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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일반법문

17. 불교춘추 1997년 11월호 통권 8호에


<불교춘추 1997년 11월호 통권 8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스님의 음성

 


이 남 덕 (전 이화여대 교수)


 


큰스님을 처음 뵌 것은 동리산 태안사에서였다. 그 때가 1987년 6월

6일 토요일로 태안사 신도들로 구성된 금륜회 정기법회 날이었다.

당시의 태안사행은 순전히 권수형 부부때문이었다. 수형은 한 때 내

제자였다. 


밤 8시쯤 절에 도착했을 때에는 때마침 이기영씨가 대표로 있는

'불교연구원'사람들이 정중당에서 큰스님의 설법을 듣고 있었다.

가볍게 일례를 하고, 정좌한 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분의 음성을

음미했다. 

 


직선적이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가득했으며 완벽한 인격에서

나오는 간곡한 표현법을 가진 분 같았다. 스님의 음성을 듣고 있자니

최상의 감동이 조용히 등줄기에서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것 같았고,

눈가로는 잔잔한 눈물이 번져 불은의 지극함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은 간화선과 묵조선, 염불선 등의 참선의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스님은 간화선으로 견성하였음이 분명한데도 그 어느 선도 편들지

않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각자의 근기에 따라 참선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하였다. 우리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서는 묵조선도 좋다

하였고, 특히 염불선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근기라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하였다.


 


묵조선이 초조 달마에서 오조까지의 가장 소박하고 순수하던 시대의

선법이라면, 이후 육조 혜능에서 체계화되어 당의 임제에서 확립된

간화선은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건너가 오늘의 한국의 조계종, 일본의

임제선이 되었는데 이는 확철대오의 매우 이성적인 성격이 농후한

참선법이라 한다.


 


일본은 조동종을 개산하여 묵조선을 펼쳤으나 우리나라는 완전히

간화선 위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비해 염불선은 이성적

경향보다는 감성적, 정서적 경향이 강하며 심성적 경향이 의심이 없고

불조의 가르침을 마음으로부터 믿는 이들에게 적합하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하나만 고집하지 말고 때에 따라서는 그 어느 참선법을

취해도 좋다고 말하였다.


 


같이 설법을 듣던 한 보살(우바이)이 염불을 할 때는 소리내어 함이

옳은지, 마음 속으로 함이 옳은지를 묻자 스님은 우리 생활이 복잡하여

소리내어 염불할 수 없는 경우가 많으니 그럴 때는 마음 속으로 염불

참선하라고 이르고, 그러나, 할 수 있다면 소리내어 염불삼매에 드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는 우리 주변에 떠도는 생명들과 산하대지도

기뻐하기 때문이라 했다.


 


현대인에게 맞는 염불삼매


스님의 강연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염불과 염불선의

차이점이었다. 염불선은 입으로만 외는 구두염불이 아니라 불지견을

가지고 우주와 동일생명체임을 믿으면서 염불삼매에 드는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내 자신을 감성풍부한 성품으로 본 일이 없었으나

삼선법 중에서 할 수 있다면 염불선의 길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어

새삼스레 내 자신의 성품경향을 발견한 것 같았다.


 


스님은 근본줄은 우리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궁극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며 편협이나 독선이 털끝만치도 없는 불법의

공명정대함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설법이 끝난 후, 우리

일행은 스님을 직접 친견하게 되었다. 수형은 나를 자신의 교수로

소개하였다. 스님의 말씀은 군더더기가 하나 없었고 겸손하고 명쾌해

독특한 분위기를 이끌어 냈다.


 


화제는 불교의 공관에 대해서였다. 스님은 눈으로 보이는 현상계 내지

수상행식 전부가 공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만유실유불성이라며, 현대

물리학에서 양자, 원자, 분자, 소립자로 들어가면 궁극적으로 남는 건

에너지 파동뿐 물질상태가 아닌 것에 비유하여 공을 설명했다.

