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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2. 금륜

금륜 11호 염불念佛! 가장 쉽고 확실하고 보장받은 성불의 길

금륜 11호 불기 2545년 8월 】




염불念佛! 가장 쉽고 확실하고 보장받은 성불의 길!



이 글은 불기 2545년(2001년) 5월 29일 제주도 자성원에서 청화큰스님께서 하신 아미타부처님 점안식 기념법문입니다.


제주도는 유서깊은 탐라耽羅국입니다. 탐라국이란 부처님 법에 의하면, 아라한 가운데에 16분이 계시는데 16분 가운데에 달타라존자가 상주常住하시는 곳이어서 부처님 가르침과도 의미 깊은 고장입니다. 이러한 신성神聖한 제주 탐라국, 달타라존자가 지금도 살아계시는 성소聖所에서 우리 불자님들과 만나게 된 것은 대단히 축복되고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성원自性苑의 그전 이름은 목부원인데 참 좋은 이름입니다. 당시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서 의의깊게 지은 이름이지마는 자성원自性苑이라는 것이 한결 부처님께 가깝고 또 우리 인간성과 더욱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자성원이라고 이름을 개명改名한 것입니다.

자성은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동산 원苑자 자성원입니다. 그러면 자성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먼저 자성이란 말씀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자성은 우리 인간성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 동시에 모든 존재의 본래 성품이 바로 자성입니다. 그래서 이 자성원에 들어오신 스님네들이나 또는 불자님들이나 때때로 지나가시는 모든 인연들도 모두 자기 자성, 인간성의 본래자리 인간성의 근본성품根本性品을 깨달아야 한다는 간절한 소원所願에서 자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서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어떤 것이 가장 소중한 가르침일 것인가를 아는 일입니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에 화엄경華嚴經 문수보살품文殊菩薩品에 심시보장제일법心是寶藏第一法이라는 법문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른 믿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보배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바른 믿음이 부족하고 바른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 행동도 거기에 따라서 바르게 나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무지를 극복하고 바른 믿음이 되어야, 우리 행동도 거기에 따르는 순수하고 거룩한 행동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인간의 근본 성품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 나는 내 근본 성품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우리 중생은, 누구나 다 근본적으로 교양이 있고 많은 수행修行을 했다 하더라도, 인간성의 순수성과 순수한 성품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범부중생凡夫衆生의 통상通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자聖者가 되어야 비로소 참다운 자성自性을 압니다. 자성, 이것은 우리 인간성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인간성의 순수한 자리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바로 불성佛性, 이것이 자성입니다. 또는 법 법法자 성품 성性자 법성法性이 자성이고 법성이나 우주성宇宙性이 자성입니다. 또 요즘 말로 표현하면 우주생명이나 우주에너지나 다 같은 말로써 자성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자성은 우리 중생들은 알 수가 없는 것이며 깨달은 성자의 분상에서만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굉장히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래 성품은 중생의 나쁜 버릇 때문에 잠시간 자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지 어느 때 어느 순간이고 우리를 떠나있지 않는 것입니다.

불성이나 법성이나 자성이나 이런 것들이 우리와 떨어져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실존적인 현재 이래로 항시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우리 자성은 금생에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세나 현재나 미래나 인간성의 본질인 자성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교에서 말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나지 않고 죽지 않지요. 무시이래無始以來라, 과거에 시작함이 없어놔서 과거도 비롯함이 없어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미래도 끝도 없이 불생불멸로 존재하는 것이 이른바 우리 자성의 인간성의 본질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자성은 인간에게는 인간성의 본질이요 본래면목이지만, 다른 동물이나 일반 무생물에는 어떨 것인가?” 이렇게 의문을 갖는 분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인간성의 본질인 이 자성은, 사람의 본질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이나 무생물이나, 이 모든 존재의 본질인 동시에 실상實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기는 어느 것보다 소중하고 또 우리 인간에게서 가장 급박한 것은 우리 자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성을 깨달으면 성자聖者고, 깨닫지 못하면 범부 중생이 되는 것입니다.   

