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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일반법문

21.정신세계 대담

정신세계 대담



고행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는 전남 곡성 성륜사의 청화 스님을 뵈러 가는 길.

마음은 턱없이 무거웠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것은 미천한 범부의 번뇌

때문이다. 산만(散漫)한 마음을 바로잡지 못한 채 스님을 찾아 뵙겠다는

생각부터가 허방에 발을 짚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왼발에 시퍼렇게 멍을

머금고 이렇게 스님의 법문을 되새김질하고 있자니, 그날 상면 당시의

'울컥'하고, 깊은 곳에서 쳐올라오던 감정의 정체를 이제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삶이란 영원의 이상향으로 돌아가는 나그네길입니다. 불교로 말하면 모든

존재들이 부처로부터 와서 부처로 돌아간다는 것이겠고, 기독교로 말하면

하나님에게 와서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간다는 것이겠지요. 그 길의 가장

끄트머리까지 먼저 간 분들이 바로 예수고, 석가모니고, 마호메트지요.

성자들의 길은 어찌 보면 어려운 것이 아니고, 가장 쉽고 간단명료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길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 길이 우리

곁에 있음에도 찾지 못하고 암중모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높은 성자들이

근래에 나타나지 않는 것도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이제 모든 종교의 진리가 결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많은 성자들이

제시한 길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른두 해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작은 회오리 같은 질곡도 있었고, 날

듯 기뻤던 적도 몇 번인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내 삶과 여러 관계들에 대해서

온전히 책임지겠다고 마음먹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을 사정하듯 쏟아내버리고, 그 허탈한 기분처럼 망연자실

두리번거리기만 했던 지난 삶.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고 자책도 변명도,

뭣도 아닌 실소를 흘리며 싸돌아다녔던 서른두 살의 '아(我·兒)'를 큰스님은

잠깐이었지만, 마치 영원토록 쳐다보셨다.


"우리 눈에 보이는 상(象)은 모두 허상에 불과합니다. 인연에 따라 잠깐 동안

조건부로 모양을 갖춘 것이니까요. 철학자 칸트도 그걸 꿰뚫고는 모든 것은

현상일 뿐 물(物) 자체가 아니라고 했지요. 일반인들(중생)은 이러한

현상계까지밖에 못 봅니다. 그러나 성자는 존재의 밑바닥 성품까지 본답니다.

이렇게 얘기하시지요. 일체의 존재가 모두 하나의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본래 하나입니다. 그리고 우주의 자리는 뭇 중생(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이 추구하는 가능성과 행복을 모두 갖춘, 원만(圓滿)무결(無缺)한

공덕을 갖춘 생명자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현상계만 보았을 때 모두가

천차만별이고, 도저히 하나일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성자와 가까워질 때, 성자의 마음으로 다가갈 때 그 환한 진리에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한 수행자와 이런 얘기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언감생심,

우리는 단 한사람이라도 지옥에 떨어지는 이가 있다면 절대로 성불 않겠다는

지장보살 계라고. (부끄럽습니다) 그러고는 함께 캔맥주 한 깡씩을 들고

인사동에서 동대문까지 걸어, 도로를 걸어갔었다. 때가 여름인지라 가는

곳곳마다 부랑자들이 노숙을 청하던 서울의 밤거리에서 돌이켜보면 누가

부랑자였을까. 누가 부처였을까. 가련한 치기가 지금도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그 분들에게 합장.


"불교의 가르침을 집약했다고 볼 수 있는 화엄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심불중생 시삼불차별' 본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경계와 구별 없는 하나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주는 근원적인 가르침이기도 해요.

예수도 하나님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대(大)성자의 경지를 얻은 것이요.

석가모니도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지요. 모든 존재의 자기

마음이 그 본래로 부처님, 하나님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게 모든 분별심을 없애고 천지우주를 하나의 큰 생명으로 보는

마음자리로 자기의 세계관·철학관을 옮겨놓아야 합니다. 특히 현대에 올수록

복잡한 지식체계와 물질계가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하고 분별심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깊은 마음공부에 장애가 되기도 하지요. 분명한 것은

물질이란 조건인 것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오는

분별심을 버려야 합니다. 성자들이 간 길과 그들의 행적들은 신화라는 생각도

마찬가지지요. 모든 중생들이 그 길을 따라 갈 수가 있고, 다시 말해 모두

성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돌아와 큰스님의 마음 말씀을 녹음한 테이프를 듣다보니 치르르 치르르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볼륨을 키우니 그것은 새소리였다. 그 날 그 시간, 함께

