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호>
20030316-광륜사정기법회
<부처님은 우주에 가득찬 생명의 빛>
우리 불자님들이 충분히 다 느끼고 계시지만 이 지식정보知識情報의 시대에 있어서는 지식정보의 그런 혼란상을 잠재우지 않고서는 우리 마음도 불안스럽지 않을 수가 없고 사회도 안정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아는 것은 제법 그래저래 많이 아는데 그러한 것을 여과를 시키고 또는 그 소위 전체론적全體論的으로 통일을 시키는 그러한 지식이 없으면 정보가 정보대로 놀고 그 얼키고설킨 그러한 것을 도저히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적인 지식 또는 철학적인 지식 또는 종교적인 그런 신앙문제 그런 문제 등등으로 해서 우리 마음은 지극히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또는 다종교사회多宗敎社會에서 어떤 종교를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인가. 이런저런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도 우리 불교佛敎는 불교의 가르침 자체가 철저한 과학科學인 동시에 또는 철학哲學이고 또는 가장 순수하고 궁극적인 종교宗敎입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과거 다생겁래多生劫來로 많이 선업善業을 지어서 금생에 그 인연因緣 따라서 선업의 과보로 해서 불자가 되신 것입니다. 어째서 불교가 가장 과학적인 것인가.
우리가 우리 자아문제自我問題, 자기라는 자아문제가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나라는 존재가 대체로 어떤 것인가. 나라는 존재에 관해서 부처님가르침같이 확실하게 사실대로 말씀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나라는 관념자체가 우리 중생衆生의 상식적으로 봐서는 나라는 존재가 엄연히 실존적으로 실제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섭섭하고 서운하고..... 참 그런 문제가 아니라, 진리문제眞理問題란 것은 섭섭하고 서운하고 그런 문제를 초월한 문제 아닙니까. 섭섭하든 말든 허무하든 말든 아, 진리는 진리로 사실로 존재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사실을 사실대로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어느 종교가 있다고 생각할 때에 과학적으로 검증이 안되면 현대인이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는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도리道理, 눈에 보이는 세계나 눈에 안 보이는 세계나 다 통합해서 궁극적인 도리를 그 철학적으로 해명을 못하면 현대인들은 못 믿습니다.
또는 종교를 선택한다하더라도 그 자기 이익利益을 위해서 자기들 종교만 유일한 훌륭한 종교고 다른 것은 모두가 다 삿된 그런 사탄에 불과하다. 마구니에 불과하다. 그런 식의 종교를 우리가 또 현대에 있어서 선택할 수가 없는 문제 아닙니까.
잘못 선택하기 때문에 그런 관념이 바르지를 못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개인적인 갈등 또는 가정적家庭的인 여러 가지 그런 불화, 모두가 거기에서 나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현대와 같이 꼭 철학이 필요한 때가 없습니다. 어느 분야에서나 그 문제의 근원적인 핵심을 모르면 바로 살 수가 없습니다. 바른 시민도 될 수가 없고 바른 어버이도 될 수가 없고 바른 사회인도 될 수가 없고 다 그렇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님은 그 여어자如語者라,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분이란 말입니다. 우선 우리 개인적인 문제도 우리가 생각할 때는 김아무개, 나라는 존재가 실존적으로 있다고 생각이 되지 않습니까. 부처님은 그것을 그 엄숙하니 거부를 했습니다. 나라는 것이 본래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왜 있지가 않은 것인가. 잠시간 인연 따라서 인因과 연緣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지로 실존적으로 있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제행무상이라는 것은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순간 찰나찰나 변화해서 마지않는다는 그런 가르침 아닙니까.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나 어떠한 것이나 순간순간 그때그때 변화變化해서 마지않습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 시간적으로 어떠한 것이나 변화해서 마지않기 때문에 사실은 엄격히 따져보면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제법무아라. 공간적으로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시간적으로 그대로 가만히 어느 처소에서 어느 시간을 점유해서 있어야 그래야 존재한다고 할 것인데 그때그때 변화하는 것이 어떻게 일정한 처소에 존재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순간순간 변화해서 마지않는 것은 또 공간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모두가 사실은 공이란 말입니다.
무상한 공인 것이 나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무상한 공이기 때문에 나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른바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여실如實하게 철두철미 과학적입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무상이라고 얘기하고, 무아라고 얘기하고 그런 가르침이 아, 부처님께서 제법 깊이 있는 말씀을 하셨구나, 이런 정도로 그렇게 알고 있지 정말로 철두철미 과학적이다. 이런 것까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현대 자연과학自然科學의 발달 따라서 그 모두를 과학적으로 생각해보니까 그 부처님 가르침이 모두가 다 철두철미 과학적이란 것입니다.
