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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36호 강릉성원사 유치원개원법회

 

                        <제 36 호>

20030413-강릉성원사 유치원개원법회


<불이법문不二法門>


성원사聖源寺는 거룩한 성인聖人의 법 즉 진리眞理의 도량道場입니다. 따라서 성원사는 진리의 도량답게 대웅전大雄殿이 들어앉고 또 각 전당이 그때그때 정도에 맞추어서 자리잡고 있고 이번에는 보재루普齋樓, 만세루萬歲樓나 똑 같이 만중생을 재도하는 누각이 만세루 보재루입니다. 주지스님은 그 이름을 정중전淨衆殿이라 명명하기로 하신 모양입니다.

거기에 겸해서 강릉시에 이러한 장엄스러운 포교당인 도량을 건립했다고 생각할 때에 참 장한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떠한 것이나 모든 일이 인연因緣을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는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이라, 모두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법입니다. 따라서 그 주지스님의 원력과 또 주지스님과 같이 동참하신 도반스님들과 또는 부산이나 마산이나 대구나 광주나 서울이나 또 강릉시에서나 거룩한 뜻을 같이하신 우리 불자님들이 동참해서 이루어진 것이 성원사 거룩한 진리의 도량입니다. 거기에 겸해서 강릉시에 이러한 훌륭한 도량을 세웠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입니다.

불사佛事라는 것은 부처님 제자로해서 하는 불사라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 다생겁래多生劫來로 지어내려온 업장業障을 녹여서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하는 그러한 불사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불사는 또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그런 공부를 하는 그 수려한 도량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그런 도량이 그 완벽하지는 미처 못했다하더라도 그 성원사는 앞으로 선원禪院만 지으면 이른바 명실공히 칠당가람七堂伽藍이라. 칠당가람의 그러한 규모를 다 갖춘 훌륭한 강원도의 명찰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문제는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어떻게 빛내야 할 것인가. 부처님의 정법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 불자님들, 우리 불자님들은 그 불경佛經도 많이 보셨을 것이고 또는 여태까지 화두를 참구해서 화두 공안선公案禪도 많이 했을 것이고 또는 화두 없이 묵조선黙照禪도  했을 것이고 또는 염불을 많이 해서 염불삼매念佛三昧도 했을 것이고 하셨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모두가 다 하나같이 성불成佛의 법입니다.

부처님 법이 어떠한 것이 진정한 부처님 법인가. 그 재가불자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유마거사維摩居士, 유마거사는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법을 빛내신 훌륭한 재가불자입니다.

그 유마거사의 그런 법문가운데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입불이법문이라. 모든 법이 둘이 아니라는 그러한 법문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눈에 보이는대로 이것인가 저것인가 또는 좋다 궂다 나다 너다 그렇게 구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부처님 법의 요체, 부처님 법은 우주의 자연법自然法입니다. 부처님 법은 우주의 법이자연적法爾自然的인 우주의 그러한 질서가 바로 부처님법입니다. 그 법은 바로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둘이 아닌 법문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천차만별千差萬別로 지금 보지 않습니까.

불이법문不二法門이란 것은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眞理라는 뜻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어렴풋이 납득이 되시는 분도 계시고 또는 전혀 감도 안잡히는 그러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하니 이 현상계現象界란 것은 천차만별인데 사람으로 보나 또는 여러 가지 이른바 정보지식情報知識으로 보나 천차만별인데 어떻게 해서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란 말인가.

우리 중생들은 상으로만 봅니다. 우리 중생들은 현상만 겉만 봅니다. 그러나 참다운 성품性稟... 이 상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성품에서 잠시간 모양을 나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아무리 많은 현상이 있다하더라도 상이 있다하더라도 모두가 다 하나의 성품으로 귀일歸一됩니다.

바다에서 바람따라서 파도가 천파만파 치지 않습니까. 그러나 똑같은 다 바닷물이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부처님법도 모든 갈래는 많다 하더라도 똑같이 하나의 진리에서 이루어진  진리의 하나의 작용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 진여眞如라는 말씀을 많이 들으셔서 알으시겠지요. 진여라. 참 진자 같을 여자. 마명보살馬鳴菩薩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보면 심진여자心眞如者 대총상법문체야大總相法門體也라. 심진여자 대총상법문지체야라. 진여라는 것은 모든 법문의 대총상이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바다에서 바람따라서 천파만파가 된다 하더라도 똑같이 모두가 다 바닷물이듯이 그 진여라는 진리의 바다에서 모든 중생이라든가 현상적인 상이 천갈래  만갈래로 갈라진다하더라도 똑같은 진여 그 자리는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상은 만갈래 천갈래로 갈라진다하더라도 근본성품은 똑같은 자리입니다. 따라서 진여眞如라는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이법문이라,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둘이 아니란 법문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개인적인 번뇌煩惱라든가, 또는 사회적인 국가적인 또는 세계적인 문제, 모든 인생고해人生苦海의 갈등과 반목이라는 것은 그 근원적인 성품을 모르는 데서 그 원인이 있습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우리 중생은 분명히 나는 나고 너는 너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중생의 아상我相으로 중생의 아집我執으로 봐서 나는 나고 너는 넙니다.

