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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일반법문

23.“마음 밖에서 道 구하지 마세요”


제416호 현대불교





“마음 밖에서 道 구하지 마세요”

  

 지상 백고좌 청 화스님 (곡성 성륜사 조실)

 


 고인들 말씀에 무슨 공부 방법이든 ‘득정(得正)하면 가야(可也)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수행법에 있어서 주문을 외우든 화두를 참구하든 묵조선을 하든 염불하든 바른 도리 바른 원리를 얻으면 좋다는 말입니다. 꼭 염불해야만 좋고 꼭 묵조선을 해야만 좋은 것이 아니라 어느 행법을 취하든지간에 그 본분사, 본래면목 자리, 진여불성 자리를 안 놓치는 것을 득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바른 도리를 얻지 못하면 꼭 화두만 든다고 선이 되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는 꼭 묵조만 한다고 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요는 본체를 안 여읜, 본체에 걸맞는 공부가 참다운 공부요 참다운 선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에 인간들이 합리적으로 잘 생각을 못하니까 맨 처음에 화두를 내세운 도인들이 필요에 의해서 시설한 것이지만 뒤에 사람들은 부질없는 분별시비를 합니다. 묵조선도 “고인들의 어구(語句)나 기연(機緣)에 대해서 부질없는 분별시비를 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 본래 부처인지라 가만히 잠자코 있으면 저절로 맑아져서(寂然而應) 부처가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그 당시에는 필요하니까 나왔던 것입니다.

 대혜종고(1089~1163) 스님도 위대한 도인인데, 그냥 묵묵하니 고목(枯木)처럼 앉아서 꾸벅꾸벅 혼침에 떨어지니까 마땅히 무엇인가 참구를 해야 하겠기에 그래서, 화두선을 역설했고 그리고 선사들의 어구에 치우쳐서 따지고 부질없는 의심을 하니까 천동정각(?~1157)스님이 묵조선을 창도했던 것입니다.


 염불은 부처님 당시부터서 염불(念佛) 염법(念法) 염승(念僧)이라고 무슨 경전에나 다 나와 있고 원래, 우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또, 부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염불은 따지고 보면 내가 참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래부처가 부처를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선(禪)이 됩니다.

 그런데 깊은 고려 없이 염불은 하근기(下根機) 중생이 하는 것이라고 하면 문제가 큽니다.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천념(千念)을 헤아리면서 애쓰고 몇 십년 동안 염불한 분도 어느 스님네가 “염불은 근기가 낮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화두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해버리면 염불을 그만두고서 억지로 화두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시간 낭비인 동시에 병통이 생기기 쉽습니다. 근세에 수월(1855~1928)스님은 ‘일자 무식’인데도 천수다리니(千手陀羅尼)로 깨달은 분 아닙니까? 모두가 다 부처라 생각하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지 섣부른 법문은 소경이 길을 인도하는 격입니다.


 “극락세계가 저 십만억 국토를 넘어서 있다. 또는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 우리 마음 밖에 있다.”이렇게 생각할 때는 참다운 염불도 못되고, 염불선(念佛禪)도 못됩니다. 부처님께서 극락세계가 밖에 있다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우리 마음이나 부처가 내 밖에 있어서 애쓰고 생각하면 우리를 돕는 가피를 주신다고 생각하셨을 리는 만무합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요, 시방여래시법계신(十方如來是法界身)이라, 부처는 바로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근본 뜻을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극락세계나 나무아미타불이나 정토(淨土) 법문을 말씀하신 경은 주로 <대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인데 그런 경을 착실히 보아도 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실히 잘 안 보고 말을 합니다. 착실히 본다면 한 경 내에서도 방편과 진실이 아울러 있습니다. ‘극락세계가 저 밖에 있다’고 말씀해 놓고도 같은 경 내에서 ‘그대 마음이 바로 극락세계다. 닦으면 그대로 극락이다’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근기 중생은 방편설(方便設)만 가지고 따지며 옳으니 그르니 합니다.


 따라서, 참다운 염불도 본래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닌 자리를 확인시키기 위해서,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고 내 마음이 부처기 때문에,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부처 이름을 자꾸만 외워야 자기 암시가 되어 가까워지겠지만 부처님 이름을 외지 않고서 분별하는 생각만 할 때는 우리 마음이 부처와 가까워지겠습니까? 화두도, ‘무자’나 ‘이뭣고’나 또는 ‘판치생모(板齒生母)’나 모두가 다 일체 유루적(有漏的)인 상대 유위법을 떠나서 오직 불심(佛心)만 잡으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공안이나 염불이나 모두 다 같은 것입니다.

 묵조(默照)도 청정미묘하고 일미평등한 진여불성을 관조하니까 같은 것이고, 또는 공안도 제일의제(第一義諦)인 ‘한 물건’ 자리를 참구하는 것이니까 같은 것이고, 염불도 부처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행복스러운 극락이 십만억 밖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 방편이 되지만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요 만법이 본래 부처일 때는 바로 선(禪)인 것입니다.