세상이 가면 갈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가르침은 과학인 동시에 철학이고, 철학인 동시에 가장 순수한 종교입니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모두가 잘 체계가 돼있어도 그 모든 존재의 그러면 근본자리는 무엇인가. 그 본질자리는 또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본질을 모르면 우리 마음은 항시 불안스럽습니다. 우리가 지금 현대생활이 불안스러운 것도 아, 내 마음이 대체로 무엇인가, 분명히 내 마음이 있긴 있는데 내 마음의 그 본바탕은 무엇인가. 이것을 몰라서 우리가 불안스럽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무상無常하고 허무虛無하고 그러니까 금강경金剛經에서도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그 중생이 겪는 것은 상대적인 모든 법은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나 똑같단 말입니다. 꿈이 사실이 아니듯이 허깨비가 사실이 아니듯이 우리가 나라고 느끼고 너라고 느끼고 이쁘다고 느끼고 밉다고 느끼는 모두가 다 그와 같이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생각한단 말입니다.
아, 잘못 생각하니 당연히 그때는 괴롭지 않겠습니까. 사실을 사실대로 생각하면 괴로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라는 것이 원래 있는 존재가 아닌데 다만 우리가 우리 범부의 번뇌煩惱로 해서 착각錯覺해서 나라는 것이 실지로 있다, 어제의 나와 오늘 나와 똑같다, 언제나 그럴 것이다, 죽은 뒤에도 똑같을 것이다, 이러다가 인제 딱 중단되면 그때는 괴로워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상적인 것은 제아무리 한도 끝도 없이 수가 많고 잡다하고 또는 화려하니 보인다하더라도 그것은 다 실존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전부다 일매지게 모두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살 아무런 재미도 없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 과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그래요. 그러나 철학적으로 생각할 때는 무슨 그 현실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현실이 근원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뿌리가 있고 본바탕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철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본바탕 본질적本質的인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저 사람은 제법 똑똑하고 아는 것이 많은데 철학이 없지 않는가, 이것은 본질을 모른 사람한테 대해서 우리가 비판하는 말 아닙니까.
그 본바탕이 무엇인가. 본바탕이 이것이 바로 참자기, 참나眞我 또는 보다 확실히 불교에서 말하는 이른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바로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자성自性이란 말이나 부처불자 성품성자 불성이란 말이나 또는 법 법法자 성품 성性자 법성法性이란 말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모든 존재의 근본자리, 어제도 오늘도 변치 않고 내일도 변치 않는 불교의 전문술어로 말하면 불생이불멸不生而不滅이라, 우리가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읽는 그러한 성구聖句 아닙니까. 불생이 불멸이라. 원래 생겨나지도 않았으니 없어질 까닭이 없겠지요. 또는 불구부정不咎不淨이라. 원래 청정한 생명자체이거니 어디가 오염이 되고 오염이 안 되고 그럴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영원히 그대로 존재하는 참다운 실존적인 그러한 것이 즉 말하자면 부처불자 성품성자 불성佛性이고 불심佛心입니다.
우리가 지금 불자가 되어서 공부하는 것도 그 허망 무상한 허무한 것을 떠나서 그때그때 변화하고 그때그때 변동이 심해서 믿을 수 없는 현상적인 거품세계를 떠나서 참다운 실상의 세계, 이른바 실존적인 참다운 존재자체의 세계, 이런 세계로 가는 것이 즉 말하자면 성불成佛하는 가르침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대과학적인 그러한 공적功績으로 해서 다행히 진리가 아닌 것은 차근차근 존재가치가 없어지고 진리만이 비로소 과학의 검증을 충분히 극복하고서 그대로 존재가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아까 말씀마따나 그 본질적인 근본 불교 전문적인 술어로 말하면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 본래면목이라 또는 본분本分소식이라, 또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법성이라, 또는 참다울 실實자 성품 성性자 실성實性이라, 실상이나 모두가 다 같은 뜻으로 말이 됩니다.
하도 그 부처님 가르침이 방편方便이 많으셔놔서 너무 그 숙어나 그런 술어가 많으니까 우리가 혼동을 느끼기가 쉽습니다마는 내내야 결국은 다 뜻은 똑같고 표현만 다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교에서 아까도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법성 불성 자성 또는 실성 또는 원만성품 모든 그런 자리가 다 똑같은 뜻입니다.
가령 법화경法華經, 법화경에서는 실상實相이란 뜻을 이른바 본질적인 철학적인 의미로 그렇게 쓰고 있고, 또는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제법공諸法空이라, 공이라는 그런 하나의 그야말로 참 일체 현상이 다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空이란 걸로 해서 모든 실상實相을 의미해있고, 다 그와 같이 각기 경 따라서 달리 표현합니다. 원각경圓覺經 같은 데는 그때는 원각이라, 둥글 원圓자 깨달을 각覺자 원각圓覺이란 말로 해서 실상實相을 의미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 정보의 혼란을 우리가 해치우고서 우리의 그 본래의 자리를 성취할 것인가. 이른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불을 빨리 할 것인가 그런 도리로 귀착이 되겠지요.