 

자성이 비록 이와 같이 소중하고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 하더라도, 일반 사람들은 “너무나 어려운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들을 합니다. 성인들은 업장이 가볍고 업장을 소멸시킨 분들이고, 다른 전생에서 많이 닦아서 금생에 성인이 된 것이지, 쉽게 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님들, 우리 인간성 본래 자리인 자성 불성을 깨닫는 것은, 사실은 가장 쉬운 것입니다. 가장 쉬운 것을 잘못 배우고 잘못 느끼고 잘못된 습관성으로 버릇이 잘못 굳어져버렸단 말입니다. 그것뿐이지, 자성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고, 어느 순간도 자성은 우리한테서 떠나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장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이나 대세지보살이나 보살님들 이름도 많고 부처님 명호名號도 많습니다. 그 보살님들이나 부처님 명호의 실상이 바로 방금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자성인 동시에 우주의 본성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중생의 그릇 따라서 그때그때 방편으로 취한 말씀이 많기 때문에 같은 뜻인데도 그릇따라 달리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성불自性佛 또는 법성法性 또는 실상實相, 실재實在, 주인공主人公 하나의 도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뜻이 자성自性의 뜻과 똑같은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생명 자체가 바로 자성이고 불성이기 때문에, 제일의적第一義的으로 우리가 되찾고 깨달아야 할 것이 불성佛性인 동시에 자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성에 대해서 너무 소홀히 느끼고 있단 말입니다. 가깝기도 하고 지금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많은 도인들 가운데서, 특히 조주趙州스님 같은 분은 자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추구도 하고 그때그때 공부하는 것은 󰡒마치 소를 탄 사람이 소를 찾고 있는 격󰡓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우리 본성이 자성이니까 불성이 자성을 떠나있는 것이 아닌데 잘못 알아서 불성이나 본래면목이 저 피안彼岸이나 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고 멀리 구하는 것을 봅니다. 사실은 자성은 바로 불성이고 법성 또 그 자리는 바로 생명 자체기 때문에, 내 생명인 동시에 우주 생명자체입니다. 따라서 지금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나 사실은 똑같은 것입니다. 기독교 바이블에도 먼저 하느님과 하늘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그대에게 주어지리라 하고 마태복음서에서 써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굉장히 소중한 성자의 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밥 먹고 결혼하는 것보다, 가장 먼저 진리를 구하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경佛經에도 말할 것 없이 바로 자성이 내 성품이고 우주의 성품이고 도리기 때문에, 자성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제일 요긴한 일입니다. 더러는 자성을 구하는 일이 그렇게 소중하다하더라도 일상생활을 다 물리치고서 자성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이것을 염려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일상생활을 무시하고서 자성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승화, 장엄시킨 공부가 바로 자성을 구하는 공부입니다.

 

