 그것이 그 오백세동안이나 간단 말입니다.

 도저히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 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교리만 바로 알아도 우리가 바로 안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 하나의 진리에 가서 그와같이 우리 행동규범까지 우리 윤리倫理가 거기에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우리 이른바 그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이것은 자기와 무관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들어있는 우리 마음의 성품공덕性品功德입니다.

 우리 마음이 끝도 갓도 없이 불교말로 하면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처음도 없고 또는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시간적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그런 자리가 이른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법신法身이란 말입니다.

 다만 그와같이 영원한 생명이다,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그 성품공덕을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지혜智慧라든가 또는 자비慈悲라든가 또는 행복幸福이라든가 또는 능력能力이라든가 일체 성품공덕, 불교말로 하면 이것보고 만덕萬德 그럽니다.

 만덕을 갖추고 있는 그 자리가 이른바 원만보신, 노사나불. 원만보신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천백억화신은 무엇인가.

 이것은 모든 것을 모든 차별분별을 다 알고, 모든 것을 우리가 그것에 따라서 활동도 하고 작용도 하고, 이 현상계에서 우리가 스스로 작용하고 느끼고 또 분별하고, 이러한 또 공덕이 이것이 이른바 화신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이 이런 것이 우리한테는 다 지금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할 때는 그 본래성불本來成佛이라, 본래성불이라는 것은 본래 다 부처가 되었다는 그 뜻입니다. 이룰 성자, 부처 불자.

 아, 애쓰고 우리가 금생에 계율戒律도 지키고 여러 가지로 난행고행難行苦行을 다해야 성불할 것인데 아,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부처라면 우리가 뭐 고생할 필요가 무엇이 있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으시겠지요. 그러나 본래 바로 부처라는 소식을 모르면 사실은 대승불교를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가 닦고 안 닦고 상관이 없이 본래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능력은 그 석가모니부처님이나 또는 다른 도인이나 또는 예수님이나 공자님이나 그 분들하고 똑같단 말입니다.

 우리가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 또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이런 말씀들을 항시 외지 않습니까.

 그것은 어느 성자만 특별하게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부증불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나가 본래 법이자연적法爾自然的으로 본래로 부증불감입니다.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는 아인슈타인같은 그런 천재적인 사람들을 우리가 얼마나 참 선망을 하고  그럽니까. 그러나 자기도 그 사람에 비해서 본래 갖추고 있는 그런 덕성德性은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자기 비하卑下를 많이 한단 말입니다. 나는 남하고 비교해서 무슨 기능이 부족하다 학식이 부족하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본래면목을 몰라서 그런단 말입니다.

 금생今生에 좀 재주가 덜하고 투미하고 그런 사람들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윤회법칙輪廻法則따라서 과거전생에 그마만치 게으름을 많이 부렸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고칠라고 생각할 때는 또 다른 묘방妙方이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스스로 부처님 법을, 부처님법은 바로 우주의 도리입니다. 부처님 법이란 것은 석가모니께서 다 만들어놓은 법이 아니라, 우주의 어느 때나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어느 때나 존재하는 상주常住의 법을 석가모니께서 발견했단 말입니다. 즉 본래로 부처인 것을...

 부처란 것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렁저렁한 자리가 부처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어느 면으로 보나 완벽한 자리가 부처입니다.

따라서 확실히 가장 쉽게 말하면 이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바로 사실은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부처님뿐이고 다른 것은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우리 중생이 업장業障에 가려서 알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가르침을 바로 알면 열등감劣等感을 느낄 필요도 없고 또 그렇다고 그래서 그 반대로 교만심驕慢心을 낼 필요도 없습니다.

 왜 교만심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인가. 아, 부처님 자리가 나만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가 다 똑같단 말입니다. 똑같거니 우리가 거지를 무시할 것입니까. 아, 우리가 어린애를 무시할 것입니까. 