그 성불하는 길도 한 가지 같으면 모르거니와, 내내야 한가지로 다 귀일歸一되기는 되는 것인데, 여러 가지가 그때그때 시대에 따라서 또 각 위대한 선지식善知識 따라서 달리 표현되기 때문에 우리가 후래인後來人들이 혼란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혼란을 모조리 다 통합을 시켜서 우리가 간단하게 정리하는 그런 그 슬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염불念佛을 하고 또는 참선參禪을 하고 여러 가지 또는 주문呪文을 외이고 하는 법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공부를 하다보면 자기가 무슨 공부를 좀 하고 있어놓으면 꼭 자기 공부하는 식이 제일 좋다고 생각이 되어져요. 왜 그런고 하면 그것에 따라서 무슨 공부나 열심히 하면 재미가 생깁니다. 재미가 생기고 또는 마음이 통일이 딱 되어놓으면 그때는 힘이 생긴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소견이 좁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공부하는 것은 별것이 아닐 것이고 내가 공부하는 이런 식이 제일 최고 겠구나, 이와 같이 자기 공부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고 또는 너무나 지나치게 과장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부하는 그런 과정에 있어서는 각기 업장業障 따라서 김金가나 박朴가나 다 똑같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가사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참구參究한다하더라도 김가가 참구할 때와 또는 박가가 참구할 때는 좀 다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 사람의 각기 업장이 차이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루해서 마음이 시원하게 되는 분도 있고 또 업장이 많은 분들은 한달내 껌껌히 괴롭기만 하고 별로 진전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에 여법수지如法修持??에 행자필증行者必證이라, 여법수지란 것은 무슨 뜻인고 하면 그 부처님법대로 우리가 닦는다고 생각할 때는 행자필증이라, 수행자가 틀림없이 그때는 증명한단 말입니다. 불불허설佛不虛說이라, 부처님은 그 헛된 말씀이 안계시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대들 공부를 어떻게 해라, 해서 그렇게 따르면 틀림없이 우리가 반드시 증명이 되고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화두를 참구하든 염불을 하든 주문을 외든 어떻게 하든 간에 그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지 간에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꼭 철저한 계행戒行이 따라야 됩니다.
근대에 있어서 별로 계행도 잘 지키지도 못한 분이 도가 통했다는 그런 분이 더러 있었습니다. 또는 자기 문중스님이 똑똑하고 아주 그 법문을 잘하고 하니까 저 양반은 다 도를 통해서 그랬겠지, 그렇게 너무나 그 지나치게 찬탄하는 그런 가운데서, 계행을 안 지킨 분에 대해서도 너무 지나친 그런 찬사를 보내는 그런 경우가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우리가 비판批判을 해야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 항상 계행이 철저하지 않고서는 깊은 삼매三昧에 못 들어갑니다. 삼매란 것은 마음이 하나로 딱 통일이 되어서 흐트러지지 않은 정도가 삼매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깊은 명상冥想이란 말입니다.
깊은 명상 없이 절대로 깨닫지를 못합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산란스런 상태 아닙니까. 산란스런 마음을 거두어서 마음을 오로지 통일을 시켜야 그래야 우리마음의 본바탕이 부처기 때문에 부처가 될 것인데 우리 마음이 통일이 못되어서 부처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이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행동이 정당해야 됩니다. 행동이 정당한 것이 즉 말하자면 이른바 계행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함부로 먹는다거나 함부로 이성관계異姓關係를 그렇게 한다거나 그렇게 해놓으면 절대로 우리가 깊은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우리는 그 부처님의 이른바 육재일六齋日, 육재일이란 것이 소박하면서도 우리 불교인이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육재일을 지키는 것이. 육재일이란 것은 8일 14일 15일 23,29,30일 한 달에 여섯 날 아닙니까. 그런데 꼭 그 부처님께서 옛날 정해놓으신 그런 날짜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 달에 그 여섯 날 정도,
기독교의 주일같이 유태교나 그런데서는 안식일이라고 그래서 일주일마다 지키지 않습니까. 안식일이나 주일이나 그때는 오로지 예수님 하느님만 생각하고 하느님 가르침을 닮는다는 그런 뜻으로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 불교가 훨썩 더 앞서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불교의 육재일이란 것입니다.
