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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일반법문

14.“40년 장좌불와… 염불선 주창한 수행자 사표”


법보신문

서기 2003년 11월 19일 수요일


 

“40년 장좌불와… 염불선 주창한 수행자 사표”

            12일 원적 청 화 큰스님 생애와 업적

 

  11월 12일 밤 10시 30분. 청화 큰스님은 평화롭게 이승을 떠나 열반에 들었다. 다만 태산 같은 불은(佛恩)을 다 갚지 못하고 갈 수밖에 없음을 못내 안타까워하는 임종게를 남겨둔 채로….

 몇 달 전부터 건강상태가 극히 좋지 않은 상태였으나 스님은 평생 계속해왔던 장좌불와(長坐不臥)와 하루 한 끼 식사를 하면 수행정진을 계속해왔다. 이날도 마찬가지로 간단한 점심공양을 마친 스님은 수행에 들었고 저녁에는 상좌들과 법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저녁께 이제 떠날 때가 됐다는 말씀과 함께 성륜사 마당을 돌아보며 그간 낯익었던 지리산 자락을 한 없이 바라보셨다고 상좌들은 전했다. 스님은 “금생에서의 세연(世緣)이 다했으니 이제 가련다”는 말씀과 함께 마지막으로 상좌들에게 간곡한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내가 가도 부디 화합해 청정가풍을 이어가야 한다. 또 수행 열심히 해 중생구제 하는 일이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다.”

 이 말씀과 함께 큰스님은 40여 년 이상 계속해 오던 장좌불와를 마침내 풀고 자리에 조용히 누웠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띤 채 조용히 열반의 세계에 들었다. 상좌들조차 고요한 미소를 보이는 스님의 모습을 보며 정말 입적하신 것이 맞냐는 의문을 가질 정도로 스님의 떠나감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스님은 81년간의 생애를 통해 눈 쌓인 들판에서 갈 곳 몰라 하는 중생들에게 눈에 찍힌 선명한 발자국처럼 뚜렷한 삶의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또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겠다는 구도열정으로 자신에게 한 치의 게으름도 용납하지 않았던 치열한 수행자로 익히 알려져 있다.

 은사 금타 스님이 하루 한 끼만을 공양하고 짚신을 손수 삼아 신는 등 무소유와 청빈의 삶을 실천했듯 제자 청화 스님도 하루 한 끼 공양과 최근까지도 손수 빨래를 하는 등 전형적인 수행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특히 40여 년의 토굴생활과 장좌불와의 정진, 태안사에서의 3년간 묵언 수행은 수행자들의 귀감이 되어왔다. 이런 스님에게 ‘장좌불와와 수행자’ ‘일종식 납자’ ‘염불선의 실천자’ 등 수식어가 단순한 찬양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새삼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백양사 전 주지 지선 스님이 “큰스님은 내가 보아 온 수많은 수행자들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열심히 수행했던 스님”이었다고 회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스님은 계율을 지킴에 있어 어느 율사 못지않게 철저했다. “계율로 말미암아 선정이 생기고 선정으로 말미암아 참다운 반야지혜가 생긴다”는 평소의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큰스님의 삶을 더 한층 빛나게 하는 것은 간화선 위주의 편향된 수행풍토에서 선과 염불을 하나로 회통해 새로이 염불선을 주창했다는 점이다.

 “부처님 명호(名號)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한 화두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나무아미타불 해라!’ 또는 ‘관세음보살 해라!’고 하신 것은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그 자체가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두라는 말입니다. 꼭 ‘무(無)’자나 ‘이뭣고’만 화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큰스님의 법어에서 알 수 있듯 염불선은 선과 대립하지 않고 염불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이를 통해 일체존재가 모두 진여불성이라는 진리의 핵심에 도달토록 이끌었던 것이다. 이는 곧 중생들의 근기에 맞는 새로운 수행체계를 열어 보인 것이며, 무엇인가를 바라는 염불에서 나와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염불참선법을 몸소 제시했던 것이다.

 스님의 입적 소식이 알려지면서 지금 성륜사에는 수많은 불자들의 발길이 잇따르고 있다. 이는 그동안 스님이 펼친 중생제도의 원력과 무관하지 않다. 세수로 60을 넘기고서 본격적인 전법활동을 통해 많은 불자들에게 불교의 깊은 맛을 체험토록 했던 스님은 95년에는 노구를 이끌고 미국 삼보사와 금강선원에 머물며 현지인과 교포들을 대상으로 법음을 전함으로써 큰 호응을 얻었다. 이후 성륜사로 다시 돌아온 스님은 호남 지역은 물론 서울, 강원, 경상도 등 각계의 초청법문에 응해 적극적인 교화 활동을 전개했다. 일반 서민들은 물론 대학 교수, 법조인, 정치인들도 스님의 법력에 감화해 속속 불교로 귀의하기도 했다.

 최하림 시인이 ‘맑은 꽃 비상하게 자기를 다스린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향훈’이라고 칭송했던 청화 큰스님. 스님은 비록 낡은 육신을 벗고 떠나갔지만 그 향훈은 국화꽃보다 진하게 불자들을 휘감고 있다.



 이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