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3.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일반법문

대전 덕림회 법문

 

절집 법문은 2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상단법문인데 상단법문은 격식을 가려서 법상을 차려놓고 법상에 올라가서 하는 법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때는 인제 가사를 수하고 위의를 갖추어야 하겠지요. 그러한 상단법문이 있고 또 한 가지는 소참법문이라. 소참법문은 격식을 가리지 않고서 이 그때그때 ~ 이와 같이 그렇게 하는 법문이 소참법문입니다.


 오늘 지금 같은 때는 이런 때는 소참법문을 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상단법문은 절집에서는 보통은 인제 법회 때라든가 또는 상망 그래서 초하루나 인제 보름에 그런 때 인제 많은 대중들이 있을 때에 그때 이른바 상단 법문을 합니다. 그러고 법문 내용도 상단 법문 때는 주로 그 본체론적인 문제 이 우리 ~ 일상생활적인 그런 것을 좀 떠나서 본체론적인 그런 문제를 주로해서 하는 법문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제 아 이렇게 주장자를 텅텅 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그런 그야말로 참 이른바 불교말로 하면은 격외성이라. 격 밖에의 그런 법문을 한다 말입니다. 이렇게 소참법문 때는 그냥 우리가 자유스럽게 그때그때 인제 일상적인 문제를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모처럼 오셨는데 우리 방사가 이렇게 정리가 못 되어나서 ~ 오늘은 상당히 추운날씨인데 저도 지금 오늘 한데서 많이 ~ 나서 제 그 말씀하기가 좀 곤란할 정도로 지금 한기를 느낍니다. 우리 불교가 좀 더 그 간단명료하니 이 경서도 바이블 모양으로 한 몇 권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그렇게 되면 은 참 좋은데 아시는 바와 같이 인제 상당히 그 방대한 분량 ~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8만4천 법문이라. 그래나서 그런 경전을 저희 같은 전문적인 그런 승려도 평생 동안에 그걸 다 볼 수가 없다 말입니다. 중점적으로 중요한 것만 보는 것이지. 다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럴 정도로 복잡 ~ 하기 때문에 특히 재가 불자들은 더욱 더 중요한 경전을 보기가 어렵겠지요. 그래서 이 불법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 소승이 있고 대승이 있고 또는 현교가 있고 또는 밀교가 있고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볼 수 있는 그런 범위 내에서 하는 법문도 있고 또는 중생들은 어떻게 감 잡을 수 없는 눈에 안 보이는 그런 형이상학적인 세계 그런 세계만 주로한 그런 또 밀교가 있다 말입니다. 밀교도 정통 밀교가 있고 이와 같이 모두 있어나서 사실 그 처음에 막 들어갈 때는 어떻게 어떤 것이 정통인가 어떻게 해야 만이 성불할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아주 그 좀 당황할 정도로 그렇게 복잡합니다.


 그러나 그렇다 그래서 갖다가 그런 요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또 역시 가장 중요한 또 요긴한 법문이 있다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그런 요긴한 대목만 간단간단히 제가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방금 말씀 드린바와 같이 그 방안에서 오손도손하게 얘기할 정도로 분위기가 되면 좋은데 이렇게 되면 은 조금 ~ 사람이라든가 듣는 분도 여러 가지로 능률적으로 봐서 다 수용하기가 곤란스러운 것입니다.


이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연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바른 생각인가 하는 이른바 이 불교의 가치관 문제 이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른 행동을 하고 또는 그야말로 참 바른 언어를 하고 여러 가지 우리가 생활상에 필요한 바른 쪽으로 우리가 도덕적인 행위를 우리가 취해야 쓰겠지만 먼저 그 철학관 가치관이 확립이 안 되어 놓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른바 바른 생각 바른 가치관 문제라 말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바른 가치관인가. 요즈음 불교 외에도 무슨 뭐 생명 연구위원회서 무슨 여러 가지 그런 사회적인 형태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만 과연 지금 우리가 중요시하는 그런 생명 그런 정신 문제라든가 말입니다. 그런 문제 같은 것도 우리 불교의 시각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이런 것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불교에서 보면 생명은 과연 무엇인 것인가.


그 생명문제에 대해서 불교의 그런 전모라고 할 수 있는 사실은 거의 전부가 다 생명을 가지고서 ~ 있습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생명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바로 볼 수가 없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시각이 짧아놔서 모든 문제에 있어서 바른 본질을 못 봅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현상만 보는 것이지 실상을 못 본다 말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가르침의 그런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것이 바로 생명론인데 생명의 본바탕을 본다 말입니다. 생명의 실상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이 불교의 중요한 그 요체라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상적인 것은 우리 중생들이 대강 알지마는 현상의 그 본체적인 문제 그런 문제는 일반 중생들은 알 수가 없다 말입니다.


일반중생들은 그 상식적이라든가 기껏해야 과학적인 그런 분야에서나 이렇게 저렇게 우리가 아는 것이지 모든 문제의 모든 그런 존재의 그런 근본적인 문제 내 생명의 뿌리는 무엇인가 가사 인제 일반 식물의 그런 생명의 뿌리는 무엇인가 말입니다. 또는 물질적인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관해서 일반 사람들은 불교뿐만 아니라 무슨 종교나 모두가 다 본질을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바탕을 다 우리가 기독교도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마는 하나님 우리가 눈에 안 보인다 말입니다. 따라서 일반 사람들은 그냥 ~ 뒤따라가는 것이지 사실은 무엇이 무엇인가 잘 감을 못 잡습니다. 감을 못 잡으니까 인제 아 기독교를 굉장히 많이 연구한 목사나 신부가 돼도 더러는 갖다가 그런 과오도 범한다 말입니다. 우리 승려도 마찬가지로 불성이다 불성은 내내야 부처님 성품이 인제 동시에 그야말로 참 우리 인간성이 본바탕이 ~일체 존재의 근본적인 성품이 불성 아닙니까. 불성이 그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많은 말을 많이 하고 또는 염불도 많이 하고 또는 경책도 상당히 많이 봤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중생의 상대유한적인 시각에서는 안 보인다 말입니다.