저는 대개 법문때마다 육재일말씀을 꺼냅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 저도 보다 더 철저하니 지키고 싶고 여러분도 성불을 목적하지 않으면 몰라도 성불을 목적한다고 생각할 때는 꼭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육재일 날은 하루에 일종日中一食입니다. 하루에 한 끼를 먹습니다. 아무 때나 먹는 것이 아니라 오전에 적당한 때에. 한 끼 먹는다고 그래서 그냥 세끼 몫으로 다 먹어버리면 그것도 안 됩니다. 그 양을 헤아려서 포만 되지 않도록 까지 먹어야 되고 또는 고기를 안 먹어야 되고 술도 안 마셔야 되고 더구나 담배 같은 것이사 뭐 어림도 없겠지요.
대체 먹을 것 다 먹고서 도인이 되겠습니까. 우리 본래 고향자리에 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진리 앞에서 보다 엄숙해야 됩니다. 진리란 것은 그냥 그렁저렁 사는 일이 아니라 그 윤리적倫理的으로 도덕적道德的으로 완벽한 상태가 이른바 성자聖者 아닙니까. 성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자의 길을 지금 더듬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지금 욕계欲界에가 있습니다. 욕계에가. 그 욕심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은 세계라고 생각을 하실 분도 계실랑가 모르지만 욕계라는 것은 모든 존재, 모든 세계가운데서 제일 저급한 세계입니다. 제일 밑에 하품下品의 세계입니다.
천상天上도 있고 극락極樂도 있는 것인데 천상도 욕계천상欲界天上 유색계천상有色界天上 무색계천상無色界天上 ... 그런 것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 사람도 허망하지만 존재하듯이.
그런데 우리는 과거전생에 우리가 닦지를 못해서 그 색계에도 가지 못하고 무색계도 가지 못하고 더군다가 극락은 생각도 못하고 말입니다. 욕계가운데 지금 인간적인 세계, 개나 소나 돼지나 그것보다는 더 낫겠지요.
우리가 불교를 무엇 때문에 이렇게 믿는 것입니까. 그 욕계라 하는, 잘못 살면, 개같이 살면 개 되는 것이고 돼지같이 살면 돼지가 되는 것이고, 그런 윤회輪廻를 떠나서 윤회를 벗어나서 그 성불해탈成佛解脫의 길을 우리가 가기위해서. 그 자리가 우리 고향집입니다.
그 자리에 가기 위해서 우리가 불교를 지금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행복스러운 최상의 길입니다. 그 인류문화사회人類文化社會에서 그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가장 선구적先驅的인 사람들이 기독교나 불교나 이슬람교나 다 그 길을 선택을 했습니다.
즉 따라서 우리 마음이 하나로 딱 통일이 되어서 우리가 어려운 말로 삼매라. 이른바 깊은 명상에 들어야 우리의 번뇌煩惱가 녹아집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해서는 부처와 나와 원래 둘이 아니다, 마음과 부처와는 본래로 하나다, 그런 소식을 아는 것은 좋습니다. 대승적大乘的으로 내 마음의 본성이 바로 부처다. 그것을 아는 것은 굉장히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지로 부처가 지금 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 나쁜 버릇이 지금도 그 우리 범부중생凡夫衆生한테는 다닥다닥 지금 딸려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나쁜 버릇이 지금 붙어있습니다. 따라서 오랫동안 오랜동안 우리가 부처님 생각하고 염불念佛도 하고 또는 그때그때 기도祈禱도 모시고 참선參禪을 하고 이렇게 하므로 해서 우리 업장業障이 우리 마음에 붙어있는 업장이 차근차근 그때는 녹아진단 말입니다. 물론 업장이 가벼운 분들은 빨리 녹일 수가 있고 무거운 분은 더디 녹을 수밖에는 없겠지요.
어떻든간에 우리 마음이 집중적으로 통일이 되어야 그래야 깊은 명상에 들어갑니다. 깊은 명상에 들어가야 비로소 참다운 깨달음이 옵니다. 이른바 해탈解脫이라. 해탈이란 것은 번뇌를 다 풀어버려서 원래 번뇌가 없는 청정한 상태, 생명자체生命自體인 그 상태로 가는 것이 이것이 해탈 아닙니까. 그 자리가 바로 성불이라. 그러기에 해탈성불解脫成佛이라 하지 않습니까.
부처란 것은 원래 내 생명의 본래의 자리가 바로 부처인데 우리가 업業을 지어서 그 부처... 내 생명의 고향자리로 우리가 가지 못하고 그때그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윤회하는 것입니다. 닦지 못하면 영원히 윤회합니다. 몇 만생 몇 천생 윤회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본래의 자리, 우리 생명의 본래의 자리가 부처기 때문에 어느땐가는 우리가 부처가 되어야 돼요. 우리 바탕이 본래 부처인지라 끝내 가서는 부처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육재일 날을 지키는, 하루에 한끼 딱 먹고 또 이 부부간 계신다 하더라도 부부간에 좋은 동기同期가 되어서...... 육재일만은 청정한 그런 같은 도반道伴 수행자修行者로 해서 같이 앉아서 좌선坐禪을 하시도록 하시고 그리고 고기도 안자시고 말입니다.
