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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 38 호 성륜사정기법문

 

                   <제 38 호>

                      20010304-성륜사정기법문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


우리불자님들을 만나 뵈서 대단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날씨에는 집안에서 다습게 그냥 좌선坐禪도 하시고 공부하시면 좋으실 것을 일부러 오셔서 한편 죄송스런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 6조 혜능慧能스님도 말씀하시기를 부처님법은 절대로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 아니라 간단명료하고 명석직절明晳直切한 그런 법문法門이기 때문에 그 대요大要를 알아버리면 그냥 공부할 것이지 나한테 자주 와서 이래저래 복잡한 질문을 한다거나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신적도 계십니다.

우리들은 지금 대상적對相的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존재가 많이 있습니다.  우선 이웃사람도 있고 또는 모든 것이 산하대지山河大地 이런 것이 하나의 대상적으로 우리한테 보이는 이 물질적인 세계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자칫 생각할 때는 그 우리 정신으로 판단하는 우리 주관主觀과 또는 그 주관主觀이 비추어지는 객관客觀 이런 것이 둘이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또 옆엣 사람하고도 ‘나따로 있고 저 사람 따로 있고’ 그와 같이 자타自他를 구분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처님 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이 본래本來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상식적常識的인 생각과 또는 바른 부처님의 그런 정견正見과는 그러한데에 굉장히 근원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것 다르고 저것 다르고, 그러나 부처님의 그 근본도리根本道理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의 근본도리란 것은 바로 성자聖者가 보는 정견正見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정견을 가지고 있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자기로서는 아, 내가 무던히 배우고 철학哲學도 하고 과학科學도 하고 했으니까 내가 보는 것은 이것은 아주 정당하다. 이럴랑가 모르겠지만 부처님가르침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중생 그 범부凡夫의 견해를 떠나지 못하는 한에는 모두가 다 전도몽상顚倒夢想입니다. 이른바 거꾸로 본단 말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보고 또 있는 것을 없다고 보고 그러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없는 것을 있다고 보는가?

우리가 지금 진여불성眞如佛性 그러면 안보이지 않습니까. 진여眞如라는 참 진자 같을 여자 진여라 하는 우주의 도리도 안보이고 또 부처 불자 성품 성자 그런 불성佛性도 우리는 분명히 지금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진여眞如가 없고 또 불성佛性이 없으면 우리가 불교인佛敎人이 될 까닭도 없지 않습니까.

그와같이 분명히 성자가 보면 명명백백明明白白히 존재存在하지만 우리가 생각할 때는 또 그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이 육체적肉體的인 존재는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도 분명히 명명백백히 존재하나,

또 우리가 제법공諸法空 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공의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은 하나의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나 또는 허깨비나 그림자 같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한말로 말씀하면 사실은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실재성實在性이 없단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금강경金剛經이나 모두가 공도리空道理를, 제법諸法이 다 비어있다는 공도리를 말씀한 경전經典 아닙니까. 그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經은 600부, 육백부도 모두가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이것은 다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거꾸로 보는 것이고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도리를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이 도리를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왜 우리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있는 것을 이 불교에서는 없다고 말하는가?

그러나 가끔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옛날에는 그런 도리를 알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옛날에는 무슨 과학적인 지식이 없어놔서 그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현대는 다행히도 그 과학문명科學文明, 자연과학自然科學이라 하는 것이 그 우주宇宙를 쪼개고 쪼개고 쪼개가지고서 조그마한 알맹이, 즉 말하자면 원자原子 같은 이 소립자素粒子 같은 그런 알갱이로 만든단 말입니다.

아무리 그런 조그마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랑가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 전자電子나 양성자陽性子나 소립자나 그 조그마한 알맹이는 사실은 존재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그것이 소멸消滅되고 또 그것이 상호전환相互轉換된단 말입니다.

전자는 전자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또는 중성자中性子나 그런 것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순간 생겨나자마자 소멸되고 또 상호 서로 이렇게 바꾸어지고 그러는 것입니다.

중성자가 전자를 내고서 양자가 되는 것이고 양자가 또 전자를 받아들여서 중성자가 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즉 그 알맹이란 것이 그것이 인간의 눈에는 안보이고 그 현미경 속으로 가까스로 볼 수 있는 그런 조그마한 그런 존재가 이런 것도 사실은 이것이 그대로 가만히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존재성存在性이 있다고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철학哲學 그러면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허나 사실은 철학을 어느 누구나가 꼭 해야 됩니다.

어째서 해야되는고 하면 모든 존재의 모든 그 있는 것의 그 근원根源자리 근본根本자리를 밝히는 것이 철학 아닙니까.

과학科學이라는 것은 이 물질적物質的인 문제만 따집니다. 과학은 물질적인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만 따지지만 과학으로 해서는 우리 정신세계精神世界나 또는 부처나 또는 신이나 그런 세계는 다루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그 눈에 안 보이는 우리 정신세계, 또는 영원한 영원불멸永遠不滅한 법신불法身佛의 세계, 또 하나님의 세계, 그런 세계는 철학이 아니고서는 다루지를 않습니다. 다루지를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육체적인 이 모양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또 역시 우리 마음도 분명히 존재한단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소위 그야말로....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의 그 말과 마찬가지로 내가 생각하니까 내가 있다고 하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힘이 없어놓으면 내가 있다고 또 할 근거지도 없겠지요. 따라서 우리 마음도 분명히 존재한단 말입니다.

왜 제가 이렇게 어려운 말씀을 여러분들한테 굳이 드리는고 하면 이 현대라는 사회가  그 복잡한 사회입니다.

이른바 문화文化의 시대時代란 말입니다. 문화의 시대, 이 정보情報의 시대라는 것은 이른바 지식知識의 시대아닙니까.