불성자리는 너의 본성인 동시에 나의 본질이고 우주의 본성이고 우주의 근본생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주의 본래 생명이라는 자성자리를 사실은 우리 중생들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우주의 근본성품인 그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에 대해서 부처님은 아주 절묘絶妙하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자성 불성이라 하는 것은, 이른바 만공덕萬功德의 자리입니다. 지혜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행복으로 보나, 어떤 자리보다 완벽한 것이 자성 자리입니다. 곧 불성 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한걸음씩 나아간다면, 나아간 만큼 행복도 지혜도 건강도 훨씬 더 좋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말씀이 아닙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옮기는 것입니다. 실은 그대로 부처님 말씀을 옮긴다 해도 그대로 옮기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지요. 부처님의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몇 천분의 일도 옮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공덕, 내 자성, 우주의 본성에 있는 공덕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공부를 많이 하셨기 때문에 원자력原子力의 무서운 힘을 짐작하시지요. 눈에 안보이는 원자핵原子核에 들어있는 무시무시한 지혜 즉 원자핵체原子核體에 대해서 여러 물리학자나 ‘하이젠베르그’같은 사람들이 원자핵에 대한 설명을 아주 소상히 했습니다. 원자핵이라는 것이 사람 눈에도 안보이지마는 원자핵 구조가 태양계구조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단 크고 작은 차이만 있는 것이지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위성이 돌고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가 돌고 있는 것과 이치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의 소립자素粒子나 경계는 하나의 방사선放射線이고 광량자光量子이고 하나의 빛이란 말입니다. 빛이란 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1초 동안에 30만 킬로미터 이상 간다하지 않습니까. 원자폭탄의 위력을 우리가 뼈아프게 경험했지요. 그렇게 무시무시한 힘이 사실은 우주의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원자로 구성되지 않는 우주의 물질이 있습니까. 우리 몸뚱이라든가 흙이나 물이나 공기나 돌이나 모두가 원자로 구성되지 않았습니까. 그런 원자는 무엇인가. ‘아인슈타인’은 ‘원자는 오직 하나의 에너지다. 이렇게 해서 통일장이라. 우주는 오직 통일된 하나의 힘 즉 에너지가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이런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의 근원根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물리학자는 모릅니다. 어째서 물리학에서는 모르는가 하면 물질을 떠나보낸 순수한 생명의 자리, 이른바 시간 공간을 떠나버린 자리는 증명證明을 할 수 없으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지만 한도 끝도 없는 에너지가 거기에 다 들어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너무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령 자기를 생각할 때 자기 몸뚱이를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우주의 진리 그대로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리 상식과는 맞지 않는 점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과감히 단호하게 우리의 상식을 버려서 진리에 따라야지 우리 상식을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몸뚱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나라고 하면 바로 자기 몸뚱이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몸뚱이는 아까 서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성이 아닙니다. 불성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알으셔야 합니다. 우리 몸뚱이는 인연 따라서 과거생에 우리가 업을 지어서 업대로 금생에 받은 허상이고 허깨비 같은 것입니다. 사실 이 몸뚱이는 자성에 들지 못합니다. 자성自性이나 불성佛性 이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죽지 않는 불생불멸하고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생명자체입니다. 따라서 자성은 비단 나의 자성으로 해서 끝나게 된 것이 아니라 너의 자성이나 우주의 자성이나 우리 자성이나 모두가 하나의 생명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일원적一元的으로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이 아닌 이원적 삼원적인 말들은 모두가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일원적一元的 진리眞理를 아시게 되면, 우리 인생에 있어서나 모든 문제에 있어서도, 마치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뜨거운 화로에다 눈을 넣으면 금세 녹아 버리듯이 녹아서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인 것이고, 하나의 생명은 만덕萬德을 갖춘 자리입니다. 학문적으로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더라도, 이 불성 자성은 물듦이 없습니다. 오히려 학문을 많이 알고 이것저것 따지면, 자성을 성취成就하는 데 거리가 멀고 소홀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제주도는 달타라존자尊者가 상주常住했던 곳이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도에 태어나셔서 2천5백년전에 열반涅槃에 드셨다하더라도 부처님 기운, 에너지는 우주에 그대로 존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어떤 목숨도 생명도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조금도 이울어짐이 없고 변동이 없는 것인데 하물며 성자들의 에너지나 생명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내 몸뚱이가 내 존재고 존재의 전부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 생각 때문에 우리의 참다운 생명이 발동發動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자기 개인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가정을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실지로 자기가 이 몸이 아닌 것을, 허깨비에 불과한 것을 알으셔야 합니다. 자기가 아닌 허깨비에 불과한 것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알으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무명심無明心을, 무지한 마음을 떠나야 합니다. 학문을 많이 알지 못한다 해서 무지가 아닙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더라도, 그 일원적인 우주의 생명, 내 생명의 본체를 모르면 무지한 것입니다. 무명이란 말입니다. 무지 무명은 자기 행복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못되고, 자기 부부간이나 가정을 위해서도 도움이 못됩니다. 참다운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것도 어떠한 의미에서나 진리와 더불어서 해야지 진리는 진리대로 겉돌고 자기 아는 것을 고집을 부리면 무명 때문에 또다시 윤회의 길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것도, 우리 사람과 절대로 다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잠시간 업의 차이 때문에, 전생에 지은 업의 차이 때문에, 개의 명命을 받고 소의 명을 받는 것이지 관계가 없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고 생각을 하면, 너와 내가 본래로 둘이 아니고, 성품으로 본다면 다 모두가 하나란 말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의 자리인 것을 안다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을 소홀히 대하는 그런 이기심을 절대로 가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주의 도리道理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성인들은 다른 분들이 아닙니다. 성인들은 우주의 도리 그대로 사는 분들이고, 우주의 도리는 자성불성自性佛性을 떠나지 않고, 자성 불성의 도리대로 따라서 산단 말입니다.