오로지 그날만은 하여튼 그 부처님한테 기독교를 믿으면 그때는 하나님도 좋겠지요. 하여튼 우리 생명의 본고향자리만 생각하고 그날 하루 온종일 그래버리면 결국은 그야말로 참 그날만으로 해서 우리가 성불을 할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이슬람교는 9월달 라마단달, 9월달을 온전히 알라신에 바칩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르침의 내용은 우리 부처님가르침이 가장 철저하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과학적인 동시에 철학적이고 철학적인 동시에 종교적이고 또 아주 해탈까지 가는... 아, 기독교사 아무리 잘해도 뭐 스스로 하나님은 못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처님 우리 불교는 스스로 부처님이 된단 말입니다. 부처님 자리나 하나님 자리가 똑같습니다. 우주의 본래 생명자리, 우주의 본체자리말입니다. 그 신앙의 구경지究竟地까지 갈 수 있는 것은 우리 부처님가르침뿐입니다.
따라서 그와같이 그런 위대한 우리 종교를 믿고 있기 때문에 마땅히 우리가 거기에 따르는 결국은 거기에 순응順應한 또 수행修行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수행에 따르는 것은 다른 종교나마 결국은 더 나은 것이 별로 없단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현재의 위치가 이 욕계에 있다, 욕심꾸러기인 욕계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본래 생명자리인, 본래 생명의 고향자리인 참다운 자리인 그런 자리로 가지 못하는 것은 결국은 욕계번뇌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과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허망무상한 것인데 나라는 실존이 없는 것인데 우리가 잘못 봐서 내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나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가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철두철미한 과학적인 도리에까지 가서 그때는 우리가 의심할 필요가 없지요. 틀림없이 결국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지로 내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나라는 관념자체가 이것은 허상이다, 이것을 분명히 느끼고서 그 다음문제는 우리가 실상을 증명해야 부처 아닙니까. 실상을 우리가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나가야 할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하품 가장 저속한 욕계를 떠나야 한단 말입니다. 아무 때나 떠나야 됩니다.
출가出家란 것은 무엇인가. 날 출出자 집 가家자, 그 욕계의 집을 떠나서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고향으로 간다는 것이 출가의 본뜻입니다. 신부나 수녀나 비구나 비구니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출가한 사람이 음식에 연연하고 이성에 연연하고 그러면 그것이 뭣되겠습니까.
금생에 그 선량한 사람끼리 만나서 부부가 되신 것은 대단히 축복스런 일입니다. 우리 출가한 수행자라도 평생 그 고독하고 정말로 어려움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선량한 사람끼리 인연 따라서 같이 부부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에 그 공부하는 데도 그렇게 좋은 도반이 없습니다.
밤에도 가급적이면 저녁공양을 아주 담박하게 말입니다. 음식을 많이 먹어놓으면 또 이제 잠도 많습니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잠도 많고 또 기름기네 무엇이네 고기네 잘 먹어 놓으면 또 이제 남녀이성간의 욕심도 더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 육재일 날 그 그렇게 소박하니 먹고 소박하니 지내는 그것이 우리 욕심을 제거하는 데 굉장히 필요합니다. 따라서 내외분 계실 때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꼭 무슨 육재일 날이라고 안 정하셔도 밤에 그렇게 소박하니 그렇게 아주 그 자시고서 말입니다.
같이 좌복 깔고 앉아서 좌선한다고 생각할 때에 얼마나 그것이 아름답고 예술적이고 행복스러운 일입니까.
집에 애들도 결국은 다 그렇게 되면 부모가 그러면 차근차근 따라서 하게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가정을 한 도량道場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그 참 쉽고 참 행복스럽고 또는 사회정화社會淨化를 위해서도 굉장히 훌륭한 일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부처님을 부처님가르침을 선택했다는 복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는 깊이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더욱 더 우리가 심각하니 우리가 축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과학적으로 보더라도 아무런 모순이 없고 또는 철학적으로 보더라도 그 존재의 실상, 존재의 실상은 다른 종교에서는 부처님 가르침같이 그렇게 보편적이고 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떻게 따져보나 결국은 가장 보편적普遍的이고 가장 궁극적窮極的이어서 흠잡을 데가 없단 말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거기에 다 포괄包括되어 버립니다.
그 종교도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다른 종교를 다 포섭합니다. 그러나 지금 세계종교가 내내야 유테교 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모두 다 그런 종교아닙니까. 그런 종교들은 꼭 자기들 믿는 것만 옳고 다른 것은 옳지 않다고 합니다.