 그래서 바로 알면 열등감도 생길 수가 없지만 동시에 교만심이 나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저절로 여러 모든 존재를 다 부처님같이 대접 안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그 용수龍樹보살은 여러분이 너무나 많이 들으셔서 잘 알으시지 않습니까. 용수보살은 제2의 석가釋迦라고 하시는 분입니다. 부처님 정통조사로 따지면 그분은 14번째예요. 마하가섭摩訶迦葉이 첫번째고 해서 쭉 내려와서 14번째 조사입니다. 시기로 말하면 서기 2세기, 1세기 때 분이어요. 용수보살이.

 달마達磨대사는 4세기때 분이니까. 달마대사보다도 훨씬 위 아닙니까. 달마스님은 28번째의 도인입니다. 6조혜능慧能스님은 33번째 성자고 말입니다.

 헌데 용수보살이 그 내놓으신 책 가운데서 중관론中觀論이라. 가운데 중자, 볼 관자, 중관론이란 책이 있어요. 그 책의 전체 그 대의가 무엇인고 하면 그것은 모든 것이 다 모든 것이 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이 아님이 없다.

 부처님가르침은 어느 한 가지에 치우침이 없습니다. 편견이 없습니다.

 일반 세속적인 가르침이나 또 웬만한 철학설 같은 것도 경우에 따라서 어디에 치우치고, 가사 유有에 치우치고 무에 치우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나 유나 무나 어떤 면으로 보나 본체本體와 또는 현상적現象的인 문제, 어느 문제나 모두를 다 원만히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중도, 중도실상中道實相입니다.

 헌데 그 중도실상을 짤막한 4구四句로 해서  표현한 그런 법문이 있어요. 여러분들께서 외워두시고서 그때그때 음미해보시면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소생법, 인연따라서 이루어진 법은 아설즉시공이라. 내가 바로 다 그대로 바로 공이다, 이렇게 내가 선언을 한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역위시가명亦爲是假名하니, 그와 동시에 역시 거짓 가자, 역위시가명亦爲是假名, 역시 이것을 가라고 또 이름을 하는 것이니, 또 역시중도의亦是中道義라.

 그 모든 법이 다 비었다는 그 자리와, 그러니까 바로 보면 인연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본래가 다 빈 것인데, 다만 빈 것이 아니라 또 인연이 생기면 그때는 잠시간 그 모양을 낸단 말입니다. 가짜로 낸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짜로 지금 모양을 지금 내고 있습니다. 실존적인 것이 아니라. 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간이나 무엇이나 아, 무슨 인연따라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지 않습니까. 모두가 인연따라서 잠시간 이와같이 모습이 있단 말입니다. 모습이 있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금강경金剛經을 여러분들 독송 많이 하시지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유위법有爲法은 다 인연따라서 생겨난 법입니다. 유위법이란 말이나 인연생因緣生이란 말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인연따라서 생겨난 것은 이것은 다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림자가 실체가 없지 않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법이자연法爾自然적인 가르침입니다. 절대로 에누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정확한 수학도 역시 부처님 가르침보다도 더 정확할 수가 없습니다. 법이자연적인 우주의 도리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법如法이라. 같을 여자, 법 법자. 법이란 것은 바로 우주의 진리를 말입니다. 우주의 진리그대로이기 때문에 같을 여자, 법 법자, 여법如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는 진여眞如라. 참 진자, 같을 여자. 그 우주의 진리 바로 그대로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 부처님가르침에 귀의歸依하고 부처님가르침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러운지를 모릅니다. 우주의 도리를 바로 그대로 안단 말입니다.

 아, 그대로 아는 것이 돈 버는 것하고 감투 쓰는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그런 그 유위법有爲法. 그 꿈같은 그런 것하고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지위라든가 또는 재산이라든가 명예나 그런 것은 모두가 이것은 하나의 이른바 유위법,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몽환포영夢幻泡影입니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와 같단 말입니다.

 부처님법은 실상법實相法입니다. 실지로 있는 이른바 실존법實存法이란 말입니다.

 즉 그래서 그 청정법신淸淨法身은 끝도 갓도 없는 우리 생명자체, 우리 생명자체의 영원성을 표현한 말씀인 것이고,

 원만보신圓滿報身은 그 생명자체에 포함돼 있는 만능의 자리, 만공덕의 자리를 말한 거란 말입니다.