 안 보이니까 벌써 선천적으로 ~ 불교말로 하면은 갖다가 선근이 깊고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저렇게 말하면 그냥 눈에 안보이지마는 그것은 꼭 있는 것이겠구나. 이렇게 느끼지마는 일반 사람들은 사실은 확신을 못한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불교를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맨 처음에는 수행이라 닦을 수(修)자 행할 행(行)자 우리가 갖다가 가르침 따라서 닦아나간다 말입니다. 수행이라. 수행이 익어지면 그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성이라 하는 인생과 또는 우주 만유의 본바탕을 훤히 우리가 체험한다 말입니다. 이것보고 그때는 견도(見道)라. 견도란 견성(見性)이라 말입니다. 견도할때는 볼견(見)자 길도(道)자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 견성할 때는 볼견(見)자 성품성(性)자 말입니다. 우리가 불성(佛性)을 스스로 우리가 그야말로 참 체험한다 말입니다. 딱 그렇게 돼서 우리가 견도(見道) 견성(見性)이 돼 버리면 그때는 그야말로 참 자기가 스스로 체험하니까 아 그렇구나. 확실히 아는 것이고 그러고 그 다음에서 아 말을 해도 확실히 보는 것이니까


 그야말로 참 별 빗나가지 않게 시리 불성이라 하는 내 생명의 내 본 바탕에 어긋나지 않는 말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행동도 할 수가 있지마는 불성을 못 볼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우리가 수행을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수행은 어떻게 해야 쓸 것인가 이것은 대체로 불교를 초보적이라도 하신 분들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른바 삼학도(三學道) 팔정도(八正道)라 말이지. 삼학도는 이것은 간추려서 계율(戒律) 또는 선정(禪定) 지혜(智慧) 말입니다. 팔정도는 삼학도를 보다 더 부연시켜서 8가지로 구분해 있다 말입니다. 따라서 이래저래 불교의 가르침이 복잡하니 많이 있지마는 모두가 다 삼학, 팔정도에 다 거기에 포섭이 됩니다. 다시 더 간추려서 말 하면은 어떻게 우리가 생각을 하는 것인가 또는 어떻게 말을 하는 것인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인가 이 세 가지 범주에서 우리가 하는 것이 그것이 이른바 삼학도라 말입니다. 또한 그것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연시키면 팔정도고 내내야 불법이라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방금 말씀 드린바와 같이 어떻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인가 어떻게 말하는 것인가 어떻게 행위하는 것인가 이 세 가지에 딱 포섭이 된다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선 우리가 바른 말을 하려면 또 바르게 알아야 쓰겠지요. 바른 행동도 취하려면 또 바르게 알아야 쓰겠지요. 그러기 때문에 바르게 생각한다는 가치문제가 역시 가장 선행적으로 인제 우리한테 문제가 안 될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생각이고 인제 바른 가치관인 것인가 이런 문제는 우리가 깊이 생각을 해야 씁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생각인 것인가 말입니다. 유교적인 그런 생각도 있을 것이고 또는 다른 그야말로 참 현대 실존철학적인 그런 견해도 있을 것이고 말입니다. 가지가지 그때그때 각 철인마다 각 종교마다 각각 가치관이 차이가 있다 말입니다. 우리 불교도 대승이 있고 소승이 있다 말입니다. 소승적인 가치관 또는 대승 가치관 가치관이 차이가 있습니다.


소승적인 가치관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모든 것이 이것이 허망무상해서 본질은 텅텅 비었다고 생각한다 말입니다. 이른바 공(空)이라 말입니다. 즉 따라서 우리 중생이 보는 모든 것이 허망무상해서 꿈같고 그림자 같고 다 모두가 다 본바탕에서는 텅텅 비어있다 하는 그런 생각을 그런 견해를 못 가지면 은 사실은 아직은 소승도 못 되는 셈이지요. 따라서 불교인들은 어떻게 불교를 하든지 간에 우선은 소승적인 견해를 먼저 가져야 쓴다 말입니다. 처음에는 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바로 못 본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겉만 보고 그 속에 본바탕은 못 본다 말입니다. 따라서 속으로 본다고 생각 한때는 본체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허망하고 꿈같고 다 그림자 같다 말입니다.


 이렇게 못 본다고 할때는 그때는 불교는 알 수가 없습니다. 불교는 중생들이 보는 그런 견해에 따라서 이 세간 적으로 가르치는 그런 범주에 머무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문제 일체존재의 근원적인 문제 그런 문제를 목표로 하는 것이 불교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선은 불교의 소승에서 말하는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이것은 가짜고 참말로 그 진정한 것은 모두가 다 이것은 텅텅 비어 있다. 그러기에 반야심경 가운데도 제법공(諸法空)이라. 모든 법이 다 비어있다 말입니다. 또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우리 몸을 구성한 각 세포라든가 우리 마음을 구성한 그런 심리라든가 모두가 다 텅텅 비어있다 이렇게 먼저 알아야 쓴다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알고 더 깊이를 몰라버리면 인생은 너무나 그때는 허망하다 말입니다. 다 비어버렸으면 우리가 살 필요가 뭣이 있는가. 그렇게 애쓰고 우리가 그래저래 인간 생활 할 필요가 뭣이 있는가. 이렇게 너무나 허망하게 염세를 느낀다 말입니다. 그래서 대승적으로 대승적인 것은 소승을 초월해서 그야말로 참 우주의 실상을 그때는 바로 느끼고 깨닫는다 말입니다.


