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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일반법문

20. 월간봉은

큰스님을 뵈옵니다.

태안사 조실 청화큰스님


한 생각에 우주법계가 열리고, 한 말씀에 중생의 마음이 열리네

글: 김희균, 사진: 손재식


  삶의 여정도 저 나뭇잎처럼 돋아나 무성해지다가는 시들고 떨어져 제 온 고장으로 돌아가는게 정한 이치일 게다. 존재들이 흘러가는 천연스런 모습일 게다.

  6백여 대중이 운집한 성북동 길상사 법석에는 때마침 가을 낙엽이 분분이 흩날렸다. 청화 큰스님 법문은 늦가을 품에 지는 낙엽처럼 대중의 가슴 속을 파고 들었다.

  “생(生)의 무상함을 느끼는 가을입니다. 우리의 삶도 저 낙엽처럼 언젠가는 떨어져 제 갈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앞으로 몇 번이나 이 가을을 맞겠습니까? 또한 나이가 젊다고 하더라도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질 문명은 어떻게 한계가 있는가, 우리 생명은 어떻게 한계가 있는가를 늘 살피지 않으면 안됩니다.”


  화답이라도 하듯 바람은 하릴없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다.

  미국에서 삼년 결사를 마치느라 한국 신도들을 가까이 못하신 탓일까. 한국 신도들의 정신적 갈증이 증폭된 까닭인가. 지방으로 서울로 큰스님 가시는 곳마다 신도들의 운집이 끊이질 않는다. 때로는 새같고, 때로는 학(鶴)같은 청화 큰스님. 아침 저녁으로 자리를 옮기어 여러날 째 계속되는 법문에도 조금도 힘겨운 기색이 없으시니 그 또한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의 삶이란 우주의 자성(自性)자리 깨닫는, 삼매를 향해 가는 확실한 깨달음의 길이여야 합니다. 지식이 있다하여 이론적으로 깨닫는 데서 멈춘다면 그것은 상식에 속하는 알음알음이입니다. 그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증오(證俉)가 되어 평등의 자리에 들지 않으면 안됩니다. 행증(行證)이 되어야만 합니다.”


  수행이란 무릇 절대와 상대에 대한 온당한 체계가 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각곡한 경계의 말씀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식의 함정에 빠져, 편협된 사고의 틀에 빠져, 자기 합리화의 꾀에 빠져 전도망상하고 있는지, 그러니 불보살님께서 잠깐인들 우리곁을 떠날 수 있을까. 큰스님께서 염려하는 것도 바로 그런 점일 터이다.

  공부인에게 자만심처럼 크나큰 어리석음이 없음을 또한 경계하신다.

  “가장 무서운 것은 증상만(增上慢)입니다. 어느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도달했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의 공부 경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곧 자기 마음에 비춰보십시오. 내 마음 속에 지금 번뇌가 남아있나 아닌가, 화가 일어나지 않는가, 욕심이 일어나지 않는가 점검해 보십시오. 아직 번뇌가 일어나고, 화가 일어나고, 욕심의 찌꺼기가 남아있다면 어떤 경계에 들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암중모색이란 어두운 가운데 아는 것을 모색해 보는 것이니 공부가 얼마나 되었는지 항상 점검해 봐야 한다는 말씀이다.

  “또 경계해야 할 점은 ‘문자’입니다. 우리 마음이 어느정도 맑아져야 대승법문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반야경>의 제법(諸法)이 공(空)한 도리, 나, 중생, 생멸이 짧다 길다․․․  하는 그 모든 문자적인 해석과 상(相)이 없어져야 합니다. 공(空)을 보는데 석공(析空)과 체공(體空)이 있습니다. 석공은 ‘원자 분자로 쪼개고 쪼개 나가면 결국 공이 아닐까’ 하는 분석공이고, 체공은 <반야경>에서 말하는 ‘즉공(卽空)‘입니다. 탁자가 있으면 그대로 공인줄 아는 것이 즉공입니다.”

