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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일반법문

26. “집착 버리고 ‘참다운 나’ 찾으면 해탈”


제 3223호 문화일보





“집착 버리고 ‘참다운 나’ 찾으면 해탈”



부처님 오신날 즈음 만나본 청 화 스님





40여년간 눕지않고 수행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 하루에 한끼만 먹는 일종식(一種食), 염불선(念佛禪)의 실천자, 조계종의 선승(禪僧) 가운데도 전남 곡성군 옥과면 성륜사 조실이자 조계종 원로의원인 청화(淸華·79) 스님은 철저한 계행(戒行)과 수행으로 불교계의 사표로 추앙받는 큰 스님이다. 지난 15일 부처님오신날(19일)을 앞두고 청화 스님께서 주석하고 있는 성륜사 조선당(祖禪堂)에서 만났다. 공부나 외부인사를 접견할 때 사용하는 방에 모셔진 피골이 상접한 ‘부처님 육년고행상(六年苦行像)’이 말 그대로 고행으로 점철된 청화 스님의 수행이력을 대변해주는 듯 했다.



  - 현대사회에서 부처님오신날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들려주십시오.


 “부처님이 하신 가장 중요한 법문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입니다. 왜 부처님은 천상천하에서 존귀한 사람이 나 혼자 밖에 없다고 말했을까요. 이른바 ‘유아독존’에서 ‘나 아(我)’자는 우리 중생들의 상대적인 소아(小我)가 아니라 참나(진아·眞我)를 말하는 것입니다. 참나는 우주의 모든 것을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것으로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하늘이나 땅 통틀어서 참나 밖에 없어요. 중생이나 범부들도 이 법문의 의미를 깨달아 제한된 나(거짓 나)에 집착하는 아집을 떠나 참나를 성취하면 성자나 성인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와 공자, 노자, 소크라테스 모두 참나를 성취하신 분입니다.”


 - 일반인들에게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아무래도 제행무상(諸行無常), 즉 모든 현상이 덧없다는 교설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때그때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항상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사람의 생명이란게 그야말로 허망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또 제행무상이기 때문에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지요. 일체 존재하는 사실에 나란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순간 변화해마지 않으니까 제법무아가 되지요. 이런 것을 바로보고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으면 열반적정 또는 영생해탈의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 청화 스님께선 수행법으로 ‘나무아미타불’등을 외우는 염불선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무슨 선을 하던 본 바탕(진여불성·眞如佛性), 즉 본성을 떠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화두선(간화선)이든 묵조선(黙照禪)이든 염불선이든 진여불성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가령 진여불성을 떠나지 않고 염불하면 염불선이 되지만 그냥 부처님을 밖에다 두거나 대상적으로만 생각하면 방편염불인 동시에 염불선이 못됩니다. 화두(話頭)를 의심하는 화두선이나 잠자코 명상하는 묵조선도 마찬가지예요. 무엇을 하든 간에 진여불성을 안으로 닦아야 선이란 말을 붙일 수 있습니다.”


 - 염불선이 화두선 중심의 우리 풍토에선 소홀히 대접받고 있지 않습니까.


 “화두선도 부처님 당시부터 있던 것은 아닙니다.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에 들어와 대혜종고 스님이 화두를 정형화시켰지요. 대혜종고 스님이 화두를 정형화시켰지만 잠자코 명상하는 묵조선도 병행했으며, 진헐청요 스님은 염불선을 했어요. 이분들 모두 친한 처지로 그 당시는 약간의 경향적 차이 일 뿐이었는데 후대에 종파가 갈라져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조계종은 화두선을 주로 하지만 원불교는 묵조선을 합니다. 일본은 화두를 참구하는 임제종과 묵조선파의 조동종, 염불을 화두로 하는 황벽종의 세 파가 마치 솥발처럼 정립돼 있어요. 중국이나 대만 같은 데는 염불선적인 경향입니다. 사실 중국을 봐도 염불선은 선종의 4조 도신 스님부터 대대손손 계승해 내려온 수행법이에요. 어느 공부를 하든지 간에 부처님을 생각하고 동경하면 되는 것이죠. 사람들이 전통적인 뿌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화두선만 참다운 선이고 염불선은 비로소 만든 것처럼 소홀히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대선 등을 앞두고 참된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누가 정치인이 됐건 또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종교와 철학에 대해 나름대로 지론을 갖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선생님이 돼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어버이가 돼서 자녀들을 가르치더라도 철학과 종교를 알아 생명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혼란스럽고 남들도 잘못 인도하게 되지요.”

 

 자신과 제자들에겐 엄격하면서도 일반인들을 대할 때는 한없이 온화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청화 스님에게 수행담을 들려달라고 하자 “그런 것은 사소한 문제”라며 “수행자들은 더러 그렇게 애를 쓰며, 저도 그렇게 애를 쓴 사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고 사양했다. 요즘은 눕기도 하고 몸이 안좋을 때는 하루 한 끼 외에 가끔 죽을 먹기도 한다는 청화 스님의 진솔한 말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성륜사(곡성)=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kr


 

 

 

40년 장좌불와 - 일종식의 戒行선승

 

 

   청화스님은 누구

 

 청화 스님은 1947년 24세때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래 백운산 사성암과 두륜산 상원암·진불암, 월출산 상견성암, 지리산 백장암, 안성 칠장사 등 오지의 토굴에서 묵언과 일종식, 장좌불와의 고행등 엄정한 계율을 준수하며 수행정진을 해왔다.

 1960년대 사성암에서 정진할 당시 한겨울에 바위틈에서 나오는 찬 샘물을 머리에 부으면서 공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청화 스님은 40대에 해남 두륜산에서 수행할 때 손수 등짐을 지어 나르면서 진불암을 개·증축했다. 그런데 오르막길을 갈때면 축지법을 쓰듯 괴력을 발휘해 20대 행자가 쫓아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 당시 청화 스님이 한 날 제자들에게 “어이, 어서 열반종을 울리게. 저 해남 앞바다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나에게 그들을 살릴 힘이 없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과연 며칠 후 해남 앞바다에서 배가 전복돼 수십명이 희생된 소식을 들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청화 스님이 일반에 널리 알려진 것은 85년 구산선문의 하나로 한국전쟁 당시 폐허가 된 동리산 태안사를 중창하고 3년간 묵언정진의 결사를 하면서 부터다. 1995년에는 미국 서부로 건너가 카멜 삼보사와 팜스프링스 금강선원을 건립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속명이 강호성인 청화 스님은 광주사범을 졸업하고 일본 메이지대 유학길에 올랐었다. 그러나 1년만에 징병으로 국내에 끌려왔다가 해방을 맞게됐으며,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에 고민하다가 부인과 아들 한명을 남겨두고 출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