 대승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보는 것인가. 대승적인 가르침이라야 비로소 진여(眞如)불성(佛性)이다 그런 말씀 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이 소승불교에서는 이 진여불성이다 그런 말을 미처 못 합니다. 모두는 다 비어서 텅텅 비어있다 다 허망한 것이다 이런 쪽으로만 이렇게 말했으나 대승이 되 버려야 비로소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존재는 모두가 이것이 진여고 참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眞如)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진리가 어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만유가 다 진리라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의 진여라고 말한다 말입니다. 진여라 말입니다. 또는 불성이다 불성은 무엇인가. 일체의 존재의 진리 이것은 그냥 보통 이론적인 논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생명이라 말입니다.


진리가 무슨 그야말로 철학적인 원리나 논리적인 것이나 이런 것에 그치고 만다고 생각할 때는 불성이란 말을 못 씁니다. 그러나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말입니다. 진리가 바로 생명이라 말입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불성이다 그런 말을 씁니다. 그래서 우리 좁게 생각할 때는 아 진여불성 그러면은 우리 사람의 본성만 그 불성이다 이렇게만 생각한다 말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게 좁게 안 본다 말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도 역시 본 성품은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고 또는 식물도 역시 부처불자 성품성자 역시 불성이란 생명이고 말입니다. 광물이나 모두가 다 부처의 성품이라 말입니다. 그러면은 부처의 성품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내 생명의 본바탕인 동시에 상(相)이나 ~ 일체존재의 근본성품인 불성이 또 어떤 것인가 불성 이것은 생명인데 그냥 생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성은 이것은 무한히 ~ 거라 말입니다.


 일체 존재의 근본은 불성이고 불성 그것은 바로 생명인데 그 가운데는 무한히 가능한 그런 공덕이 다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여까지 알아버려야 그래야 불교를 대승적으로 대강 우리가 알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오늘 여기 오신 분들은 뭘 아시는 분들은 충분히 아시겠지만 잘 모르시는 분들은 일체존재의 근본은 바로 불성이고 말입니다. 바로 진리고 그 가운데는 모든 그런 가능성 행복이나 자비나 지혜나 또는 일체 그런 ~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한다 말입니다. 이러한 진여불성이란 그릇이 그러한 그런 존재가 즉 말하자면 그것이 일체 만유가 됐다 말입니다. 우리 인간하고 진여불성하고 따로따로 뿔뿔이 있는것도 아닌 것이고 다른 동물하고 아 진여불성하고 따로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산천초목하고 진여불성하고 따로 있지도 않다 말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것이나 진여불성하고 딱 같이 맞닿아 있다 말입니다. 조금 더 확실히 말 하면은 사실은 우주란 것은 바로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바다에서 바람 따라서 파도가 일어나면은 거기에서 거품도 생기고 여러 가지 높고 낮은 파도가 있겠지요. 그런 파도가 똑같이 차별이 없이 다 같은 물이듯이 진여불성이란 자리에서 진여불성이란 자리에서 ~달이 되고 사람이 되고 그렇게 됐다 하더라도 그것이 ~ 아니란 말입니다. 모양만 바꾸어져서 사람 같은 모양이 되고 산 같은 모양이 되고 해 같은 모양이 되고 했을 뿐이지. 진여불성이라는 그러 근본적인 요소는 조금도 그때는 변질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한다 말입니다. 그것이 불교의 바른 가치관이라 말입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지금 강도나 우리가 생각할 때는 강도 저 나쁜 놈은 그야말로 참 저런 것들이 저런 사람들이 저런 ~그야말로 참 진여불성에서 왔을 것인가 또는 설사 근본은 진여불성이라 하더라도 벌써 그런 나쁜 사람들은 그야말로 악덕한 마음 때문에 악덕한 행위 때문에 아 지금은 그 사람한테 진여불성이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마는 강도나 누구나 지체부자유자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란 데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말입니다. 이런 것을 잘 느끼지 못한 분들은 우리가 물리학적으로 생각을 한번 해 보시면 될 수가 있습니다. 다 모두가 다 우리 몸뚱이 그야말로 참 산소나 수소나 모두 다 그런 각 원소가 인제 결합되어 분자로 해서 인제 이렇게 세포가 안 됐습니까. 또는 그런 것들이 근본은 모두가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나 모다 그런 것 아닙니까.


따라서 가사 강도를 구성한 강도란 그런 나쁜 사람을 구성한 전자나 중성자나 또는 양자나 아 그런 것도 선량한 사람 구성한 그런 양자나 중성자나 전자 그런 것 하고 차이가 없다 말입니다. 다만 결합에서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전자나 또는 중성자나 양자나 그런 차원에서는 그때는 별로 변질이 없다 말입니다. 어떠한 그런 조그마한 그런 우리가 원자의 알맹이라도 모두가 다 모두 에너지가 적당히 이것이 그냥 형상화돼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할 때에 따지고 보면 은 천지우주의 모든 존재는 에너지가 적당히 운동하고 진동하고 결합하고 이렇게 되었다고 안 볼 수 없다 말입니다. 따라서 일체 물질은 종당에는 현대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모두가 다 에너지가 되고 만다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에 상이나 ~ 사람 몸뚱이나 결국은 다이아몬드나 모두가 다 에너지가 되었다 말입니다.