 외도(外道)와 정도(正道)의 차이는 무엇인가? 외도는 마음 밖에서 도를 구합니다. 별스런 재주 있는 짓을 다해도 마음 밖의 무엇을 생각하면 외도인 것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화합도 모두가 다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행동 바르게 하고 진리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다스리는 방법은 무엇이 좋은가? 산을 생각하고 물을 생각하고 무엇을 생각하더라도 마음의 본래면목을 생각하는 것 같이 빠르고 쉽고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 정서(情緖)와 지혜와 의지가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전생의 숙업 따라서 정서가 좀 더 많은 사람 또는 의지가 더 강한 사람 또는 지혜가 더 밝은 사람 등으로 비중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정서나 지혜나 의지가 조화롭게 갖추고 있으면 모르거니와 우리 중생들은 조화롭지가 않습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지혜나 의지, 정서가 다 조화롭고 완벽한 것입니다.


 우리 불성은 원래 원만무결한 것이지만 중생은 숙업(宿業) 따라서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정서나 의지로 참구하는 쪽보다 화두를 의단(疑團)으로 참구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고, 확신을 위주하고 의단을 싫어하는 사람은 화두없이 묵조선을 하는 것도 좋겠지요. 어느 쪽으로 가나 다 성불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겠지요. 자기 근기에 맞으면 더 빠르고 쉬울 것입니다. 또는 정서가 수승한 사람들은 이것저것 별로 따질 필요가 없이 다만 근본 성품인 생명의 실상을 인격적으로 그리워하는 흠모심을 냅니다. 원래 부처인지라 어떤 누구나가 다 부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누구나 다 한결같이 염불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화두하는 분도 기도를 할 때는 ‘아미타불’을 외우고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영가천도 할 때는 또 부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뿌리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바로 자연의 도리며 몇 만생을 윤회해도 필경에는 부처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거니 이 몸뚱이를 비롯한 모든 집착 때문에 공부를 잘못하는 것이지, 일체 분별망상이 없을 때는 바로 선정(禪定)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화두선, 묵조선, 염불선 수행법이 어느게 수승하다 아니다 분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질없이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이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새삼스럽게 역설하게 됩니다.




정리=김재경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 기자가 본 청화 스님 >


 ‘맑은 꽃 비상하게 자기를 다스린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향훈.’

 최하림 시인이 청화 스님(조계종 원로의원)을 표현한 말이다.

 청화 큰스님이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스님은 40여년간 주로 토굴에서 생활해 오다가 17년전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 태안사 중창불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80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달 셋째 주 일요일 도봉산 광륜사 정기법회에서 법문을 하시는 청화 큰스님. 청화 스님을 따르는 불제자들은 가까이서 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만으로도 법열을 느낀다고 한다.

 큰스님은 평소의 모든 기력을 모아 매달 광륜사 정기법회(셋쩨 주 일요일 오후 1시)의 법단에서 사력을 다해 설법하신다. 오랜 장좌불와의 수행에서 얻은 견처를 마지막으로 중생에게 회향하기 위해 필생의 원력으로 보였다.

 1923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스님은 14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5년제 중등학교과정을 마친 후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고향 무안에 청운고등공민학교(현 망운중학교)를 세워 후학을 지도했다. 현대 물리학과 철학에도 관심을 갖고 있던 스님은 청년시절부터 여러 서적을 섭렵했다. 그러나 궁극에도 풀리지 않는, 존재에 대한 의문은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는데 금타 스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의문을 풀게 되었다. 스님이 스승 금타스님의 유고를 모아 펴낸 <금강심론>에는 모든 수행법과 수행의 위차를 종합 회통하여 해탈 16지로서 수행차서를 정립해 놓았는데, 특히 불교의 우주관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스님은 이같은 금타 스님의 영향으로 자주 법석에서도 현대물리학과 철학 등을 불교적으로 풀이해 설법하신다. 세상의 모든 물체들은 물질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 입자를 분석하면 소립자 단계를 거쳐 종국에는 텅 비어버리는 공의 세계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그저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데, 이 순수에너지가 바로 불성이라는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양자론과 현대과학으로도 증명하지 못하는 순수 에너지의 실체를 설명해,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세계를 스스럼없이 펼쳐 보이시는 것이다.

 스님은 묵언과 장좌불와를 평생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오셨다. 상원, 백장암 등 여러 토굴에서 50여년간 늘 검소함과 부지런함으로 한 치의 게으름도 용납없이 수행에 매진하셨다.

 늘 자비로운 모습과 진실한 수행에서 우러나오는 참 수행자의 빛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항상 새로운 발심을 하게 만든다. 2년전 큰스님을 친견 했을 때, 그 겸손하신 말씀이 늘 뇌리에 맴돈다.

 “내가 수행을 잘못했거든요. 수행을 잘 했으면 삼명육통을 다해서 신통자재할 것인데, 수행을 흉내만 내놔서 잘못했어요. 그래서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