했던 나무와 새와 풀벌레와 꽃과 하늘과 내리쬐던 태양, 여름 매미울음, 간혹

바람. 이런 것들에게까지 마음이 번져갔다. 그리고 스님 옆에서 포르락 거리던

나비 한 마리가 눈에 선하다. 얼마나 작고 하찮은 나인가. 명상이라는 화두를

이고 찾아간 나는 미물(微物)이었다. 혹, 그 나비는 다시 날아올랐을까? 아님

즉각 깨달아 윤회를 벗어났을까?    


"명상이나 참선이나 삼매나 기도는 다 같은 길입니다. 표현만 조금씩 다를

뿐이죠. 지금까지 말씀드린 성자의 경계는 바로 명상을 통해 이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모든 성자들은 깊은 명상을 통해 진리의 자리에 도달한 것입니다. 바로

백 년 전 분인 인도의 라마크리슈나도 십이 년의 고행과 명상으로 힌두교의 신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예수의 사십 일 금식 기도 역시 지독한 명상

수행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셨던 것이죠. 어떤 종교의

스승도 깊은 명상에 잠기지 않았던 분은 없습니다. 석가모니도 아시다시피 육

년 고행으로 천지우주의 진리를 꿰뚫고 해탈의 자리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마음이란 인도의 대 성자

석가모니의 탄생 여하를 넘어서는 불생불멸의 영생 부처, 즉 법신(   ) 부처의

자리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브라흐만과 법신 부처는 사실

다르지가 않습니다. 우주의 진리란 둘 셋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지요. 각기 개성

따라 지역 따라 약간씩 다르게 표현될 뿐입니다. 바로 명상을 통해 그러한

지극한 우주 진리의 경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요."      


올해 초 최면을 통해 내 전생과 후생의 쪼개진 거울 조각 몇 개를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그 경험이 개인적으로는 '기억할 만한 지나침'이었지만, 그

미천한 기록(본지 3월호)을 읽은 독자 중에 허허 하고 빙긋 웃음 지었던 분이

있었겠다는 생각으로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다. 더욱이 그 기사를 읽고 미혹에

빠진 분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솔직함이란 차선책도

아니고, 배짱일 뿐. 그리고 무지는 최악일 수 있지 않을까.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 그러나…?


"무릇 생명의 주인공은 바로 마음이지요. 명상은 바로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영원한 우주 생명·진리와 하나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자리에 척

들어앉는다고 해서 그러한 경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불가의 참선

수행자들도 애를 퍽 많이 씁니다. 보통 일 년에 두 번, 여름과 겨울 삼 개월씩

하루 여덟 시간에서 열 시간씩들 참선만 하는데도 제대로 된 도인이 되기가

힘들어요. 정밀하게 마음 준비를 해야 하는데, 선오후수(先悟後修)라. 앞서

말씀드렸듯이 분별없이 천지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고 일체의 존재가

하나님 아닌 것이 없고, 부처 아닌 것이 없다는 마음을 갖고 들어가야 깊은

명상을 이룰 수 있어요. 그리고 불교에서는 전생을 긍정하고 또 깊게 생각을

합니다. 중생에게는 낳고 죽고 낳고 죽고 이렇게 무수한 생 동안 쌓아온

업습(業習)이 씨앗으로 잠재되어 있습니다. 현생에서 체험을 통해 쌓은

견혹(見惑)은 떼기가 쉽지만, 전생으로부터 의식 종자에 뿌리 박힌 사혹(思惑)은

여간해서 떼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깊은 명상으로 들기가 힘든 것이지요."


미륵전에 들어 한 번 절에 번뇌 하나 씩 버린다는 마음으로 백팔 배를 해본들.

하나 버리면 도리어 열 개 스무 개가 따라 올라오는 번뇌와 망상과 집착. 그러나

이 어리석은 사람도 언젠가는 해탈할 수 있다는 말씀인가? 사실 이 지난한 길의

끝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 내 서른 두 해의

삶이었다. 문득 몇 년 전 심야의 택시 기사 님이 던졌던 질문이 떠오른다. "젊은

양반, 행복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오?" 집 속에 웅크린 달팽이였던 당시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었다. 그 때 기사 님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지. "저 산

뒤에 있지 않소?"