 에너지가 말입니다. 에너지가 그러면 에너지 그것은 무엇인가 현대물리학은 모른다 말입니다. 운동에너지는 뭐다 ~ 에너지란 것은 알지마는 에너지의 본 성품은 무엇인가 그런 것이 현대물리학으로도 모르는 그런 에너지의 본 성품 일체존재의 근본 되는 에너지의 본 성품이 그때는 바로 불성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에너지도 역시 일체 존재 가운데 다 포함돼 있는데 말입니다. 에너지보다도 훨썩 더 순수한 근본적인 생명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불성 그것은 어떠한데도 없을 수가 없다 말입니다. 모든 것은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은 다 진여불성의 화신이라 말입니다. 진여불성이 됐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내가 지금 아직은 번뇌에 가리어서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의 에너지가 지금 보입니까. 분석한 뒤에 갖다가 가까스로 현대 물리학에서 우리가 유추해서 아는 것이지 에너지가 지금 보입니까.


그렇게 안 보이듯이 우리 범부들은 진여불성이 안 보인다 말입니다. 성자가 돼서 번뇌가 다 가셔버려야 그때는 그야말로 참 진여불성이 훤히 보일 것인데 안 보인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은 그런 진여불성이 안 보이지마는 석가모니가 거짓말을 했을 리가 만무하고 달마스님이 거짓말 했을 리가 만무하고 그 진여불성을 훤히 체험한 그런 성인들이 있다고 했으니까 우리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 말입니다. 예수님 하나님이 우리가 보입니까. 안 보이지마는 아 예수님 같은 분이 갖다가 거짓말할 분이 아니니까 갖다가 있다고 하니까 믿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그런 하나님이나 진여불성이나 결국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도 역시 우리말로 하나님이지 갖다가 그것이 갖다가 유대말로 뭐 하나님입니까 하나의 진리 말입니다. 우주를 통틀어 하나의 진리 그것이 하나님이라 말입니다. 바로 부처님도 갖다가 인제 우주를 통틀은 하나의 진리 하나의 생명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를 통털은 하나의 생명을 갖다가 하나님이라고 허나 또는 부처님이라고 말하나 그것이 상관이 없다 말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다 바꿔서 말 하면은 다 부처님뿐이다 또는 모두가 다 하나님뿐이다 이렇게 알아야 한다 말입니다. 우리 불교인도 갖다가 모두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알아버려야 인제 그 대승적으로 불법을 안다 말입니다. 또는 기독교인도 신부나 목사가 잘 몰라서 저거가 믿는 하느님만 하나님인 것이지 모두가 다 하나님뿐이다. 그렇게 말하면 상당히 거부반응을 느낄 것입니다마는 사실은 요한복음서나 마태복음서나 우리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안 볼 수 없다 말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 뿐이고 부처님뿐이라고 생각할 때에 우리 중생들은 겉만 보기 때문에 박가 김가 있고 또는 상이 ~ 있고 모두 다 우리는 그런 구분해 봅니다. 마는 저변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저변은 다 부처님으로 해서 꽉 차있다 말입니다. 또는 이렇게 형상화 된 우리 몸뚱이도 우리 번뇌에 가린 중생이 본다고 생각할 때에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이는 것이지.


근본 진여불성 부처님을 볼 수 있는 그런 성자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같이 보인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원수가 없고 뭣이 없는 것이지 아 미운 놈 원수로 보이고 뭣으로 보인다고 생각할 때에 원수 우리가 미워할 수가 있습니까. 나쁜 놈 ~ 우리가 미워진다 말입니다. 그러나 성자의 바른 가치관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 미워할 필요가 없다 말입니다. 다 부처로 보이고 다 하나님으로 보이는데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갖다가 더 좋아지고 할 것입니까. 따라서 우리 불자님이나 또는 기독교인이나 지금은 그냥 소승적으로 자(自) ~ 해(解)서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 또는 형상만 보고서 따질 것이 아니라 근본본질을 보고 지금 믿을 때라 말입니다. 그렇게 돼야 진리에 따르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돼야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른 가치관이 됩니다. 그래야 바른 철학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바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입니다.


 불교는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 수행법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팔정도라. 팔정도 가운데 불교의 일체 수행법이 거기에 다 들어있다 말입니다. 팔정도 가운데 가장 화두가 무엇입니까. 정견이라. 바를 정(正)자 볼 견(見)자 바른 견해라 말입니다. 바른 견해는 바른 생각 바른 가치관 바른 철학관이라 말입니다. 바른 정견이 딱 바른 가치관이 있어야 한다 말입니다. 바른 견해는 무슨 견해인가.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소승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허망하다 다 꿈같고 허망하다. 이렇게만 보는 것이 소승적인 정견이고 말입니다. 대승적인 정견은 방금 제가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떠한 것이나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부처라 말입니다. 밉게 보는 것은 우리가 아직은 번뇌에 가리어 있다 말입니다. 특별히 누구만 좋게 보는 것도 역시 자기 맘에 내키는 누구만 좋게 보는 것도 역시 번뇌에 가리어 있다 말입니다. 평등무차별이라. 평등하게 봐야 한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내가 지금 불교를 믿고 있다 내가 지금 반야심경도 외우고 법화경도 왼다. 쭉쭉 들이 왼다 하더라도 미운사람 밉게 보이고 좋은 사람 좋게 보이고 그렇게 봐서는 공부는 지금 아직 멀었습니다. 반야심경도 모르고 금강경도 모르고 다 모른다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다 구성돼 있다. 하나의 진리인 부처님성품으로 구성돼있다. 모두 하나님으로 구성돼 있고 또는 부처님으로 구성돼 있거니 따지고 보면 천지우주는 바로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대승적인 그런 가치관이라 말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 할 때에 누구한테 듣기 싫은 말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누구한테 미운 말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또는 자기만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한테 그대로 볼 수가 있습니까. 생명이 원래 나와 남이 둘이 없거니 자기만 집을 2채나 3채나 가질 필요가 있습니까. 따라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견(正見)이라 말입니다. 정견 바른 견해를 가져야 그래야 정사유(正思惟)라. 생각도 바로 나오는 것이고 또는 정어(正語)라. 바를 정(正)자 말씀어(語)자 말도 바르게 나온다 말입니다.