  모든 혼란심이 뚝 끊어져 명경지수가 되어야 비로소 삼매라는 말씀이고, 그 이전엔 가상이며 흔히 문자에 속고 있는 것이란 말씀이다. 그렇다고 교학을 멀리하라는 말씀으로 듣는다면 큰 잘못이다. 교학으로 충분히 기반을 다진 뒤에 교학을 넘어서는 체득을 이르는 말씀이다. 공부인은 모른지기 삼매에 드는 공부와 교학불교를 겸해야 한다는 당부를 거듭하신다. 문자 없는 공부, 교학 없는 수행이 되려 무명을 증장시킨다는 지적이니, 어느 선지식이나 마찬가지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함께 말씀하신 까닭이 그 치움침의 폐단을 염려하시는 것이다.


  “조사 스님 누구도 문자 없이 참선만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달마 스님께서도 <능가경>에 따라 공부하셨어요. ‘이치로 먼저 들어간 다음 행입(行入)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은 다 하나의 불성입니다. 그런 이치를 먼저 깨달은 다음에 참선의 경지로 가는 것입니다. 보조 지눌 스님 말씀처럼 체용(體用)과 성상(性相)이 둘이 아님을 아는 것이 신앙심입니다. 그 자기를 찾는 태도가 애매해서는 참선이든 염불이든 바른 정진이 안되는 것입니다. 혜가 스님의 견비(팔을 자름)하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간절하게 찾으십시오.”

  눈밭에서 견비하는 마음으로, 칼을 턱 밑에 놓고 졸음을 쫓는 불퇴전의 마음으로, 그 목숨을 거는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이 없고서야 어찌 불법의 진수에 가 닿으리. 색계(色界)에 올라가면 잠이 없고 음식에 탐착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랫동안 따슨 자리에 등 한번 눕히지 않고 하루 일종식(한 끼)에 정진을 거듭해 오신 큰스님께서는 진작에 이 육계를 여의셨는지 모른다. 그 정진력과 원력으로 오늘 이 땅의 불자들에게 축복을 주고 계시지 않은가. 불성을 확연히 드러내라 재촉하고 계시지 않은가.

  <법화경>에 이르길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들락거리는 그 ‘생각’이란 무엇일까. 생각이 일면 중생이요 꺼지면 그대로 적정처가 아닐까. 그 적정처를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


  “우리의 생각은 에너지 파동에 불과합니다. 우주엔 끝도 없는 생명의 파동이 넘치고 있습니다. 화장세계, 중중무진, 진여불성이 충만해 있는 광명세계입니다. 물질이란 에너지 파동의 집합체입니다. 너무 자기의 공부 방식만 옳다고 고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본체를 여의지 않으면, 내 마음의 우주 원리를 터득해가는 방법이면 다 참선입니다. 염불을 해도 지혜와 더불어 염불을 하십시오. 부처와 내가 둘 아니다, 본래 면목이 바로 부처라는 걸 알고 염불하면 그게 바로 참다운 참선이고 참염불, 참지혜인 것입니다.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열고 부처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 큰스님을 ‘염불선을 선택하신 스님’으로 규정짓기는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스친다. 우리 또한 그저 부처가 되는 길로 나아갈 뿐, 이것이다 저것이다 규정짓기를 멈춰버리면 어떨까. 각자가 선택한 방법을 존중해 주면서, 정진에는 반드시 지혜와 복력이 구족돼야 한다는데, 염불 기도는 그 복력을 키워주는 일이라 하시니 또한 거룩한 일이다.

  대양에 떨어뜨린 한 방울의 물이 물살의 온도와 양을 변화시킨다고 한다. 우리가 무시로 일으키는 한 생각이 우주의 움직임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어떤 생각을 일으켜야 정토세계를 앞당기는데 보탬이 될까. 그 생각의 홍수 속에서 우주법계와 합일되는 생각을 일으키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도인의 한생각은 우주법계를 움직이고 천하를 움직인다고 한다. 오늘 운집한 대중들 모두가 마음을 열고 큰스님 말씀에 크나큰 영향을 받았기를 기원해본다.

  큰스님의 닫는 말씀이 크게 공명해온다. 그 말씀에 어찌 마음 찾는 일에 게으를 수 있겠는가. 세월을 낭비할 수 있겠는가.

  “저 같은 사람은 이렇게 가을이 오면 내가 과연 몇 일이나 이 가을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처처의 부처님 전당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른 길은 아무의미가 없습니다. 불자님들 모쪼록 마음자리를 찾으십시오. 부처님 대승공덕을 얻으십시오. 부지런히 공부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