그 모든 지식을 바로 밝히고 알려면 철학이 없이는 그건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훌륭한 철학자哲學者만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느 누구나가 이 정보화시대情報化時代를 살기 위해서는 꼭 철학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철학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내 마음을 밝히는 그런 가르침이 바로 철학이란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눈에 안 보이는 것이나 그러한 모든 존재의 그 근원을 밝힌단 말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형이상학形而上學, 형이상학 이것이 철학을 대변하는 말로 형이상학이라. 형이상학은 모양이란 형체라는 형자 말입니다. 말이을 이자 윗 상자, 그 눈에 안 보이는, 이 물질세계를 초월한 그 초월적超越的인 세계, 이 영원적永遠的인 그런 초월적인 세계가 이른바 형이상적 세계 아닙니까. 이런 세계를 공부하는 것이 형이상학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철학이란 말이나 형이상학이란 말이나 사실은 똑같습니다. 똑같으나 인제 조금 달리 쓰이기도 하나 그건 학자學者들이 하는 일이고 우리가 대두리를 말하면 이것이 똑같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어렵더라도 현대를 바로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리 불교인들은 현대를 이끌어갈만한 그런 그야말로 참 지도적指導的인 입장에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 다종교사회多宗敎社會에서 부처님가르침같이 합리적合理的이고 또 궁극적窮極的인 가르침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종교宗敎의 여러 가지 그런 부족한 점, 그런 점을 우리가 보완補完시키고 이끌어갈라면 꼭 불교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인데 불교를 한다 하더라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형이상학적인 그런 그 철학을 우리가 공부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그야말로 부사의不思議하고 잘못 쓰이면 또 요물妖物 같은 그러한 그런 하나의 정신이 되고 말겠지요.

그러나 이 일반사람들은 그 마음의 정체正體를 도저히 알래야 알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마음이란 것이 모양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잡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또는 그 마음이 한계限界가 있어가지고서 내 몸속에만 마음이 꽉 이렇게 갇혀있다면 모르겠지만 그 몸속에 있는가 또는 몸 밖에 있는가 어떻게 그것이 모양이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어떻다고 말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일반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아까 말씀드린 형이상학적인 즉 말하자면 물질세계 이상의 그런 영원적인 세계, 물질세계 이상의 그 순수세계純粹世界, 이런 세계를 철학적으로 우리가 깨달아서 아는 그런 성자의 경계境界에서만이 비로소 우리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 범부중생凡夫衆生들은 모두가 다 마음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학문적學問的으로 많이 공부를 했다하더라도 그 대강대강 짐작하는 것이지 마음이 대체로 어떤 것이다, 이렇게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깨달음을 우리가 얻는다, 마음을 깨친다, 또는 도통道通한다,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사실은 그 성자가 되어서 마음의 본체本體를 안다는 것에 지나지가 않습니다.

마음의 본체를 안다는 것은 그냥 마음만 아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물질세계 전반全般도 안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고하면 이 물질세계란 것이 이것도 역시 다 마음가운데가 들어있는 세계란 말입니다. 물질세계가 어째서 마음가운데 들어있는 것인가, 이것도 또 상당히 어려운 귀찮은 문제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 중생들은 자꾸만 이렇게 갈라서 봅니다. 갈라서 보니까 마음이 분열分裂되고, 또 그때그때 고통苦痛도 되고 우리가 고생한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 고생하고 번뇌煩惱를 일으키는 것이 그 원인이 어디가 있는가? 이런 것을 잘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헛고생을 또 많이 합니다.


인류역사人類歷史 이래로 그 논쟁거리가 무엇인고 하면 모든 존재는 근원적으로 본래가 물질이다. 이른바 유물론唯物論이라, 물질이 근원적인 실제다, 이와 같이 말하는 학설學說이 있지 않습니까.

맑스Marx, 1818~1883의 변증법辨證法이나 그런 것도 모두가 유물론적唯物論的인 유물사관唯物史觀에서 입각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幸福이란 것도 물질적인, 그런 여러 가지 물질적인 분야에서 다 평등平等하고 또는 자유롭고 하는 그런 이론체계로 해가지고서 이루어진 것이 이른바 맑스-엥겔스의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 아닙니까.

그래서 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본다고 생각할 때 이것은 그 유물론이라 하는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근본은 다 물질이 근원이다, 이와 같은 그런 견해란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그렇지 않고 물질적인 것은 이것은 하나의 그 허망한 다 거품이나 환상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은 정신적精神的인 것이 이것이 본래적인 근원이다, 이런 것은 이른바 유심론唯心論이나 또는 관념론觀念論 이런 것이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좀 어려우셔도 적어도 유물론唯物論이나 또는 유심론唯心論 또는 관념론觀念論 그런 정도의 구분은 알으셔야 됩니다.

왜 그런고하면 수천년을 통해서 이것가지고서 굉장히 많이 사람들이 다투어왔단 말입니다. 유물론이다 또 유심론이다, 또 실재론이다, 관념론이다 해서 그와같이 그런 그 양쪽의 견해를 가지고서 다투어왔습니다.

또 그런가하면 근대철학의 아버지라하는 칸트Kant 1724~1804같은 분은 양쪽을 다 합하려고 애썼단 말입니다.

그래 한쪽은 물질이라고 고집한 분도 있고 또 마음뿐이라고 고집한 분도 있고 그런가 하면 물질과 마음이 같이 더불어서 같이 있다, 이런 분도 있고 이와같이 세갈래로 해서 인류문화人類文化가 수천년동안 서로 다투고 싸우고 그렇게 돼왔단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 현재까지도 그런 것이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이런 것을 다 종합적으로 지금 해결시키고 있는 것이지 다른 가르침은 다 모두가 지금 애매모호합니다.