자성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어느 때나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것이 자성입니다. 에너지가 없는 데가 없지 않습니까.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없는 데가 없지 않습니까. 물질은 다 그런 것으로 되어있는데 그런 것의 가장 근원적인 생명자체가 바로 자성이고 불성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자성을 깨닫는 것은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자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가장 쉬운 방법인가 이것을 몰라서는 안됩니다. 자성을 깨닫는 방법은 부처님께서 누누이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 가운데도 난행문難行門, 이행문易行門이라. 쉬운 문과 어려운 문이 있단 말입니다. 쉬운 문이라 해서 옆으로 빗나간다든가 해서는 안되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묘妙하고 긴요緊要하게도 가장 쉬우면서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잘 들으시고 우리 불자님들도 명심하셔서 가장 쉽고도 확실한 길을 택해서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 한국불교도 여러 가지 공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느 문제를 선지식이나 성자나 도인들이 우리한테 제시해서 문제를 느끼시면 우리가 그것을 문제로 삼아서 의심을 품는단 말입니다. 가사 내 생명生命은 무엇인가,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의심을 품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렇게 데카르트 같이 회의적인 방법으로 의심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부처님 말씀에 본래가 부처라 했는데, 본래 다 자성이 있고 불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새삼스레 의심할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해서 순수한 믿음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지금 저 같은 스님네가 속해있는 조계종曹溪宗은 주로 의심하는 방법을 택해서 공부를 하고 있고 원불교圓佛敎나 그런 쪽은 의심하지 않고 자성을 불성을 그대로 믿고 들어가 잠자코 명상만 주로 하는 방법을 취합니다. 또 불교국가佛敎國家라고 자부自負하는 일본日本 사람들은 불성, 자성을 찾기 위해서 의심하는 방법을 취하기도 하고 의심 않고 잠자코 명상을 구하는 파派도 있고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인 염불念佛을 취하는 파도 있습니다.

 

방금 일본이야기하면서 염불방법이 나왔습니다마는 우리 불자님들은 깊이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님과 더불어서 절대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만유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람만 둘이 아닌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아장거리는 병아리 한 마리도 부처와 더불어서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것은 신비하고 부사의不思議하기 때문에 어떤 조그마한 것 가운데도 만덕萬德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의 원자 가운데도 헤아릴 수 없는 기운이 있는데 하물며 우리 눈에 보이는 나무 한 그루나 흙 한 덩이나 또는 물속에나 어느 것 가운데도 무량한 공덕이 다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심심미묘한 공덕이 다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보다 쉽게 말하면 우주宇宙라는 것은 모두가 다 부처님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뿐입니다.