 화신化身의 자리는 그 활용의 자리, 만공덕 그 자리에서 거기에 빗나가지 않게시리 우주의 법따라서 우리가 활동하는 그런 자리가 이른바 화신자리란 말입니다.

 그 자리가 다행히도 본래로 우리한테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본래성불本來成佛이란 말입니다.

 

 아까 용수보살 게송偈頌을 제가 마저 다 말씀을 드리지요.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따라서 이루어진 법은, 내가 이제 모두가 다 공이라고 지금 선언을 하노니,

 그러나 인연이 있으면 연이 있으면 또 그때 역시 시가명是假名이라, 역시 그런 그 가짜 즉 말하자면.. 그 몽환포영같은 꿈이요 허깨비지만 또 인연이 있으면 그런 가가 있단 말입니다.

 이와같이 그 본래적인 자리는 다 공간성空間性 시간성時間性을 떠나버린 공의 자리인데 또 인연이 생기면 또 역시 가짜로 임시간 잠시간 그런 모양을 낸단 말입니다.

 산이요 냇이요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이나 자기 인간의 존재나 모두가 다 즉 말하자면 가의 자리입니다. 가의 자리란 것은 실지로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그 고통苦痛은 무엇인고 하면 그 가의 자리를 실지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 자기 몸뚱이를 우리가 얼마나 아끼고 우리가 보존할라고 애씁니까. 남하고의 싸움이나 전쟁이나 모두가 다..., 모두가 다 자기라는 존재가 실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짜가 아니라. 인생고는 거기 가서 있습니다.

 가족들과 화합 못하는 것이나 부부간에 금슬이 나쁜 것이나 모두가 다 자기라는 존재를 잘 몰라서 그래요.

 가짜로 있다는 것은 어째서 없는 것인가. 처음에 용수보살 그 게송에 있는 바와 같이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에.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따라서 생겨난 법은 바로 그것이 공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4정견四正見이란 말이, 네가지 정견이란 말이 불경에 보면 있습니다.

 4가지 정견은 무엇인고 하면 그것은 고 무상無常 무아無我라. 고 공 무상 무아라. 인생은 고요 또는 무상이고 공이요 무아라. 이것이 4정견四正見그럽니다. 네가지의 바른 견해란 말입니다.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나 윤회하는 그 세계란 것은, 그 실체를 우리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4정견은 그것은 그런 삼계에 있어서의 삼계의 그런 현상을 바로 보는 견해가 4정견입니다.

 그 대승에서 바라볼 때는 그때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존재가 모두가 다 불성佛性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다 부처님 불성뿐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소승자리에서 삼계 윤회하는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모두가 무상無常하고 또는 공이고 또는 무아無我고 또는 고란 말입니다.

 인생고人生苦라는 것은 아, 분명히 무상한 것을 무상이라고 보지를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무상이란 것이 굉장히 중요한 뜻입니다. 이것도 역시 그 우주의 도리를 그대로 표현한 말이란 말입니다. 무상이라.

 어째서 무상인가. 이것도 인연생이기 때문에 내내야 무상입니다. 인연따라서 잠시간 잠시간 모양같이 보이는 것이지 사실로 있지가 않습니다.    

 그 무상이란 도리를 다행히도 현대물리학에 와서사 비로소 사람들이 납득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 전에는 깨닫지 않으면 그건 뭐 다 있어 보이고, 자기가 제일 중요해 보이고, 내가 있어보이고, 알 수가 있습니까마는 현대물리학이 다 증명을 했단 말입니다.

 어떻게 증명했냐하면 그 물질이란 것은 사실은 분석하고 분석하고 들어가서 보면 끄트머리에 가서 물질이 아니어버린단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무슨 물질이라든가 그런 상에 걸릴 때는 스스로 분석을 해보시면 좋습니다.    이것을 불교말로 석공관析空觀이라, 분석할 석자, 빌 공자, 불교에서 석공관 그래요.

