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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일반법문

25. 열반에 든 무주당 청화대종사 행장(行狀)


제1982호 불교신문

불기2547년 11월 18일(화요일)





  열반에 든 무주당 청화대종사 행장(行狀)

 



“서릿발 계율속 염불선 수행”



  지난 12일 오후 10시 30분 설령산 성륜사 산중에 대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시대의 큰 스승으로 많은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전해 온 무주당 청화스님이 열반에 들었기 때문이다. 청화스님은 “이 세상 저 세상 오고 감을 상관하지 않으나, 입은 은혜 무량하니 보은 다하지 못함이 한스럽구나”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평화스러운 미소로 한생을 마감했다.

 청화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의 중흥조인 만암스님의 상좌인 금타스님을 은사로 1947년 스물네살의 젊은 나이로 불문(佛門)에 들었다. 스님은 출가이후 오로지 불법을 바르게 익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일념으로 정진을 거듭했다. 하루 한끼 공양으로 법체(法體)를 유지하면서 장좌불와, 묵언, 단식 등의 수행정진으로 불법의 향기를 대중에게 전했다. 지리산 벽송사, 백장암, 동리산 태안사, 내장사 벽련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의 끈을 놓지 않은 청화스님은 여러 차례의 안거를 거치며 확철대오의 경지에 올랐다. 스님의 ‘깨달음의 노래(오도송)’는 다음과 같다.


 “미혹할 때는 삼계가 성곽 아님이 없더니(迷故三界城)/ 깨달으니 시방법계가 비었구나(悟故十方空)/ 본래 동서가 없는데(本來無東西)/ 어느 곳에 남북이 있으리오(何處有南北)”


 스님은 참선정진을 주로 하면서도 ‘공부의 방법’에 있어 후학과 재가불자들에게 염불선(念佛禪)이라는 길을 제시해 주었다. 스님이 제창한 수행방법인 염불선은 투철한 계율과 정혜쌍수를 기본정신으로 한다. 특히 염불선은 은사스님인 금타스님이 창도(唱導)한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전수받아 이를 법계일심(法界一心)의 한 생명 사상으로 승화시킨 수행방법이다. 염불선은 우리 시대의 많은 지성과 시대사상을 아우르는 한편 새로운 세기를 선도하는 수행방법으로 부각되고 있다.

 많은 스님과 불자들은 청화스님에 대해 ‘자비행(慈悲行)’이 끝이 없는 어른이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스님이 광주 추강사에 주석하던 시절의 일화이다. 대중들이 먹을 쌀이 2~3일치 밖에 남지 않아, 방안을 찾기 위해 대중들이 공사(公事)를 하던 어느날 객스님 한분이 찾아왔다. 청화스님은 주저함이 없이 쌀독에 남아있는 쌀을 객스님 걸망에 담아주었다. 또 한번은 두륜산 진불암에 머물때의 일이다. 어느날 갑자기 절을 찾아온 낯선 스님을 위해 손수 40리 거리인 해남까지 내려가 제물을 준비해와 제사의식 가운데 절차가 제일 복잡하다고 하는 구병시식을 베풀어 주었을 정도이다. 이처럼 보통 정성으로는 하기 힘든 자비행을 실천했던 스님이 청화스님이다. 때문에 “청화스님은 자비의 화신이고 보시바라밀의 산 귀감이다”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을 아무도 없다.


 스님은 교학에도 두루 밝았다. 스님이 직접 저술하거나 역주한 경전이나 저서도 여러권 남겼다. <정통선의 향훈> <원통불법의 요체> <마음의 고향> <진리의 길> <가장 행복한 공부> 등은 손수 지었고, <약사경> <정토삼부경> <육조단경>은 번역하여 세상에 내 놓았다. 이밖에도 은사 금타스님의 저술을 모아 <금강심론>을 펴내는 등 부처님 가르침을 많은 불자들이 쉽고 바르게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청화스님은 참선, 염불선, 교학을 기반으로 대중들에게 자비심을 근간으로 불법을 폈다. 스님은 포교에도 남다른 원력을 지니고 있었다. 직접 창건한 도량만 해도 무안 혜운사, 두륜산 상원암, 월출산 상견성암, 서울 광륜사, 미국 금강선원 등 10여개에 이른다. 스님은 도량을 열면 ‘가장 청정한 도량’ ‘가장 엄정한 계율’ ‘초인적인 용맹정진’ 등 세가지의 도량신조(道場信條)를 강조했다. 이제 스님의 가르침은 법향(法香)으로 남아 후대에 ‘푸른 빛’으로 남을 것이다. 지위고하, 빈부, 남녀 등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고 중생을 인도한 청화스님은 불교집안의 어른을 넘어 우리 사회의 큰 스승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곡성 = 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