진리란 것은 서로 상통相通이 되고 모든 우주 모두를 다 그속에다 포괄시켜버려야 진리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 아, 치우치게 이것만 있고 저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진리가 못되지 않겠습니까. 현대의 그 이른바 정보지식과 그런 사회에서는 그런 종교는 다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가르침을 비교해서 피강무자법이라. 피강무자법이란 것은 무슨 뜻인고 하면, 우리가 아주 두터운 견고한 가죽으로 이렇게 하나의 부대를 만들지 않습니까. 부대를 만들어서 나무위에다 부딪쳐보나 또는 그 가죽으로 만든 부대를 돌에다 때려보나 말입니다. 바위에다 갖다가 쳐박아보나 가죽으로 만든 두터운 부대가 훼손이 되겠습니까. 절대로 훼손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와똑같이 부처님 가르침같은 가르침은 이렇게나 저렇게나 훼손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종교적으로 보나 어떠한 면으로 보나 다 상통하고 또는 어떠한 외도가 와서 아무리 파괴할라고 해도 파괴가 안 된단 말입니다. 도교가 와서 덤벼봐도 안되고 기독교가 와서 아무리 사탄이고 뭣이고 별스럽게 해봐도 나중에는 즈그만(저네만) 손해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종당에는 다른 종교가 차근차근 불교화佛敎化가 됩니다. 불교화가 안되면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비과학적이고 비철학적이기 때문에 배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그 미개한 때는 모르거니와 이른바 그 지식정보화시대라는 아주 그런 명석한 시대에 있어서는 지식정보란 그 비판을 이길래야 이길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가사 우리가 하나의 세계관에 있어서라도 불교는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이라, 불이일원론이라. 전 세계를 하나의 진리로 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생각할 때는 창조한 하나님과 또 창조를 당한 피조물과 이렇게 양쪽입장이 있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위대하나 창조를 당한 그런 존재는 그보다 훨썩 못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가령 우리가 환경문제를 두고 봅시다. 이 자연을 갖다가 하나님이 창조했다. 우리가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은 훨썩 위대해서 하나님이고 창조를 당한 피조물인 자연계는 결국은 우리 인간이 이용할라고 만들었다. 이렇게 안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른바 피조물은 모두가 다 이질적인, 하나님과는 결국은 훨썩 못한 이질적인 존재라고 보기 때문에 그렇게 보기 때문에 자연을 함부로 훼손을 해도 그때는 별로 마음에 가책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불교와 같이 일원관이라,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자연이고 돌멩이고 물이고 모든 흙이고 다 모두가 하나의 불성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라고 말할 때는 불성이 여기있고 저기있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불성뿐이란 말입니다. 내 머리카락이나 무엇이나 하여튼 흙이나 물이나 모두가 다 불성뿐입니다. 다만 성자는 그 자리를 온전히 깨달아서 불성과 하나가 되었고 우리 범부는 깨닫지 못해서 우리가 뿔뿔이 너요 나요 이것이요 저것이요 구분 짓는다는 그것뿐인 것이지 원래는 똑같은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뿐입니다. 불성뿐입니다.
진여불성은 만공덕萬功德의 자리입니다. 만공덕이란 것은 행복幸福도 또는 지혜智慧도 능력能力도 모두가 다 원만히 갖추었다는 것이 만공덕이란 뜻입니다. 우리의 근본생명자리, 우리 마음의 근본자리인 진여불성은 만공덕의 자리기 때문에 우리가 하루 닦으면 닦은만치 마음도 기뻐지고 또는 몸도 좋아지고 그렇습니다.
마음도 좋아지고 몸도 좋아지고 그뿐만 아니라 우리 존재란 것은 단독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와 더불어 있어놔서 우리가 마음닦으면 닦은만치 우주공간내에서 우주를 정화를 시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하고 우리가 공부하는 그것이 그냥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宇宙를 청소를 하고 우주를 정화淨化를 시킨단 말입니다.
부모님께서 바로 닦으시면 그것이 바로 집안을 정화를 시키고 순화를 시킵니다. 부모님이 그 외내간 서로 피차 양보하고 서로 피차 겸손하고 그렇게 지내면 애들은 새삼스럽게 설법을 안 해도 차근차근 거기에 다 순화가 되고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세상살기 참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중생이 바른 견해를 갖지를 못해요. 바르게 생긴대로 제법이 무아라. 제행이 무상이라.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뜬구름같은 것이고 또는 나라고 고집할 것도 없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차근차근 정화가 되면 몸도 맑아지고 몸도 더 건강해지고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참배하실 때는 부처님 얼굴을 찬찬히 보십시오.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라. 부처님 얼굴은 서른두가지 대인상大人相과 팔십종호라. 여든가지의 그 좋은 것은 다 들어있습니다. 부처님과 우리는 다르지 않는가. 절대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 과거세 무수무량세無數無量歲에 만공덕을 세웠단 말입니다. 남한테 보시하고 몸도 보시하고 눈알을 빼달라하면 눈알도 빼서 보시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해서 부처님의 원만덕상圓滿德相이 원만스러운 얼굴이 나오신 것입니다.