 이 물질이란 것은 모두를 갖다가 분석하고 분석해서 그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자리에까지 우리가 이르러버린단 말입니다.

 그런다고 생각할 때 내 몸뚱이가 어디가 있겠습니까. 이 몸뚱이도 각 세포細胞로 되고 세포는 갖다가 각 원소元素로 되고 원소는 갖다가 또 원자原子로 되고 말입니다. 더 들어가면 그때는 그야말로 참 전자電子나 양성자陽性子나 중성자中性子나 그렇게 돼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양성자나 중성자 그런 것은 무엇인가. 그런 그 소립자素粒子까지 가서 보면 그때는 무엇이 무엇인가 몰라 버립니다. 무엇이 무엇인가. 바르게 실측을 할 수가 없어요. 실측을.

 중생의 제한된 지혜로 해서는 물질의 가장 구경적인 소립자, 미립자는 이른바 미시적인 그런 경계는 확정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른바 하이젠베르크(Heigenberg 1901-1976 )의 불확정성不確定性의 원리라,

 불확실한 결국은 하나의 에너지만 남는 것이지 어떻게 뭐라고 규정을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우리 중생의 업장따라서 그 가상假相만 봅니다. 꿈같은, 꿈같고 그림자같고 또는 물속에 비친 달 그림자같고 그것만 우리 중생은 지금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한 대로 밖에 산이 있고 장미꽃은 장미꽃대로해서 붉고 아름답고 그런 것도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의 업장따라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 정확히 우리가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유물론唯物論 같은 것도, 유물론은 모두가 다 물질이 아님이 없다는 그런 이른바 이론이 유물론아닙니까. 그 유물론이 있기 때문에 또 그 맑스주의같은 것도 생기고 모두 그랬어요.

 그 인간이란 것은 그 눈에 보이는 그런 상식적인 그런것 가지고서 이론을 전개시키니까 그것이 옳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용수보살이 말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론게中論偈,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따라서 생겨난 법은 모두가 다 그대로 다 공이로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나 또 인연이 생기면 그때는 거기에서 인연 따라서 이른바 역시 시가명是假名이라, 가라하는 현상계가 이렇게 나툰단 말입니다.

 또 역시 중도의中道義라, 그와같이 본래는 공인데 인연이 생기면 이렇게 가로 나투는 그 공자리 하고 또는 가자리 하고 이 모두를 합한 그 자리가 바로 중도中道란 말입니다. 중도의中道義라, 

 

 그러기에 진리란 것은 결국은 중도中道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공도 있고 가도 있고. 그러나 우리 중생은 가만 느끼지 공은 느끼지를 못합니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이나 그렇게 그 공도리를 말씀했건만 우리 중생은 업장에 가리워서  느끼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대물리학은, 우리가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것이. 사실로 어떻게 실측해서 증명을 다 학문적으로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무엇에 집착할 때는 그때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석공관析空觀이라, 분석할 석자, 빌 공자, 석공관으로 해서 다 한번 쪼개보십시오. 얼굴이 잘나고 뭣이 어떻고 해도 쪼개놓고 보면 그것이 아무것도 다 나오는 것이 없이 종당에는 다 비어버린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제법공諸法空인 것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 또는 자기가 책을 읽어서 배운 것, 그런 것이 우리의 이른바 관념觀念아닙니까. 관념! 또 그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것은. 잠시간 결국은 우리가 그때그때 그런 우리의 분별시비를 모아놓은 것이 이것이 우리 관념인 것이지 실지로 실존적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반야심경에서 색도 무상이고, 색은 이른바 물질아닙니까. 또는 수도 무상이고, 수는 우리 감수하는 것 아닙니까. 상은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이고, 식은 또 우리가 분별하는 것이고,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그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우리 불자님들, 그 부처님가르침을 그냥 그때그때 그냥 넘기지 말으시고 정말로 좀 제발 깊이깊이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그 오온이 비었다는 오온이 비었다는 그 소식을 모르고서는 인생고를 떠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오온법이 다 비어있는 것을 비추어봄으로해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인생고를 떠난단 말입니다.