요새 그냥 어떻게 그 남을 사람해라 남한테 그야말로 참 봉사해야 쓴다. 사회 참여해야 한다. 아 그렇게 말은 많이 하지마는 그렇게 않는다 말입니다. 어째서 안 되는 것인가. 내가 따로 있고 네가 따로 있고 말입니다. 나는 좋고 너는 그르고 말입니다. 자기와 남을 구분하는 마음 내 권속만 내 가족만 좋고 남들은 죽든가 살든가 알바가 아니다 이런 자타시비를 구분하는 그런 단계에서는 제 아무리 봉사를 강조하고 자비심을 강조해도 안 된다 말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각각 주의가 이렇게 이데올로기가 복잡하고 각 주의 사상 각 여러 가지 그런 종교관이 다양하니 같이 서로 얽혀있고 이런 때는 모두를 다 통틀어서 하나의 진리로 나가는 우리가 가치관을 가져야 쓴다 말입니다. 이것보고 불교 어려운 말로 하면은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때릴 타(打)자 이룰 성(成)자 한일(一)자 조각편(片)자 말입니다. 모두를 갖다가 부수어서 하나로 딱 만들어 버려야 쓴다 말입니다.


 바꾸어서 말하면 통일원리라 말입니다. 우주를 갖다가 하나의 진리로 통일시켜 버려야 한다 말입니다. 이렇게 돼 버려야 마음의 불안이 가시는 것입니다. 종교를 믿는 분이 갖다가 불안한 마음이 있으면 그때는 바로 믿고 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 불타(佛陀)든가 말든가 말입니다. 이런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웁게 불교를 믿지 않다 말입니다. 요새 신문 보면 갖다가 기독교도 인들이 더러 갖다가 잘못 생각해 가지고 절에다가 아 불도 질러버리고 말입니다. 또 불상을 갖다가  페인트로 뭐다 칠해버리고 했다는 것이 있습니다마는 이래 버리면 이것은 예수님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지금 상당히 추운 분들은 추우실 것이고 저도 ~ 있어놔서 오늘 상당히 피로도 하고 그래서 그 말주변이 잘 안 섭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말씀드리기가 거북합니다마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팔정도만은 정확히 알아 두셔야 하겠습니다.


 팔정도만은 그냥 단순히 뭐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아 정업(正業) 그렇게만 욀 것이 아니다 말입니다. 바른 견해도 소승적 견해가 아니란 말입니다. 본질적인 부처님 견해 즉 말하자면 이슬람교와 기독교와 유대교와 불교와 그렇게 본다 할지라도 다름이 없는 하나의 진리가 되어 버리는 그런 견해를 알아야 한다 말입니다. 그래야 바르게 말해지고 바르게 살수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이북하고 지금 통일해야 한다. 응당 통일해야 쓰겠지요. 본바탕을 모르고 생명의 본바탕을 모르고 말입니다. 진리를 바로 모르고서 바른 가치관을 모른다고 생각 할 때는 합해나 봐도 역시 그것이 별것도 못 됩니다. 또 싸우고 맙니다. 오직 하나의 진리 무수한 성자가 다 그 길을 갔고 지금도 무수한 수행자가 가고 있고 말입니다.


하나의 진리를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한다 말입니다. 하나의 진리를 바로 아는 것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팔정도의 그것이 정견이라 말입니다. 불교의 바른 지혜고 그것이 반야의 지혜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은 그것이 반야바라밀이라. 해탈의 지혜 성문의 지혜 반야바밀(般若波羅蜜)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견이라 말입니다. 정견을 가져야 만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르게 말도 나오고 바르게 생각돼지는 것이고 또는 바른생활 되지고 말입니다. 바른 생활보고 우리는 정명(正命)이라. 우리 몸으로 하는 바른 행동은 정업(正業)이라 말입니다. 그렇게 돼야 그때는 바른 정진(精進)이라. 정정진(正精進)이라 말입니다. 정념(正念)이라. 그런 바른 생각을 보다 더 깊이깊이 사무치게 생각한다 말입니다. 정념(正念)이라. 이렇게 해야 정정(正定)이라.


 바른 삼매 마음이 하나로 딱 모아진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금생에 우리가 얼마나 분별심 많이 배웠습니까. 근본적인 우리가 진여불성 자리는 못 배웠다 말입니다. 있다 없다 나요 너요 모다 이렇게 상대 유한적인 인간의 그런 번뇌에 가린 그런 우리 중생들이 보는 범부가 보는 경계만 잔뜩 배운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잠재세계에서는 이른바 유병이라. 있을 유(有)자 병병(病)자 말입니다. 중생의 병 가운데 유병(有病)이 제일 지독한 병입니다. 유병이라. 불교의 지혜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허망 무상한 것인데 허망무상하고 참말로 있는 것은 결국은 진여불성뿐인데 우리는 내가 실지로 있고 말입니다. 내 재산이 실지로 있고 말입니다. 또는 우리 눈으로 보는 상(相)이요 고대로 있다고 생각한다 말입니다. 고대로 있다고 그것보고 유병이라 이른바 있는 병이라 말입니다.