 


내가 엉뚱하게 수상행식이라는 정신작용을 무라 부정해 버리고,

어떻게 공의 세계와 현상세계(색즉시공 공즉시색)를 연결할 수

있는지를 묻고 동양에서 영이니 혼이니 하는 것인지 물었다. 전자에

대해 스님은 실유불성론이라 하였고, 후자에 대해서는 혼이니 영이니

정신 따위니 하는 것들은 모두 식에 속한다고 하였다.


 


등짐지게를 진 스님


다음날 아침 공양후 다시 큰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수형이 말하길

큰스님이 기다리다가 마침 문앞을 지나가는 나를 청해 들였다며

깔깔대며 웃었다. 스님은 그 때 선객들과 3년 결사로 참선 중이었으나

아침에는 만나고 싶어하는 대중들을 위해 특별히 얼굴을 내미셨다.

우리로서는 여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 태안사에 내려가면 볼 수 있는 연못은 당시에는 공사 중이었는데

탑돌이를 겸해 할 수 있도록 연못 복판에 탑(고려초 창건주

경자선사비탑)을 세우고 원형으로 짓는다고 하였다. 나는 그 때 당시

은근히 연못 밑을 얼마나 진흙으로 잘 다져야 물이 새지 않을 것인지,

경주 안압지를 가보면 기막히게 축지법이 잘 돼 있지만 요즘 사람들은

시멘트를 너무 과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잠시 들기도 했다.

스님에 따르면 본래 태안사는 대웅전 5간 절이었으나 그나마도

6.25전란으로 다 타버리고 스님이 20년 전에 와서 몸소 등짐지게를

지며 재건에 힘썼으나 3간 밖에 형편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했다.

신라말기에는 구산문중의 하나였던 대찰이었으나 지금은 주객전도로

구례 화엄사의 말사가 되었다.


 

20년 전 화엄사에 있을 때 당시 주지가 말사 중 어디든 선택하라고

해서 태안사의 절터가 아늑하여 선택하였다고 했다. 절에 대한 애착도

크고 왕년의 영화를 매우 아쉬워 했으나 "이제 나는 마지막 수행길을

가야지. 집짓는 역사에 붙잡힐 수 있느냐"고 말했다. 내가 그 뜻을

받아서 "그럼요. 대웅전은 작아도 아담하고 그 밑에 보제루가 있어서

오늘 아침 예불 때 보니 신도들이 거기에서 예불을 해도 참

좋더군요."하자 스님이 "암요"하며 기뻐하셨다.


 


이외에 부도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성인이 되지 않는 스님의 부도는

단을 만들 수 없으며 성인지위의 스님이라야 유단부도를 할 수 있다며

전자에 대해서는 신자들이 꼭 예경하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그


래서 내가 물었다. "일생을 중생제도하신 분들인데 설사 통달위에

오르지 못했어도 우리네야 예경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스님은 다만

빙그레 웃으셨다. 내 생각으론 스님들에 대한 공경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우리네 신도들의 몫이라고 여겨진다.


 


내 소유가 무상함을 깨달아야


낮 12시에 설법이 시작됐다. 서울 등지에서 대중이 운집해서 마치

왕년의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스님의 생존을 방불케 했다. 장소는

보제루였는데 큰스님에 대한 대중의 존경심은 화기가 있으면서도

엄숙한 회중의 위의 속에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분위기는 그렇게 흔히

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였다. 내가 서양을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은 동양의 분위기였다. 스승이나 존경하는 어른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설법의 내용은 연기법, 유식삼매, 공유이집 등 불교교리의 가장

핵심적인 생활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스님은 연기법과 지족공덕을

연결시켜 결론을 다음과 같이 이끌었다. "인간은 업에 매어 출생하고

인연이 다하면 흔적도 없는 것, 내 몸 내 소유가 무상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일체만물은 공취이며 공의 바탕은 비어있습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한 불성뿐이지요. 인연 따라서 생멸하는 것이니 소유에

집착하지 마십시요."


 


현대의 그칠 줄 모르는 물질지상주의의 인생관을 스님은 비판하시는

듯하였다. "만일 고뇌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마땅히 지족을 관하여야

한다. 지족법은 곧 그것이 복락안온의 길이니 지족하는 사람은 지상에

누웠어도 안락하고 지족하지 않는 이는 천당에 산다해도

불만이다"(유교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