역사적인 지금은 위기입니다. 그 잔뜩 모두 다 복잡하고 신문만 봐도 그래요. 그전에 우리 젊어서는 신문 달랑 하루에 한 장인데 지금 신문이 몇 장입니까. 저는 신문도 안보고 텔레비도 안봅니다마는. 그 한가지 신문만 다 볼래도 그것이 몇시간 걸려버릴 것입니다. 그 신문만 봐서 되겠습니까. 테레비도 봐야되고 다른 것도 봐야되고.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 정말로 본래의 자리, 그 본래생명의 근원자리를 모르면 당장 우리가 위퇴증?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잡다하게 많이 알기는 아는데 하나로 통일을 못시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것 저런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과학적으로 모두가 상대적인 그것은 허망한 지식이기 때문에 그저 생활을 위해서 조금은 본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그 본래 생명의 고향자리를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공부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데 그 지금 조계종曹溪宗 풍토나 한국의 풍토는 참선이라는 것은 화두공안을 의심을 해야 참선이 되고 다른 것은 참선이 아니다, 그런 풍토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풍토도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 한 종단적으로 현행된 불교적으로 뭐, 권장하는 것이 있다고 그래서 잘된 것이 아니어요. 그것이.
왜 그런고 하면 그 화두공안을 의심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그런 말씀 한마디도 안하셨고 또는 달마達磨스님이나 2조 혜가慧可스님이나 3조 승찬僧璨 ?~606스님이나 4조 도신道信스님이나 5조 홍인弘忍스님이나 6조 혜능慧能스님이나 그때 그 순수선純粹禪, 순수참선때도 화두공안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저 송나라때 그 나라가 분열되어서 서로 옥신각신 싸울때 그때 비로소 대혜종고스님이란 재주있는 분이 화두공안하는 법을 냈단 말입니다.
신라때 원효元曉 617-686스님이 화두한 것도 아니고 의상義湘625~702스님이 화두한 것도 아니고, 따라서 그것도 역사적인 그런 관계에 있어서 그 당시에 잠시간 나와있는 하나의 수행법인 것이지 그것이 그 대변적인, 불교수행법을 대변할 수 있는 이런 수행법은 절대로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잘못되어서 어느 분들은 나무아미타불 만번하는 것보다도 ‘이뭐꼬’화두나 ‘무’자 화두 한번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이런 말씀을 함부로 하는 분도 있어요.
우리 불자님들은 그런 문제에 있어서 그 이성적으로 깊이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때 있어서는 꼭 그 순수한 참선, 순수한 참선을.... 달마가 어떻게 했던가, 육조 혜능스님은 어떻게 했던가, 부처님은 어떻게 했던가. 이런 순수한 공부법을 항시 기준으로 해야 됩니다.
기준으로 해야지 그 당시에 있어서 재주가 좀 있고, 재주있는 사람들은 보통은 자기를 더 내세울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 말씀을 우리가 곧이곧대로 다 들을 필요가 없어요. 그 정평있는 도인들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우리가 판단해야 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의심을 게재로 한 그런 화두공안법이 훨썩 좋고 또 부처님을 외는 염불은 그건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염불念佛이란 것은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의 이름을 외는 것 아닙니까. 부처란 것은 무엇인가. 부처란 것은 내 마음의 본래생명本來生命인 동시에 바로 우주의 생명자체生命自體입니다. 따지고 보면 내 생명의 근본자리, 내 생명의 근본성품根本性稟인 그 부처를 외고 또 우주의 근본성품인 부처를 외는 것보다 더 더 소중한 일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생각을 잘 못합니다.
염불念佛이란 것은 아무렇게나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존재가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를 생각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우리 마음의 근본자리를 생각한 것이 염불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가운데서 가장 많은 법문이 염불법문입니다.
또 참선參禪의 대부代父라고 할 수 있는 6조 혜능惠能스님, 혜능스님도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가장 중요하게 핵심적으로 말씀한 것이 그대들 마음가운데 부처를 생각해라. 그대들 마음의 본래의 자리가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고, 그대 마음의 모든 그런 지혜智慧 공덕功德의 자리가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이고, 그대 마음의 공덕가운데서 모든 작용자리가 그때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다. 그 삼신三身이 모두가 다 우리 마음에 들어있다.
이 말씀이 육조단경, 그 참선의 대부같은 육조혜능스님이 말씀하신 거기에 있는 핵심법문입니다. 왜 그런 것은 참고로 하지 않고서 도인이 긴가아닌가도 모르는 그런 분들이 한동안에 그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이름을 냈다고 그래서 그것만을 치중할 아무 이유도 없습니다.