있는 병 유병을 미처 못 다스리면 은 절대로 우리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진리란 것은 우리 행복과 더불어 만이 참다운 진리가 있습니다. 천지우주란 것은 사필귀정이라 모두가 다 진리로 나아가고 있다 말입니다. ~ 바와 같이 우리가 하늘의 뜻에 따르면 그때는 그야말로 참 행복이 오는 것이고 말입니다. 하늘의 뜻에 거슬리면 은 그때는 우리가 불행밖에는 못 온다 말입니다. 하늘의 뜻이란 것은 바로 그 진리라 말입니다. 따라서 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보는 것은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반야심경을 천만번 외운다 하더라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한다 말입니다. 반야(般若)는 무엇인가 반야는 제법공(諸法空) 지혜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다 병들었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리자 같은 것을 참말로 있다고 생각하고 참말로 있는 것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니까 우리가 무시한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눈에 안 보인다 하더라도 가장 거짓말을 않는 분 그 분이 내내야 공자 석가 예수 모다 노자 그런 분들 아닙니까. 그 분들 말씀을 우리가 곧이 알아듣지 않을 수 없다 말입니다. 그 분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제법공입니다.


제법공 도리가 바로 반야바라밀 반야의 지혜라 말입니다. 반야의 지혜 아무리 그렇게 안 보이고 이 소중한 내 몸뚱이 보고 다 비었다고 하면 감은 안 잡히고 말입니다. 너무나 허망하지마는 실지로 비었다 말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인연 따라서 각 원소가 잠시간 합해져서 세포를 이루어서 우리 몸 안 되었습니까. 인연 따라서 각 원소가 산소나 수소나 모두가 다 그런 것들이 잠시간 이렇게 결합도 하고 저렇게 운동도 해서 이 세포로 해서 이 몸이 되었다 말입니다. 그 몸뚱이가 일초전과 일초후가 몸뚱이가 같습니까. 어느 순간도 이 몸뚱이가 같을 때가 없다 말입니다.


전변무상이라. 순간순간 우리 몸뚱이가 지금 변하고 있습니다. 내 몸 그러지마는 아까 몸과 이 몸과 같지가 않다 말입니다. 지금 몸과 내일 몸과 같지가 않다 말입니다. 이 몸뚱이가 즉 과거 있었습니까 전생 있었습니까. 부모님한테 의지해서 태어나 기전에 몸뚱이가 있을 수가 만무하다. 다만 부모님 연 따라서 없던 것이 잠시간 이렇게 되어 가지고 인제 영양을 섭취해서 이만치 컸다 말입니다. 일정 혈육이 엄마의 태속에 들어가 가지고서 영양을 섭취해서 이만치 지금 컸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뭐가 남습니까.  죽은 다음에는 매장하면 그때는 썩어서 그야말로 참 썩어서 흙되고 다 모다 물 되고 하겠지요. 화장하면 재만 남겠지요. 낳기 전에도 이와 같은 몸뚱이는 존재도 없고 말입니다. 또는 죽은 뒤에도 존재가 없습니다. 내생 가면은 또 다시 몸을 받는 것이지 이따위 몸은 없다 말입니다. 30년 40년 50년 살아있을 그 동안도 방금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아까 몸과 지금 몸이 같지가 않다 말입니다. 지금 몸과 또 뒤에 몸이 같지가 않습니다.


 순간순간 변화무쌍하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고통은 무엇이 고통입니까. 이 몸뚱이 내 것이다. 내 몸뚱이 내 것이고 가장 소중하다. 불교말로 하면 ~ 내 몸뚱이를 보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한테 좋게 하면 탐심 되는 것이고 나한테 싫어하면 그때는 짐이 된다 말입니다. 탐심을 내고 진심을 내고 그런 마음이 차곡차곡 쌓이면 그때는 마음은 더욱 더 어두워집니다. 성자의 길은 훤히 트인 광명으로 가는 것이고 우리 중생은 모두가 지금 어둠으로 가는 것입니다. 왜 어둠으로 가는 것인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유병(有病)이라. 허망 무상한 것을 실지로 있다고 생각한다 말입니다. 내 재산이 실지로 있다고 생각한다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속물근성을 떠나는 것입니다. 진리란 것은 그냥 그렁저렁 허니 우리가 세속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말입니다. 어렵더라도 단호하니 예수가 간길 공자가 간길 석가가 간 길을 우리가 더듬어야 한다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자기 참다운 생명의 ~ 참다운 행복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우리 본래성품이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진여불성까지 우리가 가 버려야 비로소 참다운 안심입명이 있습니다. 내 생명의 본바탕인 불성까지 못 간다고 생각할 때는 항시 우리가 불안스럽다 말입니다. 왕자가 된 석가모니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밥이 부족해서 뭣이 부족해서 그 와같이 집을 나왔겠습니까. 양심적인 사람들은 더욱 더 진여불성쪽으로 갈려고 애쓰는 마음이 더 강한 것입니다. 따라서 양심이 바를수록 현상적인 세계에 관해서 무상을 더 느낀다 말입니다. 무상을 말입니다. 허망하구나. 말입니다. 양심이 마비된 사람일수록 현상생활에 그냥 만족해 버리는 것입니다. 내 본래 생명이 훤히 밝은 자비도 행복도 지혜도 다 갖춘 생명이 바로 내 생명이 본바탕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우리 충족감도 더욱 더 깊은 것입니다. 우리 행복감도 더욱 깊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우고 우리가 참선도 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무엇인가 이것은 진여불성의 대명사입니다. 하나님의 대명사 진여불성의 대명사 이것이 나무아미타불 바로 관세음보살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냥 이름만 불러도 명호부사의라. 그 진여불성이라는 그 생명을 바로 표현한 이름이기 때문에 가사 우리가 김 아무개 박아무개 부르면 은 아 그분들 이미지가 떠 오리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부처님 이름이기 때문에 그 이름만 불러도 그때는 우리가 진여불성자리의 힘이 우리한테 솟아오른다 말입니다. 자기가 모르는 가운데 그러나 더욱 더 아 나무아미타불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생명의 본바탕인 동시에 우주의 본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외운다고 생각할 때는 훨썩 더 우리한테 오는 ~ 강한 것입니다. 따라서 염불이라는 것은 본뜻이 무엇인고. 하면은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닌 것을 우리가 재확인한다 말입니다. 또 한 가지 뜻은 내가 본래 부처인데 잘못 생각해서 지금 중생이 됐는데 내가 부처고 안 떠나야 하겠구나. 부처 내가 안 떠나야 하겠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애쓰고 강한 의지로 다시 부처와 하나 된다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참선하고 염불하고 차이가 있는 것이다. 참선은 보다 더 고도한 사람들이 하고 염불은 그냥 저 저급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그 방편이다 그러나 그런 것도 아닙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은 염불도 참다운 염불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바와같이 참다운 염불은 아 부처가 10만억 국토 저 밖에 가 있다 밖에 가 있다가 우리가 애쓰고 ~ 이면 우리한테 와서 도와준다. 이렇게 타력 적으로 믿는 염불 이것은 참다운 염불이 못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방편염불인 것이고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고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염불할 때는 그것이 바로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그것이 참선입니다. 참선은 뭣보고 참선이라고 하는고. 하면은 참선은 본질 본바탕을 안 떠난다 말입니다. 바탕을 말입니다.