 그 가상보고서, 실지로 없는 것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으로해서는 인생고를 못 떠납니다.

 또 우리가 안 빈 것을 억지로 비어있다고 우리가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공부를 하든 안하든간에 본래로 공이란 말입니다. 본래로 공은 이것이 제법공諸法空도리입니다.  

 그 용수보살 4구게,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 역위시가명亦爲是假名 역시중도의亦是中道義라. 이것을 그래서 불교에서 삼체三諦라고 그래요. 삼체라.

 삼체란 것은 석 삼三자, 진실할 체자 말입니다. 세가지의 깊은 진실된 도리란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깊이 외두셔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지금 느끼는 것은 모두가 다 인연따라서 생겨난 하나의 이것이 수중월水中月이라, 물 속에 비친 달이나 마찬가지고 또는 꿈결이나 또는 그림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실로 있지 않은 것인데, 있지 않은 것이지만 인연따라서 인연이 또 생기면 그마만치 가상을 낸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환경이라든가 자기 자체 이 몸이라든가 모두가 다 이런 것은 하나의 가상에 불과합니다.

중생들이 진리를 모르는 것은 가상에 우리가 집착이 되어가지고서 가상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모르고 그마만치 인생고를 스스로 우리가 초래한단 말입니다.

 인생고라는 것은 본래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어떤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다 똑같이 그 불성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아까 저는 여기 오다가 한 귀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몸도 안좋고 고생도 많이 하고 자기 인생의 풍파가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을 만나니까 굉장히 반가워서 서로 악수도 했습니다마는 그 어느 사람이나  특별히 누가 좋고 누가 나쁘고 하는 그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실은 성인들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모두를 사랑한단 말입니다. 모두를 다. 이것이 이른바 보살의 마음아닙니까.

 보살의 마음이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주의 생긴대로, 우주 생긴대로 느끼고 행동하는 그것이 보살의 마음입니다. 남한테 뭘 준다하더라도 아, 저 사람은 나와 본래 둘이 아니거니 ...이렇게 해야 이른바 상이 없는 보시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란 말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이나 간에 우리가 부처님법을 떠나서 우리가 법을 외면하고 하는 것은 이것은 상이 있는 것이고 또는 동시에 그것이 소승의 행동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도 내내야 따지고 보면 방금 제가 말씀드린 삼체법문三諦法門, 공이라, 모든 것은 다 공이고 인연에 따르면 그때는 가라 하는 몽환포영같은 실질적인 실존적인 그런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허무하지만 결국은 가로 임시간 존재하는 그런 가가 가로 현상적인 것이 이루어지고 또는 그와 동시에 이 공과 그런 가를 다 포함한 그 자리가 이른바 중도의 자리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삼체법문이라, 3가지 진실한 법문인 것이고 여러분들이 허두에 외이신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도 똑같습니다.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자리기 때문에 그 삼신三身에 대해서 확실한 그런 개념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기독교의 그 삼위일체도 금방 느낄 수가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뜻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지금 현행된 그런 해석은 그 하느님은 하느님대로 따로 있고 하나님이 창조한 우리 중생들은 그때는 별도로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가까스로 예수님 혼자만 하느님 아들인 것이지 다른 것은 하느님 아들이나 딸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예수님의 본뜻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만 하느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나 똑같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딸인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우주자체가 하느님이 창조하고 우주는 그대로 이 자연계는 갖다가 우리 인간이 아무렇게나 그냥 마음대로 써도 무방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 창조한 우주자체도 모두가 다 하느님과 다름이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했으리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도 위대한 성자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이 자연을 무시않는 것이고, 실지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자연계라 하는 것이 이 물질로 우리 중생들은 겉만 보니까 느끼지만 사실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연은 물질이 아니란 것을 여러분들이 확실히 알으셔야 됩니다.

 잘 모를 때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그 석공관析空觀, 석공을 해서 아, 분석하고 분석하고 들어가면 인제 이것은 나중에는 갖다 끝내가서는 이것이 물질이 아닌, 그 물질이 아닌 그것이 무엇인가. 현대말로 하면 결국은 에너지 아닙니까. 에너지.