기독교적인 인생관人生觀을 우리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님이 창조創造했다고 보지 않습니까. 잘나나 못나나 누구나가 다 산하대지山河大地나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본단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예수님은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은 하나의 조물주造物主가 만들어놓은 피조물被造物에 불과하고 이렇게 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차원이 결국은 세 차원 되겠지요. 창조를 하는 하나님이 있고, 또 하나님의 친아들로 해서 예수가 있고, 또 일반사람들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그런 자연이 있고, 그렇게 세 차원이란 말입니다. 세 차원이니까 마음이 그 통일이 잘 되겠습니까.     

진리眞理가 그렇다면 모르지만 진리는 오직 하나의 진리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의 도리道理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도리를 그 분명하게 밝힌 가르침이 이른바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도 대승불교大乘佛敎가 그런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어째서 하나의 도리일 것인가.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가 보는 이 존재의 세계, 모양의 세계란 것은 그 수천수만數千數萬이 되지 않습니까. 이른바 불교말로 하면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이라. 끝도 가도 없이 다양한 것이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다양하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하나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차별적인 세계는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원리적原理的인 세계,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모양을 초월超越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세계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란 말입니다.     

이것은 역시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철학에다가 관심을 두고 철학은 모든 존재의 근원을 깨닫는 것이 이른바 철학인데 철학에다가 관심을 두시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그럽니다. 관심觀心을 안두면 그냥 그렁저렁 그 모양 보이는 대로 그대로 느끼고 더러는 기분 사납기도 하고 더러는 좋기도 하고 그렇게 산단 말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범부생활凡夫生活인 것이고 참다운 우리가 진리에 입각한 정견에 입각한 바른 견해에 입각한 생활은 성자의 견해 부처님의 견해 이런 견해 가지고 살아야 우리가 이른바 세상을 바로 살고 또는 마음도 항시 아주 편안한 그런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된단 말입니다.   


그 인도印度에서 훌륭한 성전聖典인 우파니샤드Upanishad, 우파니샤드란 말씀을 들으셨지요. 우파니샤드는 인도교印度敎 즉 힌두교에서 아주 성전으로 치는 훌륭한 그런 경전입니다.

불교도 우파니샤드에서 영향을 많이 받고 또 불교 가르침하고도 아주 굉장히 밀접 불가분리한 그런 가르침입니다.

헌데 우파니샤드의 그 근본도리가 무엇인고 하면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이라. 불이일원론이라. 아니 불자 두 이자 둘이나 셋이나 그와같이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원론一元論이라. 한 일자 으뜸 원자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로 돌아간다는 그런 뜻이란 말입니다.

브라흐만梵神Brahman이라하는 그런 하나의 우주적宇宙的인 생명生命이라든가 또는 아트만atman이라 하는 그야말로 개별적인 생명이라든가 그런 것도 종당에는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로 귀일歸一되는 가르침이 이른바 불이일원론입니다.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이 되어야 우리 마음이 비로소 안정安定이 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불안스러운 것은 그 모든 존재에 있어서 그 내용이나 거기에 얽혀있는 것을 잘 모르니까 불안스럽지 않습니까.

우리가 밤에 어디 간다고 생각할 때도 가는 목표도 확실치 않고 가는 길목도 잘 모르면 불안하게 우리가 느껴지고 그러지 않겠습니까마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생人生의 그런 몇십년동안의 여정도 역시 우리 마음이 훤히 이것저것 다 알아버리면 그때는 시원스럽단 말입니다.

고생이 온다 하더라도 고생 그것의 근원도 알 수가 있는 것이고 고생의 근원을 알면 또 근원을 없애서 고생을 우리가 안 받을 수도 있는 것이고. 하여튼 그 본래적인 근원을 안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불이일원론도 역시 원래의 진리眞理가 둘이고 셋이고 있다면 모르거니와 사실은 진리란 것은 결국은 하나의 도리란 말입니다.

우파니샤드Upanishad나 그런 데에 있는 가르침만 그런 것이 아니라, 특히 우리 불교의 가르침인 부처님 가르침도 소승小乘이 있고 또는 그야말로 대승大乘이 있고 모두 그와같이 다 있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은 소승은 다 대승에 같이 흡수가 되어서 오직 있는 것은 대승뿐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법화경法華經에도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 다 있지만 모두가 다 근원적인 부처님 가르침은 일불승一佛乘이라. 모든 존재가 다 부처님의 성품을 원래 갖추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모든 중생이 다 꼭 부처가 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일체중생一切衆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모두가 종당에는 꼭 부처가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도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그 열반경涅槃經에 있는 그런 가르침인데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부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고 여래상주如來常住 무유변역無有變易이라. 여래는 바로 부처라는 뜻 아닙니까. 여래상주라. 항상 상자 머무를 주자. 그 부처님은 항시 머물러서 무유변역이라. 조금도 변동이 없단 말입니다.

여래如來란 것은 바로 부처님이고 또는 바로 우주의 도리를 말한 것입니다. 조금도 더 보태고 깎음도 없이 오직 그 진리와 똑같은 그런 생명존재生命存在가 즉 말하자면 여래란 말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성인聖人들도 사실은 다 원칙은 여래입니다. 일반 성인들 뿐만 아니라 본래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형이상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도 다 모두가 여래란 말입니다.

왜 그런고하면 어느 것이나 진리에서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 근원에서 근원적인 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여래가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이 대상對象만 우리가 끌려가면서 모양만 보니까 즉 다시 말하면 상만 보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다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나 상을 떠나서 근본성품根本性稟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일미평등一味平等이라. 똑같이 하나의 진리란 말입니다. 하나의 즉 말하자면 다 여래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불안의식不安意識을 해소하는 것이 우리 인간차원人間次元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아닙니까. 우리가 불안하면 사실은 살맛이 없어진단 말입니다. 자기도 바로 못살고 자기 가족도 바르게 이끌지를 못하고 또는 무슨 우리가 사업한다 하더라도 사업도 역시 바르게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꼭 그 바른 도리를 알아야만이 어느 길에 있어서나 자기가 지금 맡아있는 자기 어느 구실을 하든지간에 정당한 구실을 할 수 있단 말입니다. 정당한 구실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그 오직 바른 하나의 도리, 정견正見을 알아야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가르침가운데 팔정도八正道가운데도 정견이 가장 핵심이란 말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가 우리가 참선參禪도 하고 계행戒行지키고 하는 것은 정견에 따르는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바른 견해見解 바른 비전vision을 딱 우리가 확립을 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문제입니다.  