 

그래서 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다 하나의 빠짐없이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우주의 도리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주의 도리에 다 들어가니까 우주는 바로 진여인 동시에 진리입니다. 진여, 진리가 같은 말이며 그 자리는 바로 불성이고 생명인 것입니다. 금생에 나와서 과거 생에 업을 잘못지어서 잘못 태어나고 소아마비가 되어 여러 가지 불행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렇더라도 이것은 우리 업으로 해서 금생에 잠시간 받는 겉모양인 것이지 우리 생명 자체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한테 있는 불성이나 예수나 성자한테 있는 불성이나 부처님 자리는 모두 똑같단 말입니다. 똑같은 하나의 불성자리입니다. 중생은 겉만 보니까 하나의 생명자리를 못 보니까 다투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분쟁과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여러 가지 제도가 나오고 규제도 하지마는 그런 걸로 해서는 우리 인간 세상의 불행의 뿌리를 뽑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불행의 뿌리를 뽑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진리에 따르는 길입니다. 몇 천년가도 몇 만년가도 우리 인간의 진리를 안 따르면 전쟁도 끝나지 않고 불행도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런 비극이 절대로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 개인이 내 마음이 불안스럽다, 머리가 아프다 할 때, 이런 것들은 우리 마음의 불안 때문에 옵니다. 몸뚱이는 우리 마음의 명령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가식적假飾的으로 보이지마는, 우리 마음은 순간순간 우리 몸뚱이에게 반응을 받게 합니다. 즉 우리 몸뚱이는 우리 마음의 명령命令에 따르는 것입니다. 마음이 생명의 주인인 것이고, 몸뚱이는 우리 생명에 입히는 옷이나 같은 것입니다.

 

제일 쉬운 방법, 그 제일 쉬운 방법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방법이 제일 쉽습니다. 부처님 명호 외우는 것이 제일 쉽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어째서 제일 쉽고 확실한 방법인가? 그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기 때문에, 부처님 명호는 본래 자기의 참이름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기 때문에, 부처님 자리가 바로 자기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명호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닙니까? 우리 중생들은 금생에 나와서 잘못 배우고 잘못된 버릇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버릇은 갑자기 깨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깰 수 없는 버릇을 중생이 깨기 위한 방법으로,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것이 제일 쉽단 말입니다. 우리의 옛날 할머니나 부모님들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는 것이, 너무 쉽기 때문에 별 것이 아닌 것 같지마는, 명호를 부르는 것은 바로 부처님 그 자체 진리의 당체를 부르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분들의 마음이 정화되고 또 우리 마음도 정화시키고 우주를 정화시킵니다.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니어서, 내가 정화되면 우주가 정화되고, 우주가 정화되면 나 스스로도 그 만큼 정화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행동 하나하나가 다 우주와 더불어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자기한테 붙은 나쁜 습관을 떼고 부처님한테로 가는 제일 쉬운 방법은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것인데, 그 버릇이 깊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거기에 상응해서 지속적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또 지속적으로 공부할 때는 어떤 효험이 있고 어떤 공덕이 있는 것인가. 우리 불자님들, 우리 마음은 무한의 공덕장功德藏이라. 공덕의 창고나 같단 말입니다. 자비나 지혜나 능력이나 행복이나,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 가운데도 온전히 들어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느끼는 그런 공덕이나 지혜나 또는 공자가 느끼는, 갖고 있는 공덕이나 지혜가, 우리에게도 흠절欠節 없이 다 들어 있습니다. 다만 못한 것은 개발을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자가 되는 것은 절대로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어디서 꿔가지고 빌려가지고 와서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한테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이니까, 이것을 가리고 있는 나쁜 버릇만 거둬 내면 됩니다. 거두어 내는 작업이 어렵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나쁜 버릇 거둬 내는 작업이 절대로 어렵지 않습니다. 조금만 거둬내면 그만큼 우리한테 행복감이 오고, 많이 거둬 내면 많이 거둬 낸 것만큼 훨씬 더 풍족한 행복감이 비례해서 우리한테 오는 것입니다.

염불해서 염불에 일념一念이 되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다른 이름도 무방합니다. 지장보살도 무방합니다. 부처님 이름은 다 신통합니다. 다 신통한 것인데, 이른바 부처님의 총대명사가 나무아미타불이고 또 관세음보살은 자비로운 쪽으로 우주의 인력引力을 상징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한번 부르면 부른 만큼 우리한테 행복이 옵니다. 