이 뭣고란 화두를 하고 또는 무(無)자란 화두를 우리가 의단(疑團)도 품고 참구도 헌다하더라도 본바탕을 떠나버리면 그때는 참선이 못 됩니다. 비록 우리가 이름은 하나님 이라고 그렇게 왼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라고 외건 뭐라고 외건 ~다만 문제는 어떻게 하든지 간에 우리 마음이 천지 우주의 본바탕을 떠나지 않는다 말입니다. 이런 도리만은 꼭 추호도 명심해서 잘 알이시기 바랍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이라는 것은 분명히 불교로 해서는 가장 고도한 수행법인데 참선 정의가 무엇이고 하면은 참선은 본체를 본바탕을 떠나지 않는다 말입니다. 내 생명의 본질 우주의 생명의 본질을 떠나지 않아야 참선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뭣고란 그런 화두를 들 때도 역시 이 뭣고란 역시 무엇이 이것이 무엇인가 준말 아닙니까. 이것이 무엇인고란 이뭣고의 본뜻이 무엇인가 본뜻이 무엇인고. 하면은 말입니다.


 나한테 있는 우주의 진리 천지우주의 본 진리가 무엇인가 그런 뜻이라 말입니다. 어떤 화두나 모두가 다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이쪽으로 온 본뜻이 무엇인가 내내야 일반중생들이 본질을 우리한테  가르쳐 주는 것이 더 빠르겠지요. 석가모니의 본뜻이 무엇인가. 우리 인간이 본래 면목이 무엇인가. 모두가 다 우리 인간생명의 본바탕을 들어서 말했다 말입니다. 천칠백 공안이라는 그런 공안 화두가 모두가 다 그 와같이 인생과 우주의 본체 본질을 들어서 말했다 말입니다. 따라서 본질을 떠나버리면은 이 뭣고 하고 무(無)자하고 ~ 그것이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아미타불이나 또는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옴마니반메훔이나 그런 공부를 헌다하더라도 우리 마음자리가 내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생명의 근본자리에 입각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이 바로 참선이라 말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알으시고 또 한 가지 것을 꼭 명심해 둘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더러는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스님에 가운데도 지장보살이 따로 있고 또는 관세음보살이 따로 있고 이와 같이 따로따로 뿔뿔이 생각한다 말입니다.


 그 보살이름도 하도 많고 또는 부처님 이름도 그렇게 많은 것인데 따로따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가 다신교가 돼서 그때는 참다운 불법이 못 돼 버립니다. 따라서 이것도 역시 오류가 없도록 잘 외도셔야 할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부처님이 따로따로 뿔뿔이 계시지가 않다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하나의 진리인데 어디가 부처님이 따로따로 뿔뿔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참 큰 탈이지요. 그러면은 진여불성이라는 우주의 생명이 사람이 된다고 그래서 진여불성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는 된 것도 아닙니다. 진여불성이 저 하늘에 있는 태양이 된다고 그래서 진여불성이 더 증가가 되고 더 감소가 안 됩니다. 사람이 있다가 그 사람이 죽어진다고 그래서 진여불성이 더 더해지고 줄어지지 않는다 말입니다. 에너지 보존법칙이라. 에너지 불멸의 법칙이라 말입니다. 상이 무너져도 에너지는  그대로 가만히 있지요. 천지우주가 텅텅 비어서 몇 백 억년 뒤에 다 텅텅 비어서 파괴된다 하더라도 에너지는 그때는 조금도 감소함이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죽든 살든 천지우주가 허물어지든 말든 천지우주의 근본생명인 진여불성은 조금도 더 줄어들지 안하고 증가도 안 된다 말입니다. 따라서 한말로 말 하면은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이라 말입니다. 그런 부처님이 이분 따로 있고 저분 따로 있다고 생각할 때 ~ 다만 그 자리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자리는 일체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자비도 원만하고 지혜도 원만하고 또는 행복도 원만하고 다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갖추고 있어놔서 우리 중생들이 거기에 가까워지면 가까워 진만치 인정도 더 많아지고 지혜도 밝아지고 한다 말입니다. 또는 동시에 그런 자리는 불교 어려운 말로 하면은 원융무애라. 사람이 천사람 생겨나고 만사람 생겨나고 지금 세계인구가 60억이지마는 60억 생겨나고 그렇게 많은 인구가 있다 하더라도 진여불성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진여불성은 이것은 물질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에 진여불성이 나한테도 충만해있고 또는 다른 사람한테도 지금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는 진여불성 뿐이라 말입니다. 물질이 아닌 공간성도 시간성도 물질이 아닌 진여불성이 우주에 충만해 있다 말입니다. 그것이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진여불성에 갖추어 있는 그런 여러 가지 능력이나 그런 덕이 한도 끝도 없어놔서 한 말로는 다 표현을 못합니다.