그 제법공諸法空도리란 것은 우리가 말로는 쉬워도 굉장히 어려운 문제란 말입니다. 우리같이 출가승이 되었어도 한 20대나 30대나 그럴때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금강경金剛經이나 줄줄 모두 읽기는 읽지만 그 공도리가 그렇게 사무치게 오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차근차근 먹어지고 인생의 참 무상無常을 느끼고 인제 허무虛無를 또 그마만치 맛을 보고 인제 해가니까 차근차근 아, 그때는 그야말로 참 아주 그 공도리空道理 제법공도리가 그렇구나, 이렇게 느껴지고 또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대 이 학문이란 것이 굉장히 소중하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냥 미신적迷信的인 것도 현대 이 과학문명이 없으면 그냥 미신인 채로 그대로 묻혀버릴 것인데 현대 자연과학自然科學이란 것은 조금도 용서가 없이 모두를 다 파헤치고 정리하고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현대과학現代科學을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또 역시 그 과거세에 여러 가지로 해서 잘 모르던 그런 문제같은 것이 그 과학의 힘으로 해서 다 밝혀진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같은 사람도 이와같이 확신에 찬 그런 말씀을 드릴 수도 있고 여러분들도 그렇게 되셔야만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인생에 있어서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모든 존재의 실상實相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가상假相만 알고 참다운 실상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항시 불안스럽단 말입니다.

불안스러워지면 그때는 비단 자기 생활에서 문제뿐만 아니라 자기 건강에도 지대한 관계가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이 몸이라는 것은 이것이 하나의 상에 불과하니까 사실은 이것도 역시 허망한 거란 말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부모님한테 태어나기 전에 우리같은 그런 모양이 있었습니까. 이 천상천하天上天下 어디에도 이런 모양은 없었단 말입니다.

과거전생에 우리가 지은 업장業障 따라서 금생에 그 부모님의 연에 의지해서 이런 모양을 비로소 이와같이 가지고 나왔습니다. 내생에도 없고 또는 전생에도 없고 이 모양... 허망한 모양이지만 금생今生에 자기존재自己存在에 한에서 이와같은 모양이 있단 말입니다. <자기 존재라는 것은 상으로 보아서는 허망무상하지만 지금 이대로 또 역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우주의 중심적 존재라 할 수 있다.>

똑같은 모양은 또 어디에도 없습니다. 비록 이것이 허망虛妄하다하더라도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업장에 차이가 있어놔서 또 인연因緣의 차이 때문에 똑같은 모양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원적永遠的인 차원次元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누구나가 다 우주宇宙의 중심中心이 바로 즉 자기自己란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수학적數學的으로 아주 그 끝도 가도 없는, 반경半徑이 한도 끝도 없는 그런 하나의 원이 있다고 생각합시다. 원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원중심圓中心이 어디겠습니까. 도처에가 원의 중심이란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그 진리眞理의 문도 그와 똑같습니다.

이 우주宇宙가 이와같이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하지만 우주의 중심이 무슨 대통령이나 잘난 그런 천재나 그런 사람만이 중심이 아니라 나나 너나 도둑놈이나 누구나 모두가 다 우주의 중심이란 말입니다.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사실은 우주의 주인공主人公입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우주의 주인공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자기 스스로 우주의 주인공인 것을 잘 모른단 말입니다. 뭘 갖다가 밖에서 많이 보태주고 돈이 많이 있다거나 감투가 높다거나 아, 그래야 인제 우주의 주인공 구실을 한다고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대로 이 몸 이대로 모르면 모르는 채로 이대로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란 말입니다. 불교말로 하면 이 나한테 지금 현재 있는 것이 구족원만具足圓滿이라.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마음이 없는 사람이 없듯이 조그마한 티끌 속에도 역시 우리 마음은 다 들어있습니다. 조그마한 티끌 속에 있는 그런 마음과 또 우리한테 있는 그런 마음과 우주 마음이 틀리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틀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모양이 없어놔서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우주의 마음이나 또는 사람가운데 있는 마음이나 조그마한 티끌가운데 있는 마음이나 사실은 똑같습니다.

그러기에 화엄경華嚴經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이 우주의 모두가 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마음으로 돼있단 말입니다. 우리 몸도 마음으로 되고 산도 마음으로 되고 물도 마음으로 되고 어느 것도 다 마음으로 돼 있습니다. 마음아닌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동서철인東西哲人들 성인聖人들 모두가 다 그런 도리를 말씀했단 말입니다.

사실은 기독교의 하나님도 역시 저 하늘에 가서 무슨 신이 따로 있어가지고서 심판審判하고 누구를 창조創造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진리란 말입니다. 기독교 그 바이블Bible도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예수님도 꼭 바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조를 했다는 것도 모두가 다 그 하나의 진리에서 나왔다는 하나의 진리에서 유래했다는 그런 말씀을 상징적象徵的으로 창조했다고 그러는 것이지 본래 그 예수가 말한 뜻은 결국은 부처님께서 말한 뜻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보다 더 구체적이고 보다 더 궁극적인 차원이 높은 말씀을 하셨을 뿐인 것이지 그 근원적인 도리는 똑같단 말입니다.