"초저녁에는 모든 존재의 과거세를 막힘 없이 아는 숙명통(宿命通)을,

한밤중에는 미래세를 다 아는 천안통(天眼通), 그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모든

번뇌를 벗고 우주 대의를 깨달은   통(   通)을 이룬 삼명통(三明通)의 성자

석가모니. 그 깊은 삼매(명상)가 지금 절실히 필요합니다. 모든 성자들이 제시한

깨달음의 길도 바로 명상이지요. 그야말로 인류가 정신을 진화시켜 최대의

행복을 얻는 법입니다. 그리고 모든 중생이 가고 있는 길의 끝은 부처고

하나님이고 성자입니다. 윤회의 끝은 바로 그 자리지요. 모든 존재의 본래 자리,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일반인들은 우선 맑고 청렴한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그릇이 오염되어 있으면 아무리 맑은 물을 담아도

탁해지는 이치지요. 그리고 지나치게 나쁜 것도 혹은 또 좋은 것도 없는 평심이

필요합니다. 살아가면서는 누구에게나 말 보시, 표정 보시, 마음 보시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앞의 두 가지는 물질 보시보다 훨씬 커요. 그리고 현생에 모두

성불하시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 가장 큰 보시고요. 그것이야말로 생활

명상이고, 그 길이 성자의 길과 닿아있지 않겠습니까?"


등신불(等身佛). 부처는, 아니 성자는 자신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비단

대웅전이나 교회 앞에 놓여진 상(像)뿐 아니라 각자의 마음 안에 모시고 있는

성자의 모습은 말이다. "당신 마음에 무엇이 들어앉아 있소?" 누군가 지금 내게

묻는 다면, 역시 아무 대답도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청화 큰스님을 뵙고 난 후

어리석은 자에게 하나 얻음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자기 안에 진실로 소중한

무언가가 하나쯤은 들어앉아 있으며, 그것이 본래의 자기일지도 모르며, 그런

의미에서 자기와 꼭 닮은, 딱 같은 크기의 등신불이리라는 사실이다. 그 부처의

얼굴, 성자의 얼굴은 사람마다 제 각각일 것이지만, 내가 어떤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흉측하지만 염화시중의 미소를 띌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 생각. 그렇게 자기를 들여다보고 자기 마음의 상을

조각하는 것이 바로 명상이 아닐까? 이제 다시 한번 말이 아닌 몸으로, 온몸 그

자체에 각(覺)으로 각(角)을 하는 고행 성자의 길을 실천하고 계시는 청화

큰스님께 삼배 올린다. 성불하십시오. 그리고 독자 여러분 모두 큰 깨달음

얻으십시오. 청화 큰스님의 마음 말씀을 이어 전한다.

역시 어리석었던 질문 아닌 질문. "큰스님께서 수행해오신 과정 자체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큰 가르침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 제 개인적인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는 위대한 성자들을 뒤따라서,

좇아서 가는 그런 사람입니다. 제가 불가말로 해서 확철대오(確哲大悟), 즉

근본까지 온전히 마스터를 했다고 생각한다면 얘기를 해도 무방하겠지요.

아직은 제가 수행 과정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제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만 과거의 위대한 성자들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지금의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간혹 성자들과 같이 길의 끝까지 가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자기 주관을 펼치기도 하는데, 그것은 오히려 성자의 길을

혼란시키기도 합디다. 저는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단지 성자의 길을 따라서

뚜벅뚜벅 걸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자들은 이미 그 큰 ?달음의 길을

확실하게 제시를 했어요. 저는 그 길을 밝혀서 모든 분들이 함께 어우러져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사실 그 길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쉽다면 가장

쉽습니다. 우리 생은 현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뱅뱅 돌다가 종국에 부처가 되고 성자가 되야 윤회가 끝나는 것입니다.

결국은 끝까지 가는 것이고, 우리는 성자들이 이미 밝혀놓으신 길을 따라 가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우선 맑고 깨끗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종교를 떠나서 일체의 존재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마음을 갖고 모든

사람들이 성자의 길로 바르게 나서야 하는 것이지요."


●청화 큰스님의 마지막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봅니다.

처음에는 큰스님의 법문을 그대로 옮길까 했습니다.