나라는 그런 그 아집, 나라는 그런 아상을 떠나버리면 그때는 나와 남의 차별差別은 없습니다. 나 아자 볼 견자. 아견我見이라. 불자님들,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견이 있으면 이것은 그 외도外道의 생각인 것이고 그 나아자 볼견자, 아견이 없어야 비로소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내 몸뚱이가 분명히 있고 내 관념觀念도 아, 분명히 있는데 왜 왜 내가 비었다고 하는가.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를 못합니다.

나라는 것은 이것은 그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그런 그 원소가 업따라서 잠시간 이런 모양으로 지금 나투어 있단 말입니다. 거기다가 우리가 감수感受하고 또는 생각하고 분별하고 느끼고... 그러한 사유활동思惟活動 그러한 생각하는 것이 거기에 붙어서 그러한 것이 나의 정체란 말입니다. 

나라는 그런 관념이나 또는 너라는 관념이나 뿐만이 아니라 일체 우리 감각으로 받아들여지는 대상, 이 모두는 다 허망한 공인 것입니다.

금강경金剛經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그 눈에 보이는 현상계라는 것은 모두가 다 꿈이요 또는 허깨비요 또는 거품이요 그림자요 풀끝의 이슬같고 또는 번갯불같고. 이와같이 허망한 것이 이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현상계 모두입니다. 나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너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불사하는 위대한 그런 전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이요 그림자요 풀끝의 이슬이요 또는 번갯불이나 똑같이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수 있는 그런 우리 마음을 닦을 수 있는 그런 도량을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한다하더라도 또는 그것이 분명히 유익한 일인데 그렇더라도 실상實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런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어디가 있는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같이 그 사대오온四大五蘊이라. 각 원소가 우리 업따라서 합해지고 거기에 우리 관념이 달라붙은 거란 말입니다. 즉 이와같이 우리 몇 백명의 불자님들이 지금 계십니다마는 우리가 생각할 때는 옆엣 사람 모두 다 김가 박가 각각 다르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가령 산소酸素나 수소水素나 탄소炭素나 질소窒素나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봅시다. 이 공간속에 산소나 질소나 탄소나 그런 것이 없는 데가 있습니까. 또는 우리 몸을 구성한 것도 내내야 그런 원소元素가 어떻게 집합됐는가 어떻게 결합됐는가. 거기에 따라서 구분이 생기는 것이지 똑같이 이 공간이나 우리 육체적인 문제나 우리 집이나 모두가 다 각 원소로 구성됐단 말입니다. 따라서 원소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진여眞如라. 대총상법문의 체가 진여인데 그러면 진여의 차원에서 보면 어떻게 봐지는 것인가. 진여의 차원에서 보는 것이 가장 실다웁게 보는 것입니다. 진여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진여입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바로 진여불성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눈에 안보인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모양이 아닌 그러한 모든 존재의 실상을 우리가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모양으로 나툰 그런 분야도 있고 또는 모양으로 나투지 못하는 모양을 초월한 그런 형이상학적인 그러한 순수생명純粹生命도 다 같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양이 있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허망무상한 것인데 꿈같고 다 허깨비같은 것인데 모양이 아닌 우리 생명자체生命自體, 생명자체인 진여는 이것은 불생이불멸不生而不滅이라, 나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우리 생명의 본고향입니다.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인 고민도 역시 우리가 허망한 것을 있다고 집착하니까 없는 것을 없다고 봐야지, 없는 것을 있다고 보면 거기에서 얻지를 못하니까 자연적으로 우리 고뇌苦惱가 생기지 않습니까.

참말로 있는 것을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리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떠나서 모든 우리 번뇌를 다 소멸하고서 우리가 영원히 해탈解脫하는 우리 번뇌를 해탈해서 참다운 행복幸福을 얻는 그렇게 해서 모두가 더불어서 함께 성불成佛하는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 아닙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런 것은 스님네나 할 것이지 우리 재가불자들이 감히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아득한 생각을 내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런 길은 절대로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사실은 따지고 보면 제일 쉬운 길입니다.