만일 똑같은 진리를 말씀하지 않았으면 예수도 성인이 그때는 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적어도 성인이라고 한다고 생각할 때는 약간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중생의 그릇 따라서 그 표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근원적인 도리는 똑같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우주를 하나로 보는 도리는 똑같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도 비록 우리들이 우리 중생 견해로 봐서 범부견해로 봐서는 천차만별로 이렇게 저렇게 있다하더라도 모두가 다 근원적으로 하나의 도리다, 이것을 확실히 믿으셔야 됩니다. 이것은 그 무수한 성자가 일구여출一口如出로 다 증명證明을 했고 또는 현대의 그 아주 정밀과학精密科學도 그것을 증명을 합니다.

내 몸뚱이나 또는 산이나 냇이나 어떤 것도 모두가 다 원자原子로 안 된 것이 있습니까. 다 모두가 원자가 어떻게 모였는가 어떻게 진동하는가 그런 걸로 해서 그것이 됐단 말입니다.

다만 그 원자는 대체로 또 어떠한 것인가, 이런 데 있어서 물질의 그 알맹이의 근원이 무엇인가 이런 것은 현대과학은 알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하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형이상학적인 물질이 아닌 것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과학이란 것은 그 물질세계만 아는 것이지 물질이 아닌 저쪽 이른바 형체를 떠나보낸 정신의 세계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정신의 세계를 안다는 것은 역시 철학의 세계, 형이상학으로밖에는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지금 자기가 학문적으로 그런 데에 별로 관심은 없다 하더라도 그래도 하여튼 우리가 인간으로해서 바르게 살라고 생각할 때는 바른 생활을 할라고 생각할때는 남을 지도할라고 생각할 때는 꼭 우리가 형이상학에 관심을 두어야 한단 말입니다. 이른바 철학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철학이 되어야 모두가 하나로 통일되고 또는 철학을 해야 그래야 이른바 영원적인 자리를 우리가 지향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철학으로해서 바른 도리를 우리가 지향을 하고 그와 동시에 종교로 해서 그때는 우리가 체험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종교와 철학은 결국은 하나가 딱 되어야 됩니다. 이치理致로 봐서는 철학哲學이요 또는 우리 실천實踐으로 봐서는 결국은 종교宗敎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 어떻게 상태가 돼있는가. 마음자세에 따라서 우리 그런 생리적인 문제같은 것도 그때그때 그냥 바로 대응을 합니다.

기분사나우면 또 기분사나운 표정이 그냥 나오지 않습니까. 기분 좋으면 기분좋은 그런 표정이 나오고 말입니다. 우리 몸에 있는 백혈구白血球나 적혈구赤血球도 역시 우리 마음이 지금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것따라서 그런 백혈구나 적혈구도 또 불어나기도 하고 또 줄어지기도 한단 말입니다.

이 물질이란 것은 그때그때 순간순간 찰나도 모두가 다 우리 마음에 그냥 반응을 일으킵니다. 즉 대응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물질적인 우리 몸은 이것은 그때그때 변화무쌍變化無雙한 것이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고...

그러나 우리 마음 이것은 과거에도 존재하고 또는 미래에도 죽지않는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불생불멸이란 말도 굉장히 아주 심오深奧한 결국은 철학적인 말입니다.

낳지 않고 죽지않는단 말입니다. 나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은 결국은 영원히 있다는 뜻이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그렇게 많이 외시고 하셔도 불생불멸의 뜻을 그렇게 깊이 음미해 보셨습니까. 그냥 지나치게 많이 읽고 그러셨겠지요. 그 불생불멸이라. 이 생명, 나라는 생명이 과거에나 미래에나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있지가 않고서 항시 영원히 존재한단 말입니다.

새삼스럽게 생겨날 것도 없고 또는 새삼스럽게 생겨나지 않았으니 또 죽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불생불멸이라. 닣지 않고 죽지 않는, 낳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것은 영생한다는 뜻과 똑같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에 이 불생불멸을 확실히 믿어버리면 사실은 우리가 무서울 것이 없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전쟁에 나가 죽는다하더라도 이 허망한 몸뚱이만 그때는 바꾸어지는 것이지 우리 정신은 죽음이 없단 말입니다.

또는 우리가 무슨 일을 남을 위해서 애쓰고 봉사奉仕한다 하더라도 봉사하면 몸은 좀 피로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생명자체는 죽음이 없습니다. 봉사하므로해서 다른 사람과 나의 생명도 본래 생명의 뿌리가 똑같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 하는 것은 바로 자기한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바로 자기를 돕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금 수고는 스러워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은 그냥 또 그 공이 다 자기한테로 온단 말입니다.

눈에는 설사 그냥 당장에 안 보인다 하더라도 그 영원적인 차원에서는 틀림없이 남한테 베푼 이상으로 자기가 다 받는 것입니다.

그런 도리를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가 봉사 않고 자기 이익만 차리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생명의 뿌리가 다 똑같이 저사람 생명이나 내 생명이나 불생불멸하고, 불생불멸한 모양이 없는 것이 생명의 뿌리라고 생각할 때에 내 생명만 불생불멸이 아니라 여기 계신 분들 다 지금 생명이 불생불멸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니까 따라서 이 모양으로 해서는 몸뚱이 따라 우리 마음도 다르다고 생각할랑가 모르겠지만 몸뚱이 같은 모양은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우리 마음이란 것은 원래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자리는 결국은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은 무지無智하기 때문에 무명심無明心에 가리워서 잘 모르기 때문에 내 마음은 지금 내 몸뚱이에 들어있는 것이고 저 사람 마음도 저 사람 몸뚱이에 들어있어서 저 사람마음과 내 마음이 지금 다르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범부심凡夫心입니다. 범부심인 것이지 이것이 진리의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무리 지금 미운 사람이 옆에 있다하더라도 그 사람마음과 내 마음이 지금 뿌리에서는 똑같습니다. 작용은 지금 같이 한단 말입니다.

옆엣 사람을 우리가 아주, 그 사람이 좀 미운 짓을 해가지고서 굉장히 미워한다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그냥 미워하는 악념惡念이 그 사람한테 전류轉流가 됩니다. 이른바 텔레파시telepathy가 건너간단 말입니다.