 따라서 우주의 진리인 진여불성을 자비로운 쪽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관세음보살이고 말입니다. 또는 지혜로운 쪽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문수보살이고 또는 우리 중생의 영혼을 저 극락세계나 천상으로 인도하는 그런 쪽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장보살이고 말입니다. 또는 한 번에 다 몰아서 이른바 총 대명사 이렇게 할때는 그때는 아미타불이라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지 뿔뿔이 다 있지가 않다 말입니다. 따라서 마음 내킨 데로 인연 닿는 데로 지장보살을 외나 또는 관세음보살을 외나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장보살을 왼다 하더라도 다른 보살하고 차이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왼다고 생각할 때는 지장보살의 뜻을 참다웁게 모르는 사람이라 말입니다. 관세음보살 왼다고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바로 관세음보살이다 이렇게 알아야 한다 말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모든 생명의 본바탕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또는 그 가운데는 모든 것이 다 갖추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고 있다는 그 소식을 분명히 알아야 쓴다 말입니다. 또는 진여불성은 나한테도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나한테도 부처님은 지금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도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이 나한테 충만해 있어나서 어떠한 경우도 우리가 불행이 될 수가 없습니다. 행복도 지혜도 자비도 원만한 것이 나한테 갖추어 있는데 내가 무엇이 좀 잘못된다고 그래서 불행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무한히 가능성을 갖추고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부처님을 한번 외우면 외운만치 우리 피는 그냥 맑아옵니다. 남과 나를 가리어서 저사람 미워할 때 한번 미워하면 미워한 만치 우리 피는 그냥 오염돼 옵니다. 욕심을 내면 욕심을 내는 순간 거기 상응되게 시리 그냥 반사적으로 우리피도 오염돼 옵니다. 따라서 우리 생활이 ~ 가장 중요한 생활인가. 이것은 자기 마음을 위해서는 다시 말할 것도 없고 자기 몸뚱이 위해서도 말입니다. 밥보다도 다른 맛있는 영양보다도 ~ 무엇보다도 말입니다.


바른 생각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바른 생각이 바른 생각은 무슨 생각인 것인가 아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고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죽지 않고 또는 낳지 않고 말입니다. 영원히 조금도 그런 흠도 없고 영원히 존재하는 그런 부처님뿐이다 하는 그런 생각 이 생각이 가장 소중한 생각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생각할 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생명자체가 그 순간 정화돼온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바른 생각과 우리 건강과도 이것도 무관한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암에 걸려 있다. 천지우주가 다 진여불성이 아님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암(癌)균도 역시 ~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진여불성입니다. 진여불성이 암(癌) 되었다 말입니다. 폐병(肺病)이 폐균도 역시 진여불성이 폐(肺)균 되었습니다. 따라서 아 내 몸 안에 있는 그런 암균도 역시 진여불성이다. 진여불성은 이것은 죽지 않고 살지 않고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또는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또는 이 뭣고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암(癌)균도 분명히 차근차근 소멸되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잘 믿지 못하니까 말입니다.


의심하고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소멸이 안 되겠지요. 결정신심(決定信心)이라. 석가모니가 거짓말 않고 예수가 거짓말 않고 달마스님이 거짓말 할 턱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분명히 결정신심이라. 단호히 믿어야 쓴다 말입니다. 단호히 정말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석가모니 같이 예수같이 그런 기적도 하는 것입니다. 우선 저부터가 단호히 믿어야 한다는 말을 하지마는 저도 역시 그런 번뇌의 찌꺼기를 몽땅 다 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그런 기적을 잘 못 부린다 말입니다. 제가 정말로 예수같이 믿고 석가같이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석가모니같이 예수같이 기적을 다하고 신통지혜를 신통 자재하는 그런 요술을 다 부리는 것입니다. 부처님 되는 길이 가장 행복스러운 길이고 또는 금생에 못 되면 은 몇 만생 뒤에도 역시 꼭 부처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안 되고 그렁저렁 마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안 되면 결국은 사람으로 갖다가 돼지로 갖다가 또 몇 천 번 돈다 말입니다.


 본래는 부처인 것인데 우리 생각 따라서 욕심이 너무 많으면 그때는 아귀 되는 것이고 말입니다. 표독한 사람 ~ 분명히 지옥 가는 것이고 말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분명히 개 되고 소되고 하는 것입니다. 금생에 성불 못하면 은 잘 살면 또 다시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겠지요. 조금 나으면 천상 좀 올라가겠지요. 꼭 우리가 부처가 되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는 길은 우리 행복과 상응된 정비례의 길입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른 견해 바른 견해는 천지우주가 부처뿐이다. 부처는 무한한 다 행복이나 자비나 지혜를 갖추고 있다. 이렇게 믿고서 이렇게 믿으면서 지금 하시는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화두나 말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꼭 금생에 소나 돼지나 그렇게 나쁜 갈래로 굴레에 떨어지지 마시고 꼭 금생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남한테 꾸어 쓰는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충만해 있는 그런 부처님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 마칩니다. 나중에 날씨가 좋고 따스한 때는 다시 오순도 순히 얘기를 많이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