 

하물며 부처님께서 직접 지으신 부처님 명호名號, 이것은 우주의 생명을 거기에 다 담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하면 우주 생명과 상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부처님 이름은 자체가 불가사의하단 말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하루 종일 염불만 한다고 하면 얼마나 큰 공덕이 있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학문적으로 공부를 많이 하고 도인 말 듣고 하는 그런 큰스님들도, 하루에 나무아미타불 십만송十萬頌도 하고 오만송五萬頌도 하고 하시는 공덕이 큰 명호입니다.

우리한테 무슨 병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병도 역시 우리 무지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고, 우리 버릇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 명호를 외어서 우리 마음이 일념이 되면, 웬만한 병은 다 물러가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아, 내가 무던히도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는데 나한테는 단박에 공덕이 오지 않는다고 의심할지 모르나, 단박에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세에 지은 업이 있단 말입니다. 과거세에 지은 업이 상쇄가 됩니다. 금생에 별로 공부를 성실하게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과거 업이 가벼운 분들은 보다 더 빨리 마음이 바꿔지겠지요.

 

부처님 명호를 외는 염불을 하면, 그때는 자기 몸도 가벼워지고 또는 동시에 평소에 듣지 못하는 신묘神妙한 우주의 음音을 다 듣는 것입니다. 이른바 천상묘음天上妙音이란 말입니다. 천상 멜로디를 듣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더러는 우리가 평소에 보지 못하는 신선한 광명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우주의 순수한 생명은 바로 광명이요 빛이란 말입니다. 방사선, 방사광선은 광자光子라하는, 광량자光量子는 이것이 하나의 빛인 것이고 모든 존재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빛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빛이기 때문에 부처님 명호도 모두가 다 빛에 관한 이름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이란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면 새겨서 풀이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한도 끝도 없는 우주에 가득 차 있는 하나의 광명생명光明生命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행복도 끝도 가도 없이 본래 간직해 있습니다. 절대로 자기왜소나 자기비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순간도 심지어는 단두대 위에서라도 자기가 금생에 인연 따라서 인연이 잘못되어서 사형당하는 단두대 위에서라도 우리는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사실은 금생에 이 몸은 업신業身이라. 업의 몸은 어차피 가는 것이고 한번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어야 되고 만나는 것은 응당 헤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명 자체는 우리 본 주인공主人公 자체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절대로 중단이 없습니다. 영생永生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기 생명이 영생한다는 신념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위에서까지 자기 이웃의 또는 자기를 위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까지 행복을 위해서 기도드리는 것은 참다운 자기를 알기 때문에 그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원수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아님이 없고 부처 아님이 없는 것인데 저놈은 나쁜 놈이다 등으로 차별을 합니다. 바로 이 마음이 결국 원수고 그 마음이 우리를 불행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명호는 무량광명無量光明이라, 또는 청정하다고 해서 청정광불淸淨光佛이란 말입니다. 또는 끝도 가도 없이 우주에 가득 차 있다고 해서 무변광불無邊光佛이라. 이와 같이 광명이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염불할 때도 기왕이면 본래 부처의 자리가 광명자리니까, 우주에 충만한 광명 자리니까 광명의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염불하면 훨씬 더 염불도 잘되고 공덕도 좀 더 빨리 우리한테 다가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명호를 외는 것이 가장 쉽고 확실한 성불의 길입니다. 꼭 부처님 명호를 놓치지 말으시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잊지 마시고 외우십시오. 