인생이란 것은 근원도리根源道理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참 살기가 수월하단 말입니다. 가급적이면 남한테 좋게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하면 그 남한테 좋게 하면 그냥 자기한테 그 이상으로 우리한테 보답이 온단 말입니다.

보답을 바라고 하는 것은 또 그것이 소인小人이겠지요. 소인이겠으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우리가 생명이 하나라는 도리에서 그 자리에서 그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어느 순간이나 남한테 겸손하고 말입니다.

그 쥐꼬리만한 그 권위의식權威意識 내지 말고 말입니다. 모두를 하여튼 자기 가족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산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우리 마음은 차근차근 그때는 마음이 그런 칭칭 묶여있는 그런 계박繫縛으로부터서 마음이 풀려갑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칭칭 묶여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구속이 돼 있습니다.

자기라는 존재가 무엇이건데 존재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업으로 해서 잠시간 이와같은 모양을 받았을 뿐이란 말입니다. 또 이런 것이 항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도 변화무쌍變化無雙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드디어는 또 암에 걸려서 죽고 무엇에 죽고 모다 그야말로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우리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면치 못한단 말입니다.

불경佛經에 보면 어떤 사람이 죽어가지고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갔단 말입니다. 그 나쁜 짓을 많이 해서 틀림없이 지옥地獄으로 그 사람을 보내야 되겠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염라대왕도 보기에 참 안타까우니까 그대가 내가 천사天使를, 그대를 인도하는데 천사를 내가 세사람 보냈는데 그대가 그 천사를 봤는가, 이렇게 물어보니까  제가 천사란 분을 한번도 못 만나봤단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대관절 천사입니까. 그러니까 인제 이른바 늙고 병들고 죽는 이것이 삼천사三天使라 그 말입니다. 

그 아주 곱던 그런 얼굴 손발 같은 것이 젊어서는 그러지만 금방금방 그것이 이울어지지 않습니까. 마치 꽃이 시들듯이. 그와같이 그 늙음이란 것, 늙음이란 것으로 해서 우리가 그걸 깊이 생각할 때는 세상의 무상無常을 느끼고 함부로 게으름부리고 남한테 해코지하고 또 할 수가 없는 문제아닙니까.

또는 아프다고 생각할 때는 아파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아플 때는 얼마나 사람이 처량합니까. 처참한 일이란 말입니다. 아프기도 아프고 또 남한테 신세 끼치고 또 돈도 많이 들어가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플 때는 이제는 내가 건강에 주의해서 다시 안 아파야 되겠다고 마음먹지만 또 건강해지면 다 잊어버리고서 그냥 함부로 먹고 함부로 행동한단 말입니다.

함부로 먹는 것이 그것이 굉장히 우리한테 손해損害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절대로 함부로 자시지 말으십시오. 함부로 먹는 것이 여러분들이 경험이 부족해서 모르실 분은 모르실랑가 모르지만 함부로 먹는 것이 우리한테 굉장히 큰 해악害惡을 줍니다.  

저는 그 시골이 고향입니다만 시골사람들 지금 제 연갑年甲에서 산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보면은 별로 없습니다.

그 한 20대에 갑계甲契를 묻었어요. 갑계원이 한 50명됩니다. 그 시골에 있는데. 한 50명되는데 지금 고향에 가서 보면 불과 하여튼 2, 3명 저까지 포함해서 2, 3명 살아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어째서 그 사람들이 빨리 죽었는가.

그 시골지방이 되어놔서 겨울에는... 지금은 겨울에도 무슨 비닐하우스에다 농작물을 하고 합니다만 옛날에는 겨울에는 할 일이 없지 않습니까. 가마니나 치고 모다 그런 것이라면 모르거니와 그러니까 하여튼 그 주막집에 가서 가축을 추렴하고 도박이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다보면 또 출출하니까 가서 또 고기고 뭣이고 먹어야되겠지요. 폭주하고 그러니까 인제 그 건강이 베겨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체로 하여튼 그 50대 60대 위병이 났다 무슨 병 났다 하고 죽는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이 출가승出家僧이 출가스님네가 안돼도 좋으시니까요, 절대로 그 함부로 자시지 말고 정말로 하여튼 자기 몸을 사랑하고 자기 마음을 소중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꼭 음식을 바로 드시기 바랍니다. 그 절대로 많이 드시지 말으시고... 이런 것이 사소한 것 같지만 그것이 부처님 계율이예요.

 여러분들 육재일六齋日날 아십니까. 육재일날 기억하십니까. 하루에 한 끼만 자시고, 8일 14일 15일 23일 29, 30일 이것이 육재일 아닙니까. 육재일 이것은 재가불자가 지키는 날입니다.

이날은 무슨 날인고 하면 재가불자들도 하루에 한 끼를 자시라는 것이어요. 재가불자도. 남녀간도 각방 써서 같이 안자고 말입니다.

비록 출가는 못한다하더라도 부처님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한 달에 다는 우리 출가한 사람들이사 매일매일 다 재일을 지켜야되겠지만 일반 재가불자는 그렇게 안되니까 8일 14일 또는 15일 23, 29, 30일. 그날만이라도 하루에 한 끼씩 자시고 또는 음식도 그 고기나 그런 것은 자시지 말고 말입니다. 꼭 출가한 그런 스님네같이 그렇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재일날이란 말입니다.


마치 지금 기독교에서 주일날 같이 일주일마다 주일週日은 바이블끼고 교회敎會가고 그러지 않습니까. 주일날은 결국은 예수그리스도 그 주와 같이 하나님을 바로 믿는 이른바 맹세의 날이 주일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 불교에서는 그것이 없어요. 육재일날도 그냥 그렇게 있는가 만가 그러는 것이고,

이슬람교도도 하루에 다섯 번씩이나 그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에 대해서 꼭 그렇게 기도를 모십니다. 기도를 모시고 또 9월달, 라마단 달이라고해서 9월 달은 해 뜰 때부터서 해 저물 때까지는 다 단식斷食한단 말입니다. 한 달을 온전히 말입니다.