우리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가 다 지금 근본根本으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생명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그것만 생명인 것이지 돌멩이나 이런 공기나 아, 그런 것은 생명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우주 모두가 다 우주자체宇宙自體가 바로 우주생명宇宙生命입니다. 바로 생명이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돌멩이나 또는 쇳덩이나 공기나 물이나 모두가 다 쪼개고 쪼개고 나누어서 보면 드디어는 각 원소가 되지 않습니까. 원소元素는 또 원자原子가 될 것이고 원자는 소립자素粒子라하는 사람의 눈에는 안보이는 그런 미세한 즉 말하자면 미세한 물질이 됩니다.

미세한 물질은 그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에서 말하는 가장 작은 미세한 물질은 물질이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금시 생겨나고 금시 없어지고 서로 상호전환相互轉換이 됩니다.

그런 것은 물리학적인 술어로 해서 여러 가지 말이 있으나 현대물리학은 물질의 근원을 다 파악을 못합니다.

왜 파악을 못하는가 하면 학문적인 자연과학이라 하는 것은 그 물질이 있는, 시간성時間性과 공간성空間性이 있는 것은 알 수가 있지만 그런 시간공간성이 없는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측정測定을 못합니다. 

측정을 못하나 그 가운데는 무한의 힘이 무한의 에너지가 거기에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알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무서운 원자력原子力을 내지 않습니까.

따라서 어떠한 물질이나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근본자리는 만능萬能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입니다.

저는 딱 한 10분정도나 얘기를 할려고 생각을 했습니다만 여러분들 가운데서 부산서도 오시고 또 마산서도 오시고 여러군데서 모두 오셨는데 그 노장이 그래도 법상法床에 올라가서 얘기를 좀 더 해줬으면 될 것인데 그런다... 그렇게 아쉽게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안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마음이란 것에 대해서 확실히 느끼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모양은 안보여도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있다고 생각할 때는 아, 마음이 있으니까 살아있다고 생각이 되지 않습니까.

그 마음은 그러면 어디가 있는 것인가. 소박한 사람들은 마음은 뇌에가 있지, 또는 심장心臟에가 있지. 이렇게 소박한 대답을 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에가 있다고 그 처소를 지정할 수가 없습니다.

모양이 없지만 우리가 생각한다고 생각할 때, 그 데카르트Descartes 말마따나 우리가 생각하니까 분명히 나는 있는 것인데 그 내 마음은 어디가 있는 것인가.

내 마음이란 것은 이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으면서 있는 것은 사실은 끝도 가도 없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게 있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이 마음의 소재, 마음의 소재에 관해서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마음이란 것은 분명히 있긴 있는데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다는 것은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모양이 없으면서 있는 것은 바로 끝도 가도 없이 우주宇宙에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생겨남도 없고 또는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것이고. 지금 당장에 우리 몸이 죽는다고 그래서 우리 생명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생명은 죽을래야 죽을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나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는 것이 우리 생명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느 사람마음이나 모두가 한결같이 우주에 사실은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면 부처는 무엇인가.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나오신 그러한 부처님이시고 석가모니부처님이 나오시고 안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우주에 어느 때나 언제나 상주부동常住不動하니 계시는 부처님은 법신法身부처님 아닙니까.

우주의 진리로 해서 우주의 근원 그런 성품으로 해서 부처님도 분명히 계시는데 우리가 지금 안보인단 말입니다.

따라서 아까 우리마음과 똑같이 그 법신부처님도 있기는 분명히 있는데 모양이 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양이 없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천지우주를 다 감싸있습니다. 무량무변합니다. 영원히.

여래상주如來常住 무유변역無有變易이라. 열반경涅槃經에서 부처님께서 여래상주 무유변역이라. 그 여래는, 부처님은 상주를, 항시 우주에 계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도 모양이 없으면서 존재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우주를 감싸있고 똑같이 그 법신부처님도 모양이 없으면서 존재하는 우주의 진리기 때문에 우주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때는 우주를 감싸있는 그런 무량무변한 생명존재生命存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잘 외두시기 바랍니다. 똑같이 모양이 없이 있는 것은 사실은 똑같은 것입니다. 모양이 없이 있는 내 마음이나 모양이 없이 있는 그러한 그 부처님의 성품, 불성이나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가 바로 마음이고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우리가 염불念佛을 하고 또는 다른 참선參禪을 하고 또는 경을 외고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인 자리를 깨닫기 위해서 그럽니다.

마음이 바로 부처인 자리를 그 도인들은 성자들은 깨달은 분들은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합니다.

화두 공안식으로 말하면 마음이 바로 부처란 자리를, 더러는 무위진인無位眞人라, 다시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참다운 이른바 참마음이란 말입니다.

또는 운문스님같은 분은 똥바른 막대기라. 마음이란 것은 무슨 금덩이 은덩이 같은 그런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일체 존재가 모두가 다 근원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성품이기 때문에 똥바른 막대기라해도 그때는 좋습니다.