 에너지불멸의 법칙이라. 또 바로 말하면 결국은 하나의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우주란 것은 그 생명이라 하는 에너지라하는 생명만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빈틈도 없이 충만해 있습니다. 

 그 자리를 우리 불교적인 종교적인 의미로 부치면 그 자리가 바로 불성佛性이고 진여眞如고 또는 법성法性이고 또는 도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불교를 공부할 때는 대승적으로 알면 참 마음이 후련합니다. 다 트여버리니까 말입니다.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다 모두가 하나의 자리니까 말입니다.

 다른 것이 있단 말이지..... 아, 옆으로가도 그때는 다 불성뿐이고 뒤로 가나 또는 과거에 우리가 전생에 몇 만생 지금 지나왔지만 그때까지 올라가봐도 다 다 모두가 불성뿐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사실은 다 불성으로 와서 부처님한테서 와서 다시 부처님한테로 지금 가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를 플라톤Platon BC 427-347, 플라톤 같은 그런 위대한 철인들은 또 다 말씀을 했어요. 다 테오리아Theoria라. 모든 것은 그 중심을 향해서 지금 다 관상觀想도 하고 중심으로 돌아가려고 애쓴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지금 아, 거지가 되고 또는 자기가 지금 몰골이 별로 좋지 않은 그런 모양을 하고 있다하더라도 사실은 그 자리에서 어느 누구나 어김없이 지금 다 성불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금생 못닦으면 또 내생 가는 것이고 아, 내생 못닦으면 또 저내생가는 것이고. 몇 생을 그렇게 윤회해도 안되다가 나중에 또 우리지구가 다 파괴가 돼요. 파괴가.

 삼천대천세계가 다 파괴가 될 날이 옵니다. 현대물리학은 그걸 다 다 예상을 하고 있어요. 대폭발이 생기고 대 대지진이 생기고 그래가지고서 우주가 다 산화가 되어서 다 타버린단 말입니다. 그럴 때가 옵니다.

 그럴때가 오면 그때는 그 인간존재는 좋으나 궂으나 그때는 우리가 공부를 안할 수가 없어요. 그것이. 이 몸뚱이 때문에 지금 못하지만 몸뚱이 허망한 줄 알고 몸뚱이가 불타고 자기집이 불타고 자기 친구가 불타고 그러는 셈인데,

 그렇게 불타버린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그대로 그대로 성성적적惺惺寂寂하니 존재합니다. 마음은 생명자체니까 죽음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치로는 상당히 여러분들이 지금 아, 그렇기도 하겠구나, 생각은 하시겠지요. 그러나 정작 아, 그러면 어떻게 증명證明할 것인가.


 아이, 저는 한 몇 10분만 얘기를 하고 싶은데 여러분들이 서울서 오시고 부산서 오시고 했다고 생각할 때에 하찮은 말씀을 들으러 오셨는데 몇 10분에 끝낼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염불念佛 부지런히 하십시오.

 아까 제가 말씀드린 그 본래 부처의 자리를 성불하는 법가운데서 가장 쉽고 가장 확실하고 우리가 본래 부처기 때문에 본래 부처가 부처님 생각하고 부처가 되는 것이 염불念佛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기독교인들을 가리켜서 오! 주여, 하느님을 부르지 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본래 부처기 때문에 그 본래 부처를 우리가 부처님 이름을 부르고 부처가 되어가는 것이 그것이 불교입니다.

 그래서 어렵게 생각을 절대로 말으시고 우리한테 본래 다 갖추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염불念佛로 해서 꼭 금생에 쉽고 쉽고 정말 환희심歡喜心 가운데서 성불成佛하시기 빌어 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20010401-성륜사 정기법회-청화대종사 설법

*20010401-삼영불교영상-학무 유락재 촬영

*20050507-DVD작업-본정 김영동

*20070707-지혜림 이주미 녹취 워드작업

*20070712-본정 김영동 정리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 작업용으로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본문과 관련된 친필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