따라서 참선이란 것은 달마스님 말씀을 의지하나 또 어느 도인들 말씀을 의지하나 우리 마음의 본래, 우리 마음을 찾는 길이란 말입니다. 참 마음을 찾는 길입니다.
참 마음을 찾으면 내 마음의 본래 성품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그 부처는 어떠한 것인가. 부처 이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이 현상적인 의미에서는 이건 다 인연따라서 잠시간 나타나보이기 때문에 허망한 것이지마는 이 모든 존재의 성품자리가 다 부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말로 말하면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부처뿐이란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뿐입니다.
다만 성자는 항시 부처하고 하나가 돼있고 우리 중생들은 마음이 어두워서 부처는 보이지 않고 겉만 보인단 말입니다. 겉만 김아무개 박아무개 그것만 보입니다. 우리 중생은.
따라서 부처님은 우주에 가득 찬 생명의 빛입니다.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내 머리카락이나 내 몸 전체에나 이 공간속에나 어디에나 계시는 우주의 참다운 생명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그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고 염불도 하고 화두도 들고 하면 그때는 좋습니다. 이뭐꼬 하고 또는 무자無字 화두話頭를 든다하더라도 그렇게 우리 마음의 소재가 바로 부처한테가 딱 거기가서 박혀 있고서 그 부처를 찾는 의미에서 우리가 화두를 드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염불하는 것은 하나의 방편적인 공부고 다른 화두의심하는 것은 그것은 훨썩 더 최상의 공부다, 그래버리면 본말이 전도라.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 불자님들, 그 부처님 이름 외는 것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은 무량공덕無量功德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한번 외면 왼만치 한번 생각하면 생각한만치 우리 마음이 정화되고 우리 공덕이 증장이 됩니다.
부처님은 절대로.... 어느 그 중국의 왕양명王陽明선생, 왕양명선생은 중국의 명나라때 위대한 분아닙니까. 충신이기도 하고 아주 위대한 분입니다. 리즉심理卽心이라, 원래 우주의 원리가 우리 마음이라는 그런 것을 그분은 주장해서 이기理氣를 나누어서 보는 것에 그분은 반대의사를 보인 분입니다마는.
왕양명선생은 그 독실한 불교인이었어요. 불교에 참 도취하다시피 한 분입니다. 헌데 그 분이 한 말씀이 있어요. 아미타불이란 것은 귀머거리가 아니다.
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어디에가 있는고 하면 아까 말씀마따나 부처님의 대명사가 아미타불아닙니까. 우주에 충만한 우주가 부처님 뿐인데 부처님의 대명사가 아미타불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은 그 안 계신 데가 없이 있는 우주생명이라고 우리가 안 볼 수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에나 내 마음가운데나 이 공간가운데나 어디에나 충만해 있는 우주의 생명 기운이란 말입니다. 우주생명 기운이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그래놔서 왕양명선생의 말마따나 아미타불은 우주에 가득찬 생명이기 때문에 귀머거리가 안이니까. 우리가 생각생각에 아미타불을 생각하면 중생염불불환억衆生念佛佛還憶이라, 아미타불은 또 그토록 우리를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주란 것은 그 부처님 생명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때는 부처님도 그때는 우리를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차근차근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닌 자리가 그야말로 성취가 되어서 우리가 스스로 부처와 가까워져서 우리 스스로 성불이 되고 또는 모든 중생이 더불어서 성불하고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은 이런 점들을 생각하셔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염불도 부처가 내 마음밖에 저기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하는 염불은 방편염불方便念佛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자리가 바로 부처고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해서 하는 염불은 염불참선念佛參禪 그럽니다. 한계를 알으시겠습니까.
천지우주가 너나 나나 모두가 다 본래로 부처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해서 하는 염불은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바로 염불참선입니다.
염불참선을 하셔서 꼭 금생에 가장 쉬운 길, 가장 쉬운 길인 성불을 하시길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20030316-광륜사정기법회-청화대선사설법
*20030316-삼영불교음반-학무 유락재 촬영
*20051023-DVD작업-본정 김영동
*20070918-녹취워드작업-지혜림 이주미
*20070921-정리-본정 김영동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 작업용으로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3. 청화 큰스님 법문집 > 4. 금강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7호 동안거 입제법회 (0) | 2009.01.04 |
---|---|
제36호 강릉성원사 유치원개원법회 (0) | 2009.01.03 |
제34호 광륜사 정기법어 (0) | 2009.01.02 |
제33호 성륜사 정기법문 (0) | 2009.01.02 |
제32호 성륜사 하안거해제법문 (0) | 2008.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