말씀 중간 중간에 적어놓은 사념이

큰스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기만을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청화 큰스님과 관련된 인터넷 사이트 : http//sumisan.hihome.com)



박스 기사입니다!


금타 스님이 체계 세우고 청화 스님이 펼친

범부(凡夫)에서 부처에 이르는 해탈십육지


청화 큰스님은 명상과 깨달음의 길을 가는 것을 현생의 목표로 삼은 이들에게

수행 과정에서 오는 교만한 마음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에서

벗어나고 또한 자신의 공부가 어느 정도인지 몰라 암중모색에 빠지는

수행자들을 위해, 스승이신 금타 스님이 체계를 세운 수행 단계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를 청화 큰스님은 자주 강론하신다. 이것은 비록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공부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삼아봄 직하다.


1은 삼보에 귀의하는 초삼귀지(三歸地), 2는 신심과 원력을 확립하는

신원지(信願地), 3은 선택한 수행법을 닦아서 익히는 습인지(習忍地), 4는

수행을 보다 더 맹렬히 지속적으로 정진하는 경지인 가행지(加行地). 이

4가행지까지는 범부지(凡夫地)이다.

다음 5의 금강지(金剛地)는 자성불성(自性佛性)을 직관적으로 견증(見證),

이른바 증오(證悟)할 때요, 6은 희락지(喜樂地)라, 금강지를 성취해서

법락(法樂), 선정락(禪定樂)이 더욱 커져 무한불멸의 희락을 느낄 때이고, 7은

리구지(離坵地)라, 욕계 번뇌의 습기를 완전히 제거하는 경계. 다음 8은

발광지(發光地)라, 진여불성(眞如佛性)의 모든 공덕의 광명이 빛나고, 9는

정진지(精進地)라. 그래도 습기가 아직 남아 있으니 정진을 더욱 가속화하고,

10은 선정지(禪定地)로 이른바 아(我)를 소멸하는 멸진정(滅盡定)이다. 수(受)와

상(想)과 행(行)과 식(識)의 4온(蘊)을 멸진해 버려야 누진통(漏盡通)을 하는데

그런 선정을 여기서 닦게 된다. 11은 현전지(現前地)로서 일진법계(一眞法界)의

현상이 앞에 나타난다.

12는 나한지(羅漢地)라, 아라한과를 성취하고, 13은 지불지(支佛地). 모든 인연

관계를 모두 통달해 버리는 자리이다. 다음 14는 보살지(菩薩地)로 자기도

깨달을 뿐 아니라 무량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는 경지요, 그리고

부동지(不動地)로 번뇌의 습기가 없으며 자연적으로 모든 공덕을 할 수 있는

경계이며, 15는 유여지(有餘地). 아직은 불지(佛地)와 같이 완전하지 못하나,

최종 16이 무여지(無餘地)라. 부족함이 조금도 남지 않은 완전무결한

정각묘각(正覺妙覺)을 성취하는 경지이다.



▶세수(世壽) 78세인 청화(淸華) 큰스님은 24세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송만암

대종사의 상좌이신 금타(金陀) 대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셨다. 50여 년간 대흥사,

혜운사, 태안사 등 성지의 토굴에서 묵언(黙言), 일종식(日踪食) 및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좌선으로 오로지 수행 정진하셨으며, 원통(圓通) 불법을

선양하고, 엄정한 계율의 준수와 염불선을 주창하셨다. 폐사 일로에 있던

동리산 태안사를 중흥시키셨으며, 92년에 미국 카멜 삼보사 금강선원을

개원하여 한국 불교를 미국에 전파하였다. 청화스님이 이끈 한국의 제자들은

성륜불교 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성륜사를 중심으로 청화스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고 있다.



<2000년 정신세계사 9월호에 실린 대담내용입니다.>


명상, 조용한 내면의 세계


청화 큰스님 마음 말씀

맑은 삶으로 성자에 이르는 길


"저는 깨달음의 길을 제시한 성자들을 따라 좇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종교와 종파를 뛰어넘은 청정한 수행자,

우주와 하나되는 지고의 명상(참선) 수행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계시는, 청화 큰스님.

위 말씀 앞에서, 당신의 수행 과정을 말해달라는,

그것을 전범으로 삼고 싶다는 요청은 실로 어리석었다.

(지금 문장의 시제는 뒤엉켜 있다,

그러나 마음 맑은 독자님들이여! 부디 이해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