조주스님말대로 하면 그때는 아, 무라, 또는 판때기에 털나온다, 판치생모板齒生毛라. 이렇게 해도 좋습니다.

그 성인들 말씀은 모두가 다 어떻게 표현이 됐든지간에 한결같이 그 마음자리, 모양이 없는 그 자리를 상징적으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앞으로 성원사는 그러한 그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둘이 아닌 그러한 법문을 여러분들한테 빛내주실 그러한 훌륭한 도량입니다.

불이법문이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그 지금 이라크에서 그 무시무시한 전란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나 저런 것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 법문같은 그런 불이법문을, 이것이나 저것이나 또는 불교나 기독교나 또는 이슬람교나 사실은 근원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절대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둘이 아니라는 법문은 어느 특정한 법문만 가리켜서 둘이 아닌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가 바로 바로 직통直通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말씀한 것이나 또는 예수님이 말씀한 것이나 또는 마호메트가 말씀한 것이나 또는 공자가 말한 것이나 다 똑같은 자리입니다. 다 하나의 진리란 말입니다.

하나의 진리인데 잘못 생각해서 내 종교만 절대로 옳다, 내가 생각하는 것만 옳다... 이슬람교에서는 그 마호메트가 생각한 것이 제일 옳고 다른 것은 모두가 다 마구니 소리다. 또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했으니까 하나님이 말씀한 말씀만 옳고 다른 것은 다 옳지가 않고 다 마구니 소리다. 이렇게,,,

이것을 가리켜서 이른바 학문적 술어로 하면 근본주의根本主義라, 또는 교조주의敎條主義라 그럽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공부도 많이 하셔서 여러 가지로 무슨 주의, 무슨 이데올로기 여러 가지로 많이 알으십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인고 하면 꼭 자기가 아는 것, 자기가 주장하는 것,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불교전문술어로 말하면 법집法執이라. 나만 존재한다는 그런 나 아자 집착할 집자 아집我執과 더불어서 꼭 어느 법만 절대로 옳다는 그런 법 법자 집착할 집자 법집法執이라. 법집이 있으면 남하고 또 화해도 못하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무시무시한 그런 혼란과 전란을 절대로 면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분야에서나 모두가 다 한결같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참 진자 같을 여자 부처 불자 성품 성자, 진여불성은 조금도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더함도 덜함도 없이 항시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가 참선을 한다하더라도 진여불성자리, 우주의 근원적인 그 본래면목자리를 떠나지 않고 참선을 해야 참선이 되는 것이지 덮어놓고 아, 무 무 이뭐꼬 이뭐꼬 한다고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염불도 그래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 저 우리 마음밖에 저만치 계시다가 우리가 염불하면 우리를 도와준다, 이렇게 생각하는 염불은 참다운 염불도 못되는 것이고 참선도 못됩니다.

자성미타自性彌陀 유심정토唯心淨土라. 내 본성자체가 내 마음자체가 바로 부처고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부처아님이 없다, 이렇게 해서 염불하면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바로 그것이 염불참선念佛參禪, 염불선念佛禪이 됩니다.

다 그렇습니다. 화두를 드나 또는 화두없이 묵조를 하나 또는 경을 외우나... 우리 마음이 그 본래면목자리,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자리, 내 생명의 근본자리를 안떠나면 그것이 참다운 공부인 동시에 그렇게 하면 다 참선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왼다하더라도 그 마음자리로 해서 모두가 다 같은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하고 생각할 때는 이것도 역시 훌륭한 하나님 참선입니다.

이렇게 천지우주가 다 둘이 아닌 자리, 그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인도 힌두교의 우파니샤드에서 가장 중요한 법문도 무엇인고 하면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이라. 천지우주가 모두가 근원에서 둘이 아닌 하나의 진리란 말입니다.

둘이 아닌 하나의 진리, 이것은 개인적인 행복을 보장하고 또는 우리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고 또는 사회나 국가나 또는 국제간이나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 인간을 최상의 복지福祉로 인도하는 가장 근원적인 가르침입니다.

앞으로 우리 성원사에서 바른 부처님의 정법, 부처님의 정법은 바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입니다. 반야般若의 지혜智慧입니다. 반야의 지혜란 것이 바로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우주가 오직 그 하나의 일원적一元的인 생명生命이다 이 자리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하셔서 최상의 행복,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공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 기쁨을 주고 우리한테 유익을 주고 또는 모든 그런 평화와 행복을 보장하는 그러한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한없이 행복스럽게 평화롭게 불자의 길을 걸어가시길 빌어 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20030413-성원사(강릉성정사)법문-청화대선사설법

*20030413-삼영불교음반-학무 유락재 촬영

*20051107-DVD작업-본정 김영동

*20070921-녹취워드작업-지혜림 이주미

*20070922-정리-본정 김영동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정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