잠이란 것은 그야말로 우리 생명을 좀먹는 망상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자는 동안은 결국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급적이면 잠을 적게 주무시고, 명호를 순간도 잊지 말고 외우십시오. 잠을 적게 잔다고 해도 우리 마음이, 신심이 사무치면 절대로 건강에 해롭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불자님들, 음식을 절대로 함부로 자셔서는 안됩니다. 음식은 하나의 물질이기 때문에, 우리 몸에 들어오면 어느 정도까지는 영양이 되고 생명을 지속시켜 준다고 하더라도 조금만 지나치면, 소화도 안될 뿐만 아니라, 소화가 안되는 그 이상으로 공부에도 대단한 해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절대로 음식을 함부로 자시지 말으시고, 특히 할 수만 있다면 육식을 꼭 금절禁絶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이 하나라고 생각할 때, 지금 개고기나 소고기나 닭고기나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과거 전생에는, 지금 먹는 개고기나 닭고기나 소고기가 결국 자기와 똑같은 자기 형제간, 더러는 자기 친구 고기를 먹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나 소승계율小乘戒律에서는 이것을 조건부로 해서 육식을 금지했지만, 대승경大乘經에서는 일체 육식을 다 금지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대승은 훨씬 더 많이 먹으니까, 고기를 먹는 것을 용인하겠지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마는 용인한 것이 아니라, 소승경에서는 근기가 약하니까, 지금까지 고기 먹는 버릇 때문에 갑자기 끊으면 조금 장애障碍가 있을까 해서, 조건부로 동물을 죽일 때 보지 않고, 또 동물이 나 때문에 죽지 않고 하는 몇 가지를 조건부로 해서, 잠시 먹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승경에서는 훨씬 더 근기가 수승殊勝하기 때문에, 더욱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법화경法華經 또는 화엄경華嚴經도 다 육식을 금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신수봉행信受奉行해야, 지켜야 불교를 믿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금생에 잠시 살다가 가는 것이고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살로 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저같이 80이 다 되도록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살아도 지금까지 탱탱하게 있는 걸 보십시오. 그런 사소한 것 때문에 우리 마음을, 소중한 우리 마음을 오염汚染시켜서는 안됩니다. 안 자시고 계시면 훨씬 머리도 맑아지고 집안일도 잘 풀립니다. 정말로 육식 많이 하면 우리 피가 오염됩니다. 오염되면 몹쓸 병들이 많이 생기겠지요. 절대로 그런 것 자시지 말고서, 가장 쉽게 공부하는 법,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의 명호는 바로 광명명호光明名號라, 바로 빛의 명호란 말입니다. 행복의 명호, 자비의 명호, 사랑의 명호입니다. 우주의 생명대명사生命代名詞, 그것이 바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입니다. 한번 외면 한번 왼만큼 단 며칠만 해도, 그때는 억지로 하려고 안 해도 그때는 저절로 염불念佛이 항시 속에서 된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익어지면, 저 영원의 에너지, 영원한 생명의 광명 가운데서, 환희심歡喜心 나는 가운데서 공부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제일 쉽고 확실한 공부를, 그러나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공양을 자실 때도 속으로는 염불하십시오. 우리가 소리를 안내도 무방하니까, 소리를 내나 안내나 다 좋습니다. 그때그때 상황 따라서 안내고 하실 때는 안내고 내실 때는 내셔서 꼭 금생에 성자가 되시고 부처가 되십시오.

 

제일 마음 편하고 옆엣 사람에게도 제일 좋고 누구한테나 제일 좋고 가장 좋은 어머니 가장 좋은 아버지도 역시 업장을 소멸하고 성자에 가까워지는 것이 가장 훌륭한 부모가 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셔서 확실하고 쉬운 길로 해서 꼭 금생에 우리 생명이 돌아가야 할 본래의 그 자리를 꼭 닦으셔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제주도, 우리 한국에서 제일 오염汚染 덜된 아주 쾌적한 곳입니다. 동시에 달타라존자, 16나한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하고 청정하고 또는 법력이 제일 수승한 분인 달타라존자가 계시는 곳입니다. 달타라존자가 항시 한라산에, 제주도의 한 줌 흙 가운데도 청정하게 계시는 곳입니다. 앞으로 그때그때 여기 오셔도 좋고 그냥 놀러오셔서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쉽고도 가장 확실한 행복으로 가는 부처님이 보장하신 길을 공부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대단히 감사합니다. 金輪


[2001년 5월 29일, 제주 자성원 초청법어]