성자聖者의 길이란 것은 참 그야말로 신묘神妙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 중생의 마음을 영원永遠의 차원으로 인도引導한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대체로 부처님 법을 위해서 우리가 얼마만한 일을 지금 우리가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재는 부처님 법을 위해서 우리가 성불成佛을 위해서 노력을 지금 얼마만치 하고 계십니까.

불교를 제대로 믿을라면 아, 고생이 그.. 고생이 보통이 아닌데... 이렇게 생각들 많이 하시겠지요. 사실은 부처님 법을 믿는 것이 제일 쉬운 것입니다.

함부로 먹는 것보다도 함부로 안먹는 것이 훨썩 쉬운 것이고 말입니다. 짜증을 낸 것보다 짜증을 안내는 것이 훨썩 더 쉽지 않습니까. 이것도 하나의 명백한 도리입니다.

명백한 도리를 우리가 외면하고 지키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부처님법은 그야말로 참 순풍順風의 돛단배나 똑같습니다. 훨훨히 우리가 막힘없이 장애障碍없이 인생을 정말 편안便安하게 사는 길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다 좋은 길을 말입니다.

저같은 사람도 승려가 안되고 시골구석에 있었더라면 진작 저승에 가벼렸을 것입니다. 다행히 박복한 사람이지만 그 승려가 되어서 지금 여러분 앞에 부처님 법을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정말로 부처님 법을 하는 것이 제일 쉬운 길입니다. 제일 쉽고 제일 행복하고 또 영원히 우리가 또 갈 길이고 말입니다. 금생에 안간다고 그래서 그 말면 모르겠지만 금생에 안가면 그대로 그치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그 윤회輪廻라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우주의 참다운 성품,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 또 우주의 이 물질이 무엇인가. 모든 존재에 대해서 확실한 깨달음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는 몇 만생도 되풀이 됩니다. 태어나고 또 죽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이른바 윤회한단 말입니다.

아무리 재물財物을 많이 모아서 수천억원 재산이 있다 하더라도 그로 해서 윤회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뇌물이 통하는 세계가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제일 쉬운 일이란 말입니다. 돈 들고 하는 것도 아닌 것이고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할 것도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부처님법을 바로 닦아보시면 그 재미가 얼마나 지고, 몸도 얼마나 오죽 참 가벼운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신비神秘 부사의不思議한 이른바 법락法樂이라. 그러니까 우리가 그 참선參禪하는 공덕功德에 있어서 법락주法樂住라.

 법락주라는 것이 있어요. 법 법자 즐거울 락자 머무를 주자 말입니다. 이 법의 즐거움에 우리가 머문단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참선參禪하면 지금 모두 끙끙 앓고 그냥 사람들이 굉장히 고생하고 아주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지만 사실은 참선을 잘 못해서 그럽니다.

참선을 바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 제일 쉬운 거란 말입니다. 모양도 우리 앉는 자세도 가부좌跏趺坐하는 자세가 제일 편한 자세입니다. 제일 편한 자세고 또 건강을 위해서도 이 가부좌하는 자세가 제일 건강에 좋단 말입니다. 소화도 잘되고 말입니다. 머리도 더 선명해지고.

또 우리 마음도 부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은 우리 마음을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 마음이 스트레스라든가 어떤 그런 혼란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때는 우리 생리도 장애를 받는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마음이 괴롭지만 우리가 바른 생각,

바른 생각이란 것은 이 생긴대로의 생각입니다. 무슨 존재가 비었으니까 비었다하고 또는 무엇이 있으니까 있다고 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분명히 비었는데도 그렇게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거꾸로 생각하니 이른바 전도몽상顚倒夢想하니 우리 생리生理인들 베겨날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부처님 생각은 그것은 모든 존재가 바른 정견正見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의 생명으로 본단 말입니다. 사실은 하나의 생명인데...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이니까 그때는 무리가 없습니다. 무리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건강에도 제일 좋은 상황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인들보다 우리가 훨씬 더 부지런하고 또 착실히는 못할망정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 된단 말입니다.

그 주일마다 바이블을 성경을 끼고서 교회에 가는 정도로 우리도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부처님날로 딱 정해놓고서 말입니다.

그날 불경佛經을 외고 참선參禪도 하고 기도祈禱도 모시고 그렇게 해야 우리 마음이 후퇴가 안되고 해탈解脫로 가는 것이지 그냥 일상적인 생활 그대로 자기 버릇 그대로 생활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금생에 또 내내야 살 가치가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같지 못해요. 그것이. 업만 짓는 것이지 말입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가르침이 있는데도 우리가 안갈 필요가 있습니까. 가면 훨씬 쉬운 것을. 무슨 억하심정抑何心情으로 우리가 영원적인 길을 안가고 베긴단 말입니까.

눈에 불을 쓰고, 눈에 불을 쓰고 우리 가슴에 그야말로 참 아주 분발하는 그런 열을 내가지고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영원의 길, 무수한 성자가 그 길은 간 길이란 말입니다. 혼자가는 길이 아닙니다. 양심적인 사람들, 또는 우수한 사람들이 다 간 길이란 말입니다.

인도印度의 간디Gandhi1869-1948같은 분도 그 정말로 그 몸이 40킬로밖에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그 정신精神덩어리 아닙니까. 혼덩어리로해서 그 비폭력운동非暴力運動을 하고 인도 독립을 그대로 가져오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말입니다.

그 아프리카 산림의 성자라 하는 슈바이처Schweitzer1875-1965, 슈바이처 그분은 머리가 천재입니다. 대 음악가音樂家인 동시에 대 과학자科學者고 의사醫師고 또는 철학자哲學者고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호사한 생활 다 뿌리치고 명예 다 뿌리치고서 자기 아내를 간호사로 훈련시켜가지고 아프리카 산림에 들어가서 아프리카인들을 위해서 구제사업救濟事業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호의호식好衣好食을 다 할 수가 있고 호사好事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무슨 필요로 그와같이 고생을 사서 할 것입니까. 그러니까 그런 길이 이른바 영원의 길이란 말입니다. 영생永生으로 가는 길을 보다 앞당기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만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핍박逼迫받은 사람들과 더불어서 가기위해서 그런단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서 사는 것이 그것이 자기 손해일 것인가.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생명은 다 같은 뿌리기 때문에 생명은 다 본래 하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 봉사奉仕하면 그냥 그 덕이 자기한테로 온단 말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과거 전생담前生談에서 투신아호投身餓虎라,  그 범 새끼를 낳고서 주린 엄마한테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자기 몸을 그 범한테 바친 그걸로 해서 자기 몸을 주저 없이 범한테 바친 그걸로 해서 11겁이라. 오랜 세월동안 거쳐 성불成佛할 것을 다그쳐서 더 빨리 성불했단 말입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 몸뚱이 때문에 자기 몸뚱이가 대관절 무엇이건데 말입니다. 업장業障으로 이와같이 잠시간 허깨비같은 이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환상幻像이란 말입니다.

순간순간 변화무쌍變化無雙한 이 몸뚱이입니다. 어제와 오늘과 똑같은 몸뚱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종당에는 죽어간단 말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우리 생명生命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금생에 인연因緣을 누가 압니까. 내일 죽을지 오늘 죽을지 누가 아는 것입니까.

우리 길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합니다. 훤히 놓여있는 그런 탄탄대로坦坦大路란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또 그 멀리 가시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제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어떻게 또 미끄러운 길을 가실 것인가. 그런데 지금 우리 주지스님이 살림을 잘해서 우리 성륜사聖輪寺가 지금 튼튼합니다. 몇 천만원 정도는 여유가 있을 정도로 지금 탄탄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대로 여기서 며칠동안 그냥 공부하시고 가셔도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무리말으시고 말입니다. 꼭 주무시고 공부하시고 그러시다가 가시기 바랍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갈 길은 지금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그 외나무다리로 갈 길 한길뿐이란 말입니다. 성불하는 길, 그 길로 안가면 또 우리가 그 무수한 생동안에 죽고 살고 죽고 살고 우리가 윤회한단 말입니다.

그 외나무다리 그 처음에는 어려울랑가 몰라도 그 길로 건너가야만이 우리가 영생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길은 가장 행복스런 길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가장 그것은 보답되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봉사하는 그런 길이란 말입니다.

항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좋은 어머니가 되고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친구가 되고 좋은 부부夫婦가 되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도 그 일같이 좋은 길이 참 없습니다.

그러니까 야스퍼스Jaspers1883-1969 같은 사람도 참다운 자비慈悲나 참다운 사랑은 무엇인가. 이것은 서로 더불어서 영원한 해탈解脫의 길로 가는 길이란 말입니다.

서로 더불어서 영원한 해탈의 길로 가는 것이 이것이 어느 누구를 위해서나 가장 좋은 길입니다.

정말로 그 여러분들 갈 길을 생각하면 제가 너무 장황히 말씀드려도 그것이 또 미안스럽고 말입니다. 얘기를 할라고 생각하면 또 한도 끝도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 여러분들 가실 일 생각하면 또 마음이 답답해지고 합니다.

정말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가 오직 하나의 도리, 하나의 진리입니다. 일원적一元的인 길이란 말입니다. 둘이나 셋이나 절대로 있지 않습니다.

다 참다운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진여불성의 하나의 도리가 천차만별千差萬別로 인연 따라서 산이 되고 물이 되고 사람이 되고 다 그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의 도리가 내내야 이것이 법신法身부처님 아닙니까. 그 자리는 바로 인격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논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기 때문에 그때는 바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이란 말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고. 부처님 명호名號라는 것은 바로 영원적인 그 자리를 우리 인격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모으기가 우리가 버릇이 잘못 들은 것이 많이 있어놔서 쉽지가 않으니까 부처님의 자비심慈悲心으로 해서 영원적인 그런 인격적인 표현으로 해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모두 그런 이름을 우리한테 그렇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 지혜智慧로운 그런 말씀 따라서 우리 마음을 하나로 항시 생각생각에 모아가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전생에 지은 또는 금생에 지은 모든 잡념雜念으로부터서 우리 마음을 해방解放을 시킨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빨리 풀려서 그래서 하여튼 그야말로 하늘같은...

우리 마음은 한도 끝도 없는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끝도 없는 그런 하나의 생명체生命體인지라 우리가 자기自己라는 것, 또는 자기번뇌自己煩惱에 묶여있는 그것만 풀어버리면 다 누구나가 시원스러운 해탈解脫을 이룩할 수가 있습니다.

그 길이 가장 우리로서는 바람직하고 행복스러운 길입니다.

여러분들께서 가실 길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조금도 주저 없이 이런 때나 오셔서 며칠이나 쉬고 가도.....그것은 집안에도 날씨가 궂으니까 변명이 되는 것이고 말입니다. 조금도 주저말으시고서 차분히 이 방도 지금 불이 잘 들어가니까 굉장히 다습고 다른 방도 많이 있으니까요 절대로 무리마르시고 꼭 그렇게 쉬시면서 공부하시다 가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20010304-성륜사법성당-청화대종사설법

20010304-촬영-정안 김성도

20010304-음성녹음-자훈 박병섭

20040612-DVD동영상,mp3음성작업-본정 김영동

20071023-녹취 워드작업-지혜림 이주미

20071107-정리-본정 김영동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받아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